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 걸려있던 "검은 타이의 여인" - 이 그림 덕분에 머리 속이 까맣게 타는 순간을 모면했다.](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indshoes.new21.org%2Fart-gallery%2Fmodigliani%2F13-black_tie.jpg)
Woman with Black Cravat, 1917, Fujikawa Galleries. Toyko, oil on canvas
![모딜리아니의 누드화는 그 어떤 화가의 누드보다 아름답다. 최소한 나에게는](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indshoes.new21.org%2Fart-gallery%2Fmodigliani%2F84.jpg)
앉아 있는 나부, 1917년 . 캔버스에 유채, 73x116cm , 안트워프 왕립 미술관 소장
![모딜리아니의 영원한 사랑. 잔느 에뷔테른느](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indshoes.new21.org%2Fart-gallery%2Fmodigliani%2F37-SPR-672.jpg)
Jeanne Hebuter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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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는 예술이 뭐라 생각해?" (당신이라면 뭐라 대답하겠는가? 난 어째서 여자들이 연애할 때만큼은 자신의 남자 친구가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럴 때 대개 남자들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당연히 나도 고민한다. 그러다가 불현듯 모딜리아니의 <검은 타이를 맨 여인>이 눈에 들어온다. 머리를 쥐어짜서 만든 나의 대답은 이랬다.)
"음,(이건 나의 오랜 글 버릇이니 이해하시길.) 예술이란 기본적으로 왜곡이 아닐까?"
"왜? 왜 그런데...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아, 가시나야! 그렇다면 그냥 그렇다고 생각하면 되지, 니가 왜년이냐? 아해야! 세상에 대해서 왜라고 질문하지 말아라. 고독해진단다.)
"음, 그건(아, 머리가 타는구나.) 예술이란 건 사물이나 사건, 사람. 그러니까 세상에 대한 본질을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런데 저기 모딜리아니 그림 있지. 실제로 여자의 얼굴이 저렇게 생길 수는 없잖아. 눈동자도 없고. 저 그림은 그런 의미에서는 일종의 기형이거든. 즉 왜곡이 가해졌단 말이지. 하지만 화가(창작자)가 실제의 모델을 보고 그렸든 그렇지 않고, 상상으로 그렸든 저 그림을 보면서 실제로 저런 여자가 존재할 거라고 생각지는 않을지라도 우리는 뭔가 감동을 얻는단 말야. 그런데 그 감동을 얻는 과정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하지는 않지만 저절로 알게 되는 건 뭘까? 난 화가가 표현하고 싶은 그 무언가를 우리가 저절로 알게 된다고 생각해. 저 여자를 바라보면서 화가가 느낀 세상의 일면에 대한 진실 같은 거 말이야. 가령 그게 외로움일 수도 있고…거기에 멋있는 말들을 가져다 붙이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 그러니까 화가는 자신만이 볼 수 있고, 보았던 현실 그대로를 우리에게 보여준다고 해서 우리가 그 속에 숨겨진 진실을 알 수는 없으니까, 거기에 자신이 보았던 세계를 좀더 강조하고, 생략해서 우리에게 자신이 본 세계의 진실을 알려주는 거라고 생각해. 세상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현실에 왜곡을 가하는 작업이 예술이 아닐까 싶어."
"음, 그렇구나.(헉, 정말 내 말을 알아들었단 말이야. 말하고 있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사랑의 힘은 정말 대단하구나.)"
위의 얘기는 장난기 섞인 말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는 진실이랍니다.(모딜리아니와 관련되어 나온 책이 몇 권 있는데 그 중 이채로운 것은 <바늘구멍>이라는 재미있는 스파이 소설을 쓴 작가, 켄 폴레트가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소재로 추리 소설을 쓴 것이다. 그외에도 오우삼의 도둑영화 <종횡사해>도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훔치는 도욱 이야기이다. <종횡사해>, <바늘구멍>은 비디오로도 나와 있으니 못 보신 분들은 꼭 보세요. 바람구두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스파이 영화입니다. 모딜리아니, 열정의 보엠/앙드레 살몽 지음 / 다빈치 / 2001년 1월/12,000원 >이고, 다른 하나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 열화당미술문고 213/장소현 지음 / 열화당 / 2000년 5월/9,000원>인데 제 개인적으로는 열화당 책을 권하고 싶군요. 앞의 책이 다소 소설풍으로 풀어쓰고 도판도 일부만 컬러인데 반해서 열화당 것은 도판 상태도 더 좋고, 글도 차분하게 풀어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의 고전 예술적인 풍토에서 성장한 한 명의 청년. 모딜리아니. 그는 시쳇말로 잘 생긴 이태리 미남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이 그의 얼굴처럼 아름답게 흘러간 것은 아니었다.
에콜 드 파리의 전설과 모딜리아니
1884년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피렌체 남쪽의 작은 항구 도시 리보르노에서 아버지 플라미니오 모딜리아니, 어머니 에우제니아 가르신의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부유한 유태인이었고, 모딜리아니는 자신이 유태인이란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후일 잔느 에뷔테른느와의 결혼에는 이 문제가 극심한 반대의 사유가 되었지만), 초등학교 시절의 모딜리아니는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을 질투라도 하듯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 폐결핵을 앓을 만큼 잔병치레를 많이 했다. 10살에 늑막염을 앓고, 14살 때에는 장티푸스와 폐렴 때문에 중학교 과정을 중퇴하기까지 했던 모딜리아니는 그후 미켈리 밑에서 미술을 공부하던 중, 17살 되던 해에 다시 폐결핵이 생겨 요양한 후 어머니와 함께 로마와 카프리, 나폴리, 피렌체 등지의 미술관을 여행하며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에 대한 교양을 쌓았다. 그는 문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단테Dante, 페트라르카Petrarch, 레오파르디Leopardi, 카르두치Carduchi, 다눈치오Dannunzio 등 이탈리아 위대한 고전 시인과 니체, 쉘리, 보들레르, 말라르메, 랭보, 로트레아몽 등의 시를 줄줄 암송하곤 했다고 한다. 그에게 이탈리아는 자신의 작품의 원천이자 영감이었던 셈이다.
1906년 22세의 나이로 처음 파리에 도착한 모딜리아니에게 프랑스 파리는 전혀 새로운 곳이었다. 그만큼 당대의 파리는 세계 예술계의 일번지로서 모든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907년 세잔느의 회고전을 보고 커다란 감동을 받는다. 일찌기 화가. 세잔이 세상의 모든 것 “자연은 구형·원통형·원추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라는 견해로 자연을 단순화된 기본적인 형체로 집약하여 화면에 새로 구축해 나가는 자세를 주장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모딜리아니의 모든 회화에 나타나는 단순하고 우아한 선의 아름다움은 사실상 이때 결정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08년 처음으로 <유태여인> 등 유화 여섯 점과 데생 한 점을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하였다. 다음해에는 조각가. 브랑쿠시와 조각 제작을 시도하여, 원시 흑인 조각과 브랑쿠시풍의 간결한 조형 양식을 흡수 발전시킨 독자적 조각 작품을 만들었지만 그의 허약한 체력과 병약한 폐는 조각에 전념할 수 없도록 했다.
그는 1913년 몽파르나스로 옮겨 에콜 드 파리의 화가들과 키슬링, 수틴 등과 사귀었다. 그 자신이 '에콜 드 파리(파리파)'의 뛰어난 작가로서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많은 걸작을 남겨 대표적인 화가로 손꼽히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 프랑스는 다른 화가들에게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낙원만은 아니었다. 파리에는 그처럼 그곳만의 예술적 숨결을 느끼기 위해 몰려든 각국의 예술가들이 있었다. 이들을 일컫는 말이 '에콜 드 파리'다. 그곳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모딜리아니는 이방인이었고, 보헤미안이었다. 예술적 성취에 대한 초조함, 경제적 불안정, 그리고 선천적으로 허약했던 몸은 그를 술집에서 술집으로 전전하며 자신의 삶과 건강을 소진하게 했다. 그는 항상 가난했지만 자신의 자존심만은 팔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모딜리아니의 초상화 - 고독으로 꽃피운 사람들
모딜리아니의 작품은 주로 인물화 그것도 초상화에 집중되어 있다. 그림의 소재로 인간이 등장한 것은 회화의 역사와 같다고 해도 좋을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화가가 대상인 사람을 특별히 신격화하거나 신성으로 치장하지 않아도 된 시점은 그리 오래지 않다.(그것은 서양에서는 근대 자본주의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한다.) 물론 모딜리아니는 많은 누드화를 남기고 있지만 그에게 있어선 누드화 역시 초상화의 범주에 넣지 않으면 안된다.
그의 작품 속에 그려진 인물들은 한눈에 봐도 특이한 형태로 그려져 있다. 많은 평자들이 그의 초상화에 대한 양식을 논하고 있으므로, 이 자리에 긴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앞서 말한 대로 그의 회화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우하고 부드러운 선과 아프리카 원시 미술의 때묻지 않은 단순한 형태와 색채, 세잔의 영향, 자신이 직접 겪으며 마주 대해 온 모델과의 관계 속에 꽃 피운 작품 양식이다.
말로는 이렇게 단순화시켜 그의 그림이 무슨 영향을 받아 어떻게 형성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의 화풍을 이렇게 단순화하는 것은 치명적인 위험이 따른다. 왜냐하면 모딜리아니의 초상화는 모딜리아니 이외의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보적인 것이자, 모델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내면 세계를 화폭 위로 옮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만의 양식이 담긴 인물 속에 모델들의 심리적인 상태를 표현함으로써 오늘날 위대한 화가로 평가받는 것이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보면 문득 그의 그림이 식물성이란 생각이 든다. |
![스스로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는 화가의 모습이 떠오르는 작품이다.](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indshoes.new21.org%2Fart-gallery%2Fmodigliani%2Fself_portrait.jpg)
자화상, 1919.
다른 화가들의 관례와는 달리 모딜리아니는 자화상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나는 나를 향해 마주보고 있는 살아 있는 인간을 봐야만 일을 할 수 있다.'던 이른바 '만남의 화가'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그가 이 작품처럼 매우 조심스러운 붓 놀림으로 자화상을 그렸다는 건 후대의 사람들을 위해 다행한 일이었다. 이것이 남아있는 그의 유일한 자화상(1919년)이다. 화가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모델의 인상으로 보아 1920년 1월 24일(그가 죽은 날)은 멀지 않은 것 같다. '카라 이탈리아 (그리운 이태리)'란 말을 남기고 그는 떠났다.
작가연보
1884년: 7월12일 이탈리아 토스카나지방의 리보르노에서 출생 1895년: 리오르노 중학교입학. 늑막염을 앓다. 1898년: 풍경화가 미켈리에게 데생과 회화를 배움. 장 질환으로 폐렴에 걸림. 1901년: 폐결핵에 걸림. 요양을 위해 나폴리, 로마등지를 여행. 여행중 접하게된 카마이노의 조각에서 감명을 받음. 1902년: 피렌체 미술학교에 입학, 조각가의 길을 걷는다. 1903년: 베네치아 미술학교 입학. 1906년: 파리 생활 시작. <Tete de Jeune Femme> 1907년: 세잔느의 회고전을 보고 감명을 받다. 1909년: 앙데팡당전 출품. <Le Joueur de Violoncelle> 1912년: 살롱 도톤느에 조각 작품 출품. 1913년: 수틴과 친구가 됨. 1914년: 영국 여류시인 베아트리스 헤이스팅스와 연애.3년간 동거. <Portrait de Diego Rivera> 1915년: <Portrait de Pablo Picasso> 1916년: 즈보로프스키가 그의 전속 화상이 됨. <Jacques Lipchitz et Son Epouse>, <Portrait de Max Jacob> 1917년: 잔느 에뷔테른느와 만남. 첫 개인전에서 누드화 5점이 풍기문란죄로 철거됨. 1918년: 딸 잔느가 니스에서 태어남. 폴 기욤이 주최한 <젊은 작가전>에 마티스, 피카소와 함께 작품 전시. 1919년: 잔느 둘째 아이 임신. 현존하는 그의 유일한 <자화상> 그림. 1920년: 1월24일 자선병원에서 사망 1월26일 에뷔테른느 남편을 따라 투신자살 |
참고사이트 & 참고 도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 열화당미술문고 213』/ 장소현 지음 / 열화당 / 2000년 - 제 개인적으로는 열화당 책을 권하고 싶군요. 뒤의 책이 다소 소설풍으로 풀어쓰고 도판도 일부만 컬러인데 반해서 열화당 것은 도판 상태도 더 좋고, 글도 차분하게 풀어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딜리아니, 열정의 보엠』/앙드레 살몽 지음 / 다빈치 / 2001년
마이스튜디오-모딜리아니편 - 웹이미지 갤러리 <마이 스튜디오>의 모딜리아니 작품에 대한 웹이미지와 간단한 그의 작품소개들(영문)
뉴욕 메로폴리탄미술관(Metropolitan Museum) 누워있는 누드 - URL이 너무 길어서. 유명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사이트. 모딜리아니 이외에도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즐겨찾기 할 만한 사이트이다.(영문)
워싱턴 국립미술관 - 모딜리아니편 - <마담 키슬링>을 비롯해 12편의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워싱턴 국림미술관 사이트는 그외에도 볼 만한 화가들의 작품 이미지가 많은 웹이다.(영문)
E.G. Bührle Collection, Zurich - 뷜레의 개인 컬렉션 사이트다. 바람구두의 모딜리아니 아트홀에 없는 작품이 있으니 한 번씩 감상해보시길(영문).
Fondation Bemberg Museum, Toulouse, France - 모딜리아니에 대한 간략한 글과 폴 기욤에 대한 이미지로 소략하게 꾸며져 있다. 툴루즈 로트렉과 폴 기욤에 대해서도(영문)
영국 런던의 Tate 갤러리 - 모딜리아니의 작품 6편과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알파벳식 검색을 지원한다.(영문)
아트카이브(the artchive) - 인터넷을 이용해서 서양화가들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사이트는 절대 그냥 통과할 수 없는 사이트이다. 단연 최고의 사이트이고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사이트이다.(가장 다양하고 상태좋은 이미지, 가장 다양한 화가, 정확한 미술사,) (영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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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그의 초상화들은(누드화를 포함해서) 한결같이 난초 혹은 베고니아 화분을 닮은 걸까?(이건 순전히 저의 생각입니다만)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의 초상화에는 눈동자가 빠져 있거나 아니면 한쪽 만 그려져 있거나, 그도 아니면 무언가를 꿈꾸는 듯한 표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을 느끼게 된다.(누구는 이걸 술병이라고 표현하지만)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한결같이 생활이 거세된 채 표현된다.(아니 생활이 거세되었다기 보다 모딜리아니 자신이 생활이란 걸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거나 아니면 일부러 누락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다고 해서 생의 무게까지 제거된 것은 아니라는데 그 통증의 원인이 있지 않을 성 싶은데…. 그의 그림 속에 생의 공허와 외로움이 묻어나는 까닭 같은 것 말이다.
그의 초상화에 등장하는 모델들은 대부분 화가와 친분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모딜리아니 자신이 모델을 살만큼 돈이 없었던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그는 모델과의 심리적인 교감을 중시했다. 예전에 장선우 감독의 영화 중에 <나쁜 영화>란 영화가 있었는데 이 글을 읽는 분 중에서도 말많았던 그 영화를 기억하는 분들이 계시리라. 이 영화를 보고나서 한참이나 욕지기가 나서 애먹은 적이 있다. 나는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장선우 감독을 떠받드는 이라면 평론가들까지 싸잡아 믿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논란의 여지는 있겠으나 미학적인 완성도 자체가 형편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판단을 내리게 된 나름의 원인을 찾자면 다음과 같다. 사진과 영화의 공통점은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도구로서의 렌즈는 물리적이고, 광학적인 특성을 갖는다. 하지만 그 도구를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것도 사람이요, 그 대상도 역시 사람이다. 따라서 렌즈를 통해 본 세상 역시 한 인간의 모습을 닮고 담아내게 된다. 그런데 장선우 감독의 영화를 보고난 뒤의 내 느낌은 그의 영화(실제 다큐멘터리와 유사한 제작 과정을 거쳐 제작되었다는) 어디에도 렌즈를 통해 바라본 대상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그의 영화를 보면서 욕지기를 느낀 것은 어떤 개구장이 악동의 탐욕스럽고 호기심어린 시선이 배우들과 길가의 행려, 노숙자들을 줄곧 몰아세우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대상이 비록 가난하고, 보잘 것 없더라도 모델의 삶과 인생을 가까이 지켜봐 온 사람으로서 자신의 작품을 통해 모델과 대화를 나눈다. 차가운 시선이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마음으로….
천국에서도 당신의 사랑이 되어드릴께요.
모딜리아니는 선천적으로 병약했으나 예술적 성공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불태웠다. 그럼에도 생전에는 폴 기욤, 즈보로브스키 등 일부 화상(畵商)이 원조했을 뿐, 세상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그는 가난 속에 과음과 방랑을 일삼다가 1920년 초 불과 36세의 나이로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짧은 일생을 마쳤다.
그런 그의 인생에 빼 놓을 수 없는 두 명의 인물이 있었으니, 그 중 한 명은 폴란드 출신의 시인이자 화가였던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와 모딜리아니의 영원한 사랑 잔느 에뷔테른느였다.(잔느 에뷔테른느는 엄격한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태인인 모딜리아니와 결혼한다. 3년간의 결혼생활을 통해 한 명의 딸을 두었다. 둘째 아이를 가진지 9개월만에 남편 모딜리아니가 죽자 그와 함께 영원히 함께 하는 반려자가 된다.)
즈보로프스키와 모딜리아니의 관계는 마치 빈센트 반 고흐와 동생 테오와 같았으며 그 관계는 친구 이상으로 진한 것이었다. 즈보로프스키는 모딜리아니를 자신의 아파트에서 작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그의 예술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 주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모딜리아니의 영원한 사랑 잔느 에뷔테른느이다. 19세의 미술학도였던 잔느는 33세의 모딜리아니를 만나 그의 반려자가 되었다. 잔느는 생활의 반려자일뿐만 아니라 그의 예술의 숨결 같은 존재였다. 이듬해 잔느는 딸을 낳는다. 모디는 딸의 이름을 사랑하는 아내의 이름을 따서 잔느라고 지었다.(이 딸 잔느가 후일 성장하여 미술사가가 되어 모딜리아니 연구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자료들을 모아 만든 평전 『모딜리아니:인간과 신화』의 저자이다.) 이 시기가 모딜리아니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때였다.
1919년 무렵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화가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잔느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좋아진 상황과 한 아이의 아버지라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모디는 작품에 대한 열정과 끝없는 음주벽을 놓지 못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 <잔느 에뷔테른느>(1919년작)는 이때에 그려진 것이다. 임신한 잔느의 모습은 왠지 처연하다. 그 눈동자 없는 눈은 그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담아 슬프게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어 줄 께요…"(이때 이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말하는 많은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남아 있는데 일설에는 모딜리아니가 자신의 아내인 잔느에게 "천국에서도 나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했다는 말도 있고, 잔느가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어 주겠다"고 말했다는 설도 있지만 확인되지 않은 것들이다. 다만 가톨릭 교육을 받고 자란 임신 9개월의 여자가 남편을 따라 투신자살한 사건은 인간도 동물인 이상 뱃속의 아기를 지켜야 한다는 모성 본능을 초월한 일대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 부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전설이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다음은 그의 죽음의 과정을 소설투로 옮겨 본 것이다.)
1920년 1월 겨울 어느날, 모디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추정되는 자화상을 완성시켰다.(20세기 최고의 초상화가로 꼽히는 그이지만 특이하게도 자신의 자화상은 거의 남기지 않았다.)그는 얼음장 같이 찬방에서 피를 토한 채 쓰러져 있었다. 그 옆에는 만삭의 잔느가 웅크리고 앉아 죽어가는 모딜리아니를 조용히 바라본다. 하지만 그녀 자신이 모딜리아니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잔느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침대 주변에는 몇 개의 빈 포도주 병과 반쯤 얼어버린 정어리 통조림이 뒹굴고 있었다.
친구들이 달려와 이 모습을 발견하고는 곧 병원으로 옮겼으나 모딜리아니는 세상을 떠나 버린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어 줄께요" 라고 전설처럼 말했다는 잔느 에뷔테른느 역시 임신 9개월의 몸으로 자신의 양친의 집 6층 창에서 투신 자살한다. 그의 아기는 단 한번도 입 밖으로 울음소리를 토해내지 못한 채 부모의 뒤를 따랐다.
모딜리아니의 형 임마누엘은 그를 "왕자처럼 묻어달라"고 전보를 보내왔다.
에콜 드 파리 (Ecole de Paris)
에콜 드 파리는 "파리파"라는 뜻으로 제1차 세계 대전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파리의 몽파르나스를 중심으로 활약한 주로, 외국인 화가들의 총칭이다. 제1차 대전 전후, 파리에는 많은 외국인 화가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중 이탈리아의 모딜리아니, 러시아의 샤갈, 네덜란드의 반 동겐, 독일의 에른스트, 스페인의 피카소, 미로 등이 대표적인 작가이다.
파리파는 특별히 공통되는 주의나 양식이 없이 제각기 독자적인 양식을 추구하며 활동했기 때문에, 20세기의 어떤 이즘이나 유파와는 성격이 다르다.
모딜리아니, 샤갈, 수틴, 파스킨, 키슬링, 등이 모두 유태계 화가였기 때문에 애수를 띤 우울한 정서를 보여주었으며, 그 중 샤갈은 러시아의 민담이라든가, 유태인의 속담과 신비적인 전설 등을 주로 그렸다. 감상적이며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이 그들의 공통점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파리파는 해체 되었다. | |
첫댓글 슬픔의 사랑에 서사시를 남겼던 모딜리아니군요~!!! 모딜리아니에게 있어 그의 아내였던 "쟌느 에퓨테른느"를 이야기 안할수가 없겠어요... 36세란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한 모딜리아니의 주검앞에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겠어요~)란 맹세로 임신 9개월이였던 "쟌느"는 아파트 6층에서 투신을 하였습니다...모딜리아니의 주검으로 정신적 공황상태에 놓인 "쟌느"는 (당신이 없는 이 세상 육신이란 빈껍데기는 버리고~영혼으로 당신곁에 가겠어요)란 절망의 되뇌임으로 슬픈사랑에 또 다른 선택을 하였나봅니다~!!! 주검에 절망과 사랑에 열망을 위하여...행복하길 빌어요~쟌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