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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강해 제 8장 구세주이신 인자
본장은 전장에서 시작된 예수의 제2차 갈릴리 사역을 마감하는 내용이며 메시야의 권능과 말씀을 통해 제자들에게 교훈을 주시는 것으로 제1차 갈릴리 사역이 주로 무리들을 위한 사역이라면 상대적으로 제2차 갈릴리 사역은 제자들을 위한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호수를 건너기도 하시고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기도 하시며 야이로의 딸을 고치실 때는 제자 세 사람만 동행하도록 하셨다. 9장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선교의 사명을 주어 그들을 세상에 보내시기 전에 네 가지의 사건을 경험하게 하신 것이다. 이는 구두의 메시지가 지닌 것보다 더욱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제자들이 복된 소식을 전한다고 해서 항상 좋은 일만 만나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고난에 직면하기도 하고 극복해야 할 난관에 부딪치기도 한다. 본장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며 첫 부분은 말씀을 통해 제자들을 가르치는 강론이며, 둘째 부분은 이적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을 교훈하신다.
1. 비유를 통한 교훈 (8:1-21절)
본문의 말씀은 이제까지 교훈하셨던 어떤 말씀보다 심오하고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제2차 갈릴리 사역을 마감하시는 시점에서 제자들에게 복음 전파에 대한 본질적인 내용을 가르치신 것이다. 서론부에 이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해석, 다음에 등불 비유, 예수의 영적 가족이 소개되고 있다.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는데 그 사역을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진행하셨으며 성읍이나 촌락이나 집이나 회당에서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란 죄의 결과로 인해 영적 육체적으로 왜곡된 인간의 모습을 본래대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역에 열두 제자가 함께 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이들은 공식적인 수행자들이었고 앞으로 진정한 사도로 설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열두 제자들에 이어 예수와 함께 한 동행인으로 여자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유대 사회에서 여자들은 남자와 동등한 지위를 갖지 못하고 온전한 인격적 대우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공생애 초기부터 신실한 여자들을 전도 여행에 합류시켰으며 천국의 일꾼으로 배양하신 것이다. 이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예수의 깊은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자들 중에 첫 번째 이름을 올린 자는 막달라 마리아이다. ‘막달라’는 ‘탑’ 또는 ‘망루’라는 이름의 지명으로 가버나움 남쪽에 위치한 작은 성읍이다. 그녀는 과거 일곱 귀신이 들려서 극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당했으나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 주어 지금은 온전하게 된 여인이다. 이렇게 큰 은총을 입었기 때문에 그녀는 예수께 전적인 헌신을 하였을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운명하실 때 그 자리에 있었으며, 예수의 시신이 매장되는 현장에도 있었고, 안식 후 첫 날 이른 아침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목격하였고,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전하였다. 두 번째 여인은 ‘요안나’인데 이 여인은 24:10절에서 예수의 부활 사실을 두 천사로부터 통고 받은 인물이다. 그녀는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로 소개된다. 헤롯은 당시 갈릴리를 지배하던 헤롯 안티파스로 보이며 그의 청지기가 무슨 직책인지, 구사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청지기가 재물을 관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요안나’는 매우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여인이었을 것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구사’라는 관리가 요한복음 4:46절 이하에 나오는 헤롯의 관리일 것으로 추측하는데 그럴 경우 요안나는 예수를 각별히 따랐다는 이유가 된다. 막달라 마리아가 낮은 계층의 천한 여인이었다면 요안나는 부유한 계층의 여자라는 것이다. 세 번째 여인은 ‘수산나’인데 그 이름의 뜻은 ‘백합’이다. 이 여인은 이름 그대로 청순하고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른 여러 여자들이 나타나는데 ‘함께 하여’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께서는 여자들을 제자로 받아들임으로써 유대 지도자들과 전혀 다른 면을 보여 준다. 예수께서는 여자들도 남자들과 똑 같은 구원의 가능성과 복음의 증언자로 인정하셨던 것이다. 여인들은 예수의 선교 사역에 가장 필요한 재원의 공급자들이었으며 저들의 헌신적인 섬김으로 재정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섬기더라’라는 말 ‘디에코눈’은 여인들의 섬김이 일회적이 아니라 연속적이었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이들의 섬김이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것이다.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었는데 이들은 예수의 교훈도 듣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의 권능을 인하여 몰려든 무리들이었다. 예수께서는 이들에 대해 ‘씨 뿌리는 비유’로 말씀을 전하셨다. 당시 청중들은 농경사회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비유는 씨 뿌리는 자나 씨앗 자체보다도 오히려 다양한 토질이 강조되는데 곧 성도들의 마음 밭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씨를 뿌리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며, 그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그 말씀을 듣는 청중들의 마음 밭이 어떠하냐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결실하느냐 못하느냐의 성패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뿌려지는 씨가 네 종류의 땅에 떨어지는 것을 비유하셨는데 밀이나 보리 등을 사람이 손으로 뿌리는 일은 통상적이었다. 팔레스틴 지방의 토지는 보통 가늘고 길게 분할되어 있고 그 밭 사이에 좁은 길이 있어 사람들이 다닐 수가 있기 때문에 씨를 뿌릴 때 좁은 길에도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곳에 떨어진 씨는 사람들에게 밟혀 당연히 뿌리를 내릴 수 없으며 밟히지 않은 씨는 땅위에 노출되어 새들의 먹이가 되는 것이다. 두 번째 경우는 씨가 바위 위에 떨어지는 것인데 마태는 ‘돌밭’이라 하였다. 밭에 간혹 바위가 있어 그 바위 위에도 약간의 흙이 덮여 있는 경우를 말한다. 이런 흙에는 씨앗이 싹이 나서 조금 자라기는 하지만 수분이 부족하고 자양분이 없으므로 해가 뜨면 곧 말라죽는 것이다. 세 번째 경우는 씨앗이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는 경우이다. 팔레스틴은 유난히 가시가 돋은 식물들이 많이 자라는데 히브리 성경에는 가시를 의미하는 식물의 종류가 22종류나 된다고 한다. 가시 떨기 속에 뿌려진 씨앗은 싹이 나고 자라기는 하지만 왕성한 성장력을 가진 가시에게 자양분을 다 빼앗겨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좋은 땅에 자라난 씨앗은 충분한 습기와 자양분을 구비하고 성장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없기 때문에 백배의 결실을 하는 것이다. 누가는 삼십 배, 육십 배, 라는 말을 생략하고 백 배만 기록하여 풍성한 결실을 강조한다.
예수께서는 비유의 말씀을 마치시고 난 후 큰 소리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외치셨다. 들려준 말씀 이면에 있는 숨은 뜻을 찾아서 들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제자들 중에 ‘들을 귀를 가진 자’는 없었던 것이다. 예수의 비유에 대해 적절한 응답을 하는 청중이나 이해하는 제자들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청중들이 물러간 후 제자들은 예수께 비유의 뜻에 대해 물었다. ‘에페로톤’이라는 이 말은 심문하듯이 집요하게 질문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예수의 말씀에 대해 알려고 하는 제자들의 열정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의 말씀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라고 하셨는데 이 비밀을 아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청중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하셨다. ‘뮈스테리아’라는 이 비밀은 숨겨진 사실을 말하는데 인간 스스로는 발견해 낼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실 때만이 알 수 있는 진리를 말한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타락한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는 추론해낼 수 없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부여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현재는 사도들과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허락되었고 일반 군중들이나 바리새인 서기관들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 이유를 예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여 말씀하셨다. 즉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6:9-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마태는 보다 명확하게 인용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백성들이 완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아듣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은사를 주시기를 원하시지만 사람들이 이를 거절하는 것이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는데 마가와 요한은 이 비유를 한 번씩 사용하였고 마태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예수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씨를 뿌리는 자’보다는 ‘씨가 뿌려진 밭’에 더 관심을 집중시킨다. 물론 씨를 뿌리는 자는 예수 자신이며 ‘씨’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것도 예수 자신이고 복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씨가 뿌려진 밭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인간 자신이며 좁게 말하면 인간의 마음이다. 또한 인간의 전인격이다. 그것은 네 가지로 나누어 말씀하셨는데 ‘길 가’라는 인간의 밭은 말씀을 듣기는 하나 그 말씀에 대해 냉담하거나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그 말씀이 그 사람의 인격이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마귀’에 대해 마가는 ‘사탄’이라고 했다. 이 영물은 길가와 같은 상태의 사람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아 가는 존재로서 세상의 온갖 유혹과 시험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것이다. 이 훼방과 시험은 에덴동산에서 하와에게 처음으로 역사하였고 이어 아담에게 전파하여 인간을 자기의 노예로 만들었던 것이다. 씨앗이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바위 위에 얇게 덮여 있는 흙에 뿌려진 것으로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감정적 흥분과 피상적 열정으로 받아들이지만 믿음으로 진실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믿음의 진정성 여부는 시험을 견디어 낼 수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 검증되는데 이런 사람들은 시험을 받을 때 견디지 못하고 말씀을 듣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신앙을 떠나버린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시험’은 필연적인 것이며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그 신앙은 뿌리 없는 식물과 같아서 그 생명이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험을 견디어 낸 믿음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약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가시떨기와 같은 상태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 영적 성장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궁극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의 가치를 혼동함으로써 결국 실패하는 자들이다. 즉 세상적인 부귀와 명예와 권력의 유혹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돌아서게 되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이생의 염려와 세상의 재물과 일락을 즐기는 것들 때문에 영혼의 가치를 망각하게 되어 결실은 하지만 온전한 결실을 하지 못하게 되는데 하늘나라의 것과 세상의 것을 둘 다 취하려는 욕망 때문에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스라엘 민족이며 예수께서는 저들에게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라고 책망하셨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을 의미하는데 ‘마음’이라는 말 ‘카르디아’는 인간의 영적, 지적, 의지적인 요소가 집중되어 있는 전인적인 좌소를 가리킨다. ‘착한’이라는 말 ‘칼로스’는 목적에 적합하다는 의미이다. 돈벌이나 사리사욕에 몰두하는 낮은 차원의 성취를 버리고 지혜나 의로움과 같은 숭고한 일을 획득하는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을 말한다. ‘좋은’에 해당하는 말 ‘아가데’는 숭고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작은 것들을 과감히 포기할 줄 아는 마음을 말한다.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을 듣는 데에 그치지 않고 지키고 행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염려나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쾌락과 같은 마귀의 시험을 이기며 인내로 결국 결실하게 되는 것이다.
씨 뿌리는 비유를 해석하신 예수께서는 등불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을 선포하는 이유와 그 말씀을 어떻게 듣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경고의 말씀을 주셨다. ‘등불의 비유’는 마태와 마가도 기록했으며 ‘말과 평상’이라고 표현했다. ‘등’은 한 쪽 끝에 손잡이가 달려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심지를 꽂도록 되어 있는 접시 모양의 그릇이다. 사람이 등에 등불을 켜는 이유는 그 등불이 집안을 비추어 어둠을 물리치고 집안을 밝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할 경우 등불을 켠 목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비유의 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이유는 그 말씀이 인간의 어두운 심령을 비추어 밝게 하시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보고 그 빛에 나오기를 즐거워할 것이며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감으로 실족하지 않아야 한다. 이 빛은 진리의 빛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바른 길을 인도해 주며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 빛이 나타나면 지금까지 숨겨진 것들이나 감추어진 것들이 다 드러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기 전에는 세상은 어둠 그 자체였고 인간은 어둠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진리는 숨겨졌고 감추어져 있었지만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 세상의 빛인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면 인간의 모든 죄악과 불의가 밝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는 자의 태도가 제일 중요한 것이다. 겸손하며 진실하게 말씀을 듣는 자는 자신의 있는 것 위에 더욱 풍성한 진리를 받게 되지만 교만하여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지혜까지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듣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지고 있는 율법 위에 더 많은 것을 받게 되지만 예수를 배척하고 고의적으로 거절하는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율법조차 빼앗기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시는 중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동생들이 예수를 찾아온 이야기가 삽입된다. 마태와 마가는 이 이야기를 바알세불 논쟁의 결론 부분에서 다루고 있지만 누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마가에 의하면 가족들이 찾아온 이유는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걱정이 되어 예수를 집으로 데려가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누가는 가족들의 영적 무지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방문을 또 다른 차원의 교훈을 주기 위한 동기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를 만나러 왔으나 무리들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고 밖에 서 있었다는 것은 당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무리 중에 어떤 사람이 이 사실을 예수께 고하였고 그 말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그 상황을 말씀을 듣는 자의 태도에 비유하여 교훈하셨는데 예수의 진정한 가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육신의 가족이 찾아온 것을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연결시켜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사람이 진정한 예수의 영적 가족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새로운 가족의 개념은 ‘피를 나눔’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기준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의 혈통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그 뜻대로 행하는 자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2. 네 가지 이적 (8:22-56절)
예수님이 행하신 네 가지 이적이 수록되어 있는데 갈릴리 호수의 광풍을 잔잔하게 하신 일,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일,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쳐주신 일, 죽은 아이를 살려주신 일이다.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을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초기의 이적이다. 주로 귀신들린 사람과 각종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신 것인데 이것은 인간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신 인간 예수를 보여준다.
둘째, 중기의 이적이다. 이 기간에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곧 가난한 자, 과부, 죄인인 여자, 이방인까지 놀라운 구원의 은총을 베푸셨다. 이는 자기 계시가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으로 확장되었으며 군중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발전하게 된다.
셋째, 후기의 이적이다.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인식의 변화인데 제자들이 처음으로 ‘주님’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으며 폭풍이 이는 가운데서도 평화를 잃지 않고 구원해 주실 것을 간청하는 제자들은 예수께서 주시는 구원을 겸손과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여 진실로 예수를 좇는 제자들이 된다.
바람과 물결을 잔잔하게 하시는 예수의 첫 이적이 소개되는데 이 이야기는 마가에 의하면 씨 뿌리는 비유를 들려주신 그 날 저녁 해질 무렵이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명하신다. 마태와 마가는 ‘바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갈릴리 호수를 유대인들이 바다라고 부르기 때문이고, 누가는 이방인들이 ‘바다’라는 표현을 이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호수라고 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쉴 사이도 없이 선교하셨기 때문에 배에 오르자마자 피곤하여 잠이 드셨는데 행선하는 도중에 광풍이 호수로 내리쳤다. 광풍이라는 말 ‘라잎라스’는 ‘돌풍 혹은 회오리바람이다. 이 광풍은 육지에서 내려오는 찬바람과 호수의 따뜻한 바람이 충돌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배의 조종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 계속해서 몰아치는 높은 파도는 배 안에 물을 퍼부었고 그 물을 제자들이 퍼내기가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물이 점점 많아져 배가 가라앉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제자들 중에는 어부들이 있었으므로 최선을 다하여 위기를 헤쳐 나가려고 했으나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갔고 마침내 죽음의 위협을 느끼게 되자 예수를 깨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제자들은 ‘주여 주여’라는 말을 반복하였는데 마가는 제자들의 곤경을 돌보시지 않고 계속해서 주무시는 예수를 원망하는 말투로 기록했고 마태는 탄원하는 말투로 기록하는데 누가는 이 모든 것을 생략하고 제자들의 급박한 보고만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잠에서 깨어나시기만 하면 자신들을 구해 주신다는 믿음을 반영한 것이다. 예수께서 잠에서 깨어나시고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바람도 파도도 잔잔하여졌다. 예수께서는 마치 바람과 물결이 인격이 있는 것처럼 꾸짖으셨는데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꾸짖을 때와 같이 자연계를 한 마디 말씀으로 제어하시는 신적 권능을 입증하신 것이다. 마태는 ‘아주 잔잔하여졌다.’고 하여 잔잔해진 상태를 부각시켰는데 그토록 맹렬하게 역사하던 바람과 파도가 예수의 말씀 한 마디에 순종하고 엎드려진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을 책망하셨는데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하신 이 말씀은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도 예수께서 함께 하시면 안전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 제자들을 질책하신 말씀이다. 두려움에 떤 제자들의 불신앙과 시험의 때에 마땅히 인내해야 할 태도를 망각한 것을 책망하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책망의 진의를 깨닫기보다도 예수의 권능을 목격하고 다시 한 번 놀라며 기이히 여기는데 제자들이 느끼는 기이함과 두려움은 조금 전에 자연 앞에서 느낀 두려움과 놀람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신적인 능력 앞에서 느끼는 경외심 같은 것이었다. 제자들은 아직까지 예수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으므로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라고 했다. 지금까지 예수께서 병자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을 목격했지만 그것은 선지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경험한 사건은 너무 놀라운 것이어서 예수의 정체에 대해 물은 것이다. 도대체 예수가 누구이기에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자연을 말씀 한 마디로 복종시키는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의문을 제시한 것이다.
예수의 두 번째 이적으로 거라사인의 땅에 가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이적이다. 마태는 이 지역의 이름을 ‘가다라’라고 했으며 ‘거라사’는 갈릴리 호수에서 약 40km 떨어진 지역이고, ‘가다라’는 갈릴리 호수에서 약 9km 떨어진 지역이기 때문에 동일한 지역이라고 보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누가와 마가는 귀신들린 자 한 사람을 언급하고 있으나 마태는 두 사람이라고 한다. 문제는 귀신들린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예수께서 이방인의 땅에 가셨다는 사실이다. 이 사람은 오래도록 옷도 입지 않고, 집에 거하지도 않고 오직 무덤 사이에서 거하고 있었는데 인간으로써 인격을 모두 잃어버린 채 죽은 자와 살고 있었던 것이다. 마가는 이 사람이 자기 몸을 상해하는 일도 하였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서 최악의 상태를 보는듯한 그의 모습은 영적인 죄인의 형상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이 예수를 보자 부르짖고 예수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간구가 아닌 간구를 했다. 그는 예수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고 했는데 귀신들린 자가 엎드려 절한 것은 경배가 아니라 예수의 능력에 굴복한 표현이다. 귀신은 예수를 향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했다. 귀신들은 예수가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분이라고 고백하지만 이러한 고백은 예수와 화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예수께 대한 신앙이나 복종을 고백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귀신은 영적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들이 아니며 멸망할 대상이기 때문에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고백하는 일은 없고 단지 예수의 마음을 약하게 하여 적절한 타협을 하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나에게 신경 쓰지 말고 네 일이나 하라.’는 말이 있는데 귀신 역시 이 말을 한 것이다. 귀신은 이미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일단 예수의 신성을 고백하고 그 앞에 엎드려 굴복한 후에 그 사람 속에 있기를 구한 것이다. 귀신은 예수께서 자기를 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상관하지 말고 떠나가시라는 것이다. 귀신은 예수와 적대 관계에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태에 의하면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한 것이다. 이는 귀신이 멸망하는 최후의 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으로 그 때가 되기 전에는 자기들을 괴롭히지 말라고 주문한 것이다.
귀신들은 한 사람을 완전히 정복하고 있었는데 그 결과는 귀신들린 자가 늘 정신이상의 상태로 있는 것이고 때로는 귀신의 특별한 작용으로 인해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사람들은 귀신들린 자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지만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다. 귀신은 사람의 주체적 의지를 파괴하고 통제하며 사람을 파멸로 이끈다. 예수께서는 귀신에게 묻기를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하였다. 이는 귀신들린 사람에게 물은 것이 아니라 귀신에게 직접 물으신 것이다. 예수의 질문에 귀신은 ‘군대’라고 대답했는데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다는 것이다. ‘군대’라는 말 ‘레기온’은 6,000명 단위의 군대를 뜻한다. 한 사람에게 한 귀신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이와 같이 여러 귀신이 한꺼번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일곱 귀신이 들어가 있었고, 어떤 사람은 귀신이 나갔다가 자기 친구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온 경우도 있다. 군대 귀신들은 예수께 자기들을 무저갱으로 들어가게 하지 말라고 간구했는데 ‘무저갱’은 바닥이 없는 깊은 흑암의 장소를 말한다. 영어로 ‘블랙홀’이라고 하는 이곳은 종말의 때에 마귀가 갇힐 곳이며 마태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이라고 하였다.
마침 그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었는데 마가는 이 돼지 떼가 무려 2,000 마리에 달했다고 한다. 귀신은 예수의 명을 거역하고 더 이상 그 사람 속에 있을 수 없음을 알고 자기들을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예수는 이를 허락하셨다.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서 돼지 떼에 들어가자 돼지들이 미친듯이 비탈로 내려가 호수에서 몰사당하고 말았다. 물론 돼지의 주인은 이 사건으로 인해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은 것이다. 이는 한 사람의 영혼이 2,000마리의 돼지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왜 귀신들을 돼지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하신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데 그 이유는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부득불 취하신 조치이며, 귀신들이 돼지와 함께 몰사했기 때문에 더 이상 군대 귀신에게 붙잡혀 고통당할 사람을 없게 하신 것이며, 돼지는 율법 상 부정한 동물이기 때문에 이는 율법에 근거하여 정당한 명령을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온 우주의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사물을 임의로 처분하실 수 있는 권세와 권능이 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규정하였고 먹지 않았다. 따라서 돼지를 기르던 자는 이방인이었을 것이며 군대 귀신이 들린 자는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예수와 귀신 사이에 일어난 일에 대하여 사건을 직접 목격했으나 예수의 권능에 대해 심히 두려워하고 당황했을 것이다. 그래서 사건 현장에서 도망하여 그 사실을 성내와 마을에 알렸고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사건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그곳에 모여들었다. 그때 귀신이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었는데 아마도 그 사람은 자신을 온전한 인간으로 만들어주신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려 경배를 드렸을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발가벗고 이리저리 방황하며 괴성을 지르고 괴력으로 사람을 괴롭게 했던 미친 인간이 이제는 단정한 옷을 입고 온전한 정신으로 앉아 있는 초월적 사건의 현장을 보고 사람들은 두려워했던 것이다. 동네에서 온 사람들은 사건의 진상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돼지를 치던 자들이 다시 한 번 자세한 사실을 증거하자 몰려온 사람들의 신적 경외감을 더욱 증폭되었다. 귀신들렸던 사람은 먼저 육신의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받았고 나아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영적으로 구원을 받았던 것이다.
예수께서 행하신 군대 귀신 축출 사건은 그곳 사람들로 하여금 감당하기 어려운 큰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 두려움이 신적인 능력을 접한 인간이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경이로운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미신적인 두려움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실 때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었다고 했던 것처럼 2,000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몰사한 것은 미신의 재앙, 혹은 귀신의 저주라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돼지 떼에 대해서는 감히 불평하지 못하고 예수만 떠나기를 요청했던 것이다. 그들은 귀신이 들렸던 사람이 온전한 구원을 받은 것을 보았지만 그것을 이해하거나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 오히려 물질의 손실만을 생각하여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지방에서도 구원의 사역을 베푸실 계획이 있었겠지만 자기를 배척하는 무리들로부터 아무 미련 없이 타고 오셨던 배를 타고 도로 떠나셨다. 그때 귀신이 나간 사람이 너무나 귀한 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를 따라가고자 하였으나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집으로 돌려보내셨다. ‘구하였다.’라는 말 ‘에테이토 아우투’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요청했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그를 통한 다른 목적을 가지고 계셨는데 집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 전하라.’고 하셨고 그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집안 식구들뿐만 아니라 온 성내에 다니며 그 사실을 전파하였다. 예수께서는 자신과 하나님을 동일시 하셨는데 이는 제자들이 ‘저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고 했던 그 물음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 전하라.’고 하셨는데 이 사람은 ‘예수께서 하시 일’을 전하고 다녔다.
예수께서 거라사 지방에서 돌아오시자 무리들이 크게 환영했는데 그 이유는 거라사 지방에서 일어난 놀라운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무리들이 예수께서 오심을 기다렸다고 하는 것은 예수의 도움을 바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 특히 유대교의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예수를 찾아와서 발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청하였다. 회당장은 회당의 수반으로 집회를 인도하고 회당 건물과 재산을 유지하며 회당 운영의 일체를 책임진다. 예배의 질서와 신성함을 유지할 책임이 있고 토라를 낭독하거나 설교하는 사람을 선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회당장은 그 지방의 최고 상류 인사이며 사회적 지위가 있고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당시 상대방의 발아래 엎드리는 것은 경의의 표현이기 때문에 자기보다 높은 지위의 사람에게 행하는 행동이다. 회당장이 자기 지위와 명예를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경의를 표한 것은 특별한 경우이다. 그에게는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었는데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죽어감이라’는 말 ‘아펟네스켄’은 죽어가고 있는 과정 속에 있다는 것 곧 죽음을 맞이할 시간에 봉착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간청을 받아들여 그의 집으로 가실 때 몰려든 무리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함께 하였다. 저들은 과연 이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길을 가시는 도중에 또 한 사람이 예수를 만나고자 하였는데 이 여인 역시 열두 해를 혈루증이라는 중병을 앓고 있었으며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한 병자였다. 혈루증은 혈관 조직이 약하여 피가 몸 밖으로 나오는 병이지만 여인에게는 특히 자궁벽에 종기가 생겨 불규칙적으로 피가 흘러나오는 병이다. 현대에서는 이 병을 오래 두면 암으로 진행되고 자궁암으로 죽게 된다. 유대인들은 유출병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하고 의식적으로도 부정한 것으로 여겼으며 이 병에 걸린 자를 멸시하고 천대했으며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추방하였다. 이러한 악조건에서도 여인은 삶의 의지를 버리지 않았으며 끊임없는 투병 생활을 해왔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께서 거라사 지방에서 행하신 이적의 사건을 듣고 예수께 구원을 얻고자 무리들 틈에 끼어 예수에게 접근한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 여인은 어떤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단한 결단을 가지고 과감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예수를 찾아온 두 사람 중 회당장이 공식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모든 지위와 명예와 체면을 포기하고 오직 예수를 찾아 딸의 생명의 구원을 받고자 했다면 이 여인은 만약 자신의 정체가 노출되고 발각될 때에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비밀리에 예수의 등 뒤에서 그의 옷자락을 잡아 구원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두 사람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참 신앙의 인물들이었다. 마가에 의하면 여인은 병 고침을 받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고 갖은 재산을 다 탕진했으며 많은 의원들로부터 고난을 받았지만 결단코 그의 생명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이 세상의 방법으로는 더 이상 희망이 없었으므로 예수를 메시야로 믿고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병이 낫겠다는 믿음을 가졌다. 이에 예수의 뒤로 가서 그의 옷가에 손을 대었을 때 신기하게도 혈루증이 즉시 그쳤던 것이다. 마가에 의하면 그녀가 예수께 직접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던 것은 그녀의 탁월한 믿음 때문이었다. 여인이 손을 댄 옷은 유대인들이 입는 겉옷, 더 정확하게는 그 겉옷에 달린 술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의 겉옷은 네모가 반듯한 정방형의 천에 머리를 내어 놓을 구멍이 있고 그 옷의 네 귀에 술을 달아 드리우고 푸른 실로 장식하였다. 이 술을 단 이유는 그것을 보면서 율법을 기억하기 위함인데 바리새인들은 이점을 사람들 앞에 과시하기 위하여 옷술을 더 크게 하였다가 예수께 비난을 받았다. ‘그쳤더라.’라는 표현은 ‘흐르기를 그쳤다.’라는 의학적 표현으로 피만 나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 병으로 생긴 자궁 안의 모든 상처와 조직이 치료된 것을 의미한다.
여인이 예수의 옷을 만지는 그 순간 예수께서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물으셨다. 예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무리들이 다 ‘아니라’고 할 때에 베드로가 여인의 접촉 사실을 모르고 ‘주여 무리들이 밀려들어 민다.’고 하였다. 베드로가 한 말은 사람들이 서로 밀고 당기는 혼잡한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예수의 질문에 아무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일상적인 말을 했던 것이다. 무지한 말로 대답하는 베드로를 향해 예수께서는 그 질문의 진의를 밝히시면서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다.’고 하셨다. 예수께서 굳이 이 사실을 밝히시려는 의도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여인의 병이 나았음을 사람들 앞에 증거 하시기 위함이다.
둘째, 여인의 행동에 미신적인 요소가 있었다면 그것을 제거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성장시키기 위함이다.
셋째, 사람들로 하여금 여인의 믿음을 통하여 병 나음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다.
넷째, 그녀에게 구원의 확신과 아울러 위로와 평강의 말씀을 주시기 위함이다.
마가에 의하면 제자들은 강한 어조로 예수의 질문에 답변했는데 이는 누군가가 예수의 권능을 힘입고자 의도적으로 그의 옷에 손을 댄 자가 있다고 하시는 말씀을 전혀 믿지 않고 제자들은 인간의 이해의 범주에서 자기들의 주장을 피력했던 것이다. 이는 예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몰이해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 ‘능력이 나간 줄을 아셨다.’고 하신 것은 예수의 몸에 있던 능력의 일정량이 빠져나가 소모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옷에 의도적으로 손을 댄 자에게 기적의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을 부각시킨 것이다.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순간에 병이 나은 사실을 안 사람은 예수와 여인뿐이었다. 여인은 두 가지 사실에 대해 깜짝 놀랐는데 첫째는, 순간적으로 병이 깨끗하게 나은 것과, 둘째는 그것을 알고 있는 예수의 능력에 대해 놀랐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은밀한 시도가 공개되고 수많은 군중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자 당혹감과 긴장으로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유대 사회에서 여자들은 남자의 옷에 손을 대서는 안 되는 것이며, 부정한 병에 걸린 자가 다른 사람에게 접촉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부정이었으므로 자신을 노출시킬 경우 그녀는 큰 추궁과 위험에 봉착해야 하는 것이다. 마태는 여인이 ‘모든 사실을 이야기 했다.’라고 했는데 비해 누가는 초점을 증언의 공개성에 맞추어 ‘모든 사람 앞에서 말했다.’고 했다. 그녀는 손을 댄 이유와 병이 나은 것을 공개적으로 증언했는데 예수의 신적 권능과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증거 되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먼저 여인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딸아’라고 부르고 계신다. ‘뒤가테르’라는 이 말은 다정한 목소리로 아버지가 딸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며 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를 소유하신 예수의 신성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다음에 예수께서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는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다. 이는 믿음 그 자체의 능력으로 구원을 획득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녀의 믿음이 구원과 치유를 성취하게 하는 매개체 역할, 도구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녀의 믿음은 온전한 믿음은 아니었지만 예수께서 그 적은 믿음을 귀중히 여기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평안히 가라.’는 축복의 말씀을 주신다. 아마 이 평안은 영혼과 육신의 안녕을 동시에 뜻하는 온전한 의미의 ‘살롬’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여인에게 축복의 말씀을 주신 바로 그 시간에 야이로의 집에서 뜻하지 않은 비보가 날아와 축복의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회당장의 집에서 온 사람의 말은 야이로의 딸이 이미 죽었으며 더 이상 미련을 가지고 선생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런 태도는 자연인으로서 표할 수 있는 상식적이고 평범한 것으로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미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적이 있었고 그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졌던 것이다.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면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지라도 그렇게 쉽게 절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집안사람들의 전갈을 들으시고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다. 누가는 마가에 없는 말씀을 첨가했는데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신 것이다. 야이로는 혈루증 환자가 구원을 받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만 해도 자기 딸의 병이 치유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집으로부터 전해온 비보를 접하였을 때 한없는 절망에 빠져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은 먼저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이는 처음 예수를 찾아왔을 때의 신뢰를 버리지 말라는 것이며, 그 믿음을 계속해서 가질 때 딸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믿음의 성격에 대한 모범 답안을 제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바라시는 신앙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인 것이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셨을 때 집안에 데리고 들어가는 수행자는 세 사람으로 제한하셨다. 이는 매우 특별한 경우인데 지금이 처음이고, 변화 산에 오르실 때가 두 번째이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가 마지막이다. 이 세 사람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특별한 사명을 받은 자들이다. 집안에서는 이미 딸의 죽음에 대해 통곡하고 있었다. 유대인의 풍습에는 동네 사람들이 같이 울어주거나 아니면 전문적으로 우는 사람을 고용하기도 한다. 이들 중에는 피리를 부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울지 말라.’고 하시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사람들에게는 놀랄 만한 말씀이었다. 그 결과 저들은 예수의 말을 비웃었는데 이는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호곡자들의 비웃음은 아이의 죽음이 분명한 죽음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이었다. 마가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비웃는 사람들을 다 내보내신 후 아이를 일으키셨다. 불신자들 앞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를 원하시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를 불러 ‘아이야 일어나라.’고 하셨다. 마가에 의하면 예수께서 아람어로 말씀하셨는데 율법에는 죽은 사람의 시체에 손을 대는 것을 부정한 것으로 금지하고 있다. 이러한 예수의 행동은 율법을 초월하시는 그의 독특한 사랑의 표현이며 율법을 완성하시는 것이다. 예수의 부르심을 들은 아이의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났다. 이는 생명이 즉시 회복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마가에 의하면 아이가 일어나 걸었다고 했는데 이는 그 아이가 완전히 회생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는데 이는 아이가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맨 시간이 길어 육체가 심히 허약해졌을 것을 생각하여 음식을 먹이라고 하신 것이며, 아이의 회생을 공식적으로 확인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부모가 아이의 회생을 보고 크게 놀랐는데 예수께서는 이 사실에 대해 함구령의 경고를 내리셨다. 왜냐하면 이미 죽었던 아이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이를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 이웃들에게 아이가 살아난 과정을 설명해야 할 의무가 야이로에게 있는 것이다. 애곡하던 자에게 더 이상 울 필요가 없다는 것과, 딸이 건강하게 다니는 모습에 대해 사연을 묻는 자에게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마태는 이 사실이 온 땅에 퍼졌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는 4가지이다.
첫째, 사람들이 예수를 단지 기적이나 마술을 하는 사람으로 오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둘째, 예수의 지상 사역의 목적이 사람들의 세상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함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셋째, 아이의 부모들이 단순히 기적이 일어난 사건에 매여 메시야를 보지 못하고 이적적 신앙에 집착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넷째, 예수에 대한 과장된 소문으로 말미암아 메시야 사역이 방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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