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중풍을 맞아 몸이 마비된 친구가 떠올랐다. 코로나 사태로 가족마저도 없는 병실 구석의 침대에 정물처럼 있을 게 틀림없을 것 같았다. 얼마 전 드라마에서 그런 장면을 봤다. 요양병원의 창가 침대에 내 또래인 칠십 고개의 영감이 누워있었다. 그를 면회하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자식마저 그 영감을 버린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는 늙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한 번 와달라고 했다. 아직 걸을 수 있는 늙은 친구는 과자와 사탕 그리고 고량주 한 병을 품속에 숨긴 채 병원에 있는 친구를 찾아 간다. 늙은 두 노인사이에는 잔잔한 슬픔과 정이 섞여 흐르고 있었다. 어찌할 수 없는 늙음과 병 앞에서 두 노인은 무기력했다.
내가 저런 나이가 됐나?하고 그 장면을 보면서 쉽게 믿기지가 않았다. 그런 게 현실이 됐다.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내게 외로움의 구조신호를 보내는 친구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비슷한 처지에 있는 고교동기가 한명 더 있었다. 암수술을 한 그는 일주일에 사흘 투석을 하면서 연명하고 있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믿음이 깊은 좋은 친구였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병을 주는 것은 또 어떤 메시지일까 나는 궁금했다.
나는 그들을 어떻게 위로해줄까 생각했다.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과자와 고량주를 숨겨 가지고 가서 먹을 수는 없었다. 코로나 사태로 아예 만나는 게 불가능했다. 갑자기 뇌리에 엉뚱한 한 장면이 떠올랐다. 새벽에 일어나 밀가루 반죽을 정성껏 주물러 치즈를 집어 넣고 크로와상을 굽는 제과점 주인이었다. 그가 싱싱한 빵을 만들어 배달해 주듯이 아침마다 작은 글을 한 편 써서 카톡으로 아픈 친구에게 보내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매일 아침 조금씩 글을 쓰는 게 나의 기도이기도 했다.
글을 써서 카톡으로 아픈 친구에게 보냈다. 보낸 글 옆에 떠있는 노란 숫자가 잠시 후 사라졌다. 바로 그 글을 봤다는 표시였다. 그런데 그 다음에 보낸 글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다시 글을 보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병실에 혼자 있을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더 아픈 거야? 상태가 어때?”
“하루 종일 먹고 자고 먹고 자고 그래. 마비가 되니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완전히 다른 세계로 건너온 것 같아.”
그의 목소리는 잠에 취해 있는 것 같았다. 다행히 혀는 마비되지 않은 것 같았다. 어눌하지만 알아듣기에 충분했다.
“내가 카톡으로 글을 보냈는데 처음에는 보더니 그 다음은 본 표시가 없던데?”
내가 말했다.
“처음 온 글은 봤는데 야 몸이 마비되니까 누워서 스마트 폰 화면을 보는 것도 힘이 들어 그래서 보지 못했어. 여기 병원에서는 재활에 성공한다면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면서 걸을 수 있는 단계까지는 간다고 했어.”
그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곧 그렇게 될 거야. 아무 걱정하지 마라.”
나는 그렇게 위로했다. 하늘에 계신 그분은 평생 열심히 살아온 그에게 휴식을 주는 것 같았다. 병을 주지 않으면 쉴 친구가 아니었다. 오늘 아침에는 일어나 기도를 하고 글을 쓰기 위해 이십 여년 전의 일기를 들추다가 로타리클럽에 가서 강연을 했던 기록을 봤다. ‘성공의 삶에서 의미의 인생으로’라는 제목으로 말을 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로타리클럽이면 대충 세상사에서 어떤 지위에 가거나 돈을 번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그날 가서 뭘 얘기했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모인 사람들에게 인간에게 공통된 늙음과 죽음을 얘기하면서 어디로 탈출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을 것이다.
이십 년 저쪽에 있던 그때의 나의 감성과 지금 실감하는 늙음은 확연히 다르다. 그때가 관념이라면 지금은 실제가 됐다. 그때는 병이 뭔지 몰랐지만 지금은 나 자신이 아파보고 친구들을 보니까 보다 확실히 그 의미를 알 것 같다. 그때 질문받았던 성공의 삶에서 의미의 인생으로에서 의미를 지금 대답한다면 뭘 할까? 가족과 함께 맛있는 걸 먹으면서 더 얘기하고 친구를 사랑하고 주위에 좀 더 베풀라고 하지 않을까. 그리고 푸른 바다를 보러 가고 밤하늘의 별을 찾으라고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