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6:1-10 살아계신 하나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이 또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을 7년 동안 미디안의 손에 붙이십니다. 이로 인해서 미디안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2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인해서 산에서 구멍과 굴과 산성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즉 미디안을 피해서 산에 피난처를 만들어서 생활을 했다는 뜻입니다. 또 3절,4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그들이 몰려와서 식물을 노략함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의 생계에 큰 위협과 고통을 당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활이 반복되는 가운데 이스라엘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우린 금방 이스라엘의 죄와 하나님의 징계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징계로 인해서 하나님에게 부르짖고 회개를 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계에서 구해주시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순서이고 짜여진 각본이기도 할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어떤 어려움을 당하면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혹시 이것이 하나님의 징계가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하나님의 징계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재빠르게 후속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그것은 빨리 하나님의 징계를 종결시킬 수 있는 행위를 내쪽에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죄가 무엇인가를 빨리 찾아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효력을 봤으니까 이제 그만 중지해도 괜찮다는 인상을 하나님에게 심어주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과정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죄를 알게 된 자로서의 회개가 아니라 회개를 위한 회개, 즉 자신에게 일어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조치와 수단으로서 하는 회개라는 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유익과 편함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차원에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히 12:8절의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라는 말씀도 단지 징계를 받았다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징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가르치신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본문도 단순히 죄에 대한 징계로 이해하고 넘어갈 문제는 아닙니다. 하나님을 단지 죄를 지으면 벌주시는 선생님 같은 분으로 인식하고 지나친다면 그것은 성경을 크게 오해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이 악을 행하고 이스라엘의 악에 대해서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것은 계속 이어지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내용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고 벌주시는 분이니까 죄짓지 말자는 교훈으로 끝낼 문제들입니까?
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살아 계신 분으로 대하라는 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미디안으로 인한 고통을 견디다 못해 하나님을 찾아서 부르짖습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찾아서 부르짖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교인의 상식으로는 어려움에 빠졌을 때 하나님을 찾아서 열심히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어려움에서 벗어날 해결의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대해서 하나님은 우리들의 상식대로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즉 미디안을 물리쳐서 이스라엘을 다시 평안한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을 합니다.
그 책망이 8-10절의 내용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 너희의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과거에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신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이스라엘의 죄가 무엇인가를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이스라엘의 잘못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내시고 이스라엘을 학대하는 모든 자들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고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살아 계신 분으로 대접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살아 계신 분으로 대접을 했다면 과연 어떤 태도의 삶을 보이게 되었을까요? 과거 자신들의 조상을 애굽에서 구출하여 내시고 가나안 땅의 거민들을 쫓아내시고 그 땅을 자기들의 것으로 주신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들과 함께 동행하신다는 것을 알았다면 과연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압제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단지 자신들의 고통만을 생각하였을까요?
하나님의 징계는 이스라엘에게 고통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부르짖습니다. 이스라엘은 징계 속에서 자신들의 고통만을 생각합니다. 자신들을 고통스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루속히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수준이었다면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떠합니까? 이스라엘보다 낫다고 할 수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고통 속에서조차 하나님을 찾을 줄 모르는 이스라엘보다 더 못한 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죄지으면 징계하신다는 경고의 말씀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현재 처한 어려운 상황이나 고통을 하나님의 징계로 생각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이 징계하셔서 되어진 결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징계이든 징계가 아니든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 징계면 어떻고 징계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징계가 아니면 마음이 좀 편합니까? 하나님에게 벌받은 것이 아니어서 고통에 대해 떳떳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까? 결국 이 모두가 자신의 체면과 신앙의 자존심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까? 다른 사람이 자신의 어려움을 가지고 '하나님의 징계다'라고 할 때 발끈하는 이유가 바로 자기 자존심 아닙니까?
사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징계 속에서 살아가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뭐 하나 잘한 것이 없는 우리들입니다. 큰소리칠 것도 없고 자존심 상해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면됩니다. 징계 받아 마땅한 자로 서시고, 온갖 창피는 다 당해도 마땅한 자로 서십시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신자의 태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징계 속에서 자신의 고통에만 염두를 둡니다. 미디안의 압제를 받아 마땅한 악한 자임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고통에서 건져주실 것만을 기대하고 부르짖은 것입니다. 자신들이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고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이 여호와 앞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는 생각하지 않고 조금만 힘들어도 힘들다고 아우성입니다.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느냐고 원망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신 이야기를 하시면서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다고 책망을 하십니다. 목소리를 청종치 않았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을 하기보다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을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부모로 공경을 하는 것은 부모의 말에 대해 청종을 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부모에게 용돈을 주고 좋은 집에서 살게 한다고 해서 부모 공경이 아닙니다. 부모의 말씀에 대해서 청종을 한다는 것은 아직 자신을 부모의 간섭 아래 있는 존재로 인식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간섭을 벗어난 자식은 부모의 말을 청종하지 않습니다. 이제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노라고 선언하면서 부모로부터 독립을 해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런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살아가는 삶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도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신 것이 과연 단지 벌을 주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자신들의 힘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 홀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스라엘을 미디안에 붙여서 7년 간 고생을 하게 하신 것은, '너희들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삶이 누구의 간섭 아래 있는가를 깨달아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미디안의 압제를 받게도 하시고, 그 압제에서 벗어나게도 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압제를 통해서 세상은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인생이란 하나님의 간섭 아래 있음을 발견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럴 때 그들이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는 것도 바뀌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은 인생이 하나님의 간섭 아래 있음을 발견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만약 인생이 하나님의 간섭 아래 있음을 안다면 자신들의 고통을 해결해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인생이라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실 것이고,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마음을 바꾸시거나 뜻을 달리 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인생임을 잊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신자로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까? 믿으신다면 과연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 하는 삶입니까? 사실 우리는 삶에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확인하고 그 하나님을 증거하며 살아가려고 하기보다는 내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거하기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신자라면 어떤 힘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힘도 하나님의 능력을 초월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미디안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지 못한 결과이듯이 오늘 우리들의 두려움 역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지 못한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6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인하여 미약함이 심하다고 말합니다. 미디안은 이스라엘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강한 힘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을 보면서 스스로 미약하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은 아마 자신들의 미약함에 대한 한탄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미디안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달라는 부르짖음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압제하는 미디안에 대해서 하나님이 원수를 갚아달라는 호소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부르짖음이든 그 시작은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중요하고 자신이 중심인 이상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들려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관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의 나약함은 결코 미디안에 비해 소유한 것이 적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소유로 인한 힘을 준다고 해도 결국 그들은 자기보다 더 힘이 센 다른 민족을 대할 때 다시금 나약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나약함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징계 속에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분이 자신들을 간섭하고 있음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자의 강함은 힘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인생임을 잊지 않는다면 신자는 어떤 힘 앞에서도 자신이 미약하다는 좌절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진실로 강한 자입니다.
이런 이유로 신자는 하나님의 징계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자가 징계를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징계로 인해서 주어지는 고통을 피하고 싶은 욕망에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징계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증거입니다. 내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간섭받고 있는 증거입니다. 다만 주어지는 고통에 몰두하다 보니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길을 걸어가다가 넘어지는 것 하나에서까지 살아 계신 하나님이 간섭하고 계심을 배우십시오. 억지로 그렇게 인정하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분명 삶의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간섭하는 이상 여러분은 그 무엇에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돈이 생명이 아닌 이상 돈을 부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 스스로의 모습이 발견될 때 하나님 앞에서 할말이 없는 자로 설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우리가 이만큼 살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깨달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행복입니다. 이러한 행복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삿 6:11-18 큰 용사
세상의 상식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을 맡기는 사람은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그 사람의 능력과 힘을 보고 맡기는 것이고 일을 맡은 자 역시 그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의 능력과 힘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이치는 초등학생이 대학 교수가 될 수 없는 것이고 자기 한몸 가누기조차 힘든 나약한 자를 군인으로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대학 교수를 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지식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교수로서의 합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시험하게 되고, 군인으로 부르기 위해서는 건강에 이상이 없는지를 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일은 분명 능력과 힘이 필요합니다. 아무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그만한 능력과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어떤 일을 맡기면 '나는 너무 부족해서 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많이 듣게 됩니다. 초등학교밖에 못나온 분에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직을 맡겼을 때 대다수의 사람은 '나같이 못배운 사람이 무슨 교사를 하는가?'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상하게 사람들은 몸으로 때우는 일에는 겁을 내지 않으면서 남을 가르치는 일에 대해서는 뒤로 피하고 물러서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남들 앞에 서서 뭔가 가르친다는 것에 두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 남들 앞에 서서 가르칠 때 자신의 무식이 폭로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모세처럼 말주변이 없어서 인도자로서의 일을 피하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그 사람의 재능과 능력을 따져가면 일을 맡기는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오늘은 이점을 생각함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나 봉사하는 것에 대한 우리들의 잘못된 시각들이 수정될 수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다섯 번째 사사로 부름 받은 기드온의 이야기입니다. 사사란 이스라엘의 재판장의 위치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에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능력과 재능을 가진 사람이 택함을 입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지도자란 남과 다른 재능과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등장하는 기드온은 우리들의 상식과는 전혀 맞지 않는 예외의 인물입니다. 예외의 인물이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것이 기드온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인간의 상식을 깨뜨리는 하나님의 선택의 행위를 기드온에게서도 유감 없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씀을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보면 이미 기드온이 힘과 능력에 있어서 큰 용사이기 때문에 그를 불러서 이스라엘의 사사로 삼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기도 하지만, 당시 기드온이 하고 있었던 일을 본다면 그러한 가능성도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11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를 만날 당시 밀을 타작을 하고 있었는데 포도주 틀에서 타작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을 하고 있었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드온은 용사의 자질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본 대로 미디안 사람들은 곡식을 수확할 때가 되면 이스라엘을 찾아와서 수확한 것을 모두 탈취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밀을 몰래 타작을 하기 위해서 포도주 틀을 이용해 타작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만 봐도 기드온에게는 용사로 불리고 사사로 세움을 받을만한 자질이 없었음을 능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향해서 큰 용사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용사란 우리들의 자질이나 능력 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의식은 항상 우리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자질을 생각하도록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자질을 생각함으로서 내가 저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 용사란 힘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의 조건들이 가져다 준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용사의 힘은 세상이 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들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힘은 여호와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서 용사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이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을 하지 않지만 실제 삶에서는 부정을 해버립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 자체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용사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는 인정을 하면서도 용사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분명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믿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부정을 합니다. 그 이유는 13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이 말씀대로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셨다면 이러한 일, 즉 이스라엘이 미디안에게 압제를 당하고 고통을 겪으면서 몰래 밀을 타작해야 할 정도의 상황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옛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이적을 행하신 것처럼 자신들도 그러한 이적으로 미디안의 손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당연한데 그러한 이적이 없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지도 않고 오히려 자신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결국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부터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주변 환경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적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드온의 이런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기드온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환경의 개선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분이라면 그것과 같은 이적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도 성경을 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있었던 것과 같은 의미의 사건이나 이적이 자신에게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다면 오늘 미디안에게 압제를 당하는 우리를 이끌어 내시는 것이 마땅하다는 기드온과 똑같은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역시 하나님이 함께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있을지언정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살아가는 것은 없는지도 모릅니다.
많은 신자들의 기도를 들어보면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는 기도는 하는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있는 기도는 듣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자신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과연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사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기를 기대하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은 결국 기드온처럼 환경의 개선이 아닌지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분명 나를 좋은 환경으로 인도해 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환경이 더 나아지고 나쁜 것이 사라지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려는 것은 아닌지요? 그러나 그것은 결국 자신의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싶고 그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고 싶다는 의도이기보다는 좋은 환경에서 편안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 아닌지요?
과연 여러분은 지금까지의 삶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을 수 있는 그 어떤 일도 없었다고 생각되십니까?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엄청난 이적을 체험함으로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분명히 확인하였으면서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겨우 먹을 것이 없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 놀라운 체험도 결국 자신의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고 먹고 싶은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할 상황에 처하자 잊어버린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란 계속해서 자신의 편안함과 행복을 즐기고자 할 뿐 삶에서 하나님을 확인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는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드온의 모습에서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믿지를 못하는 기드온은 결국 자신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전능하심,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을 도우신다는 것을 믿는 신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때문에 자신은 무능력하고 자질이 없고 힘이 없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분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던 기드온은 힘과 능력을 자신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는다면 결국 자신의 힘으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기드온은 15절과 같은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기드온의 이 말을 단지 불신앙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물론 불신앙이라는 말을 할 수도 있지만 불신앙이라고 압축해서 결론지어 버리면 기드온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넘어가 버릴 수 있습니다.
기드온의 문제는 앞에서 말씀을 드린 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함에 있었던 것입니다. 전능하신 분, 능력이 있으신 분을 의지하지 못함으로서 자신에게 있는 힘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그러한 문제를 가진 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드온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징을 자신의 환경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자신들의 악한 환경이나 상황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었기 때문에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우리들의 환경이나 상황을 나쁜 것에서 좋은 것으로 바꾸어 주기 위함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린 결국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전혀 믿지 못한 채 신앙의 껍데기만 둘러쓴 신자아닌 신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누군가를 택하시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하십니다. 인간의 자질이나 능력으로는 되어질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환경과 상황의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말씀하는 것에서 우린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분명 용사로서의 자질이 없는 기드온을 불러서 용사로 쓰신다면 드러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몰래 타작을 하는 기드온의 성품을 보면 기드온은 당시 주위 사람들에게도 용사의 자질을 보이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용사 같지도 않은 기드온이 용사로서 행한다면 사람들은 기드온을 통해서 무엇을 발견하겠습니까? 만약 평소 기드온이 용사처럼 행했다면 칭송되는 것은 기드온의 용사와 같은 자질일 것입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을 물리친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기드온이 자기 힘으로 한 일로 여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전혀 용사의 자질이 없는 사람이 용사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사람들은 용사 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부른 것은 하나님이 용사 되게 하신다는 것을 전제한 말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큰 용사로서 부름 받은 기드온에게 필요한 것은 힘이 아닙니다. 자질도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기드온이 약자라면 그냥 약자로 있으면 됩니다. 약자로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 됩니다. 용사에게 필요한 힘은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용사란 우리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용사입니까? 자기를 키우려고 하지 않고 약하면 약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그가 큰 용사입니다. 따라서 기드온에게 큰 용사라고 부르신 것은 '너를 이러한 인간으로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부여된 부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의지가 부여된 부름이라면 그것은 이미 되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의지는 어떠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되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지전능인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참으로 강한 믿음입니다.
자신을 보면서 힘이 있다고 생각되고 뭔가 일을 잘하고 있다고 여겨지면 힘이 나고 자신감이 생기는데, 자질이 없고 일도 잘 못하고 하는 일도 안된다고 여겨질 때 낙심해 버리고 포기해 버린다면 결국 자신의 힘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일이 안되고 막히고 자신이 무능하다는 것이 드러난다고 해도 낙심하지 않게 됩니다.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자가 곧 큰 용사입니다. 자신의 무능과 연약함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무능과 연약함을 인정하면서도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감이 없으면 되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감이 자신의 힘에서 나온 것이라면, 힘이 있다고 여겨지면 강하고 힘이 없다고 여겨지면 약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을 믿는 자는 용사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강함이 자신의 힘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힘만 꺾어 버리면 결국 강함도 꺾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힘으로 삼는다면 그는 자신의 조건이나 자질과 상관없이 강한 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용사란 자신의 강함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강하신 분임을 증거 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말합니다. 분명 자신의 강함이 증거될 때 그에 따른 쾌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입니다. 결국 나보다 강한 자를 만나면 자신의 약함을 실감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강해지는 것에 기쁨을 두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이 강하신 분이라는 사실에 기쁨을 두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가 바로 큰 용사인 것입니다.
약한 자로 존재하는 것이 싫습니까? 힘으로서 많은 사람을 이기고 그들을 굴복시키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까? 내가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충동이 있습니까? 누구에게든 지기 싫고 꼭 이기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까? 약자로 산다는 것이 죽기 보다 싫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까? 그렇다면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어리석은 우리들을 깨우치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들이 갖기 싫은 모든 것을 가지시고 스스로 약자의 자리에서 사신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들에게 외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그 음성을 듣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삿 6:14-24 표징
우리나라의 영어 교육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일입니다. 중학교부터 대학까지 10년을 영어를 배웠으면서도 외국 사람을 만나면 말 한마디하지 못하고 쩔쩔 매는 것이 우리나라 영어 교육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 학교에서의 영어 교육이 너무 문법에만 치우친 결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실제 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는 영어 교육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장을 분해하고 해석하는 것에는 능수 능란하지만 실제 대화는 전혀 하지 못하는 벙어리 영어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영어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우리나라 영어 교육의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어 교육의 문제가 마치 오늘날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문제로 생각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은 천국을 가기 위해서 시험을 치기 위한 문제집이 아닙니다. 성경을 잘 공부하고 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만 있으면 신앙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의 삶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단지 우리가 공부해야 할 과목으로 이 세상에 남겨진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학교에 가면 '성경'이란 과목이 있고 주일에 교회를 가서도 목사에게 확인 도장을 찍어야 점수가 올라가게 되어 있는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결국 아이들은 성경이나 교회출석을 점수를 얻기 위한 것으로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라도 성경을 가르치고 교회를 다니게 하겠다는 의도는 이해를 하지만 단지 교회를 나가게 하고 성경의 지식을 가르치는 것으로 끝난다면 결국 그들의 생활에서 과연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분명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기독교 학교에만 국한된 문제라 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문제이고 성도의 문제입니다. 제가 목사로서 답답한 것 중 하나는 제가 설교한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제가 설교한 대로 살아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예배당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이 실제 삶으로 연결되어지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한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여러분의 삶을 모르니 알 수 없는 것이 답답할 뿐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살수도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여러분을 졸졸 따라다닐 수도 없는 것이 아닙니까?
결국 문제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예배당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맞아' '그렇게 살아야지'라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고 해서 신앙이 다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맞다고 인정한 그 말씀 하나하나를 가지고 삶을 점검하고 두드려보고 생각하는 과정이 분명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삶이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간섭하는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삶을 간섭하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하는 말씀은 말씀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여러분을 간섭하시고 함께 하고 계시는데 정작 신자가 삶에서 말씀을 벗어버린 채 살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삶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0년 동안 영어를 배웠으면서도 외국인과 대화 한마디하지 못하는 벙어리 영어처럼 수십 년을 성경을 보고 교회를 다니고 설교를 들었으면서도 불구하고 삶에서 다가오시고 만나고자 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없는 상태라면 그것이야말로 벙어리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서 대화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납니까? 예배당이니까? 성경책 속입니까? 아닙니다. 삶입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이 곧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현장입니다.
삶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삶의 질과 환경은 다양하지만 동일한 것은 어떤 삶이라고 해도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삶의 질이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동일하게 모든 삶에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식적으로 영어를 배웠기 때문에 실제 대화를 하지 못하게 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의 차원에서 가르치고 배운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데는 무기력한 성경이 되버린 것이 오늘 우리들의 현실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배당에만 존재하고 실제 삶에서는 사라져 버린 하나님의 말씀, 참으로 안타까운 문제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이상하게 들려질 수 있겠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추상적으로 상상하면서 막연하게 '나와 함께 하시겠지'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의 신앙이 힘이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나 함께 하심을 막연하게 상상만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확신이 없으면서 다만 교회를 다니고 복음을 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와 함께 하실 것이다'라는 추측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은 무한한 능력과 힘으로 작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무기력한 모습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말씀이라는 말의 뜻은,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이 말씀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때문에 추상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마시고 말씀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면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삶에서 얼마든지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능력은 말씀 안에 있는 것이지 하늘에서 기회를 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능력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신자는 곧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제가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을 드릴 것은 예배당의 설교로 그치는 말씀이 되지 않도록 하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간섭하고 인도하고 가르치는 말씀이 되도록 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은 분명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것인가를 체험하게 될 것이고, 삶에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삶이 아니라면 그분의 하나님은 머리에만 존재할 뿐입니다. 머리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삶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부딪힐 때 전혀 하나님과 대화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일하시고 있는 현장을 깨닫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신자가 어떤 문제가 있게 되면 '하나님 나와 함께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결국 문제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문제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한 신자라면 함께 해달라는 요구를 하기보다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를 묻게 될 것입니다.
문제를 가져오시고, 문제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은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즉 물리적인 힘을 능력으로 이해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신자는 문제 해결을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속에서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불평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을 능력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자와 만나지 못한 자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이 길어 졌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는 문제점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문제점은 우리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린 대로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서 큰 용사라고 부릅니다. 도저히 용사로 불려질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을 용사라 부른 것은 능력이 기드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결국 용사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이 곧 용사로 불릴 수 있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네 힘을 의지하라는 것은 기드온에게 미디안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곧 기드온에게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믿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기드온이 살아오면서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기는 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믿음이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즉 반복되는 제사라는 의식 속에서 '나는 이스라엘 사람이다. 우린 하나님을 믿는다'는 생각은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만난 삶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예배들, 귀찮을 정도로 주어지는 행사나 해야 할 교회 일들(물론 은석교회의 상황과는 거리가 먼 얘기지만 안한다고 해서 믿음이 좋아지는 것도 아님을 잊으면 안됩니다)을 성실히 실천하면서 '나는 신자다'는 생각은 있을 수 있지만 정작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기드온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에 대해서 믿음 없음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7절에서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답답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징이 없었습니까?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사라지지 않고 함께 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야말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증거 하는 실제적인 증거물이었으며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되어질 수 없는 사건들로 이어지는 역사이지 않습니까?
물론 표징을 보여달라는 기드온의 입장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신기한 천사의 모습이 아니라 그냥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기드온은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난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만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롯을 구하기 위해서 나타났던 천사도 그냥 사람이었음을 볼 때 기드온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가 보통 사람의 모습이었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믿을 수 없었던 것은 자신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 자신을 큰 용사로 부르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니까 미디안 사람을 치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여호와의 사자가 보통 사람이 우러러볼 수 없는 신기한 모습으로 다가왔다면 과연 기드온이 표징을 보여달라고 했겠습니까?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가 자신과 다를 바가 없는 보통 모습이었다는 것에 믿음이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를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드온의 평소의 삶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삶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평소의 삶에서, 즉 보통의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삶이 아니었기 때문에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여호와의 사자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특이한 일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일로 여기는 사고방식이었기 때문에 표징을 요구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기드온과 같은 모습이 아닙니까? 평소 살아가는 보통의 삶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대해서 기드온과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큰 문제가 터졌습니다. 목사가 찾아와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를 보여달라'고 말을 했다면 결국 그 사람은 지금까지의 평소의 삶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결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밖에 안됩니다. 그냥 보통의 삶이었기 때문에, 남들도 똑같이 살아가는 삶이었기 때문에, 뭔가 특별한 것이 없다고 여겨지는 삶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란 항상 특이하고 극적인 것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고칠 수 없는 병이 들었다가 나았다든지, 죽을 뻔한 상황에서 극적으로 살아났다든지, 망할 뻔한 회사가 다시 일어섰다든지, 이러한 극적인 상황들이 있을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의 삶에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드온이고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의 삶에서 하나님이 다가올 때 '표징을 보여 달라'는 요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생각하는 보통의 삶이란 결코 우리가 이해하는 보통의 삶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고, 남들과 똑같은 삶인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런데 날마다 반복되다 보니까 그저 보통의 것으로 여겨져 버린 것입니다. 중병이 들어서 나은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징이라면 왜 날마다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 표징임을 깨닫지 못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기드온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항상 표징을 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고 부탁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바로 여러분의 옆에 계시고 여러분의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정작 여러분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오셔서 함께 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으로서는 참으로 답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만나고 그분과 대화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계속된다면 특별히 다른 표징을 구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대화하는 삶이라면, 설령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는 요구를 하기보다는 이미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 문제를 바라보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허둥대지도 않을 것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지 안하시는지 몰라서 낙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기드온이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며 대화하는 삶이었다면 미디안에 의해서 고통을 받을 때 그 고통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함께 한다면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미쳤느냐는 항변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잘되든 못되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드온의 문제는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과 대화하며 살아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드렸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자로서 드리는 제사가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단지 제사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함께 해주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예배를 드리고 그 어떤 선한 행위를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예배를 드렸다고 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나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기드온처럼 평소의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분들이라면 이 말에 대해서 결코 믿음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드온처럼 특이한 표징을 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표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표징이 너무 단조롭다는 것 때문에, 너무 일반적이라는 것 때문에 표징으로 여기지 않은 실수가 결국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인정하지 않도록 해버리는 것입니다.
15절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라는 말씀도 역시 기드온의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기드온은 극히 약하고 작은 자신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자신이 크게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한 것입니다. 약한 모습은 하나님이 함께 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사고방식과 일치하지 않습니까?
18절에 "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 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그가 가로되 내가 너 돌아오기를 기다리리라"는 말씀에서도 역시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기드온을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자신이 요청하면 하나님이 떠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내가 다시 와서 예물을 드릴 테니까 이것을 떠나지 말아달라는 것은, 예물을 드리는 행위가 주를 떠나지 않게 붙들어 둘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이것 역시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 뭔가 하려고 하는 것과 일치하는 행위이지 않습니까? 결국 이것도 하나님은 스스로의 의지와 계획에 의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한 행동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 우리들의 선한 행동 때문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 같습니까? 우리들의 종교적인 행동과 열심이 하나님을 우리에게 붙들어 둘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우리가 뭔가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이 바로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대화하면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에게 예물이 여호와를 붙들어 놀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가져온 예물을 반석에서 불이 나오게 함으로 태워버립니다. 여호와는 인간의 예물에 붙들린 분이 아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신 분입니다. 우리들의 행위와 성의 때문에 할 일을 못하시는 나약한 분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반석에서 불이 나와서 제물을 태운 것을 보고 기드온은 비로소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것을 압니다. 그리고 22절에서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면 죽는다는 것은 기드온이 알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었습니다. 기드온의 지식은 기드온을 두렵게 만들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죽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왜 죽지 않는다고 말씀한 것입니까? 하나님 스스로 기드온을 택하시고 찾아 오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드온은 '죽지 않을 것이다'는 말씀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여호와를 위해서 단을 쌓게 된 것입니다.
우린 기드온에게서 우리들의 실체를 발견합니다. 기드온의 모습은 오늘날 머리에만 하나님을 담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머리로만 생각한 하나님과, 실제 삶에서 날마다 만나고 대화하는 하나님은 너무나 다릅니다. 머리에 담고 있는 하나님은 여러분과의 만남이 없는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낙심하고 허둥대며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고 소리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날마다 삶에서 만나고 대화하는 하나님이라면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 그분은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 하심을 믿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약할 때도, 못날 때도, 죄악 가운데 있을 때도, 하나님은 변함 없이 여러분 곁에서 여러분을 도우시고 함께 하셨음을 안다면 여러분의 삶은 결코 나약할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새삼스럽게 표징을 구하거나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고 소리치지도 않습니다. 다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으며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순종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신자는 말씀과 함께 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단지 말씀을 읽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과 함께 함으로서 항상 말씀의 간섭을 받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간섭을 받고 산다는 것은 특이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단조롭다고 생각하는 삶에서, 이런 것이 신앙생활이냐라고 생각할 수 있는 보통의 삶에서 날마다 그리스도로 인해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징을 여러분 자신에게서, 그리고 평범한 삶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삿 6:25-32 우상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언제나 우상과 싸우신 하나님입니다. 스스로를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시면서 하나님 외에 다른 형상을 만들고 절하고 섬기는 것에 대해서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겠다고 계명으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출 20:4-6절에 보면 십계명 중 제 2계명에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말씀을 합니다.
우상이란 형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을 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우상이 형상의 문제로 국한된다면 결국 불상이나 단군 신상 등을 섬기지 않는 것으로 우상과 상관이 없는 것이 되버립니다. 하지만 우상이란 그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징계를 받았던 것은, 그리고 그 일이 한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며 나타난 것은 우상은 인간의 본질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문제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상의 문제는 형상에게 절을 했느냐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왜 형상을 원하느냐의 문제부터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이스라엘은 섬겨야 할 형상이 필요 없는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해 낸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다른 형상의 인도를 받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상의 문제가 맨 처음 부각된 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산으로 올라가서 소식이 없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없다는 불안감에 금송아지, 즉 형상을 만듭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죄가 금송아지를 만들고 거기에 절을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왜 그들이 형상을 필요로 했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자기들을 인도하는 모세를 의지했고 그렇기 때문에 모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인도자가 사라졌다는 불안감에 싸이게 된 것입니다. 결국 모세를 보내신 하나님을 인도자로 섬기며 의지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형상을 만들게 된 동기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모세를 의지한 것 자체부터 이미 그들은 우상을 섬기고 그것에 절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우상이 되버린 것입니다. 모세라는 인간 자체가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모세를 의지하는 것이 곧 모세를 우상화 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구로서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자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사람 자체를 섬겨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대리자라는 명목을 내세워서 목사가 섬김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 이미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그 어떤 것도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든 바위든 나무든 경배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경배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 이유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죄에서 건져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신다고 해서 보이는 것을 의지할 대상으로 삼아 버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으로 대체해 버린다면 그것이 곧 우상인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면 아마 대부분의 교인들은 '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라고 생각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눈에 보이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의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잘 지은 예배당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극히 기독교적인 것이 우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절대로 그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다만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제대로 섬긴 신자들만이 우상의 정체를 파악할 뿐입니다. 지극히 기독교적인 것이 우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없이도 기독교적인 것만 있으면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믿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종교적인 자신들의 행위를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다만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수단일 뿐이지 결코 믿음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말하는 하나님, 그리스도도 단지 명목상 불러 대는 것일 뿐, 사실 믿고 의지하는 것은 자신들의 기독교적인 행위와 문화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으로 족한 줄 아는 모습이 보여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예배당은 없어도 상관없고, 메시아로 오신 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시라면 돈 없어도 괜찮고 심지어는 나라는 존재가 어떤 식으로 부인되어져도 괜찮다는 이것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분을 보이는 것처럼 섬기고 의지하고 있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흔히 우상을 섬긴다는 것을 형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을 하는 것으로 이해를 하기 때문에 교회는 우상과 완전히 결별된 단체로 인식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즉 불상이나 단군 신상에게 절을 안하기 때문에 교회는 절대로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려 버리는 것입니다.
얼마전 단군 신상의 목을 자른 목사가 구속이 되었다는 뉴스가 있었지만, 단군 신상의 목을 자른다고 해서 우상이 단절되는 것은 아님을 그 목사는 몰랐던 모양입니다. 단군 신상이 우상 자체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사는 단군 신상과 싸우고 단군 신상을 세운 사람들과 싸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싸움을 통해서 자신은 우상과 싸우는 정의의 용사 편에 서 있는 사람으로 착각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우상에 대해서 이러한 오해를 하기 쉽게 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고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비 집의 바알의 단을 훼파하고 아세라 상을 찍어버립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오늘날 교회에 어떻게 비춰질 수 있습니까? 앞에서 말한 대로 단군 신상을 훼파하고 찍어 버리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으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은 단지 집안의 우상을 무너뜨리라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 구원하기 위해서 기드온을 보내실 때 그냥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집안의 우상을 무너뜨리게 하고 보내시는 것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아비 집의 바알의 단을 훼파하고 아세라 상을 찍어 버리라고 하셨을 때 기드온은 이 일을 감히 백주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했다고 합니다(27절). 기드온이 백주에 하지 못하고 몰래 한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아비의 가족과 성읍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아비의 가족과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 한 것은 바알의 단과 아세라 상이 자기 집안과 그 성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알은 농작물 수확에 도움을 두는 신으로 섬기던 우상입니다. 결국 바알을 훼파해 버린다면 성읍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농작물 수확에 나쁜 영향이 오게 된다는 믿음을 주게 됨으로 그들에게 반감을 받게 될 것이 뻔합니다. 기드온은 이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아비 집의 바알의 단을 훼파한 것으로 인해서 성읍의 사람들이 반발을 하고 나선 것을 볼 때 기드온 아비 집의 바알의 단은 단지 그 집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온 성읍의 사람들과도 연관이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기드온이 무너뜨린 우상은 온 성읍의 반발을 사게 되는 것이었고 기드온은 이것을 알았기에 백주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몰래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기드온에게 아비 집의 바알의 단을 무너뜨리라고 하셨겠습니까? 기드온 아비 집이 섬기는 바알의 단과 아세라 상이 보기 싫어서이겠습니까? 그렇다면 기드온 아비 집의 단만 무너뜨릴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있는 단까지 모두 무너뜨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도 전국의 절에 있는 불상은 다 무너져야 하고 그 어떤 신상이라고 할지라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앙에는 단절과 사귐이 함께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아비 집의 바알의 단을 무너뜨리게 하심으로서 기드온에게 이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사로 등장하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과 사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귐에 있어서는 필히 단절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어느쪽 편도 아닌 중간 지대에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우상을 섬기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아니었다가 하나님이 부르실 때 하나님과 사귀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이 우상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닌 중간지대에서 아무것도 섬기지 않는 존재라면 단절이라는 것이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필히 하나님이 아닌 다른 쪽에 매어 있던 존재라면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기 위해서는 자신을 붙들고 있던 세력과의 단절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게 매인 자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이 매어있던 것에서 자유함을 얻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우상에도 매어 있고 하나님에게도 매인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말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눅 16:13절에 보면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은 어느 한쪽에 매인 자로 살아간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중간지대에 있다가 내가 원하는 것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날 때부터 사단에 매이고 우상에 매인 자로 살아가다가 자유함을 얻고 그리스도에 매인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때문에 기드온에게 아비 집의 바알의 단을 무너뜨리게 하는 것은, 기드온으로 하여금 단절과 사귐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이 일에 있어서 아비와 성읍의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우린 이것을 '기드온이 믿음이 약했다'라고 이해하기보다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기 위한 단절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아비 집의 바알의 단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아비 집의 사고방식과 단절함을 뜻합니다. 즉 아비의 사고방식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아비 집만 아니라 온 성읍 사람들의 사고방식과도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절입니다.
아비 집 그리고 온 성읍과 단절된다는 것은 삶의 기반이 모두 무너지는 것을 뜻합니다. 자식에게 있어서 아비란 힘입니다. 그래서 고아가 천대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힘이 되어주는 아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으로서 함께 어울리고 살아가는 이웃과 단절한 채 살아갈 수 있습니까? 단지 옆집과 어울리는 문제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사람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언제나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따라서 세상으로부터 반발을 받는다면 그것은 삶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기드온이 바알의 단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인생을 포기해 버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새로운 인생을 가르치십니다. 즉 아비를 의지하고 성읍 사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인생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힘되는 것으로부터의 단절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창 12:1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지시할 땅은 친척 아비 집의 힘으로 사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살아가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도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힘되시는 분임을 가르쳐 줘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드온부터 먼저 힘되는 것으로부터의 단절을 경험해야 했던 것입니다.
단절이 없는 사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귐이 없는 단절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단절되고자 애를 씁니까? 또 무엇과 사귀고자 소망하고 있습니까? 세상 것이 우리를 복되게 한다는 사고방식과 단절이 없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우상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여주여'한다고 해서 메시아로서의 주를 부른 것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들 속에서부터 우상으로 세워진 것과의 단절이 있어야 비로소 제대로 주님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바알의 단을 무너뜨리자 성읍 사람들이 그 소행이 기드온의 짓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기드온의 아비인 요아스에게 찾아가서 기드온을 내놔라고 합니다. 그가 바알의 단을 훼파하였으니 죽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28-30).
그러자 성읍 사람들에게 기드온의 아비인 요아스가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쟁론하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쟁론하는 자는 이 아침에 죽음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 단을 훼파하였은즉 스스로 쟁론할 것이니라 하니라"고 외칩니다. 이 말은 바알이 진실로 신이라면 성읍 사람들이 바알의 편을 들어 주지 않아도 바알 스스로 자신을 위해서 쟁론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알이 신이라면 자신의 단을 훼파한 자를 그냥 두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을 보면 요아스가 바알의 단이 무너짐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믿게 된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요아스가 하나님을 믿게되었느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요아스를 통해서 외치고 있는 말입니다. '바알이 신이라면 스스로 쟁론한다'는 것입니다. 즉 반대로 생각한다면 우상은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 쟁론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고 있음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많은 현대 교회가 하나님을 인간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하시는 분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도와줘야 하고, 인간이 나서서 하나님을 위해 쟁론해야 되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하나님을 욕을 할 때 많은 신자들이 화를 벌컥 냅니다. 성읍 사람들이 화를 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믿는 신에 대해서 모독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독당한 신을 위해서 내 쪽에서 어떤 조치를 취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우상이 되어버린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한 존재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자신을 훼방하는 존재에 대해서 스스로 쟁론하실 것임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싸움의 대상은 불상이나 단군 신상이 아닙니다. 단군 신상의 목을 자르고 전국의 불상의 목을 잘랐다고 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참된 신으로 증거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싸움의 대상은 교회입니디. 신자의 싸움의 대상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교회가 우상이며 내가 우상으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알의 단을 무너뜨리고 새로 단을 쌓고 칠년된 둘째 수소를 드리라고 말합니다. 즉 우상을 무너뜨린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새로운 단을 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단은 칠년된 수소를 드리는 단입니다. 칠년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의미로 쓰여진 말입니다. 7이란 숫자는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이루어진 일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째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것은 천지 창조는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6은 하나님의 안식을 빼버린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에게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6은 인간의 수, 또는 짐승의 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볼 때 7년된 수소를 번제로 드리라는 것은, 인간의 죄용서는 오직 하나님이 개입하셔야 해결될 일이지 인간이 나선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결국 기드온이 바알의 단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단을 쌓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속에 있는 바알의 단은 우리 힘으로 뭔가 해보려는 의도입니다. 즉 인간의 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종교 행위를 의지하는 것들입니다. '내가 기도를 열심히 했으니까 하나님이 내 정성을 보시고 응답하시겠지'라는 생각이 곧 스스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자신의 행위에 가둬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기는 행위입니다. 그 우상이 무너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스스로 일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이 스스로 제물 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는 새로운 단이 세워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은 우상입니까 아니면 메시아로 오신 그리스도입니까? 진심으로 그리스도와의 사귐에 있다면 여러분에게는 단절이라는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경험이 여러분에게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세상에서 힘을 얻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자로서 하나님이 하게 하신 일을 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가를 보십시오.
여러분의 할 일은 이 땅에 오셔서 제물 되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보다 더 가치있는 것은 없음을 알고 그 앎이 삶에서 묻어 나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모두 우상임을 알고 살아가시면 됩니다.
삿 6:36-40 기적
성경에는 기적이라고 말하는 신기한 사건들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이나, 여호수아가 전쟁을 할 때 태양과 달이 멈춘 사건 등등 현대 사회에서는 체험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는 일들이 마치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기록되어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런데 단 하나의 사건만으로도 현대 사회를 놀라게 할 수 있는 신기한 이적들이 수없이 많이 등장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성경의 기적들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이 보통입니다. 어쩌면 현대 사회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기에 무관심할 수 있을 것이고, 성경의 기적이란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던 그때나 있을 법한 일로 여겨버리고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즉 성경이니까 그런 사건들이 있을 수 있겠지라는 생각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신기한 이적에 대해서는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구약에 나타난 이적은 그렇다해도 신약의 이적은 예수님의 시대에 있었던 일이고, 또 사도들이 행했던 이적이니 만큼 예수님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시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과 사도들이 행했던 귀신을 쫓아낸다거나 불치병을 고치는 소위 권능에 대해서 많은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성경에 나타난 이적은 성경으로 끝났음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일하신다면 아직도 그러한 이적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기적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까? 기적은 성경에나 기록되고 나올 신비한 사건들이지 지금 이 시대에서는 있을 필요가 없고 있을 수도 없다는 생각은 아닙니까? 소위 보수라고 주장하는 교단들의 기적에 대한 입장은 거의 이런 쪽입니다. 기적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혹 기적에 관심을 두게 된다면 신비사상에 빠졌다는 오해를 받기 십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적이나 신비한 현상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해도 만약 자신이 직접 기적을 체험한다면 기적에 대한 견해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평소 '기적은 없다'는 입장이었다고 해서 직접 체험을 한 후에도 '기적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체험은 어쩌면 성경보다 더 확실하고 실제적인 증거로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체험했다'는 것은 체험한 그에게 있어서는 확고한 신앙과 진리로 자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적에 대한 신자의 입장은 어떤 것이 바르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 나타난 기적이나 신비한 현상을 인간에게 직접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까?
본문에도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현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과의 전투를 앞둔 기드온이 하나님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적을 구하는 내용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하시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다면 그것을 믿을 수 있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37절에 보면 기드온은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슬이란 자연현상입니다. 그러나 이슬이 어느 특정 지역에만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타작 마당에 둔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기를 요구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자신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하신다는 것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요구를 들어 주십니다. 그러자 기드온은 다시 한번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이번에는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은 다 이슬이 있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드온의 요구대로 그대로 행하십니다.
아마 기드온은 처음에 시험만으로는 믿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고 주변에는 내리지 않는 것은 우연히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재차 확인하기 위해서 두 번째는 반대로 양털만 마르게 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두 번 모두 기드온의 요구대로 하나님이 행하셨을 때 비로소 기드온은 하나님이 자신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린 이러한 내용을 대할 때 가장 먼저 생각되는 것은 기드온의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시험을 하는 기드온의 불신앙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이 기드온의 불신앙에 대해서 책망하지 않고 기드온의 요구대로 행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표적을 봐야 믿을 수 있다는 기드온의 요구를 들어주심으로서 기드온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입장이 되어야 합니까?
양털에만 이슬이 내린다거나 양털만 마른다는 것은 분명 신기한 현상입니다. 더군다나 어느 날 아침에 우연이 일어난 일이 아니라 기드온의 요구대로 두 번이나 반복해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기드온의 입장이라고 할 때 여러분이 요구한대로 하나님께서 두 번이나 반복하여 신기한 기적과 같은 현상을 일으키셨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분명 하나님은 내편이라는 생각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간증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지 않겠습니까?
분명 기적과 같은 일을 요구함으로서 하나님을 확인하려고 한 것은 기드온의 교만이며 불신앙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기드온의 불신앙과 교만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요구대로 행하시는 것입니까? 이점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당시 기드온이 믿음이 좋았다면 '믿음이 좋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드온의 요구대로 행하셨다'라고 생각하면 현대인의 사고에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기드온의 믿음이 좋은 것도 아니고 또 선한 의도로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기 위한 좋지 못한 의도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그 요구대로 행하신 것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볼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우린 기적 그 자체에 매달립니다. 기적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는 도외시 해버리고 기적을 받은 사람 자체에 의미를 둬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이 항상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쪽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기드온을 보면서 마치 기드온이 능력이 있어서 마음대로 기적을 일으킨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도란 하나님이 주신 기적을 증거 하는 증인의 위치에 있는 것이지 기적을 행하는 위치에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그 어떤 기적이 주어졌다고 해도 사람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잘못입니다. 기적은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기드온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자 하고 기적에 대한 체험이 마치 구원의 증표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기적과 기적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 인한 결과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은 기적은 믿음의 증거도 아니고 구원의 조건도 아니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로 활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즉 기적이 일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분명 하나님의 백성일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서는 전혀 무시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기적에 관심을 두지 말고 기적을 받은 사람에게도 관심을 두지 말고 기적을 주신 하나님에게 관심을 두신다면 기적에 대해서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적을 체험한 자체에 의미를 두게 되고 기적을 체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사람들이 기적을 좋아하는 이유는 기적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적을 체험하면 체험한 자신에게 영광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우러러볼 것이라는 환상을 가집니다. 그래서 기적 같은 놀라운 일이 설마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는 가지지 않는다고 해도 기적에 대한 환상은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기드온의 요구대로 신비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해 보고 기적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가지는 것이 바른 것이며, 또 오늘날 참된 기적은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기드온이 신비한 현상을 요구한 것은 불신앙이고 하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좋지 못한 의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의 요구대로 행하신 것은 분명 하나님에게 다른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확인의 수단으로 신비한 현상을 일으켜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드온은 하나님이 행하신 신비한 현상을 봄으로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신비한 일을 행하신 것은 하나님이 기드온과 함께 하심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행하신 기적은 기드온이 하나님에게 선택된 사람이란 것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쓰여진 것뿐입니다.
기적이란 하나님이 성도를 다루시는 도구일 뿐 어떤 능력도 아니고 계시도 아닙니다. 기적이라고 말하는 현상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보여주시면서 까지 일하시는 하나님에게 능력이 있으신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기적에 대한 입장은 각각입니다. 기적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적을 원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적은 없다고 말하는가 하면 기적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 말씀드릴 것은 구약에 있었던 홍해사건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한다면 현대에도 얼마든지 그런 기적은 있을 수 있습니다. 38년된 병자가 예수님의 권능으로 나았다면 오늘날에도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신다면 그 어떤 병자라 할지라도 낳을 수가 있고 나사로처럼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적을 기대하고 살아가는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시고, 신약에서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 것 모두는 기적을 도구로 삼아서 계시하고자 하시는 것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홍해 사건을 통해서는 죽어야 할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로 인해서 살아나게 됨을 가르치시고 구원의 손길이 간섭되는 사람은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살아난 자들이었음을 계시하는 사건입니다. 때문에 홍해사건이 현대에 있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고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으로서 죄로 인해 죽어야 할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공로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있음을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홍해사건을 보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보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을 수 없는 병자가 낫게 된 것도 역시 같습니다. 마 8:17절에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고치신 것은 우리들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임을 계시하시기 위해서 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병고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병고침을 도구로 삼아서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계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병을 짊어지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대신 우리 병을 앓아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질병은 인간은 죽어야 할 죄인임을 알려주는 증거물입니다.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가 되지 못하며 연약한 자로서 흙으로 돌아가야 할 자임을 보여주는 증거물일 뿐입니다. 따라서 병을 짊어지신 것은 인간의 연약함과 죽음과 죄를 짊어지신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불치의 병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수단이고 도구일 뿐, 병이 나았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의미로 남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 하나님이 하시고자 한다면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이 낳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기적이라고 하면서 좋아하고 그런 기적이 자신에게 일어나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결국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보다는 기적 자체에 매료된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제아무리 기적을 서너번, 아니 수십 번을 체험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천국 갈 수는 없습니다. 천국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갈 뿐입니다. 그렇다면 귀신을 쫓아내고, 병이 낫고, 양털에 이슬이 내리고 내리지 않는 신비한 현상을 수백번 체험했다고 해도 결국 그리스도의 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의 피보다 더 기적적인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 최고의 기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이 최고의 기적을 계시하기 위해서 성경에 기적들이 등장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결국 기적은 참된 기적이 무엇임을 가르치시기 위한 수단이며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기한 현상에 매료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라는 참된 기적에 매료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설사 여러분이 말할 수 없는 신기한 기적을 직접 체험을 했다고 해도 결국 바라보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기적 자체에 빠져들게 되고 기적을 체험한 것이 마치 자신의 믿음의 증표인양 여겨버립니다. 기적을 체험한 것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있음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기드온에게 신비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한 자로 살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을 다스리시는 방법으로 기드온이 요구한 신비한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아무나 기드온과 같은 요구를 한다고 해서 그대로 행하시지 않습니다. 기드온에게만 특별히 행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드온을 선택하시고 기드온을 다른 사람과 다르게 다스리시겠다는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도 하나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기 위해서 신비한 일을 요구한다면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실까?'라는 생각을 하지는 마십시오.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해도 어쩌면 이미 그런 생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신비한 현상을 원했다면 나도 신비한 현상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기 위해서 신비한 현상을 원한다면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은 그 속 내면을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고자 하는 열망보다는 결국 신비한 일에 마음이 끌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비한 일을 보고 싶은 마음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고 싶다는 것으로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신기한 일을 행하신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약 기드온처럼 신기한 일을 체험을 했다면 어떤 생각을 가지는 것이 옳습니까? '내 인생은 하나님에게 붙들린 인생이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기적을 체험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보이시면서 까지 나를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두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너무 믿음이 없으니까 기적을 보이시면서 까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사랑하며 사는 사람으로 만드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오히려 부끄러워하고 감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기한 일을 체험해야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는 비록 신기한 일을 체험하지 못했다고 해도 하나님이 육신으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죄인인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신 것을 놀라운 기적의 사건으로 볼 수 있으며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죄인된 인간이 천국에 가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다면 그가 바로 기적을 체험한 기적의 사람인 것입니다.
기드온에게 신기한 일을 행하신 것이 기드온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이신 것이라면,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 세상이 어떻게 다루실 것인가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 어떤 기적도, 신기한 현상도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들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합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통해서 죄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기적의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를 알았다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죄를 알았다면 죄를 해결하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까지 마음에 두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하시는 것은 왜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가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적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간섭하실 것입니다. 병고침으로 간섭하실 수도 있고, 아니면 환난과 망함으로 간섭하실 수도 있습니다. 신기한 일을 체험했기 때문에 기적의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이 함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이미 기적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감사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이미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임한 사람입니다.
진짜 기적은 신기하고 놀라운 현상을 체험하지 않고서도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신다는 것, 이것보다 감사할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간섭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인 선택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살아가도록 놔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안심되고 든든한 것이 또 뭐가 있겠습니까?
신비한 체험이 우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이 우리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간섭이 때로는 괴로움과 환난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시 받는 환난과 괴로움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거한다는 것이 더 중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간섭하시고 다스리시면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드시겠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