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노비열전(朝鮮奴婢列傳)
가혹한 신분제도의 구속에서 몸부림 친 노비, 노비를 마소처럼 취급한 양반들의 위선... 조선의 멸망은 시대 탓이나 외침 탓이라기보다는 잘못된 신분제도에 있었다.
이상각. 태안生. 시인. 역사 관련 저술가. 저서 『생각이 사람을 바꾼다』『효명세자』『조선역관열전』『1910년 그들이 왔다』등.
굴종의 역사, 저항의 미래.
불과 100년 이전까지 조선에서는 부모 중 한 사람만 노비라면 대대손손 노비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恨은 방방곡곡 넘쳐흘렀다.
우리 나라 고대에는 천역이 대부분 당대에 국한되었고, 당사자의 의지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元나라에 부역하거나, 무신정권의 마름으로서 사회 최상위 계급에 진입하기도 했다.
그중 강윤충은 관노에서 정1품까지 올랐고, 충숙왕의 모후, 재상 조석견의 아내 장씨 등과 간통하다 구설수에 오르자 조사하러 온 元나라 환관 고용보를 구워삶아 한통속으로 조정을 농락한 간웅이었다. 이런 강윤충의 친형 강윤성의 딸이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이 되어 조선 건국의 어머니 역할을 했던 신덕왕후 강씨다. 조선 초기 왕실에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는 뜻이다. 그녀의 아들 이방석을 후원했던 정도전 역시 고려 사대부들이 제기한 혈통문제로 시달렸다.
조선의 대다수 노비들은 운명에 순응했지만, 송익필,장영실,장옥정,정난정,장녹수 등은 제도의 허점, 인간적 의지, 거센 저항을 통해 팔자를 바꿨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겉으로는 위민정치를 내세웠지만 실상은 폭압적인 공포정치를 바탕으로 500년 내내 양반만의 태평성대를 누렸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어떤가? 굴종하는 이들의 천국, 저항하는 이들의 지옥, 대체 溫故知新의 한국사는 어디에 있는 걸까?
프롤로그 - 조선은 동방노예지국이었다.
전쟁과 반란이 속출했던 고려시대에는 신분역전의 기회가 많았던 만큼, 노비들의 정계진출도 활발했다. 그러나 고려말기에 들어서 귀족들의 무분별한 노비증식과 매매가 성행하자 비인도적인 노비제도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사대부들의 반대로 누차에 걸친 노비제도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로 인한 부작용은 조선으로 고스란히 전이되었다.
元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기어코 노비제도를 고수했던 고려 귀족들처럼, 조선의 위정자들은 오히려 노비제도를 개악해 부를 확대하기까지 했다.
실로 조선이란 나라는 예를 하늘처럼 받드는 동방예의지국인 동시에, 동족을 노예로 부린 동방노예지국에 다름 아니었다.
조선은 개국 초기 事大交隣 정책으로 대외관계를 안정시켰지만, 노비들에게는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오랜 이민족의 지배체제에서 벗어나 건국한 明은 전통적인 노비제도를 혁파해 노비신분을 당대로 제한했지만, 조선에서는 천역을 세습화했다.
조선의 지배세력은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숭상하면서도 노비제도만은 철저하게 고수했다.
조선의 양반들이 노비제도를 정당하다고 주장한 근거는 고조선의 팔조금법이었다. 고대 기자가 사회정화와 문명개조 차원에서 노비제도를 들여왔다고 주장하며 事大를 이용한 것이다.
"성인께서 노비제도를 만들어 이 땅에 귀족과 천민을 구분함으로써 신분의 혼란을 막았다." - 정인지.
"성인이 노비제도를 만든 건 인간을 격하시킨 것이 아니라, 도덕성을 고양하기 위한 조치이므로 노비와 주인은 국왕과 신민의 관계와 같다." - 하위지.
조선 노비제도의 원천인 신분제는 班常制와 良賤制라는 이원적 구조로 출발했다. 법제적으로는 크게 兩班과 常民으로 반상제를 내세우면서, 良人과 賤民이라는 양천제를 병행했던 것이다. 이후 良人은 다시 兩班,中人,常民으로 분화되었다.
兩班은 東班과 西班의 합성어로 초기에는 문무 관리들을 일컬었지만, 시대변화에 따라 4대조 중에서 종5품 당상관 이상의 관리를 배출한 집안으로 의미가 축소되어 良人과는 다른 신분이 되었다. 兩班은 문과에 응시할 수 있고, 토지세,경작세,노역을 면제받는 특권층이었다.
"토지를 경작해 조세를 바치는 것은 良人의 일이요, 도를 배워 직무를 닦고 공세를 먹는 것은 士君子의 일이다." - 유형원.
中人은 주로 하급관직의 실무계층이었다. 잡과를 통해 통역,법률,의료,천문,예술 등의 분야에 종사했는데, 특정 가문이 세습함으로써 신분상의 기득권을 유지했다. 특히 지방의 中人인 향리들은 임기가 정해진 수령들과 결탁해 백성을 수탈함으로써 민심이반을 부추기기도 했다. ☞ 전문가 집단.
常民은 국역을 거의 전담했던 하층민으로 통상 농민,상인,賤役 등을 일컫지만 대다수는 농민이었다.
賤民은 최하등 계급으로 공노비,사노비가 대다수였으나 기타 승려,백정,무당,광대,상여꾼,기생,工匠 등을 들 수 있다.
1592년의 임진왜란은 조선의 방자한 內政과 무심한 外治에 떨어진 철퇴였다. 도덕성을 상실한 위정자들의 내분, 주체성을 상실한 대외정책, 탐욕스런 관리들의 무능과 부패, 그로 인한 양인들의 조세와 良役의 누수 등 수구세력 집단이기주의로 빚어진 조선은 부패종합세트였다.
그러나 7년에 걸친 국토의 유린, 수십만 백성들의 죽음, 전대미문의 참화에도 불구하고 지배층의 의식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당쟁은 다시 격화되었고, 사대주의는 심화되었다. 그 와중에 자주외교를 추구하던 광해군은 서인들의 쿠데타로 쫓겨났다. 인조와 서인들은 현실을 무시한 외교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자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성은 없었다. 오히려 치욕적인 항복 과정에서 불거진 선명성 논쟁에 골몰했다.
兩難으로 노비문서가 불탔고, 국가행정력이 부족해 도망 노비들이 속출하고, 신분세탁이 쉽사리 가능해졌다.
고종23년(1886) 노비세습과 노비 소생의 매매를 금지하는 부분적인 조치가 시행되었고, 고종31년(1894) 친일 내각이 강제한 갑오개혁을 통해 신분제가 공식 폐지됨으로써 노비들은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재정적 뒷받침 없이 해방된 노비들은 고통스럽게 근대의 여명기를 헤쳐 나가야만 했다.
1. 개천에서 용 난다.
양반이 양첩(良妾)으로부터 얻은 자식이 서(庶)이고, 비첩(婢妾)으로부터 얻은 자식이 얼(孼)이다.
무장으로 盡忠報國했다는 뜻의 忠武公 시호를 받은 인물은 한국사에 12명이나 된다. 고려 현종 때 지용수, 태종의 심복 조용무, 예종 때 남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 김시민, 정묘호란 당시의 천민출신 정충신 등이 있다.
2. 전설이 된 사람들
고려시대에는 노비끼리의 결혼만 용인되었을 뿐 노비와 양인의 결합은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노비와 양인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이 늘어나자 어미의 신분을 따르는 종모법(1039)을 채택했다. 그러다 고려 중반부터는 부모 중 한쪽이 노비라면 무조건 노비로 삼는 一賤卽賤 규정을 시행했다.
조선 초기에는 양인 수의 증감에 따라 免賤法,從父法,從母法을 시행하다가 세조 때는 一賤卽賤이 복구되었다. 성종 때에는 인구 340만 명에 노비의 수효가 150만 명에 달했다. 광해군 때 울산의 6개 군,면의 호적에 2,009명 중 48.6%가 노비로 기재되어 있다. 良人으로 군역을 담당하는 수가 적어짐에 따라, 조선이 兩難을 통해 뜨거운 맛을 보게 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양반들의 가장 보편적인 노비증식 방법은 압량위천(壓良爲賤), 즉 권력을 이용해 양민을 몰락하게 한 다음 고리대를 통해 노비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과중한 국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양민들이 자진해서 권세가의 노비가 되는 투탁(投託)과 함께 국가재정을 좀먹는 주요 범죄였다.
조선시대 노비들을 세는 단위는 몇 명이나 몇 인이 아니라 몇 구(口)였다. 노비에 대한 명칭도 生口였다. 어쩌면 우리가 즐겨 쓰는 食口라는 말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는지 궁금하다.
3. 우여곡절 女人史
태조의 후궁 화의궁주 김씨, 태종의 후궁 효빈 김씨와 소빈 노씨, 세종의 후궁 신빈 김씨, 세조의 후궁 박씨, 연산군의 후궁 장녹수, 광해군을 모신 상궁 김개시는 모두 노비 출신이었다. 숙종의 왕비 장희빈은 얼녀(孼女)였다.
문종의 딸이자 단종의 친 누나인 경혜공주는 관노로 전락했다가 회복되었다.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딸 이구지는 노비를 사랑해 사사당했다.
도총관 정윤겸과 관비 출신의 소실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난정은 從母法에 따라 출생과 동시에 관비였다. 그녀는 타고난 미모와 재기를 바탕으로 당찬 결의를 구현했지만, 양반 중심의 역사는 그녀를 나라를 망친 희대의 妖女이자 蕩女로 기록해 놓았다. 유교 근본주의 사회에서 極惡의 표본으로 지목했던 불교를 되살려 놓았던 문정왕후와 보우대사의 인연도 그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에 한몫을 했다.
조선의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의 이권에 도전한 인물이라면 철저하게 응징했다. 첫째가 인격모독, 둘째가 사회혼란, 셋째가 역사에 파렴치한 인물로 낙인찍는 것이었다. 정난정도 이 복수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역적 윤원형에 기대어 본부인 연안 김씨를 독살하고 정실의 자리를 차지했으며 올곧은 선비들을 탄압한 을사사화 배후에 그녀의 모략이 있었다는 것이다.
반정으로 즉위한 중종 시대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투쟁이 격렬하게 펼쳐졌다. 공신들이 점차 세상을 떠나자 중종은 사림의 조광조를 기용해 일대 개혁에 돌입했다. 그러나 舊態依然한 도학정치에 염증을 느낀 왕의 변심과 훈구파의 반격으로 조광조는 기묘사화(1519)라는 역풍을 맞았다.
1510년 남쪽에서 삼포왜란과 사량진왜변이 이어지고, 북방에서도 야인들의 내습이 반복되자 조정에서는 외침에 대비해 임시기관으로 비변사를 설치했다. 이때부터 조선은 고종 때까지 항시 전투태세를 유지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이어졌다.
바로 이때 조선의 일대 여걸 문정황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중종의 조강지처는 반정 때 참살당한 신수근의 딸 단경왕후 신씨였는데, 공신들의 압력으로 폐위되었고, 제1계비인 윤씨가 왕비로 책봉된 장경왕후 윤씨는 1515년 세자(인종)를 낳고 6일 만에 죽었다. 이후 1517년 윤지임의 딸이 왕비로 책봉되었던 것이다. 그녀가 문정왕후 윤씨다.
1521년 중종의 맏딸을 며느리로 삼은 김안로가 세력을 얻자 심정,남곤이 그를 견제했다. 이들의 이전투구가 극에 달할 때 장경왕후 윤씨의 친척 윤임과 문정왕후 윤씨의 친척 윤원형,윤원로 등이 출사하면서 훈신과 척신 간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이들의 승부는 윤씨 일가의 압승으로 귀결되었고, 그 여파로 사림의 일부가 조정에 복귀했다. 하지만 정사는 외척들이 좌우했다. 이 무렵 정난정과 윤원형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문정왕후의 수태불공을 드리러 봉은사에 갔던 윤원형은 보우대사의 소개로 경국지색의 여인을 알게 되는데 첫 눈에 반했다. 도총관 정윤겸을 찾아가 소실로 달라고 간청했지만, 정난정은 순순히 응하지 않았다. 후사를 낳으면 정실로 맞겠다는 서약서를 요구해서 받았다.
정난정은 양반 적자 출신인 윤원형이 유교 근본주의에 물들지 않고 사대부들이 경멸하는 불교를 신봉한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다. 실제로 윤원형은 당시 사회에서는 이색적인 인물이었다. 독실한 불교도였던 누이 문정왕후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정난정은 소실이 되었지만, 당찬 행동으로 대를 잊지 못하는 본처 김씨를 주눅이 들게 만들었다.
1544년 중종이 승하한 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생을 마치면서 외척 윤씨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인종의 죽음에는 문정왕후 윤씨의 독살설이 널리 유포되어 있다. 생모 장경왕후 윤씨가 출산 6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어린 인종은 문정왕후 윤씨에게 양육되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소생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인종을 원수 대하듯 했다는 것이다.
문정왕후의 독살설은 훗날 정난정의 본처 김씨 독살설과 함께 민간에 유포되어, 여인들이 정치판에 나서면 나라가 망조에 이른다는 통념을 심어 주었다. 구한말 명성황후 민씨에 대해서도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는 대원군의 독백을 당연시하곤 했다. 승자가 남긴 왜곡된 기록은 무섭다.
인종 즉위 후 윤임이 이끄는 대윤이 득세해 이언적 등 사림세력을 기용하는 등 기세를 떨쳤지만, 명종이 즉위하면서 수렴청정을 맡은 문정왕후가 사림에 철퇴를 휘둘렀다. 소윤의 대표 윤원형은 대윤과 사림을 숙청하며 을사사화(1545)를 일으켰다. 조정을 장악한 윤원형은 양재역 벽서사건을 일으켜 이언적,백인걸 등 사림세력을 축출했다. 이어서 윤원형은 사사건건 자신의 발목을 잡았던 親兄 윤원로를 귀양 보낸 뒤 목숨을 빼앗았다.
정난정은 문정왕후에게 보우대사를 소개하는 등 불교부흥에 전력했고, 문정왕후는 정난정의 조언을 받으며 조선을 불국토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 문정왕후는 선종과 교종을 부활하고, 전국에 300여 개의 사찰을 공인했으며, 도첩제를 부활시켰다. 정난정의 깊은 불심은 문정왕후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문정왕후는 1549년 윤원형의 공이 크다는 이유로 정난정과의 소생이 벼슬길에 오르도록 은전을 베풀었다.
1551년 윤원형은 명종에게 정실부인이었던 본처 김씨의 악행을 들먹이며 이혼을 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자 정난정을 정실로 삼았다. 쫓겨난 김씨는 가난과 구박 속에서 힘든 세월을 보내다가, 정난정이 보낸 음식을 먹고 죽었다고 한다. 1553년 문정왕후는 명종을 통해 윤원형의 첩 정난정을 합법적으로 부인이 되게 했다. 정난정은 종1품 의정부 좌찬성 윤원형의 부인으로,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이 되었다. 같은 해 정난정은 남편으로 하여금 서얼허통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게 함으로써 자신과 같은 처지의 백성들을 구제하려 했다.
윤원형이 영의정,우의정,좌의정과 함께 올린 상소는 서얼들도 과거를 볼 수 있게 하자는 내용으로, 이조판서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얼허통법이 통과되어 서얼들의 환성을 자아냈다.
문정왕후는 1553년 명종의 나이 20세가 되자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1555년 왜구들이 70척의 배로 전라도 일대를 휩쓴 을묘왜변이 일어났고, 양주의 백정 임꺽정이 의적을 자처하며 1559~1562년까지 3년에 걸쳐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휘저었다.
1563년 윤원형이 영의정이 되자, 정난정은 정1품 정경부인으로 외명부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이는 훗날 숙종 때 원자를 낳고 중전이 된 장옥정에 비견될 정도의 성공신화였다. 정난정은 조선의 돈줄을 파악하고 재산을 모아 남편에게 공급했다. 훗날 사가들은 정난정이 남편의 권력을 미끼로 매관매직과 뇌물을 받아 한성에 집이 15채나 되었다고 비난했지만, 기실 그 정도의 재산은 조선의 웬만한 사대부 가문으로는 평범한 수준이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사림세력은 명종의 조종에 따라 척신세력의 상징인 보우와 윤원형을 탄핵했다. 윤원형의 죄목은 26조목으로 그중 첫째는 관비 소생 정난정을 부인으로 삼고, 그녀의 딸을 덕흥군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려 한 죄였다. 게다가 정실부인 김씨의 재산을 빼앗아 굶어 죽게 했고, 도주 노비들을 비호했다는 혐의도 포함되었다. 대부분이 정난정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사림세력은 정적 보우와 윤원형보다 불교와 정난정이 더 미웠던 것이다. 윤원형은 파직되어 황해도로 밀려났다. 사림세력은 명종에게 정난정의 부인첩을 회수하라고 상주했다.
명종은 못이기는 척하며 정난정을 첩으로 강등했고, 때를 맞춰 본처 김씨의 계모 강씨는 정난정을 김씨 독살혐의로 고소했다. 국청에 끌려가 양반들의 망신과 조롱 속에 목숨을 잃고 싶지 않았던 정난정은 냉정하게 독약을 마시고 최후를 맞았다. 윤원형도 5일 후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이후 양반들은 정난정을 권력자 윤원형을 사주해 국정을 파탄 낸 妖女로 그렸다. 연산군 때의 장녹수, 광해군의 김개시, 숙종 때의 장희빈과 거의 같은 등급이었다.
노비들의 평생 소원은 면천이었다. 변란,전쟁은 그들에겐 기회였다. 세조13년(1467) 이시애의 난 진압 후 1254명의 병사가 면천의 혜택을 입었다.
1592년 임진왜란은 국가와 백성에겐 일대 재앙이었지만, 노비들에겐 구원의 나팔소리였다. 선조가 궁성을 떠나자 노비들은 장예원과 형조를 습격해 노비문서를 모두 불태웠다. 노비들은 군대에 들어가 신분을 확실히 세탁하거나 타향으로 도망쳐 살았다.
1593년 군사 부족에 시달리던 선조는 공사천무과를 실시해, 많은 노비들이 면천되었다. 이는 궁여지책으로 2년 후 폐지되었다.
숙종 때 북벌론자 윤휴의 제안으로 창설된 만과는 정원이 없이 서얼과 공사천의 무과급제자를 18,200명이나 양산했다.
영조 때는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수많은 노비들이 반란진압에 지원해 면천의 꿈을 이루었다.
그러나 대다수 노비들은 가장 쉬운 도주를 택했다. 이들은 섬,광산,목장,도시변경 등으로 숨어들어 생계를 유지했다. 전란 이후 행정체계가 무너진 조정에서 이들을 모두 색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도망한 노비들을 붙잡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보내는 것을 노비추쇄라고 하는데, 성종15년(1484) 한명회는 조선에는 도망 노비가 무려 100만 명에 달한다고 탄식했을 정도로 노비의 도망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이 무렵 노비추쇄를 통해 주인에게 돌려보낸 노비가 26만 여 명이나 되었다.
1655년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은 도망노비 실태를 조사했는데, 노비추쇄를 통해 43만 명의 노비를 확보했다.
4. 울며 세상을 노래하리라.
"새는 지붕은 위에 있지만 새는 줄 알려면 밑에 있어야 한다. 세상의 밑에 있으면서 위의 일을 나보다 자세히 아는 자는 없다." - 어무적.
서얼 출신 어무적은 시,산문으로 백성들의 실정을 토로했지만, 착취자들의 진면목을 폭로하고 저항하기보다는 왕의 어진 정치만을 갈구했다. 연산군 시대에도 堯舜과 같은 이상적인 군주가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원시의 이상향으로 추앙받는 요순시대가 유교 지배층이 백성들에게 심어 둔 교묘한 함정이란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 몽상은 미구에 구원이 닥쳐오기를 바라며 현실에 굴종케 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저항과 변혁의 씨앗은 싹을 트지 못한다.
조선에서는 한 번도 태평성대였던 적이 없었다. 사대부들의 그물망에서 벗어나 웅지를 펴고자 했던 군왕들은 여지없이 쿠데타를 통해 제거되었고, 아무리 무식하고 용렬한 군왕이라도 臣權정치의 그늘 아래 납작 엎드리기만 하면 평생 왕권이 보장되었다.
태종 이래 조선에서 국왕의 눈치를 살핀 사대부 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帝王學이라는 명목으로 하루종일 국왕에게 유교 경전을 공부하게 함으로써 자유로운 사고를 철저하게 짓눌렀다. 무식하면 군왕이 될 수 없다는 논리, 공부해야 요순과 같은 성군이 된다는 논리 때문에 유교국가 조선의 군주들은 평생 레임덕에 시달려야 했다. ☞ 제왕학이라는 건 결국 사대부들을 위한 이념교육에 불과했다.
이러한 臣權의 강압에 반발했던 세종은 말년에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내불당을 세웠다가 친위세력으로 키운 집현전 학사들에게까지 외면당하고 병마에 시달리며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유학자들보다 뛰어난 학문을 자랑하며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만 갈래 시내에 비치는 밝은 달과 같은 존재)을 자처했던 정조 역시 세종과 똑같은 아픔을 겪었다.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조련해 놓은 규장각 신하들은 군주가 공평한 정치를 펼치려는 순간 일제히 등을 돌렸던 것이다. ☞ 오늘날 관료들의 작당과 세습 작태들의 뿌리는 매우 깊음을 알 수 있다.
5. 끝나지 않은 이야기
청백리로 알려진 정운겸과 단양 우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도전은 평생 모계가 賤出이라는 멍에를 뿌리치지 못한 비운의 정객이었다.
1383년 독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만나러 함주로 향했던 정도전,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 전제개혁과 군제개혁은 고려 사수파를 제거하기 위한 연막작전이었다. 비로소 정도전의 본심을 파악한 정몽주,이승인,우현보 등이 정도전의 모계 賤出을 트집 잡으며 필사적으로 견제했다.
단양 우씨 가문에서는 정도전의 어머니 우씨가 가문의 여식이 아니라 노비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정도전은 단양 우씨 가문의 노비가 된다. 정도전의 외조부 우연의 정실이 차씨였고, 정도전의 외조모는 비첩(婢妾)이었다는 것이다. 조선 건국 이전 정적들로부터 태생이 비천하다는 공세에 시달렸던 그는 건국과 함께 우현보의 자식과 손자를 도륙했다.
정도전은 군주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재상정치를 통한 유교적 이상정치를 생각해냈다. 정도전이 야심만만한 이방원,이방간을 고립시키고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이방석을 태자로 옹립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1398년 이방원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그의 이름은 적자를 물리치고 서자를 옹립하려 했던 역신으로 기록되었고, 모든 서훈이 취소되었다. 태종은 서얼들이 고위관직에 오르지 못하도록 한 악법을 제정하기까지 했다. 이방원의 쿠데타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정도전은 후세의 양반들로부터 완전히 賤出로 규정되었다.
정도전의 명예가 회복된 것은 고종2년(1865)이었다. 고종의 할아버지 남연군은 사도세자의 넷째인 서자 은신군의 양자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의 아들 영웅대군은 1만여 명의 노비를 거느렸다. 선조의 장남 임해군은 서울에 300여 명, 시골에 수천 명의 노비를 거느렸다. 이황의 집안에는 353명의 노비가 있었고, 윤선도의 집안에는 700여 명의 노비가 있었다. 각지의 양반 사대부들의 집안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노비들이 있었는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초야우생(草野愚生)이 이렇다 어떠하리. 하물며 천석고황(泉石膏?)을 고쳐 무엇하리." - 이황. 도산십이곡.
"연하(煙霞)로 집을 삼고 풍월로 벗을 삼아, 태평성대에 병으로 늙어 가네. 이 중에 바라는 일은 허물이나 없는 것." - 이황. 도산십이곡.
"움막 지어 티끌 족쇄 영영 풀려는데, 문득 하품 기지개에 깜짝 놀람에, 닭 울고 남쪽 창 반 허리에 달이 걸렸구나." - 이황.
노비 해방을 위해 애쓴 이들도 있었다. 영조,정조,조선,유성룡,유형원,이익이 대표적이다.
중국의 노비는 신분이 당대에만 한정되었을 뿐 조선처럼 세습되지는 않았다. 아울러 중국의 여러 왕조에서는 농민의 몰락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 종종 노비해방, 매매금지, 소유제한 정책을 실시하곤 했다. 중국의 노비제도는 唐나라를 정점으로 쇠퇴국면에 접어들었지만, 면면이 이어지다가 1909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에필로그 - 조선, 공자를 욕보인 나라.
"우리 나라의 노비법은 천하고금에 없는 법이다. 한 번 노비가 되면 죽을 때까지 고역을 겪는 것도 불쌍한데, 반드시 어미의 身役을 따라야 하니 말이다... 이런 환경에 빠진다면 안회와 백기도 행실이 불가능하고, 관중과 안영도 지혜를 쓰지 못하며, 맹분과 하육도 그 용맹을 발휘할 수 없어 마침내 노둔하고 미천한 최하등류가 되고 말 것이다." - 이익. <성호사설>.
조선의 위정자들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비인간적인 노비제도를 개선하기는커녕 오히려 강화함으로써 민족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부채질했다.
기자가 가져다 주었다는 도덕과 질서로 포장해 특권과 서얼을 당연시하는 풍조를 낳았다.
황희 정승이 노비의 자식들과 정답게 어울렸다는 전설, 명장 유극량이 옛 상전 홍섬의 은혜를 입어 면천된 뒤 나라에 충절을 바치다 순절했다는 등의 영웅담은 상명하복을 합리화하기 위한 교묘한 복선에 지나지 않는다.
위정자들이 조선의 통치기반으로 받아들인 것은 유학, 그 중에서도 남송의 주자에 이르러 만개한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무엇보다도 관직임용의 평등성과 위정자들의 도덕성,청렴성을 담보하고 있다. 하지만 군자가 앞장서서 소인을 인도한다는 성인의 고상한 대의는 국왕독재에 대한 열망, 신하들의 권력의지, 당파의 집단이기주의에 휘말려 철저히 오염되었다.
위정자들은 공자의 인간을 위한 도덕을 기득권자와 정치를 위한 도덕으로 전락시켰고, 인간의 본분을 중시한 유교문화를 정치적 기만,위선,가부장주의,허영이 가득한 의례문화로 변질시켰다. 또한 혈연,지연을 통한 폐쇄성, 계급주의에 입각한 권력의식을 통해 차별,분열이라는 고질병을 우리 민족의 내면에 심어 놓았다. 중국에서 열국을 주유하며 이상국가론을 설파하던 孔孟은 조선에서 치졸한 양반들의 방패막이로 전락했다.
위정자들이 행한 사이비 통치의 행보는 우선 국가의 미래를 담보하는 교육과 用人 부문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유교는 신분에 관계없이 가르치고 등용한다는 평등주의를 내포하고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양반들에게만 평등했을 뿐이다.
국방부문은 더욱 가관이다. 양반과 노비를 제외한 모든 양인에게 주어진 군역의 의무가 수탈의 수단으로 악용되었고, 지친 백성들은 차라리 노비가 되기를 갈망하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나라가 왜란과 호란을 당하고도 국체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이자 비극이었다.
위정자들은 고매한 정치나 학문 외에는 모든 것을 양민과 노비에게 전가하고 유유자적하면서 자신들만의 태평성대를 노래했다. 그들은 평생 공짜 밥을 먹으면서 공짜 철학을 읊조렸던 것이다.
마소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던 조선의 노비들의 고통스런 나날들은 현재 거대자본의 굴레에 얽매여 신음하는 수많은 하층민이 데자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