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한옥마을의 역사는 그리 깊지 않다. 여전히 변모 중이고 변신하며 제 모습을 만들어간다. 마을이 번성하기 시작한 건 1930년대다. 불과 80여 년 전이다. 1911년 전주부성의 자취가 사라지며 일본 상인들이 성안으로 진출했다. 다가동과 중앙동에 중심 상권을 형성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이 만들어졌다. 지금의 전주한옥마을이다. 그러니 이름난 한옥은 많아도 100년이 넘는 고택은 찾기가 어렵다.
그래서 학인당은 특별하다. 전주한옥마을에서 가장 오랜 한옥이며 민가 가운데 유일한 문화재다. 근대를 지나온 신식의 개량 한옥이다. 20세기 개량 한옥이 즐비한 전주한옥마을에서 한층 값지다.
학인당은 전주한옥마을의 제일 남쪽에 위치해 있다. 1908년에 지어졌으니 100년이 넘는 집이다. 학인당만이 가지는 특징도 있다. 그 형태가 여느 고택과는 조금 다르다. 고전적인 한옥의 생김에 변화를 주었다. 근대적인 멋스러움이다. 1908년 당시 최신식으로 지어졌다는 표현이 맞겠다. 시대를 앞선 건축양식이다.
전국적으로 화제가 됐던 건축이라 할까.
고전적인 한옥의 생김에 근대적 멋스러움 더해
건축주는 조광조의 제자 백인걸의 11세손 백낙중이다. 만석꾼이자 전주의 대부호였다. 그는 장자 백남혁이 태어난 1905년에 새집을 짓기 시작했다. 공사 기간만 2년 8개월이 걸렸다. 건축을 위해 투입된 인원은 4,280명에 달하고 공사비는 백미 8천가마에 이르렀다.
단순히 규모적인 측면에만 머물지 않는다. 고종 황제의 허락을 받아 궁궐을 지은 대목수와 대목장을 데려와 궁중의 양식을 차용했다. 원형의 기둥이나 초석 등은 민가 건축에서는 좀체 보기 힘든 사례다. 건축에 쓰인 목재도 백두산과 오대산에서 가져왔다. 여기에 근대적인 감각과 편의성을 더했다. 그 과정에서 흥선 대원군과의 인연이 작용했다. 백낙중의 부친 백진수는 낭인시절 대원군이 전주를 찾았을 때 크게 대접했다. 호형호제할 만큼 친했다. 덕분에 조선 말 건축의 집약이자 새로운 양식의 한옥이 등장할 수 있었다.
솟을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현액이 눈길을 끈다. ‘효자승훈랑영릉참봉수원백낙중지려(孝子承訓郞英陵參奉水原百樂中之閭)’라고 적혔다. 고종이 백낙중의 효행을 치하해 벼슬을 내렸다는 내용이다. 학인당(學忍堂)이라는 이름도 백낙중의 호 인재(忍齎)에서 따왔다.
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당을 차지한 정원이다. 다른 한옥과 차별 짓는 첫인상이다. 예전에는 그 사이에 중문이 있었다지만 지금은 곧장 정원이다. 소나무 두 그루가 슬그머니 가지를 내려 본채를 가린다. 그윽한 운치다. 바닥에는 꽃들이 화사하다. 5월에는 영산홍과 자산홍이 곱게 핀다. 6월에는 백일홍이 바통을 이어받는다. 서편에는 향나무 한 그루가 우뚝하다. 뿌리는 깊은 땅속으로 길을 냈다.
학인당은 1908년에 완공했지만 200여 년 전부터의 집터다.
우물은 그 뿌리와도 같다. 마당을 채우는 대신 주변으로 돌을 쌓고 정원을 조성했다. 샘으로 내려가는 지하계단이 용의 꼬리가 되고 반대편이 용머리를 이뤄 승천하는 의미를 담았다. 지금은 천연의 저장고 역할을 한다. 그 너머의 본채를 감상하며 작은 사랑채 앞을 서성인다. 건물은 꽃과 가지 사이로 숨바꼭질하듯 숨었다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정원과 더불어 ‘ㄱ’자형의 본채는 학인당의 묵묵한 역사다. 건축 당시에는 본채를 비롯해 별당채·동서사랑채·행랑채 등 99칸 규모의 한옥이었다. 1960년대를 지나며 안채와 사랑채 등을 매각하고 현재는 520평에 7채가 남았다.
본채라는 상징성에만 그치지 않는다. 학인당 건축의 백미다.
본채는 전체 35칸으로 보통 한옥의 3채에 해당한다. 7개의 도리를 걸어 지은 칠량집이다. 서까래를 받는 기다란 나무만 7개란 의미다. 칠량집답게 2층 규모로 천장도 높다.
건물의 외관은 유리창을 가진 여닫이문을 둘렀다. 내부는 방과 방, 서재, 세면장, 목욕탕을 우물마루가 깔린 복도로 이었다.
개화기의 양식이 접목된 개량 한옥의 특징이자 궁궐 양식의 차용이다. 심지어 전기와 수도시설까지 도입한 현대적 구조다. 그리고 이 모두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네 가락이다.
설계 때부터 판소리 공연장 염두에 둔 ‘소리의 전당’
학인당의 본채는 살아 있는 소리의 전당이다. 처음 설계할 때부터 판소리 공연장을 염두에 뒀다. 조선 말 중단됐던 전주감영과 전주부의 대사습경연은 학인당에서 되살아났다. 당대의
소리꾼들이 공연하고 교류했다. 대청마루에서 동쪽과 서쪽 방의 문을 열거나 떼어내면 별채 전체가 공연장으로 변신한다.
과거에는 동시에 100여 명이 판소리를 감상할 수 있는 대형 공연장이었다.
벽지는 한 번 바르고 말린 후 다시 바르기를 여덟 번 반복한 팔배접이다. 창호 또한 좀처럼 보기 힘든 4중창이다. 이 모두가 완벽한 소리의 공명을 만든다. 천장이 높아 소리의 울림도 훌륭하다. 집이 하나의 울림통이다. 전주 대사습놀이의 맥을 이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학인당의 기본은 한옥 체험시설이다. 숙박은 본채와 별당채, 사랑채 등의 주요 건물에서 이뤄진다. 본채는 VIP실 개념이다.
가장 큰 방인 백범지실은 한독당 창당 때 전주를 찾은 백범 선생이 묵어갔다. 그 시절의 방문기념 사진 몇 장이 걸렸다. 해범지실은 신익희 선생에서 연유한다.
일반 숙박객은 주로 별당채와 사랑채를 이용한다.
‘ㅡ’자형의 별당채 진수헌(眞修軒)은 남향의 집이다. 동쪽 뒤편에서 ‘ㄱ’자형 본채의 북쪽 면을 채운다. 바깥 창으로 햇살이 곱게 스미고, 격자의 창 안에는 굴뚝과 소나무가 어우러진 풍경이다. 별당채의 백미는 서쪽 끝 방이다. 실내의 서쪽으로 단을 두어 마치 별도의 누마루처럼 자리한다. 다실을 겸하는데 차 한잔을 나누며 머물기에 으뜸이다. 창문을 열자 후정의 풍경이 맞이한다.
‘ㄱ’자로 꺾인 별채의 뒷면도 보인다. 유리로 창을 낸 본채의 외관은 여느 한옥이 볼 수 없는 맵시를 뽐낸다. 따스한 햇살과 느린 바람이 어울려 풍류를 완성한다. 솟을대문의 서편에 위치한 사랑채도 숙박시설이다. 보통 한 칸의 행랑채가 위치하지만 칸수를 늘려 작은 사랑채로 조성한 방이다.
한옥 체험과 함께 다례·판소리 체험도 가능
모든 내실은 실내에 화장실과 세면실을 두어 편의를 도모했다.
본채의 대청마당에서는 전통체험도 가능하다. 종부에게 학인당의 이야기를 듣거나 전통 다례를 배운다. 소리의 집이 갖는 기능도 변함이 없다. 솟을대문의 동쪽은 전통체험관으로 본채와 더불어 소리 한가락을 배워볼 수 있고 종종 전통 공연도 열린다.
학인당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기회다.
학인당에서 머물 때는 문밖 나들이도 권한다. 전주한옥마을은 구석구석 발품을 팔아 찾을 수 있는 보물이 많다. 도심의 편의성과 한옥의 향취가 공존한다. 옛것과 새것이 조화롭게 발전해가는 전주한옥마을만의 특징이다.
오목대에 오르는 것도 추천한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삼도 순찰사 시절 흔적이다. 왜구를 토벌하고 오는 길에 연회를 열었던 자리다. 주변으로 산책로가 잘 가꿔져 있다. 단순히 숲길을 걷는 걸음이기만 할까. 오목대는 전주한옥마을의 전경을 볼 수 있는 전망대로 유명하다. 겹겹이 이어지며 마을을 이룬 한옥의 지붕은 실로 장관이다. 그 너머 도시의 현대적인 풍광과 어우러져 시간의 외딴 섬인 양하다. 학인당은 면면이 이어온 그 태초의 기억이다.
글과 사진·박상준(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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