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하지 않은 사회
1953년 어느 날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는 취리히 지역 대학에서 열리는 강연 홍보물을 보았다. 당시 19살이었던 그는 비행접시가 그려진 광고를 보며 과학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칼 융(Carl Jung)1)이 강연자여서 의아해했다. 칼 융은 비행접시를 믿는 사회적 현상에 투영된 당시 사람들의 심리 상태에 주목했다.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집단적인 우울, 두려움 또는 충족되지 않은 간절한 욕구가 비행접시를 믿는 현상의 원인이라고 느꼈다. 최근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낳고 있는 학부모의 교권 침해나 안타까운 교사의 죽음을 마주하면서 우리의 비행접시에 대한 관심이 절실히 요구됨을 느낀다.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의 설명으로 보면 우리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증가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늘어나는 사회에서는 사회적 의무를 느끼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도록 강요받는다. 자연히 제임스 콜만(James Coleman)이 말하는 사회자본(social capital)에 대한 관심은 약해진다. 개인자본(human capital)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하면 승자독식의 성공 윤리에 의해 무능력자 또는 실패자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로버트 스턴버그(Robert Sternberg)가 비판한 대로 사회가 선발과 보상의 기준으로 삼는 개인의 능력에서 기회와 외부 지원 효과는 가려지고 개인적 특성만 부각된다. 결국 뒤르켐은 자기애(self-love)는 넘치지만, 각자는 비참함을 느낀다고 지적했다. 낮은 수준의 집단 조직만 키움으로써 서로가 온 마음으로 협력하려는 의욕이 없다. 경계심과 증오의 태도를 보일 뿐이다.
교사를 죽음으로 내몬 연이은 사건은 바로 행복하지 않은 사회가 빚어낸 비극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희생자는 있지만 자신을 박해자로 인정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모두 자신을 희생자로 여기며 자기 연민에 빠진다. 사회 환경 조건의 산물로서, 혹은 사회적 조건화(social contingency) 때문이라며 자기 행동을 방어할 뿐이다. 사회의 고조된 흥분에 빨리 대응하려는 정치적 관행은 서둘러 희생양을 찾으려고 한다. 사회가 마녀사냥으로 호응하면 사람들 사이에 공허한 만족감과 두려움만 교차하면서 현상의 진단과 이해는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행복하지 않은 사회에서 사람들은 누가 무슨 말을 하면 그 말이 옳은가 아닌가를 판단하지 않는다. 로이 르위키(Roy Lewicki)에 따르면 오로지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내 편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판단만을 한다. 아무리 타당한 기준과 논리를 가지고 학부모 교육권과 교사의 교육권을 규정한다고 해도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에 빠져서 자신의 집단에 유리한 증거를 선별적으로 찾고 해석하면서 현재 자신의 신념과 태도를 경쟁적으로 강화한다.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업신여기고 무시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취급함으로써 심리적 보상을 얻는 데 몰두한다. 결국 각자의 이익을 좇지만 실제로는 제자리걸음만 하는 불행의 트레드밀(treadmill) 위에서 지쳐간다. 스테픈 카르프만(Stephen Karpman)이 말하는 ‘박해자⏤구원자⏤희생자’의 역할을 주고받는 게임이 계속된다. 학부모 교육권, 교사의 교육권 및 국가의 교육권이 본래 역할을 제대로 다하려면 우리는 이 게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학부모 교육권 패러독스 및 인간의 인지오류를 이해하는 것은 그 변화의 토대가 될 수 있다.
|| 학부모 교육권 패러독스(paradox)
학부모 교육권은 헌법에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지만, 헌법재판소는 헌법의 전체적인 취지와 정신, 혼인과 가족생활을 보장하는 헌법 제36조제1항, 행복추구권을 보장하는 헌법 제10조 등에서 논리적으로 연역할 수 있다고 보았다. 1997년 제정된 「교육기본법」은 학부모 교육권을 명시하였는데, 학생의 교육은 학습자·학부모·교원을 포함한 교육공동체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학부모의 교육권은 교사의 교육권과 협력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판단이지만, 현실적인 상황에서 학부모의 교육권은 교사의 교육권과 갈등을 빚기 쉽다. 바로 학부모 교육권 패러독스 때문이다.
성취동기의 연구자로 알려진 데이비드 맥클레랜드(David McClelland)의 얘기를 들어보자. 똑똑하기는 하지만 게을러서 공부를 안 하고 맨날 게임만 하는 아이가 있다. 교사는 놀라운 동기 개발 기법을 학부모에게 제안했고, 학부모는 반기면서 교사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전문가의 개입이 있자 단기간에 아이는 엄청난 변화를 보였다. 열심히 공부하고 성적도 올라갔다. 그러자 학부모는 점차 걱정하면서 교사가 아이에게 행사한 힘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내 아이를 세뇌하는 게 아닌가? 내 아이를 통제하고 조종하는 게 아닌가? 학부모가 원래 바라던 결과를 냈는데도 학부모는 교사를 의심스럽게 경계하는 것이다. 학부모도 어쩔 줄 몰라 힘들어하는 학생의 문제행동을 교사가 개선하려고 시도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일차적으로 학생의 문제행동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학부모와 공유하려고 하면, 학부모는 부당한 취급을 받았다는 반응을 보이며 공격적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 학부모 교육권은 교사에게 높은 역할 기대로 표출되지만, 이 기대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학부모가 기꺼이 치르려는 비용은 별로 계상되어 있지 않은 모순이 나타난다.
|| 발생하지 않은 일과 귀인 오류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사건 또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 때론 인간의 행동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추론에 핵심적인 관건이 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일어나지 않은 일을 고려하는 데 인지적으로 취약하다. 일어나지 않은 일은 거의 눈에 띄지 않으므로 귀인(attribution) 판단자의 인지적 고려사항으로 잘 떠오르지 않는다. 교사의 일상을 살펴보자. 하루 종일 학생 안전과 교육에 매진하다 보면 에너지가 거의 고갈된 채 퇴근한다. 그래서 막상 자신의 자녀는 따뜻하게 받아주지 못한다. 얘기하고 싶어 안달하는 자녀의 말에 귀 기울이지 못하면서 죄책감마저 느낀다. 바로 교사의 이와 같은 노고가 있었기에 수많은 날 학생들이 학교에서 겪지 않고 피할 수 있었던 나쁜 사건, 힘든 경험, 또는 부정적 감정은 학부모의 눈에 띄지 않는다. 개성이 강한 학생들의 다채로운 관심이 분출하는 다인수 학급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발생하지 않은 위험스러운 상황과 사건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므로 교사의 역할과 교사 역할의 어려움을 판단할 때 고려되지 않는다.
반면 드물게 보이는 잘못된 교사의 행동이나 태도는 가용성 휴리스틱(availability heuristic)2)에 의해 실제에 비해 빈번한 일로 여겨지고, 교사에 대한 태도와 판단에 큰 영향을 미친다. 화장실도 마음 편하게 가지 못하면서 애들을 챙기고 가사를 돌본 주부의 헌신은 주로 밖에서 활동한 배우자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교육적으로 잘못된 교사의 행동이나 태도는 지지받을 수 없다. 중요한 점은 어쩌다 잘못된 또는 오해받을 수 있는 행동을 했다고 해서 성급하게 교사의 정체성과 인격 자체를 부정한다면, 교사는 진정 우리 아이들을 위해 양(+)의 교육권이 아니라 가급적 안 하고 안 만나고 안 개입하는 음(-)의 교육권으로 내몰릴 수도 있다. 그때 우리 사회가 치러야 할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부모는 자녀를 누구보다도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자녀를 무작정 받아주는 행동만을 보이지 않는다.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더 엄하게 꾸짖을 때도 있다. 자녀에 대한 사랑의 태도와 구체적인 지도 행위는 다른 차원이다. 자녀를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사랑하더라도 교육적 요구 및 상황 조건에 따라 효과적인 지도 행위는 너른 폭의 스펙트럼을 보인다. 특히, 결과동일성(equifinality)이 큰 교육의 특성까지 고려하면 더욱 다양한 모습을 예상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학부모는 교사가 학생을 지도하는 구체적인 상황을 모른 채 자녀를 통해 간접적으로 혹은 때로 왜곡되어 전달되는 ‘교사 행동’만을 보기 쉽다. 이때 학부모는 교사 개인의 성향을 과대평가하고 교사가 지도에 임했던 환경 영향은 과소평가하는 인지오류에 빠진다. 분명히 상황적 압력과 조건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행위자 개인의 차원에서 추론하려는 성향 때문이다. 교사가 지도하던 당시 환경의 힘과 제약이 미치는 영향을 간과하는 것이다. 타인의 공격적 행동은 그 사람의 성격 탓으로 귀인하는 반면, 자신의 공격적 행동은 외적 환경 영향 탓으로 귀인하는 경향과 같은 맥락이다.
지각과 사고 과정에서 학부모가 빠지기 쉬운 이런 오류는 학부모와 교사 사이 의사소통을 방해하고, 공감적 상호이해를 어렵게 하며, 문제 해결을 힘들게 한다. 흑백 사고를 강화하고, 상대를 악마화하기 쉬우며, 바로 눈앞으로 시간 관점을 줄인다. 아울러 자신의 행동과 판단은 상대적으로 해당 상황에 적합하고, 누구나 보일만한 공통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인지오류도 교사에 대한 학부모의 판단을 왜곡할 수 있다. 학부모가 자신의 행동이나 판단과 일치하지 않는 교사의 행동에 대해 흔하지 않고, 기준에서 벗어나며, 부적합하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학부모 교육권과 교사의 교육권의 관계를 검토할 때 우리는 인지적 한계에 의한 이런 귀인오류를 대개는 눈치채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귀인오류를 간과하면 교사의 교육권과 학부모의 교육권은 제로섬 게임을 하면서 경쟁하고 파괴적 갈등을 빚을 수 있다. 결국 우리 아이들의 교육적 이익은 사라진 채 학부모와 교사의 전쟁만 남고 모두가 패자가 된다.
|| 호만스 원리(Homans principle)
마지막으로 사회교환 이론(social exchange theory)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호만스(George C. Homans)의 얘기를 상기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조지 호만스는 개혁을 추진하는 사람들이 곧잘 호만스 원리(Homans principle)를 잊는다고 말한다. 사회, 정부 또는 산업체를 막론하고 그 조직의 성공적인 운영 여부가 조직 운영에 연관된 사람들의 비상한 능력에 달려있다면, 그 조직은 성공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 학교는 전통적인 좁은 의미의 교수학습 활동 이외에도 해가 갈수록 계속해서 추가되는 학생 지도·지원 업무를 떠안고 있다. 학교 사정을 모르는 학부모나 사회인은 교사의 일을 매우 쉬운 것으로 생각한다. 과거 학생 신분으로 학교에 다녔을 때의 매우 제한적인 일화 경험⏤기억과 회상에 의해 실제 발생한 사건과 달리 재구성되기 쉽다⏤을 바탕으로 현재 학교를 그리기 때문이다.
요즘 학교는 비상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교사조차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을 느끼게 할 만큼 어렵고 힘든 곳이다. 갑자기 손이 풀려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많은 교사가 느끼고 있다. 사실 비상한 교사에게 의존해서 학교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너무 위험한 도박이다. 이 도박을 옹호하는 사회에서 학부모, 학생, 교사는 러시안룰렛 게임의 희생자가 되거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를 느낀다. 공포는 방어적 의사소통을 유발하고 협력보다는 경쟁과 대립을 유도한다. 이제 우리는 학부모와 교사 각각에 대한 합리적인 기대와 역할을 설정하고 필요한 비용을 우리 사회가 공정하게 분담하는 방법을 논의해야 한다. 학부모 교육권, 학생의 인권 또는 교사의 교육권이 침해되는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희생자라고 주장하는 집단에게 무기를 안겨주는 방식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창과 방패의 교육권에서 존중과 협력의 교육권으로 전환해야 한다.
- 필자 : 조석훈
- 소속 : 가천대학교 교수
- 출처 : 교육정책 네트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