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1. 전선현황
2. 해병대 전투(중동부지역) 분류
3. "안동(安東)지구 전투"
(1) 해병 독립제5대대
4. 해병 독립제5대대 및 전선현황
(1) "월암리(月岩里, 경기, 개풍군) 전투"
5. 수도 '서울' 재탈환 당시의 정찰전
(1) 독립제5대대의 "월암리 전투"
6. "영덕(盈德)지구 작전"
7. "영월(寧越)지구 전투"
(1) 해병 제1연대 영월지구에 집결
(2) "속동(束東)지구 작전"(1951.2.1-2.27)
(3) "녹전리(綠田里)지구 전투"(1951.2.1.-2.26)
(4) "창리(倉里)지구 수색전"(1951.2.27-3.2)
(5) 여량리(餘糧里) 전투"(1951.3.4-3.10)
(6) "봉산리(鳳山里) 전투"(1951.3.5-3.17)
(7) 제1대대제2중대
8. 해병 제1연대 '경춘'가도로 진출
9. "홍천(洪川)지구 전투"(1951.3.19-4.3)
(1) 전투 현황 및 해병 제1연대 '홍천' 집결
(2) "가리산 공격전투"
(3) 제1대대제2중대3소대
10. 해병 제1연대 Ready Line 진출
11. "화천(樺川)지구 전투"(1952.4.9-6.2)
(1) 적정 및 '북한강' 남안지역 수색과 도하작전
(2) 중공군의 3차 공세와 '북한강'철수 작전
(3) UN군 총사령관의 전선시찰 및 UN군의 반격
(4) "명통리지구 수색전"
(5) '화천저수지' 일대로 진격
12. 해병 제1연대의 철수작전
(1) 개 요
(2) 중공군의 제3차 춘계대공세
(3) 철수 간의 문제점
13. 시련을 통한 해병정신의 확립
(1) 해병정신의 회복
(2) 우리는 왜 육군을 무시하고, 싫어 하게 되었는가?
14. 중공군과의 2차전
15. 해병 제1연대의 일선배치
(1) 매설지뢰 사고
(2) 야간경계병의 오인
"도솔산 전투"는 생략 : "해병대 전투"(1)에서 설명됨.
1950년 11월 중공군의 돌연한 한국전쟁 개입으로 '원산', '함흥'지구에서 '진해'로 철수한 해병부대는 1개월 여일 간의 맹훈련으로 차기작전에 대비함과 동시에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이때 비로서 각대대는 해병대 사령부 직속에서 벗어나 해병 제1연대로 새로히 편성된 편제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초대연대장에 사령부 참모장 金聖恩 大領, 부연대장에 金斗燦 中領이 각각 임명되었다.
해병대 편성 및 직위표(1951.10.20 현재)
이때의 戰況은 중공군의 人海戰術로 인하여 1951년1월4일 首都 '서울'이 다시 적의 수중에 함락되었으며 '서울'을 점령한 적은 맹렬한 기세로 남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때 UN군은 남진 중에 있던 적을 '릿지웨이' 중장의 기묘한 작전으로 '오산'-'원주'를 연결하는 선에서 완전히 저지하는데 성공하고 이 지구에서 피아의 처절한 공방전을 반복하고 있었다.
한편 중동부 산악지대에서는 적의 집요한 소수병력에 의한 소규모공격이 계속되었고 그 중의 일부 병력이 安東지구에 출몰하는 형세였다. 더욱이 지난 해 馬山, 鎭東里지구에서 해병부대에 의해 맹타를 당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적은 보복작전을 꿈꾸고 전선에 진출하였다가 미 제10군단의 "북한강지역 차단작전"으로 퇴로가 끊기자 太白山줄기를 타고 북상 도주하고 있었으며 중공군은 전세가 역전되어 榮州, 安東, 淸松, 및 盈德부근 일대에서 발악적인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특히 이 일대의 적은 '영덕-안동' 간 도로를 위협하면서 방약무인하게도 경찰지서를 습격하며 또한 양민을 괴롭히는 등 유격활동을 자행하고 있었으니 이에 대한 긴급한 대책이 무엇 보다 요망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때 馬山에 주둔하고 있던 미 해병 제1사단은 '포항'에 지휘소를 두고 패잔병 소탕과 도로경비를 담당하게 되었다. 따라서 해병 제1연대는 이 지역에서 작전 중인 미 해병 제1사단을 증강하는 한편 합동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이 지역으로 출동하게 되었다.
한국 해병 독립제5대대는 1951년 1월 24일 차량편으로 출발하여 '안동'남쪽 亭下洞에 도착하고 해병 제1연대의 주력부대는 부연대장, 金斗燦 중령의 지휘하에 1월26일 LST 3척으로 鎭海를 출발하여 '영덕' 동남쪽 해변의 '하저동'에 상륙하여 1월29일 전투기지인 '영덕'에 집결하였다.
이리하여 해병 제1연대는 이후 중동부전선을 무대로 이곳 '영덕'지구를 비롯하여 寧越, 洪川, 및 樺川 등 각지구에서 "兜率山戰鬪" 및 "金日成高地戰鬪"를 치루고 "月山嶺防禦戰"에 임하던 중 수도방위를 위한 西部戰線(경기. 長湍 및 沙川江지역)으로 1952년 3월 17일 이동하였다.
한편 해병 독립제5대대는 "安東地區戰鬪"를 끝마치고 1951년2월16일 仁川에 상륙하여 金浦地區로 진출하여 지역일대의 방어임무를 수행하였다.
3. 安東지구 전투
太白山脈 일대에서 준동하고 있는 적은 人民軍 제10사단 제27연대 및 사단직속 포병대대였다. 적의 병력은 약 3.000명으로 추산되었으며 拍子洞을 근거지로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江陵으로부터 약간의 보급물자 지원을 받고 있었으나 주로 촌락을 습격하여 현지 약탈을 주로 일삼았기 때문에 민심은 자못 소연하였다.
(1) 해병 독립제5대대
해병 독립제5대대(대대장 吳命福 소령)는 미 해병 제1연대에 배속되어 '정자동'에 본부를 설치하고 미 해병 제1연대의 예비대로서 安東-大邱 간의 도로를 확보하고 이 지구일대에서 준동하고 있는 적을 수색, 소탕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1월25일 제21중대, 제23중대, 및 제24중대는 '정하동'에 경계배치하고 제22중대는 제24중대로부터 박격포 2문, 중기 2정의 배속을 받아 義城-安東 간의 도로경비와 부근일대의 수색임무를 부여받고 岩山에 파견, 배치되었다.
한편 古谷洞에 근거를 두고 臨下洞일대에서 출몰하고 있는 패잔병 약 200명이 그 지역일대에서 횡행하고 있어서 이 지구의 경찰대는 항상 패잔병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1월28일 지역내에서 준동하고 있는 패잔병 약 200명이 楸木洞을 습격하여 왔기에 경찰대는 松洞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亭下洞에 배치되어 있던 독립제5대대 대대장은 부대대장(李鳳出 대위)에게 제22중대로부터 박격포 2문, 중기관총 2정을 배속받아 이 적을 공격토록 하였다. 부대대장은 1월 29일 05:00시 '정하동'을 출발하여 06:00시에 '송동'에 도착하였고 계속 도보행군으로 30분 후에 '추목동'을 통과 중 적으로부터 불의의 사격을 받고 곧 응전하였으나 이때는 이미 적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다.
金京泰 三等兵曺
그러나 해병들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신속한 행동으로 전투배치하여 중기관총은 2분만에, 박격포는 3분만에 사격준비가 완료되어 반격을 시작하였다. 특히 金京泰 三等兵曺는 대담하게도 적의 포위망을 뚫고 적의 후방으로 돌아 적의 후방에서 사격하는 등의 용전을 계속하여 적 8명을 사살하고 또 52명을 부상시키는 등의 전과를 올리고 약 40분만에 '추목동' 뒷산 270m고지를 점령하였다.
이때 이 작전에 함께 참가했던 미 해병대의 Greenton 중위는 한국 해병대의 신속하고 침착한 행동에 경탄하여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미 해병대에 비하여 조금도 손색없는 전투부대"라고 한국 해병대를 격찬하였다.
2월1일 독립제5대대 부대대장, 李鳳出 대위는 미 해병 제1연대의 명령으로 박격포 2문과 중기관총 2정의 배속을 받은 제21중대를 點谷에 경계배치하였다. 이때 3소대(소대장 견습사관 朴天萬 해간 3기)는 수색정찰의 임무를 띄고 '정자동'일대를 정찰 중 불의에 적의 패잔병 약 200명으로부터 기습사격을 받았으나 소대장이하 전대원은 전혀 당황함이 없이 전투배치하여 응전하였다.
安榮福二等兵曺, 千春植 分隊長
특히 선임하사관 安榮福 二等병조는 분대를 지휘하여 적진에 돌입, 백병전을 전개하는 한편 千春植 1분대장은 경기관총을 전술적으로 잘 운영하여 적에게 600여 발의 명중탄을 퍼부어 적의 전의를 제압하고, 격전끝에 적 30여 명을 사살하고 11명을 생포하는 등의 전과를 올리고 패주하는 적을 계속 추격하였다.
이와같이 '점곡'지구에서 적의 패잔병 소탕작전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운 독립제5대대는 미 해병 제1연대로부터 그 배속이 해제되고 새로히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영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때 미 해병 제1연대장으로부터 보내온 치사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독립제5대대와 함께 항상 작전을 수행하였음을 행복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번 귀대대와 이탈하게 된 것을 심히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귀대대 장병, 특히 제21중대의 선전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런 사실을 申鉉俊 司令官에게 전해 주십시요". 이렇게 '안동'지구에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독립제5대대는 다시 북상하여 수색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때의 적의 동향은 인민군 제1사단의 일부 병력이 후방교란의 기도로 丹陽을 경유 '안동'부근 산악지대에서 잠복 중이었다.
2월4일 17:00시 '영주'에 도착한 독립제5대대는 부대본부 및 제21중대를 '영주'서부 26고지에 배치, 제22중대본부를 후방 116고지에 각각 배치하여 '영주'방어에 임하게 하였다. 또한 제23중대를 부대대장 지휘하에 박격포 2문, 중기관총 3정을 배속시켜 醴泉방면으로 파견하였다.
독립제5대대대는 잔적 소탕과 '영주'일대의 치안확보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주민의 협력을 얻고져 2월5일 14:30시 대대참모와 지방유지와의 환담회의를 열고 군민들의 협조와 경찰대의 임무 등에 관하여 토의하였다.
해병부대는 '영주-안동' 간을 연하는 일대를 확보하면서 2월12일까지 부근일대의 패잔병 소탕을 위한 수색전을 계속하면서 '안동'에서 제23중대와 합류하였다.
(2) 독립제5대대의 재배치
2월 13일 독립제5대대는 새로운 임무를 받고 新江口에 집결한 후 2월 16일 해군 함정편으로 仁川에 상륙하여 金浦地區에서 작전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때 한국 해병 제1연대의 주력부대는 "盈德地區作戰"을 수행하며 또한 '안동-영덕' 간의 도로일대를 확보하기 위하여 수색작전을 수행하면서 적의 발악적인 활동을 저지하고 있었다.
4. 해병 독립제5대대 및 戰線현황
독립제5대대가 安東 및 晉州지구에서 소탕작전을 마치고 해병 제1연대와는 별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중부전선에서 서부전선 '인천'에 상륙한 것은 1951년 2월 16일 13:00시였다.
仁川에 상륙한 독립제5대대는 '인천'과 '김포'반도를 새로운 전투지구로 하고 작전임무는 잔적을 소탕하여 치안의 확보와 '인천'시가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독립제5대대는 이 작전을 현지에 주둔 중인 미 제2특별공병단 여단장 '투메니' 준장의 지휘하에 수행하게 되었다.
당시 '인천'시가는 대체로 평온한 상태에 있었으며 가끔 적의 패잔병들로 조직된 '게릴라'부대의 침입이 있을뿐이었다. 퇴로를 잃고 '인천'시가에 잔류하고 있던 적의 패잔병들은 국군과 UN군의 맹열한 공격으로 인하여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인천'시를 철퇴하여 '김포'반도 북단을 연하는 일대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인천'시내에 침입하는 '게릴라'부대의 근거지를 이루고 있었다.
한편 우군부대는 육군 제1사단과 UN군이 安陽에 주둔하고 있었고 그 선봉부대는 素沙, 永登浦, 및 漢江남단까지 진출하였으며 언제든지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을 공격, 재탈환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엇다.
이와같은 우군의 상황을 고려하여 독립제5대대는 우선 '인천시'를 방어하면서 '김포'반도일대의 잔적을 소탕할 계획을 수립하고 부대본부를 仁川商業中學校에 정하였다. 독립제5대대는 제21중대, 제24중대를 예비대로 하여 '인천시'의 경비에 임하게 하고 부근일대에 배치하였다. 이와같이 독립제5대대가 '인천'을 경비하게 되면서부터 '인천시'를 소란케 하던 적 '게릴라'의 준동도 점차 없어지고 따라서 치안도 일익 확보되고 있었다.
2월7일 09:00시 부대장 吳命福 소령은 참모회의 석상에서 特別指示를 시달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戰況은 '한강'방어선에 국군 제1사단이 배치되어 있으며 우군의 전병력을 이동시켜 三陟방면으로부터 우회공격을 감행하여 平-元가도를 통하여 포위공격으로 결전할 태세에 있음.
(2) 事故防止에 유의하라. 전세가 평온하다고 안심하지 말고 철저한 경계를 실시하며 특히 부하 대원들이 시내를 배회하지 않도록 하라.
(3) 部隊는 교육을 등한히 하지 않음으로써 전투능력을 배양하여 차기 작전에 대비하라.
(4) 市內巡察은 필히 장교가 대장이 되어 大路를 통하는 집단 순찰을 실시하라.
(5) 海兵隊의 上陸, 주둔 후부터 적의 '게릴라'부대는 그 자태를 감추게 되엇고 난민은 계속 입주 중에 있음.
이리하여 독립제5대대는 '인천'을 방어하는 한편 UN군이 2월하순 반격을 개시하여 3월14일 首都'서울'을 재수복할 때 적의 '김포'반도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하는 한편 정찰대를 '영등포'일대까지 파견하여 '서울'공격전에 협조하였고 또한 적의 4월22일부터 시작한 제3차공세 시에도 수도방위를 위하여 '김포'반도에서 '개풍군'일대를 정찰하면서 적을 견제하였다.
中東部戰線에서 해병 제1연대가 "月山嶺防禦戰"을 끝으로 西部戰線으로 이동하여 '장단, 사천강'지구에 포진하게 된 1952년3월17일까지 독립제5대대는 '김포'지구의 경계와 "月岩里戰鬪"를 치루고 '김포'반도의 전방, '한강'너머의 開豊郡일대의 수색과 정찰을 계속 중 해병 제1연대의 중동부전선으로부터 서부전선으로 이동과 더불어 '한강'을 사이에 두고 연계를 지어 휴전 시까지 서부전선에서 수도방위의 중책을 수행하였다.
5. '서울' 재탈환 당시의 정찰전
독립제5대대는 '인천'시를 방어하는 한편 정찰대를 '영등포'일대까지 차출하여 육군과 UN군의 '서울'탈환전에 협력하였다. 제5대대는 2월 20일 09:00시 10명의 정보대원으로 편성된 정찰대를 '영등포'일대의 정찰임무를 부여하고 부대본부를 출발하게 하였는데 16:00시 이 지구의 정찰을 완료하고 귀대하였다.
정찰대의 보고에 의하면 적은 延禧洞고지에 속사포 3문을 배치하고 있으며 소부대로서 '한강'이남의 아군 진지에 소규모의 야습 또는 정찰을 계속하여 아군의 전투 능력과 진지를 탐지코져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이때 아군은 '한강'이남에서 공격준비를 완료하고 중부전선의 우군부대의 반격, 진출과 함께 진격할 태세에 있었다.
3월12일 부대는 차기 작전에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장구 및 피복 점검을 실시하였으며 계속하여 '인천시'의 방어 임무와 치안 확보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또한 동일부로 미 제2특별공병여단장의 작전지휘하에서 해제되었다.
제5대대는 3월17일 작명에 의거 舊富平으로 이동하고 육군 제1군단장 白善燁 준장의 지휘하에 들게 되었다. 당시 적은 이미 臨津江 북방으로 후퇴하여 '개성'근방에 집결을 기도하고 있었으며 약 1개 중대의 병력이 幸州북방에 배치되어 있었고 金浦半島의 해안에는 1개 소대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때 우군으로는 육군 제12연대가 '소사'에 주둔하여 이 지구일대의 경비에 임하고 있었다.
이동을 완료한 제5대대는 부대본부를 '구부평'에 설치하고 제21중대는 陽谷里에, 제23중대는 '김포'에 각각 배치하여 우군 주력부대가 首都'서울'을 재탈환하는 동안 적의 '김포'반도 상륙을 미연에 방지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엇다.
3월31일 육군 제1사단소속 江華島유격대에 파견되었던 중화기 중대 박격포소대 견습사관 朴俊善외 24명은 이날 12:00시 육군 제5816부대와 합동하여 경기도 '개풍군' 海艙面에 상륙하여 '개풍군'일대를 공격하고 부근일대의 수색전을 전개하여 그들의 '빨지산' 3명을 생포하였다.
또한 4월2일 10:00시 大聖面 북방 2km지점인 廣等面을 공격하여 적, 인민군 15명을 사살하고 12명을 생포하였으며 그 외에 내무서원 18명도 생포하였다.
4월4일 육군 제1사단의 작명에 의거 부대는 '구부평'으로부터 '양곡리'로 이동하여 부대본부를 陽村國民學校에 설치하고 제21중대를 太川에, 제22중대를 通津에, 제23중대 및 제24중대를 예비대로 각각 배치 완료하였다.
4월5일 이후 부대는 계속하여 '개풍군'일대의 수색정찰전을 실시하고 있던 중 4월26일 16:00시를 기하여 육군 제1사단으로부터 배속이 해제되어 다시 영국군 제26여단에 배속되어 종전의 임무를 계속 수행하게 되어 제5대대는 '개풍군'일대 및 '개성'부근까지 정찰하게 되었다.
6. 開豊郡一帶 및 開城附近 정찰
開豊郡은 '김포'반도 북단 해안(漢江변) 너머에 위치하고 있는 곳으로 그 사이는 '한강'과 臨津江이 합류되는 넓이 2-3km의 강으로 되어 있다. 특히 이 강은 간만의 차가 심하여 간조 시에는 쉽게 도강할 수 있었으므로 적은 기습부대를 편성하여 한강을 건너 침입하여 후방을 교란할 기세였다.
이에 해병 제5대대는 이 적의 기도를 사전에 분쇄하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 적에 앞서 '한강'을 도하하여 背水陣을 치고 적극적인 정찰을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특히 이 지대는 전기한 바와같이 간만의 차가 심하고 급류인 반면에 바람이 불면 목선으로도 쉽게 도하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도하하기 위하여서는 적어도 40분-1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도하 중 적으로부터 발견될 위험도 있었다. 더욱이 정찰대의 병력은 소수이며 적에게 발견되면 대부대로부터의 공격을 면치 못할 뿐만 아니라 전멸당할 각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같은 모든 악조건하에서도 해병대는 정찰전을 전개하여 물샐틈없는 경계상태를 유지하므로써 '김포'지구에는 적이 얼씬도 못하게 하여 이 지구의 치안을 확보하였으니 제5대대의 공로는 실로 찬연한 것이었다.
독립제5대대의 정찰지역은 폭 14km, 깊이 22km되는 '개풍군'의 남단에서 북으로 '개성'까지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독립제5대대가 정찰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도강지점으로 선택한 지점을 부대별로 살펴보면 제21중대 및 제22중대는 본부를 太川에 두고 江岸의 新里에서 서쪽으로 '개바우'에 상륙하였고 通津으로 부대본부를 이동한 후에는 제22중대 및 제23중대가 康寧浦와 照江里에서 떠나 역시 '개바우'에 상륙하여 정찰을 실시하였다.
다시 본부를 開豊郡 月岩里로 이동 후 '김포'반도의 북단의 江岸에 분대 또는 소대병력을 배치하여 적의 상륙에 대비하였고 부대의 방어진지인 강안정면에는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이렇게 하여 4월 초부터 시작된 적극적인 정찰전은 멀리 '개성시'까지 이르렀으며 7월21일까지 약 3개월 동안 50여 회에 이르렀다.
그 간의 정찰전을 회고해 보면 5월 3일 17:30시 정보대 1개 분대가 領井浦 일대를 수색, 정찰 중 적, 인민군 약 1개 소대와 조우하여 약 1시간의 교전끝에 이를 격퇴하였다. 익일 5월4일 '영정포' 수색을 완료한 수색대가 귀대 도중 月岩里 일대를 수색하여 적, 인민군 정치보위부원 1명을 생포하고 12:00시 귀대하였다.
5월16일 정보대 1개 분대가 陽村 일대를 수색 중에 중공군 1명을 생포하고 귀대하였다. 또한 5월27일에는 '개풍군' 일대의 적극적인 수색, 정찰을 위하여 06:00시에 출동한 1개 소대는 08:00시 '두빈리'를 수색, 정찰 중 적, 인민군 제3군단제1사단포병연대 소속인 병사 1명을 생포하여 추가적인 적과의 조우없이 18:00시에 귀대하였다.
5월29일 교대 투입된 정찰대는 역시 '개풍군' 일대를 수색, 정찰하기 위하여 '시암리'로부터 '돌뿌리'에 상륙하여 中面 일대를 수색하였으나 접적치 못하고 18:00시에 귀대하였다. 5월3일 '개풍군' 일대의 정찰을 위하여 파견된 정찰대는 下照光里에서 인민군 72명을 생포하고 귀대하였다.
6월1일 臨漢面 일대의 수색, 정찰을 위하여 정찰대를 파견한 결과 이 정찰대는 '월암리'에서 인민군 1명을 생포하고 18:00시 귀대하였다. 이같이 정찰대를 계속 투입함은 적극적인 진지 방어와 적의 침공 기도를 사전에 분쇄함에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보다 적을 생포하여 포로를 통하여 적정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함이 주목적이었다.
6월22일 작명에 의거 제23중대는 제22중대와 교체하여 전초중대로서 정찰 임무를 계속하였다. 이보다 앞서 6월6일 부대는 정확한 적정을 수집하기 위하여 정찰대를 '개성'방면까지 깊숙히 투입하기 위하여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1) 제22중대장은 병력 1개 소대를 6월 6일 19:00시가지 康寧浦를 출발시켜 臨漢面 일대를 거쳐 固城방면의 정찰에 임하게 하라.
(2) 제22중대장은 병력 1개 소대를 6월 7일 17:00시가지 新里를 출발시켜 '두박리'를 거쳐 '개성'방면의 정찰을 실시케 하라.
(3) 정보대에서는 파견된 인원과 밀접한 협조를 도모할 것이며 '하조강리'와 '두박리'를 수색근거지로서 이 지구에 위치하라.
이와같은 작전명령을 받은 각대는 각각 정찰대를 편성하여 목적지를 향하여 출발시켰다.
6월8일 제23중대 소속 정찰대는 光德山 46고지 일대를 수색, 정찰 중 적, 인민군 약 60명과 조우하여 약 30분 간 교전끝에 1명을 사살하고 20:30시 귀대하였다. 한편 제23중대소속 정찰대는 鳳道里의 紅文山, 49고지 일대를 통과 17:45시 중공군 약 1개 중대가 배치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약 4시간에 걸친 교전끝에 이 고지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 29명을 사살, 기관총 2정, 각종 소총 8정을 노획하는 등 전과를 올렸고 아군의 피해는 전사 2명이었다.
6월11일12:00시 정찰대가 東幕 80고지 일대에 도착하여 부근일대를 수색 중 17:45시 중공군, 인민군, 및 내무서원 등 혼성부대, 적 약 150명과 조우하여 약 30분 간에 걸쳐 교전하여 9명의 적을 사살하고 2명을 사상, 기타 각종 소총 등을 노획하였으며 또한 귀대 도중 光德山 일대에서 '동막'에 침입하려는 적을 발견하고 적의 진로에 잠복하여 적의 접근을 기다려 사정내에 이르자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여 다대한 손해를 적에게 주었으나 적의 지원화력과 후속부대의 증가로 인하여 21:00시 이 지역에서 철수, 귀대하였다.
6월12일 제23중대소속 정찰대는 3일 간 예정으로 '월암리', 上道里 및 '동막' 일대의 수색, 정찰 임무를 띄고 08:00시 下照光里를 출발하였다. 한편 제22중대에서도 2일 간 예정으로 6월13일 08:30시 정찰대가 '두박리'를 출발하였다.
6월13일 13:00시 제23중대소속 정찰대가 '동막'일대를 수색 중에 중공군 약 2개 소대 병력이 91고지의 능선을 타고 '동막'에 침입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정찰대는 부락을 중심으로 전투배치하여 적이 접근하자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다대한 손실을 주었으며 또한 61mm 박격포는 적의 집결지에 45발의 포탄을 명중시켰다.
그러나 적은 계속 후속부대의 지원하에 120mm포로 정찰대의 진지에 응사하여 왔고 일부 병력은 남하하여 정찰대를 포위하려 기도하였다. 이같은 적정을 판단한 정찰대는 16:00시 이 지역을 철수하여 22:30시 '월암리'에 귀대하였다.
6월14일 제22중대소속 정찰대는 예정 코-스를 정찰, 접적없이 귀대하였으며 대대본부소속 정보대는 馬停洞 일대를 수색 중 중공군 장교 1명을 생포하고 16:40시 '하조광리'에 귀대하였다.
6월16일 제22중대소속 정찰대는 목표지역 BS85.8-02.0 일대를 수색 중 적, 중공군 약 1개 소대를 발견하고 이 적을 공격하였으나 중공군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개성'방면으로 후퇴하였다. 정찰대는 이 적을 추격, 격멸하려하였으나 松岳山방면에 적의 주력이 집결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추격을 중지하고 15:00시 이 지구를 철수하여 上道里를 경유하여 귀대하였다.
6월20일 본부소속 정보대 2개 분대가 光德山 146고지 일대를 수색, 정찰하기 위하여 康寧浦, 始岩里를 각각 출발하였다. 적은 6월 20일 05:00시를 기하여 土城방면으로 후퇴하였으며 '광덕산' 146고지에 중공군 약 30명, '범고개' 일대에 중공군 약 50명이 집결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부대본부에서는 6월 22일 06:00시 이 적을 생포 또는 섬멸할 목적으로 제22중대와 제23중대에서 각각 1개 소대를 차출하여 '강령포'를 출발하게 하였다.
제23중대 수색대는 大照江에서 적, 인민군에게 포로가 되었던 육군 제8사단소속 소위 崔敦善외 7명을 구출하여 09:00시 귀대하였으며 제22중대 및 제23중대에서 차출된 공격부대는 목적지 '광덕산' 146고지에 도착하여 적정을 수색하였으나 적은 이미 04:00시를 기하여 전부 '개성'방면으로 이동하였음을 확인하고 16:00시 귀대하였다.
6월25일 출발한 제23중대 수색대는 예정 코-스를 따라 27일 10:30시 東幕을 수색 중 중공군 약 50명을 발견하고 공격을 개시하여 적을 격퇴하고 南山을 점령하였으나 적의 박격포의 집중사격으로 인하여 17:20시 철수하였다.
7월1일 제22중대 수색대는 07:30시 정찰계획에 의거 적정 수색차 '동막'을 출발하여 12:00시 BS83.3-05.5 일대를 수색 중 중공군 약 1,000명이 박격포, 중기, 및 경기 등을 소지하고 때때로 산령에 출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13:20시 이 적을 공격할 목적으로 '개성'에 돌입하여 龍水洞을 수색하고 인민군 장교 1명을 생포하였다. 계속 전진하려하였으나 적의 박격포의 집중사격으로 인하여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고 17:00시 수색대본부인 '동막'으로 철수, 귀대하였다.
7월3일 제23중대는 새로히 소총 1개 소대를 수색대로 편성하여 19:20시 '강령동'을 출발하여 22:00시 수색대 본부에 도착, 露營하고 7월 4일 06:00시 수색대 본부를 출발하여 정찰코-스를 따라 '남산'을 향하여 진격 중 부근일대에 중공군 약 1개 중대가 배치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전진을 중지하고 현위치를 중심으로 부근 고지에 부대를 배치하고 정찰대를 전방에 차출하여 적정을 탐색하였다.
01:40시 정찰대는 적의 배치 지점을 우회하여 '개성'에 돌입할 목적하에 양동작전으로 이 적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약 30분 간에 걸친 교전 중 적의 후속부대가 정찰대의 전진로인 동쪽으로 남하하여 왔으며 또 다른 일부 병력은 서쪽으로 남하하여 포위함으로서 정찰대는 완전히 전진로를 잃고 삼면으로 포위당하였다.
이때 정찰대장은 포위망을 돌파할 것을 결심하고 돌파지역 일대에 맹열한 사격을 집중하여 돌파에 성공하고 이 지역을 철수하여 23:00시 月岩里에 귀대하였으나 이 작전은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7월 7일 23:10시 적정 수색차 출발한 제23중대 정찰대는 예정코-스의 수색, 정찰을 완료하고 귀대 도중 BS86.0-93.0 지점을 통과할 때 적, 중공군 약 1개 중대의 병력으로부터 불의의 사격을 받았으나 정찰대는 이 적을 유인하여 격퇴하고 귀대하였다.
제23중대에서 소총 1개 소대로 편성된 수색대는 7월 4일 16:00시 '개풍군'일대의 수색, 정찰의 임무를 띄고 '강령포'를 출발하여 19:30시 수색대 본부인 '월암리'에 도착하여 휴식하고 22:00시 수색, 정찰코-스를 따라 수색대 본부를 출발하여 접적없이 7월7일 20:30시 '상도리'에 도착하여 야영하였다.
한편 제22중대에서 편성된 수색대는 7월 7일 16:00시 수색대 본부를 출발 21:30시 '상도리'에 도착하여 제23중대 수색대와 임무를 고대하고 야영하였다. 임무를 인계한 제23중대 수색대는 7월8일 06:00시 '조광리'에 귀대하였으며 '상도리'에서 대기 중인 제22중대 수색대는 부근 일대를 수색 중 중공군 약 400명이 남하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즉시 이 지역을 철수하여 '월암리'로 귀대하였다.
7월10일 東幕을 출발한 수색대는 '광덕산', '동물산'의 적정을 수집하고 수새대본부인 '동막'으로 귀대하였다. 이 수색대는 '광덕산', '동물산'에 중공군 약 50명이 각각 완전무장하고 배치되어 있음을 목격하였다. 이와같은 적정으로 제5대대는 적극적인 정찰을 감행하기 위한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7월 27일 07:00시 대대예비대로 있던 제21중대는 부대의 정면을 탐색하기 위하여 주둔지를 출발하였다. 16:00시 수색대본부인 '월암리'에 도착한 제21중대는 수색대본부 좌, 우측고지에 배치되어 야영하였다.
7월 13일 06:00시 정찰계획에 따라 제21중대는 수색대본부를 출발하여 부대의 정면의 적정을 정찰한 결과 중공군 약 300명이 남하하고 있었으며 또한 적은 도하할 기도가 농후하였다. 이와같은 적정에 비추어 해병대는 진지의 대보수작업을 실시하고 적 부대의 도하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7월 14일 06:00시 수색대본부를 출발한 제21중대 수색대는 09:00시 BS82.0-92.5 일대의 적정을 수색하고 또한 BS86.0-93.0 일대를 수색 중 적, 인민군 5명을 발견하고 교전끝에 1명을 사살하고 따발총 1정을 노획하고 계속하여 예정코-스를 수색하고 접적없이 22:00시 수색대본부로 귀대하였다.
이와같이 수색정찰대는 연일 적진에 침투하여 정찰하는 데에만 끝치지 않고 적극적인 공격작전까지 수행하여 敵의 南下侵攻과 漢江渡河를 적극 저지하고 있었다.
이 기간 중의 전과는 다음과 같다.
戰果: 사살 56명 사상 48명 생포 48명 따발총 3정 기관단총 2정 권총 1정 아식장총 13정 기타소총 3정 등 노획.
(1) 독립제5대대의 "月岩里戰鬪"
UN의 소련대표 '마리크'가 38도선 정전안을 6월24일 제출하자 미국의 Truman 대통령은 UN군 총사령관 Ridgeway 장군에게 북한측과 현지에서 정전교섭을 시작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때 이로인한 국내여론은 한결같이 "이렇게 정전할 바에야 무엇 때문에 싸워야만 했는가? 고귀한 희생을 내면서까지 싸운 보람이 겨우 이것인가? 결코 그래서는 안된다. 우리는 남북통일을 완수할 때까지 전투를 계속하여야 한다,"는 비통함과 울분이 뒤섞인 감정을 절규하였으나 결국 7월 초순부터 開城에서 정전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토의하게 되었다.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전 전선은 대체적으로 정찰전과 소규모의 기습전이 계속되는 기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더욱이 板門店에서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개성', '판문점', 汶山 및 이를 통하는 도로를 중립지대(D.M.Z.)라 하여 제한된 기형적인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때 적(中共軍)은 이와같은 외교의 동향을 계기로 최대한의 영향을 회담에 반영하기 위하여 '개성'북방으로 후퇴하여 소규모정찰전을 수행하던 방법을 변경하여 대부대의 병력을 '개성'지구로 투입하여 남하하여 왔다.
人民軍 제8사단제2연대는 開豊郡 光德面 夢德里까지 진출하고 이 부대에서 편성된 수색대는 '강화도'의 대안 白馬山 일대까지 출몰하면서 때에 따라서는 '한강'을 도하하여 남하할 기세까지 보였다.
힌편 다른 인민군 부대는 月光里북방 5km 지점인 上道里까지 침투하고 있었고 또한 중공군의 소수병력은 '월암리'북방 7km지점인 新村과 '상도면', '광덕산', 및 臨溪面에 각각 배치되어 있었다. 이와같이 적이 회담을 견제하며 또한 그들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갈 의도하에 다시 전황은 긴장되어 갔으며 적의 남하할 기세는 더욱 노골화되어 갔다.
이리하여 주변상황은 독립제5대대가 종전보다 더욱 적극적인 정찰전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의 우군상황은 육군 제1사단이 臨津江 남안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독립제5대대의 수색대본부는 楊村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독립제5대대는 육군 제1사단의 작전지시에 의하여 '월암리'에 수색대본부를 두고 전방 즉 '개성'방면의 수색을 계속 감행하고 있었다. 독립제5대대의 작전은 사실상 그 당시의 상황의 긴박성을 반영하고 있어서 미 제1군단장 및 육군 제1사단장으로부터 "종전보다 더욱 경계를 철저히 하여 적의 공격을 미연에 방지하라"는 지시가 거듭 강조되었다.
미 제1군단장의 지시를 요약하면:
(1) 적의 능력은 언제든지 24시간내에 아군의 주저항선에 도착할 수 있다.
(2) 각급 지휘관은 이와같은 적의 능력을 숙지하고 경계부대의 야간근무 능력을 확인하라.
(3) 최근의 潮水表를 최고도로 이용하라.
(4) 경계의 완전은 상사의 적절한 경계부서의 배치와 각개인의 경계에 대한 긴장과 시기에적합한 보고로서 완성된다.
(5) 각급 지휘관은 '임진강'북방부대의 긴급 시 휴대불가능한 중장비와 철수로에 대한 사전지시와 기습포위의 방지책을 수립하라.
(6) 경계부대의 목적은 전투가 아니다.
(7) 수색에 주밀함은 경계의 주요 요건이니 경계에 임한 부대는 항시 그 장소와 후방을 수색하라.
(8) 경계부대와 주력부대의 연락에 있어 특히 야간연락 유지에 노력하여 보고의 완벽을 기하라. 연락책임은 상급자에 있음을 명심하라.
(9) 해병 독립제5대대 및 제15연대제3중대의 정면의 경계부대의 민가 숙영은 경계심의 해이를 표시하게 되니 즉시 시정하라.
(10) 전초선 및 주저항선에 민간인, 소속 불명자의 출입을 금지하라.
이리하여 해병 제5독립대대장 李鳳出 소령(7월 8일부로 부대대장에서 대대장으로 승격)은 방어의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장애물 설치 및 진지보강과 수색전의 철저를 기하는 등 미 제1군단장의 지시에 따라 이를 다시 강조하여 지시하였다.
그 중 특기할 것은 즉 [금번 작전은 수색정찰의 철저 여하에 따라 그 승패가 좌우되는 것이니 수색정찰에 적극 노력하라. 또한 각급 지휘괸은 명령 또는 지시사항이 철저히 이행되도록 감독하고 그 경과 및 결과를 지체없이 보고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리하여 제5대대는 대대장의 지시에 따라 적극적인 수색정찰전을 위하여 제22중대 및 제23중대에서 각 1개 소대를 차출하여 '월암리'를 근거로 전방에 대한 정찰을 철저히 하였다.
그런데 정찰대의 계속되는 수색, 정찰 활동으로 인하여 해병 정찰대의 근거지가 적에게 노출되게 되었다. 따라서 적은 해병 정찰대의 神出鬼沒하는 정찰전을 저지, 방해하는 방안으로 해병대의 수색대 근거지를 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독립제5대대 수색정찰대의 혈전 현장도(월암리)
김포지구 "월암리(月岩里) 전투" 상황도(1951. 7. 23)
당시 인민군 제8사단은 본부를 '개성'북방에 두고 제2연대본부는 鎭峰山에 있었고 각대대는 光德山에서 남으로 '한강'연안 領井浦에 이르는 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때 매일 계속되는 강우와 농무로 인하여 해병들의 경계시야는 극히 제한적이었는데 이를 호기로 적은 7월23일 05:30시를 기하여 '월암리'를 급습하여 왔다.
적은 '월암리'후방고지와 좌우고지를 2중, 3중으로 포위하고 점차 포위망을 압축하여 왔고 또한 다른 적의 부대는 정찰대의 상륙지점인 下照江里에 내습하여 도강작전에 사용되는 목선을 전부 파괴하고 '월암리'남방으로 공격해 왔다.
이때의 적은 1개 연대의 병력으로 중기와 박격포를 장비하고 있었으며 이에 반하여 해병정찰대는 2개 소대의 병력뿐이었고 그나마 중장비는 없었을 뿐더러 계속된 강우로 인하여 행동에 많은 제한을 받고 있었다. 또한 통신기마저 고장이 나서 본부와의 연락은 두절되어 있었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해병정찰대는 적과 교전하여 적을 공격, 섬멸하는 것보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전원이 무사히 적의 포위망을 뚫고 철수하느냐 하는 것이 무엇보다 선결문제였었다. 적은 81mm 박격포로서 정찰대진지를 강타하면서 4면으로부터 공격하여 포위망을 압축하며 정찰대본부에 시간적여유를 주지않으려고 공격하여 왔다. 적이 접근하자 정찰대는 지근거리에서 일제히 전화력을 집중하여 적에게 사격을 가하였다.
이에 제일선의 적은 속출하는 희생자와 해병정찰대의 예상외의 완강한 저항에 당황하여 시체를 유기한채 일시 후퇴할 기세를 보였으나 숫적인 우세에 있는 적은 곧 후속부대의 증원으로써 전력을 보강하고 재차 공격을 감행하여 정찰대진지 200yds 전방까지 접근하여 심지어 해병들에게 "항복하라"고 고성을 지르기도 했다.
1) 해병들의 감투정신
해병정찰대는 현위치를 사수하면서 이리떼같이 공격해 오는 적에게 총열이 달아오르도록 사격으로 응전하였다. 약 2시 간에 걸친 전투끝에 해병정찰대는 보유탄약이 완전히 소진되어 수류탄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수류탄마저 떨어지자 해병들은 BAR, 소총, 및 경기관총 등을 분해하여 적에게 던지는 등 그야 말로 형용키조차 어려운 고전을 지속하였다.
* 金衡友 二等兵曺
이때 金衡友 이등병조는 대원 5명을 인솔하고 적 전 10yds까지 접근하여 마지막 수류탄을 투척하여 적에게 15명의 사상자를 내게하고 적진에 돌입하여 총개머리판으로 적을 내려치는 육박전을 하면서 전원이 장열히 전사하였다. 이에 용기백배한 해병들은 서로 격려하면서 적에게 포로가 되어 해병대에 오명을 남기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는 각오로 결사적인 반격을 거듭하면서 혈전하였다.
그러나 숫적으로 절대 우위에 있는 적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인하여 사태는 정찰대에 극히 불리하게 되어 부득불 후퇴를 단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 적은 이미 정찰대의 철수로인 각고지를 전부 점령하고 있어서 오직 정찰대의 철수는 개활지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개활지를 통과하여야 하는 이 철수작전은 많은 희생자를 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정찰대는 결사적인 철수를 개시하여 적이 점령 중에 있는 고지로부터의 사격을 피하면서 7월23일 10:00시 '조강리'고지까지 철수하는데 성공하였다. 여기서 정찰대는 일단 재편성을 하는 한편 대안(江寧浦)에 위치하고 있는 부대본부에 비상수단으로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것은 무전기가 고장났기 때문에 부득기 山 위에 올라가서 모닥불을 피워 연기를 내게 한 것인데 이 연기를 본 대안의 재23중대 1소대는 수신호를 교환하여 상호 확인한 다음 즉시 중대본부에 보고했고 보고를 받은 제23중대장(金在赫 대위)은 1소대장(朴炳浩 소위)에게 '한강'을 도강하여 정찰대를 지원할 것을 명령했으나 물때가 맞지 않아 즉각 도강할 수 없었던 1소대는 명령을 받은지 약 3시간 후인 13:00시경에 도강할 수 있었다.
그 동안 '강녕포'(김포반도의 북단 '한강'변에 위치)우측 능선밑에 배치되어 있던 미 해병대의 LVT(Landing Vehicle, Tracked)대대는 해병부대의 요청에 따라 '한강'대안의 '하조강리' 뒷고지로 해병정찰대를 추격 중인 적에게 맹렬한 포격을 가하여 적은 15:45시부터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照江浦에 도착한 해병지원부대는 적의 공격을 받지 않는 가운데 '월암리'로 진격할 수 있었고 이어 정찰대는 지원부대와 합세하여 다시 '월암리'를 공격하여 19:30시 진지를 완전히 탈환하였다.
이 전투에서 해병정찰대의 결사적인 저항과 미 해병대의 LVT(Landing Vehicle, Tracked)의 맹렬한 지원사격으로 152명의 적을 사살하고 사상 90명 및 2명을 생포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으나 해병들도 8명의 전사자와 부상 8명, 12명의 실종자를 내는 한편 20여 정의 소화기와 2문의 공용화기를 망실하는 등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와같이 소수의 병력으로 적의 중첩된 포위망을 결사적으로 돌파하고 피비린내나는 육박전을 감행한 '월암리'의 격전장을 시찰한 미 해병대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처참한 격전장은 처음 보는 것이라고 한국 해병들의 감투정신을 격찬하였다.
괴 파괴된'한강' - 1950.9. -
파괴된 서울역
독립제5대대는 다시 긴장한 가운데 '김포'지구의 경계와 전방 '한강'너머의 '개풍군'일대까지 적정의 수색과 정찰을 계속하던 중 중동부전선에서 혁혁한 공훈을 수립하고 月山嶺방어지구에서 "미네소다 방어"임무를 마지막으로 서부전선으로 이동한 해병 제1연대(연대장 金東河 대령)가 1952년 3월 18일 長湍지구에 배치됨에 따라 首都'서울'을 방어하기 위하여 '한강'을 사이에 두고 연계를 지어 계속 휴전 시까지 '김포'지구에서 경계방어의 중임을 담당하였다.
月岩里戰鬪의 종합전과는 다음과 같다.
전과:
사살 152명 사상 90명 생포 2명 M1소총 13정 칼빙 12정 자동소총 2정
경기 1정 61mm 박격포 1문
피해: 전사 8명 부상 8명 행방불명 12명
독립제5대대를 지휘한 휴전시까지의 역대 대대장은 다음과 같다.
1. 中領 金大植 1950. 09. 20
2. 少領 吳命福 1951. 02. 25
3. 大尉 李鳳出 1951. 07. 06
4. 少領 姜起千 1952. 07. 15
5. 中領 崔龍男 1953. 02. 10
6. 少領 朴元俊 1953. 07. 01-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