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李賀를 펼치다
- 오장근 / 무등일보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서편에서 울던
갈가마귀떼가 동편으로 분주했다 한점,
멀리 갈대밭에서 사내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오랜 슬픔같은 그의 아쟁이 등뒤에서 먹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한 번도 울지 않았던 그의 두 눈 속으로
노을이 설핏 지고 있었다 낯선 그의 발자국 소리로하여
야트막한 강 언저리에서 몇몇 물고기들이
물밑으로 잠수하곤 하였다 미세하게 출렁이는 강물과 함께
그의 아쟁도 바람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울고 있었다
그의 산발한 머리카락과 어깨를 잘 익은 어둠이 감싸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아쟁을 풀어내렸다 어둠 속에서 아쟁만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아쟁의 가는 絃이 아주 낮게
동심원을 그리자 강물에 한 발을 담그고 있던
풀들이 춤을 추었다 갈대들이 불타올랐다
그의 모든 絃들이 몸을 놓아버렸을 때,
일곱 마리의 용들이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먹구름 속에서
마른 번개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지상으로 일제히 꽂히고 있었다
동편에서 분주했던 갈가마귀떼가
그의 앞에서 무작정 내려앉고 있었다 강물 깊숙히 잠수했던
물고기들이 차례차례 물길을 차고오르며 수면으로
솟아올랐다 검은 絃 사이사이로 은빛 물고기들이 파닥거리며
수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당선소감
백석을 생각했던 것, 높고 쓸쓸한 이상(理想), 그러면서도 가장 낮은 데로 흩날리는 눈들이 생각처럼 내리는 날이면 가끔, 나도 포족족하니 ‘여우난골族’에 젖기도 했던 것, 시처럼 살았던 그의 발그림자를 따라가다 보면 난데없는 담 밑에 피어있는 그림자꽃이 알 수 없는 사투리로 피기도 했던 것. 허영허영 저 홀로 꿈넘어가는 시인이여! 나에게도 그대의 꿈한자락 잘라주시라.
그리운 이름들을 호명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흰머리의 의미를 묵묵히 알게 해준 아버지, 어머니, 언제나 비껴갈 수 없는 아픔이란 이름이여. 내 삶의 나침반이었던 무거움의 다른 이름 석근형, 한 아름다운 배경이 되어준 수근형, 그리고 동심원처럼 커지는 가족이란 나이테여, 지금 당신들 이름에 입김을 불어넣어보는 것.
웃음의 중심을 가르쳐주신 장인어른, 지혜의 끝 간 데를 항상 굴리고 계신 장모님, 나의 가장 처음과 마지막을 관통하고 있는 아내 임효진, 씨앗의 의미로 사무치는 나의 아들 창헌, 그들 이름에 축복 있으라!
문학의 꽃대궁을 깊숙이 숨기고 있다가도 불쑥불쑥 나태해진 나를 향해 매운 향기를 날리는 종필형, 문학과 삶의 어쩔 수 없는 도반(道伴) 종호, 한결같음의 또 다른 이름 병희, 사과 같은 풋풋함의 청필, 있음의 없음, 없음의 있음 석우, 그리고 내 문학의 근원 글바람문학회, 선배들과 후배들, 모두들 가는 길에 꽃길 있으라!
마지막으로 심사위원 선생님과 한국문학의 제사장인 박상륭, 그의 작품들에게 특별히 고마움을 표하고 싶은 것, 그의 작품들은 살아있는 칼날이요, 경전이며, 스승일지니….
아, 문학의 도가니에 얼음꽃이 난만하다! 가야할 길이 아직도 멀다.
+심사평-허형만 목포대 교수
“사물에 대한 통찰력 돋보여”
예심을 거친 170편의 작품이 본심에 올려졌다.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시의 구조와 언어의 쓰임이 탄탄한 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산문성이 짙고 장황한 사설로 압축미나 주제의식이 결여, 그리고 신인에게 요구하는 개성과 신선함의 부족도 흠이었다.
최종적으로 이와같이 지적된 문제점들을 가장 최소화시킨 작품으로 ‘딱따구리 경전’ ‘대추나무 집’ ‘노인과 그 가문’ ‘李賀를 펼치다’가 집중적으로 검토됐다.
‘딱따구리 경전’은 언어의 쓰임이 깔끔하기는 하나 주제의식이 가볍고 ‘대추나무 집’은 언어를 아껴 쓸 줄 아는 시적 긴장이 요구됐다.
‘노인과 그 가문’은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돋보인 반면 이미지나 구성에서 새롭지 못한 게 아쉬웠다.
결국 사물의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언어로 드러내보이는 통찰력과 따뜻한 시선, 그리고 개성있는 목소리로 시를 다뤄가는 솜씨가 돋보인 ‘李賀를 펼치다’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앞으로 등단작에 못지 않는 좋은 시 쓰기만을 고집하는 시인이 되기를 바라면서 당선을 축하한다.
숲 해설가
- 권지현 / 농민신문
휘돌던 매 부리내린 능선에
나무구름 풀구름 흐르고
바위틈 얼비치는 물빛 건너온
숲 해설가 어깨에
날아와 앉는, 옥색긴꼬리산누에나방
산초나무 나란히 사람들 멈추어선다
저기 양 팔을 층층이 펼친 건 층층나무구요,
이건 누리장나무, 뒷간에 심어 냄새를 중화했지요
잎을 뜯어 냄새 맡아보세요
산뽕나무 가지에서 머리 들고 돌아보는
구름표범나비 애벌레, 눈 사이 일렁인다
잎새 건네받은 얼굴에 푸른 수액이 돌아
촉지도 읽듯 나뭇결 더듬대며 쓸어보는 사람들,
양평 봉미산이 들어올린 잣나무 사이로
다래덩굴 타고 내린다
은빛 가지 틈틈 부신 해, 머리 위에서 화선지를 펼치고
바람에 결 다듬은 잎새를 뒤집는 숲으로
호랑지빠귀 푸르르르 날아올라
촘촘히 타래 풀리는 빛,
나무뿌리 밑으로 플러그를 꽂는다
산 아래 굽어보던 자작나무가
비탈 얽어내린 뿌리를 땅껍질 위로 차고 오른다
[심사평]
“57편 본심 … 깊이있는 성찰 높이사”
많은 응모작 중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것이 57편이었다. 이 중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숲 해설가〉 〈신명〉 〈귀농일기:방아꽃 밭에서〉 〈착각 혹은 능청〉 〈무청다듬기〉 〈벌초〉 등 6편이었다. 각기 신춘문예투의 시류를 벗어난 참신성과 뚜렷한 개성으로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었지만, 심사위원들은 즐거운 고민 속에 〈숲해설가〉 〈신명〉 〈귀농일기〉 3편으로 압축했다.
다시 최종 논의와 숙고 끝에 권지현의 〈숲 해설가〉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시적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 대화체를 깔끔하게 안배한 표현의 묘와 감칠맛 나는 언어 조탁 능력을 높이 샀다. 당선자의 다른 응모작 4편도 고르게 수준이 높았다. 마지막까지 남은 조훈성의 〈신명〉은 탈춤과 마당놀이의 신명을 사설조의 질퍽한 언어로 잘 형상화했으나 언어의 과잉과 간추림 부족이 흠으로 지적되었다. 박형권의 〈귀농일기〉 역시 농촌 현장을 실감나게 포착한 구수한 입담과 해학적인 문체가 돋보였으나 너무 현란한 사설이 언어 절제 면에서 흠이 됐다. 아쉬움 속에 응모자들의 분발을 기대한다.
[당선소감]
세상과 이어진 길들을 걸어들어가는 데 저는 늘 늦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조금만 더 총명했더라면 조금만 더 사리분별에 지혜로웠더라면… 그 길들이 쉽게 열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들이 우수수 흰 눈발에 묻혀 떨어져 내리는 오후에 저는 당선 통보 전화를 받았습니다.
시를 쓰기 시작한 지 사년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창작 속으로 몰입하는 순간으로의 잠행을 지상 최고의 자양분이라 생각하며 퍼즐 같은 언어의 사원에 발디딤을 이제 막 즐기게 된 참이었습니다. 탁 트인 세상과 정신으로 올곧게 나아가 사물과 사람들 틈으로 내려서겠습니다. 그리하여 풍경과 사물과 사람들이 어우러져 묘사와 이미지가 되고 서사 구조가 되고 의미 있는 반향이 되는, 생기 도는 시를 빚겠습니다.
아픈 저를 다독여 사람답게 빚어주신 존경하는 어머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정현언니, 숙현이, 성현이, 수민이, 성순이, 은정이, 국민대 학우들과도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부족함 많은 저를 선해주신 신세훈·이근배·손해일 세 분 심사위원님, 모교의 큰 스승이신 신대철 선생님, 주종연 선생님, 황동규 선생님께 감사 말씀을 전합니다. 돌올한 언어와 정신으로 문학의 새 장을 펼쳐 보답하는 길을 가겠습니다.
십이월의 교차로
- 한인숙 / 경남신문
상여를 보낸다
초겨울. 언 슬픔이 기억의 행렬을 짓고 있다
한 세월 이정표도 없는 길
소리꾼의 요령소리가 산역으로 향하는 몇 구비 능선을 넘어서고
흑백의 한 생이 울음에 섞인다
상여꾼의 후렴소리를 더듬던 누군가
알 수 없는 기억에 찔린 듯 추위 한 자락을 움켜쥐고
한동안은 눈물도 상처도 없는 길이
북망의 깊이를 더듬적거린다
슬픔의 실마리가 풀리고 있다
노잣돈을 뒤척이는 햇빛도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도
교차로를 통과시키고서야 안식의 길로 접어들 것이고
인연들 또한 죽음을 통과하고서야 눈물의 깊이를 알 것이다
졸고 있던 새 한마리
꽃상여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는지 움찔. 날아오른다
[심사평]
죽음 통해 생의 의미 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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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사회는 삶의 효용성을 측량하는 잣대에 의해 시가 거의 강박적으로 배제되고 있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제목의 표현이라면. ‘죽은 시인의 사회’라고나 할까? 이 같은 사회에서 그래도 아직 시인지망생이 많다는 행복한 아이러니는 한 해의 첫날 지상(紙上)에 장식되는 신춘 등용문을 통해 실로 신선하게 확인되는 것이다. 우리 심사위원은 낱낱의 애착과 열정이 그대로 배어 있는 수많은 작품을 읽은 후 압축된 십수 편의 시를 최종 결선에 올렸다.
‘홍시’. ‘어머니. 사과를 드릴게요’ 등의 시를 보낸 분의 작품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생활 감정의 심연에 숨어있는 미시 담론의 소중한 경험들을 제재로 유연한 흐름의 시상(詩想)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뚜렷한 장점이었다. 그러나 작품 수준이 전반적으로 고르면서도 돌출성이 없어 아쉬웠다. ‘망치 소리를 기다리며’는 수작의 조건을 갖추었으면서도 다소간 마무리가 덜 된 듯한. 완성도가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어 당선작으로 강하게 밀 수가 없었다. ‘버스정류장’ 등의 시를 보낸 분의 작품 기법은 영상 이미지를 실험적으로 재현하는 것이어서 참신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시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지복(至福)을 기약하기에는 시기상조인 듯하다. 그밖에도 ‘내(內)동 629번지’와 ‘손가락이 그리운 사람들’ 등이 당선작으로 논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십이월의 교차로’는 죽음의 세계가 비추어낸 일상의 단면을 객관적인 거리에서 담담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작품이다. “인연들 또한 죽음을 통과시키고서야 눈물의 깊이를 알 것이다.” 이 잠언적인 표현에서 보듯이. 흑과 백. 기억과 망각. 이승과 저승. 끝내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경계에서 생의 의미를 탐색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볼 때. 그 눈길은 관조의 시선이기도 하다.
시는 대중적으로 읽힐 수 있으면서 내용이 분명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한다. 언어의 감각만으로 좋은 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만의 은밀한 세계에 칩거하기보다는. 시란. 공명과 반향이 아니어선 안된다. 이러저러한 맥락에서 ‘십이월의 교차로’를 주저없이 선(選)하는 데. 우리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당선자의 건필과 문운을 기원한다. 심사위원= 엄국현(인제대 교수사진 왼쪽) 송희복(진주교대 교수)
[당선소감]
올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다. 함박눈 속을 한참이고 걸었다. 나를 끌고 가는 상념을 따라. 구름의 방향을 따라 내 안 웃자란 풍경들을 잘라냈다.
방금 놓친 생각들 저쪽에서 새 한 마리 낮게 날아올랐다. 시아버님의 상여를 따라나서는 길. 예고 없던 마지막 축제가 진행되었고 한 삶이 죽음에 이르고서야 가벼워지는 길임을….
아버님의 마지막 길을 시로 풀어내면서 많은 가슴앓이를 했다. 내 안의 아픔들과 못내 삭여졌을 마음들이 시의 행간과 행간 속속들이 그리움으로 파고들었다.
이제 마음속에 집 하나를 마련해놓고 시로 채우려 한다. 현대시가 갖춰야 할 덕목들을 늘 일깨워주시는 박경원 선생님과 함께 시의 주춧돌을 세우고 대들보를 올리려 한다.
아직은 서툰 대패질과 못질이 문학의 꽃으로 피어나도록 갈고 다듬을 것이다. 주부문학이 아닌 현대문학의 수사들을 움켜쥐고 지붕도 헤이고 문패도 달면서 서두르지 않는 참 문학의 길을 가고 싶다.
이 길에 늘 내 편이 되어준 사랑하는 남편과 가족들 그리고 시원문학. 차령문학 동인들과 문학을 사랑하는 주변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박경원 선생님의 선비정신과 올곧은 문학인으로서의 모습을 존경합니다. 제게 집짓기의 터전을 마련해주신 경남신문과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인숙 ▲1961년 충북 청주 출생 ▲평택 영창피아노 대리점 운영
허공위에 뜬 집
- 정동철 / 전남일보
얼어 죽은 새들을 주우러 강변에 나갔다
일찍이 우리가 접어 날린 종이비행기들
한 무리 되새떼가 되어 이리저리 허공에 휩쓸리고 있었다
쩡쩡 얼어붙은 강은 속내 깊숙이
낡은 달력들을 흘려보내는 중이었다
미루나무 가지 사이로 빠르게,
추운 햇살 한 묶음 지나가던 동화 속의 집
왜 아버지는 거칠고 마른 삭정이만 골라
허공 위에 집을 지으셨을까
마루 밑에 놓인 신발들이 안쓰럽다며
어머니는 자꾸 창문 밖을 내다봤다
밥알 같은 눈발들이 지붕 낮은 집들을 지워버리는 동안
잠들 때마다 등을 쿡쿡 찔러대던
낡고 불편한 나뭇가지의 집
우리들의 하루는 종일 공중에 떠 있었다
귀 시린 겨울밤을 지우개로 지우며
연탄난로 위에 마른 건빵을 굽다가
갈라진 손등으로 벌건 연탄집게를 들어 글씨를 썼다
어디로 공처럼 튀어나갈 수도
굴러갈 수도 없었던 날들
사방연속무늬 벽면에서 철지난 통신표들이 노랗게 바래갔다
청색의 동치미국물을 마시며 우리는 조금씩 단단해져 갔지만
허공 위에 뜬 집에서는 쉽게 잠이 들 수 없었다
아버지 소처럼 말씀하시네 / 정동철
눈송이 몇점 손님처럼 찾아간 날
더 이상 견딜 것도 더 탕진할 것도 없는 나는 집으로 내려갔다
굴뚝에서 쇠죽 끓이는 연기가 흰 팔뚝을 들어
눈 덮인 지붕을 버텨 올리는 참이었다
늙은 암소 등을 빗질하며 나직나직 하시는 말씀이 외양간 밖으로 새어나오는데
눈을 머리에 인 단풍잎들이 고개를 이기지 못하는 것을 고향집은 아는 것이다
구수한 쇠죽 냄새가 등을 토닥거려주자
처마 밑으로 녹다만 눈덩이 하나 툭 떨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염치 하나 툭 떨어져도
할 말이 없는 거다
푸우-푸 뜨끈한 여물을 먹으며
늙은 암소가 입김을 불어가며 메주콩을 씹더라도
이 세상 모든 구멍이란 구멍마다 후끈거리는 몸으로 가득하더라도,
소에게도 할 말이 없는 거다
그래, 겸연쩍게 얼굴을 들고 외양간 문을 엿보는데
부엌에서 저녁 짓다가 어머니 힐끗 보고 하시는 말씀
아서라,
느 아부지가 지금 소허구 말씀을 허신다
이 한 마디가
짚을 썰어 가마솥에 넣고 잘 마른 꽁 깍지와 쌀겨를 뿌리고
찬물 두어 동이 붓고는 풍구를 돌려가며 쇠죽을 쑤고 계시던 아버지를
외양 밖으로 불러내시는 것이었다
눈송이 몇 점 또 손님처럼 오시는 것이었다.
[심사평]
신춘문예 시들을 심사하다 보면 거의 모든 시들이 기다림의 시학에 서툴다는 면이 보인다. 시는, 그 시가 지닌 내용만큼의 기다림의 시간을 요구한다. 그 시간은 한 달이 될 수 있고 일 년이 될 수 있고, 십 년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투고자들은 그만큼 기다려주지 못하고 마무리하려고 든다. 이성임의 '별을 굽는 여자'가 그 예에 속한다. 길거리에서 설탕을 끓여 별 모양을 찍어 파는 여자를 보고 '오글오글 모여 있는 햇살을 끌어안고/온종일 별을 찍어내고 있다'라고, 햇살과 별을 하나의 이미지로 뽑아내는 탁월함을 보여주었으면서도, 그 햇살이 어떻게 세계를 비추고 따뜻하게 하는지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시란 쓰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다. 때문에 회임기간이 있어야 한다.
설정환의 '아버지는 둥글다' 외 9편도 기다릴 줄 모르는 면에서는 같다. 시 제목과 같이 인간의 삶은 둥근 것이다. 아버지의 삶도 암탉 수캐 염소 박새 등과 둥글게 굴러간다. 그런데 이 시에서 요구되는 것은 아버지와 암탉 수캐 염소 등이 어떻게 서로 상관하며 굴러가는 가를 형상화했어야 했다. 구체적인 묘사 없이 인간의 삶이 둥글다는 것을 독자들은 수용하지 못한다.
정동철의 '아버지 소처럼 말씀하시네'도 인간의 삶이 둥글고 뜨겁다는 것을 그린 작품이다. 눈오는 날 외양간에서 쇠죽을 쑤는 아버지의 모습이나, 아버지를 조금은 쓸쓸하고 따스운 시선으로 보는 아들이나 '느 아부지가 지금 소허구 말씀허신다'는 어머니의 한마디가 함께 둥근 원을 그린다. 사랑이 있는 풍경은 뜨거운 것이고 둥근 것이다. 거기에 시의 진정성이 자리한다. '허공 위에 뜬 집'도 언어들이 절도있고, 시의 보폭도 비유도 적절하다. '허공 위에 뜬 집'과 '아버지 소처럼 말씀하시네' 두편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정진하고 정진하기 바란다. <최하림ㆍ시인>
[당선소감]
어느덧 십여년이 흘렀습니다. 문학이 좋아서 시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하루종일 시를 생각하고 잠들면서도 시를 생각하고 꿈속에서도 시를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꿈속에 쓴 시들은 왜 꿈을 깨면 기억이 나질 않던지. 아예 메모지를 머리맡에 두고 잠든 날도 많았습니다. 꿈결에 써둔 시들은 언제나 알 수 없는 기호가 되어 여러 날의 아침을 쓸쓸하게 하곤 했습니다.
밥을 벌러 세상에 나왔어도 신춘문예철만 되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시를 빙자해서 문학을 빙자해서 문학 이외의 것들에 너무 정신이 팔려 있지는 않았나 싶은 시절이었습니다. 문학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믿었지만 무기만 믿고 문학을 등한시하지 않았나 하는 자책이 든 것도 시쓰기를 그만두고 나서의 일입니다. 내가 울지 않으면 절대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울리지 못한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습니다.
전북청년문학회 벗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그들과 같이 가고자 했던 길,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는데 길을 앞에 두고 우리들은 각자의 밥을 팔러 세상 속으로 흩어졌습니다. 이제 그들이 답할 차례입니다.
늘 따르고 싶었던 최하림 선생님이 제 시를 뽑아주신 것이 제게는 더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뒤늦게 다시 시작한 시업이지만 결코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갑자기 원고지를 잡고 끙끙대는 저를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던 아내와도 기쁨을 같이하고 싶습니다. 아내는 늘 제 시의 첫 독자이자 마지막 독자이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숭어
- 심인숙 / 전북 중앙신문
한밤, 봉숭아꽃 가득한 마당에서 숭어들이 튄다.
다닥다닥 붙어사는 셋방 여인들이 마당 수돗가에서 목욕을 한다. 청상과부 선아엄마, 집 나간 서방을 기다리는 애경엄마, 그냥 이모라 불리던 사투리 걸죽한 부안댁이다. 아침이면 식당이나 병원, 공사판으로 마른 꽃씨처럼 흩어졌다가 밤이 되면 물오른 입을 들고 돌아오던 여인들. 한바탕 얘기꽃을 피우며 한 겹씩 옷을 벗고 있다.
빨랫줄에 걸린 이불호청 사이로 달빛이 든다. 보초 세운 어둠이 슬쩍 돌아서 있다. 좁은 수돗가에서 미끈한 숭어들이 비늘을 떼고 있다. 찬물을 끼얹을 때마다 저절로 한숨 같은 비음이 흘러나온다. 지느러미처럼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깔깔, 허공을 질러 담을 넘어간다. 숭어들이 별빛을 따라 밤하늘을 헤엄치고 있다.
몰래 숨어든 달의 이마가 붉게 물들었다.
[심사평]
삶의 단편 생생한 이미지로 형상화
287편의 응모시 중 여덟 분의 작품이, 72편의 시조 중 일곱 분의 작품이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왔다. 모든 작품들이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어 이들 중 한 작품만 선정해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신문사측에서 당선작을 뽑아 통보할 때까지 응모자의 이름은 물론 성별, 직업, 나이 등 어떠한 정보도 일체 제공하지 않아 작가와 작품세계와의 최소한의 상관관계 조차 전혀 가늠할 길이 없었다.
문학이 상상력의 소산이라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는, 특히 시에 있어서는 작가의 삶과 생각이 녹아들기 마련인지라 과연 소중한 작품들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방침이 그러한지라 오직 응모된 작품 그 자체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작품의 구조, 시적 형상화, 어휘 구사력 등 작품의 철저한 해부와 분석에 치중하게 되었다. 작가에 대한 이해는 없었으나 어떠한 예단이나 선입견 없이 작품에만 매달렸음으로 오히려 개운한 느낌도 든다.
이미 말한 것처럼 예심을 거쳐 온 모든 작품들이 뛰어난 기량을 보이고 있어 장고를 거듭해야만 했다. 시조 부문에서 정행년씨의 <바다, 숨 고르다>와 송필국씨의 <현애> 등은 오래 시선을 머물게 한 작품이었으며 김자연,황호정,박선양씨의 작품들도 기성작가 못지않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바다, 숨 고르다>에서 "지난 밤 그 상머리 기름진 언어들도/ 월포리 산자락 끝에 변명처럼 스러진다"는 절창이었다.
시 부문에서는 <숭어>, <달의 각> 등을 응모한 심인숙씨, <덕지덕지>, <청개구리> 등을 응모한 임상훈씨, <염전여자>, <숯 굽는 마을> 등을 응모한 김민규씨, <가면의 표정>, <산티아고의 바다> 등을 응모한 이현수씨, <농경>, <패랭이꽃> 등을 응모한 한인숙씨 등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빼어난 시적 직관력과 상상력을 전개하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확고한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오랜 고민 끝에 <숭어>를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숭어>는 한마디로 읽히는 작품이다. 어떠한 이념의 색깔이 칠해지지 않은 싱싱하고 질박한 삶의 단편이 선명한 이미지로 생명감 넘치게 재현되고 있다.
시 구조도 유기적으로 잘 짜여있어 시적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이것은 삶의 한 구체적 순간을 예민한 감각과 관찰로 포착하여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작가의 능력에 기인한다. 비록 신산한 삶이지만 수돗가에서 목욕하는 여인들의 담을 넘는 웃음소리는 우리에게 건강한 관능과 따뜻한 감동을 선사한다. 여인들을 비유하는 '숭어'는 물론 작품 도처에서 나타나는 여러 비유들도 능숙한 솜씨다. 작가의 다른 작품 <달의 각>도 만만치 않은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부대낄 수밖에 없는 삶이지만 따뜻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그 속에서 존재의 가치를 캐내는 역동적인 시를 계속 기대한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기회를 놓친 분들께는 격려를 보낸다.
-심사위원 : 호병탁 정순량 김 영
[당선소감]
마감 이틀을 남기고 폭설의 중심부로 특급우편이 달려갑니다. 도착이 어렵다는 우체국 직원의 염려를 넘어 한 마리의 말이 눈발 속을 헤치고 숨 가쁜 제 詩를 넘겨줍니다. 따가닥 따가닥, 제 귀를 며칠 전부터 간질이던 말발굽소리!
오늘에야 어렴풋한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몇 년 동안 어둠이란 녀석에게 질질 끌려 다녔습니다. 빛도 없는 터널 속을 혼자 헤매고 다녔습니다. 허공에 외쳐대는 목소리는 늘 어둔 땅 밑으로 묻히고 엄습해오는 추위와 불안과 조급함을 몸에 달고 출구를 찾는 일.
그때마다 몇 개의 창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햇살의 등을 훔쳐보며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 달래곤 했습니다. 최면은 이럴 때 필요한가요.
반신반의하며 걷던 제가 햇빛 가까운 출구로 다가서고 있었습니다. 지루한 어둠 한 끝에서 빠져나와 비로소 하늘을 바라봅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려 주위를 둘러봅니다. 빛나는 햇살과 하얗게 눈 덮인 저 능선, 깊은 하늘의 눈매와 하나가 되어 서 있습니다.
이제 저는 시의 출발선을 딛고 나아갑니다. 희망이란 단어 하나를 움켜쥐고 고통을 꿈꿀 수 있습니다. 제 이름 석자에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과 이 기쁨을 함께 합니다.
설움도 많이 주시며 무지한 저를 이곳까지 끌어주신 맹문재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중대 예술대학원 문창과정 지도교수님들께도 일일이 감사드립니다.
고영 선생님과의 인연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중대 동인들과 선후배 여러분들, 시울림회의 탄탄한 격려와 애정에도 감사드립니다. 날아오르는 가오리들과 알 굵은 고구마줄기에도 따뜻한 사랑을 전합니다.
또한 사랑하는 엄마! 말없이 믿어주는 한 남자와 자랑스럽게 전역하게 되는 아들에게도 돌격과 함께 사랑한다고 외쳐봅니다. 부족한 저에게 빛 한 줄기 성큼 내주신 심사위원님들께도 깊은 감사드립니다.
<프로필>
◇1957년 인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졸업
해발 680m의 굴뚝새
- 심은섭 / 경인일보
면사무소에서 4㎞ 더 지나 우편번호 233-872에 살던
굴뚝새는 사내 굴뚝새를 산 14번지에 묻어 두고
경적소리와 높은 빌딩들이 난무하는 우편번호 100-866
69층 아랫목에서 무-말랭이가 되어 간다
우체국에서 지어준 100-866의 우편번호를
문패에 문신처럼 새겨놓고 살지만
산 14번지 바람소리 전해줄
우편배달부의 발길이 끊어져버린 지가 오래다
몇 날을 견딜 수 있는 수분이 얼마 남지도 않은
해발 680m에 살던 굴뚝새를
굴뚝새의 굴뚝새들이 바라보며 쌀독에
파랑주의보가 내려 호미자루를 놓지 못하던 날들과
냉수에 간장을 섞어 헛배 채우며 새우잠 자던 날도
미납된 등록금 영수증 머리맡에 두고
밤새워 신열을 내던 일들을 떠올린다.
절구공이에 짓이겨진 그녀의 가슴에는
슬픈 보석 몇 개 박혀 있다
두어 개의 천둥소리
하얀 달 몇 개와 서너 개의 태풍 그리고
몇 밤에 내린 무서리에 말라진 몸, 더 말려야
천국의 층계 만이라도 가볍게 오르려는 듯
남아 있는 그들의 짐이 가벼워진다는 것도 안다
점점 더 멀어진 눈과 눈 사이의 간격
문 밖까지 나온 기침소리가 폐경을 맞는다
우편번호 없는 묘비를 들고 오후 내내
창 밖에서 서성이던 검은 도포를 입은 바람이
조등(弔燈)을 든 굴뚝새들의 포효를 뿌리치며
반송되지 않을 정량(定量)의 화석을
목관 속에 편히 눕힌다
<심사평>
예심을 통과한 서른 명의 시를 다시 선고하여 심사한 결과 본심위원은 심은섭씨의 '해발 680m의 굴뚝새'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심은섭씨의 작품은 죽음을 안으로 조용히 끌어들이면서 서정적 상관물에 대한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여 생사의 슬픔을 대칭적으로 이미지화하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까지 최종 경합한 장인수씨의 '쪽방 인현동 일 번지' 한창석씨의 '로드 킬' 김명옥씨의 '날마다 황선에 선다'도 수준작이다.
하지만 죽음을 과장되게 표현하고 상투적으로 터치함으로써 시적 진실이 훼손된 부분이 지적되었다. 문명 비판적으로 죽음을 선취하고 삶을 직시하려는 의표가 과한 나머지 시적 성취도는 오히려 떨어졌다. 우리 삶 깊숙이 스며든 죽음의 냄새도 사회적 미학적 거리를 유지할 때만이 시의 의상을 걸칠 수 있다.
당선작은 상당한 수준을 보여준 심미적 작품이다. 죽음의 종결을 파괴하지 않고 보존하고 기억하는 ‘새’와 화자의 복화술은 이 처녀시를 돋보이게 했다. 시 형상이 서정적 자아에게 바라는 요구는 불립문자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 있는 바, 생이 불가피하게 성찰해야 하는 떠도는 자의 비애를 이 시는 건드리고 있다.
특히 산 번지와 도시의 우편번호, 살아있는 자와 죽은 굴뚝새로 매개되는 서사 구조의 소통은 아름답다. 당선자는 이 작품에 구속되지 말고 더 깊은 시세계를 펼쳐 시의 자유를 누리기 바란다.
<당선소감>
목 매 달아 죽어도 좋을 나무 - 詩
종은 울지 않으면 종이다 종은 울지 않으면 종이 아니다 종은 울면 종이다 종은 울면 종이 아니다 부재중인 수신함에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 전화 한 통으로 문학의 종이 되려고 한다 나에게 문학 속의 시(詩)는 목 매 달아 죽어도 좋을 나무가 되었다 신춘문예 당선의 소식을 듣고 바이러스에 감염된 고인돌처럼 오래도록 서서 침묵했다 종이 될 수 있는 여러 갈래의 길을 생각했다 산에 사는 산죽(山竹)이 떠올랐다 속을 더 비워야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생길 거라고, 사시사철 푸름을 잃지 말자고, 작은 키라도 더 낮추자는 깨달음이 없어 한 번도 산에서 마을로 내려오지 못해 대쪽이라고, 이것이 문학의 종이 되려는 해답의 근본이며 해답의 결과이며 해답의 이유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놓으려던 붓을 잡아야겠다 소외 받는 달동네 사람들의 반장이 되어 언어를 잃어버리고 사는 그들의 의미를 써야겠다 영육간에서 방황하는 어휘들을 불러 모으고 다듬어야겠다
지금까지 시의 의미를 부여해주신 이언빈 선생님, 시를 경작하는데 필요한 도구 사용방법을 알려주신 '시와 세계' 발행인 겸 주간이시며 대관령 시인학교를 운영하시는 송준영 선생님, 곁에서 만날 때 마다 격려해주신 김학주 시인께 이 지면을 빌려 감사 드리며 나와 시와의 싸움에서 늘 중립적 입장을 지켜오며 감나무 까치 밥처럼 외톨의 나날이었던 권기순 아내에게도 감사 드린다.
끝으로 문학의 성찬을 마련하고 초대하여 주신 경인일보와 단단하지 못한 작품에 당선이라는 영광을 안겨주신 두 분의 심사위원께 독한 다짐을 바치며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약력〉
심은섭
강릉 출생
2004년 시 전문지 월간 '심상'신인상
민족작가회의 강원도지부 회원
한국 가톨릭 문인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강릉시지부 감사
금이 간 거울
- 정용화 / 대전일보
얼어있던 호수에 금이 갔다
그 틈새로 햇빛이 기웃거리자
은비늘 하나가 반짝 빛났다
그동안 얼음 속에서
은어 한 마리 살고 있었나보다
어둠에 익숙해진 지느러미
출구를 찾아 깊이를 알 수 없는
고요 속을 헤엄친다.
넓게 퍼져 가는 물무늬
한순간 세상이 출렁거린다
깊고 넓은 어둠 속에서
너를 지켜주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픔 속에서 반짝임이 나온다
반짝이는 모든 것은
오랜 어둠을 견뎌온 것이다
금이 간다는 것은
또 다른 세상으로의 통로다
깊이 잠들어 있는 호수 속에서
물살을 헤치고 길이 꿈틀거린다
<심사평>
수천편의 응모작 가운데 함민복 이정록 시인의 엄격한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우이정의 ‘빈컵’외 정재영의 ‘밤톨, 다이아몬드’외 등 17분의 시 70여편이었다. 다시 심사위원 두 사람이 나누어 읽고 추려낸 것은 김영식의 ‘떠들썩한 식사’외, 김명희의 ‘노트북’외, 이지혜의 ‘곰달래길 사람들’외, 정재영의 ‘손이 쥔 손’외, 그리고 정용화의 ‘금이 간 거울’외 등이었다.
이 작품들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최종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곰달래길 사람들’, ‘손이 쥔 손’, ‘금이 간 거울’등 3편이었다.
‘곰달래길 사람들’은 안정된 시 정신과 표현이 너무나 모범적인 것이어서 좋은 작품으로 판단되었으나 바로 그점이 동시에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또한 ‘손이 쥔 손’은 너무 작품성이 농익어 그만 터져버릴 것 같은 원숙함이 장점이었으나 동시에 그것이 신인다운 패기나 신선도에 있어 아쉬움으로 작용하였다. 오랜 고심과 논의 끝에 ‘금이 간 거울’을 당선작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당선작은 작품의 완성도도 높고 시적 사유의 깊이 또한 갖추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예리하고 신선한 감각이 신인으로서 앞으로의 가능성을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아픔 속에서 반짝임이 나온다/반짝이는 모든 것은/오랜 어둠을 견뎌온 것이다//금이 간다는 것은/또 다른 세상으로의 통로다’라는 구절등에서 볼 수 있듯이 틈의 틈을 날카롭고 섬세하게 들여다봄으로써 어둠 속에서 빛이, 무에서 존재가 생성되고 존재가 비로소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존재론적 사유를 보여주는 것도 장점과 가능성으로 부각되었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면 좋은 시인으로 성장해갈 것을 믿고 우리는 이 작품과 시인을 당선작으로 선정할 것을 합의할 수 있었다. 당선자의 각고 정진과 선외 예비 시인들의 새로운 분발을 기대하고 희망한다.
심사위원 김재홍 문정희
여행, 스무살의 열차
- 이병철 / 강원일보 가작
너는 차창 위로 그림을 그리다
새벽보다 축축한 잠에 빠졌다
그림자 같이 어둡게 기운 어깨 아래
네 손은 얇은 책장처럼 떨렸고
나는 첫 장을 넘기듯 조심스레
작은 네 손에 뜨거운 지문을 새겼다
밤바람 달리는 녹슨 철로는
별빛 스러지는 안개의 통로이자
누군가 밟고 지나간 질척한 눈길
열차는 흐릿한 눈을 뜨고
쓸쓸한 어둠을 향해 주행을 재촉했다
무서운 꿈이 가슴을 짓누르는 밤
너는 엷은 숨을 내쉬는 어린아이처럼
내 어깨에 피곤한 머리를 기대고 잠들었다
열차가 기억의 간이역을 지나자
하늘의 뒷면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눈을 뜬 아침은 죽음 같은 잠을 깨부숴
어둔 너의 그림 위에 밝은 물감을 덧입혔다
열차가 멈춰 서자 우리는
아지랑이 같은 입김을 일으켜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갈색 언덕을 향해 달려갔다
우리의 숨결을 잠재울 계절이 오기 전
벌써 내일의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신춘문예] 시부문 심사평
동양전통은 말에 대해서 가혹하다. 그것은 말의 불완전함을 단정하고 있다. 동양에서의 말의 사건은 이미 종결처리된 사건이다. 그래서 노자는 “말하여질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라고 했다. 불가에서는 아예 말 자체를 버려버린다. 정말 냉정하고 과격한 철학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는 상대적인 것만 표현할 뿐 절대적 진리를 담을 수 없다’는 노자의 사상은 도교적 미의식뿐 아니라 동양의 미의식을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말 할 수 없다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우리는 심사하는 과정에서 노자의 미의식과 공자의 미의식 사이에서 고민했다. 말해지지 않음을 극복하는 사유의 깊이와, 말해야 하는 인식의 철저함이 아쉬웠다. 그것은 응모된 작품들이 모두 이러한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메시지가 강한 작품은 사유의 깊이에서 오는 시어의 독특함이 부족했고 시를 잘 만들어내고 있는 작품들은 인식의 철저함에서 오는 성찰이 부족했다. 사유가 생각의 논리적 전개라면 철저한 인식은 사유를 깊고 절실하게 만드는 힘이다. 그런 점에서 박창호씨의 `표류'는 끝까지 논란이 되었던 작품이다. 그러나 시를 만들기에 급급해 내용이 형식을 얻지 못하여 표류하고 있는 게 흠으로 지적되었다. 그 반면에 정경희씨의 작품들은 사유와 인식의 깊이에 있어서 이미 기성시인이었다. 그러나 페이소스 가득한 스냅사진이란 혐의에서 우리는 이 시인을 더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이병철씨의 `여행, 스무살의 열차'는 기성의 어떤 유행에도 물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작품을 주목했다. 상황에 대한 묘사와 통제가 적절히 이루어져 개인적인 삶의 어느 한때를 보편성 있게 설득하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다듬어지지 않은 표현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어 크게 아쉬웠다. 시에는 숨김이 없어야 한다. `생각에 삿됨이 없다’는 말은 시는 솔직해야 한다는 말이고 그 솔직함이란 지금의 자신까지도 부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 부정의 불온성이야말로 시를 시대의 가장 예민한 촉수로 만드는 근거이다. 우리는 그 근거를 더 기다리기로 했다. <심사위원 / 함성호·서준섭>
눈발 날리는 마당
- 김운영 / 불교신문
눈발 날리는 마당을
보고 있으면요
마른 저녁도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마는데요
발목 잃어버린 눈발은요
땅에 닿지도 못하구요
약한 한숨처럼 담벼락 위
아버지의 여윈 어깨 위
에도 말이지요 관절
절룩거리면서 아버지 뒤란으로
가시더니요 불쏘시개 송구나무
가마솥 물 끓이는데요
등겨같은 닭털이 공중에
몇 날아다녔나요?
오래오래 눈발이 아버지
빈 어깨에 배꽃처럼 쌓이면요
오래오래 가마솥 연기
마음의 暴政(장작불) 몸 밖으로
서서히 증발되고 있으면요
아버지 사발에 담아
안방에 어머니에게요
아버지 붉은 동맥 모세혈관 풀어
어머니에게 비는
견고한 용서
닭백숙의 용서를 말이지요
살과 뼈 허물어지는 解産처럼
맑은 국물 눈물 말이지요
어머니가 밤새 소리없이
우시는 날에는요 다음날
말없는 닭백숙 한 그릇
눈발 날리는 마당에서 말이지요.
시 당선소감
김운영(본명 김용희)
“먼 길을 돌아 詩의 섬으로 귀환”
음모에 빠졌다는 생각이다. 아무래도. 당선되었다는 통보를 받으면서 아무래도 큰일이 생기고야 말았다는 두려움이, 이제 어찌해볼 수 없는 공모의 한 가운데로 떨어지고 말았다는 불길한 예감이 한동안 마음을 짓눌렀다.
시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공포와의 대면이었던가. 시를 짓지 않기 위해 너무나 많은 길들을 우회했다. 잘도 피해왔다. 시 근처에 집 짓고 시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면서 한 평생을 그냥 그렇게 살려 했다. 그런데 어떻게 나는 다시 이 섬으로 돌아오게 되었단 말인가. 온갖 전쟁과 모험 속에서 누더기 옷을 입고 귀환한 오디세우스처럼. 내 몸에는 시가 할켜놓은 단 한 개의 생채기도 남아 있지 않다.
시 쓰기를 위해 뜬 눈을 새운 저 절망의 밤조차도 등록되어 있지 않다. 내 몸은 문학이론으로 적절하게 소독되고 논리로 증류되어 있을 뿐이다. 사이보그처럼. 내 혈관 속에 아직도 20대에 갇혀 있던 그 시의 피들이 웅웅대고 있단 말인가. 오 맙소사. 당선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실어증에 걸려 버리고 말았으니.
그러니 음모는 성공한 것이 아닌가. 이제 나에게 남아 있는 어떤 언어도 없다. 혀가 잘린 것 같은 겨울 아침, 나는 새로 시작할 것이다.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개숙여 깊이 감사를 드린다. 그 두려운 시쓰기에 대해 크나큰 용기를 주신 것이다. 무엇보다 시적 감수성을 키워주신 모교 은사 김현자 선생님, 이어령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언제나 늦된 나에게 다시 시를 써보라고 권한 어느 선생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인생에서 또 하나의 매듭점을 맺게 해주셨다.
고통과 희망이 묘약처럼 입 안에서 함께 섞이고 있다. 열심히 써서 그 모든 은혜에 보답하고 싶다.
총평
올 겨울은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내렸다. 서해안과 호남지방에는 보름 가깝게 계속 눈이 내려 교통이 두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비닐하우스와 축사가 무너져 내렸고, 출하를 앞둔 양식장에서는 얼어 죽은 물고기들이 참혹하게 떠오르기도 했다. 거기에, 황우석 교수 사건마저 가세해 2005년 12월은 나라 전체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휩싸였다.
하지만 새해 첫 날 자신의 작품이 신문 한 면을 가득 채울 것을 바라고 문학의 외길을 정진해온 문학도들의 열정은 해가 갈수록 더욱 뜨겁고 웅숭깊어지는 것 같다. 그것은 불교신문 신춘문예 응모자가 작년에 비해 1.5배 정도 증가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되고도 남는다. 좀더 자세히 살피면, 시와 시조부문에 270명, 단편소설 부문 55명, 동화 부문 88명, 그리고 평론부문 7명이 응모했다.
물론 이러한 숫자는 중앙일간지의 신춘문예 응모자에 비해 현저히 적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신춘문예의 연륜이 중앙일간지의 그것에 비하기 어려울 정도로 낮은 불교신문의 특성을 고려할 때,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대한 일반 독자의 관심이 점차 증폭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응모자 수가 늘어난 것에 비례해 작품의 수준도 예전에 비해 상당히 높아졌다는 것이 각 부문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그것은 우리 문학의 저변이 그만큼 넓고 깊어졌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어서 무척 반가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진다. 응모작들이 다루는 제재나 주제 또한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에 대한 집요한 탐구와 세계의 현상에 대한 추적, 혹은 내적 자아를 찾아가는 철저한 구도적 자세 등 우리 문학의 일반적 특징과 유관한 것들이 많이 보였다.
심사위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불교신문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제재와 주제를 불교 정신에 무리하게 적용하려는 작품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었다. 불교 정신을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스며들어야지 의식적으로 도드라지게 하려면 오히려 문학성이 훼손될 위험이 많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시와 단편소설, 동화 부문 당선자가 모두 여성이라는 사실이 말해주는 것처럼 응모자 가운데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 우리 문학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다. 한 심사위원은 우스개 소리로, “이런 추세가 한 십 년 계속되면 ‘오랜만에 남성 작가가 탄생했다’는 기사가 나올 것”이라고 하여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시조 부문에서도 좋은 작품이 보였으나 시와 시조 가운데 한 작품만을 선정해야 했기 때문에 아쉽게 당선작에서 제외되기도 했고, 동화 부문에서는 최근 입적하신 큰 스님의 일화를 연상시키는 제재와 낙산사 대들보로 만들어진 악기를 제재로 한 작품이 눈에 띄었다. 단편소설은 불교적 제재나 주제를 다룬 작품이 많았는데, 작위성이 강하고 구성이 다소 산만한 것이 흠이었다. 평론 부문은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당선자를 내지 못하였으나, 수준은 상당히 진보한 것이었다는 평이었다.
신춘문예에 당선됐다는 것은 개인에게 커다란 영광이다. 하지만 거기에 만족하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가차없이 잊혀지고 도태당하는 것이 문단의 현실이기도 하다. 당선자 세 분께 축하의 인사와 함께, 앞으로 더욱 정진하셔서 우리 문학을 빛내는 큰 작가와 시인이 되기를 간곡히 희망한다. / 장영우(문학평론가.동국대교수)
개성집
- 김명희 / 한라일보
내 유년 가까운 곳에는 개성집이라는 술집이 있었다
늙은 작부 하나가 있었고 아버지 부랑의 날들이 있었다
붉은 입술에 검은 점,
저녁이면 문득 툇마루 끝에 걸리던 속살 속의 노을,
개성집은 우리들의 적이었다
밤이 깊으면
낡은 송학표 주전자가 시끄럽게 장단을 이끌어주던
검은 루핑 지붕 밑에서 아버지는 몇 날 며칠을 머물렀다
아교처럼 단단한 아버지의 편력은 여름내 계속되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어머니에게 떠밀려 그곳을 들르곤 했다
돌아오는 길엔 눈깔사탕과 은전 한 잎이 내 안으로 넣어졌고
나는 사탕이 다 녹기도 전 어머니에게 둘러댈 붉은 변명들을
입 안 한 켠에 감춰야만 했다
그.게.슬.픔.인.지.도.모.르.고
어린시절 내 슬픔 가까운 곳엔 개성집이라는 유곽이 있었다
아카시아는 밤마다 멀미처럼 부풀어올랐고
저녁의 라디오 속에선 붉고 격양된 노래들이 꽃잎처럼 쏟아져
나왔다
조팝꽃이 끝나면,
한낮의 길엔 양산을 쓴 여인 하나 가볍게 스치었고
그런 날 어머니의 가슴은, 해가 지고 오랜 뒤에도
쉽사리 저물지 못했다
[심사평]부박한 시대에 던진 낮은 목소리
공모 마감일까지 접수된 원고가 오백 편을 훨씬 웃돌았다. 지방언론사에서 주최하는 신춘문예 치고는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응모한 예비 작가들의 면면이다.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에서부터 칠순의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무척이나 다양하다. 어디 그뿐인가? 응모한 작품의 발신처가 전국의 경향각지를 총망라하고 있다. 영상 시대의 도래를 맞아 문자 매체에 사형 선고를 내리는데 주저하지 않는 일부 비평가들의 지적이 한참 어긋났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문학은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긴다.
혼을 담아 꾹꾹 눌러쓴 시와 그 시들의 행간을 읽으면서 내내 행복했다. 많은 예비 작가들이 오랫동안 가슴 깊이 새겨둔 기쁨과 슬픔, 순수함과 아름다움, 아픔의 흔적과 덧난 상처들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시를 아끼고 가까이 하려는 마음을 읽을 수 있어서 더없이 좋았다.
지금도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이성임의 ‘별을 굽는 여자’, ‘시계대학병원이 있는 골목’, 박은영의 ‘놀러 와 주실 거죠?’, 조성란의 ‘동검도 폐교’, 이진화의 ‘귀뚜라미가 사는 동네’, 김명희의 ‘개성집’, ‘냅일물’ 등이다.
모두가 적지 않은 시력(詩歷)을 확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이성임의 시편들은 시를 포착하는 지점이나 감성에 있어서 기성과 다를 바 없는 수준작이었다. 굳이 흠을 잡자면, 시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시인의 내면세계에 대한 뜨거운 통찰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보다 깊이를 더한 그의 시에 많은 기대를 걸고 싶다.
당선작인 김명희의 ‘개성집’은 우선 시의 깊이와 감동에 있어서 독자를 사로잡는 힘이 있다. 한없는 가벼움이 미덕처럼 횡행하는 부박한 시대에 던지는 낮은 목소리처럼 내게 다가왔다. 그의 다른 작품들도 우열을 가늠하기가 힘들 만큼 고른 수준이었다. 물론 흠이 없는 것은 아니나 당선자로 선정하면서 굳이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이를 기화로 시의 밭을 일구어나갈 마음가짐이면 축하의 꽃다발을 받기에 앞서 마음의 죽비를 들어야 할 터이다.
<김수열/시인>
[당선소감]
“긴 밤 지새우던 신앙같은 詩”
비닐봉투에 팽팽히 담겨지던 하루가 막 일몰의 허리띠를 풀기 시작한 그 틈으로 뜻밖의 당선통지를 받았다. 그 동안 나는 무조건 ‘시’에 미쳐있었던 것 외엔 정말이지 준비 된 게 없었다.
‘시’의 산을 오르며 전신이 부러지고, 찢어지고, 피가나고, 굴러 떨어지기를 여러 번. 이제 다 왔구나! 하고 온 몸의 상처를 핥고 있는데…. 지금 선 바로 그 자리가 해발0. “자! 이제 부터는 더 가파른 산을 올라야 합니다”라고 말씀 하시던 내 문학의 어버이신 박경원 선생님께 가장 먼저 큰 절을 올린다.
그리고 늘 묵묵히 믿음으로 나를 지켜봐 주시던 차령문학회 회장 민성훈 선생님과 지금 이 순간에도 치열하게 문학의 능선을 넘고 있는 차령문학 회원들과 “우리말 지킴이로써 언제나 사명을 다해야 하는 게 시인”이라고 늘 애정으로 다그쳐 주시던 김양헌 선생님의 인자하신 모습이 지금 이순간 눈에 선하다.
밤 늦도록 흔쾌히 강의실을 내어주시던 안성시립도서관 유병장관장님께 감사 드리고 ‘시’에 관한한 밤과 낮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던 안성도서관 문우들, 지금까지의 내 길을 믿고 지켜 봐준 남편과 한 없이 부족한 엄마를 넓게 이해하고 도와준 나의 보석인 영광이와 선영이, 사랑하는 선배님들, 그리고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께 진정으로 감사의 마음을 올린다.
그리고 아직 부족한 나의 시에 날개를 달아 주신 김수열 심사위원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나의 일상은 언제나 내 몸 밖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에너지들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 했다. 세상 모든 것에 깃들어 있는 영혼들이 수시로 내게 접속해 옴을 감지하며 그 언어들을 해독하기 위해 긴 밤을 하얗게 보내기를 여러 번, 언제 부턴가 ‘시’는 나의 신앙이 되어 있었다.
그 동안 나의 시가 되어 준 세상 모든 에너지들에 감사와 고마움을 전하며 앞으로 더욱 섬세하게 정신을 열어 난청지역에서도 능히 듣고 해독하며 기록하고 전달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1968년 경기 양평 출생
2005년 문학과 육필 신인상
시하늘 동인, 차령문학회 회원
안성시립도서관 시창작반 재학
전주철물점과 행복부동산 사이
- 정동철 / 광주일보
우리철물점과 행복부동산 사이
그가 끼어 있다
손톱만한 햇살이 간신히 창에 비쳤다
사라질 때쯤이면 늘, 나는 그의 집을 지나친다
움켜쥔 칼끝으로 그가 새기고 싶은 것과
도려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가 칼끝으로 파낸 햇볕의 부스러기들은
결코 이름이 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이름 사이에 낀 것들을 도려내며 늙었다
그가 밖으로 나오는 법은 거의 없었다
조금씩 이빨이 자라는 설치류 꽉 다문 입 속,
엉거주춤 끼어 남의 이름을 도드라지게 새기다가
반복되는 자기 생까지 파내버릴 듯하였다
날마다 자신의 뭉툭한 손가락을 하나씩 빼내
손가락 끝에 아프게 지문을 새기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목도장을 하나 파러 갔다가 어느 날
나는 그의 뒤통수에 난 창문 하나를 보았다
(그것은 잠깐, 둥근 보름달이었다가 그믐이 되기도 했다)
나뭇결 사이에 촘촘하게 어둠을 밀어 넣는 동안
달빛이 인주를 찍어 뒤통수에 도장을 박아 넣은 것이었다
바뀐 신발
- 천종숙 / 부산일보
잠시 벗어둔 신발을 신는 순간부터
남의 집에 들어온 것처럼 낯설고 어색했다
분명 내 신발이었는데
걸을 때마다 길이 덜커덕거렸다
닳아있는 신발 뒤축에서
타인의 길이 읽혔다
똑같은 길을 놓고 누가
내 길을 신고 가버린 것이다
늘 직선으로 오가던 길에서
궤도를 이탈해 보지 않은 내 신발과
휘어진 비탈길이거나 빗물 고인 질펀한 길도
거침없이 걸었을 타인의 신발은
기울기부터 달랐다
삶의 질곡에 따라
길의 가파름과 평탄함이
신발의 각도를 달리 했던 것이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은
타인의 신발을 신고 걷는 길,
나는 간신히 곡선을 직선으로 바꾸었다
<심사평>
시들이 조금씩 어둡다. 시대가 어둡다고 시가 어두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밝히고,고통 속에서 희망을 읽어내는 변화의 징후를 시에서 엿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작품을 읽어 내렸다. 여섯 사람이 쓴 여섯 작품이 마지막까지 뽑는 이들의 손에 남았다. '기억에서 봄을 검색하다','몸빼','유마경변상도','없다,해돋이 광장에는','결혼기념일',그리고 '바뀐 신발'이 그것이다. 모두 남다른 수련 흔적과 작품 세공력을 숨기지 않은 작품이다. 게다가 주변의 구체적 일상에 충실하고자 한 점 또한 공통의 미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천종숙의 '바뀐 신발'을 당선작으로 미는 데에 뽑는 이들은 쉽게 동의했다. 신발은 흔한 글감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흔하지 않는 예각적 체험으로 되돌려 내는 눈매는 오랜 적공의 결과다. 첫 싯줄에서 마지막 싯줄까지 다소 둔탁하지만 거침없는 사색이 제 맵시를 잘 갖추었다. 함께 보낸 작품들의 수준이 가장 고른 점도 장점이었다. 세상이 변하지 않으면 시가 먼저 변해야 한다. 이제껏 이고 다닌 나이와 경력은 지금부터 잊어야 하리라. 신인으로서 보다 적극적인 모험의 세계로 즐겨 나아가기를 바란다. 시인 황동규·박태일·최영철
<당선소감>
찾아와 주지 않는 행운을 사려고 꽃집에 갔다. 팔다리가 잘리고 몸통이 삭둑 잘린 행운들이 태연하게 옆구리에서 행운의 싹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뼈아픈 절망의 칼날이 몸통을 수천 번 지나가도 쑥쑥 자라나는 행운,싹은 자랄수록 비쌌다. 한번도 피워보지 못한 너무 큰 행운은 버거운 짐이었다. 행운을 누리고 싶은 간절함과 몇 장의 지폐 사이에서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지는 동안 행운은 서서히 시들어 갔다. 행운은 아무나 피워 올리는 게 아니었다. 꽃집을 나서며 행운을 꽃피우려던 가지 하나씩 잘라냈다. 머리를 자르고 팔다리를 잘라내고 나니 몸통만 남은 옆구리에서 뜻밖의 행운이 돋아나고 있었다.
시는 내 삶의 희망이며 절망이었다. 희망과 절망의 팽팽한 줄다리기에 지쳐 그만 줄을 놓아버리고 싶었을 때 걸려온 한 통의 전화,허탈감과 함께 포만감이 밀려들었다. 먼저 부족하고 모자라는 제게 희망의 줄을 잡게 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죽을 힘을 다 해 열심히 하겠습니다.
시의 뿌리를 내리게 해 주신 유병근 선생님,언제나 힘이 되어 주시는 이선희 선생님,고맙습니다. 시의 길을 묵묵히 가고 있는 문우들에게도 작은 희망이 되고 싶다. 끝으로 말없이 나를 믿어 준 가족에게 이 벅찬 마음을 함께하고 싶다.
* 1957년 경남 고성 출생
방송통신대 국문학과 졸업
서울목공소
-- 양해기 / 경향신문
<심사평>
시인으로서 언어를 행사한다는 것은 단순히 무언가를 ‘이야기하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실천 자체이어야 마땅하다. 시의 외형을 지닌 모호한 설명과 감상들, 일부 투고작들의 필연성을 수긍하기 어려운 산문화 경향에 대해 우려를 갖는 것은, 그것이 언어의 시적 사용이 지니는 근원적 의의와 위엄에 대한 자각의 결핍을 반영한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예심을 통과한 9명의 후보들 중 ‘매듭론’ ‘고치의 시간’ ‘에버랜드 화원에서’ ‘깃을 날리며’의 4명을 우리는 대체로 시적 사유가 다소 도식적이거나 언어 운용의 긴장감이 떨어진다고 판단하여 제외하였다. 남은 5명의 후보 중 이현수는 ‘뿌리의 방’ 같은 섬세한 안정감이 인상적이었으나 좀더 새로울 필요가 있었다. 정구영은 ‘인드라의 그물’ 등 일부 작품의 재기가 신선했으나 그것이 과연 재기를 넘어 진정한 시적 모험이라 할 만한 것인가에는 의문이 남았다. 이재훈은 생기 있고 도식성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며 특히 ‘공중전화 부스들~’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부적절한 비유와 표현이 부분적으로 지적되었다.
마지막으로 신미나와 양해기 두 후보를 놓고 심사위원들의 의견은 크게 엇갈렸다. 신미나의 시편들은 감각과 수련이 높은 수준에서 결합된 가작들이며, 삶을 누추함에서 건져내는 독특한 생기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에 대해, ‘입김’ ‘흙잠’을 제외하면 가벼운 감각에 주로 의지하고 있으며, 크게 새롭다고 보기 어렵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양해기의 시편들에 대해서 역시 고단한 생활 현장에서 건져올린 살아있는 글감과 시적 몽상이 잘 통합된 작품들이며, 근년의 젊은 시 일각이
드러내는 해체와 일탈 지향에 비해 신선하고 힘이 있다는 긍정적 평가에 대해, 제출된 매편의 시적 발상과 전개가 대동소이하고, 제재의 선택이 상대적으로 신선해 보일 뿐 1970, 80년대 민중시 운동이 이룬 성과에 비할 때 시적 사유가 새롭다고 할 수 없다는 부정적 의견이 제기되었다. 재독과 삼독, 격론과 휴회가 긴 시간 이어진 끝에, 결국 신인작가상이 ‘이 한편’을 독자 앞에 내놓는 제도라는 점과 신인다운 패기에 가산점을 주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 의견을 모았으며, 이어 양해기의 ‘서울 목공소’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합의할 수 있었다. 당선작은 마음의 안과 밖이, 밈과 당김이 잘 균형 잡힌 수작이다. 울분을 벼려 사랑을 이루어야 하는-사랑의 포즈가 아니라-짐을 당선자는 지고 있는 듯하다. 건투를 빈다. 신미나를 비롯한 아홉 분 또한 우리는 잊지 않고 기다릴 것이다.
<당선소감>
아주 오랜 시간 어두운 동굴 안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어디쯤인지 이 동굴에 출구가 있기는 한 건지 넘어지고 깨어지며 암흑의 긴 터널을 걷고 또 걸었다. 걷다가 지치면 동굴 안 아무 곳에서나 쓰린 몸을 누이고 잠들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꿈결인지 생시인지도 모르게 한줄기 눈부신 빛을 감지했다. 그 빛을 따라 동굴 밖으로 나왔다. 들어온 입구와는 전혀 다른 세상인 동굴 밖에서 난 지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다. 좀 있으면 누군가 ‘어이 이봐 촌뜨기’하며 어깨를 툭- 하고 칠 것만 같다.
감사드려야 할 분들이 너무나 많다. 어둠 속에서 손전등 배터리를 갈아주신 문학아카데미 박제천 선생님, 후덥지근하고 습기 많은 곳에서 시원한 생맥주로 갈증을 달래준 이영식, 강상윤 시인, 동굴 밖으로 무사히 빠져나가길 나보다 더 초조해 하며 기다려준 형제들과 친지들, 깨진 무르팍에 소 곱창으로 연고를 발라주고 차가운 소주로 약솜을 대준 영훈고 9회 친구들에게도 고마운 마음 전한다.
그러나 특히 무엇보다도 캄캄한 시의 동굴 안으로 한줌 빛을 던져주신 경향신문사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 드린다.
동굴 밖에 나와 몸을 살펴보니 온 몸이 멍자국이고 말라붙은 피와 고름으로 뒤범벅된 상태다
내 온 몸에 감겨 있는 핏자국을 자세히 보니 알 수 없는 한 장의 그림 형태로 그려져 있다
앞으로 내 시가 걸어가야 할 지도쯤으로 보인다
그 지도 지워지지 않도록
그 상처 아물지 않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하겠다
아쿠아리우스 [2006 서울신문 당선 취소작]
- 최호일 / 서울신문 당선취소작
[서울신문]서울신문은 2006년 신춘문예 시 부문인 최호일씨의 ‘아쿠아리우스’의 당선을 취소합니다. 이 작품이 한국수자원공사가 2004년 실시한 제15회 물사랑글짓기 공모 입상작인 이모씨의 ‘물병자리별’과 동일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이씨는 “지역 시동인 후배인 최씨가 2년 전 품평회에서 돌렸던 내 작품을 몰래 가져다 응모한 것이라 전혀 몰랐다.”고 주장하고, 최씨도 “그렇다.”고 시인했으나 같은 작품이 이미 최씨의 이름으로 발표된 만큼 미발표작을 대상으로 하는 서울신문 신춘문예의 규정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과를 드리며,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서울신문은 신춘문예 응모작을 더욱 철저히 검증할 것을 다짐합니다.
나는 물 한 그릇 속에서 태어났다
은하가 지나가는 길목에 정한수 떠있는 밤
물병자리의 가장 목마른 별 하나가
잠깐 망설이다 반짝 뛰어 들었다
물은 수시로 하늘과 내통한다는 사실을
편지를 쓸 줄 모르는 어머니는 알았던 것이다
달마다 피워 올리던 꽃을 앙 다물고
그이는 양수 속에서 나를 키웠다
그 기억 때문에 목마른 사랑이 자주 찾아 왔다
지금도 물 한 그릇을 보면 비우고 싶고
물병 같이 긴 목을 보면 매달리고 싶고
웅덩이가 있으면 달려가 고이고 싶다
어디 없을까 목마른 별 빛
물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멎을 때까지
아주 물병이 되어 누군가를 적셔주고 싶다
아니,트로이의 미소년 가니메데에게
눈물 섞인 술 한잔 얻어 마시고
취한 만큼 내 안의 고요를 엎지르고 싶다
한밤중의 갈증에 외로움을 더듬거려 냉장고 문을 열면,그리웠다는 듯
반짝 켜지는 물병자리 별 하나
※물병자리 별. 그리스 신화에는 제우스에게 납치 당해 신들에게 술을 따르는 트로이의 왕자 가니메데의 이야기가 있다.
■ 당선 소감 “옆집 아줌마에게 말걸듯…그렇게 詩 써내려 갈 것”
십년 전쯤, 생업을 등지고 시에 빠져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무성 영화처럼 돌아간다.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고 나는 살짝 맛이 가 있었다. 과도한 의욕이, 편견과 오만이, 그리고 화려한 궁핍이 내 유일한 의상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보이거나 천재였다.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먼저 지쳐있었다.
▲ 최호일 씨
어림도 없을 줄 알았던 당선소식을 듣고는, 아이들은 상금의 용도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고, 아내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방에 가서 운다. 나는 실없는 장난 전화를 받은 것처럼 담담했다. 가소롭다. 나도, 아내도, 아이들도…. 누군가 말했다. 시인은 돈을 멀리해야 하고, 살이 쪄서도 안 되며, 오로지 고독과 이슬만 먹고 살아야 한다는 심한(?)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시인의 양식은 과연 고독과 이슬일까? 하지만 나는 어느덧 돈의 단맛을 아주 잘 알고 있을 정도로 영악해져 있다. 그러나 등이 따뜻해져 갈수록 마음은 여전히 춥거나 허기를 느낀다. 그리하여 시여!시인이여!절벽까지 나를 안내해 다오. 출구가 도대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작심을 하고 쓴 시는 모조리 밀려나고, 옆집 아줌마에게 얘기하듯 쓴 시가 당선이 되어 적지 않게 놀랐다. 힘을 뺐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는 앞집 아줌마에게 얘기하듯 시를 써 봐야겠다. 아무튼, 내가 어쩌자고 이곳으로 다시 기어들어 왔는지 통 모르겠다. 아버지에게 약주나 한잔 부어 드리러 산에 가야겠다. 격려해 준 어머니와 형제들, 그리고 홍일표 시인, 날시 동인, 글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님들, 지금은 눈에 덮여 있을 추동공원의 벤치에게 참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 최호일 약력 ▲1958년 충남 한산 출생 ▲잡지 프리랜서 ▲날시 동인
■ 심사평 “우물처럼 웅숭깊은 신화적 시선”
예심을 거쳐 온 적지 않은 작품들을 숙독하면서, 올해의 응모작들이 시적 다양성이나 인식의 틀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해 선자(選者)들은 안타까웠다. 말을 지나치게 낭비하고 있으면서도 사로잡힌 시가 안 보이니!
뿌리 없는 상상력과 모호한 주제들, 시답지 않은 시시덕거림의 중언부언들, 리듬을 사상(捨象)시킨 산문의 줄글체 등이 어지럽게 부조되어 왔다. 스스로 감동하지 못하는 시상(詩想)을 펼쳐 독자에게 다가선들 그 반응은 불문가지이리라. 마치 알맹이가 빠져나가버린 말의 빈 포대자루를 한참이나 들고 서있었다는 느낌이다.
그 와중에서도 임수련씨와 최호일씨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라 할까.
임수련씨의 작품에서 오래 묵힌 신뢰 같은 것을 맛본다.‘악어왕국’에서 보여주듯이 진술과 묘사를 교직시키는 적확한 비유가 삶에 스며드는 풍자와 제대로 어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발상의 동력을 내쳐 지탱해내는 인내를 잃었을 때,‘달리는 자전거의 실루엣’처럼 처음의 긴장이 어느새 허물어져버리는 시편으로 나타난다.
최호일씨의 경우, 응모 작품 전체에서 균질감이 살펴진다. 그만큼 습작의 강도가 굳셌음을 읽어내게 한다. 상상에 젖어든 시어의 활달한 운용도 그의 시편들을 오롯이 한 편씩의 완결된 서정으로 구축하는데 일조했으리라.
그 중에서도 ‘아쿠아리우스’는 태생의 별자리를 짚어 삶의 근원적인 갈증을 풀어내는 신화적 시선이 우물처럼 웅숭깊게 다가온다. 이 작품이 당선작으로 뽑힌 것은 직선도 곡선도 아닌 시의 얼개를 어느 정도 아우를 줄 아는 솜씨가 평가된 것이다. 당선을 축하하며, 더욱 정진하길 당부한다.
정현종 김명인
내 친구 야간 대리운전사
- 최명란 / 문화일보
늦은 밤
야간 대리운전사 내 친구가 손님 전화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은
꼭 솟대에 앉은 새 같다
날아가고 싶은데 날지 못하고 담배를 피우며 서성대다가 휴대폰이 울리면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솟대를 떠나 밤의 거리로 재빨리 사라진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또 언제 날아와 앉았는지 솟대 위에 앉아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그의 날개는 많이 꺾여 있다
솟대의 긴 장대를 꽉 움켜쥐고 있던 두 다리도 이미 힘을 잃었다
새벽 3시에 손님을 데려다주고 택시비가 아까워 하염없이 걷다 보면 영동대교
그대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참은 적도 있다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어제는 밤늦게까지 문을 닫지 않은 정육점 앞을 지나다가 마치 자기가
붉은 형광등 불빛에 알몸이 드러난 고깃덩어리 같았다고
새벽거리를 헤매며 쓰레기봉투를 찢는 밤고양이 같았다고
남의 운전대를 잡고 물 위를 달리는 소금쟁이 같았다고 길게 연기를 내뿜는다
아니야, 넌 우리 마을에 있던 솟대의 새야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솟대 끝에 앉은 우리 마을의 나무새는 언제나 노을이 지면
마을을 한 바퀴 휘돌고 장대 끝에 앉아 물소리를 내고 바람소리를 내었다
친구여, 이제는 한강을 유유히 가로지르는 물오리의 길을
물과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물새의 길을 함께 가자
깊은 밤
대리운전을 부탁하는 휴대폰이 급하게 울리면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솟대를 떠나 밤의 거리로 사라지는
야간 대리운전사 내 친구
오늘밤에도 서울의 솟대 끝에 앉아 붉은 달을 바라본다
잎을 다 떨군 나뭇가지에 매달려 달빛은 반짝인다
시적 형상화 탁월…상상력 빼어나
당선작 ‘내 친구 야간 대리운전사’ 외 네 편을 응모한 최명란씨의 작품들은 그 어느 시를 당선작으로 내놓아도 좋을 만큼 빼어난 것들이다. 탁월한 시적 형상화 능력과 적확한 언어 구사, 기발하면서도 활달한 상상력, 절제된 담백한 어조는 이 신인의 만만치 않은 문학적 내공을 짐작케 한다. 작품들은 주로 고된 삶을 다루고 있다. 노숙자, 보도블록 까는 청년, 꼬막 캐는 여자, 야간 대리운전사 같은 버거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묘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최명란씨의 시들은 감정의 표출을 자제하면서 어떤 안쓰러운 사실들의 풍경 앞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대상과의 거리를 요구하는 그 풍경은 소외된 인생들의 어두운 풍경이기도 하지만, 심미적 안목과 감수성으로 걸러진 언어들에 의해 언어예술로 승화된 풍경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당선작이 되지는 못했지만 이승규씨의 ‘대추나무 이력서’ 외 2편도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승규씨의 시들은 맛깔스러운 언어들로 빚어낸 정감있는 이미지, 연기론적인 상상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시적 긴장을 늦추는 산문적인 요소들이 흠이었다.
고원효씨의 작품 중에서는 ‘미더덕의 맛’과 ‘코가 만들어지기까지’ 두 편이 관심을 끌었다. 말의 우연성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시적 전개 방식은 재미있고 독특하다. 그러나 그것이 시적 울림을 이끌어내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그리고 응모자 모두에게 정진과 향상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심사위원 황동규·최승호
“솟대 끝 나무새처럼 날고 싶다”
내가 새로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대부분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이었고, 내가 안다고 믿고 있는 것들도 정녕 모르고 있는 것이었으며, 아래로 흐르고 있다는 것 역시 위로 흐르는 것인지도 몰랐다. 소통되지 않음에 절망하고, 절망으로 넘어질 때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일어서야 했다.
그런 내게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는 이는 솟대 끝에 앉은 나무새였다.
함께 날고 싶었다. 날고 싶은데 날개가 없었다. 그 막막한 상황을 뒤집는 박수소리는 바로 당선 소식이었다.
이제 단단한 등에 날개를 달았다. 내 딸 진이가 가는 손가락으로 얼굴을 묻고 까르르 웃는다. 나도 함께 웃는다. 웃음이 이내 눈물로 바뀐다. 이래서 우리 삶은 때때로 감동적인 것을! 아, 우리에게 이야기가 아닌 것이 어디 있으며 노래가 아닌 것이 어디 있으랴.
솟대 끝에 앉은 나무새 한 마리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날아간다. 물과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물새의 길을 나도 함께 가야지. 베란다 화분의 풍로초도 그 사이 또 한 송이 꽃을 피웠다.
최명란 <프로필>
1963년 진주 출생
세종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2005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봉제동 삽화
- 김성철 / 영남일보
천둥 번개가 치자 공장엔 정전이 찾아왔다
소나기의 망치질 소리가 시작되면
늙은 배선이 어김없이 누전 빙자한 어둠을 불렀다
여공들의 환한 치아가 깜빡깜빡 불 밝히고
재단사 김씨는 하늘위로 쌓아올려진
회색원단 눈길로 만지며 납품기일 손꼽는다
창틀 등지고 불어오는 바람
미싱 선반 위로 펼쳐진 꽃길타고 달려간다
손 맞잡은 여공들 바람의 허리춤을 잡고
꽃길 위로 걸어 들어간다
피지 못한 꽃들이며 줄기 오르지 못한 실밥들이
보푸라기 흔들며 반긴다
페달 밟는 미싱공 꽃들에게 먼저 수인사 건네자
웃자란실꽃들 서둘러 뿌리 걷으며
손에 핀 봉제선 위로 올라탄다
때 묻은 손목, 손목들
산수유열매처럼 붉게 흔들린다
재봉중인 꽃술이 실밥을 흔들었으나
접근금지를 알리는 도안선이 유난히 날을 세운다
작업반장의 기침소리와 함께 기지개 다시 피는 형광등
주파수 맞추는 고물전축, 후후 바람 불어 목청 가다듬고
여공들은 와 하며
공장안으로 퉁긴다
봉제동 수출공장
시동 거는 미싱들 서역 향한 길을 재촉한다
실크로드 사막의 모래처럼 날리는 보푸라기
봉제동 여공들은 실크로드를 걷고 있다
[심사평] "민중의 삶 진전된 감각으로 표현"
예심을 거쳐서 본심에 넘겨진 작품들은 대체로 상당기간 수련과 일정한 수준의 솜씨를 보여줬다. 아직도 시인 지망의 열정을 가진 높은 수준의 후보자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한국문학의 미래를 위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응모작들은 최근 시단의 흐름이 반영된 탓인지 전반적으로 크고 무거운 주제보다는 작고 가벼운 일상사를 소재로 한 미시적인 삶의 세계를 천착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짧고 기지가 번득이는 시, 밝고 건강한 시, 서구적 감성의 시 등이 눈에 띄었다.
마지막까지 당선작으로 검토의 대상이 된 것은 '페르세포네의 동굴' '소설(小雪) 일주일 후, 첫 눈' '봉제동 삽화' 등의 작품들이었다. '페르세포네의 동굴'은 신선한 신생의 감각이 두드러졌으며 '소설(小雪) 일주일 후, 첫 눈'은 깔끔하고 완결된 서정적 구조가 돋보였다. '봉제동 삽화'는 봉제공장 여공들의 건강한 삶의 풍경을 소재로 한 시로서 약간 익숙하긴 하지만 새로운 감각을 보여주었다.
세 편의 작품은 각각의 장단점을 지니고 있어 우열을 가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좀 더 세밀하게 검토한결과, '페르세포네의 동굴'은 현실에 대한 밀착감이 조금 부족했으며, '소설(小雪) 일주일 후, 첫 눈'은 전체구도의 시적 완결성에 비해 마지막 결말 처리에 있어서 내적 에너지가 약했다. 결과적으로 '봉제동 삽화'를 이의없이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는데, 그것은 이 시가 기존의 민중시와 달리 새롭게 진전된 감각을 긍정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민중시가 지닌 부정이나 분노의 감정을 벗어나서 "여공들의 환한 치아가 깜빡깜빡 불 밝히고" "웃자란 실꽃들 서둘러 뿌리 걷으며/ 손에 핀 봉제선 위로 올라탄다" "실크로드 사막의 모래처럼 날리는 보푸라기" 등의 사실적인 표현들은 노동현장에서의 삶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새롭게 표현해 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같이 응모한 '거미집'이나 '만물상' 등의 작품도 일정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점 또한 선자들의 결정에 참조사항이 됐다. 당선자가 새로운 민중시의 지평을 걸어나갈 것을 기대해 본다.
당선자에게는 아낌없는 축하의 박수를 보내드리고 아깝게 탈락된 많은 응모자들에게는 격려의 박수를 보내드린다. (신경림·최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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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김성철
"같이 아파하지 못한 나를 원망"
△전북 군산 출생
△원광대 국어국문과 졸업
△원광학예대상 시부문 수상
△현재 김성철 입시공부방 운영
삶은 배반이다. 영화같은 삶은 늘 현실도피중이거나 대인기피증이 심하다. 그 덕에 앓아누웠던 일 얼마나 많았던가?
한동안 부서진 것들만 눈에 들어왔다. 깨진 계단이 그랬고 녹슨 육교난간이 그랬고 어머니의 해진 보험가방 가죽도 그랬다. 닳아빠진 구두 뒷굽 속에 들어앉은 단단한 사내도, 문 닫힌 유곽 속에 핀 꽃도, 가슴 속에서 꽉 깨문 신음만 뱉고 답답해하기만 했다. 형상화되지 못한 것들이 꿈속에서 부유하고 난 늘 축축한 식은땀만 흘리다 깨곤 했다. 손을 뻗어 만지기만 할 뿐, 같이 아파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는 날. 그런 날들.
전화를 받은 게 바로 어머니께서 진통을 시작했던 날과 같았습니다. 당선통보를 받고 눈에 선하게 밟히는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아직도 낡은 보험가방을 들고 다니십니다. 서른 넘은 아들 녀석이란 게 매번 어머니 가방의 해진 가죽만 바라볼 뿐이지, 가방을 들어드리거나 새로운 가방을 만들어드리지도 못했습니다. 오늘의 이기쁨이 어머니께서 저를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인내하시던 진통을 조금은 덜어드렸을 거라 믿습니다. 또한 하나뿐인 누나와 자형, 그리고 사랑하는 조카 지은·지선에게도 이 기쁨을 전합니다.
이 기쁨 함께 하고픈 사람들 더 많습니다. 산적 같은 석정, 가냘프고 억센 상웅, 아프리카 소사 태관, 눈 먼 안빈, 소설을 위해 불태우는 모군과 유민, 그리고 1기 안도현 선배님부터 23기 오희진까지 모든 원광문학회 선배님, 후배님들. 목포를 지키고 있는 벗 인석, 늘 곁에서 힘을 주는 일영·유미씨, 강연호 교수님, 이 자리를 빌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더욱더 열심히 쓰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그리고 저를 믿고 따라와 주는 공부방 사회선생님을 비롯한 모든 선생님들. 그리고 깨물어 보듬고 싶은 아이들. 효정 별 선필 성범 준형 정곤 성민 성현 은탁. 또한 마음속에 앉은 그녀에게도….
나에게서 떠난 모든 사람들, 아픔 줘서 감사합니다. 좀 더 많이 아파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못난 저에게 죽비를 내리쳐 주신 두 분의 심사위원께 엎드려 고합니다. 더욱더 노력해서 부끄럽지 않게 쓰겠습니다.
조각보를 짓다
- 이은규 / 국제신문
그믐, 공명 쟁쟁한 방에 외할머니 앉아 있네요 오롯한 자태가 새색시처럼 아슴아슴 하네요 쉿, 그녀는 요즘하늘에 뜬 저것이 해이다냐 달이다냐, 세상이 가물가물 한다네요 오늘따라 총기까지 어린 눈빛, 오방색 반짇고리 옆에 끼고 앉아 환히 열린 그녀, 그 웃음자락에서 꽃술 향이 피어나기는 어찌 아니 피어날까요 시방 그녀는 한 땀 한 땀 시침질하며 生의 조각보를 짓고 있네요 허공 속에 자투리로 남아있을 어제의 어제들 살살 달래며, 그 옆에서 달뜬 호명을 기다렸을, 아직 色스러움이 서려있는 오늘의 오늘들을 공들여 덧대네요 때마침 그믐에 걸린 구름이 얼씨구 몸을 푸는데, 세상에서 제일 바쁜 마고할멈 절씨구 밤 마실 나왔나 봐요 인기척도 없이 들어와선 그녀 옆에 척하니, 그 큰 궁둥이를 들이대더라고요 그러더니 공든 조각보가 어찌 곱지 않으랴, 조각보에 공이 깃들면 집안에 복인들 왜 안 실리랴, 이러구러 밉지 않은 훈수를 두네요 마치 깨진 기와조각으로 옹송옹송 살림 차리던 소꿉친구 모양새로 앉아서는 말이지요 마고할멈의 넓은 오지랖이야 천지가 다 아는 일, 그 말씀 받아 모신 그녀는 손끝을 더욱 맵차게 다독이네요 한때 치자빛으로 터지던 환희들이 어울렁, 석류잇속 같이 아린 화상의 점점들이 더울렁, 쪽빛 머금은 서늘한 기원들까지 어울렁더울렁 바삐 감침질 되네요 生의 감칠맛을 더하던, 갖은 양념 같은 농지거리들도 착착 감기며 공글리기 되더니, 이내 그 色들色들 어우러져 빛의 시나위 휘몰아치네요 드디어, 우주를 찢고 한 장의 조각보가 첫 숨을 탔네요 금방이라도 선율 고운 장단이 들썩이며 펄럭일 것 같네요 저만치 아직 조각보에 실리지 않은 시간들은 羽化登仙이라 적힌 만장을 펄럭이며 서있네요 어느새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마고 할멈, 다 빠져버린 이빨 설겅설겅한 잇바디 내보이며 방짜유기빛으로 쨍하게 웃고요 외할머니야 그 조각보를 가슴에 안고 어린애처럼 좋아라, 술렁술렁 일렁일렁 거리네요 마침 장지문 밖에서 그믐달이 막 玄牝之門으로 드는 때 말이지요
2006 신춘문예-시] 심사평
토속의 기운 신선하게 느껴져
김명인
선자(選者)에게 넘겨진 시편들은 예심을 거쳐 온 작품이라서, 어느 정도의 시적 성취가 고루 엿보였다. 그러나 습작기의 신인들에게서 흔히 살펴지는 판에 박힌 수사나 장식적 언술에서는 모두들 비켜서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검토의 대상이 되었던 작품들은 이하정의 '합천 가는 길', 이인주의 '모자를 쓴 사철나무', 이은규의 '조각보를 짓다' 등 세 편이었다.
오정환
이하정의 시에서는 한 세대 전의 자옥했던 체험이 조밀하게 읽혀진다. 그러나 낡은 화폭을 대하는 듯한 느낌은 화자가 선택한 회상의 어조가 고루한 문맥 위에 얹혀있는 탓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인주의 응모작들이 보여주는 신선한 문체는 평가받을 만하였다. 시화의 선택이나 상상력의 밀도 또한 감각적이었다. 그러나 시의 힘을 한데 모으려는 집중력에서는 신뢰가 떨어진다. 집중력은 작품을 관통해가려는 시적 긴장감의 바탕이자 일관성의 핵심인 것이다.
이은규의 시편에서도 여러 결점들이 눈에 띄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선작으로 뽑힌 '조각보를 짓다' 역시 수다스러운 언사에 필적할 만한 감동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더구나 '현빈지문(玄牝之門)'처럼 공연한 현학이 이 시에 무슨 보탬이 되었는지는 곰곰이 따져보아야 한다. 노자(老子)에 기댄 이 구절은 '만물을 낳게 하는 근원의 길'을 가리키지만, 그런 어사가 아니더라도 모성(母性)의 주술적 분위기를 감각적으로 살려낼 수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겹겹의 말에 감싸인 '마고(麻姑) 할미'와 같이 토속에의 생식적 기운이 이 시의 신화적 토대가 되어 작품의 일체감을 어느 정도 건사해내고 있다는 점에 심사위원들은 함께 공감하였다. 당선을 축하하며 거듭 정진하길 당부한다. 김명인·오정환
[2006 신춘문예-시] 당선소감
시는 달게 받아야 할 고통이자 희열
추사의 '사난결(寫蘭訣)'에는 "인품이 고고특절 하여야 화품도 높아지는 것인데 세인이 공연히 형상만 같이하기에 애를 쓰거나 혹은 화법으로만 꾸려가려고 애쓰는 이들이 있다. 또 비록 9천 9백 99분까지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나 9천 9백 99분까지 갔다고 난이 되는 것이 아니요, 그 9천 9백 99분까지 간 나머지 1분이 가장 중요한 난관이니 이 난관을 돌파하고서야 비로소 난을 그린다 할 것이다"라는 크고 깊은 문장이 나온다.
화(畵)의 길과 시(詩)의 길은 일맥이며 상통한다고 생각한다. 추사가 "나머지 1분의 경지는 누구나 다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하자면 인력으로 되는 경지가 아니요, 그렇다고 인력 이외의 것도 아니라"고 한 그 1분의 경지는 내겐 먼 먼 미래의 이야기이다. 오히려 그 미래를 위해 이제 비로소 9천 9백 99분까지의 험한 행로가 눈앞에 준비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내게 시는 달게 받아 모실 고통이자 희열이고, 또 푸른 미래이다.
시인으로 살아가는 고통과 희열을 늘 몸소 보여주시는 고재종 선생님과 남도의 미풍으로 다가오는 광주대 문창과 교수님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 천금같은 내 귀인께도 어여쁜 절 올리고 싶다. 아울러 가능성 하나만을 믿고 내 시가 세상 첫 숨을 타도록 도와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와 함께 부지런히 쓰겠다는 다짐을 올릴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북어
- 기명숙 / 전북일보
살점이 뭉텅 빠진 들쑥날쑥한 몸 하나 허공에 걸려있다
쾡한 눈알을 바람이 핥고 지나가자 파르르 눈가의 잔주름이 흔들린다 헤쳐가야 할 길을 또렷이 바라볼수록 굳은살처럼 딱딱한 몸은 야위어간다 그 해 누군가 억센 손으로 그의 내장을 파내고 그 속에 단단한 뼈대를 세웠다 그의 몸 바깥에서 느닷없이 아카시아꽃이 펑펑 지고, 군화자국이 지나간 자리마다 비늘 같이 꽃잎이 소복하게 쌓였다 바람 불어 허공이 저 혼자 우는 밤, 그는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뻣뻣해졌다
스물다섯 해, 맷집 하나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사는 북어가 있다 상한 지느러미 곧추세워 풍향계처럼 헤엄치려 하는데 아무도 그에게 길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우리 큰오빠……
떠나야 한다, 떠나야 한다 입술을 달싹이는데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날아다니는 꽁치
접시 위에 잘 구워진 채 퍼덕거린다 물때가 채 가시지 않은 맑은 눈을 또랑또랑 뜨고 꽁치는 지금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다 꽁치가 다시 날아가지 못하도록 젓가락들이 날렵하게 접시 주변을 들락거린다 그러다 보니 꽁치의 살과 살 사이 흰 머리카락 같은 가시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참 성가시게 달라붙어 있다 용케도 힘을 나란히 모으면서 촘촘히 박음질한 무명 천 조각처럼 가시는 끄떡없다 이 가시는 바다에서 꽁치의 몸을 찌르던 바늘이었다 바다를 벗어나고 싶은 꽁치가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물을 때마다 가시는 단단해졌다 가시 때문에 아파서 푸른 물결을 뚫어야 했다 가시에 찔리지 않으려고 도망치다 보니 꽁치는 길쭉해졌다 그러다가 꽁치의 몸에 청회색 바다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길게 들어와 박히게 되었다 젓가락들이 바다를 뜯어먹게 놔두고
지금 꽁치는 다시 날아가려고 기우뚱 몸을 한번 뒤집고 있다
반대쪽 살이 통통하다
심사평 - 섬세한 관찰력이 돋보인 수작
예심을 거친 17 사람의 시가 우리에게 넘겨졌다. 한 사람이 대략 3-5 편씩, 더러는 10여 편이나 20 편 가까이 응모한 이도 있었다. 한 사람이 열 편도 넘게 응모하는 것은 응모하는 이에게 아무래도 손해가 될 것 같았다. 그 중에 좋지 않은 게 섞여서 그 사람의 다른 시들도 도맷금으로 넘어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 단위가 아니라 넘겨받은 시 한 편 한 편을 독립시켜 읽어보고자 했다. 오늘이 동짓날, 일 년 중 낮이 가장 짧은 날이라고는 해도, 오후 2시부터 심사를 시작했으니 시간은 우리에게 녹녹한 편이었다.
예선을 거친 작품들이어선지 시들은 그러나 모두 녹녹치 않았다. 선 밖으로 일단 밀어놓는 작품들이 쌓일 때마다, 하얀 실에 검정물이 드는 것을 보고 한없이 울었더라는 墨子 생각이 나곤 했다. 노란 색 파란 색 빨간 색 그 어느 색깔로도 다시는 물들일 수 없는 그런 절망적인 검정색이 아니기를 빌면서 우리는 자꾸만 선 밖으로 작품을 밀어냈다. 한 편만 뽑아야 한다는 건 얼마나 야속한 선택인가.
「얼룩동사리」, 「어머니에게 ‘잊혀진다’는 말은」, 「날아다니는 꽁치」,「북어」등 마지막 4 편이 그렇게 우리의 선 안에 남았다. 선 밖으로 작품을 밀어낼 때마다 우리는 작품의 흠결들을 주로 화제로 삼곤 했는데 이제부터는 작품의 좋은 데를 서로 들춰보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한 곳으로 한 곳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얼룩동사리」는 정확한 관찰과 참담한 부성애를 집요하게 부각시키는 전개 솜씨가 돋보였지만, 마지막 부분의 자살한 사람과 얼룩동사리와의 대비가 시적 긴장을 결정적으로 상쇄시킴으로써 시 전체가 사람이 미물만도 못한 거 아니냐 하는 일반론에 함몰되고 만 것 같다.
「어머니에게 ‘잊혀진다’는 말은」이라는 작품에 대해서 우리는 가장 길게 의견을 나누었다. ‘잊혀지는 것’과 ‘잘 삭아서 숙성되는 것’을 일원적으로 파악하는 시적 착상이 무엇보다 돋보이는 작품이었지만 땜질 흔적이 드러나 보이는 구조상의 문제점과 숙성이 덜 된 시어들이 끝내 우리들의 맘에 걸렸다.
「날아다니는 꽁치」와 「북어」는 둘 다 기명숙씨의 작품이었다. 데생이 정확한 화가가 좋은 그림을 오래 그릴 수 있다는 말을 새삼 떠올리게 할 만큼 두 작품 다 섬세한 관찰력이 우선 돋보였다. 「날아가는 꽁치」의 시적 긴장이 유지되는 상상 또한 그런 섬세함 때문에 더 신선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북어」는 북어라는 媒材를 통하여 시대의 그늘과 그 아픔이 우리들의 삶 속에 어떻게 얼룩져 있는가를 가시화하고 있어서 특히 눈길을 끈다.
선 밖에 빚더미처럼 쌓인 작품들이 내내 맘에 걸렸지만 우리는 이견 없이 이 두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고 신문사를 나섰다. 일 년 중 낮이 가장 짧은 날 뽑았지만, 가장 좋은 작품이 가장 긴 밤과 큰 축복을 함께 누렸으면 좋겠다. 팥죽도 못 얻어먹은 동짓날 짧은 해가 무슨 미련이 남아 있는 듯 녹다 만 눈길 위에 머뭇머뭇 기울고 있었다. (이운룡. 정 양)
당선 소감
"미숙한 출발 치열하게 정진할 터"
터널 속을 통과할 때 잠시 겪는 적막감이 줄곧 나를 괴롭혔다. 발길에 채이는 것은 온통 고개숙인 것 투성이고 문득 내가 서있는 곳이 어딘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럴 때마다 일기장 귀퉁이에다 주절거리기도 하고 수신인이 없는 엽서에 한없이 깊고 슬픈 내 사랑을 꾹꾹 눌러 썼다. 삶의 비의가 날카롭게 나를 스쳐가고 문학을 향한 그리움이 세월의 톱니바퀴 속에서 자잘하게 부서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두리뭉실하게 살아버리자, 하며 나를 달래고 있을 때, 기적과 같은 당선소식이 내게로 왔다.
과문한 문장, 부끄럽고 송구스러울 뿐인데 시인으로서 명찰을 달아주신 전북일보와 두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우석대 문창과 안도현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교수님들을 만난 건 내게 행운이었다. 그분들의 존재가 너무 커서 혹 뒤뚱거리다 그림자라도 밟을까 늘 조심스러웠다. 우석대 문창과 꼬맹이들아! 정말 고맙다. 문학캠프 담임선생님, 윤석정 선생님, 두 분의 열정이 무지하고 소심한 내게 불을 지폈습니다. 그 고마움을 오랫동안 잊지 못 할 것 같고, 무엇보다 나를 믿고 지켜봐 준 사랑하는 남편과 내 아이들, 사랑하는 아버지, <북어>의 모델이 된 오빠, 멋진 기행숙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어쩌면 하늘나라에서 시인의 모습으로 다시 살고 계실 어머니! 당신이 내 몸에 남겨놓은 풍류객의 피가 결국 무대 위로 나를 세우는군요. 친구 황미숙, 그 외에 나를 아껴주는 많은 친구들과도 이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
무턱대고 달아오르는 문학에 대한 열정만으로 시작한, 미숙한 출발이지만 앞으로 정진하겠습니다. 치.열.하.게.
약력
전남 목포 출생
한양대학교 졸업
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 재학 중
거미집
- 김두안 / 한국일보
그는 목수다 그가 먹줄을 튕기면 허공에 집이 생겨난다 그는 잠자리가 지나쳐 간 붉은 흔적들을 살핀다 가을 비린내를 코끝에 저울질 해본다 그는 간간히 부는 동남쪽 토막바람이 불안하다
그는 혹시 내릴 빗방울의 크기와 각도를 계산해놓는다 새털구름의 무게도 유심히 관찰한다 그가 허공을 걷기 시작한다 누군가 떠난 허름한 집을 걷어내고 있다 버려진 날개와 하루살이떼 돌돌 말아 던져버린다
그는 솔잎에 못을 박고 몇 가닥의 새 길을 놓는다 그는 가늘고 부드러운 발톱으로 허공에 밑그림을 그려넣는다 무늬 같은 집은 비바람에도 펄럭여야 한다 파닥거리는 가위질에도 질기게 버텨내야 한다 하루 끼니가 걸린 문제다
그는 신중히 가장자리부터 시계방향으로 길을 엮고 있다 앞발로 허공을 자르고 뒷발로 길 하나 튕겨 붙인다 끈적한 길들은 벌레의 떨림까지 중앙 로터리에 전달할 것이다 그가 완성된 집 한 채 흔들어본다 바람이 두부처럼 잘려 나가고 거미집이 숨을 쉰다
입가에 물집처럼
달이 뜬다
해도 지기 전에 뜬다
나는 어둠이 보고 싶어
내 어두움도 보일 것 같아서
부두에 앉아 있는데
달이 활짝 뜬다
달빛은 심장을 욱신거리게 하고
희번득 희번득 부두에 달라붙고 있다
아 벌리다 찢어진 입가에 물집처럼
달빛은 진물로 번지고 있다
달은 어둠을 뻘밭에 번들번들 처바르고 있다
저 달은 환하고도
아찔한 내 안에 근심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초병에게 쫓겨가는
통제구역인 것 같아서
나는 캄캄한 나를
어떻게든 더 견뎌 보기로 한다
심사위원들이 골라 온 작품은 모두 11편이었다.
응모된 전체 작품 수를 고려하면 뜻밖에도 너무 적은 양이었다. 그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무엇보다 한국일보 신춘문예의 시 부문 심사절차가 지닌 독특성이 고려되어야 할 듯하다. 즉 예심위원이 본심을 겸하는 만큼 아예 예심 단계에서부터 본심에 임하는 각오로 작품을 선별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다. 어쨌든 11편을 두고 예심을 치러 아쉽지만 6편을 탈락시켰다.
이여명의 ‘돌을 쪼다’정철웅의 ‘철거민’이유훈의 ‘저수지에서 경전을 읽다’조인호의 ‘알라딘과 코카콜라의 요정’이연희의 ‘장독하나 묻어두고’김두루의 ‘얼룩말’이 그 작품들이다.
본심에 오른 작품 가운데 박희진의 ‘햇쑥’은 인고의 계절을 딛고 선 초봄의 여린 햇살처럼 따스하고도 빛나는 서정성이 돋보였으나 작품을 구조적으로 맵시 있게 갈무리하는 솜씨가 다소 서툴러 보였고, 또 소품에 그치고 만 것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정지현의 ‘직선의 방정식의 일반형’은 곧고도 날렵한 음조를 지닌 의욕적인 목소리와 능란한 은유의 구사가 매력적이었지만, 아직은 저 수사가 소리의 의욕을 충분히 감당하지 못한 듯했다.
작품의 제목을 정하는 데에도 보다 오랜 고민과 세밀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드린다. 배호남의 ‘고래꿈’은 구조적으로 매우 안정된 작품이어서 오랜 습작과 훈련의 세월을 읽게 만들었다. 그 점은 함께 출품된 ‘사군자의 꿈’ 같은 시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단 한 편만을 뽑을 수밖에 없는 심사위원들의 처지에서는 그 결정적인 무엇인가가 부족해보였다.
당선작과 마지막까지 경합한 작품은 오선희의 ‘꽁치’로서, 구조적 완결성에 있어서 발군의 솜씨를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실직 가장의 죽음과 구운 꽁치의 이미지를 절묘하게 결합하여 삶의 엄숙함과 핍진함을 형상화한 이 작품이 당선작이 되지 못한 데에는 그러므로 순전히 운명의 여신의 장난이 작용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실망하지 말고 계속 정진하시길 각별히 당부 드린다.
당선작인 김두안의 ‘거미집’은 어떠한 과장된 수사나 현란한 말재간도 사양한 채, 차라리 어눌할 정도로 느껴지는 작고도 여린 목소리로 이 삶과 존재의 미세한 결을 한 땀 한 땀 정직하게 발음해내는 섬세한 내면 감각이 단연 돋보였다. 세상의 말들이 제 가치를 잃어가고 있는 시대에 시의 언어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다시금 일깨워주는 기회가 되었다.
함께 제출된 ‘입가에 물집처럼’도 저 우직할 정도의 정직성을 높게 사 아울러 당선작으로 뽑는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낙선자에게는 위로를 드린다.
심사위원= 김기택, 황인숙, 김진수
詩부문 당선소감
좁고 판판한 들길이 절벽 같아
늦은 저녁 전화 한 통이 걸려오고 머리 속에 달 하나 뜬다
뻘밭에 김 말뚝을 다 세우고 아버지와 나는 배를 밀어낸다 갯벌에 종아리를 박고 등으로 민다 섬 사이에 닻을 내린다 깍두기 국물에 밥을 말아먹고 낚시줄을 던진다 환한 수면이 잔잔히 밀려오기 시작한다 달 속에 수수깡찌가 보인다 낚싯대가 휘어진다 배가 출렁거리고 달빛이 끈길 것 같이 팽팽하다 아버지의 가시등이 휘어오른다 달이 뽑힌다 팔뚝만한 농어가 꿈벅꿈벅 아가미를 벌리고 허공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고향 섬 임자도를 떠나온 지 오래 되었습니다. 습관처럼 김포 들녘을 걷습니다. 별똥이 논둑으로 사라지고 군데군데 남아있는 눈이 은하수처럼 반짝입니다. 얼어붙은 논바닥에서 기러기 한 무리 소리없이 날아오르고 있습니다. 겨드랑이에 바람이 스밉니다. 나는 좁고 판판한 들길이 절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절벽을 기어오르는 희미한 달그림자를 봅니다. 나는 어딘가에 내 그림자 하나 버리러 갑니다. 아버지와 눈빛도 없이 살아가는 어머니 얼굴이 보입니다. 저에게 힘든 길을 안겨주신 심사위원 선생님, 그리고 한국일보에 깊은 감사 드립니다. 김포 지인들에게도 오래 고개 숙입니다.
▦ 김두안(金斗安) 1965년2월 전남 신안군 임자도 출생. 임자중- 목포 영흥고 졸.
신춘문예 詩 부문 당선 김두안 인터뷰
"사람의 삶, 그 사이에 있고파"
전남 신안군 임자면 임자도(荏子島).
섬 소년은 문둥이가 산다던 배미골 너머 바다와 나란히 뻗은 20리 산길을 달려 마방촌 큰 아버지댁에 심부름을 다니곤 했다. 늦봄이면 외진 해변마다 피어나던 찔레꽃무리, 그 그늘에 앉아 바라보던 바다를 그는 기억한다고 했다. 5학년 때 그의 어린 동생이 숨진다. 뭍의 병원에서 석 달을 버티다 식어버린 동생을 포대기에 싸 업고 배에서 내린 엄마를 따라 걷던 조금사리의 갯벌둑…, 하얀 간(흙의 소금기)에 반사되던 그 날의 노을과, 엄마의 병원 냄새를 그는 기억한다고 했다.
20대의 그는 고향의 김 양식장과 염전을 등지고 상경해서는 공장 일을 했고, 운 좋게 장가를 들었고, 잠시 낙향했다가 다시 올라와 경기 김포에 눌러앉는다. “섬이 싫어 찾아온 도시지만 이 곳도 섬과 다를 바 없더군요. 김포는 그래도 바다와 들판이 있어 좋았어요.”
빈 들녘의 허전함과 고요가 좋다는 그는 그 날 이래 지금껏, 한 해 최다 여섯 켤레의 구두를 작살낸 보험맨으로 살아왔다. 5년여 전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것도 그 박탈감과 허전함을 견디기 위해서라고 했다.
“김포시가 연 ‘시민강좌’에서 함민복 시인을 만났어요. 그가 시인이라는 것도 그 때 처음 알았죠.” 배워서 된 시인이 아니라, 겪어서 된 시인인 그는 그래서 유년의 바다와 염전, 김포 공단을 떠돌 때에도 이미 시인이었을 것이다. “유년의 추억과 가족, 자연, 길에서 만난 사람들…, 그들의 삶을 잇는 시간과 공간 속의 길처럼 늘 그 사이에 있고 싶습니다.”
그런 그의 당선 소식에, 한 번 미치면 끝장을 보려 드는 그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의 아내는, “갑갑하다”고 했다고 한다.
개기월식
- 곽은영 / 동아일보
밤의 문이 열렸어요 이 세계를 견디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는 800Cal 가게 문을 열고 누가 왔어요 저녁을 먹다간 입가 훔치며 정육점 여자는 일어섭니다 반쯤 닫힌 문틈으로 둥근 밥상 가장자리가 보여요 오늘은 개기월식이 있겠습니다 어린 딸 리모컨을 눌러요 채널을 바꿔요
여자는 손님에게 웃어보이지요 붉게 물든 장갑을 끼고 비닐장갑을 또 끼고 차가운 살덩어리 하나 척 베어서 저울에 올려요 200g 중력이 달랑 하늘에서는 쓱쓱 사라지는 하얀 달조각 여자는 능숙하게 고기를 썰어요
엄마 나 쉬 마려 칭얼대는 딸 탁탁탁 도마에 칼을 부딪치며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해요 마지막 한 조각까지 쓸어모아 검은 비닐에 담아 들려 보내요 달랑 떠 있던 마지막 달조각이 사라졌어요
달이 밟고 가는 모든 길에 검은 비단을 깔고 바람은 휙휙 채찍질 구름마저 쫓아버렸어요 이제 무엇을 바치오리까 보셔요 은빛 가면 벗고 강림하신 핏빛 달님 여자는 장갑을 벗고 선지 한그릇 뚝 떠내요 스테인리스 밥그릇 안에 오늘은 핏덩어리 달이 잠겨요
36.5 365일
달님의 체온은 몇 도인가요
엄마 나 정말 쉬 마려 발 동동 구르는 딸 여자는 계집애 팔 잡고 한 볼기 때리고 바지를 까내리고 엄마 한 번 쳐다보고 제 오줌줄기 한 번 쳐다보고 바람이 보듬어가는 어린 것의 지린내 윤기나는 밤의 비단에 싸서 달님 앞에 내려놓아요 하얗고 새초롬한 아가씨 얼굴로 돌아오는 달
동그란 밥상에 둘러앉아 여자와 아이가 다시 밥을 먹어요 리모콘을 눌러 채널을 돌려요 달은 개기월식 궤도를 완전히 벗어났어요 그녀 힐끔, 가게 문을 쳐다보아요
[2006 신춘문예]시부문 심사평
예심을 통하여 본심에 합류한 시들은 산문성이 농후하였다. 시는 다른 장르의 특징을 시적인 것으로 포용하여 그 장르적 영토를 변용시켜 온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시 쓰기 방법은 시를 다른 장르, 산문에 복속시켜 버리게 되는 위험성 또한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본심 작품들 중에서 세 사람의 작품을 최종적으로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
이운성의 ‘황금나무 밑을 간다’ 외 4편의 시는 대상을 집요하게 관찰하는 시각, 그에 따른 해석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시적인 표현보다는 대상을 설명적으로 묘사하거나 산문적 전개가 거슬렸다.
주영중의 ‘시조새’ 외 6편의 시는 응축된 이미지들의 전개로 하나의 국면을 조성하는 형상화 능력이 뛰어났다. 특히, 응모된 여타의 시들에서 읽을 수 없었던 낯설고 신선한 표상을 시적으로 구현해 내고 있다. 그러나 시적 언술이 전개되는 중에 이미지가 비약하거나 소홀히 처리되고만 시들이 지적되었다.
곽은영의 ‘양철인형’ 외 5편의 시들은 치밀한 표현, 선명한 이미지, 그 이미지들을 능숙하게 서사적 전개 속에 배치하는 형상화 능력들이 눈에 띄었다.
아울러 응모된 작품들 모두가 완성도가 높고, 수준이 골랐다. 우리는 응모된 모든 시들 중에서 ‘개기월식’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 쉽게 합의하였다.
‘개기월식’은 정육점 여자, 살코기, 월식 중인 달과 아이의 요의와 배설이 중첩되거나 흩어지면서 먹고, 먹히며, 배설하는 풍경 속에 숨은, 생의 비의 하나를 그려내고 있다.
최승호 시인 김혜순 시인
(예심: 반칠환 권혁웅)
[2006 신춘문예]시부문 ‘개기월식’ 당선소감
일곱 명의 왕자가 있었지요 마녀가 그들을 백조로 만들어버렸는데
차가운 밤바람 불어요 생각들은 얇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웅크리고 돌아눕네요
집집마다 꿈 한 자락 배달 나온 달이 가볍게 노크하는데 고양이가 꼬리에 한 가닥 감아말고 저 너머로 사뿐 사라지네요
저 너머로 쫓겨난 왕자들에게는 어린 여동생이 있었어요 어린 공주는 쐐기풀로 실을 자았는데요
묘지에서 자란 쐐기풀은 침묵의 푸른 옷이 되어 차곡차곡 어두운 바구니에 담깁니다
빈 밤거리 거역할 수 없는 붉은 문장 같은 정지등이 가득해요
규칙적으로 찾아오는 금지와 가능의 경계가 거북하네요
마녀에게 씌웠던 모자만큼이나 큰 낙엽들 몇 장이 굴러와요
어린 공주는 화형장으로 끌려갔지요 일곱 벌의 옷을 미처 완성하지 못했는데 요란한 머플러 소리를 내며 오토바이가 지나가요 덜컹이는 수레에 실려가는 공주를 보세요
몇몇이 공주의 손에서 남은 쐐기풀을 앗아갔어요 대신 욕설과 침을 던져 주었죠
12시 시곗바늘처럼 화형목은 서 있고 시간은 이제 자정을 지나려 합니다 어린 공주 푸른 옷 높이 던졌고 일곱 마리 백조는 날개소리로 그녀의 침묵을 받아들였어요
흰 깃털 목이 메이도록 사방에서 쏟아져 내리며 쓰는 이야기
딸들이 더 어리신 따님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한쪽 날개 그대로 간직한 왕자가 하늘을 나는 대신 날개팔로 공주를 안아주었어요
바람이 새로워요
신호가 바뀌었네요 고마운 이름을 휘파람처럼 불러요
곽은영
불가리아 여인
- 이윤설 / 세계일보
매일 창 여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지만,
매일 창 여는 순간 일정하게 지나가는
이국의 여인.
자줏빛 붉은 함박꽃 모직코트를 여며 입은 그 몸은 뚱뚱하나
검게 불 타는 흑발,
영롱한 흑요석의 눈동자
불가리아 여인, 이라 칭하기로 하자.
가본 적 없는데도 그 여인 볼 때마다
벽력처럼 외쳐지는
불가리아!
정염의 혀가 이글거리는
태양과 열정이
조합된
발음!
가혹하게 태질하는 칼바람을
움츠려 깊이 찔러넣은
함박 핀 꽃은
불길하게도 피붉어
하염없이 걷고 걸어도 불가리아 여인
하염없이 걷고 걸어도 내 창 앞 그 여인
어쩌다 여기에 와 있는 거죠,
겹쳐진 창문으로 지나가는 그 여인
부풀어 터질 듯 꽃핀 몸, 타오르는
흑요석 눈빛은 생각하겠지,
저 이방의 여인 코리아의 여인
창 속의 갇힌 듯 노랗게 뜬 얼굴 부르쥔 손
왜 내가 지나가는 이 시간마다 일정하게 창을 여는 걸까.
어떤 이끌림이
그녀와 나의 눈동자 속 흑점에 맞추어지고
우리 서로 의아해하며 바라본다
왜 하필 나를 선택한 걸까.
하고많은 사람 중에
불가리아 여인
코리아 여인
우연히 다시 만난다면 스치듯 안녕, 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불길하게도 매일 일정하게.
"삶과 사물을 꿰뚫어보는 빛나는 예지"
심사평 유종호·신경림
비슷비슷한 내용, 비슷비슷한 이미지들의 시가 많은 것은 같은 세대가 같은 정서, 같은 생각에서 살고 있는 데 연유하는 바도 없지 않겠으나, 한편 시를 잘못 공부하고 있어 그런 것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억지로 만들어 잘 읽히지 않는 시도 많았지만, 삶과 사물을 꿰뚫어 보는 빛나는 시가 예년에 비해 더 많았다.
그 중에서도 이윤설의 시들이 단연 빛난다. 우선 세상을 보는 눈이 남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가령 ‘불가리아 여인’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창을 열고 같은 시간에 지나가는 이국 여인을 본다는 것이 시의 내용인데, 그를 불가리아 여인으로 상정한다든가 또 그의 위치에서 창 안의 나를 바라본다든가 하는 설정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못된다. 시가 전체적으로 지극히 발랄하고 싱싱하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또 ‘성난 여자’에서는 활기와 거침없는 서술이 독특한 리듬을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도 시가 재미가 있고 속도감 있게 읽힌다는 점도 미덕이다.
재미있고 잘 읽힌다는 점에서는 황현진의 시도 뒤지지 않는다. ‘당신과의 드라이브’나 ‘당신에게 키스를’ 같은 시는 시라면 으레 심각하고 어렵다는 개념을 바꿔 놓는다. 한데 어딘가 한구석 덜 익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 흠이다.
김종분의 시들은 조금 구투라는 느낌을 준다. ‘나는 불량 농민이다’는 메시지도 분명하고 잘 읽히지만, ‘나는 구술 면접을 잘 볼 자신이 없다’ 같은 시는 지루하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이만큼 형상화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우리 문학에서 전반적으로 사회적 상상력이 퇴색되어가고 있는 현실에 있어 그의 시들은 매우 값진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마지막까지 남은 세 사람의 작품 중에서 이윤설의 ‘불가리아 여인’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선자들은 쉽게 합의했다
"오늘의 기적에서 신의 은유를 느낀다"…당선소감 이윤설
사람은 누구에게나 은유가 있다.
오래도록 어두운 창을 바라보는 날이었어도 잘 지냈다고 미소지을 때, 그 미소에는 그의 혼자인 촛불이 흔들리던 날들과 등을 기대고 허공에 그리던 얼굴 같은 것들이 모두 둥글게 감싸인 채 소유되는 것이다. 돌아서는 그의 어깨 뒤로 숲의 잎들이 가을을 받아적기 시작할 때, 그는 그 모든 날들을 자신의 힘겨운 육체의 일부분으로 가지고 호젓한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사람이 모두 시인인 때는 제 뜨거운 아픔을 손에 꽉 쥐고도 놓지 않고 지니고 갈 때이다. 그것이 또 하나의 자신이 될 때까지 버리지 못하고 울 때이다. 사람의 은유는 신에게서 배워 사람만이 읽을 수 있도록 주어진 것, 그래서 그는 신의 은유로써 살아가고 신의 품에서 죽어가는 것이다. 신이 그를 버리지 못하고 울 때이다.
오늘 이 평범한 기적에서 나는 신의 은유를 느낀다.
나의 모든 아름다운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감태준·이승하 선생님과 문창과 선생님들, 강형철 선생님, 오정국 선배님, 차창룡 선배님 그리고 멀리서 마음의 손 잡아주시는 철학과 선생님들과 선후배들, 토지문화관의 봄에서 여름까지 뜨거운 예술가의 자세를 보여주셨던 고마운 선생님들, 나의 벗 기연. 그리고 엄마 아빠 가족들, 내가 그다지도 귀애하는 꽃과 새와 별의 지옥인 너에게. 기회를 주신 신경림 유종호 선생님께는 말로 다하지 못하겠습니다.
▲1969년 경기도 이천 출생
▲명지대 철학과 졸업,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수료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
▲2005년 국립극장 신작희곡페스티벌 당선
▲2005년 거창국제연극제 희곡 공모 대상
나무 맛있게 먹는 풀코스법
- 이윤설 / 조선일보
비린 게 무지하게 먹고팠을 뿐이어요
슬펐거든요. 울면서 마른 나뭇잎 따 먹었죠, 전어튀김처럼 파삭 부서졌죠.
사실 나무를 통째 먹기엔 제 입 턱없이 조그마했지만요
앉은 자리에서 나무 한 그루 깨끗이 아작냈죠.
멀리 뻗은 연한 가지는 똑똑 어금니로 끊어 먹고
잎사귀에 몸 말고 잠든 매미 껍질도 이빨 새에 으깨어졌죠.
뿌리째 씹는 순서 앞에서
새알이 터졌나? 머리 위에서 새들이 빙빙 돌면서 짹짹거렸어요
한 입에 넣기에 좀 곤란했지만요
닭다리를 생각하면 돼요. 양손에 쥐고 좌-악 찢는 거죠.
뿌리라는 것들은 닭발같아서 뼈째 씹어야해요. 오도독 오도독 물렁뼈처럼
씹을 수록 맛이 나죠. 전 단지 살아있는 세계로 들어가고팠을 뿐이었어요.
나무 한 그루 다 먹을 줄, 미처 몰랐다구요.
당신은 떠났고 울면서 나무를 씹어 삼키었죠.
섬세한 잎맥만 남기고 갉작이는 애벌레처럼
바람을 햇빛을 흙의 습윤을 잘 발라 먹었어요. 나무의 살집은
아주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었죠. 푸른 생선처럼 날 것의 비린 나무 냄새.
살아있는 활어의 저 노호하는 나무 비늘들.
두 손에 흠뻑 적신 나무즙으로 저는 여름내 우는 매미의 눈이 되었어요.
슬프면 비린 게 먹고 싶어져요,
아이 살처럼 몰캉한 나무 뜯어먹으러 저 숲으로 가요.
[2006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심사평
“활달한 상상력, 시어를 부리는 탁월한 능력”
언어를 통하여 삶을 투시하는 힘, 절제된 표현, 무엇보다 참신한 패기를 기대하며 심사에 임했다. 박민규의 ‘낙산’, 신미나의 ‘부레옥잠’, 한인숙의 ‘마이산’, 이윤설의 ‘나무 맛있게 먹는 풀코스법’, 남궁선의 ‘폭설’, 김종훈의 ‘국소 마취’는 상당한 시적 성취를 이룩하고 있는 작품들이었다. 그 중 박민규와 이윤설의 작품을 최종 심사 대상으로 올렸다.
박민규의 ‘낙산’은 시어를 다루는 솜씨와 객관적 서술력이 돋보였지만 신인의 패기보다는 모법답안이 주는 안정성이 넘치는 작품이었다. 이윤설의 ‘나무 맛있게 먹는 풀코스법’은 활달한 상상력과 살아있는 시어를 부리는 능력이 탁월했다. 섬세한 묘사로 주제를 구체적으로 서술해 감으로써 한편의 시로서 스스로를 지탱시키는 힘을 느끼게 했다.
이 작품과 함께 보내온 다른 응모작들도 두루 수준을 이루고 있어 그동안의 습작의 흔적도 알 수 있었다. 부드럽고 미화된 언어보다 정확하고 정직한 언어가 감동으로 직결된다. 언어 사용자로서 최고의 축복을 누리는 한 시인의 탄생을 기다리는 분들께 기쁜 소식이 되기를 바라며, 오래오래 깊은 향기를 터뜨리는 시인으로 남기를 기원한다.
시인·문정희·황지우
[2006 신춘문예] 시 당선작 - 당선소감
“느린 우주의 걸음으로 당신을 다시 만났다”
꿈같고 꿈에서 운 아침같다
▲한때 당신과 나, 우리 둘이는 짝짝이 신발처럼 어색했지만 잘도 어울려 다녔다.
▲내가 가장 착할 때 당신은 떠났고
왜냐고 묻지 못했다.
▲조금씩 해와 달의 각도를 맞추듯 그렇게
▲느린 우주의 걸음으로 걸어와 당신을 다시 만났다.
참 예쁜 당신
▲당신이 나를 알아볼 줄 나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그냥 안아줄 줄 나는 알고 있었다.
아무 말도 묻지 않겠다.
이 별에 오길 잘했다.
시가 시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신 시인들 - 감태준 이승하 선생님과 문창과선생님들, 강형철 선생님, 오정국 선배님, 차창룡 선배님 그리고 멀리서 마음의 손 잡아주시는 철학과 선생님들과 선후배들, 토지문화관의 봄에서 여름까지 뜨거운 예술가의 자세를 보여주셨던 고마운 선생님들, 나의 벗 기연. 그리고 엄마 아빠 가족들, 내가 그다지도 귀애하는 꽃과 새와 별의 지옥인 너에게. 시를 쓰며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문정희 황지우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윤설
1969년 경기도 이천 출생
명지대 철학과 졸업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수료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
우주물고기 - 미래과학그림展에서
- 강경보 / 대구매일신문
미래의 어느 때에는
우리 살아갈 집이 달 옆에 있을 것이다
먼 지구의 일터로부터 귀가하는 일이
오늘 출퇴근하는 일 만큼이나 고되고 느린 것이 아니라
그냥 눈 한 번 쓱 감았다 뜨면
어느 사이 나는 우주정원의 앞마당에서 깨금발을 딛고
고층 빌딩 높이의 테라스를 지나 침실로 들어갈 것이다
은하수가 냇물처럼 반짝이며 별 사이를 흐르고
어린 시절 앞강에서 물장구치며 놀던 기억으로
가끔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고도 싶을 것이다 누군가
명왕성 뒤에 숨어서 우주적 망원렌즈로
얼음처럼 투명한 내 몸을 투사하기도 할 것이다
내 꿈은 비록 지금보다 육분지 오의 무게를 덜어낸
달에서 노니는 것이지만 그것은 촘촘하게 엮인
지구의 기억을 한 편 매달고 사는 일이 될 것이다
별과 별 사이에 빛의 길이 나고
택시는 허공을 날며 손님들을 태우고
어느 영화에서였지, 흰 천 조각으로 여인의 가슴과 음모를
붕대처럼 감으면 그대로 일상의 옷이 되는
그때는 사랑의 말도 한 번의 눈빛이면 되고
이별도 백만 광년 먼 별장에서 보내는
순간의 텔레파시면 족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남아,
내 어항 속의 금붕어 한 마리가 어떻게
하늘을 날아 저 얼음별로 헤엄쳐 가는지
어느 날인가는 앞강에 낚시대를 드리우고 앉아
오래 당신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처럼
마음에서만 사는 아득한 것들은 또 어떻게
저 별의 시간을 건너가게 되는지
[심사평]
예년보다 우수한 작품이 많아 반가웠다. 예심을 거쳐 넘어온 44명의 작품 중 검토해서 남은 작품이 강은새의 ‘우주물고기’, 장진명의 ‘흑두루미 주점’, 조혜정의 ‘말을 굽다’, 장인자의 ‘발’, 박태순의 ‘쓸쓸한 퇴화’, 석지명의 ‘일인용 매트리스’, 이순화의 ‘풀꾹새’, 박소원의 ‘흰 종소리가 울린다’, 류진아의 ‘사내의 나라, 유토피아’, 임재정의 ‘기차는 미루나무 이파리를 자나네’, 백상웅의 ‘무림 책방’, 박지성의 ‘실연의 꽃이 피었습니다’, 김영숙의 ‘비평가 식당’, 황인숙의 ‘호랑나비 겨울’, 정미경의 ‘개를 위한 랩소디’, 강은미의 ‘아름다운 추락’, 이근창의 ‘구덩이’, 안정혜의 ‘외줄에 묶인 사나이’, 박혜점의 ‘선창포구’, 전향국의 ‘대설주의보’ 등이었다.
여기서 다시 논의해서 남은 작품이 ‘우주물고기’, ‘흑두루미 주점’, ‘말을 굽다’, ‘일인용 매트리스’, ‘발’, ‘호랑나비 겨울’이었다. ‘발’은 짜임새도 있고 무게가 있는 작품이었으나 같이 투고한 작품 ‘엇각’이 작년 수준에서 별로 진전이 없어 보여 제외시켰고 ‘호랑나비 겨울’도 같이 투고한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뒷받침되지 못해 제외시켰다.
‘말을 굽다’는 능란한 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었으나 ‘말’로 비롯되는 이미지 전개가 화덕으로 집약되는 상징성이 약해 보여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였고, ‘일인용 매트리스’는 현실성 있는 진한 이미지가 시선을 끌었으나 좀더 폭 넓은 상상력으로 구체화시켰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우주물고기’와 ‘흑두루미 주점’은 어느쪽 모두 버릴수 없는 작품이었다. 특히 장진명씨가 함께 투고한 작품 ‘육교’도 ‘흑두루미 주점’과 함께 수준을 이룬 작품이었으나 나머지 작품들이 고르지 못해 어쩔수 없이 투고한 다섯편의 작품이 모두 수준급인 ‘우주물고기’를 당선작으로 했다
‘우주물고기’는 우주적 소재를 시적 환타지로 이끌어가는 수사법이 새로운 맛을 준다는 의미에서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이 작품 자체만으로는 밀도가 여린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그의 ‘우포늪 통신’이나 ‘너도밤나무, 그대’같은 탄탄한 작품이 뒷받침 해주고 있어 당선작으로 하는데 의견이 없었다.
권기호(시인.경북대 명예교수) 정호승(시인)
[당선소감]
검둥오리사촌이라는 바닷새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참으로 별난 이름을 다 가지고 있구나 싶었다.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그것은 별난 이름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이름을 모처럼 갖고 있는 동물이 아닐까 라고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오랫동안 시를 습작하면서 깊은 좌절을 겪었다. 어느 날인가는 내가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어찌 어찌 그것을 붙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붙들고 안 놔주는 집착을 부리는 것은 아닐까 자학할 때도 있었다.
검둥오리도 아니고, 검둥오리가 아닌 것도 아닌 불편한 이름 하나 알처럼 품고서 수년간의 습관적 투고 여정을 거쳐왔다. 어느 중견 시인이 문예지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몇 년간의 신춘문예 투고에서 한 번도 최종심에 올라가 본 일이 없어 별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덜컥 당선이라는 통지를 받았다는.
그런 일도 있을까 싶었는데 막상 지금 당해보니 막막함을 넘어선 먹먹함이 엄습해 온다. 아, 지금까지는 이랬는데, 앞으로는 과연 얼마나 더 해야 이 큰 상의 이름값을 하는 걸까 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먹먹함을 오랜 세월동안 막막하게 견뎌온 힘으로 헤쳐 나가려 한다.
부족한 저를 꼭 마지막 날에 구원하듯 손 내밀어 주신 두 분 심사위원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가르침을 주신 이승훈,이화은 선생님 고맙습니다. 시로 인하여 고민할 때마다 늘 옆에 있어 주신 이대의,차주일,문정영 시인님들 또한 고맙습니다.
시에 대한 갈급과 애증(愛憎)이 생길 때마다 기꺼이 제게 시간을 할애해 주던 시맥,풀밭,아도 그리고 시산맥 님들 또한 제 시의 밑천임을 감히 고백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어머니,아내 숙,규민·태인과 친지들에게 오래 묵혔던 말을 꺼내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집
- 박순서 / 동양일보
언 강을 떠나는 새는
내 눈 속으로 들어와 집을 짓는다
나는 차마 관 뚜껑을 닫지 못한다
하루살이처럼 세상 휘저으며 여태껏 살아
나는 누구의 보금자리가 되었는가
언 강에도 새들의 집이 있고
꽃이 진 마른 대궁에도
봄볕의 집은 남아있다
내 눈 속의 새들아
이제 돌아갈 길일랑 잊어버려,
마지막 웅덩이에 고인 빗물처럼
흐르다 흐르다 내 몸에 칭칭 감기어
안온한 보금자리에 머무름 같이
너 이제 날개를 묻으라
능선을 넘으면 내 무덤이 있다
낯선 바라마에 끌려가다
부리로도 울지 못한 네 눈물이 있다
저기, 보아라
저승 가는 길목에 굶주린 까마귀가
까르륵 까르륵
빈 솥에 밥을 푸고 있지 않느냐
[심사평]
1차 예선을 거쳐 심사위원에게 넘겨진 작품은 49명의 285편이었다. 3일 동안 꼬박 밤을 지새면서 읽었다. 어느 해 보다도 정성들인 시편들의 높은 수준에 즐거웠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다섯 편이었다. ‘은행나무에 걸린 곡예사’(부산 박미경)는 소재가 이색적이고 신선했지만 어딘지 설득력이 조금 부족한 것 같았다. 시어 선택이 너무 경직된 탓이 아니었을까. ‘아궁이’(충북 박태순)는 너무 물기 없는 시적 분위기가 당초의 의도를 다 살리지 못한 것 같았고, ‘호박 속의 모기’(경북 권영하)는 주제 설정도 좋았고 잘 읽혔지만 구성이 약간 산만스러웠다. 집중력이 조금 부족했다. ‘풍장’(광주 정철웅)도 좋았지만 ‘수만리에서’가 더 잘 읽히고 애정이 갔다. 하지만 다 읽고 나면 어딘가 허전한 느낌이 남은 작품이었다. 기승전결중에서 결이 약했던 것은 아닐까. 마지막 ‘집’(서울 박순서)은 그 끈적끈적한 시어들이 끝까지 놓지 않게 했다. 전체적인 시의 구도도 짜임새가 있었다. 그릇, 형식에 알맞는 내용이 잘 맞아 들어간 것 같다. ‘수만리에서’와 두 작품을 놓고 겨루다가 좀 더 따뜻하고 부드러워 설득력이 앞서는 ‘집’을 당선작으로 민다. 다른 작품과 달리 절제된 시어로 인하여 이미지가 투명해서 전달력이 뛰어나다. 금년도 응모작품들은 모두 상당기간의 수련을 거친 분들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아직도 표현을 위하여 너무 많은 시어들을 낭비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그것은 주제가 잘 익고 절실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너무 일찍 손댄 것일 수도 있다.
너무 욕심을 많이 부리다 보니 말이 앞서고 많아졌다. 어느 한곳에 카메라의 초점을 잘 맞춰야만 하는데 이런저런 사물들을 사용하다보니 길어지고 이미지 또한 흐려지고 말았다. 설득력이 떨어지고 나 홀로의 시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독자들에게 다가가는 감동 또한 약해졌다. 시는 장시를 제외하고는 가급적 짧아야만 이미지의 투명성이 돋보이고 리듬이 되 살아난다. 그래야만 호소력도 강해진다. 주제에 따른 언어의 경제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최소한의 언어로 최대한의 이야기를 담는 것이 시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초부터 카메라의 위치를 잘 선택해야만 한다. 너무 많은 욕심을 부려서 많은 사물을 담으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집을 건축하는데 쓸데없이 많은 재료들을 낭비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오늘의 시는 눈보라치는 겨울밤의 연탄불처럼 따뜻했으면 좋겠다. 당선된 분께 박수를, 그리고 다른 분들에게는 위로를 보낸다. 공부하시다 보면 좋은 소식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박희선<시인>
[당선소감]
내 집은 내 안에 있다. 낯선 번호가 휴대전화기를 두드렸다. 첫눈에 알았다. 누가 나를 찾고 있다는 것을, 나는 괜히 먼저 흥분했다. 안녕하시냐는 인사를 두 번이나 건넸다.
“ 당선입니다! ” ‘내가 뭘 잘못 듣기라도 한 것은 아닌가?’ 외로운 날들아, 아픈 날들아,
바다가 차오르고 새들이 날아가도 나는 거기 그대로 돌아서지 않았다. 북풍이 아무런 말도 없이 다가와 나를 죄 많은 아이라며 후들겨 팰 때, 눈물샘을 나온 내 눈물이 그 짧은 볼을 못다 흐르고 볼 위에 살얼음으로 남았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훑어 내어야 나도 집을 지을 수 있는가. 잡으려 할수록 멀어지는 것은 아직도 내가 그림자 속에 있는 탓인가. 외로웠다. 그러나 별이 떠나간 새벽은 나만의 세상이다. 세상에 가진 것 없는 내게 밤마다 꿈은 풍요로웠다. 꿈을 꾸지 않게 해달라고 몇 날을 투덜거렸다. 그런 며칠 후, 흰 눈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눈을 밟으며 하얗게 피어오르는 어린 날의 나를 생각했다. 밤새 호롱불을 켜놓고 연필심지에 침을 발라가며 써놓은 원고지를 아버지가 몽땅 불 태워버렸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면 도대체 밥은 뭘로 먹고 살 거냐!’ 이제 아버지는 이 세상에 안 계시고, 나는 지금도 소년이다. 그때처럼. 부족한 저에게 너무나 큰상을 주심에 송구스럽다.
함께 응모한 모든 문학도들과 기쁨을 같이 나누고 싶다. 길은 여러 갈래로 나있어 흩어질 것 같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야 한다. 내 따스함으로 상대를 녹일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