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모음
복수적 전통의 포용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기록한 복음서가 네 권이라는 사실이 근본주의적 사고에는 힘든 두통거리가 아닐 수 없다. 서로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데, 왜 복음서가 한 권만 있으면 아무 문제도 안될텐데 네 권이나 정경에 포함시켜 문제를 야기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예를 들자면, 십자가의 죄패가 사복음서에 모두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역사적으로는 분명히 하나였을텐데, 그리고 심지어 세 언어가 달랐다고 하더라도 셋 이상일 수 없는데 서로 다른 네 개의 기록은 단순한 근본주의적 논리로는 해결될 수 없는 난제가 아닐 수 없다. 사실상 동일한 단순논리를 가진 자유주의자도 이를 보고 성경의 오류라고 지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류가 아니라 차이인 것이다. 복음서에는 그 외에도 많은 차이들이 있으나, 그것은 대상과 상황, 기자와 전통에 따라 다른 차이로서, 오히려 다양한 상황에 말씀을 적용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이다. 실로, 그와 같은 차이들은 문제가 아니라 축복이며 해석의 보고(寶庫)인 것이다. 차이에 의미가 있다. 차이도 성령의 영감에 의한 것으로서,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그 차이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진실한 축자영감설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런 차이는 복음서에만 존재하지 않고, 구약의 역사서도 같은 내용을 사무엘-열왕기와 역대기가 복수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엄격히 말하자면 바울의 많은 서신서나 여러 사도들의 글들, 또는 신명기나 선지서들을 비롯하여 모든 성경이 다소의 차이들을 내포하고 있다. 정경(canon)은 하나님을 섬기는 복수적 전통을 복음의 본질이 허용하는 한에서 함께 포용하고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기독교와 바울이 주도하는 이방기독교가 서로 다른 전통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급기야 예루살렘 회의가 소집되었으나, 사도들의 회의는 복수적 전통을 허용하기로 결정하였고, 이것이 교회의 하나됨을 유지하는 원리가 되었다. 기독교는 한 지도자의 신학이나 한 교파의 전통에 획일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복음의 한계 내에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를 포용하며, 여기에 기독교가 세계종교로 발전할 수 있는 포용적 위대성이 있다.
20세기에 과열된 성경관 논쟁은 마치 성경관이 기독론이나 구원론보다도 더 중요한 기독교의 중심교리인 것같이 주장하였다. 66권중에 한권이라도, 아니 한 장이라도 부정하면 이단시되었다. 그러나, 개신교의 원조인 마르틴 루터가 ꡐ나는 에스더서를 너무 싫어한다. 없었으면 좋았을 뻔 했다ꡑ고 말한 것이나, 야고보서와 히브리서, 유다서와 요한계시록을 부록으로 첨부한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러면, 루터도 이단인가? 기독교의 모든 계파가 정통의 상징으로 추종하는 어거스틴이 구약성경을 39권이 아니라 외경을 포함하여 44권으로 인정한 사실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사실은 우리가 순수하다고 믿는 초대교회에서도 에스더를 비롯하여 신약의 논란서(antilegomena) 일곱권이 오래동안 거부되었다. 즉, 66권이 아니라 60권으로도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요한복음이나 에베소서 한 권만으로도 그 내용을 모두 믿고 순종한다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나아가, 성경이 기록과정에 있었던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아직 아무 신약도 기록되지 않은 채 예수를 믿었던 50년 이전의 최초 그리스도인 세대는 물론 구약과 사도들이 있었지만, 복음을 가르치는 신약성경이 전혀 없이도 모든 성경을 가진 우리보다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성경 66권을 모두 믿고 순종할 때 완전한 신앙인이 될 수 있지만, 성경의 한 구절 차이를 가지고도 구원받을 수 없는 신앙으로 몰아부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오히려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복수적 전통과 비본질적 다양성을 수용한다는 포용의 고백이다.
구속사와 문화
한편, 성경의 다양성은 단순한 문자적 해석의 한계를 보여준다. 성경은 다양한 장르와 수사법을 사용하고 있어서 올바른 해석을 필요로 한다. 사실적 서술을 실존주의자들과 같이 상징적으로 이해해서도 안되지만, 상징적 구절을 사실적으로 단정해서도 안된다. 또한 성경에서 보다 분명한 말씀과 모호한 말씀, 보다 중요한 말씀과 부수적인 말씀이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조도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진리와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고 있다. 따라서, 보다 분명하고 중요한 구절을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ꡐ성경이 성경의 해석자(Scriptura Scripturae interpres)ꡑ라는 원리에 따라, 성경의 개 구절은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원만하고 조화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거꾸로 자기가 선호하는 구절을 중심으로 모든 성경을 견강부회하는 것은 이단들의 해석방법이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과거의 기록에 그치지 않고 ꡐ살아있는 말씀(The Living Word)ꡑ이라는 사실이 고백되어야 한다. 고대의 기록을 통해 현재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이것은 성령께서 구속사의 발전에 따라 항상 새롭게 말씀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노예해방 문제를 두고 남부지역의 교회들이 성경이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노예해방을 반대하고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보수하는 신앙심으로 전쟁에 임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이룬 후 1800여년이나 구속사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1세기에 머물러 있는 잘못된 성경관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도 성경을 사랑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같은 우를 범하고 있다. 복음의 본질은 영원히 변하지 않지만, 문화적 다양성과 구속사의 진보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는 생동적 신비를 고백하고 구속의 역사에 힘차게 참여하는 살아있는 신앙이다.
무지 - 오바댜 세즈윅
번호 : 25 작성자 : 김재윤 작성일 : 2001-11-26 조회수 : 58
무지가 지배한다면, 죄는 쉽게 그 마음을 지배할 것입니다. 모든 죄악된 지배는 무지에 의해 힘을 부여받게 됩니다. 사탄은 어둠의 왕이며 사람들을 눈멀게 하려고 애씁니다. 적그리스도는 어둠의 자식으로서 모든 것 위에 군림합니다. 그는 무지로 자기 왕국을 세웁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의 지배는 무지에 의해 유지됩니다.
그러므로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의 죄는 하나님의 말씀과 지식에 반대됩니다. 죄를 식별하지 못하고 죄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 또 죄를 모르는 사람은 죄에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죄수는 자물쇠 아래, 그리고 토굴 감옥에 단단히 갇혀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이 이런 본성적인 죄의 지배를 극복하려면 지식, 즉 두 가지 지식을 마음 속에 지녀야 합니다.
하나는, 직접적인 지식, 즉 죄에 대한 분명하고도 참된 이해입니다. 주님은 죄의 적절한 본성과 참된 결과는 제시해 주십니다.
또 하나는, 반성적인 지식입니다. 하나님은 그 죄를 아주 비열하며 가증스럽고 두려운 것으로 밝혀 주셨습니다. 그런 죄악이 여러분 안에 존재하면서 활동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어둠의 권세 아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단단히 지켜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죄에 대해 민감하지 못하다면(그리고 죄를 알지 못한다며), 여러분은 죄 가운데 살다가 죽게 될 것입니다.
***절망 - 오바댜 세즈윅
번호 : 24 작성자 : 김재윤 작성일 : 2001-11-25 조회수 : 53
고의적인 범죄는 영혼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핀에 찔리거나 칼에 베이면 상처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예리한 칼에 찔려 깊은 상처를 입게 되면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모든 죄는 영혼의 피를 흘리게 만들지만 고의적인 죄는 양심을 산산조각 내버립니다.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극악무도한 죄를 범한 사람은 심판의 날에 근육이 쪼개지고, 관절이 떨릴 것입니다.
영혼의 모든 감각적 고통 중에서 가장 극심한 고통은 절망의 고통일 것입니다. 아, 절망이라니! 절망은 양심의 죽음의 고통입니다. 절망은 영혼에게 가해지는 매우 극심한 고통입니다. 절망에 찬 영혼은 하늘도 바다도 보지 못하고 지옥 가운데 머물 것입니다. 따라서 고의적인 범죄 행위는 절망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고의적인 죄악의 길을 걷게 되면 천국의 경고를 받아 돌이키는 대신 오히려 죄 가운데서 편안함을 느끼고 죄를 확신하게 됩니다.
영혼의 모든 감각적 고통 중에서 가장 극심한 고통은 절망의 고통일 것입니다. 아, 절망이라니! 절망은 양심의 죽음의 고통입니다. 절망은 영혼에게 가해지는 매우 극심한 고통입니다. 절망에 찬 영혼은 하늘도 바다도 보지 못하고 지옥 가운데 머물 것입니다. 따라서 고의적인 범죄 행위는 절망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고의적인 죄악의 길을 걷게 되면 천국의 경고를 받아 돌이키는 대신 오히려 죄 가운데서 편안함을 느끼고 죄를 확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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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란서의 소설가 에밀 졸라의 작품 「나나」의 주인공 나나는 어느 극장의 여배우였으나 사치와 허영에 빠져 매춘부로 전락하게 됩니다. 뛰어난 미모를 가진 그녀 주변에는 수많은 남성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모조리 몰락했습니다. 어느 백작은 가산을 탕진했고, 어느 은행장은 파산했고, 군 장성 형제는 공금 횡령과 자살로 파멸해 버렸고, 나나 자신은 천연두에 걸려 죽었습니다.
에밀 졸라는 말미에서 말했습니다.
ꡒ쾌락이라는 독소로 다른 사람들을 해치던 그 독소에 의해 비너스는 썩어 갔다. 마치 시궁창에 내던져진 고깃 덩어리처럼 썩어가고 있었다ꡓ
**미국 몬타나주의 가면 옐로우스톤(Yellow Stone)이라는 강이 있습니다. 이 강은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배경이기도 한 강인데 낚시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미국에 관광을 가면 이곳에 가서 많은 사람들이 낚시를 즐기는 것입니다.
그 환상적인 강 위에서 관광객들은 배를 타고 강물이 흐르는 대로 흘러가며 낚시를 합니다. 쇠붙이로 만들어진 미끼를 멀리 던졌다가 릴(reel)을 감아 올리면서 고기를 잡는 캐스팅(Casting)낚시를 합니다.
배의 노를 잡고 광관객들을 안내하던 사람 중에 폴(Paul)이라고 하는 젊은이가 있는데 그는 그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그 강과 더불어 자랐습니다.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그는 한때 건축업에 종사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옐로우스톤 강을 잊을 수 없어 사표를 던지고 낙향하여 낚시 안내원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가는 젊은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옐로우스톤강의 낚시에 관한 한 자타가 공인하는 제1인자였습니다. 배를 타고 낚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고기는 쉽사리 잡히지 않습니다. 열심히 모조 미끼를 던지고 쉴새없이 릴을 감아 올렸지만 번번히 허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배의 노를 잡고 있는 폴은 관광객들에게 아무런 도움말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기를 수십 분여―옐로우스 톤에서 고기 잡기가 쉽지 않다는 것, 아무 데나 낚시를 던져서는 아무 것도 건져 올릴 수가 없다는 것을 터득했을 때에, 마치 그때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그제서야 폴은 입을 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폴이 손가락으로 지시하는 곳을 향해, 그가 던지라 할 때 낚시를 던지고 감아 올리면 열 번 중에 일곱번은 어김없이 팔뚝만한 송어가 잡힌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물살의 속도, 흐름의 방향 그 리고 지형에 따라 고기가 어디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관광객들이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옐로우스톤강에 능통한 폴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옐로우스톤에서 태어나서 그 강에서 40년 가까이 낚시만 하며 살아온 폴이 고기잡이를 나서지 않으면 허탕치고 돌아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몇 해 전 우리나라에서 인간 승리의 한 표본으로 소개된 '장승수'라는 대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내신성적 5등급, IQ 113, 고등학교 졸업 6년 후에 입시를 준비한 지극히 평범한 청년이었는데, 5수를 거쳐 서울대학교에 당당히 합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참 재미있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자서전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에서 성공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말을 합니다. "자신은 남다른 재능이 있어서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1879년 독일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는 나이는 먹어 가는데 지적 성장이 너무나 늦어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는 '학습 불가한 아이'라고 절망적 평가를 내리기까지 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스위스 취리히 대학시험에 낙방하였다가, 재수하여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는뒤늦게 배움에 발동이 걸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가 되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곧 앨버트 아인슈타인입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 이후 21세기 최고의 물리학자로 인정받고 있는 스티븐 호킹 박사를 아실 것입니다. 그는 지금도 '근육위수축성 경화증'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도 21세기 신과학 혁명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 저는 성지순례를 가기 전에, 함께 가는 다른 목사님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야드 바셈(Yad Vashem)에 갑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잘 모른다고 하기에 여행업무를 취급하는 여행사 직원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야드 바셈에 갑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간다는 것을 확인하고 성지순례를 떠났습니다. 오래 전에 한 권의 책을 읽고 감명 받았던 내용의 조각을 보려는 마음을 품고 야드 바셈에 갔습니다.
야드 바셈(Yad Vashem)은 독일군에게 학살된 유대인 600만명을 기념하는 '학살 기념 박물관'입니다. 그 600만명의 유대인 희생자들 가운데 150만명이 어린이들입니다. 야드 바셈에 가보면 150만명의 어린이를 기념하는 방이 있습니다. 거기에 들어가 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캄캄합니다. 그 안에는 150만명의 어린이를 기념하는 150만개의 작은 불빛들만 비칩니다. 그리고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150만명의 어린이의 이름을 하나씩 하나씩 부릅니다. 캄캄한 그 방을 지나서 바깥으로 나가면 작은 뜰이 있는데 그곳을 [야누스 코르자크]정원이라고 합니다. 그곳 한편에는 한 어른이 겁에 질린 아이들을 팔로 감싸 끌어 안고 있는 조각이 세워져 있습니다.
폴란드의 작은 마을 학교에 독일 군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유대인 학생들을 잡아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아이들은 무서워 선생님에게 매달렸습니다. 야누스 코르자크 선생님은 유대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아이들의 손을 잡고 트럭에 같이 올랐습니다. 그 차가 어디로 간다는 것을 선생님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코르자크 선생님은 아이들을 끌어 안고 "얘들아, 걱정하지 말아라. 더 좋은 세상에 가게 될 것이다. 더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아이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코르자크 선생님은 트레블렌카 강제수용소 가스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희생되었습니다. 그 선생님을 기념하기 위해서 뜰에 조각을 해 놓은 것이 위의 사진입니다.
여러분, 코르자크 선생의 사랑이 참 사랑의 실천이 아닙니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은 창조주 하나님, 그분을 믿고 영원히 살며 천국에 갈 것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가정의 식구들을 정말 사랑하십니까? 얼만큼,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십니까?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예수 믿는 사람끼리 서로 사랑하십니까?
코르자크 선생 처럼 가스실에서 함께 죽어갈 만큼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삶의 현장에서 순간 순간 주님이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 아트 부치왈드라는 언론인이 친구와 함께 뉴욕시내에서 어느날 택시를 탔습니다. 목적지에 다다르자 친구가 운전기사에게 말했습니다.
ꡒ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운전을 아주 점잖케 잘하시는군요ꡓ
이 말을 들은 택시기사는 순간적으로 멍하니 있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ꡒ선생님은 혹시 도를 닦는 사람인가요?ꡓ
ꡒ아닙니다. 그저 추케세우는 것이 아니라 꽉 막힌 교통 체증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게 운전하시는 것이 감탄스러워 드린 말뿐입니다ꡓ
ꡒ아, 그래요ꡓ
그 말을 남기도 택시 운전사는 차를 몰고 갔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한 말을 했느냐고 언론인이 친구에게 묻자, ꡒ뉴욕에 사랑을 심기 위한 내 노력의 일환이라네, 이런 식으로 해야 뉴욕을 구할 수가 있네ꡓ라고 친구는 말하더랍니다. 친구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ꡒ아까 그 택시 기사가 하루에 20명의 승객을 태운다고 가정해보세. 그 기사가 기분이 좋으면 20명의 승객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겠지. 그러면 20명의 승객도 기분이 좋아져 회사 사람이랑 가족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겠지. 그러면 20명의 승객도 기분이 좋아져 회사 사람이나 가족들에게 친절하게 대할 것이고 그런 식으로 전파되면 적어도 100명의 사람들에게 전파되지 않겠나? 그 정도면 적은 숫자는 아니지ꡓ
ꡒ그러하기에 나는 날마다 다른 종류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 10명에게 기분 좋은 말 한마디씩 해주기로 결심하고 실행하려고 노력하고있네, 나 때문에 10명중 3명만이라도 기분이 좋아진다면 결과적으로 3000명의 사람들이 친절한 마음을 갖지 않겠나?ꡓ라고 친구는 말했다고 합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하고 언론인이 자기 친구에게 묻자, 그는 ꡒ효과가 없더라도 손해볼 일은 아니지 않는가? 남에게 수고한다고, 고맙다고 한 마디 말하는 것이 돈이나, 시간 들이는 일이 아니지 않는가?ꡓ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러면서 아트 부치왈드와 친구는 건물을 짓고 있는 공사장 앞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5명의 인부들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고 합니다. 친구는 발걸음을 멈추더니,
ꡒ참 대단한 일들을 하십니다. 공사장 일이란 무척 힘들고 위험한 일이겠죠ꡓ
인부들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친구를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ꡒ언제 완공되나요?ꡓ
ꡒ6월이요ꡓ
인부 한사람이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친구는 ꡒ멋진 건물을 짓고 계십니다. 매우 자랑스럽겠습니다ꡓ라고 말을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못 생긴 여자 한사람이 지나가는데 친구는 윙크를 보내면서 ꡒ저 여성이 학교 선생님이라면 오늘 저 선생님 반의 아이들은 신나는 하루를 보내겠지ꡓ라고 말하면서 친구는 주장하기를, ꡒ나는 혼자서 뉴욕을 바꾼다고 생각하지 않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스스로 실망하지 않는 것이라네, 뉴욕 사람들이 모두가 친절해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일세. 하지만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단 한 사람이라도 동참한다면 희망이 있을 것 일세ꡓ라고 친구는 말하더랍니다.
** 독일에 '뮌헨 바하 합창 관현악단'이 있습니다. 목사의 아들이며, 올겐 연주자인 칼 리히터씨가 창립한 단체입니다. 여기에 입단할 때 이런 서약을 합니다.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과 돈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몽땅 바하 음악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바친다"
과연 훌륭한 약속입니다. 그들처럼 우리도 이렇게 한마디 고백함으로 나의 인생을 걸고 서약할 수는 없겠습니까?
"나의 생명을 우주적인 하나님의 음악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바칩니다. "
** 제 1차 대전 때의 일이었습니다. 연합군과 동맹군으로 나누어 백병전이 벌어졌습니다. 끝내 터키군의 동맹군이 영국을 중심한 연합군에게 패하여 최후의 격전 장소 예루살렘으로 퇴각하여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영국의 연합군은 예루살렘을 겹겹이 포위하여 압축해 갔습니다. 터키군은 더 싸울 힘이 없어서 성문을 잠그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때 총사령관인 Alemby 장군은 영국의 황제 죠지 V에게 보고하여 최후의 공격 명령을 내리도록 전문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죠지 V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도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것은 불경죄를 범하는 것이다. 과거 바벨론과 파사와 로마가 성도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그들의 나라가 불경죄로 망했으니 하나님을 믿는 연합군이 어찌 또 다시 불경죄를 지을 수 있느냐? "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어찌 할 것입니까?"
"기도하라! "
이 명령은 몰지각한 어리석은 지식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총사령관 Alemby는 순종하여 전 연합군에게 기도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얼마 후 정찰대를 파송하여 예루살렘을 살펴보았더니 터키군대는 그 동안 불안에 싸여 초조히 공격받게 될 것을 기다리다 못하여 모두 땅굴을 파고 몸만 간신히 도망하였습니다. 그래서 Alemby사령관은 이것은 하나님의 승리이니 예루살렘 입성은 예배의 행렬로 하여야 한다고 하여 장군을 위시하여 모두가 도보로 입성하여 개선하였습니다. 그 날이 1917년 12월 9일이었습니다.
** 세계 제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국방장관이었던 뉴턴 베이커는 전쟁 중 유럽의 어느 야전 병원을 찾아가 부상병들을 돌아보다가 두 다리가 잘리고 한 쪽 눈과 두 눈을 잃은 병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얼마가 지난 다음 다시 그 병원을 방문했을 때, 베이커는 원장에게 그 청년이 살아 있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원장은 ꡒ간호원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ꡓ고 대답했습니다.
그후 베이커가 국방장관을 사임하고 죤스 홉킨즈 대학의 재단 이사장을 하고 있던 어느 해 졸업식에서 그는 박사 학위를 받는 눈 멀고 한 팔 없고 두 다리 없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바로 야전병원에서 본 그 젊은이였던 것입니다.
감격한 나머지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위로했더니 오히려 그가 ꡒ은퇴하셨다니 섭섭하시겠습니다. 아직도 보람된 일이 있을터이니 낙심말고 사십시오ꡓ라고 위로하더라는 것입니다.
용기를 잃지 않고 고난과 싸우는 사람에겐 영광이 오는 법입니다
**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한 여성이 하루는 눈이 아파 안과에 갔습니다. 의사는 ꡒ눈이 너무 지쳐 있군요. 당분간 휴식을 취하도록 하십시오.ꡓ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업무가 바빠서 한 시도 쉴 수 없었던 그 여성은 다른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만약 일하시는 곳에서 산을 볼 수 있다면, 눈이 피로할 때마다 그곳을 바라다 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눈의 피로가 풀릴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문제에만 시선을 두고 있다면 우리의 영적인 눈은 곧 피곤함에 지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안과 의사의 처방대로 산을 바라다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산이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지쳐 그 분을 바라볼 때 그 분은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와 함께 휴식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 저희의 문제들로 인해 힘겨울 때 저희의 도움되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옵소서"
당신의 눈을 주님께로 돌리십시오.
우리의 짐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커 보일 때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돌리고 그 부드러운 돌보심에 맡기자.
***영웅 나풀레옹의 안식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고 세계를 지배하려다 워털루 전투에서 폐전한 뒤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돼 있을 때의 일이다. 지난 날 그는 세계를 제패했던 영웅이었지만 죄인의 몸이 됐기에 좀처럼 남들에게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한 기자가 어렵사리 그를 인터뷰하게 됐다.
"지난 날을 회상할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나풀레옹은 눈을 지그시 같은 채 눈물을 흘렸다.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을 넘을 때였지. 잠시 전투가 그친 어느 주일 아침이었는데, 산 아래 조그만 교회에서 종소리가 울려왔지. 그 소리에 이끌려 교회로 들어갔다네. 나는 그때 눈물을 흘리며 인생 최고의 행복을 맛봤다네."
천하의 나폴레옹도 하나님의 집에서 안식을 찾았다. 탕자같이 방황했던 어거스틴도 주님 품에 안긴후에야 참된 평안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다
** 성도간의 의심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며 교회를 순회하는 채필근 목사님은 가끔 선교부 돈을 가지고 각 교회에 나누어주곤 했다. 한번은 돈을 잔뜩 넣고 순회하는 도중 외딴 곳에 이르러 객주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손님들이 많아서 둘이 묵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서로 잠자리에 누웠으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혹시 저놈이 내 가 잠든 사이에 돈을 훔쳐가지 않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난 다음날 주인이 차려다 준 상에서 겸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둘은 할 수 없이 서로 마주 앉아 식사기도를 하고 식사를 했다. 그랬더니 마주 앉았던 사람이 "선생님, 예수 믿는 어른입니까?" 해서 "네, 저는 채필근 목사입니다." 했다. 그는 깜짝 놀라면서 "저는 0 0 교회 장로입니다."고 하는 것이다.
**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고아의 아버지로 알려진 죠지 뮬러는 어느 날 40년 동안 동고 동락을 해 오던 아내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죠지 뮬러는 아내를 잃은 지 채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세일렘 교회의 저녁 집회에서 밝은 얼굴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ꡒ하나님은 무한하신 은혜로 제 아내를 오랫 동안 참고 견디어 온 고뇌로부터 건져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평안히 이르게 하셨습니다. 지금쯤 제 아내는 예수님을 만난 기쁨으로 감격에 차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정말 기쁩니다.ꡓ 어느 누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앞에 놓고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죠지 뮬러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ꡒ주님, 주님 안에 있으므로 죽음조차 오히려 기쁨인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음을 감사드립니다.ꡓ
당신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영원한 궁정의 문을 여는 황금 열쇠이다.
****값싼 은혜
독일의 신학자인 본훼퍼는 당시 독일 교회의 연약해진 원인과 독일교회의 능력과 사회를 향한
영향력의 상실원인을 말하면서 '"이는 교회가 '값산 은혜'개념에 집착해 있었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본훼퍼는 값싼 은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 회개없는 용서, 삶을 바꾸지 않고 용서만 가르치는 것,
고백없는 세례, 참된 신앙의 고백이 없이 의식에만 참여하려는 것,
교제가 없는 성찬, 하나님과 나 사이의 진정한 교제가 강조되지 않고 성찬이라는 형식만 강조되는 것,
십자가 없는 은혜, 희생없는 제자도, 그리스도를 따라가기를 원하고 축복 받기를 원하지만 희생을
거부하고 있는 성도들, 생활이 없는 그리스도, 삶이 없는 그리스도, 이것이 바로 값싼 은혜이다."고
그는 비판했습니다.
" 그 날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 갈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게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 가리라." 이것은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앞에
자신을 점검합시다. 나의 생활속에 이런 행함이 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삼았다면 참으로 내 삶속에
이러한 행위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뜻을 참으로 행하는가? 누가 나에게 어떠한
신앙사상을 가져와서 나를 미혹하거든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그들을 검검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가?
< 이렇게 행하라 : 이동원 >
** 바른 진리를 가르치라
한 교사가 사표를 제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ꡒ오늘날 학교에서 교사들은 교장을, 교장은 이사회를, 이사회는 학부형들을, 학부형들은 자녀들을 무서워하지만, 자녀들은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는다.ꡓ 이 이야기는 그만큼 교권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입니다. 이처럼 교권이 땅에 떨어지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우리나라 교육이 참진리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서둘러 참진리가 교육 현장에서 선포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ꡒ주님, 참진리가 교육의 장에서 선포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ꡓ
하나님 말씀에 입각한 참진리가 교육의 장에서 선포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에는 참진리에 입각한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
** 위대하신 하나님
오늘은 당신을 그토록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 이사야서 40장 12절과 15절을 근거로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첫째로, 하나님은 전세계에 있는 대양의 모든 물을 손바닥 안에 담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둘째로, 하나님께 있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되에 담을 수 있는 티끌에 지나지 않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300억 광년이나 되는 우주의 길이를 한 뼘으로 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넷째로, 우주에는 약 1,000억 개의 은하수가 존재하며, 그 은하수들이 각각 약 1,000억 개의 별들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들의 이름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어떻습니까? 당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정말 위대한 분이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당신이 바로 그분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감사하십시오.
ꡒ주님,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저희를 주님의 자녀로 삼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ꡓ
하나님의 위대함을 곳곳에서 발견하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경배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더 위대해지시는 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 분을 섬길 때 더 위대해진다.
***내일을 위한 오늘
이문희 목사(광천교회)
정신분석학을 수립한 프로이드(sigmund freud)의 글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바다를 항해하던 배가 파선이 되었다. 다행히도 선원 중 한 사람은 파도에 밀려 어느 섬에 도달했다. 그 섬의 사람들이 그를 발견하여 추장 앞으로 데려 갔다.
이 선원은 “이제 나는 죽었구나”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들은 그를 그 섬의 임금으로 모시는 것이었다. 그는 하루아침에 왕이 된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그는 심복을 불러 왜 자신이 임금이 되었는지 물었다.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신하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마마, 이 섬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왕을 세우는데 1년이 지나면 그 왕은 가까운 무인도로 보내어 나오지 못하게 하여 그곳에서 죽게 만듭니다.”
이 말을 들은 선원인 왕은 큰 고민에 빠졌고 그 날부터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궁리를 하였다. 그리고는 부하들을 명하여 한 척의 배를 짓게 하여 그 배에 곡식과 과일나무를 가득 싣고 문제의 무인도에 가서 심도록 하였다.
마침내 왕의 자리에 오른 지 1년이 되는 날 약속대로 그는 무인도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그 무인도는 더 이상 죽음의 섬이 아니라 그동안 뿌린 그대로 먹을 것이 풍족한 신천지가 되어있었다.
그가 안전하게 또 배부르게 그곳에서 보냈을 것이라고 우리는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미래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의 무인도이다. 우리는 인생의 항로를 가고 있다. 현실에 안주하면 미래는 사망의 무덤이 될 것이요, 왕 된 선원처럼 현실의 만족이나 자만에 빠지지 않고 내일을 위해 오늘을 준비하며 산다면 무인도는 분명 낙원으로 변해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이 매우 소중하다. 나는 가끔씩 아이들에게 이렇게 교훈 한다.
“너희가 지금 해야될 일을 힘들고 하기 싫다고 하지 않으면 너희는 평생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인생을 힘들게 살 수 밖에 없지만, 만약 너희들이 힘들지만 꼭 해야될 일을 하면 평생토록 하고싶은 일을 하면서 인생을 아름답게 가꿀 수가 있단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왕 된 선원처럼 왕의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 「오늘」은 전혀 다른 감동으로 찾아 올 것이다.
***믿음은(적어도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순종하며 살게 하는 힘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출발은 많이 소유하고 가지고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완성은 더 많이 포기하고 내려놓고 버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만사형통이 아니라 만사불통인 순간에도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은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 아니라 믿음은 문제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하는것입니다.
믿음은 소원성취가 아니라 사방이 막혀 있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숙한 믿음은 최악의 상황을 최선의 상황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속에서도 최선의 삶을 살게 하는 힘입니다.
믿음은 감옥문을 열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감옥안에서 찬송하게 하는 힘 입니다.
진짜 믿음이란 감옥을 궁궐로 바꾸어 주는 것이 아니라, 감옥 같은 환경 속에서 나의 마음을 궁궐같은 마음으로 바꾸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악의 상황 속에서 최선의 삶을 가능케 하고, 최악의 조건 속에서 최고의 감사를 하게 만드는 힘이 믿음 입니다.
진짜 믿음은, 환경과 형편을 나아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시각과 관점 그리고 해석 능력을 바꾸어주는 것입니다.
이 믿음에 대하여 끝없이 묵상 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성숙한 믿음이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소유하고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꿈에도 소원하는 것들을 포기하고 내려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날마다 바울 처럼 죽어야 합니다.
내가 살아 있는 만큼 포기는 어렵고 포기되지 않는 부분 만큼 우리의 마음은 지옥 입니다.
지금 세상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흔들릴땐 흔들리지 않는 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지금 흔들리지 않는 것은 말씀 뿐입니다.
감정도, 돈도, 환경도, 명예도, 직장도, 미국도, 과학도 ----- 많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요새시며 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위에 우리의 삶을 얹어 놓으시면
우리의 삶은 요동치 않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아무 응답이 없고 아무런 징조가 없는 그 순간에도 또 다시 기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큰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다리고 바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축복이 당신의 가정과 기도제목과 아픔과 한과 억울함과 분함과 상처속에 날마다 스며들기를 소원 합니다.
그리고,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주님의 위로와 격려하심이 당신의 모든 과거 현재 그리고, 작은 신음까지도 치유하시고 고쳐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범사가 하나님으로 해석되는 놀라운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당한 그리고, 당하고 있는 어떤 고난과 아픔의 size보다 은혜주심의 size가 더 크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대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편견과 오해가 풀어졌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때문에 얼마나 우리는 갈등하고 혼돈하고 아파하고 목말라 합니까?
여러분 잘 아시죠?
진짜 믿음은 까닭없이 주님을 좋아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욕심 내시기를 기도 합니다.
***항아리에 돌 넣기
어떤 시간관리 전문가가 한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이 전문가가 경영학과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명확히 하기 위해,
(학생들이 잊지 못할) 어떤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을 했습니다.
경영학과 학생들앞에 선 이 전문가가 말했습니다.
"자, 퀴즈를 하나 해 봅시다."
그는 테이블 밑에서 커다란 항아리를 하나 꺼내가지고 테이블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먹만한 돌을 꺼내 항아리 속에 하나씩 넣기 시작하였습니다.
항아리에 돌이 가득하자 그가 물었습니다.
"이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습니다.
"예"
그러자 그는 "정말?" 하고 되묻더니, 다시 테이블 밑에서 조그만 자갈을 한 뭉큼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항아리에 집어넣고 깊숙히 들어갈 수 있도록 항아리를 흔들었습니다.
주먹만한 돌 사이에 조그만 자갈이 가득 차자, 그는 다시 물었습니다.
"이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눈이 동그래진 학생들은 "글쎄요" 라고 대답했고, 그는 "좋습니다" 하더니, 다시 테이블 밑에서
모래주머니를 꺼냈습니다. 모래를 항아리에 넣어, 주먹만한 돌과 자갈사이의 빈틈을 가득 채운 후에
다시 물었습니다.
"이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학생들은 "아니요." 라고 대답했고, 그는 "그렇습니다." 면서 물을 한 주전자 꺼내서 항아리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전체 학급에 물었습니다.
"이 실험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한 학생이 즉각 손을 들더니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매우 바빠서 스케줄이 가득 찼더라도, 정말 노력하면, 새로운 일을 그 사이에 추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시간관리 전문가는 즉시 부인했습니다.
그리고는 말을 이어 갔습니다.
"그것이 요점이 아닙니다.
이 실험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만약 당신이 큰 돌을 먼저 넣지 않는다면, 영원히 큰 돌을 넣지 못할
것이다' 란 것입니다."
인생의 큰 돌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하고 있는 프로젝트입니까?
사랑하는 가족들과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신앙? 재물? 승진? 사업? 우정? 신의? 봉사?
오늘 밤에 이 이야기를 회상하면서, 한번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요.
'내 인생에서, 내 직업에서, 큰 돌이 과연 무엇인가?'
여러분의 큰 돌이 무엇이 되었든, 그것을 항아리에 가장 먼저 넣어야 한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마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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