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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5. 묵상글 (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기도의 실패는 없고, 실패한 기도만 있을 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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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기도의 실패는 없고, 실패한 기도만 있을 뿐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헛수고 2.
어제 세례자 요한 탄생 축일 강론에서 저는 헛수고에 대한 나눔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도 저의 헛수고가 또 생각났습니다.
사실 제 인생에서 최대의 헛수고는 북한 사업일지도 모릅니다.
몇 년의 힘든 줄다리를 하여 가까스로 평양에 종합 복지관 ‘평화 봉사소’를 세우고
그것을 통해 북한에 상주하며 인도적인 사업과 복음화 사업을 하려 했는데
금강산에서 박왕자 씨가 피살된 후 북한이 아니라 우리 정부가 가는 것을 막아
아직도 가지 못하고 그 많은 돈이 투입된 복지관은 운영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세운 ‘평화 봉사소’가 개점휴업 상태인 것이
헛수고의 느낌을 제일 많이 들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헛수고의 느낌을 더 크게 느끼게 하고 좌절감까지 느끼게 하는 것은
남북 관계가 지금 이 모양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했는데도 남북의 망나니들 때문에
특히 윤석열 정부 때문에 그동안 이뤄놓은 많은 것이
다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 같아 정말로 속이 쓰리디쓰립니다.
기도의 헛수고.
기도한 것이 헛수고라는 느낌,
이것이 ‘평화 봉사소’ 헛수고보다 더 큰 헛수고 느낌입니다.
그래서 요즘도 남북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한우리 기도를 바치고 있는데,
이 기도를 바치면서도 계속 바쳐야 하나? 언제까지 바쳐야 하나?
공염불이라는 말이 있는데 혹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공염불(空念佛)이라는 느낌,
이것 정말 고약한 느낌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둘이나 셋이 모여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고 하는데
이 말씀에 대한 믿음을 송두리째 흔드는 느낌이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많은 기도가 사실 ‘아직은’ 공염불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기도하고 싶지 않고 포기하고 싶습니다.
이때 저를 붙잡아주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네가 아직 간절하지 않구나!
-포기할 때 진짜 실패하는 것이다!
-악마가 노리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낫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기도를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남이 아픈 경우라면 몰라도 내가 아픈데도 포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기도의 실패는 없고 실패하는 기도가 있을 뿐입니다.
간절하지 않은 기도.
성급한 기도.
같이하지 않는 기도.
사랑이 부족한 기도.
이런 것들이 실패케 하는 기도일 것입니다.
이것을 묵상하는 것으로 오늘 나눔을 끝내며
그러니 또 그리고 더 기도하자고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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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단지 15분’이라는 연극이 있다고 합니다. 이 연극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극 중 주인공은 몸이 이상해서 병원을 찾아갑니다. 여러 검사를 하고 나서 의사로부터 “당신은 15분 후에 죽습니다.”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게 됩니다. 우울한 마음으로 병원 문을 나서는데 전화가 울립니다. 재산상속을 해줄 테니 얼른 서명하러 오라는 할머니의 전화였습니다. 15분 후면 죽는다는데 유산 상속 소식에 기뻤을까요?
잠시 후에 오랫동안 구애를 했던 여자친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당신의 청원을 받아들일 테니 얼른 자기 집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15분 후면 죽는다는데 결혼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곧바로 세계적 과학 학술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당신의 논문 게재가 확정되었으니, 게재료를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역시 15분 후면 죽는데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주인공은 15분 앞에서 세상의 모든 욕망이 의미 없음을 깨닫고 오열합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 하나였습니다.
‘남은 15분을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 유한한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이 시간 안에서 과연 중요한 것이 나의 욕망일까요? 그보다 삶에 충실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을 찾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사랑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삶을 통해 지금이 의미 있으며, 무엇보다도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나의 전부가 있는 것처럼 살았던 것이 아닐까요? 욕심을 버리고 사랑으로 채울 수 있는 나의 삶을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1950년 6월 25일의 전쟁을 시작으로 남북한은 지금까지도 민족 분단의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였던 나라가 둘로 갈라져 너무 오랫동안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과연 중요한 것일까요? 아직도 우리 민족 간에는 거리감이 무척 커 보입니다. 좌파, 우파, 빨갱이, 보수라는 말 등으로써 아군과 적군으로 나누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민족 간의 간격은 너무나 커 보입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사랑의 삶을 통한 일치인데도 아군 적군 식의 편 나누기가 더 중요한 것처럼 여기는 사람도 너무나 많습니다.
사랑의 주님이시만 동시에 이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주님의 마음을 받아들여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라는 주님 말씀을 따라, 마음을 모아 기도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즉, 남북한의 진정한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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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우리는 인생의 3/4을 남의 인생을 살다가, 나머지 1/4은 내 인생을 살지 못했음을 후회하며 죽는다(쇼펜하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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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마태 18,22)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들어야 할 일입니다.
“너희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여
이 땅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구하라.”(마태 18,20)
바로 “이 땅”이 우리가 이루어야 할 친교와 화해의 장소라는 말씀입니다. 먼 훗날이 아니라, 평화로운 새로운 새 땅에서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바로 지금, 서로 마음을 모으라는 호소입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마태 18,22)
이는 허물을 탓하지만 말라는 말씀이요, 동시에 무한히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용서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조건이나 단서를 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반드시 죄를 고백해야만, 혹은 용서를 청해야만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때로는 완고하고 고집부리더라도 혹은 계속해서 똑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더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도 남북의 형제들끼리 적대 논리로 서로를 적으로 강요당하며, 서로 죽이는 살인 연습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적이 아니라, 형제가 되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적대감과 대립을 몰아내야 할 일입니다. 편견과 거짓과 위선을 몰아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와 용서, 일치와 사랑이 필요할 때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특별히 “오늘”이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한 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신명 30,2-3)
이는 축복과 저주는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이지만, 동시에 인간에게도 달려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분단극복과 화해와 일치의 실현에는 그동안의 우리의 불성실을 성찰하는 동시에, 바로 오늘 우리의 책무와 투신이 요청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새로운 생활 법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에페 4,29)
사실, 우리들 사이의 분쟁의 상당한 것들은 잘못된 말이나, 욕, 비난, 중상모략, 거짓말로 시작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남과 북이 서로를 비방하고, 거짓 뉴스와 유언비어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를 멈추고, 오히려 서로를 격려하고 고무, 찬양해야 할 일입니다. 축복을 가져다주는 좋은 말, 기쁨과 칭송의 말을 해야 할 일입니다.
이어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라.”(에페 4,30)
이는 형제들에게 하는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과 온갖 악의”가 사실은 바로 그들 안에 있는 성령께 대한 모독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몸이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서로 욕하고 비방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형제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성체조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형제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을 예배드리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라.”(에페 4,32)
사실, 용서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거저 받은 것을 마땅히 이웃에게 거주 주어야 할 일입니다. 특히 대립과 반목으로 오랫동안 쌓여온 남북의 적대를 용서로 바꾸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내가 ‘먼저 용서’하는 일입니다. 먼저 물꼬를 터야 함께 터지게 됩니다. 그러니 상대가 화해하기를 바라지 않아도 먼저 화해하려해야 할 일입니다. ‘네가 먼저 하라’고 버팅기다가 영영 화해하지 못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어”(에페 5,1)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화해와 일치를 위해 바치는 향기로운 산 제물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죄와 죽음을 이겨내신 부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회해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부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주님!
일곱 번이 아니라 이제는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셨으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하고,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하게 하소서.
아무리 꺾이어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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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다
아버지 하느님의 큰마음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워주시길 기도합니다. 허물을 이해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에 앞서 내 삶의 여정에서 이웃과의 관계를 살펴보고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이웃과의 관계 형성도 어려운데 북한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은, 얼마나 더 힘든 일인지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과 백 사람이 한마음이 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쉬울까요? 이론적으로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 결코, 두 사람이 일치를 이루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치의 전제조건은 화해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다 좋은데 이것만은, 안돼!’하는 속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음 한번 틀어지면 둘이 하나가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정성이 요구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머릿수가 아니라 마음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 입으로는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막상 얼굴을 마주하거나 목소리를 들으면 옛 생각에 울컥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피하고 싶어집니다. 마음이 불편하다면, 아직 진심으로 품어 용서하지 못한 것입니다. 신비한 것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준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겉과 속이 다른 배신자를 수박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 받아들이는 사람의 그릇이 중요합니다. 말하는 사람이나 행동하는 사람도 품위가 있어야 하지만 담는 그릇이 커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나를 치켜세운다고 해서 우쭐하지도 않고, 헐뜯는다고 해서 화를 내지도 않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18,19). ‘마음을 모아 청하면 이루어 주실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머릿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그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용서하지 못하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면 상대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에게 상처를 준 저 사람을 용서해 주십시오. 인간적으로는 힘이 들지만, 당신이 이미 용서하셨기에 용서합니다. 당신이 그를 사랑하시기에 저도 사랑하고 용서합니다. 그러나 제가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 것이 있다면 먼저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1절에서 11절을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이 이 여자를 끌고 와서는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마음 안에는 ‘나는 의롭다.’, ‘나는 잘살고 있다.’ ‘나는 거룩하다.’ 뽐내고 으스대는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와서 그러는 것입니다. “스승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소리를 듣고 금방 대답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히시어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무엇을 쓰셨을까요?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너 자신을 알라!’ 하셨을 것입니다. ‘너도 하느님 앞에 죄인 아니냐? 잘 생각해 봐라. 네가 잘난척하지만, 너도 별수 없다.’ 예수님께서 뜸을 들이시자, 사람들이 재촉합니다. ‘스승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씀 좀 하십시오.’ 사람들이 줄곧 물어대자,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을 때 나이 많은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다 떠나갔습니다. 마침내 예수님 앞에는 죄 많은 여자만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그러자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자유를 주셨습니다. 과거를 묻지 않고 자비와 용서를 허락하셨습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성경은 나이 많은 자들부터 떠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삶의 경륜이 많은 사람부터 떠나갔습니다. 말하자면 의롭다고 자처한 사람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세상에는 밝게 눈떠 있었지만, 하늘에는 눈이 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한 말씀에 눈이 뜨였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하시는 한 말씀에 눈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죄를 인정하고 자기 죄에다 죄를 더 보태지 않고 떠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눈뜨지 못했다면 돌을 집어 던졌을 것입니다. 죄에 죄를 더했을 겁니다.
마태복음 7장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자기가 잘못한 것은 보이지 않고 남이 잘못한 것은 아주 크게 보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눈뜬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눈뜬 사람은 허물을 보면 그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눈 뜬 사람은 그 허물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비추어 봅니다. 내가 저 사람과 똑같은 잘못은 범하지 않았지만, 또 다른 잘못과 허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리처럼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이 죄 많은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18,21)하고 물었습니다. 일곱 번, 많죠. 한 번도 힘든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용서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용서는 선행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일생을 살아오면서 잘 산다고 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용서받고 살았느냐? 너 그거 아느냐? 너 그거 안다면 다른 사람을 용서 못 할 것이 없지 않으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기에 앞서 먼저 가까운 사람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또 베푸는 것부터 시작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하신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고 ‘내가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신 말씀을 선포하시길 바랍니다. 나의 이웃에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짐하시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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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60이 넘으면서 꼭 지켜야 할 삶의 태도 5가지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저도 어느덧 60이 넘어서인지 관심이 있었습니다. 강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젊어서는 식탁에 꽃병이 있는데, 나이가 들면서 식탁에 약병이 놓인다고 합니다. 어쩌면 인생은 꽃병과 약병 사이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점잖다.’라는 말은 젊지 않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 그만큼 말에 품격과 품위가 있다는 뜻입니다. ‘늙은이’라는 말은 늘 그렇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 쉽게 변하지 않고, 나이가 들면 포용한다는 뜻입니다. 점잖게 늙어가는, 늘 그렇게 변함없는 노년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5가지를 잘 지켜야 합니다. 첫째는 타인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사는 겁니다. 남의 눈치를 보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보다는 무엇이 나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지, 무엇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지를 생각하면서 사는 겁니다. 소신껏,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하고,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삶은 노년의 시간을 기쁘게 합니다. 저는 신학생으로 지내면서, 사제로 살면서 소신껏 지내기보다는 아무래도 눈치를 보았습니다.
둘째는 여행을 자주 다니는 겁니다. 60년대에 태어난 저는 해외여행을 많이 하지 못하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가능하면 가족이 함께 여행을 다니면 좋습니다. 여행은 삶에 활력을 주고, 여행은 새로운 견문을 넓혀주고, 여행은 인생을 풍요롭게 합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경제적인 이유로 참다 보면 여행의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여행은 가슴이 떨릴 때 가야지, 몸이 떨릴 때 가면 어렵습니다. 여행의 목록을 정해놓고 떠나는 삶은 노년의 시간을 기쁘게 합니다. 다행히 저는 성지순례를 다닐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셋째는 힘들고 어려울 때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33년 사제로 지내면서 동창 신부님들은 제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됩니다. 매달 서울에서 동창 신부님들이 만나는데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큰 아쉬움입니다. 뉴욕에서 팬데믹을 잘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동료 사제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곳 댈러스에서도 서울 교구 신부님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이 세상 떠나는 날 그 한 사람이 있어서 마음이 놓인다면 좋겠습니다.
넷째는 자기 계발입니다. 자전거는 페달을 밟아야 움직입니다. 페달을 멈추면 자전거는 쓰러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달란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을 이웃을 위해, 나 자신을 위해 사용하면 좋습니다. ‘난 할 수 없어!’라는 말을 하기 보다는 ‘나도 할 수 있어’라는 말을 하면 좋습니다. 본당에는 성경 공부하는 모임이 있습니다. 부채춤을 배우는 모임이 있습니다. 사물놀이를 배우는 모임도 있습니다. 저도 팬데믹 때 배웠던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인생은 많이 소유한 것으로 존경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고, 이웃과 나눌 때 존경 받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건강관리입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합니다.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건강을 잃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스트레스는 면역력을 떨어트린다고 합니다. 늘 감사하며, 언제나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은 면역력이 강해집니다. 욕심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면 건강해 집니다. 이해 받기보다 이해하는 사람이 건강해집니다. 적당한 운동과 규칙적인 식사는 건강에 큰 도움이 됩니다. 아름다운 노년을 위해서 이 다섯 가지를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위한 방법도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이룰 수 있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먼저 화해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너그럽게 품어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이론이라도 결실을 맺기 어렵다고 이야기 합니다. 인간의 관계는 꼭 시비를 가려야만 해결되는 것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 남과 북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비를 가리려고 하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결을 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엉킨 실타래는 더욱 심하게 꼬이게 됩니다. 불가에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원망을 원망으로 갚으면 원망은 해결되지 않는다. 오직 참음으로써 원망은 해결되나니 이 가르침은 영원한 진리이다. 시비(是非)란 본시 그른 것만 취한다면 해결되지 않으며, 옳고 그른 것을 동시에 놓아버려야 끝이 난다 宗敎란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한자라고 합니다. Religion은 엉킨 실타래를 푸는 의미가 있는 영어라고 합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으로 세상사의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이 종교라면 그리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그리하여 참된 구원의 문에 도달하려면 꼭 是非를 가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듯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普施와 容恕 그리고 사랑이만이 냉각된 남과 북의 문제를 풀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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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그리고 이런 화해와 일치의 날에 복음은 함께 있음과 용서에 대해 말합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주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기도는 혼자일 때보다 함께 마음을 모아 봉헌할 때 그 힘은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일치 위에서 기도할 때 그 함은 더욱 강해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주님께 용서에 관한 질문을 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자신의 드넓은 관대함을 드러내려고 질문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일곱 번을 용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우리 뺨을 쳤다고 합시다. 혹은 누군가가 사랑하는 가족에게 죄를 지었다고 합시다. 우리는 몇 번까지 용서할 수 있을까요? 아니, 용서는 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일곱 번 정도 하면 되겠느냐고 사도 베드로의 질문에 주님께서는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이미 우리는 우리 삶을 통해 용서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용서했다고 머리로는 생각할 수 있지만 다시 비슷한 상황이 닥치거나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눈앞에 마주치게 되면 용서했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다시 불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보내는 날 용서에 대한 복음 말씀을 듣는 데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화해와 일치는 용서라는 은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용서 없이 화해와 일치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특히 전쟁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총과 칼을 들고 서로를 겨눈 것에는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습니다. 그 순간에는 모두가 서로에게 상처를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서로가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을 때 화해와 일치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용서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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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빵
하루는 사무실에 필요한 사무 가구를 사러 나갔습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간다는 말은
진리의 말씀과 동급의 선조들 지혜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나가던 길가에 있는 찐빵집에 들렀기 때문입니다.
그 찐빵집은 동네에서 유명한 곳입니다.
찐빵도 팔고 만두도 팝니다.
사실 저에게 찐빵과 만두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만두를 고릅니다.
만두를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찐빵을 골랐습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날따라 찐빵을 먹고 싶었습니다.
손이 작지 않은 터라 직원분들것까지 푸짐하게 담았습니다.
필요한 사무 가구를 사고 돌아와 아직도 따뜻한 찐빵을 나눠 먹었습니다. 역시 맛있었습니다. 맛있는 집이라 맛있었고 함께 먹어서 맛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이라 맛있는 것이고 그 누군가와 함께 나눠서 맛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든 음식이 행복함으로 맛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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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남북의 평화공존과 통일의 길
“기도하라, 사랑하라, 공부하라”
“주님,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이 시대에 평화를 주소서”
‘2024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 주제어로 연중 제2주일 본기도이기도 합니다. 곳곳에 만개해 있는 “화해”라는 꽃말의 개망초 야생화들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듯 합니다. 역시 기상하자마자 바치는 만세칠창중 하나입니다.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오늘은 6.25전쟁 제74주년이 되는 해로 제 나이 2세때 일어난 전쟁이요, 남북은 여전히 분단에 경직상태입니다. 아니 어느때 보다도 전쟁 발발의 위기상황입니다. 불신과 증오의 골이 너무나 깊습니다. 전쟁은 공멸일뿐 남북의 평화공존이 참으로 절박한 시절입니다. 남북의 통일보다는 남북의 평화가, 남북의 화해와 일치가 우선적임을 깨닫습니다. 한때는 남북의 동포가 공통으로 불렀던 ‘우리의 소원’ 노래가 생각납니다. 한번 조용히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겨레 살리는 통일, 이나라 찾는데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전쟁통일이 아니라 평화통일이요, 더디더라도 평화공존의 우선적 바탕위에 통일의 그날까지, 서로의 신뢰가 회복될 때까지, 평화통일의 희망을 간직하고 끝없는 기도와 인내의 기다림, 그리고 노력이 참으로 절실한 때입니다. 무엇보다 가톨릭 교회의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평화공존을 위한 지칠줄 모르는 항구한 노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담화문 일부를 소개합니다.
“전쟁은 악하고 부조리합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실제로 무력 충돌이 이어지는 가운데 대화와 협력으로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은 멀어지고, 군사력을 이용한 안보만 강조됩니다. 대화가 단절된 한반도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남북대화가 시작된지 이렇게 오랜 시간 소통이 단절된 적은 없다 합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갈등의 여파까지 냉전적 대결을 부추기는 형국인데, 이와같은 정세속에서 남북관계도 일촉즉발, 최악의 국면으로 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와 더불어 평화공존을 위해 힘껏 노력하는 일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가톨릭 신자들의 기도로 일상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신자들은 오늘 말씀을 바탕한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바른길을 놔두고 지름길만 찾으면 오래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된다’는 <다산>의 말씀처럼, 바로 다음 주님의 바른길을 택해 정진하는 것입니다.
첫째, “기도하라!”
평생 주님 '기도의 전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민족의 일치와 화해와 평화공존은 하느님의 은총과 도움이 있어야 가능하기에 기도가 우선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진리도 이런 기도와 삶에서 나옵니다.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도 이런 한결같은 기도의 열매입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기도를 강조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날마다 하루하루 평생, 온 세계가 주님 안에서 교회 공동체가 일치하여 동시다발적으로 끊임없이 거행하는 미사은총이, 또 온힘과 온마음을 다해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남북의 평화공존을 위해 바치는 미사은총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요!
둘째, “사랑하라!”입니다.
평생 주님 '사랑의 전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마음은 말과 행위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사랑할 때 깨끗한 마음, 가난한 마음, 행복한 삶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겸손과 온유, 용서와 평화, 회개와 겸손 모두가 성령의 열매이자 사랑의 열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용서의 사랑에 지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사랑의 구체적 지침이 됩니다.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 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말씀이 아름다워 전문을 인용하다시피 했습니다. 말한마디 천량빚을 갚는다 했습니다. 삶은, 몸은 정직합니다. 온삶과 온몸을 통해 표현되는 사랑입니다. 만병통치약이 사랑이고, 만병의 근원이 사랑 결핍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 사랑 안에 살아가는 것이요,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셋째, “공부하라!”
말씀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평생 주님 '말씀의 전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공부하고 지킴으로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공부에서 올바른 기도도, 올바른 사랑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경청- 묵상-기도-관상-실천"에 이르는 렉시오 디비나 성독 수행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신명기에서 모세의 말씀도 이와 일치합니다.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흩어진 상태에서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흡사 남북분단 대치상태에 있는 우리 한민족에게 주시는 말씀 같습니다. 특히 가톨릭교회 형제자매들은 엄중하게 받아들여할 말씀입니다. 마음을, 정신을 다해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공부하고 실천하며 명실공히 ‘말씀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본질적이요 중요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주님은 우리의 운명을 바꿔준다 하셨습니다.
남북의 화해와 일치보다, 남북의 평화공존보다 더 화급한 것이 총체적 난국에 처한 남남의 화해와 일치, 남남의 평화공존입니다. 이념상태의 극단적 대립을 보면 완전히 내전상태를 방불케 합니다. 극단의 대결과 대립, 분열과 갈등의 시대요, 참으로 남북에 앞서 남남의 화해와 일치, 통합과 평화가 화급한 상태입니다. 참으로 기도와 사랑과 말씀으로 무장한 주님의 기도의 전사, 사랑의 전사, 말씀의 전사로 살아야 할 우리 가톨릭교회 신자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민족의 화해와 일치로 이끌어 주시며 우리 모두 주님 평화의 전사로 살게 하십니다.
“주님, 흩어진 당신 백성, 한민족을 하나로 모으소서.”(예레31,10ㄷ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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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 함께 계시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미움이 아니라
사랑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가짐이 아니라
나눔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내침이 아니라
품음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가름이 아니라
이음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죽임이 아니라
살림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맞섬이 아니라
화해가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폭력이 아니라
평화가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분단이 아니라
통일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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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 18,19)
하늘과 땅의 화합
일치는 두 가지 면에서 이루어집니다. 먼저, 생각의 일치가 있습니다. 두 마음이 같은 것을 생각하고(사도의 표현입니다) 견해가 같을 때 이루어지는 일치지요. 둘째로 비슷한 식으로 살아가는 데서 오는 의지의 일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하는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무엇을 청했으나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기 땅에 있는 두 사람의 마음이 모이지 못했기 때문이 분명합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우리 탓입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삶의 방식이 하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하느님께서 …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지체들이 서로 똑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뼈합니다”(1코린 12,18.25-26)라고 하니, 우리는 하느님의 음악이 빚어내는 조화를 실현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모였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요 권능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실 것입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7 사람은 위대하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지혜 1,7)
이와 같이 우리 존채는 하느님과 재결합되고, 우리의 일도 그러하다. 존재하는 말씀은 우리를 자신의 근원으로 되돌려 보내되, 끊임없이 밖으로 흐름과 동시에 안에 머문다. 하느님의 젊음, 하느님의 새로움, 혹은 하느님의 영원이 이러한 합일의 시간을 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합일 속에서 하느님은 하느님을 재발견한다. “영혼 안에 있는 무한한 하느님, 그분만이 무한한 하느님을 이해한다. 영혼 안에서 하느님은 하느님을 이해하고,영혼 안에서 하느님 자신을 낳고 자신을 본떠서 영혼을 ‘만든다’. 그렇다면 “영혼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있고 … 내가 있는 곳에 하느님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변모하고, 일속에서 이러한 변모가 표현될 때, 주님의 영이 온 세상에 충만핳 것이고, 거기에서 일치를 확립할 것이다. 엑카르트는 영혼을 일컬어 “세상”이라고 부른다. 이는 그가 신봉하는 영성이 얼마나 우주적이고, 얼마나 외향적인지를 잘 보여 준다. 영혼, 곧 세상에서 “안”과 “밖”은 서로 스며들어 차이를 녹여 버린다. 영혼은 세상이 될 수 있고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고, 세상을 새로이 낳을 수 있다. 이처럼 영혼의 잠재력은 위대하다.
실로, 영혼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영혼은 하느님을 위한 넉넉한 공간, 곧 하늘 자체가 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이 거주하는 하늘이 되어야만 한다."(191)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나의 예수님, 이 성시간 기도에 저로 하여금 당신을 초대하게 하시니 감사드리나이다! 당신이 제 소리를 듣고 저를 준비시켜 주시니 고맙습니다! 생명을 다해 당신을 찬미하며 감사하게 하소서. 어서 오시어 저를 온전히 소유하여 당신의 빛으로 가득하게 하소서! 제가 당신의 빛을 드러내게 하소서.
저를 통해 가정 · 공동체 · 교회 · 세상에 들어오소서! 저로 하여금 당신이 말씀하신 산 위의 마을에서 빛나는 빛이 되게 하소서. 오시어 제 안에 빛을 비추어 다른 이들이 당신을 보고 발견하게 하소서!(침묵 기운데 특별히 축복과 치유기도를 바라는 이들을 예수님 앞에 봉헌한다.)
축복기도
주 예수님, 당신은 앓는 이와 죄인들, 당신을 멀리하고 또한
당신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나쁜 습관으로 인해 당신한테서 멀어지는 이들, 당신께 기도하거나
당신을 찾지 않는 이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믿나이다.
또한 악의 영향으로 떨어져 나간 사람들과 끊임없이 사악한 손길에 유혹되어
자신의 삶을 망치는 사람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믿습니다.
그들이 비록 당신의 뜻을 거스르고 당신을 부인한다 해도 당신은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손을 펼치시어 저희를 치유하소서! 저희를 비추어 성령의 은총을 내려주소서.
병들고 어두운 마음과 영혼을 어루만져 저희를 당신께 이끄소서!
환멸을 느끼는 마음과 홀로 내쳐진 이들,
그리고 당신과 이웃한테서 멀어진 이들을 찾아오소서!
세세에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예수님, 저희를 축복하소서! 아멘.(257)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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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해마다 6월 25일에 한국 교회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 전쟁을 기억하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우리 민족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주님의 자비를 청하며, 이 땅에 평화와 일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이 땅에는 아직도 전쟁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21세기에 무슨 전쟁이냐고 물을 수 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미얀마 내전 등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평화를 이룩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많은 이가 상대를 누르고 자신을 지킬 힘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방식이 아닙니다.
참평화는 용서와 화해로 이루어집니다.
힘은 근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2014년 유럽에서 테러가 일어났을 때, 그 테러에 대응하도록 주요 명소에 군인들이 배치되었습니다.
이는 테러를 예방하는 데 효과적이었지만, 도심에서 총을 든 군인들의 모습은 오히려 긴장과 불안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힘에 대한 더 큰 힘의 대응은 평화를 가져오기보다 더 큰 긴장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힘의 대결이 지속되는 한, 참평화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한반도의 상황도 그렇습니다. 북한은 미사일을 쏘며 힘을 과시하고, 남한은 군사 연합 훈련으로 이에 대응합니다.
더 큰 힘으로 서로 위협하는 이 상황에서 참평화를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평화를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실천할 방식을 제시합니다.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본받아, 형제의 죄를 일흔일곱 번까지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를 바탕으로 서로 화해하고, 대화로써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우호적인 태도와 그렇게 쌓인 신뢰가 참평화를 이루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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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18,1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북이 화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도하고,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남북으로 갈라진 지 어언 70년도 훨씬 넘은,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물리적 시간으로 생각했을 때는 꽤 긴 시간이지만, 우리 민족의 심리적 시간은 언제나 서로가 더 가까워지고 하나가 되길 바라는 짧은 기다림의 시간이었습니다. 명절 때면 가끔 이산가족 상봉을 보곤 하였지만, 이제 이마저도 중단되어 버린 상태입니다. 한때 남과 북이 참으로 소통하고 왕래할 날이 곧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 아닌 기대를 했었잖아요. 남북의 화해, 곧 남북통일은 우리 민족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이며 성취되어야 할 소원입니다.
복음은 우리 민족에게 남북통일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너희가 한반도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그러기에 예전 마더 데레사 성녀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남북통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길밖에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분열을 원하지 않으시는 주님께 남북의 모든 이가 한마음으로 그 어떤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고, 남북이 화해하고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18,19)라고 언약하신 대로, 두 사람 곧 남과 북이 함께 기도하면 꼭 남북통일은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서로의 화해를 위해서 긴장감을 조성하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에,4,29)라고 강조하듯이, 서로 좋은 말로 상대방에 도움이 되는 일을 지속적으로 실행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남북이 하나 되는 것을 저해하는 행위 곧 신뢰를 방해하는 악의惡意 찬 상호 비방을 중단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신뢰 회복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첫걸음은 바로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나 되는 방법으로 용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어느 날 남북통일 기원 미사 때 이렇게 강론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통일되길 원하십니까? 그러려면 먼저 옆의 형제들을 용서하십시오.” 사실 그분의 말씀은 우리의 정곡을 찌릅니다. 가족 간에 서로 미워하며 갈라지고, 이웃과 직장동료와 국회에서도, 또 교회에서도 서로 갈라지면서 통일 기원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한다고 한들 뭐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먼저 우리부터 서로 용서하고 하나가 되어야 더 큰 용서와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용서하라고 하시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고 화해하지 않을 때 따라오는 것은 관계의 단절입니다. 그러기에 용서할 횟수는 한편으로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죄의 크기, 다른 한편으로 그 사람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강도, 이 둘의 관계에서 결정됩니다. 한번 잘못하면 그것으로 관계가 끝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나를 속였다면 더 이상 그 사람과 만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친구라면 서로 잘못하고 다시 화해하고 하는 일들이 어느 정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족의 경우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흔히 ‘가족은 웬수다.’라고 말합니다만, 가족은 아무리 잘못해도 함께 살아야 할 피붙이기에 결코 단절하고 절교하면서 살 수 없습니다. 또 ‘부부 싸움은 칼로 물베기’ 라는 말이 있는 것은 아마 부부는 몇 번 싸웠다고 결별하고 이별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부부는 이혼하면 남남이 되겠지만, 형제 관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을 거치면서 가장 많이 다투는 것은 형제끼리입니다. 그러나 형제는 싸웠다고 갈라질 수 있는 관계가 아니잖습니까?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18,21) 라는 물음을 달리 표현한다면, “제 형제가 몇 번이나 저에게 죄를 지으면 형제 관계를 끊어버릴 수 있습니까 ?” 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일곱 번 ? 형제가 나에게 일곱 번 잘못하고 나면, 그 관계는 끝내야 할까요 ? ‘형제’ 라는 표현에 구체적으로 얼굴을 넣어 봅니다. 베드로는 안드레아를 내칠 수 있을까요 ? 형제와 다툰 경험이 있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흔일곱 번이라고 말씀하셨다 해도, 설령 형제가 일흔여덟 번 나에게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가 형제라면 화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과 북은 형제의 관계입니다. 설사 수많은 잘못을 했다고 하여도 쉽게 형제 관계를 끊어버릴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구약의 레위기 19장 17에 보면,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은 설사 형제가 잘못했다고 하여도 모르는 사람처럼 외면해서는 아니 되고 오히려 형제가 돌아오게 하여 함께 살아야 만이, 진정으로 형제 를 사랑하는 올바른 방법일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과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것, 이 두 가지는 그 형제를 내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통되고, 궁극적으로는 형제 라는 관계를 온전히 보전하기 위한 화해의 노력입니다. 복음에 의하면, 남북은 화해가 필요한 형제 관계입니다.
사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의 정권을 지배하는 김씨 가문과 이들을 떠받들고 살아가는 일부 사람을 적대시하는 것이지, 단지 북한에 살고 있다는 이유에서 모든 북녘 동포를 미워하고 적대시해서는 아니 된다고 봅니다. 남북통일은 정치적 이념 차이로 서로 갈라져 대립하는 우리 서로가 용서하고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마음에서 모든 응어리를 없애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충만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나라에 통일을 주실 것입니다. 통일, 통일 외치기 이전에 먼저 우리 마음이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리고 민족 화해를 위해 전심으로 기도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끝으로 우리가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용서의 시를 바칩니다.
『용서의 반대말은 증오랍니다. 믿는 사람은 용서하고, 믿지 않는 사람은 증오합니다. 증오를 하면 사람을 죽이고 용서를 하면 사람을 살립니다. 용서에는 사랑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듣는 사람은 용서합니다. 남의 마음을 헤아리면 용서가 됩니다. 그러나 듣지 않는 사람은 원망만 합니다. 자기만 알아달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남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기에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면 행복해집니다. 자기도 남도 해방시키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사람이 부족한 사람을 만나 용서하지 않으면 자기도 남도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 자기의 결핍을 인정하게 되면 남의 상처도 감쌀 수 있습니다. 나도 용서받아야 할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남을 용서합니다. 그는 자기의 약점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결코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는 자기의 약점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감사함도 없고, 긍정도 없고, 희망도 없습니다. 단지 남의 탓만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남이 용서해달라고 하기도 전에 용서합니다. 그는 남의 잘못 속에 숨겨진 자기의 잘못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용서도 없습니다. 용서는 망각도 아니고, 무시도 아니며, 덮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용서는 사랑할 때만 가능합니다. 사랑을 하면 섭섭함이 쌓이지도 않고 녹아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용서를 하면 또 하나의 용서를 낳습니다. 그런데도 난 용서해 주는 분량만큼 용서받는다는 것도 모르는 체 어리석은 인간이 되곤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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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화해와 일치는 오로지 용서로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2&id=2098382&menu=4770
박윤식 [big-llight] 2024-06-24 ㅣNo.173635
한 가족이 흩어져 생사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비극일 게다. 같은 민족 간의 전쟁은 많은 가족들을 이처럼 비참하게 흩어 버렸다. 6·25전쟁이 끝난 지도 70년을 앞두고 있어, 이산의 그 큰 슬픔을 느끼는 세대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이처럼 긴 세월이 흘러 분단의 고통도, 이산의 슬픔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 심리가 부담이 된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이를 용서하기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살다보면 미움은 자신과 남 모두를 몽땅 망가뜨리는 무서운 거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상처를 잊으려고 회피하거나 무관심해 보려고 하지만, 미움의 끝은 내가 없어지거나, 아니면 나의 상대인 그 남이 없어지거나 둘 중에 하나여야 될지도 모른다. 더 힘든 건, 서로 상처 받은 비슷한 상황에서 우리의 기억이 그 아픔을 시도 때도 없이 꺼내 반감을 부르고, 더 큰 분노로 그 상처를 주고받는다는 거다.
거듭 다져보지만, 같은 민족끼리 죽고살기로 상대를 향해 총을 겨누어 온 지도 어느새 60년이 훨쩍 넘었다. 세월이 흐르면 이 땅에 화해와 일치의 평화가 찾아오려니 그 기대가, 이제 다소간 그 시작의 낌새가 보이지만, 긴장과 갈등은 여전하다. 사실 지금껏 만나는 출구조차 못 찾아 이 구석 저 구석 쳐다보지만, 마음은 언제나 너희가 먼저라면서 뒷짐이었다. 이 와중에 죄 없는 북한의 형제들만 굶주림과 온갖 학대 속에서 고통을 겪는 것 같다. 남북은 여전히 끝도 없는 무기 경쟁을 해 왔다. 불행을 가져오는 군비 증강을 중단해야 전쟁은 끝내 사라질 게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저 북의 형제가 짓는 저 죄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나요, 일곱 번까지 하면 됩니까?’라고 묻는다면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분명히 답하시리라.
“일곱 번보다 일흔일곱까지도 용서하라.” 화해를 위해서는 끝없는 용서가 필요하단다.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을 닫는다. 닫힌 마음으로는 함께 대화고 기도고 도무지 할 수가 없다. 그게 지금까지의 ‘남북의 안타까운 관계’였다. 우리는 너무나도 오랜 기간 남북이 대치한 상황에서, 평화통일은 요원한 느낌마저 드는 게 솔직한 심정이기도 하다. 설사 그렇지만, 설령 그토록 간절한 통일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형제를 용서할 수 없는 적으로는 여기지를 말자.
따라서 화해와 일치를 위해 먼저 해야 할 게 용서다. 사실 용서한다는 게 그리 쉽지는 않다. 그 마음 안에는 깊은 상처가 남아 있기에. 그러나 그 상처를 치유하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용서이다. 나 스스로를 위해서도 용서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기쁨과 평화로 화해와 일치의 길로 가기에. 민족이 지닌 오랜 분단의 상처가 치유되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하자.
이것이 하느님 자비로 무한한 용서를 실천하는 신앙인의 유일한 길이다. 그러지 않으면, 자비의 하느님 계명을 끝내 저버리는 거다. 그러니 이제는 정치적인 선입관 같은 따위는 아예 접자. 미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다가가자. 그래야만 그분도 함께하실 게다. 남과 북이 함께 손잡고 기도하는 날이 화해가 시작되는 날이다. 갈라진 민족이 서로 화해와 일치를 이루길 바라며 기도하자. 주님의 은총으로 남북이 지혜를 모아 분단의 설움이 사라지도록 간절히 기도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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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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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김명겸 요한 신부님.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용서를 하는데 일곱 번까지 해야합니까?'
한 두 번은 할 수 있지만
일곱 번까지나 해야 하는지
묻는 것 같습니다.
한 두 번은 실수로 잘못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반복되는 상황에서는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실수라고 생각되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의도적으로 한다고 생각되는 상황에서는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용서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로 베드로가
완벽함을 의도했다면
예수님께서는 일흔일곱을 말씀하시면서
그 완벽함을 넘어가십니다.
우리가 부족한 인간이라는 것
완벽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일곱 번도 무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훨씬 더 완벽함을 요구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청원 기도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둘이나 셋이 모이는 것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 청한다는 것은
인간이 완벽하지 않음을
완벽하지 않아도 됨을 보여줍니다.
둘이나 셋이 모이는 것도
혼자의 힘보다 훨씬 낫기에
즉 혼자의 힘은 부족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아시는 분이
인간에게 완벽함을 요구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즉 용서는 내가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내가 아닌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마태오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분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만
완전한 용서를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용서를 하는데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용서하지 못하는 상황에 머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용서하기 힘들 때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 사람과 관계를 끊기도 합니다.
나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면에서는
이 방법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관계를 끊을 수 없는 상황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족이기도 하고
수도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특히 수도 공동체에서는
공동체를 바꾼다고 해도
그러한 상황은 여기나 저기나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그 상황에 잘 머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잘 머물기 위해서는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나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용서가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에게 전달됩니다.
그 사랑 안에 머물도록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우리가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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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분단의 벽을 넘어서는 일은 온몸이 으깨어질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담대한 용기로 실천해야 가능합니다!
또 다시 민족 분단이라는 우리의 가슴 아픈 현실을 돌아보고 기도하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이 돌아왔습니다.
통일로 가는 길목에는 넘어야 할 산봉우리가 한두 개가 아니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으시니, 오늘 모두가 합심해서 더 간절히 기도해봐야겠습니다.
같은 피를 물려받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한 동포인 남과 북이 갈라서서, 점점 더 멀어지기 시작한지 벌써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리적으로는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살아가지만, 심리적으로는 지구상 가장 멀리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제는 서로가 너무 낯선 존재, 이질감이 커져버린 존재가 되었습니다.
오늘 같은 날, 남북한 동포들이 다 함께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고민거리이자 역사적 과제가 한 가지 있으니, 분단고착화를 기정사실화하려는 분위기의 배척이요, 남북통일의 필요성에 대한 무감각을 경계하는 일입니다.
남북 분단 이후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니, 이제 사람들 머릿속에 통일은 불가능한 것인가 보다, 그냥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 보다 하는 의식이 점차 일반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분단의 고착화와 남북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는 반민족 세력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통일은 자신들이 오랜 세월 쌓아온 입지와 기반을 흔드는 일이니, 결코 있어나서는 안 될 일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눈만 뜨면 어떻게 해서라도 남북 간의 갈등과 긴장을 조장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같은 날, 안타깝게도 분단고착화 세력에 희생되신 백범 선생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마음 깊이 담고 지내야겠습니다.
“분단된 동포를 하나로 만드는 것은 이 시대 새로운 독립운동입니다.
통일 운동은 곧 제2의 독립운동입니다”(백범 선생)
한반도의 평화통일은 다른 그 누구의 과제가 아니라, 남북 당사자들 사이에서 해결해야할 문제입니다.
남북을 둘러싼 주변국가들 겉으로는 반기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지속적인 분단을 원합니다.
한반도의 분단이 곧 그들의 국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의 내밀한 가정사에 대해 옆집 이웃들이 끼어들어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 얼마나 기분 나쁜 일이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처한 형국이 똑같은 현실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히 남북문제의 주도권을 우리 손으로 가져와야 마땅합니다.
70여년 이상 분단고착화로 인한 남과 북의 증오와 대립, 불신으로 우리는 북한에 대하여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왜곡, 날조된 정보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이른 바 우리는 북맹(北盲) 상태입니다.
북한에 대하여 증오와 불신으로 눈이 멀어 아무것도 아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북녘 동포들을 좀 더 알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단의 벽을 넘어서는 일은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온몸이 으깨어질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담대한 용기로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우리 한민족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이제는 그만 분단의 세월을 끝내고, 조속한 평화 통일을 선물로 주시라고 열심히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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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기도와 용서
오늘 독서 복음은 한국 가톨릭교회가 남북통일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통일을 준비하는 자세가 담겨있다. 회개와 용서를 통한 사랑의 생활과 믿음의 기도로써 민족화합과 통일을 기원하자. 일제의 손에서 우리에게 광복을 주신 하느님께서 자비로이 평화통일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회개하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으며 사랑의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듯이 서로 용서하라고 하며 분노와 욕설과 악의를 내어버리라고 한다. 북한의 위협적인 태도가 용서와 신뢰를 회복하기에는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북한의 어떤 주민이 “남한과 미제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이대로 폭삭 망하는 것이 낫겠다.” 한 기사는 그들 또한 우리를 두려워하고 못 믿고 용서 못 할 자들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북은 서로를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의 자유, 복지와 평화 그리고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안보 의식을 굳게 가져야 한다. 그러나 상호 용서를 통해 민족이 화해할 때 그 이상의 안보와 평화는 없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먼저 마음으로 용서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복음에서는 기도와 용서를 가르치신다. 기도는 통일과정에 필요한 교회의 역할 가운데 가장 우선적인 선택이다. 기도하면서 남북의 화해를 이루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에 앞서 우리는 우리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화해하지 못한 형제가 있으면, 이 미사의 은혜로 서로 화해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하도록 하자.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누군가를 오랫동안 용서하지 못하고 또 화해하지 못하고 끝내 이 세상을 떠나보낸 적이 있다. 그때는 그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기도하던 중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와 화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냥 모른 척 부딪히지 않고 관심 두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그와 화해하고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마음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하느님과 가까워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사랑하는 아드님을 통해서 나를 용서하셨고, 그런 나를 받아들여 주신 하느님 앞에 나는 그를 더는 미워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얼굴을 맞대고 손을 먼저 내밀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내 마음이 열리기를, 용기가 생기기를 기도하였다. 하루 이틀 미루던 중 갑자기 떠나버린 그를 앞에 두고 뒤늦게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어리석게도 ‘내가 화내는 이유는 너무나 정당한데 왜 내가 먼저 화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자꾸 던졌던 내게 하느님은 아무 말 없이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나를 용서해 주시지 않았는가?” 하였다. 기회는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다. 은총의 때를 잘 알고 그 순간에 우리는 용기를 내어서 다가가야 할 것이다.
별 뚜렷한 근거 없이 낙관하는 통일관은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장벽에 좌절한다는 것은 우리의 희망을 빼앗아 간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통일을 이루어 주시도록 겸손과 인내로 기도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랑의 생활할 때 통일은 성큼 우리에게 다가와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사회가 서로 용서하고 화합할 수 있도록 우리 신앙인들이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먼저 화해하지 못하고 일치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북이 통일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먼저 우리 사이의 관계 개선을 위해, 그래서 일치되도록 노력하자. 이것이 남북통일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항상 하느님의 일,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말씀을 선택하여 실천하는 삶으로 우리나라의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결심하며, 오늘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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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우리는 통일이라는 선물을 받을 준비가 되었는가?
오늘은 남북통일 기원 미사입니다.
남북통일은 우리가 하는 것일까요?
우리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선물의 가치를 아는 이에게 그 선물을 주십니다.
동서독의 통일되는 과정을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통일은 정말 선물과 같이 왔습니다.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치국 귄터 샤보프스키 의원이 동베를린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그는 동독인들이 해외여행을 위해 비자를 더 쉽게 신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새로운 여행 규정을
발표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샤보프시키는 일설에 의하면 전날 술을 많이 마셔서 새로운 규정의 세부 사항과 시기에 대해 충분히 설명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기자회견에서 한 언론인은 샤보프시키에게 새로운 규정이 언제 발효되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자기 발표문을 여기저기 뒤적이다가 다소 불확실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내가 아는 한, 지체 없이 즉시 발효됩니다.
이 발언은 틀렸으며 동독 정부를 포함해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해당 규정은 즉각 시행되지 않고 점진적으로 순차적으로 시행되도록 의도됐습니다.
샤보프스키의 성명은 TV와 라디오로 생중계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수천 명의 동베를린 주민들은 베를린 장벽을 통과할 것을 요구하며 베를린 장벽으로 달려갔습니다.
갑작스럽고 대규모의 인구 유입에 대비하지 못한 국경수비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명확한 명령도 없이 늘어나는 군중에 직면한 그들은 결국 문을 열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개방되었고 이 물결은 더는 막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이후 몇 달 동안 협상과 외교적 노력이 강화되어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공식적으로 통일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나라도 이렇게 갑작스러운 선물처럼 통일의 물꼬가 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북한 주민들이 수없이 철책을 넘어온다면 우리는 기쁘게 맞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을까요? 어떤 이들은 내가 왜 그 많은 통일비용을 내야 하느냐며 통일을 반대합니다.
앞으로의 치안과 전체적으로 나라가 가난해질 것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미 결혼도 안 하고 자녀를 낳지 않아 소멸해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통일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되면 새롭게 국민들의 마음도 변화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통일비용이 많이 든다고 통일을 반대하는 이들은 장기적으로 북한과의 대립으로 우리가 소비해야 하는 군사비용이나 핵무기의 위협과 같은 감정적인 부분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질적으로도 관광적으로도 기대되는 이익도 엄청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건 북한을 이용하기 위한 것 아니냐, 우리가 북한이 불쌍해서 통일해주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관계는 쌍방의 고마움을 전제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존심을 비굴해지느니 죽는 것을
선택합니다.
로마에 끝까지 맞서다 나중에 집단으로 자살했던 마사다 항쟁을 생각해봅시다.
아니면 영화 ‘300’에서 자신은 관대하다는 페르시아 장군에게 목숨을 잃더라도 끝까지 저항한 몇 안 되는 스파르타 군인들을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북한에게 다가갈 때는 우리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갑작스러운 선물로 통일의 물꼬가 트일 때 서독인들처럼 기쁘게 동독 사람들을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만약 나의 배우자가 “너 나 아니었으면 거지로 살았을 거야?”라고 한다면 그래도 그 사람과 살겠습니까?
통일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이 통일이 우리에게 더 좋다는 전반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회가 오면 내분이 없이 바로 통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통일이라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도 마찬가지고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하고 자녀를 낳는 것이 더 좋다는 믿음이 먼저 있어야 그 선물도 받을 수 있습니다.
분명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서독에서는 통일의 이점이 어려움보다 크다는 것이 전반적인
공감대였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몰려올 때 우리가 기뻐 뛸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통일의 준비가 된 것이고 이때 우리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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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서로’가 아니라 ‘내가 먼저’입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1) 신자들 사이에 분쟁이 생긴 경우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가
했던 말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다른 사람과 문제가 있을 때, 어찌
성도들에게 가지 않고 이교도들에게 가서 심판을 받으려고
한다는 말입니까?(1코린 6,1)”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형제들 사이에서 시비를 가려 줄 만큼 지혜로운
이가 하나도 없습니까? 그래서 형제가 형제에게, 그것도
불신자들 앞에서 재판을 겁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서로
고소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그릇된 일입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왜 차라리 그냥 속아
주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도리어 스스로 불의를 저지르고
또 속입니다. 그것도 형제들을 말입니다(1코린 6,5-8).”
여기서 ‘불신자들, 이교도들’을 ‘다른 나라’, 또는 ‘외세’로
바꾸면, 이 권고는 우리 민족의 문제에도 잘 적용이 됩니다.
<‘어찌 이교도들에게 가느냐?’ 라는 말을, ‘어찌 무력으로
해결하려고만 하느냐?’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2) “왜 차라리 불의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왜 차라리
그냥 속아 주지 않습니까?” 라는 말은,
불의와 악을 방관하거나 방치하라는 뜻이 아니라,
형제애를(사랑을) 먼저 생각하라는 권고입니다.
그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8-39).”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3-44).”
<이 가르침에 대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개인 간의
사적인 문제에서 실천하는 것도 힘들지만, 국제 문제에서
실천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고, 특히 남북문제에서 실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은, 사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자들입니다.>
3) 남북문제의 해법은 “서로 용서하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화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긴 한데,
‘서로’ 라는 말에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남의 일’이라면 ‘서로’ 용서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일’에 대해서는
“서로 용서해야 한다.”가 아니라
“내가 먼저 용서한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남북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입니다.
<성경에 있는 예수님 말씀에서 ‘서로’ 라는 말은,
가르치는 입장에서 사용하신 표현일 뿐입니다.
뜻으로는 ‘네가 먼저’입니다.>
그는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내가 먼저 그를 용서하는 것,
또 그는 나를 이해해 주지 않아도, 내가 먼저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는 나와 화해하기를 바라지
않아도 내가 먼저 그와 화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만이 용서와 화해를 실현하는 방법입니다.
개인의 사적인 문제에서도 그렇고, 국가 간의 문제에서도
그렇고, 특히 남북문제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언제나 항상 ‘내가 먼저’입니다.
4)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에 대해,
“우리가 이렇게 긴 세월 동안 간절하게 남북통일을
염원하면서 기도하고 있는데도 왜 통일이 되지 않는
것인가?” 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진지하고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로 마음을 모으고 있는가?”
전 국민이 정말로 한마음으로 평화를 원하고,
통일을 원하고, 화해를 원하는가?
사람들 가운데에는 전쟁을 원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평화통일이 아니라 무력통일을 주장하는 자들도 많지 않은가?
그리고 사실 통일 자체에 관심이 없거나,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제대로 모으지 않고 있는데,
무슨 염치로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도
심각하게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려면,
그리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바란다면,
우선 먼저 예수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가장 먼저 할 일은 ‘우리의 회개’이고,
‘나의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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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남북 통일 기원미사] 마태 18,19ㄴ-22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오늘 우리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맞아 ‘남북 통일 기원미사’를 봉헌합니다.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한국전쟁으로 인해 분단된 우리나라는 아직도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건과 상처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또 그로 인해 서로를 향한 미움과 오해가 얼마나 깊어졌는지 모릅니다. ‘나만 옳고 넌 틀렸다’는 태도로 상대방을 폭력으로 굴복시켜서라도 억지로 내 말을 듣게 만들려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나와 다른 상대방을 이해하고 포용하기보다는 배척하고 제거하려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으로 일치되어 함께 살아야만 제대로 살 수 있는 한 민족, 한 가족입니다. 이를 생각하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용서의 메시지를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겁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상대방이 나에게 저지른 실수와 잘못에 대해 입으로는 용서했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마음으로는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막상 그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거나 목소리를 들으면, 그 때 그가 나에게 입힌 상처와 아픔이 떠올라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그를 향한 미움과 분노가 솟아나 그를 보고 싶지 않아지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얘기가 좀 달라집니다. 내가 상처받은 걸 몰랐다고 합니다. 나에게 상처 입히려고 그런게 아니라고 합니다. 본인의 입장과 상황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그런 피해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상처를 준 사람과 상처를 받은 사람의 입장이 서로 다릅니다. 또한 자기가 누구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 이들은 많은데, 정작 자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말하는 이는 별로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 인간은 상황을 자기 위주로,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모르는 사이 나에게 상처를 입힌 만큼,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단지 내가 내 상처만 바라보느라 다른 이가 받은 상처를 헤아리지 못할 뿐이지요. 이를 깨닫는다면 이해와 사랑의 마음으로, 연민과 감사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저에게 상처를 준 저 사람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를 용서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너무나 힘이 들지만, 마음이 억울하고 괴롭지만, 당신께서 먼저 저를 용서하셨기에, 제가 살면서 관계 맺은 많은 이들로부터 저도 용서 받았기에, 저도 힘을 내어 용서해보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는 베드로의 질문에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는 넓은 아량으로 그의 잘못을 한 번 눈감아 주는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한도를 정해놓고 일정 횟수 만큼만 참아주는 건 용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걸 용서라고 착각하며 일흔 일곱번이나 반복하다가는 내 마음 속에 천불이 나서 만신창이가 될 겁니다. 용서는 상대의 잘못을 참아주는게 아니라, 그런 잘못을 저지르는 그 사람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이해와 포용이 그 사람을 변화시키고 또한 그를 바라보는 나를 변화시킵니다. 그를 통해 나의 부족함과 잘못을 돌아보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이에게 ‘용서해달라’고 청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기는 겁니다. 또한 내 마음 속에 타오르던 분노와 증오의 불을 꺼뜨려 나를 살리지요. 그러니 나부터라도 ‘네 탓이오’말고 ‘내 탓이오’를 먼저 했으면 좋겠습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라는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해 먼저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 형제 자매들을 용서하고 나도 용서를 청하며 화해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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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민족분단의 아픔이 벌써 70년의 세월이 지나고 있습니다.
한 민족이면서도 주위의 강대국에 의해서 분단의 역사가 시작되고 한 세대가 지나가고
또 다른 세대가 와도 통일의 길은 다가 올 듯 하면서도 아직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
오지 않습니다.
무력의 전쟁이라는 해법으로 이 나라를 휩쓸고간 자리에는 폐허와 커다란 상처들만이
남았습니다.
전쟁은 예술도 논리도 아닌 그저 눈도 코도 없는 괴물처럼 무지막지하고 잔혹한 탱크 궤도와
같은 것이지요.
그것이 지나가면 무엇이든 짖눌리고 파괴되고 맙니다.
그 전쟁이 어떻게 진행 될지도 모르는 어느 날 현실로 다가온 것이 휴전이었습니다.
이러한 휴전의 과정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풀기 어려운 민족의 과제로 우리를 짖누르고
있습니다.
머나먼 사막을 가로지르며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만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급한 마음에 당장 물을 찾고 먹을 것을 마련하다 보니 하느님의 명령은
저 만치 비껴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시려 하십니다.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신명 30,1-3)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장차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실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의 참된
번영의 날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서로 한 마음이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 안에서 그 예를 보여주었듯이
정치적인 것이 아닌 참된 조국애가 바탕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서로 신뢰를 회복하고 갈라진 차이를 서로 인정하고 받아들이 데에서 통일의
확고한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런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에페 4,32-5,1)
사도 바오로는 서로 사랑하는 기반을 그리스도께서 당신 생명을 십자가에 제물로
내 놓으신 것으로 삼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당신 생명을 제물로 바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우리도 주님의 말씀에 따라 먼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때 그 때마다 ‘무한히 용서해야 한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위가 지키기에 참 힘든 사랑의 과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에서 먼저 우리가 서로 용서하는 것을 전제로 하십니다.
분단의 아픈 역사 앞에서 우리는 서로의 잘못과 차이를 말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손을 내미는 화해를 전제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아픈 우리의 정치 역사는 서로에게 있는 차이를 부추기고 반대의 감정을
부추기기에 바빴습니다.
이제 우리는 서로 신뢰를 구축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용서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온유의 마음을 지녀야 하지요.
한 둘이 모여서 청원해도 들어주신다고 하신 주님께서 우리가 서로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며
통일의 날을 주시기를 청하면 꼭 들어주시리라 희망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때가 다가 왔습니다. 모두들 힘을 내고 차분한 단계를 쌓으며 통일을 이룩하는 날을
꿈꾸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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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복음의 열정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삶
<2024.6.25> 아침을 여는 묵상(행 26:1~18절)
❚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열정은 좋은 것이지만, 잘못된 방향인데도 열정적인 것을 사태를 악화시킵니다.
✔ 어떠한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까?
➲ 부활을 기다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1~8절).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자 바울은 유대인들이 고발한 내용을 가지고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기를 바라며 변호하기 시작했습니다(1~3절). 바울은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의 중심부인 예루살렘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음을 강조합니다. 또한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에 정통하다고 자부하며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왔음을 자신이 고발한 그들이 증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4~5절). 바울은 유대 조상들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성취되기를 소망하는 까닭에 자신이 심문을 당한다고 말했습니다(6~7절). 이제 바울은 좀 더 공격적인 질문을 던지며, 하나님이 죽은 사람 살리시는 것을 왜 믿지 못하느냐고 반문합니다(8절). 하나님의 부활을 믿는 자들은 죽어도 죽은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분이심을 지각하지 못하고, 그 진리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이들이 진정 죽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든지 어떤 자리에 있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존귀하게 높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양심에 확정된 주의 복음을 거슬러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어도 그리스도의 것이고, 살아도 그리스도의 것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확고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핍박이 예견되어 있다 할지라도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김으로 복음 전파를 멈추지 않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 부활 생명을 가진 자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의 문화와 환경에 매몰된 삶에서 벗어나 부활의 소망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부활을 간절히 기다리는 믿음으로 순례자의 길을 걸으며, 그때까지 복음의 열정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사명을 감당하는 열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9~12절).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죽은 사람을 살리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전에 바울은 나사렛 출신의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그분을 추종하는 자들을 대적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9절)하며 살아왔습니다. 바울 자신은 대제사장들에게 권한을 받아 많은 성도들을 감옥에 가두었고, 그들을 죽이는 일에 찬성했습니다(10절). 회당마다 찾아다니면서 그들을 처벌했고, 강제로 예수님을 모독하도록 했고, 그들을 향한 분노가 얼마나 심하였던지 다른 도시에까지 찾아다니면서 그들을 박해하였다고 말합니다(11절). 그러다가 대자세장들에게서 권한을 위임받다 다메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12절).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특징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들에게는 인정받는 것일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삶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리의 복음을 믿지 않고, 자기 스스로 열심을 내는 종교와 윤리는 겉으로는 훌륭해 보일지는 몰라도 결국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삶이라는 것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잘못된 열심은 잘못된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잘못된 열정은 많은 사람들을 절망과 죽음으로 몰아넣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아울러 많은 유대 사람들과 율법에 정통하다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고, 그들의 잘못된 열정은 자신들은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멸망하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영적 지도자들의 잘못된 열정과 열심은 곧 교회 공동체를 큰 혼란에 빠뜨리게 됩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진리를 배워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내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잘못된 열정은 없는지 돌아보고, 하나님을 위한 진정한 열정으로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여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므로 복음의 열정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복음의 능력으로 담대하게 살아가야 합니다(13~18절).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사건을 설명합니다. 해보다 밝은 빛과 소리로 바울과 그 일행들에게 다가왔는데, 그분이 바로 바울이 핍박하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다메섹은 핍박하기 위해 가던 바울의 걸음을 주님을 위해 살도록 생의 목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살기등등하던 다메섹 도상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변모했습니다(13~15절). 예수님은 바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전에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살아왔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명하신 일을 감당하는 일꾼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바울에게 주신 사명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가서 그들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고, 사탄의 권세에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며 그들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하고, 또한 예수님을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는 일이었습니다(16~18절).
복음이 가진 은혜의 충만함은 삼중적으로 나타납니다. 죄인들을 돌이키시고, 죄인들을 용납하심으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며, 약속된 나라를 상속해 주신 복음의 은혜는 죄인들의 회개와 믿음과 그 나라를 상속한 자로서 사는 삶을 통해 더욱 풍성해지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남은 생각이 변하고 삶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핍박하던 바울에게 영광스러운 사명을 부여해 주신 것인 가장 거룩하고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그릇에 담긴 물건에 따라 그릇의 용도와 가치가 결정이 되는 것처럼 질그릇 같은 우리에게 고귀한 복음이 담겨져 귀한 일에 쓰임 받고 있음에 늘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복음은 생명력이 있기에 진정한 복음을 소유한 사람은 당당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 담대함으로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잘못된 열정은 없는지 돌아보고, 하나님을 위한 진정한 열정으로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여 살아갈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과 진리를 온전히 깨닫는 진정한 열심을 통해 복음 안에서의 열정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행 26:1~18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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