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오월 어느 일요일이었다. 서교성당 야외미사에는 관광버스 열여섯대가 동원되었다. 여주 까지 내려가 그날이 마지막이었던 도자기축제장터에서 미사를 드리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잠든 단내성지를 둘러보고 서둘러 돌아오던 해거름이었다. 날이 어찌나 후덥던지 동행했던 패거리가 헤헤풀린 허우대로 길가 커브집 수퍼앞에 둘러앉으니 구경삼아 함게 갔던 비신도를 합쳐 여섯이었다.
더불어 수고들 했다고 냉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희희낙락 한담을 노닥거리던 중에 내가 문득 멜가방에서 꺼낸 것이 이틀 전에 타계하신 피천득 선생의 문고판 시집이었다. 오래전에 사두고 종종 펴보던 것을 선생이 돌아가셨다니 여행중에 즐기려고 갖고나왔는데, 갈피를 접어놨던 몇편을 낭송하니 좌중에는 어느새 추모의 정이 흐르고 새 병이 두엇 더 들어섰다.
귀엿고 듣고만 있던 오선생이 고 손바닥만한 문고판을 좀 줘보라더니 자기 가방에 밀어넣으며 책도둑은 도둑도 아니라고 눈웃음을 치길래, 외려 기분이 좋아진 나는 6개월도 좋으니 아주 장기간 빌려드리마 하였다. 아흔일곱 세수를 누리다 가신 선생을 위한 길거리 추모회는 필시 당신이 덤으로 누린 복락일 테다.
그러고 얼추 한 달이나 지났을까. 오선생이 술 한 잔 하자고 전화를 주셨다. 나는 어제 마신 술이 아직 덜 깨어 어리버리했으나 사양키도 어줍잖아 소걸음으로 주막거리에 나아갔다. 오랜만에 들어선 황금마차집 주모의 미소는 여전히 생글생글, 햇덩이 같은 해물매운탕 한 냄비를 시켜놓고 소줏잔을 나누니 오선생과의 독대는 꽤 오랜만이었다.
노동쟁의조정관을 지내다가 퇴임하신 오탁 선생은 나 보다 대여섯 살 위, 관절이 안 좋아 날마다 걷는 운동을 하면서도 종종 맥주컵으로 한 두 잔 소주를 즐기는 호주가다. 이미 전작이 있던지라 불콰한 얼굴로 흥얼흥얼 노래를 꺼내시길래, 뭐 그냥 흘러간 옛노래겠거니 했는데, 열창을 끝내자마자 그 피천득 시집을 꺼내어 노래가사를 펴보이는 게 아닌가, 아이고 이런, 일찌기 피선생이 작사하신 진달래란 노래다. 허어 - 등잔 밑이 이리도 어두워서야,
겨울에 오셨다가
그 겨울에 가신 님이
봄이면 그리워라
봄이 오면 그리워라
눈 맞고 오르던 산에
진달래가 피었소
순간 나는 활화산 처럼 취기가 올라 다음엔 어찌 되었는지 의식이 몽롱하여 그날밤에 대취했던 것만 기억난다. 일년전엔가는 틈틈히 모아둔 거라며 쪽지에 썼던 글들을 보여주길래 내 도와드릴테니 작은 시집 한 권 엮어보시라고 권고를 드렸건만 여태 자신이 없는 건지, 겸양이 지나친 건지 아무런 말이 없으시다.
선생은 내가 갈피갈피 접어놨던 2천원 짜리 그 문고판 시집을 돌려주며 자기는 새로 4천원 짜리 한 권을 샀노라 하셨다. 종전에 하이네 시집, 워즈워드 시집, 그리고 김소월 시집 세 권만 갖고 있다가 내 덕분에 한 권이 더 늘었노라고 좋아라 하는 홍안백발 노신사의 천진난만함이라니..... 이래서 소천하신 피천득 선생이 또 한번 히죽해죽 웃으시다.
2007. 6. 19
즐거운 셈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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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동창모임에 나가면 미안한 일이 있다. 상대방은 나를 알아볼 뿐만 아니라 이름까지도 반갑게 불러주는데 나는 이름은 커녕 얼굴조차 긴가민가 어리벙벙한 것이다. 이거 등에 식은 땀이 솟는 일이다.기억 테잎이 낡아서 그런가? 예전에 비해 길눈도 어두워졌다. 지하철의 출구를 대충 나가서는 꼭 실패를 한다. 더구나 술이 거나할 때는 엉뚱한 곳에 내려 우왕좌왕하다가 택시를 잡기도 여러번, 꽤 오래전 고향에 살 때 술을 마시고 선창께에서 택시를 탔는데 내가 사는 주택단지의 이름이 떠오르지를 않는 것이다. 방향만 잡아서 한참을 가다가 겨우 신안주택이라는 이름을 알아내고는 휴우- 한숨을 내쉰 적도 있다. 자칫 밤내 택시요금을 올리면서 시가지를 돌아다닐 뻔 하지 않았는가. 술 마신 다음날 필름이 끊기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그것도 이미 역사가 오래되었다. 그냥 그렇게 불편함을 감수하며 살아오는 것이다. 숫자에 대한 기억은 더욱 심한 편이지만 이런 몇 가지는 지워지지 않으니 이건 또 무슨 조홧속인고? 옛날 서부영화의 명배우 게리쿠퍼가 허리에 찬 귄총을 뽑아들어 발사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0.8초였다. 아란랏드는 1.2초, 죤 웨인은 1.6초. 사람은 누구나 칭찬을 들으면 쑥스러운 기분에 얼굴이 달아오르기 마련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0.7초 동안 감전상태를 경험하는 것, 너나없이 칭찬이 황홀한 건 그래서란다. 가끔은 주민등록번호나 집전화번호를 까먹는 주제에 이런 기억력은 퍽 칭찬 들을만하지 않은가? 태양이 발산하는 햇빛은 지구에만 쏟아지는 게 아니다. 광막한 허공에 뿌리는 햇빛 중에 과연 얼마나 이 작은 초록별의 차지가 될까? 22만분의 1이다. 사람 하나의 구성물질을 값으로 환산하면 5천원 정도인데 30여년 전에 비해 크게 오른 가격이 아니다. 전체 지구의 인구를 통조림처럼 압축한다면 사방 100미터의 상자 속에도 미처 못찬다. 등등.... 아내가 좋아하는 텔레비젼 프로 '아침마당'에 나온 어느 여자탈렌트가 얼마전 외우기 좋은 숫자 하나를 가르켜주었다. 사람은 나이가 육십이건 칠십이건 팔십 구십이건 스스로 생각하는 체감연령이 33세라는 것! 아하, 이렇게 멋진 숫자를 어찌 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서른둘에 늦장가를 든 나는 아직 깨가 쏟아지는 그 이듬해를 살고 있는 셈이다. 아하 즐거운 셈본이여!
홍도 어부
연휴가 있던 어느 해 봄날 이또 씨와 나는 첫 홍도행 쾌속선에 올랐다. 일본인 이또 씨는 도자기메이커 행남사 디자인 자문위원으로 석달만에 한 번씩 오면 보름쯤 머물며 도자기 디자인에 관한 여러 일들에 자문을 하던 분으로 나보다 대여섯 살 위였다. 잔잔한 봄바다를 갯바람처럼 달린 쾌속선이 홍도1구의 남쪽항구에 머무르니 종선이 와서 우리를 뭍으로 실어다 주었는데 늙수구레한 노인이 반가운 얼굴로 민박을 권했다. 노인을 따라 앞바다가 눈 앞에 내려다보이는 깔끄막집에 여장을 풀고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노인장의 지극정성이 여간이 아니었다. 아침나절에 물질 나갔다 왔노라고 우럭으로 정갈하게 매운탕을 끓여 내오지를 않나 일본말도 한 두마디는 하시는 분이라 이또 씨도 여간 맘에 들어하질 않는 눈치였다. 다음 날 일주관광을 마치고 떠나려는데 두 사람 일박에 세 끼 식사값이 3만 2천원이라는 것이다. 3천원을 얹어드리니 어찌나 고마워 하시던지... 이또 씨도 두고두고 3만5천원 짜리 알뜰한 홍도관광 이야기를 자랑삼아 하곤 했다. 3년 후던가, 선편은 물론 숙박 예약까지 마쳐논 매제내외와 우리 부부가 다시 홍도유람을 가게 되었는데 때는 한창 해수욕철이라 인파가 들끓었다. 밤에 예고도 없는 해일이 일어 남항의 낡은 방파제 하나를 깨부숴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낙네들 일주관광을 시켜줘야 하는데...오전 내내 멈춰섰던 유람선이 뜬다길래 올라가니 갑판에 시나브로 비가 뿌리고... 나눠주는 비닐 비옷을 입은 채 기념촬영을 하고나서부터 무려 한 시간의 고행은 시작되었다. 아내가 더러 차멀미를 했지만 배를 처음 탄다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긴 탓이다. 유람선이 열길 물속으로 곤두박혔다가 부숴질듯 뿌지직거리며 다시 떠오르기를 반복하는데 토악질로 얼굴이 샛노래진 아내를 달래다가 어르다가 껴안고 함께 뒹굴기를 연신 하던 중에도 눈에 띄는 풍경이 있었으니 남문 밖을 돌 즈음 가랑잎배 위에서 손쳐주던 홍도어부의 태연자약한 모습이다. 어찌 그 지옥같은 풍랑 속에서 낚시를 드리울 수 있으며 반갑다고 손까지 쳐줄 수가 있단 말인가! 아이들 놀이개로 목마를 타듯이 풍랑을 타던 그를 보면서 깨우친 게 있었으니 세상 풍파도 가랑잎배 위의 날처럼 타라는 말씀! 억만년 풍상에 깎인 바위섬에 사는 현자의 도도한 처세 앞에 고개가 꺾였다. 그러나 저러나 그 날 이후로 아내와 내가 부부동반으로 홍도 유람선에 오를 일은 다시 없게 되었다.
미울 고울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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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의 곱절이 세월의 체감속도라는 말은 옳다. 어언 인생 육학년에 다가서니 얼추 시속 120 킬로는 달리는 셈, 서울살이를 시작 한지가 엊그제만 같은데 거진 십년이 다 되어간다. 예전에 일본인 현지처가 많이 살았다는 마포구 아현동 낡은 혜성아파트에 8톤트럭이 모자라 딸아이의 피아노며 소파 등속은 1톤 봉고를 딸려야 했던 이삿짐을 들여놓고 비좁은 안방에 고단한 몸을 눕히던 밤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운동장처럼 널찍한 고향집을 버리고 올라와 이게 무슨 알량한 짓인지... 천정조차 낮아 숨이 터억 막혀왔지만 번거로운 서울살림에 그런 사치스런 생각도 그날 그때뿐이었다.
퇴근길에 아파트 입구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길래 알아보니 꼭대기 13층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처녀가 뛰어내렸다는 것, 소지품 중에 있던 주민증을 복사해서 방을 붙여놓고 가족을 찾는 중이라 했다. 이미 날이 어두워진 창문 밖을 내다보니 이웃집 지붕끝이 왕창 부숴지고 아뿔싸! 상체만 남은 시신의 참상이 희끄무레 엎드려 있었다. 이웃 달동네에 살던 처녀인데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한 사연이 있었다고들 했다.
아파트 근처엔 8차선 차도 건너 내가 좋아하여 가끔 산책을 즐기던 쌈지공원이 있는데 어느날엔 공원지하에 매설했던 까스시설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 대재앙을 불렀다. 주변 일대의 건물은 물론 우리 아파트 창문까지도 여러장을 깨뜨려놓았다. 미울 고울 서울의 인상은 이렇듯 황당하고 무참한 것이었다. 한 치 앞은 물론 열길 물속보다 어두운 세태 속에서 하루하루 허우대는 삶에 아내도 나도 면역이 되어갔다.
그나마 아현지하철역 앞 재래시장 거리는 재미가 났다. 아내와 더러 그 시장골목을 누비다가 다리를 쉬는 곳이 있었으니 할머니의 파전 좌판이었다. 젊어서는 밤새 지져논 파전을 받아가려고 몰려든 차량이 새벽마다 줄을 섰더라는데...불 달군 쇠판에서 노릇노릇해진 파전은 싱거운 놈과 매운 놈이 있었는데 내가 시키는 놈은 언제나 호호 매운 청양고추를 넣은 고 매운놈이었다.
더불어 막걸리 한 병, 아내의 주량은 한 모금이 고작이었지만 곧잘 나의 말동무가 되어주곤 했다. 파전할매는 백발에 양반스런 서울토박이, 말수 없이 삐긋이 웃는 흰 얼굴에 보살같은 인자함이 묻어나던 분이어서 단골삼아 막걸리를 즐기며 속내를 삭이기에 딱 좋았는데... 어느날 막걸리 두 병째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에 열을 올리던 중, 아내가 느닷없이 배를 움켜쥐고 애고대고 신음을 연발하는 것이다. 너무도 갑작스 런 일이라 어쩔 줄을 몰라하며 아내를 껴안고 서너걸음을 비칠거리다가 골목길바닥에 주저앉아 등을 두드리다가 쓸어주다가..... 무슨 약을 먹여야 하나 약국은 어디 있나, 허둥대는데 쇳소리를 내며 어깨를 두드리는 이가 있었으니 파전 할매였다. 보살같은 모습은 간데 없고 서슬이 퍼런 얼굴로 막걸리 한 병값을 덜내고 거버리면 어쩌느냐고 노발대발... 아내의 식중독은 약을 먹고 곧 숙져 몸을 추스릴 수 있었지만 단돈 천원 때문에 서울깍쟁이로 돌변하던 파전할매의 야멸찬 도끼눈은 여태 사라지질 않는다. 누구나 겪고 사는 미울 고울 서울이다.
朱定延 - 전남 완도에서 출생하여 목포에 이주, 흑조시인회 창립회원으로 시집 '인구문제' '떠오르는 바다' '풀잎이슬에 도는 우주' '서부역벤취에 대하여' 시문집 '길 위의 시간'을 내고, 소청문학상 송암창작상을 수상했으며, 서울에 와서 목포출향문인회 두줄시인회를 결성하고, 2006년 충북 단양 '산 위의 마을' 가톨릭 경당에 묵주성화 20처를 만들어 봉헌하였다.
첫댓글 ..2000원 짜라 문고판 시집을 다시 받아 드신 선생님의 마음, 그늘 아래 스치는 솔바람 같습니다..
그 기쁨을 나눠가시니 더 기뻐집니다. 하찮은 문고판 시집 한 권이 더욱 소중한 것이 되는 순간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