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은 펜촉 속에 잉크를 저장하고 사용할 때 모세 현상을 이용해서 잉크가 알맞게 흘러 나오도록 하는 필기도구다. 중요한 서명을 할 때 만년필을 사용하고, 작가들 가운데는 마크 트웨인, 서머셋 모음, 대서양 횡단비행에 성공한 찰스 린드버그가 만년필로 항해일지를 기록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만년필리 단순한 필기도구가 아니라 반지나 보석 같은 선물로 변신했다. 이 만년필을 사귄 지 한 달도 안 되는 남자친구가 군대 가면서 내게 주고 갔다. 이것이 선물이라면 여자인 내가 남자에게 만년필을 주고, 남자친구는 내게 반지를주어야 맞다. 하지만, 남자친구 K가 내게 만년필을 ㅜ었어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물론 군대로 떠나는 날, 남자친구에게 난생 처음으로 입술을 허락하고 포옹해준 것이 전부였다.
그날부터 훈련소에 입대한 남자친구가 얼마나 훈련이 힘든지, 어디 아픈데는 없는지, 거기는 여자들은 없는지, 하루하루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같은 직장에서 만났으니 직장에 출근하면 남자친구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도 남자친구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J선생, 넘어질라. 어디 아파요?" "머리가 조금요." "군대 간 K대리가 생각나시는군요. 처음에는 그러다가 나중에는 고무신 바꿔 신어요. 제가 J선생 챙겨드릴게요. 쓰러지면 큰일이잖아요." "그만하세요." 나는 끈적대는 G가 미웠다. 그리고 매일 만년필로 편지를 썼다. K에 대한 그리움도 편지를 쓰니 만년필의 잉크가 마르지 않는 사랑처럼 술술 나왔다.
또 K가 바로 옆에서 나를 보듬어 주는 것 같아서 마음도 안정되고 생활에 활력을 찾게 되었다. 훈련 기간에는 편지를 어디로 보내야 할지 몰라 편지를 써서 차곡차곡 모아 두었다. 드디어 K가 자대배치를 받고 무사히 근무한다는 연락이 왔다. 그간 써두었던 편지를 모두 소포로 보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편지를 소포로 보내다니 김 일병 다라 다니는 이상한 여자 아니야? 이상한 사람이면 고무신은 바꾸어 신지 않지. 하지만 머리가 이상한 여자하고 살면 곤란하지 않겠어?" 상사가 놀리는 바람에 힘들었다고 했다.
내 눈과 머릿속은 온통 k뿐이어서 일기처럼 글을 써서 편지를 했다. <편지가 너무 쌓여서 내무반 어디에도 보관할 데가 없으니 며칠 걸려서 한 통씩 보내줘. 아니면 작은 메모지에 쓰던가! 당신을 산소처럼 사랑하는 K로부터>이런 편지가 왔다. "편지 보관할 데가 없어서 며칠 걸려서 보내라고! 자기가 만년필을 내게 줘서 편지하게 만들더니 이제와 보내지 말라고! 알았어." 편지를 딱! 하고 끊으니 휴가 때 와서 무릎 꿇고 사정사정해서 다시 편지를 보냈다.
K는 그 편지들을 부대 외곽 담벼락 사이에다 버리고는 했단다. 이런 사람하고 그래도 고무신 거꾸로 신지 않고 결혼했다. 결혼 할 때 커플반지를 하느라 나는 그에게 만년필을 사주지 않았다. 그런 동갑내기와 환갑을 앞두고 있다. 아들은 군에 갔다가 제대해서 직장 생활을 잘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예전 만년필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첫댓글 가슴 뭉클한 이야기 잘 보고 갑니다...예전의 만년필 향수가 그리워지네요...감사합니다.
예. 박사님!
그옛날 빠이롯드 만년필, 한 때 많이 썻죠.
볼펜 출연으로 지금 존재감은 있지만,
별로 쓰지 않고 선물로는 간간히 주더군요.
수 년 전 인도 갔다 오다가 비행기 안에서
어느 고객이 면세품인데 40만원 짜리
구매하더라구요.
물론 외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