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휴고상 최우수 장편상 수상작! 대체 역사소설의 걸작!
소설가를 꿈꾼 철학자 필립 K. 딕. 지금 그가 가상의 역사를 그려 보인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 <페이첵> <콘트롤러> 등의 원작자로 ‘할리우드가 가장 사랑한 작가’로 평가받는 필립 K. 딕.
<높은 성의 사내>는 ‘2차 세계대전에서 만일 연합군이 패했다면?’이라는 가정을 토대로, 독일과 일본이 세계를 양분하여 지배하는 음울한 가상의 1960년대를 배경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이 빚어내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마치 거울에 비춰본 세상처럼 지금 우리의 현실과 묘하게 닮았으면서도 판이한 세계,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높은 성의 사내’가 쓴 책을 정신적 위안으로 삼는다. 갖가지 망상증과 신경쇠약에 시달리고 평생 순탄치 못하게 살면서도 늘 그를 둘러싼 세상에 의문을 던지고 구원을 꿈꾸던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보지 못했을 우리의 모습을 절묘하게 비춰 보여준다.
대체역사 소설의 효시, <높은 성의 사내>
필립 K. 딕은 이 작품으로 대체역사 소설이라는 장르를 처음 개척함과 동시에, 1963년에는 최고의 SF작품에게 주어지는 휴고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다. 하지만 그 뒤로도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으며, 사후에야 재조명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어슐러 르귄이 “만일 그의 작품이 순수문학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싸구려 표지 대신 거창한 표지를 내세웠더라면 그렇게 비평가들에게 잊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움과 찬사를 한데 모아 표현했듯, 필립 K. 딕은 과학소설의 보편적 소재를 이용해 진지한 메시지를 담는 작가로서 20세기 SF문학사를 대표하는 인물로 손꼽힌다. <높은 성의 사내>는 딕이 작품 활동 최전성기에 접어드는 1962년에 발표되었다. 이후 <화성의 타임슬립>,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유빅> 등 최고의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정체성의 혼란과 다중 현실, 그리고 불안감과 편집증 등 작가 특유의 코드는 이 작품에서 이미 발현되고 있다.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세상’, 그 안에 깃든 존재론적 의문
암울하고 그로테스크한 세계를 그린 딕의 작품에서는 ‘당신은 누구인가’를 비롯해 ‘당신이 보고 있는 현실은 진실인가’ 같은 존재론적인 질문이 거듭 등장한다. 이 작품도 다르지 않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은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독일과 일본이 세계를 양분해 통치하고, 미국 역시 동부는 독일이, 서부는 일본이 지배하는 현실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진짜 현실(연합군이 승리하고 미국이 팍스 아메리카나를 주도해가던 1962년)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책 속의 책 <메뚜기는 무겁게 짓누른다> 속에만 존재한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동양문화를 숭배하며 일본인들의 우월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백인들과 인종 청소라는 끔찍한 짓을 자행하는 나치의 만행을 효율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이는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 만연한 백인 우월주의와 팔레스타인의 혼란을 야기한 유태인들을 모습과 다름 아니다. 그래서인지 <높은 성의 사내>에서 그려진 현실 혹은 그 세상은 그리 낯설지 않다. 혼란 속에서 21세기의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현실과도 흡사하기 때문이다. 필립 K. 딕 소설 속이 주는 철학적인 메시지들은 단순히 텍스트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새 현실적인 맥락과도 맞닿아 자리를 잡아간다. 그리고 이렇게 한 작가의 상상력은 시공을 뛰어넘어 우리의 현실을 뒤집어 다시 한 번 조망하게 해준다.
P.63
나도 유태인을 좋아하지는 않아. 하지만 1949년에 너희들이 살던 미국에서 도망친 유태인들은 좀 봤지. 너희들이 그들을 쫓아내고 미국을 차지했잖아. 미국에 다시 건물이 잔뜩 들어서고 굴러다니는 돈이 많은 건 뉴욕에서 유태인을 몰아낼 때 뺏은 돈이 많아서야. 그 빌어먹을 나치의 뉘른베르크법* 덕분이지. 나는 어렸을 때 보스턴에서 살았어. 유태인과 관련해 특별한 경험은 없지만 아무리 전쟁에서 졌다고 해도 미국에서 나치의 인종차별법이 통과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
P.67
늙은 히틀러는 매독으로 온 몸이 마비되고 노망까지 든 채 여생을 보내고 있다. 뇌까지 번진 매독은 그가 비엔나에서 길고 검은 코트에 더러운 속옷을 입고 싸구려 간이숙소를 전전하며 부랑자로 살던 시절에 얻은 것이다. 무성영화에나 나올 법한 하느님의 복수가 분명했다. 그 지독한 자는 몸속 더러움, 남자의 추악함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역병에 쓰러졌다. 끔찍한 건 지금 독일제국이 바로 그자의 머리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그의 두뇌는 처음에는 정당을, 이어서 나라를, 다음에는 세계의 절반을 집어삼켰다. ‘지도자’ 히틀러의 헛소리는 여전히 성스럽게 여겨졌으며 아직도 성서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사상은 이제 사악한 씨앗처럼 온 문명세계를 감염시켰고, 나치의 맹목적인 금발 동성애자들은 이제 지구를 벗어나 다른 행성으로 내달리며 더러움을 퍼뜨리고 있다.
P.74
내가 이 친구와 가까운 인종이라고? 바이네스는 의아했다. 사실상 같은 민족이나 다름이 없어? 그럼 내게도 정신병자 같은 구석이 있겠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신병 환자로 가득해. 미친놈들이 권력을 잡았어. 우리는 언제부터 그걸 알았을까? 언제부터 직시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제대로 알까? 로체는 모른다. 스스로 미친 걸 안다면 미친 게 아니지. 아니면 마침내 제정신을 차리는 중이거나. 깨어나고 있는 거지. 내 생각에 이 모든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나마 여기저기 따로 떨어져 있지. 하지만 일반 대중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곳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제정신이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그들도 슬쩍슬쩍 진실을 의심할까?
P.222
라이스는 책을 덮고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 일본 놈들을 더 세게 압박해서 이 책을 금지시켰어야 해.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라이스가 화나는 건 이 부분이었다. 아벤젠이 쓴 책에 묘사된 아돌프 히틀러의 죽음, 히틀러와 나치당, 독일의 패배와 파멸. 그 모든 것이 왠지 더 웅장한데다 현존하는 실제 세계, 그러니까 독일이 패권을 차지한 지금 상황보다 옛 정신과 더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