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공산성(사적 12호) written by 힌국의 성곽 돌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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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곽 위에서 내려다 본 공주 공산성 입구 주변 모습 |
공산성(公山城)은 백제의 수도가 공주였을 때, 공주를 지키던 백제의 산성이다. 금강변 야산의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쳤다. 쌓은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며,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공산성으로,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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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입구에서 올려다 본 공산성과 금서루 모습 |
공주 공산성 안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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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번(금서루 입구 비석군), 4번(금서루), 6번(쌍수정), 8번(추정 왕궁지), 15번(임류각), 20번(영은사), 21번(연지), 25번(공산정) |
4방에 문터가 확인되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었는데, 1993년에 동문터에는 영동루 서문터에는 금서루를 복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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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공산성의 혈투' 촬영(1968년) 장소라고... |
▲ 금서루 입구에 위치한 비석군 |
목사 김효성의 비(충남 문화재자료 7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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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 김효성의 비(안내판 있는 비석) |
▲ 몸돌이 부러져서 붙여 놓은 비석도 있습니다. |
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효성(金孝誠) 선생의 비이다. 김효성(1585∼1665)은 광해군 5년(1613) 생원이 되었으며,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정조, 윤인, 이위경 등이 인목대비를 해치려고 할 때 이들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다 길주에 유배당하고 뒤에 진도로 옮겨 유배생활을 하였다. 인조반정으로 관직을 되찾아 의금부도사를 지냈으며, 청안현감이 되었고, 이후 남원, 죽산의 부사와 공주, 청주의 목사(牧使) 등을 두루 지냈다. 오랜 외직 생활동안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청렴하고 강직한 목민관으로 이름을 떨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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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민천교 영세비 |
▲ 특이한 비석이 있어서 한 컷... |
암문·치성·고대·장대·수구문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쌍수정·영은사·연지·임류각지, 그리고 만하루지 등이 있다. 또한 연꽃무늬 와당을 비롯하여 백제 기와·토기 등의 유물들과 고려·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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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4개의 성문 중에서 서쪽에 위치한 문루인 금서루(1993년 복원) 주변 성곽 모습 |
백제 멸망 직후에 의자왕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으며,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이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김헌창의 난(822)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이괄의 난(1623)으로 인조가 피난했던 곳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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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서루 |
▲ 금서루에서 바라 본 성곽 |
백제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의 백제 도성이었으며, 이후 조선시대까지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큰 중요한 유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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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서루 안쪽 모습 |
▲ 공산정 방향으로 성곽을 따라서 돌아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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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곽 위에서 멀리 바라 본 금서루 방향 |
▲ 공산성에서 내려다 본 금강교 |
공주 금강철교(등록문화재 23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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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에 건설된 금강철교. 현재는 소형차에 한해 일방통행만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
공주 금강철교(公州 錦江鐵橋)는 서울에서 목포를 연결하는 국도 1호선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다리로 1932년 1월 2일에 착공하여 1933년 10월 23일에 준공하였다. 철교가 완성되기 전에는 배를 연결하여 왕래했으나 비가 올 때에는 금강의 수량이 증가하여 통행에 어려움이 많았던 상황에서 1932년 충청남도 도청의 대전 이전에 따른 보상으로 철교를 완성하였다. 이에 의해 공주는 서울에서 호남에 이르는 육로 교통의 일부를 분담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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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정 |
▲ 공산정에서 내려다 본 공북루 방향 |
공북루(충남 유형문화재 3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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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북루와 멀리 바라 본 공산정 |
공산성의 북문으로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남북통로의 길이다. 조선 선조 36년(1603)에 관찰사 유근이 쌍수산성을 고쳐 세우면서, 이 자리에 있었던 망북루를 다시 지어 공북루로 고쳐 부르고, 그 옆에 월파당을 지었다고 한다. 현종 4년(1663) 관찰사 오정위가 낡은 것을 다시 지었으며 기록은 송시열이 하였다. 월파당은 효종 5년(1654)에 붕괴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앞면 5칸·옆면 2칸으로 규모가 큰 누각 건축이어서, 윗층에는 누마루를 깔았고 아랫층은 통행로로 쓰고 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공북루(拱北樓)’라고 쓴 현판은 성의 안쪽에 해당하는 추녀 밑에 걸려있다. 공북루는 송시열이 쓴 기록을 비롯해 여러 글이 걸려 있어 멋스러운 경치를 더해 주는 건물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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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북루 앞은 문화재 발굴 중에 있어... |
▲ 누에씨를 보관하는 저온시설 창고인 잠종냉장고 |
공주 공산성 연지(충남 기념물 4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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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곽 위에서 내려다 본 연지(蓮池)와 만하루(挽河樓) |
공산성 연지(公山城 蓮池)는 공산성 안에 있는 연못 중 하나이다. 전체적인 모습은 석축을 단이 지게 정연하게 쌓아 동서로 최대 길이 21m, 너비 12m 정도로 위를 넓게 하고, 아래는 최대 길이 9m, 너비 4m로 좁혀 쌓아 석탑을 거꾸로 세워놓은 모양을 하고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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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와 만하루 전경 |
서남 방향에는 잘 다듬은 돌 2매씩을 길게 쌓아 10여 개의 계단을 설치하여 출입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였다. 바닥에는 판판한 돌을 깔았고, 동·서벽쪽에는 너비 40㎝의 배수로를 설치하여 물의 흐름을 쉽게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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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의 내부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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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하루 |
▲ 만하루 앞에서 바라 본 연지 |
이 연못은 백제 때부터 계속하여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연못에 이를 수 있는 암문(성벽에서 잘 보이지 않는 지점을 택하여 몰래 출입하도록 만든 작은 문)이 발굴되어 산성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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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은사 앞의 은행나무 모습 |
영은사 대웅전(충남 문화재자료 5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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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은사 관일루 |
▲ 영은사 원통전 |
영은사<靈隱寺>는 [공산지]에 의하면 조선 세조 4년(1458)에 지은 사찰이며 광해군 8년(1616)에는 이곳에 승장<僧將>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영은사 내에는 주불전인 원통전<圓通殿>과 강당인 관일루<觀日樓>가 있다.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기둥 위에는 보를 받치고 장식도 겸해 새날개 형태의 부재<部材>를 짜맞춘 익공계의 맞배지붕을 하였다. 규모는 21m로 현재의 건물은 1933년 12월에 보수하였다. 관일루는 처마의 하중을 받고 장식도 겸해 나무쪽을 짜맞춘 공포를 기둥 위에만 배치한 주심포 계통의 팔작지붕이다. 임진왜란때에는 승병의 합숙소로 사용되었으며 이 곳에서 훈련된 승병은 영규대사의 인솔 아래 금산 전투에서 참여하였다고 한다. 이 영은사 부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불상 6구가 출토되어 조선시대 이전에도 이곳에 사찰이 존재했었음을 짐작케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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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곽 위를 걸으며 뒤돌아 본 연지 |
▲ 성곽 주변 전경 |
임류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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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과 신하들의 연회 장소로 추정되는 임류각(1993년 복원) |
임류각((臨流閣))은 공산성 내에 위치한 많은 건축물 중에 백제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그 건축시기가 명확한 유일한 곳이다. 고구려 장수왕의 세력이 남하하여 위례성이 위험에 처하자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는 이로부터 약 25년이 지난 동성왕대에 이르러 국정이 안정화됨에 되었고, 왕성 내에 연회를 즐기기 위한 목적으로 임류각을 축조(500년)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전한다. 지붕이 크고 가파른 특징을 보인다. |
명국삼장비(충남 유형문화재 3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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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국삼장비 |
▲ 임류각과 명국삼장비 원경 |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는 공산성 공북루 아래에 자리한 한채의 비각 안에 3기의 비가 나란히 서 있다. 이 비들은 정유재란 이듬해인 선조 31년(1598) 공주에 주둔해 있으면서 주민들을 왜군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준 명나라 세장수 이공, 임제, 남방위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
공산성 광복루(충남 문화재자료 5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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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루 |
▲ 영동루로 내려서며 바라 본 모습 |
공산성 안에서 군사가 주둔하던 중군영(中軍營)의 문이었으나 광복 이후 8·15해방을 기리는 뜻으로 광복루(光復樓)라 불렀다. 광복루는 원래 공산성의 북문인 공북루 옆에 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기고 웅심각이라 불렀는데, 1946년에 백범 김구와 성재 이시영이 이곳에 와서 나라를 다시 찾았다는 뜻을 기리고자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공산성 진남루(충남 문화재자료 4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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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의 동문 누각인 영동루(迎東樓) |
▲ 공산성의 남문 누각인 진남루(鎭南樓) |
공산성의 출입통로로 이용되고 있는 진남루(鎭南樓)는 성의 남문에 해당되며, 조선시대에는 삼남의 관문이었다. 원래 토성(土城)이었던 것을 석축성(石築城)으로 고쳐 세운 것은 조선 전기의 일이다. 진남루도 그 때 세운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고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71년에 전부 해체하여 원래대로 복원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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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연못 |
▲ 연못에서 바라 본 쌍수정과 쌍수정 사적비각 |
공산성 쌍수정(충남 문화재자료 4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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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단을 오르며 바라 본 쌍수정 |
▲ 쌍수정에서 내려다 본 추정 왕궁지 |
쌍수정(雙樹亭)은 공산성 진남루 서쪽에 있으며, 조선 영조 10년(1734)에 처음 세운 정자이다. 인조가 이괄이 일으킨 반란(1624)을 피하여 공주로 잠시 피난 왔을 때, 이곳에 머물렀던 일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한다. |
쌍수정 사적비(충남 유형문화재 3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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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수정 사적비 비각 |
▲ 비각 내부의 쌍수정 사적비 모습 |
쌍수정 사적비(雙樹亭史蹟碑)는 공산성 진남루 서쪽에 자리한 비로, 조선시대 인조임금이 이괄의 난을 피하여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비는 거북모양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목조 건축의 지붕을 모방한 머릿돌을 갖춘 조선시대 일반적인 양식이다.
비문에는 이괄의 반란, 인조가 난을 피하게 된 사실, 공산성에 머물렀던 10일 동안의 행적, 왕이 머물렀던 공산성에 대한 내용 등이 적혀 있다. 숙종 34년(1708)에 세운 비로,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비문을 짓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글씨를 썼다. |
공산성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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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중앙의 숲이 무성한 곳 전체가 공주 공산성입니다. 소재지 : 충남 공주시 산성동 2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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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우측의 나무들이 무성한 곳이 공산성입니다. 금강교를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
첫댓글 저도 갔는데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