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학기 1주차] 무기징역을 꿈꾸는 감옥
- <황홀한 글감옥>을 읽고 -
평생을 문학에 대한 목마름으로 책을 들이켰다. 어릴 때, 영문학 서적으로 둘러쌓인 아빠의 서재에서 숨바꼭질을 하며, 여고시절에는 예쁜 국어 선생님들을 동경하며 문과생이라는 신분에 자부심을 가지며, 대학 이후에는 지식을 취사선택하여 글로 뱉어내는 사실적 글쓰기를 이어오더라도 마음 한 켠에는 '문학소녀'의 꿈을 품은 채 말이다. 그 목마름을 어떻게 해갈할지 두서 없이 던진 질문에 글쓰기 사부님께서는 조정래의 <황홀한 글감옥>을 예로 드시며 문학에 대한, 글쓰기에 대한 대가의 생각을 전해주셨다. 그렇게 <황홀한 글감옥>을 밑줄 그어가며 읽게 되었다.
조정래 작가는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 시대를 대표하는 대작(大作)을 남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다. <죄와 벌>을 쓴 러시아의 도스토예프스키가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는데, 한국에 그만한 칭호를 받을 만한 이가 있다면 조정래일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그의 대작을 그 방대한 분량에 압도되어 다 읽어보지는 못했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그는 고3 때 '하늘을 벗해 살라'며 승려가 되라는 아버지의 요구에 "저는 문학을 해야 합니다."라며 단호히 거절하고 동국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다. 이후, 혼란스럽고 불합리한 세상의 시류에 여타 철학자들보다 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글을 썼고, 시대의 아픔에 여느 종교인들보다 더 민감하게 통각을 느끼며 피로 얼룩진 대한민국의 역사를 소설로 절절하게 풀어냈다.
이 책은 작가 조정래의 진수가 담긴 자전 에세이집이다. 작가는 이 책을 두고 "이 책은 나의 자전 소설과 같다"고 했다. 책은 인터뷰 형식으로,국어국문학, 영어영문학, 사회학, 정치외교학 등 다양한 전공의 대학생들로부터 질문 500가지를 받아 84개의 질문으로 추려 이에 대한 작가의 대답으로 꾸려진 책이다. 책의 제목인 <황홀한 글감옥>은 글쓰기에 구속된 작가의 처지가 감옥과 같이 고통스럽다는 뜻에서 조정래 작가가 만든 말이다. 헌데 고통의 대가로 얻은 성취감이 무척 황홀하기에 '황홀한 글감옥'이라 형용했다. 책에는 소설가 및 작가의 시대적 책임, 글을 잘 쓰기 위한 방법,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 문학 안에서 다져진 아내와의 러브스토리 등 작가의 생각과 삶이 구어체로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중 책에서 거듭 강조한 작가의 책무와 글을 잘 쓰기 위한 꿀팁을 소개한다. 그는 작가가 어떠해야 하는지, 단순히 글을 쓰는 사람을 넘어선 작가의 정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레닌 옆에서 막심 고리키가 그랬듯이 수많은 작가는 역사의 중요한 고비고비마다 펜을 든 혁명가의 역할을 해내며 인간의 인간다운 삶에 기여하고자 했습니다. 그 역사적 역할, 그것이 곧 '시대의 산소' 노릇입니다. ... 소설가의 산소 역할의 산소는 무엇일까. 그건 '진실' 입니다. 사회적 진실, 역사적 진실, 인간적 진실을 옹호하고 육성하고 지키는 일, 그것이 바로 산소 역할입니다. ... 옳고, 바르고, 참된 것을 위하여 모든 비인간적인 것에 저항하고 맞서야 하는 것이 작가의 소임입니다. 그 옳고, 바르고, 참된 것을 작품으로 지키고 실현하는 것이 곧 진실입니다. ... 모든 비인간적 불의에 저항하고, 올바른 인간의 길을 옹호해야 하는 작가는 오로지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인생을 총체적으로 탐구하는 작가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무입니다. 그 책무를 달고 즐겁게 이행할 의지와 각오가 없다면 작가가 되기를 바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황홀한 글감옥, 2021: 34-36)."
조정래는 또한 그의 뒤를 따르려는 예비 작가들이 눈을 초롱거리며 묻는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방법을 알려주세요."라는 질문에 다독, 다상량, 다작, 국어사전 찾기를 권한다.
"많이 읽고(多讀), 많이 쓰고(多作), 많이 생각하라(多商量). ... 다독 4, 다상량 4, 다작 2의 비율이면 아주 좋습니다. 이미 좋다고 정평이 나 있는 작품을 많이 읽으십시오. 그 다음에 읽은 시간만큼 그 작품에 대해서 이모저모 되작되작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마지막 단계로 글쓰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미련퉁이처럼 실천에 옮기십시오. 그러면 문학의 여신은 뜻밖에도 빨리 여러분을 찾아올 것입니다(황홀한 글감옥, 2021: 48-50)."
"글을 쓰는 사람은 여러 종류의 사전을 서재의 여기저기에 두고 늘 펼치고 또 펼쳐야 합니다. 글을 잘 쓰는 일은 사전을 부지런히 찾는 일이라고 해도 일차적으로는 과히 틀린 말이 아닙니다. 모든 종류의 운동선수가 기초체력을 다지기 위해서 무엇을 합니까. 달리기 아닙니까. 단어를 많이 익히는 것은 문학의 기초체력 다지기 입니다(황홀한 글감옥, 2021: 53-54)."
'작가는 인류의 스승이며, 그 시대의 산소다.'
이 책에 거듭 등장하는 문구로, 세계 문화사가들이 작가에 대해 내린 정의다. 철학을 공부하며 철학자들의 사명은 독재자들의 위협과 어지러운 세계 정세 속 촛불처럼 흔들릴 때도 올바른 진리만을 추구하고 진실만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배웠다. 우리가 익히 아는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목숨과 진리 중 진리를 택하며 육신의 생명은 꺼졌지만 '진실'이라는 영원한 생명을 후세에게 전했다. 조정래 작가가 설파하는 작가의 정체성에 대해 곱씹을수록 작가는 마치 철학자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하여 그 속에 담긴 진실을 캐내어 읽을 거리, 사유할 거리, 놓쳐서는 안 되는 존엄한 것들을 우리 앞에 던져주며, 숨막히는 현실 속에 '시대의 산소'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렇듯 단순히 글을 잘 쓰는 글쟁이를 넘어 사회적 책무를 이행할 때 주어지는 귀한 칭호다.
고귀한 정체성에 글쓰는 능력이 더해져야 '작가'라 불리게 되는데, 글쓰기 비법을 묻는 대학생들에게 그는 다독, 다상량, 다작, 국어사전 찾기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상식적인 방법을 권한다. 좋은 책, 특히 문학전집500권을 읽을 것에 대한 그의 조언은 학창시절 국어 선생님이 옆에서 해주는 말씀처럼 느껴져 정겹기까지 했다. 위대한 작가들의 정수가 담긴 책을 많이 읽고 혀에서 공구르고 머리에서 되뇌이며 그렇게 발효된 것을 원고지에 토해내는 가장 기본적인 스킬(skill)이 가장 모범적인 글쓰기 실력을 키우는 방법이 된다니 희망이 보인다. 이에 더불어 초등학생 때부터 하는 '국어사전 찾기'라니, 이 챕터를 읽고 그 날 바로 국어사전을 사러 시내의 대형서점에 들렀다. 벌써 작가가 된 것 같다.
조정래 작가의 다른 책들을 정독하지 않은 채, 작가의 인터뷰집부터 먼저 읽었다. 보통 작품을 읽고 마음에 들어 작가에 대해 궁금해하며 인터뷰를 찾아보는 것과는 반대로, 순전히 글에 대한 고민, 문학에 대한 갈증에 대한 혜안을 얻기 위해 집어든 책인 것이다. 그래도 그마저도 가슴 뛰는 수확이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뒤에 또 어떤 내용이 나올까 궁금해하며 책장이 빠르게 넘어갔고, '꿀팁(tip)'이라 생각한 부분은 과감히 밑줄을 긋고 그 내용을 책 표지 뒤에 야무지게 옮겨 적었으며, 아내와의 러브스토리를 비롯해 폭발적인 작품을 써낸 작가가 살아간 정갈하고 소박한 하루하루의 시간을 엿보며 행복했다. 그 행복감을 이렇듯 서평이라는 틀을 빌려 글로 풀어내니 황홀하다. 이런 감옥이라면 평생 갇혀 있고 싶다. 모름지기 작가를 꿈꿔본 사람이라면 평생 글을 읽고 쓰는 삶을 살아가고 싶을테니 말이다. 이 황홀한 감옥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 책에 대한 애정을 넘어 글로 번져간 사람, 글이 좋아 평생 글 쓰며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은 사람 모두를 초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