2021년 2월 9일 (화) 촬영
제3전시실 이인행각(二人行脚)
제 3 전시실에서는 1930-1950년대 문인과 화가들의 개별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종교를 매개로 절대적인 정신성의 세계를 추구했던 시인 정지용과 화가 장발의 만남을 시작으로,
조선일보사 편집실의 옆자리에 앉아 순박하고 아득한 시의 세계를 갈구했던
시인 백석과 당대 최고의 장정가, 삽화가였던 정현웅의 조우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조선일보의 사회부장과 신입 기자로 처음 만나 누구보다 지적이고 댄디한 세계관을 공유하면서,
세계사적 흐름 위에서 조선의 당대적 위치를 적확하게 가늠할 수 있었던
이여성과 김기림의 만남도 확인되며, 마지막으로 일본 유학시절에 낭만주의적 예술관을 공유했다가
결국 조선의 "옛 것"이 주는 아름다움에 심취했던 이태준과 김용준의 교유를 만나볼 수 있다.
또한, 이들의 유산을 계승한 다음 세대 예술가들의 작업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시인 김광균을 시작으로 한 이미지즘의 세계,
즉 "시를 그림과 같이, 그림을 시와 같이" 여겼던 다재다능한 후예들의 작품들이다.
김광균, 김만형, 오장환, 이중섭, 구상, 이쾌대, 진환, 서정주, 김환기, 이봉구, 조병화 등 시인과 화가들의
서로 얽히고설킨 관계망을 통해, 한국 근대기 가장 아름다운 시와 그림이 탄생할 수 있었던 풍요로운
문화적 토양을 짐작해볼 수 있다.
정지용(1902~1950?)과 장발(1901~2001)
정지용은 참신한 이미지와 절제된 시어로 한국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 역할을 한 시인이다.
그와 비슷한 연배의 화가 장발은 휘문고보와 도쿄미술학교를 거쳐 1920년대 미국 콜롬비아 대학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한 서양화가이다.
이들은 "카톨릭"이라는 종교를 매개로 연결되는데, 함께 잡지 <카톨릭청년>을 발간하였으며,
휘문교보의 교사로도 같이 재직하였다.
정지용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서양화 기법으로 성화(聖畵)를 그린 장발의 아틀리에를 방문하여
거의 "종교적"이라 할만큼의 경건한 태도로 작업에 임하는 장발에 대한 인상을 글로 남긴 적이 있다.
이 둘 사이에는 종교적 공감에서부터 기원하는,
엄격하게 절제된 예술가적 자의식이 공통적으로 엿보인다.
장발 / 성녀 김골룸바와 김아녜스 자매, 1925, 캔버스에 유채,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소장.
<가톨릭소년> 창간호, 제1권 제3호, 제1권 제5호, 표지-장발, 가톨릭소년사, 1936,3. 1936,6. 1936,8.
대구가톨릭대학교 중앙도서관 제공.
<가톨닉청년> 제2호, 제4호, 표지-장발, 가톨닉청년사, 1933. 6, 1933. 9, 개인소장.정지용 /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근대서지연구소 소장.
정지용 글 장발 그림 / 여상사제,女像四題, <여성> 제1권 제1호, 1936. 4, 근대서지연구소 제공.
백석(1912~1996)과 정현웅(1910~1976)
시인 백석과 화가 정현웅의 인연은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조선일보사에서 발행한 잡지 <여성>의 편집자로 함께 일했는데,
당시 <여성>은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이 잡지에 실린 백석 시, 정현웅 그림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여러 채색 화문들 가운데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아름다움과 감흥을 지닌 합작품이다.
정현웅은 편집실의 옆자리에 앉아 언제나 심각한 표정으로 작업하는 백석의 조각 같은 옆얼굴을 그려
<문장, 1939,7>에 발표한 적이 있고,
백석은 만주에 머물 때 정현웅에게 시 <북방에서>를 헌정하기도 했다.
이들은 나중에 월북한 이후에도 인간적인 교유를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백석 글, 정현웅 그림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여성> 제3권 제3호, 조선일보사,1938.3, 아단문고제공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북방에서 -정현웅에게- 백석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
홍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승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떡갈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았다
오로촌이 맷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그때
아모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침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금은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야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쫒겨
나는 나의 옛 한울로 땅으로 - 나의 태반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너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백석 / 북방에서, 정현웅에게, <문장> 제2권 제6호, 문장사,1940,7.
정현웅 / 미스터 백석, 문장 제7집(임시증간호), 문장사, 1939, 7. 아단문고 제공.
이것은 청년 시인이고 잡지 <여성> 편집자 미스터 백석의 프로필이다.
미스터 백석은 바로 내 오른쪽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사진을 오리기도 하고 와리쓰게(레이아웃)도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밤낮 미스터 백석의 심각한 프로필만 보게 된다.
미스터 백석의 프로필은 조상(彫像)과 같이 아름답다.
미스터 백석은 서반아(西班牙, 스페인) 사람도 같고 필립핀(필리핀) 사람도 같다.
미스터 백석에게 서반아 투우사의 옷을 입히면 꼭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하략(以下略) ...
정현웅 / 백석초상, 출처- 백석, <집게네 네 형제>, 1957.
정현웅 / 소녀상, 1928,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정현웅 / 소몰이, 1963, 종이에 판화, 개인 소장.
정현웅 / 금강산 소견, 194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개인 소장.
김기림(1908~?)과 이여성(1901~?)
김기림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모더니즘 문학 운동을 선언하고 그 이론을 소개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1930년 조선일보에 처음 생긴 공채 기자 시험에 최연소로 합격한 "문인 기자"이기도 하다.
이때 그는 같은 신문사에서 사회부장으로 있던 이여성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김기림은 당시 사회부장의 인상을
"(그는) 50개 이상의 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러냐 하면 간단없는 전화가 그를 습격하기 위하여
모든 순간순간에 그의 테이블 위에서 소리치고 있으니까"라고 기록했다.
이들은 7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깊은 우정으로 연결되었으며, 김기림은 그의 신혼집에 튤립을
선물로 들고 나타난 이여성의 이야기를 그의 수필 <붉은 울금향과 로이드 안경>에 남겼다.
이여성 / 사계산수도, 1934, 비단에 수묵담채, 개인 소장.
이여성 / 수국송뢰,水國松籟, 1935, 비단에 수묵담채, 개인 소장.
이쾌대(1913~1965) / 이여성 초상(이쾌대의 형),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지난해 3월 달에 L과 내가 작은 보금자리를 남산 밑에 꾸민 이튿날 밤.
나는 첫손님으로 이여성 형과 홍직(鴻稙) 형을 맞았다. 이형은 나의 2년 동안의 서울 살림 중에서 얻은
최대의 우정이다. 그는 L과 나의 행복을 위하여 커다란 붉은 튤립의 화분을 주셨다.
튤립 붉게 향내 나는 밤.
홍직 형과 나는 이형의 달콤한 옛 이야기에 감탄 낙망 매혹하면서
마지막 전차가 끊어지는 줄도 모르고 생활에서 전연 해방된 유쾌한 몇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이형을 생각할 때마다 초 동양류(超東洋流)의 위대한 콧마루 위에 걸려서 끊임없이 약소민족의
대국(大局)을 통찰하는 검은 "로이드" 안경과
그리고 "튜립" 붉게 향내 나던 그 밤을 잊을 수 어떻게 있으랴.
-김기림, <붉은 울금향과 로이드 안경> 신동아 1932,4.
이태준이 사용하던 책장, 19세기, 나무, 유족 소장.
이태준(1904~1970)과 김용준(1904~1967)
이태준과 김용준은 근본적으로 "고전주의 사상과 완당 사랑"을 공유했던 내성의 친구이다.
유려한 한글 문장으로 당대 베스트셀러 작가의 대열에 함께 올랐던 것도 공통점이다.
이태준은 원래 미술학도를 꿈꿀 만큼 미술에 관심이 많았으며, 일본 유학 시절에도 귀국 후에도
미술전람회를 보러 다녔고, 감상평을 자주 남겼다.
미술평론가로서 이태준은 "단원과 오원의 후예"로서 한국인이 전통의 한국화를 계승한 새로운 진로를
개척할 것을 호소한 바 있는데,
이는 서양화를 공부했던 김용준이 한국화로 전향한 사실과도 일맥상통한다.
이태준의 주옥 같은 책은 대분 김용준의 장정으로 출판되었으며,
이들은 함께 일제 말기 문예 잡지 <문장>의 발간에도 헌신하였다.
김용준 / 묵매도, 1947, 종이에 수묵, 개인 소장.
매화와 더불어 벗이 되려 했더니
매화의 격조에 어울리지 않을까 늘 걱정일세
이제부터는 익힌 음식도 끊어버리고
물이나 마시며 신선 되는 책을 읽으리 정해년(1947) 소춘(음력 10월). 근원.
1930년대 한국의 "이미지즘" 시를 주도한 시인 김광균이 기록한 대로, 이 무렵 경성의 시인과 화가들은
"시를 그림과 같이, 그림을 시와 같이"
라는 명제 하에 함께 어울리며,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영감을 주고 받았다.
1910년대에 태어난 이 젊은 예술가들은 앞선 세대에 비해 더 나은 교육 환경과 동료 의식을 공유할 수
있었으며, 깊은 연대감 속에서도 각자의 개성을 발휘한 진정한 예술가의 자의식을 성장시켜 나갔다.
이들의 관계는 2인의 쌍으로 설명되기보다는 더욱 다면적이고 입체적이다.
마치 1920년대 "에콜 드 파리"의 화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들은 같은 시대정신을 지향하면서도 뚜렸한 자신만의 세계를 찾아 나섰다.
김만형 / 수국, 연도미상, 캔버스에 유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오씨 일족이 있는 여관 -1939년 8월 장(章)
최재덕 / 허수아비, 장만영의 시집 <유년송, 1948> 속지 수록 삽화, 1948, 종이에 색연필, 개인 소장.
최재덕 / 금붕어,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최재덕 / 한강의 포플라 나무,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개인 소장.
최재덕은 보성고보를 거쳐 도쿄의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여, 1940년대 근대기 화단에서
가장 촉망받는 화가 중 하나로 성장했다.
한국전쟁 중 월북하여 그가 남한에 남긴 작품은 아쉽게도 몇 점 되지 않는다.
<한강의 포플라 나무>는 한때 시인 김광균이 소장했던 것으로, 최재덕의 얼마 안되는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예에 속한다.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배경으로 뱃사공이 한가로히 노를 젓는 가운데, 포플라 나무들이 과감하게 화면의
전면을 뒤덮고 있다. 나무 잎사귀들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흔들리는 것 같다.
대담한 화면 구성과 미묘하고 섬세한 색채의 변주가 작가의 뛰어난 감각을 엿보게 한다.
최재덕 / 농가, 1940,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경주 박물관 추녀 밑 제일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지나는 바람같은 미소를 띤 부처님이 최재덕인 것 같다.
그의 그림은 행복한 색체로 덮힌 나이브한 풍경이 많다.
가을 추수 때 시골로 내려가 그린 들판의 <원두막>, <포도>, <한강의 포플라 나무>, <금붕어> 등
독창적이고 부드러운 형상에 서려있는 서정은 이중섭과 맞먹는 것이라 생각한다.
- 김광균, <30년대의 화가와 시인들>, <계간미술>, 1982, 9.
최재덕 / 포도,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꽃으로 그린 악보 김상옥
어디선가 게가 한 마리 기어나온다.
눈을 부라리고 옆걸음질로 기어나온다
게는 거품 뿜는다 뿜은 거품은 공중에서 꽃이 된다
때 아닌 복숭아꽃이 된다
꽃이 된 거품은 공중에서 악보를 그린다
꽃은 높고 낮은 가락으로 크고 작은 음향으로 울려 퍼진다.
이때 뜻밖에도 봉같이 생긴 수닭이 찾아와서
꽃으로 울리는 음악을 듣는다
한쪽 다리를 오그리고 향기처럼 퍼붓는 음악을 듣는다
수닭은 놀란 눈이다 꼬리를 치켜세운 채 놀란 눈이다
입에는 어인 일인지 잘 익은 복숭아 한 가지가 물려 있다
복숭아는 연적같이 생긴 복숭아다
어느 도공의 입김이 성애처럼 스린 그런 복숭아다
아직도 게는 옆걸음질로 다가오고 있다
털이난 가위발을 벌리고 연신 거품을 뿜으며
다가오고 있다
막이 오른다
어디선가 게 한 마리 기어 나와 공중에서 꽃이 된다
게가 뿜은 거품은 공중에서 꽃이 된다
꽃은 복숭아꽃, 두웅둥 풍선처럼 떠오른다
이중섭 / 닭과 게, 초정 김상옥의 출판기념회 방명록에 그린 그림, 1954, 종이에 유채, 이중섭미술관 소장.
이중섭 그림, 김용호 글 / 너를 숨쉬고, 1950년대, 종이에 유채, 개인 소장.
날이 날마다
오가는 길에
너만 있어
숱한 사람들이
오가는 길에
너만이 있어
어항 속
한마리, 운명의
금붕어처럼
너를 숨쉬고
나는 살아간다
이중섭 / 시인 구상의 가족, 1955, 종이에 연필, 유채, 개인 소장.
이중섭은 정주 오산고보에서 임용련에게 처음 미술을 배우기 시작해, 일본제국미술학교와 문화학원에서
서양화를공부했다.
원산에 살던 그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한으로 피란 내려와 제주도, 부산, 통영 등에 머물렀는데,
전쟁 중 사랑하는 가족들을 일본으로 보낸 후 이들과의 재회를 꿈꾸며 작업에 매진했다.
<시인 구상의 가족>은 가족과의 재회의 꿈에 부풀렀던 이중섭이 그러한 희망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을 때 극심한 "절망" 속에서 제작한 작품이다.
그는 1955년 1월 개인전이 경제적 실패로 돌아가자, 이후 일본에 있는 아내와의 연락을 단절하고,
오래된 친구 시인 구상의 왜관 집에 머물러 있었다.
구상이 자신의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서 태워주자, 이를 몹시도 부러워한 이중섭 자신의 모습이 담겨있다.
이미 구상을 따라 종교에 귀의하고 싶다고 고백했던 이중섭은 이전의 강렬한 색채를 버리고,
누런 색감으로만 가득 찬 초라한 자신의 옆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위) 이중섭/ 구상에게 보내는 편지, 1955, 서울대학교미술관 소장.
구형(具兄) 그새 언나 얼마나 바쁘셨습니까.
제(弟)는 여러분의 두터운 사랑에 쌓여 정성껏 맑게 바로 참사람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弟)는 하나님을 믿으려고 결심을 했습니다. 구형의 지도를 구해 가톨릭 교회에 나가
제(弟)의 모-든 잘못을 씻고 예수 그리스도님의 성경을 배워 깨끗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명일(明日) 15일 오후 4시경에 사(社)로 찾아뵙겠으니 지도하여 주십시요.
이남덕(이중섭의 부인)이 구상에게 보낸 편지.
구상님
어느새 6월도 얼마 남지 않아, 본격적인 더위가 다가왔습니다. 그 후 별 일 없이 지내시고 계신지요.
실은 이전에도 편지를 보내 드린 것처럼, 남편으로부터 3개월 이상 편지가 없어 무척 걱정하고 있습니다.
구상님과 동시에 서울에 있는 2, 3명의 친구에게 부탁을 해 보았더니
그 중 한 명으로부터 (남편이) 대구에서 제작 중이라는 소식만 들었을 뿐입니다...
제 편지를 받고 계신지 아닌지,
그것도 알 수 없는 상태라서 여러 가지 상상을 하면 할수록 불안해질 뿐입니다.
생활력도 왕성하여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는 분이라면 잠시 편지가 없더라도 이렇게 걱정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님도 아시다시피 그런 성격이고, 뿐만 아니라 신경이 둔한 분이라 하루라도 떨어져 있으면 불안합니다-
그래서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남편의 소식에 대해 확실한 것을 구체적으로 전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아직 그곳에 계시다면 잘 알고 계실 터이고,
서울이나 통영에 가셨다면 그쪽 분들에게 물어 볼 수도 있을 테니...
하루라도 빨리 구체적인 답장을 주시도록 절실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마사코 1955년 6월 22일
이중섭 / 정릉풍경, 1956, 종이에 연필, 크레용,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쾌대 / 모란, 1949년 추정,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이쾌대 / 소녀상,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이쾌대 / 족두리 쓴 여인, 1940년대, 목판에 유채, 개인 소장.
김환기 / 달밤, 1951, 하드보드에 유채, 개인 소장.
김환기는 문학을 매우 사랑했던 화가로,
김광균, 서정주, 김광섭, 조병화 등 수많은 시인과 친교를 맺었으며,
또한 이들을 다른 화가들과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달밤>은 시인 김광균이 소장했던 작품으로, 1951년 한국전쟁기, 대부분의 문예인들이 총 집결해 있던
부산 피란지에서 제작된 것이다. 시인이면서 사업가였기 때문에 여러 문예인들을 후원하기도 했던
김광균이 그의 부산 사무실 뒷벽에 걸어 두었던 작품이다.
큼직하고 둥그런 보름달 아래, 바닷가의 배들 또한 달과 같이 두둥실 떠 있다.
전쟁기에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풍부한 서정성을 담은 작품이다.
김환기 / 소반, 1958, 종이에 채색, 개인 소장.
시월달 깊은 밤에 깊은 밤 시월달에 괴롭고 또 괴롭고 오만가지 생각에
깊은 밤 시월달에 시월달 깊은 밤에 오만가지 생각에 괴롭고 또 괴롭고 1958,10,16. Whanki Paris
김환기 / 창공을 날으는 새, 1958,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김환기 / 가을, 1955,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또 이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수화가 성북동에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자주 놀러 갔습니다. 오전에 들렀습니다.
그날은 나 혼자였습니다. 수화와 단둘이서 마시던 술이 점점 취해 들었습니다. 열두 시쯤 되어서
나는 견디기 어려워 "나는 이제 술을 더 못 하겠소, 가야 하겠어" 했더니,
"그럼 이 방에서 그림 하나 가지고 가," 했습니다.
그 말에 나는 아직 이젤에 걸려 있는 마르지 않은 그림을 손에 들고, "이곳에 싸인을" 했더니
"싸인은 무슨 싸인, 그림을 보면 내 것이지" 하며 그저 가지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 마르지 않은 그림을 조심조심 성북동 고개를 걸어서 넘어 왔던 겁니다. 술에 만취해서,
이 그림은 지금 아들네 집에 걸려 있습니다. -조병화, <수화 김환기 화백을 생각한다> 중에서-
김환기 / 매화와 달과 백자, 1958,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항아리 -김환기 유화개인전에서- 조병화
외줄기 검은 가지
긴 꽃머리에 흰 꽃이 피었네
송이 송이 피었네
흠빡 모여서 피었네
맑은 기류(氣流) 삼천리 강산
봄이 무거워 가지가지에 늘어졌네
산 넘어 먼 곳
곳
항아리 구는 마을
어디선지 호둘기 소리만 나네
봉오릴 타고
골짜길 타고
온종일 계란과 같은 태양이 도네
아무도 없어도 그대로 도네
잎사귀 어린 봄
김환기 / 항아리와 매화가지, 1958,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좌) 노천명 / 별을 쳐다보며, 장정-김환기. 희망출판사, 1953, 근대서지연구소 소장.
중) 윤동주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표지-김환기, 정음사, 1955(재판), 근대서지연구소 소장.
우) 손소희 / 태양의 시, 장정-김환기, 어문각, 1962, 근대서지연구소 소장.
조병화 / 드로잉, 1960, 종이에 펜, 파스텔, 개인 소장.
첫댓글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3부
열정과 정성으로 올려 주신 소중한 글
시, 그림, 감사히 즐감하며 경의를 표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분들의 시, 그림
오늘의 선물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활동이 자유롭지 못해
즐거움을 코로나에게 빼앗겨 아쉬움이
컷으나 올 해 서서히 즐겨보려 합니다
전시 소식이나 정보 공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늘 강녕하시길 두 손 모음니다.
이름있는분들 시
그림들 주욱 잘보았습니다
설 보너스 입니다
감사합니다
유명하신
시인과 화가의 전시
잘 보았슴다
많은 공부도 했구여
설 명절
국립현대 미술관
덕수궁
미술과 시가 어우러진
한마당
눈요기와 감동
두가지 행운을 얻었슴다
감사해요~^^
설 연휴
알차고 보람차게 잘 보내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