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아이에 관한 시모음 20)
그 아이 별이 되었네 /양재건
날이 저물면
서녘 하늘가에서
엄마별 아빠별 쫓던 아이,
달빛 퍼 올리던 두레박 소리
그리움 되어 찾아드는 밤,
바람 속에 아이 엄마도 잠들고
바람 속에 아이 아빠도 잠들고,
그리고 밤하늘 보며
엄마 꿈 아빠 꿈 꾸던 아이,
아이가 알고 있던 숲과
아이가 알고 있던 풀들이
어둠 속에서 찬란히 눈을 뜨고,
눈물 한 방울 눈물 두 방울
고운 꿈들로 방울방울 맺혀와,
엄마별 아빠별 쫓아 별 헤던 그 아이
반짝반짝 반짝이는 별이 되었네.
산 아이 /고재종
용골 아이 김순동이는
재 넘고 내 건너는 시오리 학교길
타잔처럼 날래게 뛴다
2학년짜리 그 아이
동무들 하나같이 떠나버려서
하학길엔 냇가에서
홀로 다슬기 송사리 잡고
숨 하나 안 차게 뛰어오르는 산길에선
먹딸기 따고 나리꽃들과 노닥이다
뉘엿거리는 해 동무하여
산막에 들면
지난겨울 아이와
산노루 쫓다 허리 다친 그 아비
으흐흐흐 짐승처럼 끌어안고
그때쯤이면 칠흑 천지 속으로
알별 잔별 총총
풀벌레 울음 따글따글 영글어
머언 전설 한 태산 내려쌓인다
산아랫말 더벅머리 총각과
눈 맞아 떠나버린 그 어미처럼
우리 너무 쉽게 숫정을 버릴 때
우리 추억의 문도 소리없이 닫히고
용골 아이 김순동이 오늘도
야밤중에 오줌 싸러 나왔다가
산정 위 일등성 보고
엄마! 하고 부를 때
산이 산으로 우는 소리며
별이 별로 우우우 떠는 소리 더한
지상의 모든 순결한 것들이
제 몫의 외로움을 싸하게 깨닫는 소리
땅 끝 어디 한포기 풀잎에까지
싱싱한 이슬로 미쳐 떨린다
아이들을 위한 기도 /김영호
당신이 이 세상을 있게 한 것처럼
아이들이 나를 그처럼 있게 해주소서
불러 있게 하지 마시고
내가 먼저 찾아가 아이들 앞에
겸허히 서게 해주소서
열을 가르치려는 욕심보다
하나를 바라게 가르치는 소박함을
알게 하소서
위선으로 아름답기보다는
진실로써 추하기를 차라리 바라오며
아이들의 앞에 서는 자 되기보다
아이들의 뒤에 서는 자 되기를
바라나이다
당신에게 바치는 기도보다도
아이들에게 바치는 사랑이 더 크게 해주시고
소리로 요란하지 않고
마음으로 말하는 법을 깨우쳐주소서
당신이 비를 내리는 일처럼
꽃밭에 물을 주는 마음을 일러주시고
아이들의 이름을 꽃처럼 가꾸는 기쁨을
남 몰래 키워가는 비밀 하나를
끝내 지키도록 해주소서
흙먼지로 돌아가는 날까지
그들을 결코 배반하지 않게 해주시고
그리고 마침내 다시 돌아와
그들 곁에 순한 바람으로
머물게 하소서
저 들판에 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우리 또한 착하고 바르게 살고자 할뿐입니다.
저 들판에 바람이 그치지 않는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들의 믿음을 지키고자 할뿐입니다.
어린이들을 바라볼 때 /김영수
주님,
제가 어린이들을 바라보면서는
그들처럼 빛나게 낮아지게 하소서.
낮아지는 곳에 평화가 흐르는 것임을 깨닫게 하시어,
끝없는 순결의 꿈을 꾸게 하소서.
그 꿈에 적셔진 눈빛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게 하시어,
꽃들은 대지에다 생명의 향기를 채우고 있음을 ,
하늘은 영원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휘어지고 있음을,
이웃은 따뜻한 형제로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보게 하소서.
주님,
어린이들의 평화를 통해
하느님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하시고,
다 버리고 오직 하나,
순수만을 붙잡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영혼의 심지를 어린이들의 순수에 촉촉이 적셔
평화의 등불을 밝혀서 들고,
머나먼 영원의 바다에 이르는 기쁨을 허락하소서.
주님,
헛기침으로 어른이 되고 있는 저를,
또한 복잡하게 어지러운 표정으로 어른이 되고 있는 저를
뜨거운 사랑으로 다스려주시어,
다만 어린이의 마음으로 낮아지게 하소서.
티없는 생명의 기운을 저에게 새로이 채워주시어,
제가 어린이들 틈에 끼었을 때,
아무도 저를 가려낼 수 없는 아름다움을 허락하소서.
아멘.
여름 아이 /최보윤
그 여름 언니는 툭하면 부러졌다
갈 곳 잃은 개들이 마당을 파헤치고
새들이 쪼아먹은 자두가 뒹구는 현관 앞
왜 이리 현기증 나나 했지 언니는
여름에 태어난 바람에 자주 지쳤다
스스로 바람이 되어 흔들리는 나무처럼
언니의 얼굴은 자두를 닮았나
훔쳐본 얼굴이 왜 이리 서글플까
가까워 머나먼 표정 들녘에 엎드린 채
언니 언니, 부르면 돌아보는 그림자
개들이 언니를 파헤치면 어떡해
새들이 언니 얼굴을 삼키면 어떡해
언니는 고요하고 쓸쓸히 말한다
"하늘에선 수평이 중요하지 않단다
그러니 답 없는 슬픔일랑 접어둬도 괜찮단다"
나는 저 아이들이 좋다 /이성복
나는 영혼에 육신을 입히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너무 사랑했다.
- 세르게이 예세닌, <우리는 지금>
나는 저 아이들이 좋다. 조금만 실수해도 얼굴에 나타나는 아이, "아 미치겠네" 중얼거리는 아이, 별 것 아닌 일에 '애들이 나 보면 가만 안 두겠지?' 걱정하는 아이, 좀처럼 웃지 않는 아이, 좀처럼 안 웃어도 피곤한 기색이면 내 옆에 앉아도 주는 아이, 좀처럼 기 안 죽고 주눅 안 드는 아이, 제 마음에 안 들면 아무나 박아 버려도 제 할 일 칼같이 하는 아이, 조금은 썰렁하고 조금은 삐딱하고 조금은 힘든, 힘든 그런 아이들, 아, 저 아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내 품에 안겨들면 나는 휘청이며 너울거리는 거대한 나무가 된다.
그늘아이 /안차애
지역시청 복지과 관련, 10개월짜리 학습매니저 알바를 한다
맡은 아이들은 모두 세 명인데 아픈 아이가 둘, 고픈 아이가 하나이다
아픈 아이 하나는 열다섯 살의 문법이 없고 자신의 방은 있지만 자신의 시간은 없다
제가 어디가 아픈지 몰라서 또래보다 긴 등이 물음표의 자세로 구부러져 있다 담당
복지사가 소곤소곤 말하기를 아이 엄마는 아이의 손목을 세게 조금 더 세게 끌어당겨
인지장애의 경계를 한사코 넘고 싶어 한다고,
아픈 아이 둘은 여덟 살을 달릴 발목이 없고 골목이나 놀이터의 그림자가 없고 나이가
들어도 소리칠 물구나무의 자세가 없다 햇살이 헛바퀴를 돌리는 한낮에는 소리쳐도 통
증이 없는 포유류의 발성을 몰고 와서 논다
고픈 아이 하나는 열 살의 등짝이 없고 끼니와 하루의 각도를 구분하는 엄마가 없다 햇
살이 들어오는 창가의 명도와 채도를 모르고 생명과 반 생명을 구분할 동선이 없어서 없
는 것의 정체가 삶은 감자와 계란뿐인 줄 안다
월요일의 아이는 화요일의 아이를 모르고
화요일의 아이는 금요일의 아이를 알 수가 없는데,
앉은 자리에 실뿌리가 돋아나는 그늘종(種)의 변이구조가 닮았다
웃어도 소리를 내지 않는 그늘과(科)의 습속이 점점 길어지거나 점점 겹쳐진다
아이가 아빠를 키운다 /손병걸
아빠 식사하세요
밥때만 되면
아이의 목소리 들린다
자식이라고는 단 하나
고작, 초등학교 3학년
생일이 빨라서 3학년이지
이제 아홉 살짜리다
밥상에 앉으면
이건 김치, 빨개요
요건 된장찌개, 뜨거워요
두 눈이 안 보이는 아빠를 위해
제 입에 밥알이 어찌 되든지 말든지
오른쪽에 뭐 왼쪽에 뭐
아이의 입은 바쁘다
요란한 밥상이 물러나면
커피는 두 스푼
설탕은 한 스푼 반
크림은 우유가 좋다며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내게
깡충깡충 커피를 가져다준다
아홉 살짜리 아이가
아빠를 키운다
나이 들어가는 아이들을 보며 /양재건
저의 세 아이들이 모두 불혹의 고개를 넘었습니다.
그중 큰아이는 어느새 오십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저도 저의 아내도 불혹의 나이를 훌쩍 지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고개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아이들 모두 일가를 이루어 제 몫의 가정을 아름답게 꾸미고들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봄날 빈 들에 나목같이 쓸쓸해집니다.
저의 아내도 그렇게 쓸쓸해지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세월을 훌쩍 건너온 노스탈자가 되어 함께 외로워집니다.
작았던 아이가 큰 어른이 될 때까지 세심하게 들여다보지 못해,
몹시 아이들에게 죄송하기도 합니다.
저의 훌륭하게 살아오지 못한 지난 세월을 아이들에게 사과라도 해주고 싶습니다.
저라는 사람은 꽃다운 꿈들이 자라고 있을지도 모를,
저 먼 미지의 세계에서 온 자는 결코 되지 못합니다.
바람이 세월의 틈새를 매몰차게 비집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지난 세월은 정말 모질고 거칠었습니다.
가슴속 그리움을 꺼내어 하늘에 걸어 놓습니다.
옹기종기 모여 담소를 나누던 한때의 아름다운 가족의 풍경들이 그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안타깝게도 저는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상처투성이인 저를 위해 누군가는 회한의 기도를 드려주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절이 세월 저 멀리에서 저를 애타게 부르고 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더 낮음에 이를 때까지,
저는 더 이상 망설임 없이 고해의 시간 속에 항시 머물러야겠습니다.
꽃피는 아이 /천양희
언덕길 오르다 아이가 내 손을 잡는다
"구름 한번 더 쳐다보고 가자
구름이 꽃처럼 피었네"
바쁘다고 하늘 한번 쳐다보지 않은
나는 부끄러웠다
마을로 들어서다 아이가 또 내 손을 잡는다
"저 초가집 꽃들 좀 봐
꽃이 구름처럼 피었네"
가난도 때로 운치가 있다는 걸 몰랐던
나는 부끄러웠다
아아, 아이가 피고 있다
이 세상에
눈부신 꽃이 있다
등불 /오봉옥
이렇게 환한 등불 본 적 있나요
개미 두어 마리가 죽은 나방을 움켜쥐고
영차 영차 손잔등만한 언덕을 기어오를 때
공놀이하던 한 아이가 잠시 가던 길을 비켜줍니다
순간 개미의 앞길이 환해집니다
이렇게 빛나는 등불 본 적 있나요
일곱 살짜리 계집아이가 허리 꺾인 꽃을 보고는
냉큼 돌아서 집으로 달려가더니
밴드 하나를 치켜들고 와 허리를 감습니다
순간 눈부신 꽃밭이 펼쳐집니다
오늘 나는 두 아이에게서 배웁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등불이 될 수 있다는 걸
봄에 태어날 아이에게 /안상학
온단다
삼월이 오면
그리운 사람 하나
맨몸으로
나를 찾아온단다
사내면 사내로
계집이면 계집으로
부끄럼 없이 맨몸으로
온단다
봄이 오면
온단다
내 청춘의 무거운 짐을 풀었던
기찻길 옆 어두운 방
환하게 만났던 여인이
겨우내 품었던
꽃씨와도 같은 사람 하나를
내게 보내온단다
우리에게 보내온단다
사과꽃 /이윤학
뗏장을 새로 입힌 무덤 몇 기
황토가 드러난 무덤 앞에서
아비 손을 이끌고 내려온 여자아이가
카니발 주위에 흩어진 사과꽃을 줍는다
사과꽃은 나비가 된댔어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나비가 되어 날아간댔어
고개를 돌리는 아비 얼굴을
요리조리 따라다니는 아이
엄마 말이 맞지?
아빠 목에 팔을 두르고
손깍지를 낀 아이가
또 묻는다
시들기 전에 나비가 되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날아간댔어
아빠, 엄마 말이 맞지?
떨어진 사과꽃 몇 개
손바닥에 올려놓은 나를 바라본 아이
아비 품에 안겨 떨어질 줄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