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말씀: 디모데전서 6:3-21 요절: 디모데전서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
예전에 어떤 분이 기숙사에 피싱을 하러 갔다가 내려오면서 마침 택시가 있어 타고 내려와서 하는 말이 '역시 돈이 좋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money 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이며, 부하려 하는 자는 침륜과 멸망에 빠진다고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돈과 부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피하고 경건에 이르고자 하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리하면 영생을 얻습니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지만 우리의 삶은 한번 밖에 없으며 그 나중에 심판이 있습니다. 부하려 하면 멸망이고, 믿음으로 선한 싸움을 싸워 이기면 영생이 있습니다.
I.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1-10)
3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당시 에베소 교회에는 영지주의나 율법주의 또는 금욕주의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어 복음역사를 혼란하게 하기도 하였지만 에베소가 무역도시인지라 성도들 가운데 부자들도 많았습니다. 세상의 영향을 받아 부자가 되려고 하는 자들도 많았습니다. 이들은 생각이 복음에 있지 아니하고 다른 교훈을 말하였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궤변을 늘어놓는 소피스트들이 있어 웅변과 변론술을 가르치고 돈을 받았습니다.
이와같은 사람들이나 이같은 자들의 말을 듣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마음을 드리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4,5절을 봅시다.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이때 교만하다는 것은 conceited로써 자신의 능력과 생각에 대해 자만하여 우쭐대는 것을 말합니다. 남들이 잘생겼다고 하면 정말 그런줄 아는 배우와 같은 내용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말씀에 마음을 드리지 않으면 금방 이렇게 되어 이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통해 자신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게 됩니다. 말씀을 잃어버려 경건이 신앙목표가 아니고 다른 욕심이 목표가 되어 순종이 아니라 다툼이 일어납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초대교회에서 사람들이 많아졌을 때 말씀과 기도보다는 구제에 힘을 기울이자 성도들 간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행 6:1,2).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은 것이 마땅치 않다는 것을 알게되자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리라는 방향을 잡았습니다(행 6:4).
6절을 봅시다.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지족하는 마음이란 분수를 지켜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아는 것입니다. 현재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하는 믿음생활이 큰 유익이 됩니다. 장막생활을 하면서 우리에게는 왜 식기세척기가 없을까 하고 불평 불만을 가진다면 믿음의 훈련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7,8)." 현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 때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을 이유가 없어집니다. 자신이 어떤 물질적인 형편에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깨끗하게 나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믿음생활에 있어서도 지족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공동체에서 타이틀이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나는 왜 이럴까라고 생각한다면 경건에 이르기가 힘들어집니다. 현재 나의 믿음의 분량에 지족하면서 어떻게 하면 믿음의 진보를 이룰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가난하든지 부한 형편에 있든지 매이지 않았습니다. 빌립보서 4:11-13을 찾아서 읽어봅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가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 사도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하였습니다. 그 비결은 능력주시는 자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적인 형편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도록 믿음의 투쟁을 할 때 자족하며 경건에 이르게 됩니다.
지족하며 믿음을 가지려 하기 보다 물질을 더 가지려 하는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9절을 봅시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말씀을 읽고 말씀의 방향을 좇아가고자 하기 보다는 물질적인 무엇인가를 더가지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에 빠집니다. 부자가 되고자 하면 생각의 방향이 자꾸만 그쪽으로 가게 되어 결국 경건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유혹이 오고 함정과 욕심에 떨어져 허우적거리게 되고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현세에서의 파멸인 침륜과 사후의 파멸인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말렉을 쳐서 다 진멸하라고 하였는데도 좋은 것은 남겨두고자 하는 욕심이 생겨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었습니다(삼상 15:18-23). 이로 인해 그는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끊임없는 두려움에 시달리다가 결국 자결을 하고 말았습니다.
10절을 봅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을 사랑하는데서 모든 악이 나옵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고대에서나 예수님 시대에서나 요즘같이 산업화가 된 사회에서는 특히 돈이 없이는 하루도 살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성경에서 악이라 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벗어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게 되면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믿음에서 떠나게 됩니다.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급기야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이 떠나면 근심이 찾아듭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의 제자 빌립은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들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는 말씀에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무리를 어찌하든지 먹이고자 하는 생각보다는 돈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대로 소유를 팔아 하나님께 가지고 나오면서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근심이 찾아들고 성령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속이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혼이 떠나가버렸습니다(행 5:1-11). 이 말씀은 우리의 전재산을 다 주님께 드려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믿음이 없을 때 근심을 하게 되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근심이 생겨 성령을 속이게 된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돈을 관리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장사하라' 하셨고, 주인이 맡긴 돈을 관리하지 못하고 땅속에 묻어두었던 자는 쫓겨난다고 하셨습니다(마 25:14).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여 가난함을 원하는 것은 병든 자의 생각입니다. 노동의 능력이 있는 자가 얼마든지 일을 할 수 있는 자가 걸식을 하는 것은 태만이며 죄악입니다. 단지 나태와 죄 깊은 향락에 대한 유혹을 즐기기 위해 돈을 사랑하거나. 또는 후일에 안일하고 근심없는 생활을 위하여 부를 추구하는 것은 그 사람을 멸망케 합니다. 누가복음 12:15-21을 보면 소출이 풍성해진 부자가 하나님께 감사하기 보다는 곡식많은 것으로 인해 마음이 부요해져서 '영혼아 여러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습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자 열심히 봉사하고 일을 하여 그 결과 수익을 올린다면 그 수익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또한 마땅히 하나님과 하나님의 역사에 내어놓아 하나님께서 쓰시도록 하는 것으로 기쁜 것입니다. 결국 근본 생각이 어떠하냐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쾌락을 구하는가, 일을 구하는가, 하나님과 하나님 역사를 생각하는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계심과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믿을 때 돈이 주는 유혹과 함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II.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11-21)
11, 12절을 봅시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 디모데는 부하려 하는 생각,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어찌든지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는 선한 싸움을 싸워 영생을 얻어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강력히 권면하였습니다.
의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셨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천지를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더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 의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중국의 진나라 때 재상 이사가 청년시절 시골의 하급관리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이사가 관청의 변소에서 쥐들이 불결한 것을 먹다가 사람이나 개가 접근하면 놀라서 달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사가 창고에 들어가니 창고에 있는 쥐들은 쌓아놓은 곡식을 먹으며 큰 건물에 살고 있으므로 사람에게 위협받는 근심이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이사는 '인간의 현 불현은 쥐나 다름없다. 몸은 두는 장소에 따라 그렇게 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여 정치학을 공부하고는 그동안 섬기던 작은 나라를 떠나 큰 나라인 진으로 가서 천하를 통일하는데 일조를 하고 재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환관 조고가 진시황이 죽었는데도 아직 죽지 않았다고 하고 둘째 아들 호해에게 위를 물려주자고 하였을 때 그렇게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환관 조고의 말대로 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조고의 모함으로 자신은 허리를 잘려 죽고 삼족이 모두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사가 조고에게 모함을 받아 아까운 인재가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의가 없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사기는 말하였습니다.
경건이란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있다는 경외심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는 경건이 없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진리를 증거하였는데도 진리가 무엇이냐 하며 하나님이 계심을 믿지 못하였고 예수님이 무죄임을 알면서도 무리들에게 눌려 자신의 입신을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내어놓았습니다.
사랑은 용서입니다. 비록 내 돈을 떼어먹고 도망간 자도 용서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창세기의 요셉은 자신은 팔아먹은 형들을 용서하고 이들이 회개하기 까지 도왔습니다.
인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목적을 가지고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초대 이스라엘 왕 사울은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사무엘이 온다고 한 때에 오지 않고 병사들은 자꾸 도망을 가자 사무엘 대신에 그가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로써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견뎠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오는 사울을 죽일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하나님께 맡기고 참았습니다. 인내는 엄청난 투쟁이 필요한 것입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인내하라고 합니다.
온유는 부드럽고 따뜻하여 우리 중에 누가 목자와 같이 대인 관계에서 늘 여유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를 행하면 유혹과 함정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부하고자 하는 마음, 돈을 사랑하는 마음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해결해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할 그때에도 사단은 예수님을 40일간 굶은 상태에서 '너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덩이가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극한 상황에서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심으로 이 싸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믿음의 싸움은 선한 싸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자 하는 투쟁입니다. 싸워라는 말씀은 시합에 이기기 위해 애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음란하고 패역하고 물질적인 시대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싸움, 첫째는 자신의 죄문제와 싸워야 하고, 둘째는 세상의 죄의 물결과 싸우고, 셋째는 세상에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그 결과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곧 영생입니다.
영생은 그야말로 오래사는 것입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면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습니다. 그 어디에서나 하늘나라를 누리며, 마지막 심판의 때에 구원을 얻습니다. 세상에 부자로 이름을 남긴 사람이 있습니까? 믿음의 사람이 이름을 남겼습니다. 이삭은 기근이 심한 가나안에 남으라는 말씀에 좇아 그랄에 남아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그야말로 자신이 좋아하는 명예, 여자, 돈을 죽을 고생을 하며 얻어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그를 전혀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강 하나를 건너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한 끝에 구원을 얻었습니다. 싸움이 시작되면 끝까지 가야 하고 결국에는 승리해야 합니다.
저는 편하게 돈벌고 살고자하는 소망으로 평소에 가지고 있던 뜻을 꺾고 경영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학생활도 졸업후 취직을 했어도 정말 재미가 없었습니다. 허무하여 술을 마시고 전봇대 밑에서 얼어죽을 뻔했습니다. 이런 저를 창세기 말씀과 마가복음 말씀이 구원해내셨습니다. 말씀을 더욱 공부하여 인생의 방향을 확실히 잡고나서 군대에 갈려고 하숙비와 퇴직금을 계산하여 퇴직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하였던 성탄헌금을 하게 되면서 많은 고민이 되었습니다. 기도 끝에 남아있던 돈을 헌금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그리고 하숙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래층 아주머니가 헌금하기로 한 금액과 꼭같은 액수를 제시하면서 제게 아르바이트를 제안하였습니다. 저는 너무나 놀랐고 하나님을 의뢰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돈 문제에 매이기 보다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훈련과 투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김해지역 캠퍼스 영혼들을 먹이고 세계선교를 위해 우리에게 1억 5천만원에 해당하는 부지를 구입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등기할 날만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계속하여 주님을 의뢰하며 믿음의 싸움을 싸워나갈 때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김해와 세계에 말씀을 계속하여 전파하는데 우리를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아멘.
이를 위하여 디모데가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사도 바울은 다시 한번 디모데에게 명하였습니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바울 사도는 기약이 이르면 다시 나타나실 그리스도 예수님, 죽임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찬양하였습니다(15,16).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이 믿음의 투쟁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하면 영생이 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에게 다시 한번 부자들에 대하여 이단사상에 대하여 명하였습니다(17-21).
결론적으로 부하려 하는 마음과 싸워 이기면 영생을 얻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일하면 하나님께서 필요한 물질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부지런히 쓰게 되면 돈도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주님과 주님의 역사에 드려 선한 일에 쓰면 우리 자신을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으로 물질관을 분명히 하여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더욱 1:1과 세계선교역사에 자신을 드려 영생을 얻는 자 되기를 기도합니다.
형제라고 경히 여기면 1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지상에 교회가 존재하면서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사랑이 넘치고, 어떤 교회는 파가 나뉘어서 서로 으르렁거립니다. 어떤 교회는 세월이 많이 흘러도 별 문제가 생기지 않는데, 어떤 교회는 1년이 멀다하고 큰 문제들이 터집니다. 이처럼 교회마다 각기 특징이 있습니다. 이러한 각 교회의 특징과 모습에 따라서 우리는 '그 교회는 참 좋은 교회다' 또는 '저 교회는 아주 좋지 않아'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이처럼 교회가 좋은 교회나 좋지 않은 교회가 되는 것은 무엇에 달렸을까요? 교회의 예배당 건물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운 교회가 됩니까? 프로그램이 좋으면 좋은 교회가 됩니까? 목사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면 성숙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아니지요. 교회는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교인으로 평가됩니다. 교회는 구성원 각 개인의 삶과 상관없이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각 사람 하나 하나의 모습이 연합되어서 교회라는 공동체의 모습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각 개인의 삶이 아름답게 변화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건물이나 프로그램의 내용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에 의해 교회가 좋은 교회인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가 교회를 좋은 교회, 아름다운 교회로 가꾸어가기 위해서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이겠어요? 교인들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해야 할 일은 성경말씀을 잘 가르쳐서 지식에 통달한 교인들을 만들어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에요. 그 말씀이 각 개인의 삶 구석구석에서 실천되고 그래서 사람이 변화되도록 도전을 주고 자극을 하는 것도 목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목사가 시어머니처럼 잔소리를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목사가 별 걸 다 간섭이야, 목사가 교회 일이나 잘 알아서 할 일이지 왜 남의 사생활까지 간섭하는 거야? 아무리 목사라고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나도 어른인데, 나도 체면이 있고 내 가치관이 있는 것 아니야?' 목사는 이런 불만들이 나오는 것을 각오하고라도 성도들의 삶 속에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삶에 대해서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는 목사라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제가 요즘 저 자신에 대해서 많이 반성하게 되는 것 하나가 이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어떻게 사는지 잘 몰라요. 여러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여러분의 인생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전혀 모른단 말이지요. 저는 사실 며칠 전에 장로님이 갑자기 행방불명되신 것에 대해 충격이 상당히 컸어요. 장로님 나름대로는 많은 생각과 계획이 있으셨겠지만, 저는 전혀 알지 못했단 말이죠. 늘 가까이 있고 날마다 얼굴을 대하면서도 말이지요. 이걸 보고 동상이몽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 도대체 어떻게 사세요? 이렇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우선 제가 너무 조심스러워서 그렇습니다. 저도 여러분의 사생활 침해 같은 것은 하고 싶지도 않구요. 그래도 어떻게 사는지, 말못할 어려움이나 고민은 없는지 관심이 없는 것은 물론 아니에요. 그렇지만 조심하다 보니까 무관심한 것처럼 되어 버리는 거예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목사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가 상담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 함께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애쓰는 일이지요. 그런데 그런 상담 요청하는 분이 하나도 없어요. 문제가 없어서 상담할 것도 없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문제가 많으면서도 목사한테는 비밀처럼 감추는 것 같아요. 혼자서 고민할 것 다 하고, 괴로워할 것 혼자서 다 괴로워하고, 그리고 일이 다 끝난 다음에야 그런 일이 있었노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사가 도움이 되는 목사가 아니에요. 또 필요한 목사도 아니지요. 그렇게 되면 결국 목사와 교인들간에 온전한 신뢰관계가 형성될 수 없지 않겠어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서로 그 선을 넘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현상유지를 해 나간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목사가 좋은 교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교인들의 삶을 권면하고 가르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어요? 바울은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목회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이 편지에서 교인들의 삶을 간섭하라고 말합니다. 2절 마지막에서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고 하지요? 이것들이 뭔가 보세요. 우선 1절에서는 종이 상전을 섬기는 태도를 다루고 있습니다. 종이 상전을 잘 섬기든지 아니면 삐딱하게 반항하든지, 목사가 무슨 상관입니까? 목사는 이 종이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헌금 많이 하고 교회 일에 부지런한 것만 챙기면 되지, 왜 주인을 섬기는 태도까지 간섭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이 구절의 배경은 노예제도입니다. 당시 노예는 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사회를 떠받치는 하부구조였습니다. 이 노예들이 경제, 사회, 문화, 학문,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활동함으로써 로마라는 특수사회가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고대의 이 노예제도는 근대의 노예제도와는 상당히 다른 것입니다. 근대의 노예는 인종차별에 근거한 것으로서 비인간화를 초래하는 것이었지만, 고대의 노예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당시의 노예제도를 배경으로 한 성경의 가르침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우리의 통상적인 사회생활, 특히 직장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상급자를 섬기거나 대하는 경우라면, 이 구절의 의미가 그대로 적용될 수 있겠지요. 성경은 노예제도의 부당성과 그 폐해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제도 자체가 아니라 그 제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세입니다. 세상을 평화롭게 하고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0여 년 전에 동구권이 붕괴되고 공산주의가 몰락했을 때, 서구권에서는 악한 제도가 종말을 맞이했다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위대한 승리라고 자화자찬을 했겠지요. 그러나 공산주의가 인간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고 자본주의가 인간을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욕심이 없고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공산주의를 맡겨보십시오. 그야말로 지상낙원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탐욕과 지배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자본주의를 맡겨 보십시오. 생지옥 외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어요? 제도가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제도를 악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선할 때 제도가 선하게 운용될 수 있는 것이지요. 성경이 관심을 가진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제도에 따라 좀더 선하고 좀더 악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제도를 운영하는 인간의 선함과 악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결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물론 최선의 제도를 만들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적합한 완벽한 제도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여러 제도와 규범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불편한 것도 많고 내 가치관에 거스리는 것도 많아요. 그러나 그 제도와 규범이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의 논의는 두 번째 문제이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로마 제국 안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생겨나면서 많은 노예들이 이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어쨌거나 노예는 노예제도라는 현실적인 제도 안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집단입니다. 즉 제도에 대한 불만계급일 수 있지요. 그러던 노예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참된 인간의 회복과 해방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종이나 자유자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 없다는 놀라운 하나님의 선언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자기의 소유로 그렇게 부르신 노예들에게 자신들에게 불리한 이 제도를 거부하고 봉기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그 제도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현실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더 잘 믿는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을 봅니다. 사회생활을 희생해야 교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지요. 이 세상과 결별해야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있다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적어도 오늘 이 말씀에 의하면, 사회생활에 충실하지 않고는 결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직장에서나 학교에서, 즉 교회 밖에서 그 제도에 충실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충실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것은 정말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충실하지 않을 때,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훼방을 받게 되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모든 행위를 규제하는 원칙이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제도나 법이 금지하는 것을 행했을 때, 문제는 하나님의 교훈이 훼방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은 불법을 행해도 되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을 밝히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우리의 행동을 제약한다는 것이지요. 어떤 집사님은 자동차 뒤에다가 기독교인이라는 물고기 표지를 붙였는데, 그 이유는 운전을 하면서 난폭운전과 법규위반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더군요. 2절의 말씀은 이 세상의 제도에 의해 형성된 관계가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경우입니다. 노예가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주인도 예수를 믿는 경우입니다. 상당히 미묘한 문제지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갈 3:28)라는 선언과 믿음을 주인과 종이 함께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노예는 주인을 만만하게 보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 같이 평등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선언이 우리의 현실적인 구별을 없애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어집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해서 한국 사람과 키위의 인종적인 구별이 없어지나요? 마찬가지로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하더라도 노예와 주인의 구별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라는 선언이 노예들로 하여금 주인을 섬겨야 할 의무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가 회사에서 사장이지 교회에서도 사장이야?" 이런 말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사장과 종업원이 같이 교회에 속해 있다고 해서 당장 회사에서 사장과 종업원의 역할에 변화가 생길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하게 될 때, 교회는 공동체 의식의 붕괴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 자동차가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른 정비소에 가면 100달러가 들 것입니다. 그래서 임집사님의 정비소에 갔습니다. 같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니까 80달러에 해 줄 거라고 기대를 하고 말이죠. 그런데 임집사님도 100달러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이 상했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이런 태도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합니다. 친구 사이에는 돈거래를 안 하는 것이 좋다고 하지요? 친할수록 예의를 지키고 우정을 깨뜨릴 여지가 있는 일은 피하는 것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입니다. 교회 안이라고 해서 이러한 보편적인 가치가 무시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같은 교회에 다니니까 100달러 짜리를 80달러에 해 줄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물론 임집사님 편에서 같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찾아왔으니까 100달러를 다 받지 않고 80달러만 받는다면, 이것은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돈 내야 할 사람이 그것을 아예 처음부터 계산하고 찾아가는 것은 안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온당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바울은 상전이 믿는 사람일 때는 안 믿는 사람을 섬기는 것보다 더 잘 섬기라고 합니다. 믿는 사람에게 가서 물건을 살 때는 다른 데서 깎는 것처럼 악착같이 깎아서는 안 된다고 읽을 수 있겠지요?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그 종이 섬김으로써 유익을 받는 사람이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고 사랑을 받는 사람, 즉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법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종은 상전을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함께 소유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종으로서 주인을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같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일도 쉬운 것만 맡겨주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잘 섬겨서 그 주인에게 더 큰 유익을 주는 것이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약 임집사님이 정비소를 열었다면,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임집사님의 정비소에 가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같은 교회 다닌다고 싸게 해 주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같은 한국 사람이라서 못하는 영어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까?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집이 장사가 잘 되도록 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같은 그리스도인이 장사가 잘 되도록 도와주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결국 인간관계입니다. 그런데 보통 인간들의 관계가 아니라 특별한 인간들의 관계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인간들의 관계지요? 그런데 서로 사랑하니까 이 정도는 이해하겠지 하는 생각에 서로 실례를 범하고 각자의 위치를 망각하게 되면, 그야말로 형편없이 특별한 사람들의 관계로 변질되고 말 것입니다.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좋은 교회를 만들어 가는 중요한 한 가지 방법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서로를 만만하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상전도 같은 형제라고 경히 여기면 교회는 무너집니다. 서로를 더 존중하고 더 아껴줄 때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 튼튼한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역시 골치 아픈 이단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의 처음 부분에서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도록 한 이유가 에베소에 창궐하고 있는 이단의 공격으로부터 교회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의 첫 번째 교훈은 이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와서 다시 교훈하는 것이 이단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젊은 목사 디모데가 목회를 잘하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교훈과 조언을 했는데, 왜 유독 이단에 관한 이야기는 재차 강조를 하고 있을까요? 목회하는 데 필요한 것이 이단에 대처하는 것뿐입니까? 교회의 일꾼을 세우는 데 있어서의 지침, 교인들 사이의 인간관계, 또 대외적인 활동 등, 목사가 신경써야 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 중에 중요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요? 바울이 편지의 서두에서 언급한 내용을 편지 말미에 다시 들고 나온 것을 보면 바울의 강조점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를 다스리고 목회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이단에 대처하는 것이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왜 이단에 대처하는 것이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까? 교회의 일꾼을 세우는 것, 목사가 교인들을 대하는 태도, 교인들 사이의 관계, 이런 내용은 좋은 교회를 만들기 위한 조건들이지요. 우리가 교회를 섬기면서 마땅히 애써야 할 것은 좋은 교회를 만드는 일입니다. 우리 주사랑교회는 좋은 교회입니까? 아니면 형편없는 교회입니까? 이것은 우리의 노력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고 충성하는지,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 격려하는 사이인지에 따라서 좋은 교회가 될 수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목사가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어서 세습한다는 비난을 받는 교회도 있고, 교인수를 계산해서 교회를 사고 파는 경우도 있고, 서로 싸우고 깨지는 교회, 목사를 쫓아내는 교회 등등 아주 좋지 않은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좋은 교회가 되는 데 실패한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충고하는 내용들, 그 교훈들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결과지요. 그러나 이단에 대한 바울의 교훈은 좋은 교회를 만들기 위한 조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가 되느냐 교회가 안되느냐, 즉 진짜 교회냐 가짜 교회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비록 욕을 얻어먹는 교회라 할지라도 거기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비록 교회가 깨지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았을지언정, 그들 역시 동일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아니게 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 것이지요. 교회에게 있어서 이만큼 심각한 문제가 어디 있겠어요? 다른 교훈들을 잘 지켜서 좋은 교회를 만들었다고 합시다. 목사의 능력도 뛰어나고, 교인들의 사랑과 믿음이 탁월해서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었다고 합시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들이 믿는 내용에 있어서 오류가 있고 잘못된 것을 믿게 된다면, 그 아름다운 교회가 무슨 소용입니까? 어제 밤에 인터넷 어느 게시판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광주의 어느 곳에 침례교의 간판을 내건 한 교회가 있는데, 대학생만 2,3백명이 모이고, 그래서 살아있고 생동감 넘치는 교회로 소문이 나 있는데, 사실은 요즘 대학가에서 골치 아픈 JMS 이단교회이니 주의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겉모습만 본다면 얼마나 대단한가요?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세속의 악한 성격을 띤 문화들이 젊은이들의 영혼을 잠식해 가는 세상에, 그 젊은이들을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교회, 또 그 젊은이들에게 호소력과 설득력을 가진 힘있는 교회, 그래서 미래가 밝은 교회...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 자랑스러운 모습을 가진 교회인데, 알고 보니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이 잘못된 이단이라면, 그들의 아름다움과 그들이 이룬 성과가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이 다른 운동이라면, 가령 민주화 운동이라거나 사회개혁을 위한 운동이라거나 또는 통일을 준비하는 운동이라면, 그들의 조직과 힘이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겠지만, 그것이 교회인 한,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쓸모도 없는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해악이 될 뿐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교훈이 바로 그것입니다. 디모데가 좋은 목사가 되기 위해서 힘써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나가기 위해 신경써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이 언급되었습니까? 감독을 세우고 집사를 선임하는 문제,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 과부들을 어떻게 돌봐야 할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많은 교훈들을 디모데에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디모데가 아주 튼튼한 교회, 모범적인 지도자들을 가진 교회, 교인들 사이에 신뢰와 사랑이 넘치는 교회, 어디에 내놓아도 모범적인 그런 교회를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잘못된 내용을 믿고 있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디모데의 사명은 에베소 시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강력한 이익단체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모범적인 공동체를 조직해서 사회에 선을 보이려는 것도 아닙니다. 디모데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교회에 장로를 세우고 집사를 뽑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로 알고 믿을 수 있도록 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행사도 많이 있고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지만,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진리가 선포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그 중심에 서 있지 않다면 다른 일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쨌거나 우리교회가 확실하게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선 교회, 진리 편에 선 교회가 되도록 애쓸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우스운 얘기입니다. 그렇지 않을 교회가 어디 있겠어요? 교회라면, 그리스도의 교회라면 다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문제는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해밀턴에 많은 이단의 활동이 왕성하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지켜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서 양보를 한다거나 자칫 실수해서 곁길로 가고 오류에 빠지게 되면, 그것은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 인생에, 우리 영혼에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가 건전한 교회가 되고 싶어할 것입니다. 이단이나 거짓된 가르침에 현혹되고 싶어할 교회가 어디 있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넘어갑니다. 또 많은 교회 안에 거짓 가르침이 침투해 들어옵니다. 이러한 일들은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끊임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탄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그런 거짓 가르침과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의 정체와 속성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선 이단의 표식이 있습니다. 이마에다가 '나는 이단'이라고 써 붙여가지고 다니는 표식은 아니지만, 바울은 여기서 이단의 표식을 몇 가지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첫째는 다른 교훈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뉴질랜드에 여행하고 돌아가서 뉴질랜드의 수도는 오클랜드라고 떠들고 다닌다면 이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믿을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말하는 사람 자신도 진짜로 오클랜드가 뉴질랜드의 수도인줄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제일 큰 도시이고 비행기도 오클랜드에 내렸으니까요. 모든 이단은 그리스도와 그에 관련된 진리에 대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면 무엇이 올바른 교훈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따질 수 있겠지요? 남대문 문턱이 박달나무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남대문에는 문턱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둘 중에 하나는 거짓 사실을 유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요? 이단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 우리가 틀렸다는 것이냐? 너희가 틀린 것이다. 너희가 수가 많다고 정통이냐? 아니면 역사가 오래 됐다고 정통이냐? 물론 정통과 이단은 숫자나 역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이 객관적 판단의 근거들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절대적 기준은 될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와 다르다고 해서 그들이 이단이 아니라 진리와 다르면 이단인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진리인가 하는 것은 다행히 기록된 말씀으로 주어진 성경이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르쳤던 것과 다른 내용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다른 교훈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바울과 다르면 이단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계시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성경의 많은 부분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기준이 될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 1:8)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새로 생겨나는 이단의 특징은 뭔가 새로운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새로운 계시를 받은 것처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가지요. 여러분,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말씀이라고 혹하지 마세요. 오히려 그런 것은 바른 말, 건전한 교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경시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행위인 것입니다. 누군가가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건전한 교리, 즉 삼위일체나 그리스도의 성육신 등을 전혀 다르게 이야기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이단의 표식이지요.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믿으니 얼마나 교만하겠어요? 자기와 다르게 믿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실상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말이지요. 진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과 무지는 늘 동행합니다. 정말 무지한 사람은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자신만이 진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상태, 이것이 바로 이단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어서 이단의 특징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고 그래서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을 유발시킵니다. 정말 골치 아픈 일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단에 대항하는 소모적인 논쟁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리고 그 노력을 복음 전하는 일에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이익이 되겠습니까? 물론 이단에 대처하면서 교리가 확정되고 진리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 긍정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지만, 이단에 의해 교회가 파괴되고 많은 영혼들이 거짓에 속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아픈 일입니까? 또 이들은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린 결과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기에 이릅니다. 이 사람들의 관심은 진리가 아닙니다. 이미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모습은 매우 경건해 보일 때가 많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종과 같이 거룩해 보이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사이비 종파의 교주들은 대부분 신도들로부터 하나님에 버금가는 존중을 받습니다. 실상은 진리를 깨닫지도 못했고 진리에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경건의 모양을 위해 애쓰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이 돈벌이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종교는 돈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천주교의 여러 수도회 가운데 큰 것 중 하나가 프란체스코 수도회입니다. 이 수도회에 내분이 생긴 적이 있습니다. 문제는 돈에 관련된 것이지요. 설립자인 프란체스코는 청빈을 이념으로 수도회를 세웠는데, 수도회가 커지고 많은 지지자들이 생기다 보니까 거대한 재산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체스코의 설립정신을 따르는 엄격파는 모든 재산을 버리고 다시 청빈과 금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현실을 인정하고 적응해야 한다는 온건파는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그런 억지주장이냐고 싸웠던 것입니다. 오늘날 대형교회들의 뒷이야기는 돈에 관한 것이 많습니다. 교회마저도 돈에 관한 한 비리와 의혹으로부터 멀지 않습니다. 교회가 돈을 모으기 위한 집단이 아니지만, 신앙과 종교활동에는 헌금이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돈이 모이게 되고, 거기에 순수하지 못한 욕심이 개입되어 문제가 생겨납니다. 종교적인 열정과 모이는 돈의 액수가 비례한다는 사실이 전혀 종교적이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악하게 이용되는 수도 많습니다. 에베소의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은으로 신상을 만들어 파는데, 그것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종교적 열성이었겠지만 파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좋은 돈벌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져온 새로운 종교에 의해 그의 돈벌이가 위협을 당하자 큰 시위를 벌였던 것입니다.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도 그런 사람입니다. 마술로 사람들의 마음을 장악해서 괜찮은 돈벌이를 하고 있었는데,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사도들의 기세 앞에서 그만 주눅이 들었습니다. 사도들이 기도하기만 하면 그 사람에게 하늘에서 성령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술과는 게임이 안되는 것입니다. 시몬은 이제 옛날의 좋은 돈벌이였던 마술을 버리고 새로운 돈벌이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내고서라도 그 능력을 사겠다고 했던 것이지요. 오늘날에도 경건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특히 거짓된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모습이지요. 진리를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기어이 경건을 가장하는 이유는 그것이 괜찮은 돈벌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가증한 것입니까? 이런 사람들은 꼭 이단이 아니라 하더라도 정말 없어져야 할 사람들입니다. 돈을 받고 기도해 주는 사람들이나 천국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천국에 관해 설교하는 목사들이 그렇지요. 미국의 목사들 가운데 10%는 천국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통계조사가 있었습니다. 우리 눈에도 악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멋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많이 보이는데,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요? 하나님의 진노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인간의 악한 욕심 채우는 일에 사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악한 일입니까? 정말 혼탁한 세대입니다. 이 악하고 혼탁한 세대에서 우리 교회가 순결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도록, 진리 위에 선 교회, 진리만 선포되는 교회가 되도록 우리가 모두 함께 힘을 모으도록 하십시다. |
돈이 웬수 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란 돈이 가장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회입니다. 생산 요소 가운데서 자본의 비중이 가장 크다고 보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를 영어로 capitalism이라고 하는데, capital이 ism인 사회, 즉 자본을 이념으로 한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는 모든 활동이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합니다. 이윤, 즉 자본이라는 가치의 추구를 위해서는 다른 가치들이 희생되기도 합니다. 이윤의 발생의 최고의 선이지요. 그래서 이윤이 발생하지 않는 기업행위는 사회악으로까지 치부됩니다. 며칠 전에 현대자동차의 정몽구 회장이 직원회의에서 "최근 일부 기업 사태에서도 볼 수 있듯이 회사가 이익이 나지 않으면 경영은 엉망이 되고 고용안정도 기대할 수 없으며 나아가 국가경제에도 악영향을 주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윤을 발생시키지 못하는 경제활동이 사회악이라는 말 아닙니까? 가령 적자만 계속 나는 회사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 회사는 존재할 가치도 없을 뿐 아니라 존재함으로써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게 됩니다. 결국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그런 기업이 도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구조적인 문제와 맞물려 도태가 되지 않고 남아 악영향을 끼치니까 구조조정이다, 워크아웃이다 하는 얘기들이 나오는 것 아니겠어요? 며칠 전에 정주영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도 나오는 것처럼 정주영씨 역시 빈손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공수래공수거,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것은 만고에 변할 수 없는 철칙이고, 지하철 입구의 거지에게나 재벌의 회장에게나 똑같이 공평하게 적용되는 법칙입니다. 그러나 똑같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고 해서 거지와 재벌 회장의 삶을 똑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빈손으로 떠났지만 정주영씨는 한국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커다란 역할과 공헌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가지고 누리는 부는 일시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과 이 세상에서 누리는 부가 일시적이라고 해서 우리가 거들떠보지도 않을 수 있습니까? 아무리 일시적이고 짧은 인생이라지만, 기왕 사는 것, 없이 사는 것보다는 풍족하게 사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어차피 죽을 인생이라지만 지하철 입구의 거지처럼 비참하고 고달프게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재벌 회장처럼은 못돼도 잘사는 게 좋지 않아요? 자본주의라는 제도는 상당히 악한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지만,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은 변할 수 없고, 또한 수천년의 인류 역사 속에서 현재 최후로 채택되어 시행되고 있는 이 자본주의가 앞으로 폐기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될 가능성은 거의 없게 보입니다. 이러한 조건과 상황 속에서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요?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비록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또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과 하늘나라 시민으로서의 삶이 충돌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6절을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했던 말과 정반대의 내용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5절은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경건은 하늘나라 시민의 가치이고 이익은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입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늘나라의 가치를 자본주의의 가치에 종속시키고 말았던 것이지요. 하늘나라의 가치가 자본주의의 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바울은 6절에서 '그러나'로 시작하면서 자본주의의 가치를 하늘나라의 가치에 종속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경건함을 추구하고 또 소유하고 있어도 그 경건이 자본주의의 가치 아래 있는 한 그 경건은 아무런 유익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경건이라는 하늘나라의 가치가 우리에게 효력이 있게 하기 위해서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많이 벌어야 그것으로 부를 누리고 출세를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의 가치인 이 경건을 우리가 소유함으로써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서는 돈과 경건에 대한 올바른 태도와 가치관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본주의의 가치를 하늘나라의 가치에 종속시키는 비결을 지족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간단히 말합니다. 만족함을 안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지족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가치체계와 양립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지족한다는 것은 역사 이래 자본주의의 가치에 대항하려는 사람들의 고민이요 갈등이었습니다. 자본주의의 가치란 자본주의 사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사회주의 역시 자본주의의 가치에 대한 대항이고, 고대로부터 어느 사회든지 이 자본주의의 가치가 모든 인간활동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도 이 자본주의 가치에 대항하는 고민이었고, 이러한 고민을 과감하게 실행에 옮긴 사람이 아씨씨의 프란체스코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간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다른 것은 다 끝이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욕망에는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더 많은 것을 얻어도 인간은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욕망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욕망을 제거했을 때 우리가 지족할 수 있게 되고, 그래서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믿음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으려는 우리의 경건이 우리에게 큰 이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지만, 사는 동안이라도 풍요롭게 사는 것이 좋겠지요. 그러나 만약 이 일시적인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영원한 풍요로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면, 이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이 세상에서 몇십년 사는 우리 인생, 할 수만 있다면 부자로 잘살면 좋지요. 그러나 이 몇십년 잘살려다가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다면 얼마나 낭패입니까? 물론 그렇다고 이 세상에서 비천하게 살아야만 영원한 생명을 풍성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지요. 이 세상에서 부를 추구하고 소유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되거나 영생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잘살고 싶어요. 저도 가난이 싫어요. 저도 고물차보다는 새 차 타고 싶어요. 이 영원한 생명에 손해가 없을 보장만 된다면 이 세상에서 잘사는 것이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일시적인 풍요로움을 위해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가치와 영원한 풍요로움을 위해 추구해야 할 하늘나라의 가치가 우리 인생에서 늘 사이좋게 공존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뭔가 하나를 다른 것에 종속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그러셨지요? 한 종이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구요. 또 한 샘에서 단 물과 쓴 물을 동시에 나오는 것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족하는 마음이 동반될 때 경건이 우리 인생에 큰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장이 노동자들 월급 떼어먹으면서 지족하는 마음을 배우라고 하면 되겠어요? 미국 같은 부자나라가 도와달라는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들에게 지족하는 마음이 없다고 비난한다면 합당한가요? 사실 제가 여러분에게 지족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말하기 전에 저 자신이 먼저 지족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지족하기에 완전히 도달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으니까, 나도 배우면서 여러분도 같이 배웁시다,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더 있습니까? 사도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고 합니다. 이 말씀 앞에 우리는 지금 얼마나 호화롭게 살고 있습니까? 그날 먹을 것을 얻기 위해 하루를 소비해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사치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지족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아이구, 그런 말씀 마십시오. 사람이 어디 밥만 먹고 삽니까? 철마다 이사다니는 것도 지겨운데 집이라도 한 칸 마련하면 그때 가서야 지족하게 될지 모르겠네요. 정말 그렇습니까? 부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진다고 사도는 진단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의 고대사회에서 사도가 이런 말을 했다면 오늘날 돈이 근본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무슨 더 할 말이 있겠습니까?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라고 했지요? 그러나 부를 추구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팔아야 할 시험이 없을까요? 자본주의의 가치를 잡으려는 길에 하늘나라의 가치를 포기하도록 하는 올무가 숨겨져 있지 않나요? 돈에 눈이 어두워져 양심도 팔고 사랑도 팔고 사람도 팔고 자신의 영혼까지 팔게 되는 어리석은 일들은 전혀 남들의 이야기뿐인가요? 바울은 급기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는군요. 아, 그렇다면 정말 고민입니다. 돈을 사랑할 것인가, 미워할 것인가? 이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 있으면 나오라고 해 보세요. 돈이 얼마나 좋았으면 청와대의 작은 방 하나 전체를 금고로 만들었을까요? 돈이 얼마나 좋았으면 그것이 나중에 자신을 파멸로 끌고 갈 것도 모르고 덥썩 받았을까요? 아니, 우리는 사실 그 정도로 돈에 눈이 어두워져 있지는 않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돈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르지요, 그런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좋아하게 될 수 있는지를 경험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말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돈을 미워하며 살 수는 없지 않아요? 당장 돈이 있어야 헌금도 할 수 있고, 돈이 있어야 아이들 학교도 보낼 수 있고... 그렇습니다. 돈이 중요한 가치인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비록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일만 악의 뿌리가 될 정도로 돈을 사랑해서 미혹을 받고 믿음에서 떠나는 일은 없을지라도, 우리가 돈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렇게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사실은 우리의 삶 속에서 매 순간 순간이 양립하지 못하는 두 가치 사이의 선택 아닙니까?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이 자본주의 세상의 가치 사이에서 우리가 방황하고 갈팡질팡할 때가 많지 않아요?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이 어디로 기우느냐, 이것이 우리 믿음의 척도이고, 그러한 갈등은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어가는 과정일 것입니다. 돈은 소중합니다. 돈은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더 소중하고 더 큰 가치에 종속되어 있을 때만 사실입니다. 만약 그 반대가 된다면 우리에게는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되는 재앙일 뿐이지요. 어떻게 해야 우리가 돈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지족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지금 내 형편에 만족할 줄 아는 것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한다는 것은 나에게 있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공급하셨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삼상 2:7). 하나님이 나를 부자가 되게 하셨으면 나에게 주신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사용하면서 감사하는 것, 또 하나님이 나를 가난하게 하셨으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주신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헛된 욕망을 갖지 않는 것이 돈을 사랑해서 낭패를 당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입니다. 평생을 가족도 없이, 쉴 만한 집 한 채 마련하지도 못하고 먼 길을 다니며, 그것도 가는 곳마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누명을 써야 했던 바울이 하는 말을 보세요.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요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알았노라"(빌 4:11-12). 가난하고 비천하게 되어도 비굴하거나 신세를 한탄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거기서 자족할 수 있다는 것, 얼마나 큰 믿음입니까? 부자가 되고 풍요롭게 살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더 욕심을 부리지도 않고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으면서 그 형편에 적당하게 인생을 즐기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또 얼마나 멋진 모습인가요? 물론 저는 바울이 풍요롭고 여유롭게 살았던 적이 있었으리라고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지족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비천에 처하거나 풍요에 처하거나 지족하며 하나님을 인정할 것입니다. 반면에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가난하게 되어도 돈을 사랑해서 양심과 사랑을 배반할 것이고, 부자가 되어도 돈을 사랑해서 믿음을 저버리고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부모 세대만 해도 저녁을 굶고 저녁예배에 나와야 했던 분들이 많았고, 내일 아침 먹을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도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주신 것들에 지족하지 못하고 경건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추구할 수 있습니까? 정주영씨가 자본주의 사회를 위해서는 큰 일을 했고, 자신의 짧은 인생은 매우 성공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영원한 가치는 얼마나 추구했고, 그의 영원한 미래는 얼마나 지혜롭게 준비했습니까? 우리가 비록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돈을 벌어야 하고 세상의 가치를 얻기 위해 수고해야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우리의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경건한 모습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형편에 두셨든지 지족하기를 배우는 것이 돈을 사랑하게 되는 일만 악의 뿌리를 미연에 방지하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지족하는 마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경건으로 돈을 이기는 하늘나라의 시민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
부자도 천국에 간다 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한번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여쭈어보았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은 계명들을 열심히 지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단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인증을 받으러 온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 사람은 예수님의 말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인증 받기는커녕 그렇지 못하다는 것만 확인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돌아간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폭탄선언을 하셨습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이 말씀에 제자들이 심히 놀랐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 놀래키려고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장난삼아 한 농담이 성경에 기록되었을 리도 없습니다. 그 사실 때문에 그 젊은 구도자는 근심하며 돌아갔고, 제자들은 심히 놀랐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에 전혀 놀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젊은 관원처럼 근심하지도 않습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감동을 주지 못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무시하며 삽니다.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씀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모두들 부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이 나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설령 자신을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말씀을 마치 예수님의 재치있는 농담쯤으로 받아넘깁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우리 인생이 심각해지기 때문입니다. 그 부자 청년처럼 근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이 그렇게 심각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그냥 이렇게 모르는 체하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괜히 이 말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가 그 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감당하지 못하느니, 차라리 그 문제에 연루되지 않는 것이 편하겠지요. 솔직히 여러분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나 사실적으로 심각하게 생각해 보셨습니까? 만약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예수님의 말씀을 진지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거대한 혼란이 일어날 지도 모릅니다. 우선 교회들은 어떻게 될까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솟아오른 예배당들은 폭파되든지 아니면 국가에 반납되어야 할 것입니다. 통계상에 나타나지도 않는 교회의 재산들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안수기도 한방에 백 만원씩 받았다는 목사님과 거대한 사설왕국처럼 되어 있는 대형교회들은 낙타보다 훨씬 큰 몸집으로 바늘구멍보다 작은 하늘나라 입구를 통과하기 위해 어떤 특별한 대책을 가지고 있을까요? 만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에 가겠다는 마음으로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포기한다면 국가의 경제가 일시에 무너져 내릴지도 모릅니다. 기독실업인연합회, 말하자면 부자 기독교인 모임 같은 집단은 그 존재 자체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부정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이 모조리 재산을 내버리고 가난하게 되면 국가에서는 기독교인 관리부를 신설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기독교인들이 양심적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말씀에 충실할 의지도 없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게 되기 위해서 자기 몸에 걸치고 있던 옷가지마저 다 벗어던지고 그렇게 빈 몸으로 집을 나갔던 프란체스코 같은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놀라운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프란체스코처럼 되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신 의도도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모든 소유와 재산을 버리고 거지가 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을 보면 거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소수의 부자들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랬거든요.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다면 천국에 갈 사람이 없다는 것이지요. 큰 부자가 아니라 해도 좀 넉넉하게 사는 사람은 낙타는 아니라도 아마 돼지가 바늘구멍을 통과해야 하는 정도일 테니까요. 그럭저럭 사는 사람이라도 어쩌면 토끼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정도는 될 것입니다.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소유가 전혀 없는 경우는 드물 것이고,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개구리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은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어차피 바늘구멍 통과하지 못할 것은 낙타나 개구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보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사람의 재주로는 개구리도 바늘구멍에 들어가게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낙타라도 바늘구멍에 들어가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부자들이 정말 눈에 불을 켜고 읽어야 할 말씀입니다. 물론 부자들만 읽어야 할 말씀이 아닙니다. 낙타도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려면 이 말씀을 읽어야 하고 개구리도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려면 이 말씀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디모데가 목회했던 에베소 교회에는 재산이 많은 부자들도 꽤 있었을 것입니다. 돈이 많다고 교회에서 쫓아내야 하는 것은 아니지요. 부자들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우니까 헛수고하지 말고 아예 일찌감치 포기하시오. 그럴 수는 없지 않겠어요? 오히려 그 부자들도 회개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나라의 백성으로서, 변화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도록 인도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고 목사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 부자들을 이렇게 가르쳐서 구원받도록 하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 디모데는 부자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지 배우고 있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우선 마음을 높이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음을 높인다는 것은 교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낮추어본다는 것이지요. 돈이란 인간의 마음을 태우고 다니는 구름과 같습니다. 돈이 없을 때는 마음도 낮아집니다. 그러다가 돈이 조금 생기면 마음도 그만큼 높아지지요. 돈이 많아질수록 마음도 더 높아집니다. 이것은 성품이 나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수현상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즉 돈은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고, 그래서 돈이 많은 부자는 대체로 교만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잠언 기자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잠 16:18)이라고 했어요. 사탄이 인간을 타락시키기 위해 이용한 것이 바로 이 교만이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데 무얼 못하겠어요? 그러나 교만은 멸망의 지름길입니다. 사탄 역시 하나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고, 그렇게 높아지겠다는 교만 때문에 그렇게 타락한 것이었지요.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피조물로서의 자기 분수를 알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피조물인 주제에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다는 것은 조물주에 대한 도전이지요. 하나님으로서는 참을 수가 없는 행위인 것입니다. 같은 인간 사이에서, 같은 피조물끼리 누가 누구를 멸시하고 스스로를 높인다는 것 역시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리가 없고, 그래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 자신이 겸손의 모범을 보이셔서 종의 형체로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겠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그 겸손함을 품으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겸손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이고,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돈이라는 것이 그러한 인간의 올바른 관계를 파괴한다면, 돈이 얼마나 악한 것입니까? 돈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전혀 높아지지 않고 겸손하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부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낙타를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그 돈을 믿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디모데가 부자들을 가르쳐야 할 내용은 그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돈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돈이 없을 때는 먼 길도 걸어다녀야 했는데, 돈이 많아지니까 편안하게 자동차를 타고 다닐 수 있게 됩니다. 돈이 없을 때는 남의 눈치를 보고 심지어는 멸시를 당해야 했는데, 돈이 많아지니까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굽실거리고 내 눈치를 봅니다. 돈이 있으니까 아무리 어려운 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돈이 너무나 좋은 거예요. 돈만 있다면 이 세상을 천년 만년이라도 살고 싶어집니다. 즉 돈에 소망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인간의 행위는 거의 동일한 패턴으로 반복이 되는데, 돈과 하나님 사이에서의 갈등도 어디서나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불안할 때는 내세에 대한 소망이 깊어지고, 그래서 경건에 힘쓰게 되어 사회가 안정되고 풍요로워지면 이제 내세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게 됩니다. 한국이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교회는 2000년 기독교 역사에 전무후무한 부흥의 기록을 세웠습니다. 국민들의 희생 위에 경제성장을 이루려는 정부의 시책에 의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던 형편에서, 그리고 말 한 마디 잘못하면 큰 죄인이 되어야 하는 살벌한 폭력적인 권력 아래서 민중이 기댈 곳은 내세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허리를 펴고 좀 쉴 만해지니까, 그리고 돈이 가져다주는 편안함을 조금 맛보게 되니까 내세라는 것이 별로 매력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성장이 멈추고 오히려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는 불을 보듯이 뻔한 일입니다. 그리고 돈이 없을 때는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돈이 우리의 소망을 차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이 너무나 좋기 때문입니다. 돈은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게 되면 문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 다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문제는 하나님의 가치와 돈의 가치가 서로 상충된다는 것입니다. 즉 둘 다 동시에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우리 주님이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만일 돈이 많으면서도 돈을 의지하거나 돈에 소망을 두거나 돈을 사랑하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부자가 되어도 좋은 사람이고, 이 사람은 부자로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이런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럼 우리에게 돈이 주어진 이유가 무엇이냐? 왜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게 돈이라는 것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만약 우리가 부자라면, 아니 꼭 부자가 아니라도 우리에게 돈이 있다면, 그것은 그 돈으로 우리 배를 채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 배를 채우려고 할 때 마음이 높아지고 그 돈에 소망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돈으로 천국에 가기 위한 길을 예비할 수 있습니다. 낙타에게는 너무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 그 바늘구멍을 낙타가 얼마든지 드나들 수 있는 커다란 대문처럼 크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돈으로 내가 잘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 가지고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돈이 주어진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그 돈을 올바로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재산을 소유한다는 것은 어차피 일시적인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만 있는 일이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죽기 전에 재산을 내놓기도 합니다. 이것은 잘하는 일이 아니에요. 사는 동안에는 그 돈을 가지고 그 돈이 주는 든든함을 누리다가, 죽게 되니까 죽을 때는 어차피 그 돈 가지고 갈 수 없으니까 기왕이면 좋은 일이나 하자면서 내놓는다면 잘하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은 만약 죽지 않는다면 절대로 돈을 내놓지 않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돈을 주신 것은 나를 위해 쓰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선한 일을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돈을 나를 위해서만 사용한다면 뭐가 됩니까? 공금횡령죄를 범하는 것이지요? 돈이 많으면서도 인색하지 않고 자기보다 남을 위해 그 돈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그 돈이라는 낙타를 타고 대문처럼 넓어진 바늘구멍을 지나 천국으로 가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부자가 천국에 가는 방법입니다. 여기서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주는 바울의 모든 교훈과 충고가 끝을 맺습니다. 그 마지막 내용이 돈에 관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는 돈에 관한 교훈으로 끝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해도, 아무리 다른 부분에서 인정받았어도, 돈 문제에 걸리면 천국가는 길에 커다란 장애가 됩니다. 돈은 천국가는 데 우리의 발목을 잡는 덫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 돈으로 천국가는 고속도로를 건설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돈은 여러분이 천국가는 데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