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1969년 나는 중앙중학교를 졸업하고 동교진학을 하여 중앙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중학교 때에도 보이스카웃(소년단)을 한 나는 고등학교의 특활반 시간에 다시 보이스카웃을 하겠다고 하였고 그래서 중학교 때의 소년단생활에 이어 고등학교에서도 소년단을 하게 되었다.
우리 중앙소년단은 서울연맹소속으로 18대라 불리었는데, 최초로 소년단 운동을 한국에서 실시한 한국 소년단의 창시자가 관산 조철호 선생님이신데 이 선생님께서 당시 중앙고보의 체육선생님으로서 바로 중앙학교는 우리나라에서 소년단이 제일 처음 생겨나 구국독립운동에 앞장 설 젊은이들을 양성하는데 가장 먼저 앞장선 학교이기에 중학교 때 부터 우리 소년단원들은 선배로 부터 이러한 뿌리깊고 자랑스러운 전통을 잊지 않도록 부단한 교육과 훈련을 받아 대외적으로 열리는 잼보리, 캠보리, 야영대회, 하이킹대회에 참가할 때 마다 항상 1위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은 전통을 지켜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인식하에 소년단원이 되면 모두가 열심히 소년단활동을 해 왔다.
이러한 전통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모교의 후배들과의 끊어지지 않는 유대를 통해서 계속되어 왔는데 우리가 고 1에 진학하였을 때에도 모교를 졸업하면 유대가 끊어지는 다른 서클과는 달리 우리 소년단 선배들은 대학에 진학하여서도 모교를 방문하여 후배들에게 소년단원으로서의 기능과 문화적인 활동을 지도해 주곤 하였다.
우리 동기가 졸업깃수로 63회이니 우리 보다 4년 선배인 59회에는 임종택 선배가 계셨는데 바로 우리가 고 1 때 이미 졸업을 하신 이 임종택선배께서 동기생들과 함께 모교를 찾아 주시어 우리들과 함께 한국보이스카웃에서 처음으로 실시한 제 1회 연장대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준비를 위한 합숙훈련에서 부터 백마강에서 열린 대회까지 우리들과 함께 참석을 해 주시며 우리들을 이끌어 주신 것을 계기로 우리들은 소년단을 창시한 고 조철호선생님의 호인 관산을 찾아내 함께 "관산회"란 선배와 후배가 함께 모이는 회를 만들게 되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의 소년단 활동은 주로 조직에 적응하는 훈련과 하급생을 다스리는 리더쉽을 함양시키는 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는데 이는 스카웃이라는 군인이 아니면서도 전시에 최전방의 척후병으로서 군인이 되기에는 나이가 어린 청소년들도 훈련을 통하여 여러 기능을 익혀 위급한 상황에 대하여 훌륭히 대처를 할 수 있도록 하여 전시에도 한 몫을 하도록 했는데, 이것은 아무리 어려운 환경하에서도 Scout Sprit 를 익히고 또 이에 필요한 기능을 함께 훈련함으로서 어려운 환경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훈련받은 사람이 된다면 이것 보다 청소년기에 더 좋은 경험은 없을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스카웃 그 본연의 뜻이 잘 이어져 내려온 중앙소년단의 전통은 대내외적으로 유명하다. 특히, 중앙소년단원은 사회에 나가서도 조직에 잘 적응하며 사회에서 한 몫을 하는 일꾼으로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당시 고 1인 우리들을 리드해 나간 고 2 선배는 영조장에 임순필, 그리고 김병용, 최영묵, 양윤모, 박한익, 정용석, 강창석 등의 형들이었고, 고 3에는 김상조, 김용균, 권길헌, 이승훈, 허성삼, 진태훈 형들과 같은 형들이 있었다.
이 중 당시 영조장을 맡고 있던 62회 임순필형과 59회 임종택 선배, 그리고 63회 이윤우, 이동우, 정광현, 송창환, 최철기 등은 당시 선배로서 우리들의 존경을 받고 있던 임종택선배와 함께 "관산회"를 만들기로 하고 제 1회 관산회 소식지를 발간하였다. 이를 계기로 학교 밖에서 선배들과 후배들은 자연스럽게 만나 술잔도 기울이며 서로의 친목과 우정을 다지는 이야기를 하고 만나게 되었는데 바로 이것이 현재의 관산회로 발전되어 나오게 된 그 처음의 이야기다.
청소년기 학창시절의 인연은 졸업 후 계속되어 지기가 힘든 시절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관산회"란 이름하에 회를 결성해 놓으니 선배와 후배들은 졸업한 후에도 서로 끊김없이 만나게 되었고 이제 그 전통이 저 위로는 54회 선배로 부터 막 졸업한 95회에 이르기 까지 40년의 세대차를 극복한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간, 관산회란 이름으로 많은 모임이 있어왔고, 또 앞장서서 그 모임을 이끈 선후배들이 참 많이 있다. 그러나,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관산회의 리더로서 활동한 사람 보다는 남을 위해 봉사한다는 모두가 몸에 밴 보이스카웃 정신에 따라 자기를 희생하고 조직을 살리는 그런 입장에서 관산회를 이끌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어느 한 사람이 자신이 이런 저런 이유에서 누구를 만나게 되어 "관산회"가 다시 부활하게 되었느니 하는 이야기는 정말 어불성설이다.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관산회는 그 사람 아니면 벌써 없어져야 할 지도 모르고 또 선후배간의 관계가 그 정도의 유대관계였다면 지금은 더 유명무실해졌을 것이다. 중앙이라는 전통있는 좋은 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어느 한 사람이 나오라 해서 또 그 한 사람이 지키고 앉아 있다고 해서 그 모임에 나가겠는가...절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절대 그렇게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구국을 위해 소년단을 만든 창시자인 고 관산 조철호 선생님을 우리가 존경하고 그 유지를 받들 듯이 우리 선후배들은 "관산회"란 이름을 지어 당시 선배와 후배간의 끊임없는 유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뜻을 같이한 선후배들을 모아 지금의 관산회의 초석을 만든 59회 임종택 선배를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관산회"는 바로 누가 무어라 해도 59회 임종택선배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뿌리가 만들어 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35년이란 강산이 세 번 반 바뀔 긴 세월이 흐르면서 고교 졸업 후 어떤 깃수에서는 관산회를 통해 활발하게 선후배간의 유대에 동참을 하면서 지내오게 된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또 어떤 깃수에서는 참여가 저조하여 관산회가 유명무실하게 되어있던 시절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관산회를 처음으로 주도하여 만들어 놓으신 59회 임종택 선배가 엄연히 생존해 계시는 한 아무리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서 살아가는 관계로 모이지 못하던 관산회원들이더라도 "관산회"의 이름으로 다시 모이자면 모두가 모일 그런 마음의 자세들은 모두가 갖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더우기 그러한 계기가 인터넷의 발달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관산회"를 만든 59회 임종택 선배는 잠시 선후배간의 모임이 활발치 못한 시기에 다시 선후배간의 끊임없는 만남의 계기를 마련하게 하고자 온라인상에 관산회의 홈페이지를 만들어 놓을 것을 나에게 부탁하게 되었고, 이에 미력하나마 함께 "관산회"의 결성에 참여한 연이 있기에 62회 김병용형과 함께 관산회의 홈페이지를 MSN Site와 중앙교우회가 제공한 계우닷컴에 마련해 놓게 된 것이다. 그 후 3년여가 지난 오늘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54회로 부터 95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깃수들의 참여를 독려해 온 결과 이제 180 여명의 회원들이 모이는 회로 다시 발돋음하게 되었다.
온라인상의 홈페이지로서의 역할이 오프라인에서의 모임을 견인하고 또 오프라인에서의 활발한 만남이 온라인상의 홈페이지를 통해 알려지게 된 것을 계기로 관산회의 회장단, 특히 54회 왕기주, 58회 김영국 선배님의 탁월한 리더쉽과 이를 뒷받침 해 준 임원진들의 노력은 다시 관산회가 다른 어떤 모임 보다도 그 결속력이 강함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2004년을 보내면서 새해에는 더욱 단합된 관산회의 모습으로 더 많은 회원들이 오프라인의 모임에 직접 참여하거나 사정이 허락치 않다면 온라인에서라도 서로의 유대관계를 더욱 돈독히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관산회원 모두가 사회가 필요로 하는 훌륭한 인물로 각자 맡은 분야에서 더 발전해 나가게 될 것을 굳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