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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8. 묵상글 (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 다 나에게 있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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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8.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다 나에게 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의 치유 얘기입니다.
나병은 인간의 힘으로는 지금도 치유가 불가능한 병입니다.
물론 여기서 치유란 병에 걸리기 이전 상태로 돌리는 것을 말하기에
요즘도 병의 진행은 막을 수 있을지언정 치유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시대는 더더욱 치유가 불가능한 병인데
주님께서는 자기를 치유해주실 수 있다고 하는 그의 믿음은
대단한 믿음이고 인간의 능력 이상의 능력이 주님께 있다고 믿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치유가 어려운 병일수록 치유 가능성은 믿음의 영역이고,
불치병의 치유는 더 많은 믿음이 요구되는 영역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이고,
아주 드문 믿음의 소유자이지요.
사실 그 당시 그 말고도 나병환자가 수많았을 텐데
그들은 치유를 불가능한 것으로 믿고 고치려고 들지 않았고,
예수님께도 불가능한 것이라고 믿고 치유를 청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여러 차례 얘기한 내용이지만 인간은 다 믿는 존재입니다.
가능을 믿는 존재와 불가능을 믿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한다고 믿는 존재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존재가 있을 뿐이고,
전능하시다고 믿는 존재와 그렇지 않다고 믿는 존개가 있을 뿐이며.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믿는 존재와 그렇지 않다고 믿는 존재가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믿는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선택입니다.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하느님도 불가능하다고 믿고,
하느님은 사랑이 아니라고 믿기로 인간은 선택할 수 있고,
그렇게 선택한 인간은 나병을 운명 또는 숙명으로 알고 살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능이 없으시고 사랑이신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나병은 운명(運命)도 숙명(宿命)도 아닌 하느님의 뜻 곧 신명(神命)이라고 믿고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 곧 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에 자기 나병을 맡길 것입니다.
나병을 주신 분도 하느님이시니
나병을 고쳐주실 분도 하느님이시며
고쳐주실지 말지는 오로지 하느님의 뜻이라는 믿음과 순종으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았지만 사렙다 마을의 과부만 구해주시고,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나병환자가 많았지만 나아만만 고쳐주셨다고.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도 이런 믿음으로 하느님 뜻 곧 처분에 자기를 맡깁니다.
나병을 주신 하느님이 나병을 고쳐주시는 것도 하느님 뜻이고 사랑이며,
나병을 주신 하느님이 고쳐주시지 않는 것도 하느님 뜻이고 사랑이라고
믿고 사랑이신 하느님의 선하신 뜻에 맡깁니다.
이렇게 믿는다는 그리고 맡긴다는 오늘 나병환자의 믿음에
주님도 배신하실 수 없으셔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맡길 것인가? 말 것인가?
다 나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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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8.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떤 형제님께서 제 강의를 듣고 배우자인 아내에게 “사랑한다.”라는 말을 많이 하기로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에 가자마자 “여보, 사랑해.”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아내의 반응은 어떻게 돌아왔을까요?
“나 몰래 뭐 잘못했어? 그것도 아니면 뭐 잘못 먹었어? 무섭게 왜 그래?”
이런 아내의 반응에 남편은 깜짝 놀랐습니다. 진심 어린 자기의 사랑 고백을 이렇게 받아들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랑한다는 말은 남편이 평소에 잘 하지 않던 말이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일심동체니까 자기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말하지 않기 때문에 다 모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사랑의 말, 따뜻한 말,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말…. 특히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런 말을 아끼지 않고 해야 상대방이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말하는 것에 돈이 드는 것도 또 자기 체면이 깎이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말을 하면 자기에게 더 큰 이득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좋은 말은 아끼고 나쁜 말은 과감하게 토해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런 모습이 사람과의 간격을 더 멀게 만듭니다.
주님과의 간격도 좋은 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불평불만, 원망의 말만 하면서 과연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미사 때 이루어지는 응답에 전혀 진심을 담지 않으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도 ‘제 마음 다 아시죠?’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니었나요?
주님과의 기도 내용에 따라 주님과의 관계도 쉽게 파악됩니다. 전혀 믿음 없이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또 급할 때만 주님을 찾으면서 바치는 기도, 자신의 청원을 들어주시면 자기도 무엇을 하겠다는 협상의 기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자기는 의인이라면서 당연히 들어줘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 협박의 기도 등등…. 모두 믿음 없는 기도입니다. 믿음의 기도를 오늘 나병 환자의 모습에서 발견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 앞에 다가간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나병 환자는 일반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도 자기 뜻이 먼저가 아니라 주님 뜻이 먼저였습니다. 이렇게 용기를 내어 당신 앞에 나아오고, 그리고 자기 뜻보다 주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그 믿음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은 어떤 모습일까요? 나병 환자의 용기 있고 주님의 뜻을 먼저 따를 수 있는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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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가족이 지니는 의미는 그냥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지켜봐 주는 누군가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려주는 것이다(미치 앨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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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8.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통하여, 당신의 권위를 드러내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열 개의 기적 이야기를 통하여, 당신의 권위를 드러내십니다. 이는 마치 이집트에 내린 열 개의 재앙(탈출기 7,14-12,36)과 대비하여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암시해줍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를 통하여 가르치신 바를 몸소 성취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하산은 당신이 구원해야 할 하느님의 자녀들에게로 오실 수밖에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치유를 통해 예언자 ‘엘리사의 활동’을 완성함으로써(2열왕 5,1-27), 당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십니다.
나병환자는 <레위기>(13,45-46)에 따르면,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윗수염을 가림으로써 자기가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음을 드러내야 했고,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날 수도 없었으며,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도 없었습니다(민수 5,2-4). 그래서 혹시 누군가가 자기에게 접근해 오면,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레위 13,45)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약의 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의 한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와서 치유를 받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때문에 오히려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십니다.
<복음>은 이 처럼, 규정을 제시하기보다 사랑과 호의를 제시합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이는 주님의 치유의 능력을 믿으며, 그 능력의 행사는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있음을 인정하고, 오로지 주님의 처분에 온전히 의탁한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당신의 원의에 순명하겠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마치 겟세마니에서의 예수님께서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신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라고 하신 것처럼, 나병환자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 뜻에 순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한다면’ 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당신의 바람이 이루어지소서!’ 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는지요? 자신의 바람을 하느님께 원하고 있는지요? 아니면 하느님의 바람이 자신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혼자를 만지셨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를 만지거나 접촉하면 부정을 타게 됩니다(레위 14,46).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구원의 힘을 드러내며, 그분의 신체적 접촉은 우정과 사랑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결한 나병환자를 직접 접촉하심으로써 그에게 사랑을 베푸십니다. 나병환자를 접촉하시지만 부정을 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부정을 피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져 깨끗하게 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율법을 완성하시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규정보다도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더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그리하여, 당신께서는 불결함에 더럽혀지지 않는 “거룩하신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곧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시고, 당신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마치, 호렙산의 불꽃 속에서도 타지 않는 떨기나무처럼(탈출 3,2), 아기를 낳으면서도 동정성을 잃지 않은 성모님처럼, 불결한 이를 만지면서도 불결해지지 않으시고 오히려 불결한 이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태 8,3)
주님!
불순함으로 제 온 몸이 부스럼투성입니다.
죄와 상처로 속이 문드러지고,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불결하기에, 저는 망설이지만 당신은 오히려 불결하기에 다가오라 하십니다.
죄인이기에, 저는 숨지만 당신은 오히려 죄인이기에 용서받을 대상이라 하십니다.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소서.
제가 하고자 한 바가 아니라, 당신이 하고자 한 바를 이루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을 이루소서.
오, 주님! 당신이 원하신 것을 제가 원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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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8.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깨끗하게 되어라
어떤 나병환자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며 깨끗이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병의 원인이 무조건 환자 자신의 죄나 부모의 죄, 드러나지 않은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병자나 장애인은 그 자체로 죄인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이들은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죄인이라는 낙인으로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나병환자는 격리되어 지내야 했습니다. 가족은 물론 사회에서도 소외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불치의 병이고 전염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록도, 안양 나자로 마을, 경북 칠곡 등에 따로 모여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철저히 소외시키고 외면했습니다. 육체적, 종교적, 사회적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시면서 고쳐주셨습니다. 보통 사람이면 감염의 위험 때문에 결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결핵이 유행할 때 ‘폐병’이라고 해서 그의 곁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서로를 경계해야 했고,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서서 환자들에게 치유의 손길을 내밀어 고쳐주셨습니다. 한마디로 낫게 할 수도 있었는데 손을 대시며 마음을 쏟아주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을 거두어 준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종교적 단죄에서 그리고 사회적 소외에서 해방 시켜준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덕분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방법은 고통 중에 있는 그 사람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 모두를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치유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할 일도 생각합니다. 능력의 주님께서 기적을 보여주셨는데 그 바탕에는 나병환자의 믿음이 한몫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하고자 하시면’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말에 예수님께서“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응답하시며 고쳐주셨으니, 나병환자는 자신의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드린 것입니다. 믿고 구할 때 주님께서는 그 간절한 청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외적인 나병을 치유 받아야 하지만 우리 영혼의 치유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꼬이면 그것이 겉으로 드러납니다. 드러난 병보다 마음의 병이 더 무서운 것이고 그래서 그 병을 깨끗이 치유 받아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쌓여만 가는 교만함과 나태함, 이기적인 습성들을 인정함으로써 새로 나야 합니다. ‘하고자 하시면 낫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을 모시고 산다는 것이 우리의 큰 기쁨이기를 바랍니다. ‘보통 의사는 병의 증세를 보고 그것을 다스리지만, 명의는 병의 뿌리를 다스린다.’고 합니다. 뿌리를 다스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으니, 죄의 용서를 통해 마음의 자유를 누릴 수 있길 희망합니다. ‘죄의식으로 말미암은 병은 죄의식을 없애서 고쳐야 하고, 잘못된 생활습성 때문에 생긴 병은 그것을 바로잡아서 고칠 일’(이현주)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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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8.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98년 제기동 본당의 보좌신부로 있을 때입니다. 중고등부 학생들과 칠갑산 청소년 수련장으로 여름 캠프를 갔습니다. 둘째 날에 본당 신부님께서 사목위원들과 캠프장으로 방문 왔습니다. 먼 길인데도 더위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사목위원들은 학생들을 위해서 간식을 준비해 왔고, 본당 신부님은 필요한 데 쓰라면서 격려금을 주셨습니다. 신부님은 아이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보시고, 바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1시간 정도 머물기 위해서 왕복 8시간을 걸려서 왔습니다. 신부님에게 왕복 8시간 걸리는 거리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당의 어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신부님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2024년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학생들이 부주임 신부님의 인솔 하에 오스틴에 있는 피정의 집으로 여름 캠프를 갔습니다. 저도 사목위원들과 함께 왕복 8시간이 걸리는 피정의 집으로 격려차 방문했습니다. 아이들은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본당 신부님이 그랬던 것처럼 격려금을 주고, 1시간가량 머물다가 돌아왔습니다. 다행히 적당히 구름이 낀 날이어서 운전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한 가지 해프닝이 있었는데 제가 선글라스 케이스를 가져간다는 것이 서두르는 바람에 면도기 케이스를 가져갔습니다. 선글라스를 쓰려고 케이스를 열었는데 면도기가 나와서 조금 당황했습니다.
왕복 8시간을 길 위에 있으면서 ‘길’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습니다. 길은 ‘길들이다.’라는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길이 원래 있던 것이 아니라, 걷다 보니 길이 되는 거라고 합니다. 대관령도 미시령도 새로운 길이 나면서 옛길은 차량 통행이 적어지고, 그러다 보니 길이 잊혀지는 걸 보았습니다. 산보할 때도 그렇습니다. 매일 같은 길을 걷다보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니 덜 피곤하고, 덜 피곤하니 산보가 즐겁습니다. 인류는 살아오면서 가축을 길들였습니다. ‘개, 양, 소, 말, 낙타, 닭, 고양이, 돼지’는 인류가 길들여서 같이 지내는 가축입니다. 신발도 처음에는 발에 익숙하지 않지만 자꾸 신으면 길이 들어서 편하게 신을 수 있습니다. 사제복도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자꾸 입으면 사제복이 편하게 느껴집니다. 사람들은 편하고, 기능이 좋은 것을 선택하지만 때로는 조금 불편해도 익숙한 것을 선택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면 서로 닮는다고 합니다.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잘 키운 부부는 닮은 모습이 많습니다. 그만큼 서로에게 맞추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선한 눈빛이 비슷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말투가 비슷하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 비슷합니다. 제가 본당 신부님께서 격려 방문한 것을 배웠듯이, 부주임 신부님도 언젠가 그렇게 하리라 생각합니다. 따뜻한 마음은 서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나병환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나병환자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나병환자는 자포자기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였습니다.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만 보았습니다. 나병 때문에 영혼까지 병들고 말았습니다. 어떤 나병환자는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이 나병환자가 된 것은 부모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온 나병환자는 스스로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죄나 자신의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갈망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나병환자는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외모는 깨끗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도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외모와 건강만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깨끗하고 건강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허물을 보면서 어쩌면 우리의 내면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부로 외면하는 때도 있습니다.
신앙은 어쩌면 하느님의 사랑에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에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먼저 신앙의 길을 걸었던 성인, 성녀들의 삶에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에 길들여졌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함께 하시지 않지만, 길들여진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주님을 찾아가서 자신의 갈망을 이야기했던 나병환자처럼 우리들 또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혼을 치유해 주시도록 주님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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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8.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가끔 복음을 묵상하다 보면 재미있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오늘 복음과 같이 끝날 때는 더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 환자에게 주님께서는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말하지 말고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증거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나병 환자는 주님의 함구령을 지켰을까요? 지키지 못했을까요?
어떤 사람은 지켰다고 말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지키지 못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저는 지키지 못했다는 것에 한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나병에서 해방된 기쁨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나병에서 해방됐다는 뜻이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외국에서 나병 환자분들과 잠시 지냈습니다. 그래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원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떠들고 장난치고 밥 먹고 거니는 것이 그들이 원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면서도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할 것들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는 그 소중한 것을 다시 찾았습니다. 사람들과 떨어져 살지 않아도 됩니다. 다시 사랑하는 사람들과 집에 머물며 함께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웃을 수도 있습니다. 손을 잡을 수도 있습니다.
저라면…. 제가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라면 동네방네 소리치며 기쁨을 누렸을 것입니다.
아마 주님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 기쁨을 감출 수 없으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도 사제에게 증거로 몸을 보여야 마을에 들어갈 수 있으니 잊으면 안 된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너무나 큰 기쁨은 숨긴다고 해서 숨겨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 기쁨이 우리 삶의 곳곳에 숨어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선물을 만날 때마다 숨김없이 기뻐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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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의 향기
부산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동백섬’입니다.
동백섬은 ‘동백꽃으로 가득한 섬’이라는 뜻입니다.
일본 고토 지역을 순례하던 중 작은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게 됐습니다.
그 성당은 자연 채광이 너무나 예쁜 성당이었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창들은 자연의 빛을 더욱 아름답게 바꾸어 성전 안으로 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대 양쪽에 크게 자리한 스테인드글라스는 특이했습니다. 왜냐하면 꽃의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양은 분명 동백꽃의 모양이었습니다.
그때 들었던 그 지역의 설명이 생각났습니다.
장미를 키울 자연조건이 안돼서 장미와 비슷한 동백을 그 지역 사람들은 성모님께 봉헌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런 신앙인들의 정성을 떠올린 순간 미사의 모든 순간이 꽃과 꽃 빛깔과 꽃향기로 가득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동백꽃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성모님께 바친 장미만큼 아름다운 꽃이 바로 동백꽃이라는 의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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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8.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의 중심
“그리스도 예수님”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시편23,1)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 삶의 중심임을 고백하는 시편 성구입니다. 말마디를 바꾸어 “주님은 나의 목자 두려울 것 없노라”, “주님은 나의 목자 걱정할 것 없노라”, “주님은 나의 목자 불안할 것 없노라”로 고백해도 그대로 통합니다. 35년 동안 수도사제로 살아오면서 강론 주제중 참 많이 이용했던 주제가 “삶의 중심, 그리스도 예수님”일 것이며 오늘 강론 주제도 똑같습니다.
삶의 중심을 잃어 방황이요 혼란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삶의 중심인 주님께 날로 깊이 뿌리 내릴 때, 안정과 평화요, 불안과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베네딕도의 평화도 바로 삶의 중심인 하느님께 깊이 뿌리내리는 믿음의 정주서원을 통해 이뤄집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입니다.
“어른이란 흔들릴 때마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존재다. 꾸미고 감추려는 마음을 덜어내야 진짜 어른이다.”<다산>
“어른은 예가 아닌 예와 의가 아닌 의를 행하지 않는다.”<맹자>
노인은 많아도 어른은 드물고, 선생은 많아도 스승은 참으로 귀한 시대라 합니다. 보고 배울 어른이, 스승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어른중의 어른이, 스승중의 스승이 주 예수님이요 이런 주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배우며 살아가는 우리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히 보고 배울 스승이자 주님이 계신 것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무리 바쳐도 늘 새롭게 와닿는 우리 삶의 중심이신 스승이자 주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행복과 내적 힘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영원한 참 어른을 닮아갈 때 진짜 어른이요, 고맙게도 우리 가톨릭교회는 무수한 진짜 어른들이 있으니 바로 성인들입니다.
오늘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2년 그리스도인 일치주간중인 1월21일 리옹의 이레네요 성인을 ‘일치의 학자’로 공식 선언함으로 교회의 37번째 학자가 됩니다. ‘일치의 학자’ 참 멋진 호칭입니다. 문득 며칠전 주고받은 메시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내조의 여왕’이란 너무 멋진 호칭을 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찬미 예수님! 신부님, 약 40여명 시댁 가족들과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꽃바구니 상을 받았습니다.”
꽃바구니 사진을 확대해 보니 “내조의 여왕 제현주님”이라 씌어 있었습니다. 시댁식구들에게 얼마나 인정을 받았기에 이런 칭호를 받았겠나 그 자매님이 존경스러웠고 즉시 답신을 보냈습니다.
“아, 오래만에 반갑습니다. 40여명 시댁 가족들 모였다니 놀랍습니다. ‘내조의 여왕’ 참 멋진 호칭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늘 이렇게 사시고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레네오 성인을 교회학자로 선언하는 교령에서 말합니다. “위대한 스승의 교리를 통해 더욱더 많은 주님의 제자들이 완전한 일치를 향해 걷는 여정을 만들기를 바랍니다. 리옹의 이네네오는 동방에서 태어났고 서방에서 주교직무를 수행했으며, 동방과 서방의 그리스도인들을 영적 신학적으로 이어주는 다리가 됐습니다.”
이레네오 성인은 130년경 지금의 터키인 스미르나에서 태어났고, 요한 사도로부터 교육을 받은 성 폴리카포로 주교 순교자로부터 설교를 들은 뒤 사제품을 받습니다. 그가 리옹의 주교가 된 후 저술한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나는 소년시절 소아시아에 있으면서 성 폴리카르포 선생님의 슬하에서 배운 일이 있다. 나는 지금도 선생님께서 앉아계시던 곳, 그 가르치는 모습이나 가르치신 말씀, 그 걸어 다니던 모습이나 용모들을 뚜렷이 기억한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성 요한과 기타 주님을 친히 뵌 이들과 교제하던 말씀이나 주님에 대해서 즉 주님의 성덕, 그의 가르치심에 대해 그러한 사람들한테 전해들은 이야기등은 아직 나의 귀에 여전히 남아있다.”
사도교부들의 전통과 모범을 그대로 이어받은 성 이레네오 주교입니다. 성인은 170년경 현재의 프랑스 골 지역에 있는 리옹의 두 번째 주교가 된 이후 프랑스 지방에 만연된 영지주의 이단과 피나는 싸움을 전개했는데, 이때 쓴 저서가 <이단논박>에 이어 <사도적 선포의 논증>입니다.
성인은 이단사상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면서 동시에 초기교회의 정통신앙을 확립합니다. 가톨릭교회의 수호자로 불릴 정도로 2세기 신학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으며, 특히 영지주의 계통의 이단들에 대항하여 정통교리를 수호한 대표적인 자랑스러운 교부입니다. 말그대로 이단들과 치열히 싸워 영적승리를 거둔 주님의 용사 성 이레네오 주교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빛나는 제자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이레네오 주교입니다. 어제로서 마태5장-7장까지 산상설교는 끝나고, 오늘 8장부터 9장까지는 주님의 활약이 펼쳐집니다. 말씀의 권위가 이제는 행위의 권위로 들어납니다. 산에서 내려오자 맨먼저 다가온 이가 나병환자입니다. 참으로 삶의 중심이 되는 착한목자 예수님을 만나 치유 구원받은 복된 나병환자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역시 ‘연민의 마음’, ‘권위있는 말씀’, ‘사랑의 스킨쉽’이 치유의 삼박자 원리임이 드러납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예나 이제나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이 치유의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삶의 중심인 주님을 만남으로 치유받은 나병환자는 이제부터 삶의 중심이신 주님 반석 위에 인생집을 짓게 됐음을 봅니다. 이어 예수님은 그에게 말합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예수님이 얼마나 구약의 율법을 존중하고 준수한, 살아 있는 전통의 사람인지 깨닫습니다. 율법에 대한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겠습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철저했던 우리의 주님이자 스승이신 예수님입니다.
이런 예수님이나 오늘 기념하는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와 비교할 때 제1독서 열왕기 하권의 유다임금 치드키야는 참으로 어리석었습니다. 하느님을 중심한 지혜와 겸손의 사람이었다면 이런 참화는 결코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독서 앞에 나오는 대목 둘입니다.
‘치드키야는 여호야킴이 하던 그대로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2열왕24,19)
‘그런데 치드키아가 바빌론 임금에게 반역하였다.’(2열왕24,20ㄴ)
치드키야의 어리석음이 자초한, 자업자득의 화로 바빌론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은 초토화되며 두 아들은 살해되고, 그는 두눈이 뽑힌채로 청동사슬에 묶여 바빌론으로 끌려가니 비극의 절정입니다.
참으로 주님 중심의 삶에 충실함으로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삶이 되지 않도록 늘 깨어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는 시간이요, 하늘에 보물을 쌓는 시간이자 우리 인생집을 주님 반석위에 짓는 복된 시간입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병고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 짊어지셨네.”(마태8,17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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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8.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기도>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나조차
어찌 할 수 없는
나이오니
나에게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당신께서
내게서
하고자 하신 바를
이루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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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8.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태 8,4)
사제의 확증
나병 환자가 깨끗이 나으면 그 사실을 개인적 판단에 맡기지 말고 사제에게 몸을 보여야 하는 것이 고대의 법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제가 직접 눈으로 그 사실을 확인하면 그는 깨끗한 사람에 속할 수 있었습니다. 사제가 그 사실을 확증해 주지 않으면, 그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거주지에서 떨어져 더러운 이들 가운데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8
영성은 깨어남이다
젊은이, 내가 이르노니, 일어나거라(루카 7,14).
우리 주님은 “젊은이, 내가 이르노니, 일어나거라” 하고 말씀하섭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내 안에서 듣고자 한다면, 나는 나의 모든 소유, 특히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마치 바다 저편에 있는 것이 내게 낯설듯이 말입니다. 영혼은 그것이 창조되던 때만큼이나 젊습니다. 늙음은 육체에 관련하여 영향을 미칠 뿐, 영혼은 감각 속에서 생생하게 활동합니다. 영성의 대가는 말합나다. “노인이 젊은이의 눈을 지녔다면, 그는 마치 젊은 사람만큼이나 잘 볼 것이다." 어제 나는 숙소에 앉아서 믿어지지 않을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곳이 나의 영혼 가까이 있듯이, 예루살렘도 나의 영혼 가까이 있다." 나의 몸이 나의 영혼 가까이 있는 것만큼, 예루살렘에서 천 마일이나 더 떨어져 있는 대상도 나의 영혼에 가깝습니다. 나는 내가 사람임올 확신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이 사실을 확신합니다. 학식이 있는 사제들이라면 내가 말하고 있는 바를 쉽게 이해할 것입니다. 나의 영혼은 그것이 창조되던 때만큼이나 젊습니다. 실로, 나의 영혼은 그때보다 더 젊습니다. 나의 영혼이 오늘보다 내일 더 젊어진다고 해도, 나는 전혀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194)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교부들의 격언
북아프리카와 근동에서는 이러한 공동체들에 속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장소로 사막이 있었고, 이 사막에서 은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나 공동생활을 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단체와 같은, 다양한 삶의 형태들을 가진 공동체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상을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사막은 세속적인 가치들로부터 자유로운 장소가 되었으며, 무엇보다 하느님을 위한 자유의 장소가 되었다. 또한 회개, 정화, 기도를 위한 장소, 하느님 곁에 있기 위한 장소, 단순하고 소박한 일과 생활의 장소가 되었으며, 유혹을 거슬러 싸워 나가는 장소가 되었다.
다양한 종류의 수도 생활을 위한 지침서가 된 것은 성서와, 수도 생활을 막 시작한 수도자가 경험이 많은 아버지와 같은 아빠스에게 의견을 청한 것에 대한 답을 모은 책들이다.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아빠스가 되는 것은 반드시 나이가 많아서만 히는 것은 아니어서 젊은 수도자도 아빠스가 될 수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만한 사실은 결코 나이 많은 아버지와 같은 수도자가 먼저 주도권을 쥐고 영적 지도를 하러 나서지 않는 점이다. 조언을 구하러 올 때까지 기다린다. 그렇게 하여 내린 말씀은 어느 특정한 구체적 상황에 맞추어 복음을 실천한 것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이들 자신이 살아 있는 복음 해설서가 되었다. 아빠스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는 매우 소중한 은사였고 구체적인 특정한 상황에서 그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질문을 청한 젊은 수도자는 그 말씀을 잘 간직하고 지켜 나갔다. 이렇게 하여 4세기 후반부에 수도자들의 아버지들이 하신 말씀들과 이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책으로 편집되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특정한 상황에 필요한 조언을 구한 것에 대답한 아빠스들의 말씀에 대해, 사람들은 성령으로 충만한 아버지의 말씀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의미를 지닌 격언(apophthegma)으로 느끼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 말씀들을 처음에는 작은 모음집들로 편집했다. 그러다가 차츰 이것들이 모이고 다시 편집되어 부피가 큰 책으로 편찬되었고 그리스도교가 전해진 모든 지역에 보급되었다. 이러한 종류의 “격언들(apophthegma)"의 책에서 일부 발췌하여 여기에 소개한다.(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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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8.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8, 2. 3)
「나는 치유되었다.」의 저자 밥슈츠는 이 책에서 예수님과 만남은 치유로 나아가는 여정의 첫걸음이라고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건강해지고 온전해지고 싶어 하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간 존재 구조 안에 낫고 싶은 강한 마음을 심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베네딕또 16세 교황의 말씀대로, 치유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목적을 위해, 곧 우리를 온전하게 회복시켜 아버지와 인간 상호 간의 충만한 친교 안으로 다시 데려오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고 믿습니다.』 성경의 수많은 사람, 곧 육체적인 여러 질병으로 죄인이라 불리고 손가락질받던 사람들, 부서지고 상처받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난 후 인생이 달라지는 기적을 체험했다고 전해 주고 있습니다.
산에서 제자들과 당신을 찾아왔던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뿐만 나병 환자 또한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사실 구약, 특히 레위기에 의하면, 이는 결코 있을 수 없고 해서도 아니 되는 행동입니다. 나병 환자는 레위기 13, 45~46에 의하면,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치면서 사람들이 물러나 근접하지 않도록” 해야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 환자가 예수님과 사람들을 피하도록 소리를 외쳐대지도 않았고 오히려 예수님께 가까이 접근해 엎드려 절합니다. 이 짧은 맥락을 통해서 우리는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 간의 극명한 차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의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건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건강하지 않은 나병 환자이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예수님을 통해 치유 받기 위해 다가왔고, 엎드려 간청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8,2)
나병 환자는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 존재 깊은 심층 곧 영혼 안에 심어 놓은 ‘건강해지고 온전해지고 싶은 갈망’에 따라 간절히 애원했습니다. 이는 곧 아빠 하느님께서 그를 예수님께 이끌어 데려온, 치유 받아야 할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예수님께 단지 자신의 바람을 들어주십사고 강요하지 않고, 온전히 그분의 뜻대로 하시도록 순명의 자세로 내어 맡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훗날 겟세마니에서 아빠 하느님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신 대로 하십시오.”(마태26,39)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이 나병 환자 또한 자신의 바람보다 예수님의 의향과 의지에 전적으로 내어 맡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바람보다 불가능이 없으신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어떤 일도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분께서 하시고 하시기에 우리의 삶에서 매일 기적이, 치유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만 이 나병 환자처럼 주님께 온전히 신뢰와 의탁의 마음으로 ‘건강해지고 온전해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아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간절한 마음을 보시고,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닌 깨끗하게 되어라.”(8,3)하고 말씀하시자,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주님의 말씀은 용서와 치유의 말씀이며 생명과 사랑의 말씀임이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산에서, 곧 기도하고 내려오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의 치유 이야기를 통해 우리 또한 단순히 우리의 욕구 충족과 바람만을 청하지 말고,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뜻대로 그리고 하느님께서 ‘하고자 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바람은 이루어질 것이며 이루어진 일을 통해 하느님께서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병고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 짊어지셨네.”(마태8,17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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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8.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이스라엘의 위대한 점은 주님 말씀에 충실하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들은 계속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거슬렀고 주님의 사랑을 저버렸습니다.
그들의 위대함은 자신의 실패를 감추지 않고 드러냈으며, 신앙의 눈으로 실패의 역사를 바라보고 이를 끝까지 기억하며, 그 책임이 온전히 자신에게 있음을 고백하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유다 왕국이 바빌론에게 멸망한 역사를 들려줍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과 모든 집은 불태워지고, 임금과 남은 백성은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갑니다.
이스라엘은 패배하고 이방인의 포로가 된 이 치욕적인 역사를 낱낱이 기억하며 그 원인을 살펴보았습니다.
자신들이 율법을 따르지 않았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어겼다는 것을 인정하며 반성합니다.
그래서 다시 계약에 충실하고자 주님의 말씀 자료들을 정리합니다.
그렇게 바빌론 유배 시기에 구약 성경이 정립됩니다.
실패의 역사를 회피하지 않고 신앙의 눈으로 반성한 이스라엘은 주님의 말씀을 다시 정립하게 되었으며, 그 경전으로 이스라엘은 더 충실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느님께 더 가까워지는 때는, 하느님께 충실하다고 자신하기보다 자신의 잘못을 잘 알고 그것을 돌아보며 주님의 자비를 청할 때입니다.
흠 없이 주님 뜻을 따르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보다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얼마나 죄인인지 절실하게 깨닫는 사람이 더 거룩하고 더 성숙하게 보입니다.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을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겸손하게 주님의 자비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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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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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8.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합니다.
여기에서 '엎드려 절하다'라고 표현된 동사는
인간이 하느님을 만났을 때
하느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동사입니다.
즉 그는 예수님의 신성을
자신의 행동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입으로도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합니다.
그가 말하는 '주님'이라는 칭호 역시
구약에서는 성부 하느님께만 사용된 단어입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께서 나병을 치유하실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의 신앙 고백에 예수님의 의지가 화답합니다.
'내가 하고자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고자 하십니다.
우리의 병이 낫고
고통이 줄어들고
행복해지기를 원하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고통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우리의 잘못에 책임을 물으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오늘 복음에 나타난 하느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고
그 고통에 함께 아파하시면서
그것을 해결해 주고 싶어하십니다.
나병 환자의 신앙 고백과
예수님의 의지가 만나
결국 그는 치유됩니다.
우리도 그의 모범을 본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며
더 나아가 해결해 주고 싶어하시는 분임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믿음이 있을 때 우리도
하느님께 우리의 어려움을 겸손되이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느님께서
모든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려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만큼 든든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 마음, 그 사랑에 기대어
오늘을 기쁘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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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8.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날이 오면 인간의 비참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자비와 영광만 남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가장 가련하고 불행한 부류의 사람들을 꼽자면, 첫 번째로 꼽을 사람들은 바로
나병환자들이었습니다.
사제로부터 나병 확진을 받는 순간, 그들은 성밖으로 강제 추방 당했습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것만 해도 억울한데, 당시 사람들은 나병을 천형으로 여겼습니다.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해 하느님께서 벌을 주신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아 부정을 탄 사람이니만큼 성 밖에 나가서 살아야 했습니다.
길을 걸어가다가 혹시라도 인기척이라도 나면 사람들에게 주의하라는 표시로 이렇게 큰 소리로 두 번 외쳐야 했습니다.
“부정한 사람입니다.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 앞으로 한 나병 환자가 다가왔습니다.
사실 그 나병 환자가 예수님 가까이 다가왔다는 그 자체가 위법이었습니다.
당시 율법에 따르면 나병에 걸린 사람은 나병 환자라는 표시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멀쩡한 옷도 찢어 입어야 했습니다.
머리도 풀어 산발을 하고 다녀야 했습니다.
윗수염도 가려야 했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마치 성 밖 토굴 속이나 무덤가에서 마치 들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더이상 내려갈 데가 없는 그였습니다.
인생의 막장 앞에 선 그였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최후의 용기를 내어 예수님 앞으로 달려왔습니다.
모든 법적 장벽과 인간이 정한 규정을 무시하고 인간 세상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더 이상 그의 머릿속에는 율법이고 전통이고 필요 없었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만을 믿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털썩 꿇음으로서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솔직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능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굳게 믿으며 있는 힘을 다해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보통 사제들 같았으면 기겁을 하고 도망갔을 것입니다.
좀 나은 사제라면 근엄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겠죠.
“이러면 안 되지. 자네 이거 불법인 거 잘 알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하면 서로가 좋을 일 하나도 없네.
힘들겠지만 꾸준히 약 먹고 치료에 전념하게.
그리고 나중에 병이 진정되면 그때 한번 만나세.”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태도는 정말이지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상처와 진물투성이인 그의 몸에 다정하게 손을 얹습니다.
그리고 위엄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건강하고 순결한 예수님과 병들고 불결한 인간이 만납니다.
고상하고 맑은 정신의 예수님과 좌절과 원망뿐인 한 인간이 만납니다.
위엄으로 가득 찬 영광의 예수님과 얼굴을 땅바닥에 대고 엎드린 한 사람이 만납니다.
빛과 어둠의 만납니다.
생명과 죽음이 만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의 비참이 정면으로 마주친 것입니다.
참으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존재의 만남입니다.
그 결과는 마치 갓 태어난 아기 피부처럼 보송보송하고 깨끗한 피부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과 대면할 때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순간은 참으로 축복된 순간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지은 모든 죄와 허물, 어둠과 상처는 하느님 자비의 얼굴과 마주치는 순간 화로 위에 던져진 눈송이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인간의 비참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자비와 영광만 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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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8.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한센병 환자의 치유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2절) 한센인이 예수님께 드린 말씀이다. 그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다. 자신이 치유되든 안 되든, 모든 것은 예수께 달렸다. 치유의 권한은 주님께 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3절) 하시면서 치유를 해주신다. 이 말씀은 당신의 권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며 한센인의 추정을 확인해 주신다. 이 치유 사화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에 대하여 가지신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이 어떤 경우에도, 어떤 상황에 부딪힌다고 하더라도 당신의 자녀로서 사랑하고 계시는 분이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여라.”(4절) 환자가 깨끗이 나으면 그 사실을 개인적 판단에 맡기지 말고 사제에게 몸을 보여야 하는 것이 율법이었다. 사제가 그것을 확인하면 깨끗한 삶이 될 수 있었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가족들의 품으로 갈 수 있었다. 사제에게 그런 확인을 받는 것이 당신께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기적은 당신이 행하셨지만, 그에 대한 사실 확인을 사제에게 맡겨 당신이 행한 기적을 판단하도록 하셨다. 우리는 이 환자의 믿음을 볼 수 있다. 많은 소문을 통해 들었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로서, 인간으로 받아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주님께 대한 이러한 믿음을 우리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겸손한 자세로 예수님께 말씀드린다. 강요도 하지 않고 요구도 하지 않았다. 다만,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린다.
이 한센병 환자와 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인정하는 가운데 그분께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 역시 이러한 은총을 체험할 것이다. 몸이 썩어가는 한센병이 아니라, 우리 전 인간을 모두 썩게 하는 무서운 죄 중에 있을 때에도, 우리는 오늘 복음의 한센병 환자처럼 주님께 나아가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분 앞에 나아가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하느님은 내가 생각하듯이 어렵고 무서운 분이 아니라, 우리를 언제나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심을 생각하며,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사랑하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로 정립하고 그분 안에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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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8.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늘도 원하게 할 수만 있다면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치유해주시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나병 환자가 어떻게 끝까지 믿고 희망하며 주님 앞에까지 나아왔는지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는 치유되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그리스도께서도 원하시기를 바랐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무언가 좋은 것을 원하게 되는 것도 하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못 할 게 없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리스도교가 더는 로마에서 박해받지 않게 하였습니다.
바로 통일 전쟁에서 막센티우스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임박하자 콘스탄티누스는 태양 위에서 십자가 표징을 보았고 꿈에 이 표시를 하면 승리할 것이란 계시를 받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었음에도 군사들의 방패에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문양을 새기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승리하였습니다.
희망을 북돋아 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북돋아 주시는 희망에는
성취의 믿음도 포함됩니다.
이때 그러한 희망을 품는 이들은 가슴이 뜁니다.
이것이 내가 희망하는 것을 끝까지 가지고 갈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어린 농부 소녀였던 잔 다르크도 영국과의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도록 하느님이 자신을 선택했다고 믿었습니다. 천사에 의해 계시받았다고 믿는 그녀에게 프랑스 왕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셨다면 하느님께서 성취하십니다.
그리고 그 희망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성취될 것이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허물어진 다미아노 성당에서 “내 교회를 재건하여라!”라는 목소리가 십자가에서 들려왔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가슴이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돌을 모아 무너진 성당을 재건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를 따르는 무리가 생겨났고 그렇게 가난을 목적으로 하는 수도회의 창설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돈과 권력에 취해있던 교회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지는 탁발수도회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교황은 꿈에 라떼라노 대성전을 성 프란치스코가 어깨로 받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회의 회칙을 승인합니다. 이렇게 나중에야 예수님께서 하신 교회를 재건하라는 목소리는 작은 다미아노 경당이 아니라 물질주의로 허물어져가는 교회를 재건하라는 뜻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 넣어주는 꿈은 주님께서 책임지십니다.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오는 꿈을 꾸는 이는 정말로 성취될 그 기대감에 취해서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 닥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켈리 최는 10억이 넘는 빚을 진 노처녀였습니다. 이때 ‘시크릿’이란 책을 60번 읽었습니다.
이 책은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그동안 성공한 모든 사람의 주장이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믿지 않습니다. 이때 켈리 최는 꿈을 정하되 가슴이 뛰는 꿈을 정하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어지지 않는 것이고 믿어지지 않는 것이면 하늘로부터 오는 꿈이 아니기
때문에 하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27년간 옥살이하였지만, 누구보다 건강하게 나온 넬슨 만델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끝까지 해보기 전까지는 늘 불가능해 보인다.”
그리고 어떻게 그 긴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난 견뎌낸 게 아니라 준비한 거라오.” 라고 대답했습니다.
감옥 안에서도 그는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믿고 있었습니다.
그 꿈이 하늘에 준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얻어내려면 하늘이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원하게 된 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게 되어 그 꿈으로 벌써 가슴이 떨려야 합니다.
가슴이 떨리는 꿈은 하느님께서 그것을 원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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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8.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태 8,1-4)”
1) 여기서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는,
“저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입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입니다.
바로 앞에 있는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도,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말인데,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는지, 아닌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은 아직 부족하거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 합해져 있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병을 고쳐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믿음과 “예수님은 나를 가엾게 여기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모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권능만 믿고 자비를 안 믿는다면,
예수님에게 복종하기는 해도 사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믿음이 아닙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자비는 믿지만 권능을 안 믿는다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이 아닌 것이고, 그러면 그것 또한 믿음이 아닙니다.
2) “내가 하고자 하니”의 원문은, “나는 원한다.”인데, 그 병자가 청하지 않았어도 당신이 먼저 원하신 일이기 때문에 병을 고쳐 주신다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자비와 권능을 동시에 나타냅니다.
<권능은 있지만 자비가 없다면 원하지 않았을 것이고, 반대로, 자비는 있지만 권능이 없다면,
원한다는 말이 빈말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신데,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당신이 원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요한 5,21).”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요한 17,10).”
이 말씀들은,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은 곧
하느님의 자비와 권능이라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우리가 자비를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가엾게
여기셔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깁니다.
3) 누가 청하기도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가엾게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들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2-1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마태 14,14).”
4) “예수님께서는 왜 병 자체를 없애시지 않고,
병자들을 고쳐 주기만 하셨을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뒤에도 여전히
인간들은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바뀐 것이 있기나 한 것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는 예수님께서 주신 ‘희망’이 보입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병자들에게 일시적인 진통제만 주시고 그친 일이 아니라,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묵시 21,4) 하느님 나라를 미리 체험하게 해 주신 일이고, 그 나라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주신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상의 인생을 살면서 겪는 고통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겪는 고통 자체는 아직도 수수께끼, 즉 신비입니다.
그러나 ‘그날’이 되면 모든 것을 깨닫고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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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8.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이스라엘의 위대한 점은 주님 말씀에 충실하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들은 계속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거슬렀고 주님의 사랑을 저버렸습니다.
그들의 위대함은 자신의 실패를 감추지 않고 드러냈으며, 신앙의 눈으로 실패의 역사를 바라보고 이를 끝까지 기억하며, 그 책임이 온전히 자신에게 있음을 고백하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유다 왕국이 바빌론에게 멸망한 역사를 들려줍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과 모든 집은 불태워지고, 임금과 남은 백성은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갑니다.
이스라엘은 패배하고 이방인의 포로가 된 이 치욕적인 역사를 낱낱이 기억하며 그 원인을 살펴보았습니다.
자신들이 율법을 따르지 않았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어겼다는 것을 인정하며 반성합니다.
그래서 다시 계약에 충실하고자 주님의 말씀 자료들을 정리합니다.
그렇게 바빌론 유배 시기에 구약 성경이 정립됩니다.
실패의 역사를 회피하지 않고 신앙의 눈으로 반성한 이스라엘은 주님의 말씀을 다시 정립하게 되었으며, 그 경전으로 이스라엘은 더 충실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느님께 더 가까워지는 때는, 하느님께 충실하다고 자신하기보다 자신의 잘못을 잘 알고 그것을 돌아보며 주님의 자비를 청할 때입니다.
흠 없이 주님 뜻을 따르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보다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얼마나 죄인인지 절실하게 깨닫는 사람이 더 거룩하고 더 성숙하게 보입니다.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을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겸손하게 주님의 자비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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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8.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
박윤식 [big-llight] 05:05 ㅣNo.173721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때에 나병 환자가 와 예수님께 절하며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그의 나병이 나았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끔 하여라.”’
나병은 살이 문드러지는 비참한 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육체뿐 아니라 정신도 병들어 가족과 이별해야 했고 격리되어 살았다. 그러니 어느 누가 정상적인 생활을? 그러니 그 나병에 걸린 이가 치료 끝에 낫게 되었을 때, 그의 기쁨과 놀람은 어떠했겠는가? 실감할 수가 없었을 게다. 그리고 그 체험을 평생 간직하며 살았을 게다. 어떻게 그날의 감격을 잊을 수 있겠는가?
나병 환자와 예수님의 대화가 참 인상적이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과연 예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 게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은 왜 여전히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걸까? 왜 우리 삶은 아쉽고 부족한 것이 많을까? 그분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다 채워 주실 텐데 말이다.
여기서 우리 소원을 예수님께서 들어주시느냐, 그렇지 않으시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그분과 우리 관계가 가까워지느냐, 그렇지 않으냐이다. 단순히 소원 들어주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면, 그분께서는 그냥 기도를 들어주는 기계나 부적에 지나지 않으실 수도. 그러나 그분께서는 이를 바라지 않으시고, 당신과의 인격적인 관계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에 우리는 만족할 지라도, 그분께서는 만족하지 않으신다.
부모와 자녀들만 보아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자녀에게 생일 선물을 주고, 용돈을 주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에. 자녀가 그런 부모님의 마음을 모른 채 선물이나 용돈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 자녀는 아직 부모님 마음을 모르는 철없는 자식일 수도.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시라, 우리의 소원을 정화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그렇다. 소원을 빌고 그에 대한 응답을 바라는 것에 그치지 말고, 소원을 들어주시는 바로 그분과의 관계에 충실하자.
사실 나병 환자는 가난한 이 가운데서도 가장 소외된 이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을 구분하고 소외시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잣대다. 우리가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심과 잘못된 정보로 무시하는 마음으로 잣대를 만들어 구분하고, 이러한 구분이 단절과 소외를 오히려 더 크게 만들어 낸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멀리서 바라보거나 온갖 미디어에서만 그저 만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장벽을 깨고 그들에게 다가가 진정으로 손을 내밀어야 한다. 마치 우리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시고, 우리를 만져 주시기를 바라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이런 기적의 체험이 없는지? 작고 하찮은 것이라고 잊고 지내는 것은 아닌지? 누구에게나 기적은 있다. 삶의 위험 속에서 얼마나 많은 기적들을 만났는지 가만히 돌아보자. 이 나병 환자는 바로 우리 모습일수도. 그러니 지금 그의 기도를 바쳐보자.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제게 속한 것을 깨끗하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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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8.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희망의 메신저로 살아가는 삶
<2024.6.28> 아침을 여는 묵상(행 27:21~44절)
❝희망의 메신저로 살아가는 삶❞
❚ 유라굴로 광풍 속에서 배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람 바울 때문이었습니다.
✔ 희망의 메신저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신뢰하는 삶이어야 합니다(21~26절).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여러 날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바울이 일어나 이전에 자신이 한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 어려움에 처하게 된 것임을 상기시켰습니다(10절). 그러면서 다시금 그들에게 소망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을 것...”(22절)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자가 밤에 그의 곁에서 알려 주었기 때문(24절)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기에 ‘안심하라’고 선포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반드시 어떤 섬에 밀려가 닿게 될 것입니다...’(26절,쉬운성경)라고 말합니다.
로마를 향한 바울 사역은 바울 개인의 열심과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거센 폭풍 가운데서도 목숨을 잃지 않고, 끝까지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구원하심을 신뢰할 때, 어떠한 상황과 환경에서도 안심하고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약속하시며 돌보시는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두려워하지 않고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소망하는 삶이어야 합니다(27~38절).
광풍을 만난 지 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27절). 사공들이 물의 깊이를 재어 보았는데, 스무 길에서 열다섯 길로 얕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사공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 보고자 배 윗부분에서 닻을 내리는 시늉을 하면서 몰래 거룻배를 내려 탈출을 시도했습니다(28~30절). 그러자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 사람들이 배에 남아 있지 않으면 당신들마저 구조되지 못할 것(31절)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밧줄을 끊어서 거룻배를 떼어 버렸습니다. 14일 동안 굶주린 상태에 있던 사람들에게 음식을 권하면서 그들 가운데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33~34절). 바울은 276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당당하게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빵을 떼어 먹기 시작했습니다(35절).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영적 지도자로서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람들도 용기를 얻어 음식을 먹은 후에 배를 가볍게 하려고 남아 있던 곡물을 바다에 버렸습니다(36~38절).
배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거센 폭풍 가운데서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배가 튼튼하고, 안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하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돌보심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없으면 마치 운전자 없이 달리는 자동차와 같기에 내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엄청난 피해를 입힐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 자신들의 영혼의 레이더를 하나님께 잘 맞추어 영적 신호를 잘 읽을 수 있도록 깨어 있어서 모든 상황을 지혜롭게 대처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세상 속에 온전히 드러내는 희망의 메신저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하는 삶이어야 합니다(39~44절).
날이 새어 시야가 확보되자 육지가 눈에 들어왔고, 그들은 배를 항만에 댈 수 있는지 의논했습니다. 그들은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고 키를 풀어 늦추었는데, 이는 배 고물에 있는 키를 내림으로 모래가 많은 해안에 배가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39~40절). 닻을 끊어 버렸다는 것은 그 배를 가지고 더 이상 항해하기를 포기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배는 두 물살이 만나는 곳에 들어가 모래톱에 걸려 뱃머리는 꼼짝도 하지 않고, 배 뒤쪽은 거센 파도에 부딪혀 깨어졌습니다(41절).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이미 계시하셨던 것처럼 배는 실제로 난파되었습니다(22절). 군인들은 죄수들을 죽이려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또 한 번의 죽음의 위기가 찾아왔지만, 백부장은 바울을 살리고 싶어했습니다. 결국 배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무사히 육지로 올라왔습니다.
백부장은 바울의 놀라운 신앙의 인격을 통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과 보호하심에 의해서 바울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살 수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역의 현장에서 여러 모양의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광풍을 만날 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풍파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친히 도우시고 인도하시기에 위기 상황을 헤쳐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이 희망의 메신저로 살아가므로 평안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인생의 풍랑으로 인해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소망을 잃어버린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겨내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풍파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신뢰하며 더 간절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평안 속에서 희망의 메신저로 살아갈 수 있기를(행 27:21~44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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