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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양서원 동배위 김자수(金自粹, 1351년 ~ 1413년) 상촌(桑村). 향년 63세.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중(純仲), 호는 상촌(桑村)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에 제수되었고, 1392년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거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조선 건국 후에는 청주목사, 충청도 도관찰사,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고려 후기에, 판전교시사, 충청도관찰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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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순중(純仲)
호 상촌(桑村)
이칭 김자수(金子粹)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413년(태종 13)
본관 경주(慶州)
정의 고려 후기에, 판전교시사, 충청도관찰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초명은 김자수(金子粹).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중(純仲), 호는 상촌(桑村). 아버지는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지제고(知制誥)를 지낸 김오(金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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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및 활동 사항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에 제수되었다.
우왕 초에 정언이 되었는데, 왜구 토벌의 공으로 포상받은 경상도도순문사 조민수(曺敏修)의 사은편지에 대하여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김자수가 전날 김해·대구에서 있었던 왜구와의 전투에서 비겁하게 도망하여 많은 사졸을 죽게 한 사실을 들어 거절한 죄로 전라도 돌산(突山)에 유배되었다.
뒤에 전교부령(典校部令)을 거쳐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가 되고, 공양왕 때에 이르러 대사성·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었다.
이때 왕대비에 대하여 효성을 다할 것, 왕세자의 봉숭례(封崇禮)를 서두르지 말 것, 사전(祀典)에 기재된 바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음사(淫祀)는 금지하고 모든 무당의 궁중 출입을 엄단 할 것, 천변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숭불로 인한 것이니 연복사탑(演福寺塔)의 중수 공사를 중지할 것, 언관의 신분을 보장할 것 등의 상소를 올렸다.
1392년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어 좌상시에 전보되자, 중국 조정에 파견하는 환관들에게 관직을 남발하는 것과 재정 운영에 관한 상소를 하였다.
이후 충청도관찰사·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이숭인(李崇仁)·정몽주(鄭夢周) 등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문장이 뛰어나 김자수의 시문이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다.
조선 건국 이후 1397년 청주 목사를 지내면서, 흉년으로 인해 보리에 대한 세금을 감면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후 태종이 즉위한 후에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를 거쳐, 충청도 도관찰사,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事)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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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수 왕의 부름에 죽음으로 답한 절의
"두 임금 섬길 수 없다"…고려에 대한 충의와 지절의 정신 지켜내
동시 안기동에 있는 김자수 정효비각.
이방원의 삼고초려
태종 이방원의 부름은 엄중하고 집요했다.
정신 차릴 틈 없이 불러댔는데 호출의 이면에 피비린내가 묻어났다.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1351 ~1413)는 그때 고향 안동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자신이 형조판서에 제수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침묵했다.
‘을’의 침묵에 ‘갑’은 조바심을 냈다.
두 번째 전갈에 이어 곧바로 세 번째 사람이 왔을 때 김자수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들겠구나, 긴 숨을 내쉬었다.
김자수와 이방원은 가는 길이 달랐다.
고려의 개혁에는 뜻을 함께했으나 김자수는 고려 체제를 유지하면서 성리학적 이상에 따라 나라를 개조하는 온건개혁파로, 이방원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강경개혁파로 갈렸다. 위화도회군 후 고려의 실질적 주인은 이성계 일파였다.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명분 아래 우왕과 창왕을 폐위했고 이성계를 병문안하고 돌아가던 정몽주를 피살했다.
그즈음 김자수는 충청도 관찰사를 그만두고 ‘두문 72현의 한사람으로 두문동에 들어갔다가 고향 안동에 내려왔다.
안동의 남문 밖 상촌(桑村)에 은거하며 호를 ‘상촌’이라 지었다.
안동에서 시와 술로 시름을 달래며 산 지 10년 가까운 세월, 잊혀졌던 그를 왕이 된 이방원이 불렀던 것이다.
이방원은 이성계의 아들 중 유일하게 문과 급제자다.
한때는 이방원과 권근(權近), 김자수가 좋은 벗이었던 적도 있었다. 이방원은 왕이 되자 조선의 건국에 반대했던 고려 중신을 상대로 적극적인 포용책을 펼쳤다.
정몽주 길재 김약항 등을 절의지사로 포상 추증하고 김자수를 3차례나 불렀다.
왕은 마지막에 엄중한 경고를 함께 담아 사람을 보냈다.
“이번에도 기꺼이 오지 않겠다면 반드시 너의 처자식을 죽이고야 말겠다.”
김자수는 고민이 깊었다.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 권근은 100세 된 노모를 죽음에 몰아넣을 수 없다며 절의를 굽혀 벼슬길에 나아갔다.
이 일이 이방원을 더욱 자극했을 것이다.
‘도대체 너는 뭐냐.’ 이방원의 ‘삼고초려’는 김자수에게 그걸 묻고 있었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김자수 순절 비각.
왕의 부당한 지시에 반발, 유배길에 오르다.
김자수의 자는 순중(純仲), 호는 상촌이다.
조부는 삼사부사 김영백, 아버지는 통례문부사 김오이다.
부인은 안동권씨다.
신현의 문인으로 19세에 생원시에서 장원했다.
성균관에 입학해 24세에 지공거 이무방과 동지공거 염흥방이 주관하는 친시문과에서 장원해 덕령부주부에 임명됐다.
덕령부주부는 정6품으로 보통 과거급제자가 종9품에서 관직을 시작하는 것과는 출발부터 달랐다.
그는 생원시와 문과에 잇따라 장원급제하며 고려왕조를 이끌어갈 차세대 지식인으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는 고려 말 둔촌(遁村) 이집(李集), 양촌(陽村) 권근(權近), 방촌(厖村) 황희(黃喜)와 함께 ‘사촌(四村)’으로 불렸다.
이색·정몽주·이숭인을 일컫는 ‘삼은(三隱)’과 함께 일세의 충신 명류 석학으로 꼽히는, 고려를 대표하는 지성이었다.
김자수는 성리학적 이상으로 무장한 단단한 간관이었다.
그의 논리 앞에 성역이 없었다.
잘못된 일이 있다면 설사 그가 왕일지라도 서슴지 않고 직언을 쏟아냈다.
경상도도순문사 조민수가 밀성에서 왜적을 격파하여 수십 명의 머리를 베었다.
왕이 의복과 술을 내려 주자 조민수가 표전을 올려 사례했다.
왕이 김자수에게 회답하는 교지를 짓도록 명하자 거절했다.
“조민수는 온 도내의 병사를 거느리고 김해·대구 전투에서 져 많은 군사를 죽였습니다. 밀성전투에서 이긴 조그마한 공을 가지고 그의 죄를 모두 가리지 못하니 의복과 술과 말 등으로 포상하는 것은 지나치십니다. 또 어찌 회답하는 교지를 내리겠습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난 왕이 그를 전라도 돌산으로 유배 보냈다.
그가 정언일 때 홀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안동으로 돌아와 3년 동안 시묘를 살았다.
시묘를 사는 동안 한 번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매일 조석으로 두 차례 죽을 먹었을 뿐 입에 밥을 넣은 일이 없었다고 한다.
김자수의 극진한 효행이 알려지자 당시 왕이 정려를 내려주고 당대의 이름난 화공 용면(龍眠)에게 시켜 그가 시묘하던 모습을 그리게 해 ‘삼강행실록’에 실었다.
조선에 와서도 그의 효행은 국가적 모범사례로 꼽혔다.
광해군 때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김자수의 여묘살이 그림과 함께 요약된 글이 실렸다.
김자수는 고려에 성리학이 도입된 뒤 성리학적 이상을 통해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애썼다.
개혁적 시무론으로 무장한 그는 왕이 불편해하는 상소와 탄핵을 줄기차게 올리며 왕과 귀족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공양왕이 생모인 국대비에 대해 극진한 효를 행하는 반면 공민왕의 모후인 명덕태후를 홀대하자 법도에 어긋난 비례라며 왕대비를 존숭해 왕실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 인륜의 대의를 밝히라고 간언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공민왕 2년, 연복사의 중 법예가 절 경내의 5층탑과 연못 3곳, 우물 9곳이 허물어진 채로 방치돼 있다며 수리해 줄 것을 왕에게 요청했다.
왕은 이 절의 복원공사를 즉각 시행하면서 궁실 별전에 인왕불을 봉안하고 조석으로 예불을 드리는가 하면 연복사 낙산사 온륜사 등에 내시를 보내 재를 올리고 복을 빌게 했다.
또 매월 두 차례씩 승려를 입궁케 해 불경을 독경시키고 각종 불교 행사를 벌였다. 왕은 연복사탑을 확장 수리한다며 민가 3, 40여 호를 밀어내고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였다.
김자수는 연복사탑 공사를 중지할 것을 호소하면서 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김자수의 누운 비.
김자수가 절명할 때 내 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자 누운 비를 제작했다.
나를 위해 비석을 세우지 말라
정몽주가 이방원의 자객에게 피살당했다.
당시 정국은 이성계, 정도전, 하윤, 조준 등 고려왕조를 엎고 새로운 국가건설을 꿈꾸는 급진역성혁명파와 이색, 정몽주, 길재, 김진양, 김자수를 중심으로 뭉친 온건개혁파가 정면으로 대치하는 상황이었다.
정몽주의 피살로 정국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1392년(공양왕 4) 4월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한 뒤 7월에 급진역성혁명파들이 이성계를 추대하고 조선을 개국했다.
이때 김자수는 조선건국을 반대하는 고려의 유신들과 함께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두문동 72현’의 명단에 김자수가 들어있다.
두문동에 들어갔던 김자수는 뒤에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다.
김자수의 절명시를 새긴 ‘상촌시비’ 경기도 광주에 있다.
시대는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고향으로 내려와 은일의 삶을 살면서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내는 그에게 다시 한번 시련이 닥쳤다.
태조 이성계가 대사헌으로 불러낸 데 이어 태종 이방원이 그를 형조판서에 제수하며 3번이나 불렀던 것이다.
3번째 부름에는 태종의 분노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김자수는 자신의 죽음으로써 사태를 매듭지으려 했다.
외아들 근(根)에게 관을 짊어지게 하고 길을 나섰다.
안동을 떠나 경기도 용인의 능곡에 이르렀다.
그곳에 이방원의 손에 죽은 정몽주의 묘소가 있었다.
술을 올리고 절한 뒤 크게 통곡했다.
추령(현재의 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신현리 태재)에 이르러 아들 근에게 말했다.
“여기가 곧 내가 죽을 자리다. 비록 여자라도 두 남편을 거치지 않는데 하물며 남의 신하가 돼 두 성씨의 임금을 섬기겠는가. 내 뜻이 이미 결정됐으니 너는 당장 나를 추령 곁에 묻고 삼가서 비를 세우지 말고 초목과 함께 썩게 놔둬라.”
그는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했다.
평생 동안 충효에 힘쓴 뜻을 오늘 누가 알아주리오
한 번 죽음 서운치 않으니 구원에서 응당 알아주리라
平生忠孝意 今日有誰知
一死吾休閑 九原應有知
김자수를 제향하는 충북 음성 지천서원.
김자수 유적지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태재는 광주 신현리에서 분당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예부터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군사요충지였다.
1413년 태종 이방원으로부터 형조판서를 제수받고 서울로 향하던 김자수가 이곳에서 순절했다.
순절 당시 이곳은 ‘추령’으로 불렸다.
김자수의 신도비와 사당을 세웠으나 도로가 조성되면서 현재의 신현리로 이전했다.
김자수의 유적지에는 순절비각과 신도비, 상촌 시비, 묘역이 조성돼 있다.
순절비에는 ‘고려충신 상촌 김선생자수 순절비’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고 상촌시비에는 그의 절명시가 적혀있다.
지천서원(知川書院)은 충북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에 있다.
김자수와 김세필, 김저, 박상 등 8현을 제향하고 있다.
김자수의 마지막 벼슬이 충청도관찰사였는데 이때 후손들이 뿌리를 내렸다.
김자수 효자비는 그의 고향 안동시 안기동 주택가 좁은 골목길에 있다.
본래는 월곡면 노산리에 있었는데 안동댐을 건설하면서 1973년 옮겨왔다.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이다.
비각 전면 밖에는 ‘정효비각(旌孝碑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안에는 ‘비각이건기(碑閣移建記)’와 ‘상촌선생비각기사(桑村先生碑閣記事)’ 현판이 걸려 있다.
비석은 비좌와 비신, 보주현의 옥개석으로 이뤄져 있으며 비신 앞면에 ‘효자고려도관찰사김자수지리(孝子高麗道觀察使金自粹之里)’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효행이 기록돼 있다.
비문은 경상도관찰사와 판서를 지낸 김노경이 짓고 글씨는 그의 아들 추사 김정희가 썼다.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타양서원陁陽書院에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안동시 가류 2리 사찰골에 상촌선생 유촉비가 있다.
이곳은 김자수가 절에서 독학하던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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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수
경주김씨 상촌공파 파조 상촌 김자수 묘역 경기도 기념물 제98호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산 120-1번지
두문동 72현으로 유명한 할아버지 답게 신도비(구 신도비는 뉘어져 보관되어 있음)가 있고 아래쪽에는 사당도 있다.
고려의 문신인 상촌 김자수 선생은 1374년(고려 공민왕 23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우왕 초에 사간원의 정언이 되었다.
이때 왜구 토벌의 공로로 포상받은 조민수의 사은 편지에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조민수가 왜구와의 전투에서 도망쳐 많은 병사를 죽게 하였다고 이를 거절하여 전라도 돌산에 유배되었다.
공양왕 4년(1392) 충청도 관찰사·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충신은 불사이군이라며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다가,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묘 앞에는 혼유석·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앞에 장명등(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으며 좌우로 석양과 망주석이 각 1쌍, 문인석이 2쌍 배열되어 있다.
상석 좌우에 세워진 문인석은 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의 것으로 생각되며, 묘역 앞쪽의 문인석은 조선 후기의 양식이고, 그 밖의 상석·장명등·석양 등은 근래에 세운 것이다.
묘비는 그의 유언으로 세우지 않았다.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는 땅에 묻혀 있던 것을 1926년에 후손들이 발굴하였으나, 비문이 닳아 없어져 사진과 같이 뉘어져 보관 중이며 새로 채유후가 지어서 세웠다
와비, 신도비, 순절 비각이 있다.
김자수는 고려 충정왕 3년(1351)에 태어났다.
10세 때 아버지를 잃었고, 20세 되던 공민왕 19년(1370) 생원시에 합격, 개성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당시 성균관 책임자는 대사성 李穡(이색)이었고, 선생으로 朴尙衷(박상충), 鄭夢周(정몽주), 金九容(김구용), 朴宜中(박의중), 李崇仁(이숭인)이 있었다.
선생은 포은 다음으로 이어진 생려효자였다.
형이 벼슬살이로 나섰기에 자신은 홀어머니를 모시면서 살려 하였으나, 과거에 나서라고 하는 어머니의 명에 따라 성균관에 들어가서, 머문 지 채 1년이 안 되어, 어머니에게 병환이 있음을 알고 급히 내려가서는, 2년을 하루 같이 어머님을 보살피며 약을 구하려고 헤메었다.
한겨울 얼음장 밑에서 잉어를 잡고 눈 덮인 대밭에서 죽순을 캐어
드리며 효를 다 하였지만, 끝내 어머님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주자가례'에 따라 어머님 묘소 곁에 움집을 짓고 3년 시묘살이를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가상히 여기시어 旌閭(정려)를 명하시고, 畵工(화공)에게 명하시어 出居廬圖(출거여도, 묘에서 여묘하는 모양을 화폭에 담은 그림)를 그리게 하고는 이를 '동국삼강행실록(東國三綱行實錄)'에 게재하도록 하였다.
훗날 김자수의 효행과 시묘살이한 묘소 주변을 '侍墓洞(시묘동)'이라 부르고, 그가 살던 안동 남문 밖에 '孝子高麗道觀察使金自粹之里(효자고려도관찰사김자수지리)'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
이후 비석은 어머니 묘소가 있던 시묘골인 안동 월곡면 노산리로 옮겨졌다가, 월곡면이 안동댐으로 수몰되자 어머니 묘소와 정자 추원재(追遠齋)와 함께 1973년 안동시 안기동 정자골로 이전하였다.
공민왕 22년에 효자로 정려가 내려지니 이른바 생려효자였다.
그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렀다.
와비
묘비를 세우지 말라 하여 뉘어놓은 神道碑(신도비).
원래는 땅에 묻혀 있던 것을 1926년 후손들이 발굴하였으나, 비문이 닳아 없어져 새로 채유후가 지어서 세워 놓았다 한다.
고려 말, 나라가 점점 어지러워지자 충청도 관찰사를 마지막으로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 집으로 돌아와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망국의 한을 달랬으나,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으로 들어 가셨다.
새 정부가 두문동을 불살라 버리자 선생은 향리 안동으로 다시 돌아 오셨다.
조선이 건국된 후 이성계는 그와의 친분을 고려하여 그를 대사헌으로 불렀으나, 그는 임금의 부름을 받고도 방안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태종이 다시 병조판서로 부르면서 나오지 않으면 가족을 모두 죽이겠다고 하였다.
벼슬을 받지 않으면 집안이 풍지박산 날 진퇴양난의 처지였다.
"한 나라의 신하가 되어 나라가 망하면 같이 죽는 것이 도리이다.
내 평생에 충효로써 스스로를 가다듬어 왔는데 이제 몸을 잃으면
무슨 낮으로 조상들을 지하에서 뵙겠는가 내 스스로 죽을 곳이 있노라"
이윽고 그는 조상의 사당에 엎드려 절한 후 아들에게 말했다.
"너는 내 장례식에 쓸 물품들을 챙기거라"
깜짝 놀란 아들이 되물었다.
"갑자기 웬 장례 물품입니까?"
"내가 마땅히 가야 할 곳이 있다."
이윽고 감자수는 짐을 꾸려 집을 떠났다.
그의 아들 根(근)은 장례 때 쓸 물건을 챙겨 뒤따랐다.
성균관 시절 스승으로 모셨던 정몽주 선생의 묘지를 참배한 후 秋嶺(추령, 현재 대지산 준령인 태재로 추정)에 이르렀을 때 그는 고갯마루에 서서 산천을 둘러본 후 아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태재에서 맞이한 것은 눈 앞으로 한양 땅이 펼쳐지고, 등뒤로는 스승인 포은 鄭夢周(정몽주) 묘가 있었기 때문이라한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선택의 시간이 온 것이다.
한양이냐, 정몽주냐의 갈림길에서 그는 정몽주의 길을 택한 것이다.
여자도 不敬二夫(불경이부) 하거늘 하물며 신하가 되어 어찌 두 왕을 섬길 수 있으랴하고 아들 근에게 "나는 이 곳에서 죽겠다."하고 유언을 하기를 "이곳에 매장하고 비석을 세우지 말며, 행적을 金石(금석)에 새기지 말라.
나무뿌리 썩듯이 내버려 두어서 널리 알리지 않도록 하라."
널리 알리게 되면 武人(무인) 투성인 신 조정에서 자손들에까지 해를 미치게 할 것이 염려하는 말을 남기고 그는 '絶命詞(절명사)' 시 한 수를 남기고는 독약을 삼켜 자결하셨다.
때는 태종 13년(1413) 11월 14일이었으며 향년 63세였다.
絶命詞(절명사)
平生忠孝意(평생충효의)
평생토록 지킨 충효
今日有誰知(금일유수지)
오늘날 그 누가 알아주겠는가
一死吾休恨(일사오휴한)
한 번의 죽음 무엇을 한하랴만
九原應有知(구원응유지)
하늘은 마땅히 알아줌이 있으리라.
상촌선생 순절비각
상촌선생의 묘역은 김자수가 자결한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 묘역이 있는데, 묘역은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산에 있고, 묘하에는 고려충신 상촌 김자수선생의 순절비각이 서 있으며,와비를 비롯하여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태재에서나 그가 묻힌 곳에서나 직선거리로 4km 떨어진 곳에 정몽주의 묘가 있다.
輓詞(만사)
有忠有孝難(유충유효난)
충이 있으면서 효가 있기는 어렵고
有孝有忠難(유효유충난)
효가 있으면서 충이 있기도 어려운데
二者旣云得(이자기운득)
이 두 가지를 이미 다 얻었건만
況又殺身難(황우살신난)
하물려 살신의 어려움까지야.
그의 죽음을 두고 黃喜(황희)가 지은 '輓詞(만사)'이다.
상촌 김자수 그는 충신이면서도 지극한 효자셨다.
'삼강행실록'에 효행이 전할 정도로 효자의 표본이기도 했다.
김자수 무덤에 차마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비석을 눞혀 묻어둔 후손은 8대손인 金弘郁(김홍욱)이다.
김홍욱은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소현세자 姜嬪(강빈)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해 달라는 應旨上訴(응지상소, 임금의 요청에 응해 올린 상소)를 올렸다가 효종이 직접 친국한 심문을 받던 중 매 맞아 죽은 인물이다.
김홍욱은 죽음에 이르러 "언론을 가지고 살인하여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라고 말할 정도로 대찼다.
김홍욱 자손 중 정승이 8명, 왕비가 1명이 나왔으며, 추사 김정희도 그 자손이다.
순절 비각과 절명시 시비
우왕 초에 正言(정언)이 되었는데, 그때 임금으로부터 왜구 토벌의 공으로 포상받은 曺敏修(조민수)의 사은 편지에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이는 조민수가 왜구와의 전투에서 도망하여 많은 군사를 죽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왕명을 거절한 죄로 전라도 突山(돌산)에 유배되었다.
뒤에 典校部令(전교부령)을 거쳐 判司宰寺事(판사재시사)가 되고 공양왕 때 이르러 대사성, 世子左輔德(세자좌보덕)이 되었다.
1392년에 判典校寺事(판전교시사)가 되었고 곧 충청도 관찰사.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문장이 뛰어나 그의 시문이 '동문선'에 실려 있다.
경북 안동에 그가 살던 옛 집터가 있고, 그의 효자비가 있다.
상촌순절비
이후 비석은 어머니 묘소가 있던 시묘 골인 안동 월곡면 노산리로 옮겨졌다가 월곡면이 안동댐으로 수몰되자 어머니 묘소와 정자 追遠齋(추원재)와 함께 1973년 안동시 안기동 정자골로 이전하였다 한다.
안기동으로 이전하였을 때는 앞에 하천이 흐르고 논밭이 있었는데
지금은 하천이 복개되고 아파트가 들어서 주택가가 되었다.
절명사 시비
桑村 金自粹(상촌 김자수, 1352~1413)는 경주김씨로 고려 공민왕 23년(1374)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 세자좌보덕 등을 거치며 불교 행사의 중지와 언관의 신분 보장 등을 직언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공양왕 4년(1392) 충청도관찰사, 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였다.
조선이 개국 된 뒤 태종이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묘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여 고려에 대한 충성을 지켰다.
묘역
桑村 金自粹(상촌 김자수, 1352~1413)의 묘 봉분 앞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고, 그 앞에 장명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묘역 좌우로 石羊(석양)과 망주석이 1쌍, 문인석이 2쌍 배열되어 있다.
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의 것으로 생각되며, 묘역 앞쪽의 문인석은 金冠朝服(금관조복)의 형태로 조선 후기의 양식이고, 그 밖의 석양, 장명등, 상석 등의 석물은 근래에 세운 것이라한다.
부인 우봉이씨 묘소가있다.
桑村先生遺杖 詩(상촌선생유장 시)
平一疑雲(평일의운)
고려말의 어지러운 시국을 말함
老當益壯(노당익장)
늙음을 맞이해도 더욱 장건할 것이며
窮當益堅(궁당익견)
궁함을 당해도 더욱 굳건하리라
嗟爾吾與(차이오여)
슬프다! 너와 내가 더불어
無替永年(무체영년)
영원히 변치 않으리라.
이 시는 상촌선생이 고려와 운명을 함께 한다는 뜻으로 지팡이에 남긴 것이다.
우봉이씨 묘소 앞 비석
칠언절구 /金自粹(김자수)
憑虛樓次金少尹師古韻(빙허루차금소윤사고운)
빙허루에서 소윤 김사고의 운을 따라-桑村(상촌) 김자수
新樓壓水對靑山(신루압수대청산)
신루(憑虛樓)는 청산(永嘉山)의 물(주천강)을 마주하고
朝暮烟嵐?案間(조모연람궤안간)
아침저녁 아지랑이가 책상 사이에서 피어나네
幸有村庄?隔岸(행유촌장재격안)
다행하게도 언덕너머에는 시골집이 있으니
暮年投?共淸閒(모년투불공청한)
늙어 벼슬을 그만두고 남의 여생을 즐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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