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후퇴
가울이 깊어지자 현역다음 고령자 제2국민병 일개중대정도가 시흥군청 뒷마당에 모여 점호를 하고 계부와 함께 남으로 먼저 내려갔다. 급식용 일종을 빼돌려 많은 국민병이 아사로 병사하자 청치적문제로 크게 번져 책임자들이 처형되기도 하였다. 제2국민병 사건은 전쟁중 부패로 생긴 큰 사건에 하나였다.
태평방직 비산동 연립사택에 국군요양부대가 들어오고 우리집에서는 친절히 거들었다. 모친은 당시 큰 재산인 재봉틀과 새 옷을 사택 지하실 반공호에 넣고 흙으로 봉인하고 피난준비를 하였다. 이후 지하실에 숨긴 재봉틀 옷등 재산은 주변할머니의 먹이 감이 되었다.
서울서대문구 옥천동 외가에서 할머니와 외삼춘 4녀가 걸어서 우리집으로 왔다. 남으로 후퇴하는 트럭에 매달려 태워달라고 애걸하여 한 대는 모친과 나와 이모둘이 충남옥천으로 가고 외조모 외삼춘 이모 둘은 대전에 떨어졌다. 안양역내 에서는 탄약열차가 고장으로 폭파할 예정이니 지붕위 피난민을 내려서 도보로 가게 권하였다. 내리게 할려고 거짓말하는 줄 알고 일부 타고 있던 피난민은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열차잔해로 한동안 열차 바뀌들이 여기저기 굴러 다녔다.
강원도 평창등에서 박수근화백 가족들은 군용트럭으로 안양에 피난 와 세멘트 바닥위에 가마니를 깔고 있다가, 아는 집 움막에서 며칠을 앉아서 잠을 잤다고 부인의 자서전에 나온다. 피난민은 허가 없이는 지정된 피난지를 떠날 수 없는 규정이 있었다.
당시 옥천은 야간에는 공비들이 내려와 경찰서를 습격하여 초병을 죽이고 항문에 몽둥이 박아 죽였다는 이야기로 공포에 떨었다.
옥천은 산이 많은 금강 상류로 풍광 있는 소읍으로 육영숙여사 친정 육관수 큰 한옥을 가 보니 도 하였다. 정원과 툇마루의 정취가 지금도 선하다. 경찰들 하고 남강에 꽝(병에 모래를 넣고 폭약을 넣고 심지에 연결하고 불을 부쳐 물에 던지는 무기)으로 물고기 잡아 천렵한기역이 난다. 밥과 소금물만 먹다 내가 앞을 못보자 옆집에서 개울에 사는 물고기를 잡아 끌여 먹으라고 하여, 송사리를 잡아 끌여 먹으니 며칠후 앞을 보았다. 당시 술이 부족하여 메칠 알콜로 술을 만들어먹다 실명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들었다.
1951년 9.28 수복후 비산동에 들어오니 지하실물건은 피난안간 옆집 할머니들의 차지로 소문나고, 우리 거지가 되었다. 모친은 시장에 나가 개떡( 밀겨 쌀겨등을 개서 쪄 만든 떡으로 현쑥떡 같고 영양가는 있으나 맛은 없다,)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당시에는 오긍선박사 같은 유지들도 부대찌개(간스메고기 햄, 소세지, 빵부스러기 들이 석여진 상태로 끌인 항가리 굴라시 같은 형태) 를 시장에서 사먹는 처지였다.
섣달그믐이 되자 남자들은 화토치기를 한다. 계부가 여기에 개떡장사 밑천을 잃고 알거지가 되었다. 52년 겨울 우리는 모친의 사촌이 사는 수원 외사촌 오빠집으로 내려가서 엄동설한嚴冬雪寒에 창없는 작은 대청마루에 가마니를 갈고 첫날밤을 맞이하였다. 최씨 아저씨는 이동영화관 영사기사로 있다가. 세류동 야산에 주둔한 반공포 부대 장교식당에서 일하며 저녁에는 영사기를 운전하였다. 그래서 조수가 필요해 건의하여 계부를 조수로 고용되었다. 며칠지내다 시내에서 다리를 건너 좀 지나 우측, 1번국도변에서 골목으로 들어가 세 번째 역기역자 소농의 한옥 집으로 이사하였다. 역기역자는 (ㄱ)기역자를 뒤집어놓은 형태로 서북풍을 막는 유리한 형이다. 앞 동내는 공동묘지가 있고 동남쪽 멀리 화장터가 보이고 밤에 사자死者를 지계에 메고 다니는 것을 보면 무서웠다. 뒤는 중국인 농장이며 농장으로 찔러 가면 5분정도 등굣길이 짧아지나 우리 집 북동코너에 수체물이 모이는 농업수용 드럼통이 지하에 묻혀 있었는데, 꿈자리가 뒤숭숭해 나는 이 길로 다니지 않았다. 내가 이사 후 옆집친구가 헛디뎌 빠져서 죽었다고 한다.
장교식당은 설탕과 일본산 귤이 풍부해 몰래 가지고 나오면 돈궤에 가득 모을 수 있는 큰돈이 되었다.
첫댓글 어린 나이에도 많은 일들을 기억하고 있구만.
그 때는 누구나 다 고생했지만 친구는 더 많이 고생했네.
나도 1/4후퇴 피난때 얘기를 하자면 책 한권은 되지 싶네.
언제 만나서 막걸리 한잔하며 옛 얘기 해보세
카페에서 나의이야기로 시작하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