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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장 : 화해와 분리에 대한 권고
1. 사도의 수고와 기쁨 ( 6: 1 – 10 )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3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 1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 -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
사도들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고 간절한 마음과 진지한 마음으로 받아야 한다.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르군테스 데 카이'(*)는 문자적으로 '함께 일하는 자로서'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쉬네르군테스'는 현재 분사로서 '누구와 함께 일하다' 라는 의미를 지니므로 그 대상을 필요로 하나 헬라어 본문에는 이 대상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다음 세 가지 견해가 있다.
Ⓐ 다른 교사들이다(Plummer).
이 견해는 타당치 않다.
왜냐하면, 바울이 본 절에서 1인칭 복수 주어 '우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바울이 그 자신을 다른 교사들과 구분하려 했다면 여기서 1인칭 단수 주어인 '내가'를 사용했을 것이다.
Ⓑ 고린도 교인들이다(Chrysostom,Allo).
이 견해는 문맥상 타당하지 않다.
바울은 바로 앞장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을 진정한 복음 사역자로 받아들이라고 권고하였고(5: 11-13), 이제 다시 이러한 권면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3-12절. 7: 2-7).
Ⓒ 하나님이다(Calvin, Hodge, Tasker).
전후 문맥상 이 견해가 지지를 받는다.
바울은 항상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 고전 3: 9 -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5: 20에서 그 자신이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고 고백하였다.
본 절 하반 절에서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하나님의 사자(使者)로서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Martin).
2] 너희를 권하노니
권한다는 것은 타일러 하도록 권하는 일. 또는 한 개인 또는 어떤 단체에 대해서, 어떤 의무의 수행 또는 심지어 왜곡되었거나 해롭다고 생각되는 어떤 행동의 과정을 삼가도록 촉구하는 직접적인 호소의 한 형태를 의미한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권고하시는 대상은 심령에 통회(痛悔) 하는 자
* 사 66: 2-4 –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4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
성도
* 시 8: 4 -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기도하는 자 등이다.
* 삼상 2: 21 –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잠언에는 지혜있는 자와 미련한 자의 대비에 쓰였다.
* 잠 12: 15-16 – 15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16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여기에서는 권고를 받아 들이는가와 자제심을 갖느냐의 여부에 있다.
권고를 듣고 훈계를 받는 일은 필경은 지혜롭게 되는 일이다.
* 잠 19: 20 -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
3]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본문의 '헛되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케논'(*)은 '빈', '공허한'의 뜻을 갖는다.
따라서 본문의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를 공허한 것으로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었다. 이에 모든 사람이 그의 죽음에 참여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는(5: 15-17), 개인의 결단과 선택 그리고 끝까지 자기를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본문의 말씀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어졌을 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사항이 추론(推論)된다.
하나는,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영과 육을 더럽게 하는 것에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에(7: 1, 12, 20-21)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다른 하나는,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과 다른 내용의 복음을 전했을 때, 그들 중 일부가 그 가르침에 현혹되어 교회에 문제를 일으켰으리라는 것이다(11: 4, Bruce).
고후 6: 2 은혜 베풀 때에 -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이 구절은 사 49: 8의 인용이다.
* 사 49: 8 -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으로 바벨론의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이 놓임을 받고 완전히 회복된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아직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때요 아직은 하나님의 구원의 날이다!
1]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바울은 이 예언의 말씀을 복음 시대에 적용하고 있다.
혹자는 바울의 이 인용이 뜻하는 바는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지만(Lowery), 그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되는 때가 도래(到來)했음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Harris, Barrett).
바울은 본 절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때가 도래했음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때의 긴급성을 강조하고 있다(Tasker).
2]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실 때 그를 부르며 그에게로 가까이 나와야 구원을 받아야 한다.
* 사 55: 6 -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가 있다. 그가 가까이 계실 때에 찾고 불러야 한다.
* 전 3: 1-8 – 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우리 동양에는 천시(천시)라는 말이 있다. 하늘의 때를 의미한다. 이 하나님의 때를 바로 포착하여야 사업도 성공하고 나라도 부강하며, 전쟁에도 승리하고 민족도 중흥케 된다.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 은혜를 받을 만한 때, 구원을 받을 만한 때, 회개해야 하는 때가 있다. 이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말씀의 기근이 올 때가 있다.
* 암 8: 11 -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은혜를 거두시고 심판을 내리시는 날이 올 것이다.
* 잠 1: 24-31 – 24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25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26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27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28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29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30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 31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3]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본 절의 앞부분에서 언급한바, 구원의 때가 도래했음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 구원은 바로 '지금'(*, 뉜)이다.
바울이 전하는 화해의 복음을(5: 18-21)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된다.
그러나 이 '때'는 항상 지속하지 않는다. 더는 구원의 기회가 없어지는 날. 곧 주께서 재림하실 날은 생각하지 않은 때에, 도적같이 임할 것이다.
* 눅 12: 40 -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 살전 5: 2 -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따라서 바울이 복음을 선포하는 그 순간은 곧 종말론적인 '결단의 때'라고 할 수 있다(Cullmann).
또한 이 '결단의 때'는 각 개인에게 올바로 선택해야 할 책임이 부과된 '책임의 때'이다.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라는 외침을 듣는 사람들이 그 메시지와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을 경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이며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Hughes).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들은 소경 바디매오는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라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 결국 예수님의 일행이 걸음을 멈추고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
열두 해를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을 헤치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는 순간 그녀의 병을 고침을 받았다.
고후 6: 3 비방 받지 않게 하려고 -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
바울은 5: 12에서 언급한바 자신의 사도 직분에 대한 주제를 다시 거론한다.
본 절에서 바울은 훼방(毁謗)받고 싶어 하지 않은 것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1]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바울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을 살았다. 이를 위하여 모든 것에 거리끼지 않도록 노력했다. 자신의 인격적인 문제로 인해 복음이 전파되는 일이 방해받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바울은 많은 문제에 부딪혔다. 가령 그는 자신을 자랑하는 자라거나(3: 1), 어리석은 자라거나(11: 16), 미쳤다는 오해를 받았다.
* 행 26: 24 -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그러나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는 직책을 수행할 때 발생한 문제들은 복음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 고전 1: 23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바울의 인격적인 문제나 그의 잘못된 신앙생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비방을 받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메데'(*)는 '조롱을 받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동사 '모마오마이'(*)의 가정법으로서 '의심을 받는다'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헬라어 동사가 본래적으로 나타내는 개념은 '비난', '책망'이었다. 이 동사의 어근인 '모모스'(*)는 헬라의 조롱과 냉소의 신(Momus)을 가리켰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다른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迷惑)되어 자신의 진실성을 의심했던 행위를 염두에 두고 이 말을 사용하였을 것이다(Martin).
비방(욕, 모욕)은 남의 인격을 무시하는 모욕적인 말을 의미한다.
* 창 16: 5 –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모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마스'는 '손해', '강포'를 뜻하는데 이는 곧 주인인 사래가 일개 여종에 지나지 않는 하갈로부터 받은 멸시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강포스러운 것이었음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책망하실 권세를 가지고 계셨지만 도리어 십자가 위에서는 친히 욕을 받으셨다.
* 마 11: 20 -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 막 15: 32 -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다 듣게 되는 욕은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듣게 되는 것이므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다.
* 마 5: 11 -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욕하는 것은 큰 죄악이다.
* 고전 5: 11 -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아울러 그리스도인은 중상 비방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라고 바울은 가르쳤다.
* 딤전 5: 13 -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더 나아가 욕하는 사람에 대해 축복해 주라고 했다.
* 벧전 3: 9 -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 고전 4: 12 -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2]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그의 직분이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든지 거리낌을 주지 않도록 처신하려고 애썼다.
그의 직분이 비난받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되며 영혼 구원과 교회 건립의 일들에도 지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교회 직분자들이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행동한다면 교회는 은혜롭게 진행되며 잘 세워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다고 하면서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도, 교회도 위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일과 교회의 평안과 건립에 해를 끼칠 것이다.
'거리끼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코펜'(*)은 '실족할 계기', '죄를 범할 기회', '걸려 넘어짐'의 뜻을 갖는다(stumbling block, NIV)
고후 6: 4 모든 일에 자천하여 -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
바울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고난을 당했고 그것을 견디었다.
경제적 어려움도, 핍박과 매맞음과 갇힘 등의 육체적 고난도 있었다.
1]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감히 '자천'하고 있는데, 이것은 앞에서 자기를 천거(薦擧)할 의사가 없다고 말한 것(3: 1)과 모순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바울이 자신을 천거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것은 자기를 과시하거나, 어떤 외부적 권위에 의지하여 자신을 보증받고자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지금 바울이 자신의 이기적 야심이나 인간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에서 사역하며 그리고 그것을 위해 그가 견디어 낸 무수한 고난들에 따라 자신의 정당성을 말하는 것은 앞의 언급과 모순되지 않는다.
특히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이 당한 곤경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자신에 대한 천거는 말로서가 아니라 실제적 행동으로 보여주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2] 많이 견디는 것
'견디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모네'(*)는 일반적으로 '인내'를 뜻하나, 이 말 속에는 시련을 체념적으로 수용하거나 수동적으로 참는 것을 넘어 적극적인 의미에서 끝까지 견디어 낸다는 뜻이 있다.
'많이 견디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홉 가지로 열거되는데(4-5절), 이것들은 세 부분으로 분류될 수 있다(Bruce, Harris).
3]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첫째로 본 절에는 일반적인 시련들이 열거되어 있는데, 환난과 궁핍과 곤난이 그것이다.
(1) 환난(*, 들립세신. 患難)
본서에서 특징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로(1: 4, 8. 2: 4. 4: 17. 7: 4. 8: 2, 13),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압박받는 체험을 말한다(1: 4-11).
* 고후 8: 2 -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 엡 3: 13 -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 살전 3: 3-4. 7 – 3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4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7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 약 1: 27 -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 계 1: 9 -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계시록에 나오는 큰 환난에서 나온 흰 옷 입은 무리에 대해 살펴보자.
* 계 7: 13-14 –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 정체 -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장로 중에 하나'는 본서 가운데 나타나는 교회를 대표하는 장로들이 아니라 어떤 천상적인 존재인 듯하다(4:4 주석 참조, Johnson).
'응답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크리데'(*)는 '아포크리노마이'(*,'대답하다')의 부정과거 수동태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응답한 사실을 나타낸다.
이는 예언서에서 흔히 등장하는 문답 형식으로(*) 질문 없이 스스로 해석하고 답하는 히브리어 중복성(Hebrew redundancy)을 나타낸다(Swete).
* 렘 1: 11 -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 겔 37: 3 -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 슥 4: 2, 5 - 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기름 그릇이 있고 또 그 기름 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 그릇 위에 있는 등잔을 위해서 일곱 관이 있고 5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장로 중에 하나'는 24 장로 중에 하나로 사도 선지자들을 대표하고 있는 자로 사도 요한이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啓示)된 자다.
* 요이 1: 1 – 장로인 나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 요삼 1: 1 –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2) 질문의 내용 -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①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입니까?
요한 사도는 흰옷 입은 무리들이 누구인지를 묻고 있다.
② 이들은 어디서 왔습니까?
'어디서 왔느냐?' 수많은 거룩한 무리들이 흰옷을 입고 새로운 모습으로 출현한 것이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으로 잠자고 있는 하나님의 종들을 깨워서 그들과 함께 나타난 것을 말한다.
* 살후 1: 7 – 환난(患難)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公義)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天使)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 살전 4: 14-17 -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 요 5: 25, 28-29 -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유 1: 14 -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3) 요한의 대답 -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당신이 알고 있습니다.
① '내가 가로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레카'(*)는 완료 능동태로 생생한 증언을 나타낸다(Swete).
② '내 주여'는 천상적인 존재에 대한 경외심을 나타내는 표현이다(Vincent).
③ '당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수'(*)는 강조적인 표현으로 '바로 당신'이란 의미이다.
이 말은 자신의 무지에 대한 진지한 고백과 존경, 두려움의 감정이 내포되어 있다(Plummer, Swete).
'당신이 알리이다' - 하나님의 종들은 이제야 자신들의 피가 신원(伸寃) 받을 때가 되었다는 것을 자신들이 알지 않느냐는 반문이다. 이 말에는 확신과 자신에 찬 진지한 고백뿐 아니라 존경과 두려움의 감정이 내포되어 있다.
4) 어린 양의 증거 -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① 큰 환난에서 나온 자
환난을 통과한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큰 환난'의 내용에 대해서는 몇몇 견해가 있다.
Ⓐ 모든 시대의 성도가 겪는 보편적인 환난이다(Morris, Alford, Greijdanus, Niles).
Ⓑ 종말에 겪을 환난을 가리킨다(Charles, Walvoord, Mounce).
* 막 13: 19 - 이는 그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 단 12: 1 -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 계 3: 10 -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두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큰 환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스 들리프세오스 테스 메갈레스'(*)에는 정관사 '테스'(*)가 사용되어 그것이 특정한 사건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휴거 사건이 환난 전이라기보다 환난 중에 있을 사건임을 여기서 보여주고 있다. 환난을 통과하는데 성령의 기름과 회개의 흰옷을 입은 자가 공중 들림 받는다.
'큰 환난'은 야곱의 환난, 요셉의 환난, 예수의 환난이요 개국이레 없었던 환난을 말한다. 예수님이 율법 종교계 속에서 당하셨던 환난을 이기셨던 것처럼, 야곱이 환난 속에서 형(兄) '에서'와의 장자 싸움에서 승리한 것처럼, 다른 천사는 큰 환난(患難) 속에서 큰 성 바벨론의 핍박을 이기고 셀 수 없는 거룩한 무리들과 함께 승리하고 나오는 것을 말한다.
* 욜 2: 2 -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 마 24: 21 -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② 어린 양의 피
모든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있다.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 하이마티투 아르니우'(*)는 수단을 나타내는 여격 구문으로 그들의 사죄 받음이 인간의 공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보혈의 속죄피로 말미암은 것임을 시사한다(Swete, Milligan).
* 사 1: 18 -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 히 9: 14 -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 요일 1: 7 -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씻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플뤼난'(*)과 '희게 하였느니라'의 헬라어 '엘류카난'(*)은 모두 부정 과거 시제로 단회적인 행위를 나타낸다. 이는 그리스도의 희생 사역이 단회적이면서도 그 효력은 영원함을 나타낸다. 허다한 무리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서 깨끗함을 입고 구속받은 자들이다.
③ 옷을 씻은 자 -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하였다.
* 슥 3: 3-5 -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 딤전 5: 10 -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 것이요.
* 계 19: 8 -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도록 허락 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2) 궁핍(*, 아낭카이스. 窮乏)
역경이 끊임없이 닥쳐오는 상황에서 겪는 고통을 말한다.
* 행 20: 34 -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 고후 12: 10 -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 빌 4: 12 -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 히 11: 37 -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 곤란(*, 스테노코리아이스. 困難)
좌절을 강요하는 극한 상황을 가리킨다(1: 7-8. 4: 8).
①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았다.
* 고후 4: 8 -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②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았다.
* 고후 4: 8 -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③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았다.
* 고후 4: 9 -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④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았다.
* 고후 4: 9 -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6: 5 육체와 마음의 고통 -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
바울은 때때로 어떤 이들의 반대와 배척을 받았고 소동과 소란을 경험하였다.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는 일들도 있었다.
1]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이것은 두 번째로 분류될 수 있는 것으로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직접 육체에 가해지는 핍박들이다.
(1) 매 맞음
* 행 16: 22-24 –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 고후 11: 23-25 –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 갇힘
* 행 16: 22-24 –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 고후 11: 23 -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3) 난동
사도행전에 상세히 나타나는데 사실상 그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 행 12: 18 - 날이 새매 군인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 행 13: 50 –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 행 16: 19, 22 – 19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갔다가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 행 17: 8, 13 – 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 행 20: 34 -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2]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이것들은 세번째로 분류되는 것으로, 외부로부터 강요된 것이 아니라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복음을 위하여 스스로 짊어진 것들이다.
(1) 수고로움
'수고로움'은 열성적으로 끊임없이 복음을 전파한 일과, 바울이 교회에 재정적 부담을 지우지 않고 자신의 노력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일했던 것을 의미한다.
* 행 18: 3 -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 고후 11: 23 -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 살전 2: 9 –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2) 자지 못함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은 영적인 내핍 훈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고 싶고 먹고 싶은 상태에서 그러지 못한 것을 가리킨다(11: 27).
* 고후 11: 27 -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3) 먹지 못함
바울이 이런 고난을 피하지 않고 온 몸으로 마주쳐 견디어 나가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고 미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 고후 11: 27 -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 빌 4: 12 -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과 고린도 교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그렇게 했다(5: 13).
고후 6: 6 바울의 내적 자질 -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
5절에서 언급한 아홉 가지 시련들을 견디어 나간 것이 사도의 외적 자질이라면 본 절과 7절에 열거되는 항목들은 사도의 직분을 이행하는 동안 줄곧 지향했던 내적인 자질을 말한다.
바울은 범사에 깨끗하였다. 물질 관계에서도 이성 관계에서도 그러하였다. 이것은 후대의 모든 일꾼들에게 모본이 된다.
또 그는 항상 지식으로 준비되었다. 전도자는 늘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바른 지식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는 범사에 오래 참았고 친절하였다. 또 그는 늘 성령의 감화를 받았다. 성령께서는 전도자들의 힘과 위로이시다. 또 그는 거짓 없는 사랑으로 행하였다. 이것들은 다 하나님의 일꾼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1] 깨끗함(*, 하그노테티)
영적인 순결 즉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과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실을 가리킨다.
* 레 24: 2 -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 시 12: 6 -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 시 19: 8 -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 마 10: 16 –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 엡 5: 26 -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 딤전 3: 9 -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 살전 2: 10 -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 요일 3: 3 -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 계 14: 4 -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 계 19: 8, 14 –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2] 지식
여기서 '지식'(*, 그노세이)의 의미를 분명히 가리기는 쉽지 않다.
* 롬 11: 33 –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그러나 적어도 바울이 이 말을 사용할 때는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된 구원에 대한 지식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5: 20, Hughes).
* 호 4: 6 -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 벧후 3: 18 -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시대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예수의 죽음과 그 죽음의 구속적 의미를 분명히 알고 있다(5: 16, 18-20).
* 말 2: 7 -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늘
* 빌 3: 8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지식을 가진 성도는 구체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민감하게 분별하여 그 뜻에 합당하게 살아간다.
* 골 3: 10 -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 벧전 3: 7 –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이러한 의미에서 '지식'은 하나님의 구속사에 대한 삶과 그 앎을 생활에 적용하는 것 모두를 포괄한다(Barrett,Kelly).
* 고전 13: 2 -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오래 참음(*, 마크로뒤미아)
혹자는 이를 모욕이나 상해(傷害)를 당했을 때 노하거나 보복하지 않고 견뎌내는 것으로 이해한다(Plummer).
본 절의 '마크로뒤미아'를 4절의 '휘포모네'(*, '견디는 것')와 구별하여 '견디는 것'은 교회 밖의 대적들로부터 오는 시련에 대한 인내를 가리키며, '오래 참음'은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인내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Hughes).
실제로 바울은 사심 없는 순수한 동기와 목숨을 돌보지 않는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생겨나는 오해와 불신, 분란과 열매 맺지 못함 등에 대해 끊임없이 참고 언제나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했고 그의 성도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쳤다.
* 엡 4: 2-3 –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 골 1: 9-11 – 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1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 딤후 4: 2-4 –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4] 자비함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스토테티'(*)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결과, 인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태도로 대하는 것을 말한다.
* 눅 6: 36 -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 갈 5: 22-23 –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엡 2: 7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바울은 고전 13: 4에서 사랑을 '오래참고 온유하며'라고 묘사했다. 실제로 그 자신이 어려움에 직면하였을 때 다른 사람을 온유하게 대하였다.
* 빌 2: 1 -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 골 3: 12 -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이러한 의미에서 혹자는 본 절의 '자비함'을 '행동에서 선함'으로 보았다(Tasker). 이는 성령께서 주신 결과요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유래하는 삶을 변화시키는 증거이다(Martin).
* 롬 12: 1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 약 5: 11 –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5] 성령의 감화
'성령'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를 인간의 구성 요소인 '영'으로 이해하나(Barrett) 이는 '감화'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오'(*)를 동반하므로 타당치 않다.
'프뉴마티 하기오'는 그 용법상 '성령'(Holy spirit, NIV)을 의미하며, 여기에 특히 정관사가 없는 것은 '성령의 능력' 또는 '성령의 은사'(NEB)를 암시한다(Hughes, Tasker).
바울이 본 절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변증적 의미가 있다. 고린도 교인들이 문제를 삼고 있는 그의 인간적 유약함은 바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실로 바울의 삶은 성령의 능력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 롬 15: 18-19 – 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19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6] 거짓이 없는 사랑
이는 성령 사역의 최대 열매이다(Bengel).
여기서 '거짓이 없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뉘포크리토'(*)는 부정 접두어'아'(*)와 '가장하다', '속이다'는 뜻을 가진 '휘포크리토스'(*)가 합성된 단어로 '위선 됨이 없이'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사랑은 전적으로 위선이 아닌 순수한 것이었다(12: 15).
* 고전 8: 1-3 – 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고후 6: 7 말씀과 능력 -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
바울은 또 진리의 말씀으로 일하였고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으로 일하였다.
또 그는 의를 전하고 의를 세우는 도구로 일하였다.
복음 운동은 의인 만드는 운동이다. 물론 이 일을 위한 도구로 쓰임 받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하고 그 의만 의지하고 그 의를 전하고 의를 실천하는 자이어야 한다.
1] 진리의 말씀
복음 곧 화해의 말씀(5: 19)에 대한 일반적 표현이다.
* 시 119: 43 -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
* 잠 22: 21 - 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
* 전 12: 10 -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
* 엡 1: 13 -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 골 1: 5 -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 딤후 2: 15 –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 약 1: 18 -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바울은 적대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고 오직 진리만을 선포하였다(4: 2).
2] 하나님의 능력
바울이 선포하는 것이 진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 즉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의 설교와 행위 속에 현시(現視)됨으로써 증명된다.
* 롬 15: 19 -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 고전 1: 18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고전 2: 4-5 –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3] 의의 무기로 좌우에 가지고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영적 정비가 완벽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가 잘 사용하는 로마 군대의 무장법을 비유로 들고 있다.
* 롬 13: 12 -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 엡 6: 12-17 –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여기서 '의의 병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으나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의'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고결한 인격, 그리고 복음의 진리'를 포괄한다고 본다(Harris, Tasker).
'좌우에 가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덱시온 카이 아리스테론'(*)은 문자적으로 '오른손과 왼손에'라는 의미이다(in the right hand and in theleft, NIV).
이는 양손이 완벽하게 무장되어 있어 언제라도 적의 공격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태세가 완비되어 있음을 말한다(Barrett).
이 묘사는 마치 적군의 화전(火箭)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두 겹의 나무에 짐승의 가죽을 덮어서 만든 방패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에는 검을 든 로마 병사를 연상케 한다.
바울은 엡 6: 16-17에서 그리스도인의 무장으로서, 공격용으로 '성령의 검'과 방어용으로 '믿음의 방패'를 갖출 것을 언급하였다.
고후 6: 8 영광과 욕됨 -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
비록 사도라는 그의 직분이 영광스럽지만, 바울은 악하고 거짓된 비난도 받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의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또 그의 확신 있는 교훈 때문에 그는 확실한 지식과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마치 속이는 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속이는 자가 아니고 진리를 말한 자이었다.
1]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바울은 그의 사도 직무를 수행하면서 존경을 받을 때도 있었으나 오해와 비방을 받을 때도 많았다(10: 10. 11: 23-33).
* 갈 4: 14 -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 고전 4: 10-13 –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도다.
* 빌 1: 15-18 –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 살후 2: 2 -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바울은 이러한 현상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의아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어떠한 난관에 부딪혀도 절대 좌절하지 않고 그의 직책(5: 18)을 묵묵히 수행할 수 있었다.
2]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본문은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공동번역)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역자는 뒤에서 비방(誹謗)하는 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고 사랑하는 태도로 일관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은 결국 교만과 자만으로 이끌 뿐이므로 단호히 물리쳐야 한다.
바울은 본 절을 통해서 '악한 평판이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를 해칠 수 없고, 좋은 평판이 참되다 할지라도 결코 그를 비뚤어지게 할 수 없다'라는 결연한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3]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예수께서도 생전에 미혹하게 하는 자라는 비난을 받았었다.
* 마 27: 63-64 – 63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 요 7: 12 -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야기했을 때, 그의 대적들은 그를 가리켜 거짓말을 한다고 비난했다.
* 고전 15: 15 -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속임수라는 비난을 하였다(12: 16-18).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결코 거짓말하는 자가 아님을 하나님 앞에서 강력하게 증거 한다(4: 2. 5: 11. 11: 31).
고후 6: 9 무명한 자 같으나 -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
바울은 자기를 선전하지 않고 조용히 일하였으므로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신실한 자들은 그를 인정하고 그를 사랑했고 그의 이름은 그들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었다.
그는 죽을 고난도 많이 당했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도우심으로 구원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 그가 고난을 당하고 육신의 질병으로 고생할 때는 마치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 같았지만, 그는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그를 겸비케 하고 하나님만 의지케 하는 훈련 과정이었다.
1]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무명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그노우메노이'(*)는 '무시당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바울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바울이 무시당했다는 것은 아마 그의 사도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 고전 9: 1-2 – 1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 고전 15: 8-9 –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이 바울의 사도직을 부인하면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반(反)하는 자기들의 견해를 주입하려 하였던 상황이 전개되었었다(10-13 장).
그리고 사실상 바울은, 열한 사도들처럼 생전의 예수와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외부적 조건을 갖추지는 못하였으나 모든 사도직의 유일한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도직은 부여받았다.
* 갈 1: 1, 12, 16 –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그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중심 사도로부터도 인정받았고,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인정받았음이 틀림없다(5: 11).
* 갈 2: 7, 9 – 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9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2]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본 절은 바울의 역설적인 표현으로 실제적인 의미와 신학적인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실제적으로 바울은 죽음의 위협을 여러 번 겪었다.
* 행 14: 19 –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 고전 15: 29-31 – 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거의 죽게 된 상황에까지 이르렀었다(1: 8-9).
또한, 그는 예수의 죽음을 그의 몸에 짊어지고 다녔다(4: 10-12).
여기에는 자기 안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신학적 의미가 있다(5: 14-15)
* 롬 6: 1-14 –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 갈 2: 20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본 절에서 바울은 그 자신이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께 헌신(獻身)된 도구가 되었음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지시키고 있다(Martin).
3]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구약성경에서 여호와의 징계는 아들을 바로 세우기 위한 아버지의 행동에 비유되는바,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과 관심의 증거로 이해되었다.
* 욥 5: 17 –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 시 94: 12 -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 시 119: 67 -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잠 3: 11-12 – 11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12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 렘 31: 18-19 – 18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노니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19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본 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그와 같이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이 여러 가지 고통과 시련을 당하는 것은 그가 과거에 바리새인으로서 교회를 심히 핍박했기 때문이라고 비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고난이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가 아니라 바로 세우기 위한 사랑의 표시임을 인식하였고 실제의 삶에서 이를 체험하였다(1: 9. 4: 11)
* 고전 11: 31-32 –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6: 10 모든 것을 가진 자 -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바울은 성도들의 연약 때문에 근심하기도 했지만, 그는 예수님과 그의 구원 사역의 확장 때문에 항상 기뻐할 수 있었다.
그는 비록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이었지만, 많은 사람을 하나님의 구원의 풍성한 은혜와 복으로 부요하게 하는 자였고 하나님께서 공급하심으로 모든 것을 가진 자로 부족함이 없이 일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꾼들은 평안 가운데서 뿐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바른 사역을 수행해야 한다. 전도자의 직분은 고난으로 감당해야 할 직분이다.
비록 심적, 육체적, 물질적 고난이 컸지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공급하심과 위로와 능력도 컸다. 그러므로 전도자들과 성도들은 낙망치 않고 더욱 주의 일에 충성하게 된다.
1]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적대자들의 사도 시비, 그것에 의해 흔들렸던 일부의 고린도 교인들, 그리고 전체적인 이스라엘의 불신앙 등은 바울을 슬프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늘 기뻐하였다(2: 3. 7: 4).
* 롬 12: 12 -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 고전 16: 17 –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그의 성도들에게도 그리하도록 가르쳤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적인 특징이다(Barrett).
2]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바울은 세상의 부(富)를 거의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경제적인 가난의 상태를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가 고린도 교인들의 영육이 부해지도록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교회의 보수를 받기를 피했다(5절. 11: 7-10).
* 고전 9: 12, 15, 18 – 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그가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영적인 의미의 가난이다(Collange).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였는가?
(1)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고귀한 지식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부요한 자라고 생각하였다.
* 빌 3: 7-9 –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바울이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물질적인 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인간의 부요함을 위해서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셨다(8: 9).
3]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울이 '아무것도 없는 자'라고 했을 때, 그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관한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런 것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이 세대'가 진행되는 동안만 쓸모 있고, 다가오는 '새로운 세대'에는 전혀 가치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었고 '새로운 세대'를 얻었으므로 사실은 모든 것을 소유한 자였다.
* 고전 3: 21-22 – 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는 자'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의미이다.
* 고전 3: 23 -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본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기기 때문에 오직 주 예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심을 믿고 살아간다(Barrett).
본 절의 내용은 영적인 것에 자신의 모든 사고와 행동의 초점을 맞춘 철저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바울 사도의 자화상(自畵像)을 보여준다.
바울은 실로 소유와 무소유, 삶과 죽음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던 하나님의 신실한 사역자였다.
2. 바울의 관용 ( 6: 11 – 13 )
11 고린도 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고후 6: 11 입이 열리고, 마음이 넓어졌으니, - 고린도 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 고린도 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마음의 관계다. 십 년을 같이 지내도 서로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마음을 넓혀야 한다.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바울의 마음은 넓어져 있고 그의 입도 열려 할 말을 가지고 있었다.
1] 고린도 인들이여
혹자는 이 칭호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사랑과 관심을 나타낸다고 하나(Chrysostom), 그 용법상 이는 타당치 않다.
오히려 바울이 편지를 쓸 때 독자들의 칭호를 부르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로 매우 격한 감정의 상태에서 그런 표현을 쓴다(Collange).
가령 갈라디아의 성도들이 유대주의 교사들에 미혹되어 율법으로 회귀하는 가슴 아픈 상황에 직면하여 사용했다.
* 갈 3: 1 –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리고 빌립보 성도들의 친절을 칭찬할 때 독자들의 칭호를 직접 불렀다.
* 빌 4: 15 –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지금 바울이 '고린도 인들이여'라고 불렀을 때, 그의 심정은 아마 진리의 영안에서 누리는 자유에 충만하여 어떤 문제도 능히 극복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2]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바울은 '숨김없이 다 말하였다'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다.
공동번역은 본문을 '나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다 말하였고'로 번역하고 있다.
실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항상 공개적이었고 신실했다(1: 12-14. 4: 2).
3]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정직하게 숨김없이 말하였고 그들을 향하여 마음이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에 그 속에는 어떠한 비밀도 없었다.
또한 그는 고린도 교인들의 어떠한 잘못도 자비로 덮을 수 있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7: 3).
고후 6: 12 심정에서 좁아진 것 -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
본 절은 '여러분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옹색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자기 마음 스스로 옹색하게 만들었습니다'는 뜻이다(공동번역).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향해 마음이 좁아져 있었다.
1]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분명히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 사이가 소원(疏遠)해졌다.
이는 아마도 거짓 교사들이 바울이 그들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선동하였기 때문일 것이다(11: 11).
2]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문제는 바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이 좁아진 데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은 그들을 책망하거나 자기의 결백을 주장하기보다는 자신이 여전히 예전처럼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부드럽게 호소하고 있다(Barker).
예수를 믿는 자들은 마음이 넓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허물과 실수를 용납해 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마음에 분을 품고 악하게 대하는 경우를 말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의 마음이 넓어서 누구나 용납하고, 용서로 가슴에 품어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이기적이고 독선적이며 배타적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잘못에 대하여 책망의 글을 썼는데 바울의 대적자들이 이를 악용해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 이간질했다. 이는 얼마간 성공을 거두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한 후에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의 마음이 옹졸했음과 바울의 책망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고후 6: 13 자녀에게 말하듯 -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 그의 고난의 사역을 상기시키며 아버지같이 권면한다.
그의 사역은 그들에게 그의 진심을 알게 할 것이다. 그들은 마음을 넓게 열고 그의 말과 생각과 행위를 이해하고 그와 일치된 마음을 가지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도 하나님의 생각이 목사의 생각이 되고, 목사의 생각이 장로들과 교인들의 생각이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잘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서로를 향하여 마음이 좁아짐이 없이 마음을 넓혀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 안에서 일치할 때 교회는 잘 진행하고 세워질 것이다.
1]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 아버지로서 그의 영적 자녀들에게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Hughes, Tasker).
이처럼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랑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Plummer).
왜냐하면, 부모가 자녀에게 자존심이나 권위를 내세워 옹졸해지는 법이 없듯이 바울 자신도 단순히 가르치는 자로서가아니라 그들을 사랑하는 자로서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2]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바울은 오해하고 불평을 한 고린도 교인들을 나무라지 않고 그에게 사랑의 마음을 가지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는 사도의 권위로써가 아니라 부모의 사랑으로 자녀들에게 주는 호소였다. 혹자는 바울이 본 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오직 '공정하게 행동할 것'(fair play)을 요청하고 있다고 본다(Bruce).
오늘 말씀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이 좁아서 교회에 분쟁이 많았음을 보게 된다. 고린도 교회는 신령한 은사를 받아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지만,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성적으로 문란했다. 그리고 바울의 사도성에 대해서 폄론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의 정통 사도가 아니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었다. 바울은 자식같이 사랑해준 교인들이 서로 분쟁하면서 ‘나는 바울파다, 게바파다, 아볼로파다, 그리스도파다’라고 할 때 고린도 교회를 세운 지도자로서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이 말을 하고 있다.
첫째,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본문(11-13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읽어보자. “고린도의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넓게 열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옹색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옹색한 것입니다. 나는 내 자녀들에게 이르듯이 말합니다, 보답하는 뜻으로 여러분도 마음을 넓히십시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가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권면하는 말씀이다. “내 사랑하는 성도들아. 마음을 좀 넓혀다오. 그래야 이 험악한 인생을 사는데 그대들이 행복할 것 아닌가. 내 마음의 뜻이 그러하니 오늘 말씀을 듣는 중에 옹졸한 사람이 있으면 좀 넓혀서 넉넉한 인간으로 변화를 받으라”
우리는 마음이 넓은 사람을 큰 사람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인물이 좋고 공부를 많이 했어도 속이 좁으면 작은 사람이다. 넓은 마음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사한다는 것은 은혜를 아는 것이다.
* 엡 5: 20 -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넓은 마음을 가지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고, 자녀들이 마음이 넓으면 부모의 은혜를 안다. 경외하는 것이 뭡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두려운 마음으로 복종하고 사는 것이다.
* 엡 6: 1 –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부모님이 나를 낳아주었기에 내가 세상에 존재하지’ 이 마음을 가질 때 부모의 은혜가 감사해서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가질 때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인생 사는 것 전체가 은혜요, 모든 삶이 다 축복이 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 빌 2: 5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의 마음이 무슨 마음입니까?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는 마음이요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는 마음이다. 이것이 바로 넓은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갖는 사람은 불평하지 않는다.
여물을 먹는 소는 산에서 고기 잡아먹는 사자를 부러워하지 않고 땀을 흘리면서 자기 할 일을 다 합니다. 비둘기는 콩알을 먹으면서도 고기를 먹는 독수리를 부러워하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할 뿐이다.
* 시 37: 1 -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악한 자가 잘 되는 때가 있다. 그러나 불평하지 말라. 선하게 사는 것으로 이미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다하는 것이다.
둘째, 화목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고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다. 우리의 과거를 고칠 수 없다. 죽음을 고칠 수가 없다. 남의 성격도 고칠 수 없다. 날씨를 고칠 수 없다.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좋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불어서 좋다”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넓은 마음은 다른 사람과 화목하는 마음이다.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감사하는 마음이요 온유한 마음이다.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화평하다. 친절하고 이해심이 많다. 인간관계를 바르게 맺고 살아간다.
* 엡 4: 2 -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
관용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남을 존중하고, 격려하고, 허물을 덮는 마음이다.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이 마음이 왜소하다. 핵가족화로 부모와 자녀들이 서로 떨어져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녀들도 하나, 둘만 낳아서 기르고 방도 한 사람이 쓰기에 사람들이 자기밖에 모른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른다. 옛날 가난했던 시절에는 방이 없으니까 형제들이 다 한 방에서 살았다. 잘 때는 이불 하나로 자니까 서로 밀고 당기면서 자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면서 서로를 배려해 주면서 정감있게 살았다.
이 세상에 살면서 서로 화목하게 사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없다.
* 잠 15: 1 -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서로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좋게 보면 자기도 좋고 다른 사람도 편한 것을 사소한 것 가지고 다투고 싸운다. 이것이 괴로운 일이다.
셋째, 자기를 용서해야 한다.
넓은 마음은 자기를 용서하고 자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 눅 9: 23 -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자기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자기를 죽이는 것이 자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불행한 과거를 원망하고 ‘나는 팔자가 사나워’ 하면서 탄식한다. 자랄 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부모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상처받은 과거를 용서하지 못한 채 탄식하고 저주하면서 괴롭게 살아간다.
자기 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부모님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준 유일한 은혜의 부모님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용서해야 한다. 자기 용모나 출생, 성격,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자. 감사하면 모든 것이 축복이다.
사람은 두 종류의 생애를 배우게 된다. 하나는 미워하는 사람을 닮고 또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닮게 된다. 왜 미워하는 사람을 닮는가? 밤에도 그 사람을 미워하고, 낮에도 그 사람 생각하면서 미워하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이 자기 마음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 사람을 닮게 된다. 자기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어느 순간에 그 사람을 닮아가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시어머니 밑에서 시집살이를 했던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며느리 얻으면 절대로 저렇게 안해야지’ 다짐한다. 그러나 이 며느리가 나중에 시어머니가 되면 옛날에 시어머니가 자기에게 했던 행동을 며느리에게 똑같이 하게 된다. 그 시어머니를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어머니를 용서해야 그 독이 자기에게 들어오지 않고 은혜가 들어온다.
예수를 믿으면 마음이 넓어져야 한다. 생각이 깊어져야 한다. 감사가 하늘로 높아가야 한다. 그런데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라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이 내게 임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봄이 오면 나무가지가 부드러워져서 꽃이 피고, 얼었던 땅이 녹게 된다.
3.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 ( 6: 14 – 18 )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17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고후 6: 14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믿음 없는 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던 것 같다. 고린도 교인들은 믿지 않는 자들과 어울리지 않는 멍에를 같이하지 말아야 했다.
믿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받고 거룩한 길을 걷는 자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가 삶의 주인이고 죄에게 종이 되어 불경건과 불의와 죄악된 욕심 가운데 있는 자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자와 어울리지 않는 멍에를 같이해서는 안 된다.
1]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것(13절)이 믿지 않는 자들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했을까?
갑자기 서신의 주제가 바울과 고린도 교인과의 관계에서, 고린도 교인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의 관계로 바뀌고 있다.
본 절의 '믿지 않는 자'(*, 아피스토이스)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다음 세 가지 견해가 있다.
Ⓐ 바울의 적대자들을 가리킨다(Rensberger, Collange).
이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은 근거로서 본서의 주제는 불신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울을 대적하는 거짓 사도들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 문자 그대로 불신자들을 가리킨다(Filson, Barrett).
Ⓒ 믿음의 순수성을 해치는 세상과의 타협을 가리킨다(Hughes).
세 견해가 모두 일면 타당성을 지니나, '아피스토이스'의 어의상, 그리고 전후 문맥상 Ⓑ와 Ⓒ의 견해가 더욱 타당하다.
성도들의 순결을 요구하는 본문은 신 22: 10의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와 레 19: 19의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하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라는 구약의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본문의 '멍에'는 믿음의 순수성을 저해하는 불신자와의 결혼
* 고전 7: 39 - 아내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우상숭배
* 고전 10: 14 -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도덕적 타락
* 고전 6: 8-10 – 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11: 4)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바울은 본절을 통해 신앙과 윤리적인 면에 있어서 성도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라고 권고하고 있다.
바울은 불신자들과 절대 어울리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 고전 5: 10 -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예수님도 생전에 죄인들과 어울리셨다.
* 마 11: 19 -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복음과 믿음의 참됨과 순수성을 훼손시키는 거짓과 불법과 어울림이다. 실상은 그런 어울림은 세상과의 타협이고 신앙의 타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불법'(*, 아노미아)은 불신자와 적그리스도의 특징이다.
* 롬 6: 19 -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 살후 2: 3, 7 – 3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7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
반면에 '의'(*, 디카이오쉬네)는 신자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특히 본문에서의 '의'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칭의의 차원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윤리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Martin, Collange).
이와 관련하여, 혹자는 '의'가 윤리적 의미로 사용되는 용법이 쿰란 문헌에 나타난다는 점에 착안하여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직면한 문제는 율법주의가 아니라 '불의'였다고 추론하기도 한다(Schlatter).
그러나 바레트(Barrett)는 이 견해가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의'가 윤리적 의미로 사용되는 용법은 바울에게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7절. 11: 15).
* 롬 6: 13-19 –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 빌 1: 11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의'를 윤리적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쿰란 문헌의 영향이 아니라 구약성경의 영향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와 불법이 함께할 수 없음과 같다. 의는 불법을 정죄하고 멀리하며 불법은 의를 싫어하고 배척한다.
3]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또 그것은 빛과 어두움이 서로 사귈 수 없음과 같다.
바울은 신자들의 순결성을 강조하기 위해 매우 극단적인 대조법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사귀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사랑과 일치의 교제를 나타낼 때 사용되었던 말이다(9: 13).
* 고전 1: 9 -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 고전 10: 16 -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빛과 어두움이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은 구원 얻는 자들과 멸망하는 자들(2: 15)이 동반자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예수께서 '세상의 빛'이시며 세상은 멸망으로 귀착할 어둠에 속하기 때문이다.
* 요 8: 12 -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요 9: 5 -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 마 8: 11-12 –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 마 25: 30 -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빛이 오면 어두움은 물러가고 어두움이 오면 빛이 물러간다. 빛과 어두움은 동시에 함께 있을 수 없다.
고후 6: 15 조화와 상관 -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서로 조화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벨리알(Beliavr)은 ‘무가치한 자’라는 뜻으로 마귀를 가리킨다(BDAG).
마귀는 하나님의 원수이다.
* 마 13: 39 -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예수께서는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다.
* 히 2: 14 -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은 서로 조화될 수 없다.
1]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벨리아르'(*)은 히브리어 '벨리야알'(*)의 음역으로 본래는 '무가치함', '악함', 비천한 것 등을 뜻하는 말이다.
* 시 101: 3 -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이다.
여기서는 바울이 이를 의인화 시켜 참되고 진리이신 그리스도에 대비되는 거짓되고 악한 사탄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다.
구약성경에서 이 말은 매우 나쁜 뜻으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개인에게 적용될 때는 불량하거나, 방탕하고, 거친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 삿 19: 22 -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
* 삼상 10: 27 - 어떤 불량배는 이르되,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바치지 아니하였으나 그는 잠잠하였더라.
다른 단어와 함께 사용될 때는, '악심을 품은 허위 선전'을 뜻하는 '벨리알의 말’
* 신 15: 9 -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 시 41: 8 – 이르기를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
* 시 101: 3 -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이다.
'거짓 증언자'를 뜻하는 '벨리알의 증인’
* 잠 19: 28 - 망령된 증인은 정의를 업신여기고 악인의 입은 죄악을 삼키느니라.
'음모를 꾸미는 자'를 의미하는 '벨리알의 충고자' 등으로 적용되었다.
* 나 1: 11 -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 도다.
이 말이 사해 사본에서는 '악마의 왕'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본문에서 이 말이 뜻하는 바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단'을 가리킨다고 본다(Robertson, Barrett).
2]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믿지 않는자'(*, 아피스투)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을 가리킬 때 바울이 사용하는 단어이다(14절).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서로 상충하지 않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양자는 근본적으로 병립할 수 없으며, 운명을 같이 할 수가 없다(2: 16).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소유하는 바가 서로 다르다.
믿는 자는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을 받고 영생과 천국을 소망하고 그가 주시는 평안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사탄의 지배를 받고 멸망과 지옥을 향해 가고 있고 허무한 삶을 살고 있다.
고후 6: 16 하나님의 성전 -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도 일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진리는 성도들의 교제 전반에서 적용될 원리이다.
믿음이 없는 자는 구원을 받아야 할 대상이지 교제의 대상이나 협력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의 교제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의와 진리 안에서 참된 믿음과 순종과 소망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제이어야 한다.
* 요일 1: 3 -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1]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14절)는 주제에 대한 논증이 본 절에서 절정을 이루며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본문에서 '일치'로 번역된 헬라어 '슁카타데시스'(*)는 '함께 찬성의 투표를 하여 승인한다'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과 우상이 함께 동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2]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성도들의 몸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바울이 언급한 바 있다.
* 고전 3: 16 -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고전 6: 19 -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성전'에 해당하는 헬라어 '나오스'(*)는 구약 시대의 성전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온전히 임재하시는 '지성소'를 가리킨다.
성도들의 몸이 곧 하나님이 온전히 임재하시는 성전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우상이 있을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어야 한다.
* 고전 10: 14 -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3]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바울은 자기가 진술한 것들에 대한 정당성을 더 강화시키기 위하여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다.
본 절에서 인용하고 있는 구절은 레 26:11, 12이며 같은 내용을 가지는 구약의 구절들은 출 25: 8. 29: 43-46. 삼하 7: 14, 27. 사 52: 4, 11. 겔 20: 34 등이다.
* 레 26: 11-12 – 11 내가 내 성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12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 출 25: 8 -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 출 29: 43-46 – 43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44 내가 그 회막과 제단을 거룩하게 하며 아론과 그의 아들들도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며 45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46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 삼하 7: 14, 27 – 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27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의 귀를 여시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 사 52: 4, 11 – 4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전에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에 거류하였고 앗수르인은 공연히 그들을 압박하였도다. 11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에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
* 겔 20: 34 -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여러 나라에서 나오게 하며 너희의 흩어진 여러 지방에서 모아내고
이와 같은 구절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순결을 강조하는 것들이며 새로운 관계에 대한 약속이기도 하다.
사실상 바울은 이 약속이 그리스도가 거하도록 허락하는 모든 사람에게 성취되었다고 보았다.
고후 6: 17 나와서 따로 있고 -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
고린도 교인들은 믿지 않는 자들과 교제를 끊어야 한다.
순종하는 형제들 간의 분리는 죄이지만, 불신자들과의 교제 단절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신약성경은 이것을 밝히 교훈한다.
* 롬 16: 17-18 – 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스려[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18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1]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본문은 이사야가 그의 백성들에게 바벨론은 떠나 그곳의 이교주의와 단절하라고 권고한 사 52: 11의 인용이다.
* 사 52: 11 -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에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
하나님께서 임재하기 위해서는 백성으로서의 순결성이 선행적으로 요구된다.
마찬가지로 고린도 교인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성전이려면 음행, 토색, 우상숭배 등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키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다.
* 고전 5: 1-13 – 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 도다. 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6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9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12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13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이처럼 더러운 것을 온전히 버리고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한 생활을 이루겠다는 것은 사도시대 이후의 모든 경건한 성도들의 한결같은 염원이며 노력이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중세시대에 조용한 곳에서 자기의 생활을 깨끗하게 하려고 애쓴 수도원 제도가 있었다. 마틴 루터나 쯔빙글리,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도 이것을 말한다.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할 때, 생명력을 가진 새로운 교회, 깨끗한 교회로 변화시키겠다는 운동이다.
틸리히가 ‘Protestant Era’에서 말한 종교개혁은 계속 되어야 한다(Reformation must be continue)라는 말은 옳은 것이다. 매일매일 새로워지고, 개혁되어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17세기 중엽. 영국 왕 제임스 1세로부터 찰스 2세까지 1세기 동안 로마교회로 기울어지는 경향과 영국 국교를 상대로 순수한 신앙을 위하여 투쟁한 성도들과 핍박을 피하여 미대륙으로 이주하여 뉴인글랜드 주에 교회를 세우고 미국을 건설한 성도들이 있다. 이들이 청교도들이다.
(1) 그들은 신앙의 기초를 성경에서 찾았다.
주후 1611년 제임스 1세가 54인의 학자들에게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도록 했다. 당시에는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되어 있어서 로마교회는 라틴어로 번역하여 사용하였다. 따라서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를 아는 사제들만이 성경을 읽을 수 있었다.
3년 만에 완성된 영어성경이 King James Version(흠정역)이다. 이 성경을 애독한 청교도들은 생활과 도덕의 표준을 성경에서 찾았고, 교회와 국가의 정치적 표준도 성경에서 얻었다.
(2) 그들의 신학 사상은 단순했다.
바울 사도의 신학 사상을 계승한 어거스틴과 칼빈의 칼빈주의가 그들의 신학 사상이었다. 인간은 죄로 타락했기에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었다.
하나님의 경륜으로 사랑과 자비로 인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단순한 신학 사상이다. 예배도 하나님 중심의 단순한 것으로 모든 의식주의를 배제하고 마음에서 우러난 찬송과 기도, 성경을 읽고 마음으로 드리는 신령한 예배를 지향했다.
주일은 엄격하여 소득의 십일조와 주의 날을 하나님의 날로 지키며, 성전에서 예배하고, 예배 후에는 전도와 위문하는 일에 힘썼다. 일체의 오락이나 노동은 금했다. 성도의 생활은 검소했고, 근면하며 정직하였다. 누구나 믿을 만하게 살았다. 세상과 타협이 없는 생활로 세상에 물들지 않고 사는 것이 그들의 윤리 사상의 근본이었다.
2]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본 구절 앞에 '그러면'(*, 카이)이 있다.
이는 앞의 조건이 충족되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영접한다는 의미가 된다.
성도의 교제는 믿는 자들 간의 교제이어야 한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 것은 성도 상호 간의 사랑을 명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사 시대에 반복적으로 실패했던 원인은 가나안 정복 시 가나안 땅의 일곱 족속들을 완전하게 제거하지 못했던 까닭이었다(삿 1장).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을 다 지키지 않았고 그 우상숭배자들을 포용함으로 그 우상숭배를 본받게 되었고 부패되었다.
오늘날도 교회가 불신자들을 교인으로 포용하고 성도들이 그들과 교제할 때 교회는 속화되고 부패되기 시작할 것이다.
무분별한 교제가 교회를 부패시키는 것이다. 작은 누룩이 온 교회를 부패시킨다. 그러므로 교회는 불신자들과 분리된 회(會)가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교회에 나아와 말씀을 들을 수 있으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의 구주와 주님으로 인정하고 영접하기까지 그는 아직 교회의 참 교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를 교회의 직분자나 봉사자로 세우거나 그런 자와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려는 것은 매우 큰 잘못이다.
고후 6: 18 전능하신 주의 말씀 -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은 명확히 구별된다.
* 요일 3: 10 -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세상과 교회의 선이 명확할 때 교회는 강력한 단체가 될 것이다. 교회가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사실은 교회의 특권이요 힘이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과 비슷하게 될 때 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결국 세상에 짓밟히게 될 것이다.
1]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본 절은 바울이 구약성경의 여러 구절을 자유롭게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 삼하 7: 14 -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 사 43: 6 -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 렘 31: 9 -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바울이 삼하 7: 14과 사 43: 6을 나름대로 수정 인용함으로써 '남자'(*, 휘우스, '아들')와 '여자'(*, 뒤가테라스, '딸')를 명시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을 때 남자들과 여자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하나님과 동등한 관계를 갖게 된다.
* 갈 3: 28 –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갈 4: 5-6 –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 엡 2: 18 -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1) 전능하신 주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 판토크라토르'(*)는 삼하 7: 8. 렘 51: 7등에 나오는 '야웨 쉐바오트'(*, '만군의 여호와')에 대한 70인 역(LXX)의 인용으로 바울 서신에서는 본 절에서만 발견된다.
* 삼하 7: 8 -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 렘 51: 7 - 바벨론은 여호와의 손에 잡혀 있어 온 세계가 취하게 하는 금잔이라. 뭇 민족이 그 포도주를 마심으로 미쳤도다.
바울은 이 말을 사용함으로써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대한 강력한 확신을 표현하고 있다(Martin).
(2) 주의 말씀
주의 말씀은 무에서 이 세상을 창조했던 무한한 능력의 힘을 의미한다.
본 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자.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때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날이다.
우리는 모든 불경건과 불의와 악을 버리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고 모든 성경 교훈을 온전히 순종하자.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고난으로 감당하자.
우리 주님의 지상 생활은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했던 삶이셨다.
사도 바울의 전도사역은 환난, 궁핍, 매 맞음, 수고, 비방을 당했던 사역이었다.
오늘날 교회의 직분자들은 자기를 부정하고 고난을 감수하고 죽도록 충성하기를 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고난으로 감당해야 할 일이다.
셋째, 우리는 구별된 삶을 살자.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하지 말아야 한다.
성도는 믿는 자와의 교제가 중요하다.
악은 누룩같이 퍼진다. 잘못된 교제는 신자 개인과 교회를 부패시키고 변질시킨다. 우리는 잘못된 교제를 피하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오염의 시대이다. 공기의 오염, 물의 오염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이렇게 인간의 육체와 생명을 위협하는 오염 이외에 인간의 생명 전체를 위협하는 오염 문제가 있다. 소위 영적 오염이다.
사상적으로는 유물주의의 오염, 무신론의 오염, 사신론의 오염, 공산주의의 오염, 인간 천시 사상의 오염같은 갖가지 사상적인 오염이 있다. 그러므로 비인간화의 시대가 되었다.
이와 같은 사상적인 오염은 도덕적인 오염을 파생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부정부패의 오염, 허위와 가식의 오염, 불신 풍조의 오염, 폭력주의의 오염, 사치와 향락의 오염, 음란과 방탕의 오염, 이혼과 가정 파탄의 오염, 나쁜 유행의 오염, 술과 담배, 마약의 오염 등 오염이 범람하는 시대가 되었다.
오늘날 이 사회는 공기 오염이나 물의 오염보다 매우 심각하다. 이런 오염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성경의 교훈은 무엇인가?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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