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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자료 스크랩 등반가 조형규
아카데미 추천 0 조회 95 19.06.03 11: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등반가 조형규

 

 

 


 

 

그의 8,000m 고봉 등정 욕구는 그렇도록 강했다. 결국 그는 99년 당시 51세로 한국 최고령 8,000m 고봉 등정을 기록하며 가셔브룸2봉(8,035m)을 올랐고, 2004년엔 56세로 또한 최고령 기록을 바꾸며 로체봉(8,516m)도 올랐다. 또한 96년 세계적 난벽 에베레스트(8,848m) 남서벽 한국 초등정까지 그는 네 번의 큰 원정대 대장을 맡으며 모두 성공으로 끝냈다. 이제 할 만큼 했다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웬걸,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의사 친구가 정밀 검사 해보더이만, 수술해도 고산 등반하는 데는 아무 지장 없다 캅디다. 그래서 마, 이태 전에 해삐?지.” 그는 사시에 던져지는, 동정·혐오·궁금증들이 훌 뒤섞인 시선을 15년여 감내하며 견뎠다. 그렇게 하게 한 그것은 무엇일까. “쫌 어렵게 영어로 말하면 마인드풀니스, 그거지예. 우리말로 하면 깨어 있는 마음인데, 성경 구절에도 있어예. 불가에서는 정념(正念)이라 카는 거, 그거지요.” 과거의 일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에 시달리지 않고 현재에 늘 깨어 있는 상태, 그것을 추구하는 수련의 한 방편이 그에겐 등반이라는 뜻이다.

 

 

 

“왜 오르는가”란 질문에 그는 이렇게도 말한다. “근본적으로 좋아해서 하는 것이지예. 좋아하고 사랑하는 감정은 철학적으로 풀 수 없는 겁니다. 다만 그 감정은 국가적, 운명적으로도 변환될 수 있겠지예. 아무튼 저는 산을 감으로써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왜 오르느냐고 묻는다면 ‘삶을 잘 살기 위해, 아름답게 살기 위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삶이란 욕망을 채우는 과정이 아니라 의미를 채우는 과정이라.” 자기 희생과, 거기서 배태되는 감동 또한 그가 늘 추구해온 등반의 덕목이다. 그는 자신의 이런 등반율을 후배들에게도 요구해왔다.

 

92년 낭가파르밧봉(8,125m) 원정 때의 일이다. 박희택, 송재득 두 대원이 등정에 성공했으나 하산 길에 “송재득이 지쳐 쓰러졌다”는 박대원의 무전 연락이 왔다. 그는 “어떻게든 재득이를 데리고 같이 내려오라”고 간절히 말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만약 너 혼자 내려오면 죽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파키스탄 정부연락관 총을 빌려서라도 정말 그럴 작정이었지예.”


8천미터 고봉 등정 후 하산 길의 걸음걸이는 그 누구든 힘들고 비틀거릴 수밖에 없는 법. 제 몸 건사하기도 버거운데 지쳐 늘어진 동료까지 구해 내려가기란 제 목숨을 함께 걸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본능과 의지의 경계선상에서 갈등했던 박희택대원은 결국 서로 연결된 자일을 풀지 않고 송재득과 더불어 밤늦게 제4캠프로 귀환했다. 귀국 후 송재득은 박희택의 패러글라이딩 용품 매장에서 2년간 봉사하는 것으로 보은했다.


 

조형규씨가 대장을 맡은 88·89 경남산악연맹 눕체봉 동계 초등정은 경남 산악계가 악순환과 선순환, 둘 중 어디로 가느냐를 가름하는 중요한 등반이었다. 그는 이 등반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92년 그 때까지 여러 한국 팀이 고배를 마셨던 낭가파르밧봉 등정에도 성공했다. 그 후 경남 산악계는 히말라야 쪽으로 마치 물꼬가 트인 듯 너도나도 원정에 나서, 지금까지 80여 차례의 거봉 원정을 기록했다. 이를테면 조형규씨는 경남지방 산악계를 부흥시킨 주역이었다. 그가 역시 대장으로서 주도한 95년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정은 한국 산악사상 기념비적 성과다. 대장이란 베이스캠프에 상주하기 마련이나 그는 해발 6,300m의 제2캠프에서 30여 일을 버티며 등반을 지휘, 대원으로 하여금 한국인 최초의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정을 성공하게끔 했다.

 

 

 

2004년 로체봉 등반 때 그는 생사의 경계선 바로 옆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해발 6,300m의 제2캠프에서 25일간 연속해 머물다가 그 자신 또한 등정에 성공한 5월15일의 일이다. 그는 하산 중 홀로 비박(=비부악=bivouac, 악천후나 사고 등으로 텐트도 사용하지 못한 채 지형지물을 이용해 하룻밤을 지새는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피켈(긴 자루 끝에 T자형 금속 날이 달린 등반 용구) 때문이라. 해발 8200m쯤 되는 지점이었을 긴데, 옆구리에 꽂아뒀던 게 바위에 툭 걸리면서 비탈 저 아래로 떨어지길래 마, 값은 얼마 안 나가도 평소 애지중지 하던 기라 찾으러 내려갔어요. 후배들은 먼저 내려가라 카고….” 그러는 사이 날이 어두워졌고, 실수로 헤드랜턴 또한 떨어트리고 말았다. 무전기도 먼저 내려간 후배들한테 있었다. 피켈도, 랜턴도 없이 어둠을 더듬어 혼자 고산 벽을 내려가기는 너무 위험했다. 도리 없이 그는 비박에 들어갔다. 앉기는 어렵고, 겨우 서 있을 만한 턱에서였다. 바로 옆엔 언제 죽었는지 모를 등반가의 시신 2구가 매달려 있었다. 거기서 그는 가톨릭 기도문을 외면서, 가만히 있으면 얼어 죽을 것이 분명하기에 끊임없이 제자리 걸음을 하며 8천 미터 고소에서의 악몽 같은 밤을 보냈다. “별 생각 다 나데요. 누가 꼭 원정 말리는 거 같더이만 이래 되는구나, 싶기도 했고…. 간암 진단 받은 우리 신부님 가톨릭 성모병원에 모셔놓고 나니 장모가 또 후두암이라, 서울원자력병원에 입원시켜드리고 돌아서니 곧바로 마 장인 어른이 세상을 뜨시데요. 그기 원정 출국 2주 전 일이라.”


새벽 5시경 사위가 훤해 오며 그는 하산을 시작했다. 피켈이 없었기에 그는 등산을 돕는 로프가 고정되어 있지 않은 비탈은 뾰족한 돌덩이 두 개를 주워서 빙설면(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곳)을 찍으며 내려갔다. 사력을 다한 하산 세시간 만에 그는 제4캠프에 극적으로 귀환했다. 후배들은 아마 귀신이 내려오는 줄 알았을 것이다. 제4캠프를 떠난 지 30여 시간 동안 그는 물 한 모금 입에 넣지 못했다. 때문에 위장에 탈이 났던지, 음식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겨우 몸을 추슬러 캠프를 철수, 네팔 수도 카트만두로 내려왔을 때 가슴 미어지는 소식이 들려왔다. 대구 후배 박무택이 에베레스트 북사면(초모룽마) 등반 중 사망했다는 전언이었다. 어금니를 깨물며 슬픔을 참다 못한 그는 빈속에 독한 양주를 퍼부었다. 결국 그는 수혈을 받아야 할 만큼 허약해져서 돌아왔다. 함안 그의 집에서 본 5년 전 그 때의 조형규씨는 마치 미라처럼 말라 있었다.

 

 

 

사시마저 고치고 난 지금의 조형규씨는 우리 나이로 61세 환갑인데 40대 때처럼 젊고 팔팔해 뵌다. 그러니 그는 어딜 가도 또 갈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지 않은가. “요즘은 마, 내가 산을 가야 할 운명을 타고 났다고까지 생각하게 돼요. 그래서 내 70대에 가서 다시 8천 미터 봉 하나 올랐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 하고 삽니다. 지금은 좀 때가 아니라 참고 있지예. 팔순 노모가 계신데, 장남인 나만 믿고 사시는 격인데, 혹여 잘못 돼서 상처주기 싫네요. 그래도 내 꼭 이루고 싶은 게 있는데, 말하자면 산악올림픽 금메달 격인 저 황금 피켈상을 한국에 가져오는 일이라.”

 

네 번의 큰 원정을 성공적으로 끝낼 때마다 그가 두툼하고도 자세한 원정보고서를 낸 것은 그런 꿈을 위해, 귀한 체험을 한국 산악계 공통의 것으로 하고자 해서다. 이렇게 산만 생각하는 것 같고, 엄홍길 같은 스타도 아닌 그는 그러므로 사회 생활은 좀 문제가 심각할 것 같지만, 아니다. “나한테 일상이나 가족, 내가 운영하는 약국은 말하자면 고산 등반을 위한 베이스캠프 같은 거라. 그러니 절대 등한히 할 수 없지예. 밤 9시30분까지 철저하게 약국 지킵니다. 후배들한테도 마찬가지로 말합니다. 직업, 가정 모두 반듯해야 한다고요. 부인이 찾아와 원정대에서 빼달라고 하면 그 대원 등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바로 빼버립니다.” 

 

 

 

조형규씨는 49년 경남 함안군에서 유명한 한의사 집안의 4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함안중, 마산고를 거쳐 부산대 약대를 나왔다. 고2 때 수학2를 마스터했을 정도로 수재인 그는 당시 부산대 입시에서 수학 만점을 받은 4명 중 한 명이었다. 약대 재학중 그는 마약에 대해 알게 되며 ‘마약 검사’의 꿈을 품었다. 대학 졸업에 이어 군복무도 마치고 나서 2년간 사법고시에 매달렸다. 그러나 조부가 세상을 뜨며 가세가 기울어 약사 개업을 미룰 수 없었다.

 


“내가 죽은 뒤 (남에게 돈을 받을) 외상 장부도 불태워 버리라”는 조부의 유언 한 마디는 그의 삶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함안읍 인구는 고작 15,000명 남짓이지만, 그의 약국은 크기가 서울 종로통의 큰 약국만 하다. 마산, 부산 등지에도 그의 고객이 많다. 세상을 떠나며 외상장부도 없애버린 ‘큰 가슴’을 조부로부터 물려받은 덕이다. 그의 약국 건물 4층 방에는 산꾼들뿐 아니라 국회의원이 되려는 사람들 발길도 잦다.

 

산악인들 사이에서 ‘조대장 약 가방’은 유명하다. 그는 고산 원정 시 꼭 필요한 약품 수십 가지를 챙겨 원하는 원정대마다 거저 빌려줘 왔다. 때문에 그의 플라스틱 약가방의 해외원정 경력은 이미 30회가 넘는다. 부인은 속깨나 썩을 것이다 싶은데, 알고 보면 부창부수다. 정신지체아 시설에 약국 운영해 얻은 수익을 뭉텅뭉텅 가져다 주는 당사자는 그가 아닌 그의 부인 이정희여사(56)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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