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란 무엇인가 ? 그리고 문학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 그 대답은 그렇게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나라마다 문학의 개념이 다르고 시대에 따라서 다르며 작가에 따라서도 달라 질 수 있기 때문에 그 정의를 쉽사리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동안 문학에 대한 많은 해명이 있어왔지만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작가에 따른 서로 다른 문학의 개념과 정의를 넘어서 주목할 만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언어학의 발달과도 연관이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문학은 언어예술이라는 정의이다.
한마디로 문학은 ‘언어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문학적으로 과학이나 실용적인 지식에 반대하는 개념으로서의 예술에 속하기 때문이다. 문학의 매체는 언어이다. 문학의 매체인 언어는 회화나 조각의 매체인 시각적 징표나 음악의 매체인 소리와 구별된다. M. H. 에이브럼즈는 ??거울과 램프??에서 문학을 예술의 형식으로서 정의하는 방법을 우주, 독자, 작가, 작품이라는 네 가지 좌표로 나눠 다루었다. 그리고 각각을 모방론, 표현론, 효용론, 존재론(객관론)이라고 명명하였다.
문학의 기원설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그것은 크게 심리적인 욕구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입장과 사회적인 욕구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의 둘로 요약된다. 전자는 예술의 창작심리, 즉 예술본능을 중심으로 예술의 기원을 고찰하는 경우인데, 이에는 모방충동설, 유희충동설, 자기과시설 등이 있다. ‘모방충동설’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왔다. 예술이란 모방이라는 명제가 바로 그것이다. 영어의 art, 독일어의 kunst는 모두 ‘모방의 기술’, ‘모방의 기교’라는 뜻으로 쓰여졌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은 인간에게 있어 어린 시절부터 갖고 있는 것이요, 또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모방을 잘 하는 동물이요, 처음에 이 모방에 의하여 배운다”고 기술하였다. 모방충동설이란 그러한 충동이 예술을 낳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으로 희랍시대 이래 칸트의 유희충동설이 나오기까지 가장 권위있는 견해로서 인정되어 왔다. ‘유희충동설’은 인간에게는 본디 유희본능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유희본능에서 예술이 나온다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원래 유희본능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동물보다도 한층 높은 자리에서 앉게 한다. 다른 동물들은 종족보존과 생명보존을 위하여 모든 정력을 다 바치고 있지만, 사람은 그것만이 아니라, ?정력의 과잉?이 있어, 그것이 즉 유희본능의 시원이 된다. 그리고 예술은 이 유희본능이 밖에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이와같이 스펜서에 의하면 예술은 실제생활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 된다. 그것은 칸트가 <무목적성의 목적>이라고 예술을 無償性으로 규정한 것에 해당된다. ‘자기과시설’은 허드슨이 주장한학설로서 예술은 자기를 과시하려는 본능에 의하여 창작되어진다는 것이다. 허드슨은 그의 저서 ??문학연구서설??에서 문학을 만드는 인간의 심리적 동기로서 다음의 네 가지를 들었다. 1)우리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기표현의 욕구, 2)우리들이 인간과 그 활동에 흥미를 갖는 것, 3)우리들이 현실의 세계 및 공상의 세계에 대한 흥미, 4)우리들이 형식을 형식으로서 기뻐하는 마음
한편 후자 즉, 예술이 ‘사회적인 욕구’에서 시작되었다는 견해로는 헌과 그로세의 ‘발생론적 기원설’이 있다. 헌(Y. Hirn)과 그로세는 근대에 이르러 발달한 원시 인류사회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 등의 도움을 받아 일체의 예술현상을 사회성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이들의 학설에 의하면 유희충동설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하였는데, 우선 유희 자체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유희는 결코 그 유희충동설에서 말한 것과 같이 실생활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활을 회복시키고 생기있게 하는 필요에서 유희가 생겼다는 것이다. 타일러 또한 ??원시문화??에서 우리의 문화제도와 인공물들이 선대 사회로부터 주어진 패턴들의 반복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들은 예술의 기원이 심미성이 아니라 실용성에 의하여 발생하였음을 밝혀주고 있다. 문학기원설중 원시종합예술설 ballad dance은 실용성과 심미성이 결합되어 동시에 작용하였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한국문학 또한 시가는 원시종합예술로부터 비롯되었다. 옛날로 거슬러 오르면 시가는 독립된 양식으로서가 아니라 음악과 무용과 함께 미분화 상태로 있었다. 시가, 음악, 무용의 삼위일체 그러한 미분화 상태가 시가의 기원이자 원천이다. 그만큼 한국 시가는 처음에는 구비문학의 단계를 거치다가 문자발생 이후 기록문학으로 정착된 것이다. 그러나 이른 시기의 시가에 관한 자료는 찾아보기 어려운 형편이다. 다만 진수의 ??삼국지?? ?위지동리전?에 보이는 원시종합예술인 원시가무의 자취와 현존하는 호남지방의 ??강강수월래??와 영남지방의 ??쾌지나 칭칭나네??와 같이 고대의 집단예술을 방불케 하는 민속가무 등을 통하여 그 편린을 더듬을 수 있을 뿐이다.
이른 시기의 사람들의 예술활동은 주로 집단이 모여 음주가무하는 것으로 이루어졌고, 그것은 농경생활 및 제의와 관련된다고 생각한다.
1.2. 문학의 어원과 개념
1)문학의 어원
문학이란 무엇인가 ? 문학(literature)은 원래 라틴어 litera에서 왔는데, 그 뜻은 ‘언어로 된 모든 글’을 의미하는 letter와 같은 개념이었다. 즉 인쇄술이 발전하기 전에 나무껍질 등을 벗겨 동물의 뼈로 글을 쓴 것이다. 동굴의 벽에 글을 써놓은 것 등이 모두 litera의 범주에 들어간다. 따라서 예술적인 글뿐만이 아니라 실용적인 글의 개념도 모두 포괄하는 것이 문학의 원초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문학의 최근의 개념은 예술적인 의장이 포함되어 있는 글 즉 상상력에 바탕을 둔 미적인 범주의 글만을 포괄한다.
그리고 문학은 예술의 하위장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은 음악, 미술, 무용, 문학, 건축, 사진 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다음 항목인 문학의 속성에서 좀더 자세하게 언급하겠지만 문학은 예술 중에서도 ‘언어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의 매체는 언어이다. 문학의 매체인 언어는 회화나 조각의 매체인 시각적 징표나 음악의 매체인 소리와 구별된다.
2)문학의 속성
인간은 누구나 이데올로기나 유토피아를 가진 존재로서 진, 선, 미의 균형, 조화를 이룬 전인격체를 지향한다. 진, 선, 미중 어느 한 가지라도 갗추지 못한 인격체는 절름발이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중 예술은 미(美)를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장르이다. 예술(art, 독 kunst)의 어원은 라틴어 ‘ars'로서 조립하다, 궁리하다의 뜻으로 어려운 과제를 솜씨있게 해결할 수 있는 특수하게 숙련된 기술을 가리킨다. 학문과 경험의 중간형태인 테크네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생활상의 필요에 의한 기술‘과 ’기분전환과 쾌락을 위한 기술‘의 둘로 나누고 후자를 ’예술‘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예술에는 음악, 미술, 무용, 문학 등 다양한 장르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장르의 공통점은 아름다움(미)을 추구한다는 사실에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미에 대한 인식과 예술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언어에는 과학적 언어와 문학적 언어가 있다. 과학적 언어는 개념의 정확성을 바탕으로 삼는 언어를 말한다. 그러므로 과학적 언어는 대상과 언어의 관계가 1대 1의 대응관계에 있을 때를 뜻한다. 수학에서 1 + 1 = 2라는 수식은 답이 분명하다. 이런 경우 1이라는 숫자는 단 하나의 지시대상과 관계된다. 철학에서는 이런 관계를 외연( denotation)이라고 한다. 언어를 과학적 입장에서 사용한다는 것은 곧 그것을 외연에 충실하도록 또는 개념지시가 명백하게 되도록 사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언어의 사용을 지시적 사용이라고 한다. I.. A. 리차즈는 이러한 것을 진술이라고 명명하였다. 과학적 진술이나 법정 진술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한편 문학적 언어는 과학적 언어와 대척적인 관계에 놓인다. 문학적 언어는 내포를 통한 언어의 사용을 의미한다. 언어의 외연적인 측면을 개념지시라고 할 수 있다면 그 내포에 의한 사용을 우리는 함축적 의미에 의한 사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멘트에 흐느끼는 불빛
카페 프랑스에 가자
이 시는 정지용이 청년기에 쓴 시이다. 하지만 모더니즘의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따라서 외래어의 남발과 도시적 서정을 노래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감각적 이미지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카페 프랑스에서 거론되는 ‘뱀’의 뜻은 적어도 사전적 의미를 크게 벗어난다. 실제의 뜻이 더 큰 경우를 가리키는 것이다. 문학에서의 언어는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방향으로 언어가 사용되어 비유, 비약, 생략, 또는 상징 등의 용법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개개의 사물과 육체의 미는 우리에게는 대단히 자연스럽게 느껴지지만, 플라톤은 이것을 미의 가장 저급한 형태로 보았다. 즉 사물과 육체 등의 미는 주관과의 관계에서 비로소 성립하는 감각적 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참으로 순수한 최고의 미는 이미 감각적 세계를 초월해 있는 궁극적, 객관적 실재이고, 존재의 존재인 이데아 자체인데, 그것은 순전히 지적 직관에 의해서만 포착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감각적, 현상적 세계에 있는 것은 미의 이데아의 불완전한 반영일 때 비로소 아름다운 것이지 그 자체로서는 아름다운 것일 수 없다. 플라톤에 의하면 미는 모두 명석한 것, 명백한 것이지만, 그중에도 최고의 존재이자 이데아의 이데아인 ‘선의 이데아’는 미를 관조하는 정신보다는 미의 빛나는 극치로서 현현하는 것이다. 즉 인식의 궁극에 가서야 비로소 미의 체험도 극에 도달하게 되고, 그리하여 미의 문제는 이데아의 변증법과 깊은 연관을 맺으면서 전개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미에 대해 가장 통일적으로 서술한 것은 ??향연??과 ??파이드로스??이다. 사랑은 미를 향유하려고 하는 정신의 강렬한 파토스적 충동이며, 일종의 광기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정신은 이 에로스에 이끌려 감각적 현태의미로부터 출발하여 보다 고차적인 미를 추구하면서 점차 존재의 단계를 밟고 올라가 마침내 이데아 자체의 미를 바라봄과 동시에 참된 실재를 직관적으로 인식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와같이 플라톤이 지니고 있는 미의 본질 또는 가치는 정신으로 하여금 감각적 찌꺼기의 오염으로부터 스스로를 전화시키고, 현상적 세계의 속박을 탈피하여 영원한 존재와의 완전한 조화, 근본적 통일을 달성하도록 하는 작용에 있다. 한편 플라톤은 예술을 일종의 기술로 파악하였다. 인간의 행위가 어떤 대상과 목적을 갖는 경우에 그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이론적 지식, 방법이 기술인 바, 플라톤은 ??소피스트??에서 여러 가지 기술을 열거하여 그 분류와 평가를 행하고 있다. 거기에 따르면 기술은 우선 획득적인 것과 제작적인 것으로 양분되고 여기서 또 전자는 협의의 실천적 기술(수렵술, 상업술, 전술 등)과 인식적 기술로 나뉘어 지며, 후자는 신적인 자연의 생성과 인간에 의한 그 모방의 기술, 즉 예술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플라톤은 이중에서 예술과 인식적 기술을 모두 모방적 기술이라고 부른다. 인식은 덕을 획득적으로 모방하고, 예술은 자연을 제작적으로 모방한다는 것이다. 예술을 이렇게 규정하면, 예술의 합목적성과 진리성이 당연히 문제가 된다. 플라톤에 의하면 기술은 단순한 육감과 경험적 숙달로부터 순수한 학적 인식에 이르는 모든 이론적 지식과 방법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리하여 제작적?모방적 기술로서의 예술이 진리성의 측면에서 기술의 어떠한 단계에 놓여야만 하는가는 똑같은 모방적 기술인 이론적 인식과의 대비속에서 결정되는 바, 플라톤은 이것을 예술의 평가 그 자체로 간주했다. ??폴리테이아??에서 이데아의 모방인 침대를 또 다시 모방하여 묘사한 화가가 진리로부터 세 번째에 즉 침대를 만든 직공보다도 낮은 위치에 놓인 것은 예술의 대상과 내용이 예술가의 대상인식의 정도와 직접 연결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으로부터 여러 예술형식들간의 서열도 생겨난다. 회화는 거짓된 것, 외관을 표현하는 것으로 모든 예술중에서 가장 부정적으로 평가되며, 연극, 조작, 건축 등은 대상을 전형으로서 파악하고 조화와 균제에 보다 부합하는 것이므로 회화보다 높이 평가된다. 그리하여 계율과 조화 자체를 표현하는 음악과 시는 가장 창작적인 예술로서 특별히 포이에시스라고 불린다.
예술은 어떤 대상을 모방하는 행위를 통하여 성립한다. 그리고 플라톤이 모방이라고 하는 것에서 찾았던 참된 의미는 모방하는 사람이 그의 모방행위를 통하여 스스로가 바라보고 있는 대상과 유사한 것으로 된다는 데에 있다. 즉 예술가는 어떤 대상에 공감을 느껴서 표현활동(모방)을 행함으로써 또 향수자는 거기에 표현된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 어떻게든 모방의 대상에 스스로 접근해간다. 플라톤에 의하면, 예술의 이러한 존재방식이 예술의 독자적 의의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입장에 서게 되면, 참된 예술은 이상적 형식, 전형적으로서의 미를 표현함으로써 이것을 향수하는 자의 정신에 훌륭한 조화를 가져다 주고, 그리하여 선으로 향하는 습성을 만들어 내게 한다. 또한 예술은 그것을 향수하는 사람에게 쾌락을 준다. 플라톤은 그 쾌락의 질이 예술적 표현의 질과 깊이 관련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폴리테이아??에서는 저급한 감정을 자극하는 예술을 배척한다. 정신의 고귀한 부분이 예술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참된 예술적 쾌락이다. 그것은 미적 쾌락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보다 고차적 존재와의 부합, 조화로 이끄는 정신적 감동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은 플라톤이 이데아를 관조할 때 체험하는 순수한 정신적 신비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말한 바의 것이다. 뛰어난 예술에 관계하는 사람은 이러한 정신적 감동에 의해서 참된 존재를 모방하도록 촉발되는 것이다. 즉 예술가는 미의 이데아로부터 오는 영감, 신적 광기에 의해서, 향수자는 예술로부터의 쾌락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주로 수학적인 본질직관과 논리적 사변을 가지고, 종교적, 윤리적 혹은 정치적인 가치판단과의 연관 속에서 미와 예술의 본질을 규명했다고 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형상과 질료의 목적론적, 역동적 상관관계 속에서 바라보면서 미, 예술일반의 개념규정 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현실에 작용하는 경험적, 심리적 과정에 관심을 기울였다.
미 일반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방식은 일반 그리스인과 그리 다르지 않다. 즉 미는 선과 함께 목적인으로서 ‘인식과 운동의 원리’이고, 그 주된 형식이 질서와 균제와 한정이므로, 수학적 학문의 대상으로 될 수 있는 것이다.(??형이상학??) 그러나 이러한 미 일반은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심사가 아니다. 오히려 각 예술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구체적이고 특수한 미의 양태를 명확하게 인식했다는 점에서 플라톤과 비교했을 때 그 독자성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예술이 자연과 다른 점은 예술가의 내면적인 원리에 따라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다. 단순한 개개의 사상으로서의 존재로 보면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연속에 있다. 그러나 예술가가 이것을 대상으로서 하나의 통일원리에 기초하여 그 미를 ‘종합함으로써’ 전형화하고 이상화할 때, 비로소 자연의 미를 보완, 완성하는 예술의 독자적인 미가 성립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미는 크기와 질서에 있다”고 말한 것은 이러한 예술미 성립의 통일원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질서는 그 객관적, 형식적 측면을 대표한다. 음악과 시에서의 리듬, 하모니, 선율, 운율 등은 바로 거기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의 형식적 미 중에서 뛰어난 것으로 내적 형식을 들고 있다. 르네상스 이래의 고전주의 연극론에 의해 ‘3통일의 원칙’으로 편협하게 외적, 형식적으로 이해되었던 비극의 구성에 대한 그의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오히려 줄거리가 내적 필연성에 의한 통일을 유지하면서 하나의 완성된 전체로서 구성될 것을 요구하고 작품의 각 부분들 상호간의, 또한 내용과 전체의 길이 간의 내적인 비례관계에서 균제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크기의 개념은 미의 주관적 상대성의 자각에 기초를 둔 것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미에 대한 사상에 두드러진 특징을 부여하고 있다. 크기는 사물 본래의 성질과 주체의 관조라는 양자에 들어맞아야 하는데, 그러한 점에서는 보다 커다란 것이 보다 아름다운 것이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표현하는 미를 엄숙하고 숭고한 것에 한정하지 않고, 골계, 우아미 등등 비속한 것의 아름다움도 인정했다. 그러나 ‘크기’를 미의 가장 중요한 원리로 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자를 후자 보다 탁월한 미로 간주한다. 이것은 그가 선량한 성격을 표현할 것을 주장하고, 신과 영웅의 위대한 행위를 엄숙하게 묘사한 호메로스를 칭찬하고 있는 데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작으로서의 예술의 본질을 모방의 개념으로 포괄하고, 여기에 대응하여 예술을 향수하는 측면에 대해서는 미적 효과로서의 카타르시스를 들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개의 개념을 오로지 심리적으로만 고찰함으로써 예술의 독자적인 의의를 적극적으로 인정했다. 예술의 모방은 고도의 기술적 제작이며, 단지 관습에 따른 직공의 제작과는 구별된다. 왜냐하면 예술의 모방은 그 합목적성의 측면에서 볼 때 자연의 생성원리에 비교되지만, 그 합목적성은 예술가의 자각적 의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는 행위의 모방을 통해서 성격을 표현하는 것이지만, 무용도 신체의 리듬에 의해서 성격, 정서, 행위를 모방하며, 또한 음악도 성격의 직접적 표출인 리듬과 선율을 표현형식의 기초로 삼기 때문에, 시와 동일한 예술의 계열에 놓여진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성격표현의 방식은 모든 예술을 단지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평가하는 하나의 규준으로 된다. 예컨대 조형예술(특히 회화)을 사물의 감각적 형태의 모방이라고 해서 한 단계 저급한 예술로 간주하는 것은 성격을 모방하는 직접성의 정도에 따른 평가이다. 또한 시는 로고스를 매개로 인간의 행위를 전형화, 이상화함으로서 전형적, 이상적 성격을 여타의 예술보다 한층 잘 표현할 수 있으며, 감각적 대상을 넘어섬으로써 예술의 최고 단계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시는 역사보다도 한층 더 철학적이며 한층 더 뛰어난 것이다”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나아가 예술적 모방은 매체, 대상, 방법의 세 가지 관점에서 형식적으로 분류된다.
예술은 또한 미적 효과라는 측면에서도 고찰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서 카타르시스(배설, 정화)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예술의 독자적인 본질에 대해 매우 주목할 만한 설명을 할 수 있었다. 즉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이 정서의 카타르시스를 완수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음악의 교육적 효과와 나란히 카타르시스적 효과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아도 분명하듯이, 카타르시스는 비극이나 어떤 종류의 음악 등과 같은 예술에 항상 수반되는 미적 효과이며, 울적한 감정을 쏟아버림으로써 정신을 정서의 압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리하여 일종의 쾌락을 주는 것이다. 그는 비극의 구성요소로서 줄거리, 성격, 사상, 대사, 선율, 장면을 들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줄거리’, 즉 모방의 대상이 되는 ‘행위’의 전개이며, 그 중요부분을 이루는 페리페테이아(급전)와 아나그노리시스(발견)에 의해서 정서가 격렬하게 유발되어 그 정서의 카타르시스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1. 3. 문학이란 무엇인가 ?
문학의 정의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우선 표현매체를 언어로 한 모든 글들이 모두 문학에 속한다는 정의이다. 이렇게 테두리를 넓게 잡으면 중국의 오래된 모든 기록이나 고대 인도나 이집트의 기록들 심지어 역사서까지도 모두 포함이 된다.
하지만 범주를 좁히면 근대 이후 예술적인 장식의 글들만을 포함하게 된다. 그리고 단순히 사실을 전달하는 것만이 아니라 상상력에 의거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는다. 이렇게 범주를 좁힐 때 거기에는 시와 소설, 희곡, 수필 등이 포함이 된다. 한마디로 문학이란 인간 정신이 빚어낸 교묘한 구조물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문학이란 무엇인가 ?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문학은 작가와 작품과 독자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현실(세계 / 대상) 사이의 유기적 관계의 총합이기 때문에 상당히 광범위하고 고차원적인 범주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것의 개념정의를 쉽게 내리기 어려운 것이다. 우선 범주를 좁혀 나가기 위해 설명하자면 문학은 예술의 하위장르라고 할 수 있다. 그간 예술은 바로 미(美)라는 고전주의적 예술관에 의해 개념이 정의내려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자연과학의 현저한 영향에 의해 예술학을 별도로 독립시키려는 움직임에 따라 미와 예술을 구분하려는 흐름이 있었다.
우선 고전주의의 문학관을 따르면 예술은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학문임에 틀림이 없다. 인간은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를 가진 존재이다. 따라서 고등인간인 지성인의 경우 진, 선, 미가 조화 균형상태에 있는 완벽한 인격체가 되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렇게 전인격체가 되는데 중요한 미적인 가치를 예술이 가져다 주게 되는 것이다. 예술은 하위장르로 음악과 미술과 무용 등을 거느리고 있다. 이중 미술은 색채로 미적 가치를 구현한다면, 음악은 멜로디로 아름다움을 표출한다. 그리고 무용이 몸짓을 통해 아름다움을 드러낸다면 문학은 언어로 미를 맘껏 그려내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의 매체는 언어이다. 문학의 매체인 언어는 회화나 조각의 매체인 시각적 징표나 음악의 매체인 소리와 구별된다.
1.4. 문학적 언어와 과학적 언어
문학은 언어예술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정의는 언어학의 발전과 궤도를 같이한다. 물론 어원을 따져 문학 literature의 어원이 라틴어 litera에서 왔는데, 그 말의 뜻이 문자나 글과 연관이 있다는 해석이다. 이렇게 볼 때 이미 우리는 언어와 문학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개 언어를 구분할 때 문학적(예술적) 언어와 과학적 언어와 일상적 언어로 나누게 된다. 일상적 언어는 일상대화에서 사용하는 언어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는 과학적 언어를 사용하고 어떤 경우에는 예술적 언어를 사용한다. 전자의 경우 우리는 관료적이고 경직된 대화라고 말하고 후자의 경우를 우리는 개방적이고 부드러운 대화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부하직원이 상사를 “우리 상사는 호랑이야 ! ”라고 말했다면 이것은 예술적 언어를 구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언어와 예술적 언어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과학적 언어는 언어의 지시적 사용에 몰두한다. 로만 야콥슨이 6가지 언어의 기능을 말했지만, 그중 첫 번째 기능인 언어의 지시적 기능(참조적 기능)은 대상에서 화자가 체험한 것에 기호형식을 부여한 경우를 말한다. 따라서 한 가지 대상에 한 가지 의미만이 부여되게 마련이다. 이런 경우를 르네 웰렉은 외연이라고 말했다. 즉 언어대 대상의 관계가 1 : 1의 대응관계를 있을 때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예술적 언어의 경우 언어의 함축적 사용을 구사한다. 즉 한 가지 대상에다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이 경우를 내포라고 흔히 말한다. 이를테면 정지용의 모더니즘 시는 비가 오는 스산한 도시문명을 다음과 같이 “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멘트에 흐느끼는 불빛 / 카페 프랑스에 가자”라고 묘사하였다. 여기에는 대상에 여러 가지 작가가 느낀 복합감정을 담아놓은 형상을 나타내고 있다. 즉 대상 대 언어의 관계가 1: 多의 복잡다기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내포는 언어의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
한편 리차즈는 시를 假진술(pseudo statement)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외연적 의미를 사용하는 과학적 언어는 진술에 해당한다. 즉 한 가지 사물에 한 가지의 의미만을 담게되는데 비해 내포는 여러 가지 복합적 의미를 담게 됨을 말한다. 이렇게 문학은 언어와 밀접한 관계에 서있는데 그중에서도 예술적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특징인 것이다. 이러한 예술적 언어를 시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한다. 쿤즈는 워즈워드의 <서곡>을 현상학적으로 해명하는 자리에서 경험의 철학적 진술과 시적 진술을 논증(argument)과 표현(performance)으로 구별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논리적 필연성과 타당성으로 연결되는 것이 논증이며 시인의 타고난 감수성인 공감각과 기억의 재료를 사용하는 언어행우이가 표현이라는 것이다. 앞서의 리차즈는 이러한 차이를 과학적 인식적 언어용법과 시적 정의적 언어용법으로 구별한 것이다.
1.5. 문학의 네 가지 관점
문학은 어떠한 기능을 가졌고 어떠한 목적 아래 쓰여지며 어떠한 효용을 나타내는가 ? 작가들은 왜 창작하고 독자들은 왜 작품을 읽는가 ? 이렇게 제기되는 물음에 대한 해답은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가령 독자들은 왜 작품을 읽는가 ? 하고 묻는 경우, “교양을 높이기 위하여”, “권태에서의 해방을 위하여”, “미의식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상상력의 영역을 넓히기 위하여” 작품을 읽는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인즉 이런 이유에서보다 많은 사람들은 재미가 있기 때문에 문학작품을 읽는 것이다. 주제가 새롭다느니, 묘사가 훌륭하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모두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고, 끝까지 읽고 나서 책을 덮은 다음에 우선 먼저 나오는 말은 “재미있었다”, “재미없었다”하는 극히 소박하고 단순한 인상적인 반응인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효용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거울과 램프??를 쓴 영미비평가 에이브럼즈는 문학의 관점에 대해 모방론, 표현론, 효용론, 존재론의 네 가지를 제시하였다. 이중 세 가지만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모방론
모방론적 관점은 문학을 바라보는 가장 기본적인 관점이자 가장 오래된 입장이기도 하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기원전의 고대 그리이스의 플라톤이나 그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 대상과 연관을 맺으면서 살아가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세계 / 대상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기도 하고 때로는 갈등관계에 서기도 한다. 모방론은 문학을 이러한 삶의 현실(세계 / 대상)과 연관시켜 정의를 내리는 입장을 말한다. 문학은 모방의 형식이라고 정의를 내릴 때 그것은 사물 그 자체, 자연의 실재, 삶의 원리 등 이른바 삶의 현실을 언어로 재현 또는 재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방론의 원조는 역시 <<공화국(이상국)>>의 저자인 플라톤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그의 사상이 이데아사상인 것이다. 플라톤은 위의 저서에서 문학은 복사의 재복사라고 비방하는 말로 문학을 정의하였다. 플라톤은 진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성의 활동을 그는 중시하였다. 이성의 원활한 활동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에 도달하는 지름길이라는 입장이다. 플라톤은 순수한 이성을 통해서만 이데아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데아를 보지 못하게 하는 그룹이 나타났는데 그것이 시인이나 화가를 비롯한 예술가집단이라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뜨거운 가슴 즉 인간의 감정 정서에 호소하여 표현을 하게 되므로 감정의 격정을 통해 쉽게 사람들로 하여금 이성에 눈이 멀도록 유도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로부터 인간을 멀어지게 하여 가짜에 빠지게 하는 것이 시인 등이므로 그들을 이상국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시인추방론을 주장하며 또 한편으로는 문학검열제도를 도입할 것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에 비해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세계를 어떤 것의 단순한 그림자(복사)로 보지 않았다. 그는 모방본능은 어린 시절부터 인간에게 심어져서 인간을 동물과 구분시켜 주는 주요한 징표로 보았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을 인간이 지닌 속성 가운데 중요한 하나로 보았던 것이다. 그가 스승의 이론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으로 제시한 대안이 바로 개연성의 법칙이다. 문학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행동을 모방하지만 보편타당한 세계를 창조하기 때문에 가짜인 역사보다도 진실에 가깝게 된다는 이론을 제시한다. 역사는 이미 있던 일이나 일어나고 있는 세계를 역사가의 사관에 따라 그리지만 문학은 있을 수 있는 세계를 그린다는 것이다. 즉 허구의 세계를 예술가가 꾸며내지만 무의미한 허구가 아니라 의미있는 즉 인간의 진실성을 담고 있는 보편적인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개연성의 세계란 인간에게 보편적 진리로 느껴지는 세계를 의미하지만, 인간에게 보편적 진리로 다가오는 세계는 결국 그 자체가 수미일관한 통일성의 세계일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가는 총일성이 있는 세계를 형상화함으로써 보편적 진리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작품의 유기적 구조에 의하여 제시되는 것이다.
2)효용론
효용론은 문학작품과 독자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이론이다. 독자들이 왜 문학작품을 찾게 되는가에 관한 의문을 풀어주는 입장이 바로 효용론이다. 조선조의 양반사대부들은 소설을 멀리 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유교적인 공리성의 효용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공자의 말씀인 “소설은 비록 小道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생활을 하는데 가히 볼만한 것이 그 안에 있다”라는 어록을 중시하였다.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大道를 배워야 하는데 그것은 성현들의 말씀을 담은 경전이나 역사에 담겨있다는 입장이다. 조선조의 양반사대부들은 중국에서 유입된 4대 기서인 삼국지연의나 수호지 등을 재미있게 읽었으면서도 자신들의 자녀들에게는 금서로 정하여 읽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이유로 世敎의 가르침이 없이 잡된 생각만 담고 있다고 꼬집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모두 독자들이 예술작품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효용론에 해당된다. 또 공자는 “시삼백을 한마디로 말하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시의 효용성 즉 공리주의 내지 교훈주의를 강조한 것이다.
효용론에는 크게 공리설(교훈설)과 쾌락설(오락설)이 있다. 공리설은 문학작품이 독자들의 인생의 질적인 변화를 줄 수 있는 감동을 담고 있어야 함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대표적인 견해가 톨스토이의 예술감화론이다. 위대한 문학은 독자들에게 삶의 지혜를 줄 수 있어야 하며 인생의 감화를 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문학의 가치를 그 시회적 효용의 면에서 구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교훈주의 문학관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교훈이란 말을 좀 더 넓게 해석하면 지식의 전달과 도덕적 가르침이란 뜻을 동시에 포함하게 된다. 역사, 과학, 기술 등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기 위하여 쓰여진 문학은 고대에는 적지 않았다. 중국의 <<역경>>은 당시의 우주과학 내지 형이상학의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운문시이며 로마의 대시인 베르길리우스는 농사짓는 기술을 가르치기 위하여 <게오르기카>라는 장시를 썼다. 한편 도덕적 가르침을 위한 문학은 문인이 사회에 대하여 선각자, 스승, 교사로서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때 생길 수 있다. 어느 시대에나 그러한 입장을 취하는 문인이 있지만, 특히 문학적으로 도덕적 취향이 강한 시대가 있다. 한국 신문학 초창기가 바로 그러한 시대로서 이광수는 특히 계몽주의자, 즉 몽매한 민족을 새롭게 깨우치는 선각자의 입장을 취했다. 현대에 있어 교훈주의 문학은 창작의 목적이나 결과라기 보다는 해석의 태도라고 보는 것이 옳다. 실상 모든 문학은 그 저자가 교훈적으로 의도하였든 안 하였든간에 교훈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좋은 문학은 넓은 의미의 인간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결국은 사람에게 유익하다고 할 수 있다. 공리설에서 강조하는 도덕률이란 시대에 따라 바뀌기 때문에 교훈적인 해석은 임시성을 면하지 못한다. 물론 많은 경우에 있어서 문학은 저자의 명백한 교훈적, 또는 정보제공의 목적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인간성에 호소하는 자유로운 상상의 질을 구현하고 있는 까닭에 창작 당시에만 효과가 있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도 있다. 이른바 고전이란 것이 그것이다. 결국 교훈주의는 현실적 효용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 효용성을 극도로 강조하면 문학은 선전(propaganda)이 된다. 대표적인 경우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계급투쟁의 도구로 문학작품을 도구로 사용하려고 한 것이 그것에 해당된다.
한편 공리설과 달리 문학작품이 단순히 재미를 주고 여가선용에 도움이 되며 작품을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쾌감을 준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 쾌락설(오락설)이다. 이러한 입장의 대표적인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충동설에 근거한 쾌락설이다. 조선조 양반사대부들이 흔히 말하던 感人이나 破閑이 여기에 해당된다. 서포 김만중은 효자였는데 그가 유배갔을 때 어머님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해 하룻밤 사이에 <구운몽>을 지었다고 말한 것이 바로 쾌락설에 가까운 효용설이라고 할 수 있다. 호이징가는 인간의 본성을 호모 사피엔스나 호모 파베르 보다는 호모 루덴스로 보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놀이인간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잉된 생명력의 발산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그외에 모방본능의 충족, 또는 긴장완화에 대한 욕구로 보기도 한다. 글쓰기나 글읽기도 일종의 놀이본능에서 왔다고 볼 수 있으며 그런 측면에서 호모 루덴스는 쾌락설의 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앞의 논지로 돌아가면, 독자들이 무협지나 청춘소설 또는 에로소설을 찾게 되는 경우는 쾌락설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90년대 들어와 독자들이 포스트모더니즘에 바탕한 가벼움의 미학을 즐겨하거나 환생소설이나 SF소설류를 즐기는 것도 모두 이러한 효용설에 바탕한다고 할 수 있다.
3)표현론
모방론이 작가의 현실체험의 예술적 형상화에 초점이 맞추어진다면, 표현론은 문학작품이 바로 작가의 창조력에 의해 완성되는 작품이라는 점에 관심을 보이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현실에서 체험한 것을 바로 언어라는 기호로 다듬어놓은 것이 예술작품이라는 인식이다. 서구에서는 표현을 express라고 한다. 이 말의 뜻은 ‘밖으로 몰아낸다’, ‘짜내다’는 뜻이다. 즉 뮤즈의 작용에 의해 외부로부터 신령스러운 기운이 시인의 마음내부로 스며 들어와 응어리져 있다가 그 심리적 다발이 다시 시인의 격정적인 흥분상태에 의해 시인의 입을 통해 밖으로 흘러 나오게 된 것이 바로 시라는 한편의 예술작품이 된다는 입장이다. 즉 작가의 사상과 감정을 밖으로 나타내는 것이 문학이라는 것이다. 낭만주의 시인의 대가인 워즈워드는 이 과정을 <시는 격정적 감정의 자발적 범람>이라고 말하였다.
표현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靈感說이다. 영감에 의해 작가는 천재성을 발휘한다. 작품은 이러한 작가의 영감이나 천재성, 광기의 소산이라는 입장이다. 이것은 낭만주의의 입장이다. 이에 비해 작가를 장인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고전주의의 견해인데, 문학적 표현을 하나의 조각처럼 한 자, 한 구절을 갈고 다듬는 것으로 생각하는 입장이다. 즉 작가는 뮤즈의 광기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 냉철한 이성과 치밀한 계산자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4)존재론
존재론은 문학작품 자체의 존재가치를 규명하는 관점을 말한다. 즉 텍스트 자체가 어떻게 생명력을 갖게 되는가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문학이 하나의 믿을 만한 즉 개연성이 있는 허구가 되려면 언어를 가지고 그것이 믿을 만하게 되도록 꾸며야 할 것이다. 즉 의미들이 긴밀한 상호연락을 가짐으로써 하나의 완결된 의미의 덩어리를 형성해야 한다. 이렇게 치밀한 내부적 조직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완성된 형상을 일러서 ‘구조’라는 이름을 붙인다. 일반적으로 구조라는 말은 조직이라든지 형식이라든지 하는 말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조직과 형식은 모두 구조에 포함되는 요소들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구조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모든 요소들의 총합이다. 이러한 구조라는 말을 사용할 때 문학테스트는 ‘동적인 구조(dynamic structure)’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문학적 구조는 건물처럼 일정한 공간을 점령하고 무변화 상태에 머물러 있지 있고 시간의 경과를 통하여 의식 속에서 파악되는 좀 까다로운 개념이기 때문이다.
또 문학작품을 발달된 생물체의 조직과 같은 성질을 가졌다고 해서 유기체에 비유하는 학자도 있다. 이것을 소위 문학유기체설(organicism)이라고 한다. 유기체도 각 부분들이 긴밀히 연결되어 하나의 생명체를 이룬 것이고 또한 필요한 부분을 다 갖추고 필요없는 부분은 안 갖춘 것이다. 그러나 문학작품은 유기체처럼 스스로 생성, 발전, 쇠퇴, 소멸하는 것은 아니므로 유기체와의 유추관계에 지나치게 의존할 수는 없다. 최근에는 유기체설보다 구조주의설에 더 주의를 기울이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또 구조주의에서 발전한 기호학에선 문학텍스트를 ‘자율적인 기호’나 ‘자율적인 실체’라고 파악한다. 부분이 전체와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는 유기체설에서 좀 더 발전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나. 조선의 소설문학
국문학과교수 박태상
I. 고소설의 흐름
도입
1)소설의 근원은 이야기이다. 설화는 신화계이야기, 전설계이야기, 민담계이야기로 개성을 지니면서 성장해왔다.
2)고급 이야기형식인 소설은 귀족문학과 서민문학간의 대립이 약화되면서 이루어진 장르이다. 발전과정에서 金時習, 許筠, 金萬重, 朴趾源의 4대가의 활약이 컸다. 물론 중국문학이란 외래문화의 영향도 컸다고 할 수 있다.
3)고소설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발전한다. 하나는 패관문학(더 올라가면 사마천의 ??史記?? 열전의 영향을 들 수 있음)이 假傳의 형태로 변모되고, 이것이 짜임새있게 형태를 갖추어 한문단편이 된다. 그리고 한문단편이 허구와 삶의 진실성을 용해하여 미적인 가치를 가지게 되었을 때 한문소설로서 자리를 잡게 된다. 또 한 부류는 패관문학(패관적 모티프)이 설화로 분화되고 이것이 발전하여 국문소설이 된 것이다.
전개
1)고소설의 흐름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단계는 본격적인 고소설을 마련하는 생성시기로 단순 서사체인 설화적 이야기를 초기의 소설적 이야기로 올려 놓은 가전체, 전기체 소설시대이다. --麴醇傳, 孔方傳, 麴先生傳, 淸江使者玄夫傳, 竹夫人傳, 楮生傳 등 假傳體小說의 형성기 / 김시습의 단편소설집 ??金鰲新話??가 나와서 만복사저포기,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과 같은 수준높은 한문 전기계 단편소설이 창작된 시기
2)성숙기는 국문소설이 등장하고 가전체, 전기체를 벗어난 전기적 서사체가 중심을 이루던 시기이다. 허균, 김만중 등의 대가들이 소설의 흐름을 크게 발전시켜 놓고, 다수의 작가들이 창작에 참여하여 군담계 영웅소설이 독서계의 대유행을 가져온 시기이다. --허균은 이시기에 홍길동전이외에 蓀谷山人傳, 張山人傳, 嚴處士傳, 南宮先生傳, 蔣生傳 등을 창작했다. 또 김만중은 이 시기에 九雲夢과 謝氏南征記를 창작하였다. 또 이 시기에는 군담소설,애정소설, 가정소설 등이 크게 융성하였다.
3)결실기에 해당하는 영정조대 이후의 소설들로서 형태적으로 세련된 한문, 국문의 단편소설과 대장편인 대하소설이 창작되는 시기이다. 이와 함께 판소리의 성행의 여파로 판소리계 소설이 풀현하여 창작계 소설과 새로운 각축을 벌리며 공존하는 시기이다. 이시기의 작가로는 實學派의 대가인 燕巖 朴趾源과 판소리의 개작자인 申在孝가 있다. --연암의 許生傳, 虎叱, 兩班傳, 穢德先生傳, 閔翁傳, 廣文者傳, 虞裳傳, 金神仙傳, 馬?傳의 9전과 작품이 전하지 않는 易學大盜傳, 鳳山學者傳 그리고 실전으로 간주되는 烈女咸陽朴氏傳이 이 시기에 창작되었고 판소리는 12마당에서 신재효에 의해 6마당으로 정리가 되었다. 그외 대하소설인 가문소설 玩月會盟宴, 林花鄭延, 尹河鄭三門聚錄, 明珠寶月聘, 華山仙界錄, 劉李兩門錄 등이 창작되어 유통되었다.
II.??금오신화??
1. 작가
梅月堂 金時習(1435 - 1493)은 東峰, 淸寒子, 贅世翁, 碧山淸隱, 雪岑 등 실로 다양한 호를 가졌는데, 그것은 그의 삶의 파란만장함과 자유분방한 사유의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지조를 지키어 39년간이나 방랑생활을 하는 소외적 삶속에서도 16권이나 되는 방대한 불교적 사상서와 ??四遊錄??이라는 기행적 창작시, 그리고 ??金鰲新話??라는 독특한 형식과 아름다운 문체의 전기소설을 창조했다. 그의 삶과 철학을 정리해 보면, 그의 삶속에는 ㄱ)어머니를 잃은 후의 고독감과 애상감으로 상징되는 ‘고아의식’, ㄴ)불의에 대한 저항과 방외인적 삶, ㄷ)자유분방한 사고와 기행, ㄹ)儒, 佛, 仙의 변증법적 인식 등으로 요약할 수 있는 특성을 찾아낼 수 있다.
2. 매월당의 세계관
그의 세계관은 ‘一氣??論’과 ‘精氣已散說’과 ‘圓而無物論’으로 요약할 수 있다. 김시습은 원래 ‘일이론’에서 ‘일기론’으로 생각을 바꾼다. 애초에 주리론에 정통했던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 찬탈행위 이후에 그의 세계관을 바꾼다. 그의 ‘일기탁약론’이란 천지 사이에는 오직 하나의 기가 풀무질할 따름이라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은 물론 노자의 ??도덕경??에 나온 노장사상에 바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정기이산설’이란 “사람이 죽으면 정신과 기운이 흩어지고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몸뚱이는 땅으로 내려가 근본으로 돌아간다”라는 주기론에 입각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원이무물론’이란 기사상에 바탕한 그의 우주관인데, 하늘은 그 형태가 둥글되 물체는 없다는 것이다.
3. ??금오신화??의 소설사적 위상
최근의 ??최치원전??을 소설의 효시로 보자는 학설의 제기로 인해 금오신화설은 많이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다음의 다섯 가지 측면에서 이 작품은 그 문학사적 위상이 뚜렷하다고 할 수 있다. 1)최초의 소설이라는 소설장르를 개척한 공적, 2)전기소설의 새로운 영역을 구축한 업적, 3) 사회현실을 우의적으로 묘사하여 ‘사실성’이라는 문학 본래의 기능을 강화시킨 공로, 4)??전등신화??, ??태평광기?? 등의 중국문화를 유입하여 독창적인 새로운 문학을 창조해낸 점, 5)작품에 나타난 민족주체성과 역사의식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통해 단순한 미적 형상화의 부산물로서가 아니라 역사속에서 숨쉬고 있는 생명력을 지니는 텍스트를 창조해낸 점 등이 평가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박태상 등에 의해 제시된 최치원전설은 ?최치원전??이 1)세계의 파편화현상을 반영함, 2)‘문사형’의 전형적 인물이 등장함, 3)운명을 개척하는 ‘자기 실현 요구형’의 인물이 부각됨, 4)자기 비판능력을 갗춘 패로디의 성격을 지님, 5)서사시적 예언이 아닌 소설적 예측을 보여줌 등의 특성을 나타냄에 따라 최초의 소설로 평가하고 있다.
4. 작품의 의미구조 분석
??금오신화??에 들어있는 작품들은 傳奇小說로 평가받고 있다. ‘奇異를 傳述한다’는 뜻의 전기는 본래 志怪와 구분하기 위한 唐代 소설의 범칭이었다. 한마디로 傳奇는 비인간적이며 비논리적인 몽환의 세계, 천상의 세계, 명부의세계, 용궁의 세계 등 시공의 제한을 두지 않고 주인공이 활약하는 기이한 사건을 다룬 소설을 말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김시습의 ??금오신화??를 들 수 있다. ??金鰲新話??는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의 다섯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萬福寺樗蒲記?는 주인공 양생이 만복사에서 부처님에게 가우를 점지해 달라고 발원하여 이미 3년전에 죽었으나 환생된 낭자를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되는 이야기이다. ?李生窺墻傳?은 서생인 이생과 권문세가 집안의 규수인 최낭자의 로맨스를 다룬 소설이지만 후반부에 가서는 홍건적의 난에 희생된 최낭자가 환생하여 부부지정을 이어가는 내용의 전기적 모티프를 지닌 작품이다.
?醉遊浮碧亭記?는 개성에 사는 선비 홍생이 평양 부벽정에서 술에 취해 잠든 사이에 천년전에 죽어 하늘에 올라가 신선이 되어 있다가 인간계에 내려와 부왕의 묘소에 참배하고 돌아가는 기자왕의 딸과 고금사를 나누고 시로 호답하여 하룻밤의 사랑을 속삭이는 일종의 몽유록이다. ?南炎浮州志?는 유학자인 박생이 평소 불교의 지옥설에 회의를 품고 있었는데, 어느 날 꿈속에서 바다 속의 한 섬에 닿아 남염부주라는 염라대왕이 사는 곳으로 나아가 염왕과 오랜 시간 동안 불교와 유학에 관한 문답을 하고 나왔다는 이야기이다. ?龍宮赴宴錄?은 한생이 꿈에 용왕의 초청을 받아 수중국인 용궁을 구경하고 선물을 얻어 나온 이야기인데, 어족들을 해학적으로 의인화하고 용궁의 문물을 표현하면서, 작가가 5세때 궁중에 들어가 세종대왕의 사랑을 받았던 것에 비의한 寓意에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금오신화??의 다섯 작품중 ?이생규장전?, ?만복사저포기?, ?취유부벽정기?의 세 작품은 애정소설에 해당된다.
III. 연암의 한문소설
1.작가
燕巖 朴趾源(1737 - 1805, 영조 13년 - 순조 5년)은 18세기 말에 북학의 거두인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 후한학사대가들과 더불어 선진적인 외국문화의 섭취를 주장하던 북학파의 한 사람이자, 정약용과 더불어 실사구시의 학문인 실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던 선구자적인 학자이다.그의 자는 仲美이고 호는 연암, 烟湘, 열상외사 등을 사용하였다. 연암은 44세때(정조 14년) 그의 종형인 박명원을 따라 연경에 가서 그곳의 문물제도를 목격하고, 중국의 명유 석학들과 접촉하고 돌아와서 ??열하일기??(1780년 6월 25일 출발, 10월 27일 귀국)를 발표함으로써 당시의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그는 ??열하일기??에서 당시 중국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청나라의 번창한 문물을 받아들여 낙후한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한 그의 노력을 집대성하고 있다. 이 때는 明에 대한 의리와 결부된 청나라를 배격하는 풍조가 만연하던 시기였다. 북학사상으로 불리는 그의 주장은 비록 적대적 감정이 쌓여있는 처지이지만 그들의 문명을 수용함으로써 우리의 현실이 개혁되고 풍요해진다면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또 그의 관심은 西學에도 머물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은 홍대용과의 교유에서 보이는 우주론의 심화를 위한 작업이며 실제로 북경을 여행할 때 그곳에 있는 천주당이나 관상대를 구경하면서 서양인을 만나고 싶어하였다. 또 그는 ?호질??, ??허생전??, ??양반전?? 등 12편의 한문소설을 발표하여 크게 이름을 날렸으나, 그에 반해 관운은 그를 따르지 않았던 것 같다.
몇 차례 과거에 응시하여 34세때에는 小科初試에서 수석을 했으나, 會試에는 우인들의 강권으로 시험장에 들어가긴 했으면서도 試紙를 고의로 제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이 50세가 되어 겨우 膳工監 監役이라는 하찮은 관직에 발을 등여놓게 된다. 그 이후 司僕寺主簿, 義禁府都事, 한성부판관, 安義縣監 등을 거쳐 면천군수가 되어 정조에게 ??課農小抄??를 써 바쳐 크게 신임을 얻게 된다. 그러나 襄陽府使를 끝으로 정조가 승하하게 되어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2. 연암의 세계관과 문학관
연암 박지원의 세계관은 자연 내지 우주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기초 위에 성립되어 있다. 그의 과학적 인식은 地轉說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이는 金錫文의 지구?해?달이 球體로서 허공에 떠있다는 이론인 三丸浮空說에서 발전한 홍대용의 지전설에서 도움 받은 것이다. 이 지전설의 내용은 태서인들은 땅이 둥글다는 것만을 알았지 땅이 구체로서 회전운동을 한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고 하고,지구가 일전하면 一日이 되고,달이 지구를 한 바퀴를 돌면 一朔이 되고,해가 지구를 한 바퀴 돌면 一歲가 된다는 것을 언급한 것이다. 또 연암은 종래의 ‘오행설’에 대한 신해석을 하였다. 즉 종래의 오행설은 사생론을 그 주축으로 하고 상극론을 곁들여 종종의 미신적 사고를 부연해 오면서 근2천년 동안 동양인의 사고를 지배해 왔다. 상생론의 골자는 주지하듯이 <목생화,화생토,토생금,금생수,수생목>라는 단순한 다섯가지 무기물질에 부여한 자모적 연쇄관이 그것이다. 이 소박한 발상은 마침내 유생관을 부여하고 사변적으로 추상화시켜 방위(오방-동.남.중.서.북),색채(오색-청.적.황.백.흑),맛(오미-신.고.감.산.함),성음(오음-각.치.궁.상.우),그리고 인간의 품성(덕-인.예.신.의.지)에 이르기까지에 연결시켜 우주를 오행이라는 연쇄망으로 결박시킨,그리하여 구속적이며 규격적인 우주관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점복,참휘 등 갖가지 미신적 사고가 산출되어 온 것은 주지하는 바이지만,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우주관이 은연중 구속성,폐쇄성,규격성에로 지향된 봉건적 윤리의식의 배경적 사고로 기능해왔다는 점이다.
연암의 세계관의 대체적인 면을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우주에 대해 자연과학적인 접근태도를 갖고 있었다.
둘째,사물을 발전적인 동태로 파악하려 했다.
세째,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탈피해 있었다.
네째,사물에 대해 개체주의적인 접근태도를 가짐으로써,개방성을 띠고 있었다.
연암의 사상은 실학사상과 북학사상으로 요약된다. 연암의 학문은 실용성이 없는 논쟁위주의 성리학이나 사장학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그는 또 <北學議序>에서 만일 학문을 하려 한다면 중국을 버리고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연암의 문학관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그는 ‘法古창신’을 강조하고 있다.우선 법고에서 변할 줄 알고 창신에서 전아할 수 있는 ‘법고창신’의 고귀함을 밝히는 데서 출발한다. 둘째 문장은 寫意에서 그쳐야지,妄想이나 假飾이 스며들어서는 안된다는 ‘寫實爲主’의 문장론을 전개하였다.그의 <孔雀館文稿 自序>에 나오는 귀울림(耳鳴)과 코골기(鼻간)의 비유가 이러한 그의 생각을 반영해 주는 글이다. 이 글은 뒤에서 소개하기로 한다. 세째 연암은 사실적인 표현과 더불어 상스러운 일상어와 예사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나 아이들의 노래 및 마을의 상말까지도 市井의 생활상을 그대로 묘사하기 위해 적극 수용해야 함을 주장한다.
3. ?양반전?의 의미구조 분석
?양반전?의 작품구조는 매우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형식은 ‘기 - 승 - 전 - 결’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첫 부분에서는 글읽는 것만 알고 끼니를 이어가는 방도를 전혀 모르는 정선고을의 한 양반이 등장한다. 그리하여 환곡을 타다 먹은 것이 천석에 이르러 갚을 방도가 없어 쩔쩔매는 이야기와 이 말을 들은 고을의 천부가 양반을 사는 조건으로 환곡을 관청에 가져 다 갚는 이야기가 나온다. 둘째 부분은 군수가 개입하여 고을의 사, 농, 공, 상의 모든 사람들을 모아놓고, 양반의 조건을 명시한 공문서를 작성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부분이 承에 해당한다. 轉의 부분은 형식과 구속에 얽매이는 양반의 규율을 전해들은 천부가 좀 더 좋은 조건을 삽입해 달라는 말을 하는데, 군수가 새로 집어넣은 내용인즉 상민들에게서 물건과 노역을 탈취하고 무단을 행하는 전횡적인 양반의 모습임을 발견하고,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장면이다. 結은 천부가 양반을 사는 것을 포기하고, 길을 떠나 다시는 양반의 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는 짧은 대목이다.
?양반전?의 줄거리의 핵심모티프만을 추출하면 다음과 같다.
1)양반이 관곡을 빌려 먹음(가난때문)
2)양반의 위기(관찰사 순행시 발견)
3)천부가 위기에서 구해줌(양반 매매조건으로 관곡을 대신 갚아줌)
4)조정자 출현(군수가 개입, 증명서 작성)
5)제 1문권 작성
6)제 2문권 작성
7)천부의 깨달음 - 길 떠남
1)은 무능하고 생활능력이 없이 무위도식하는 양반을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2)에서는 무위도식하는 양반이 관곡만 축내는 현실에 대한 고발을 담고 있다. 3)에서는 賤富의 말을 통해 당대의 사회현실을 풍자하고 있다. 4)에서는 군수가 조정자를 자처함으로써 새로운 양상을 보이게 된다. 군수가 천부의 행위를 “재물이 넉넉하면서 인색하지 않은 것이 義요, 사람이 어려운 것을 도와주는 것은 仁이요, 비천한 것을 싫어 하고, 존귀한 것을 사모하는 것은 智이니, 이것은 참 양반이니라”라고 선언하는 것은 당대 현실을 상징하는 풍자적인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5)에서 증명서를 작성하기 위해 관청의 뜰에 고을의 선비와 농업하는 사람, 공업하는 사람, 장사하는 사람들까지 불러 모은다. 이것은 농업과 상공업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v 것이자, 작가 연암의 이용후생에 바탕을 둔 실학사상을 반영하는 표현인 것이다.
IV. ‘雲英傳’에 나타난 사랑과 죽음의 의미
박 태 상
1. 긴장과 풀림의 반복구조
<雲英傳>은 宮女인 운영과 宮外野人인 金進士가 조선의 봉건적 사회제도의 모순된 현실을 뛰어넘어 인간본능의 자유스러운 표출을 모색하여 에로스를 추구하다가 결국 한계에 부딪쳐 자살한 내용을 담은 일종의 비극소설이다.
여기에서는 李在秀 교수 소장본인 한글 필사본을 텍스트로 하여 작품구를 분석하고, 작품의 미적 가치를 규명해 보기로 한다.
이러한 전체 줄거리를 통해 작품의 내적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음을 알 수 있다.
㉠ 柳泳이 壽聖宮에 가서 술에 취하여 잠을 잠-깨어남.
㉡ 金進士와 雲英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함.
③ 柳泳이 술에 취하여 잠을 잠-깨어남.
이와 같이 이 소설은 ㉠㉢의 외부구조 속에 ㉡의 내부구조를 품고 있는 형태를 지니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柳泳의 이야기 안에 金進士, 雲英의 로맨스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형태의 소설을 우리는 흔히 額子小說이라고 한다. 액자소설이란 “이야기 속에 하나 또는 여러 개의 비교적 짧은 내부 이야기를 내포하는 소설의 구성형식”1)을 말하며, ‘나’와 ‘그’ 또는 ‘그’와 ‘나’라는 이중의 인물시점의 서술방법을 택하는 소설을 의미한다.
작품의 의미파악에 앞서 작품의 구조분석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핵심모티프를 중심으로 기본 줄거리를 좀더 요약, 압축하기로 한다.
(1) 선비 柳泳이 壽聖宮에 놀러 간다.
(2) 유영이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가 깬다.(夢--覺)
(3) 유영이 金進士와 雲英을 만나 사랑의 이야기를 듣는다.
(4) 安平大君이 私宮에 운영 등 10명의 궁녀를 둔다. (雲英은 특수한 신분의 여성임)
(5) 文士인 김진사가 안평대군과 詩를 화답하다가 雲英을 만난다.
(6) 안평대군이 궁 밖 출입을 금하는 엄명을 내린다. (장애 요소 등장)
(7) 김진사와 운영이 로맨스에 빠져 戀書를 주고 받는다.
(8) 김진사가 西宮 담을 넘어들어 운영과 密愛를 나눈다. (1차 모험)
(9) 雲英이 탈출을 위해 의복과 중보를 궁 밖으로 옮긴다. (2차 모험)
(10) 김진사의 奴僕인 特이 흉심을 품는다.
(11) 特의 발설로 인해 宮中 財寶의 반출이 大君에게 알려진다.
(12) 안평대군이 西宮의 궁녀들을 문초하여 운영을 別堂에 가둔다.
(13) 운영이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자결한다. (모험의 실패-죽음)
(14) 김진사가 운영의 齋를 지낸 후 죽는다. (남성이 뒤따라 죽음)
(15) 유영이 두 사람에게 天上의 사람이 되었느냐고 묻는다.
(16) 두 사람이 자신들의 기록을 후세에 전할 것을 부탁한다.
(17) 유영이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책자만 놓여 있었다.
위의 핵심모티프를 살펴보면, <운영전>은 ‘평범한 남자와 특수한 신분의 여자와의 로맨스-장애 요소 등장-모험시도-죽음-사랑의 성취’의 패턴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운영전>의 기본구조는 <螺中美婦說話> 또는 그 변이설화의 구조와 유사한 것이다. 또 콩쥐팥쥐형이나 신데렐라형 그리고 로망스 문학의 모험을 통한 사랑 성취형 이야기와도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다. 단지 이야기마다 모험이 실패로 끝나느냐, 성공하느냐에 따라 죽음이 등장하느냐, 사랑의 성취가 이루어지느냐의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螺中美婦說話>를 핵심모티프 중심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평범한 총각이 늦도록 장가를 못간다.
(2) 농사를 지으며, “이 농사를 지어 누구랑 목을꼬”라고 혼자 탄식한다.
(3) 논고동속의 美女를 발견하고 같이 산다. (로맨스?결혼)
(4) 하루는 몸이 아파 美女가 대신 일하러 나가는데, 그 고을 縣官이 그녀를 보고 흑심을 품는다. ---그녀를 官家에 데려감.
<운영전>의 내부구조에 나오는 운영과 김진사의 로맨스는 이와 같은 ‘童話的 모티프’를 가지고 있음에 따라 흥미도를 더하기 위해 극적 긴장으로 치닫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운영전>에서 장애요소의 등장과 그것을 극복?초월하기 위한 모험의 시도는 치열할 수밖에 없고, 그것의 실패에 따른 죽음으로의 급전직하는 긴장된 구조를 형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운영전>에는 이러한 긴장의 구조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세밀한 스토리 전개에 있어서는 주로 詩의 和答을 통한 풀림의 완화된 구조가 등장하게 된다.
安平大君과 金進士의 詩和答 장면을 문틈으로 엿보던 雲英이 자신의 마음이 담긴 이와 같은 詩를 지으나, 건네줄 인편이 없어 안타까와 한다. 이 시에는 이러한 운영의 간절한 사연이 담겨있는 것이다.
이렇게 <운영전>에서 로맨스의 진전 또는 사건의 전개에 중요한 매듭역할을 하는 것은 ‘漢詩의 和答’이다. 그런데 이러한 漢詩의 화답을 통한 스토리 전개는 ??金鰲新話??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2. 現實의 논리와 超越의 논리
<雲英傳>에는 당대 규범을 준수하여 순리대로 살아가려는 입장과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여 새로움을 창조하려는 입장이 상충되면서 공존하고 있다. 전자는 현실의 논리라고 말할 수 있으며, 후자는 초월의 논리라고 명명할 수 있겠다. 운영의 입장에서 보면 두 갈림길에서 하나를 선택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안평대군 私宮의 한 궁녀로서 그 나름대로의 규범과 질서에 쫓아 살아가는 자세는 현실안주의 자세로서 자아가 세계와 직접 충돌하는 것을 피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한 방법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할방법에는 인간적인 본능과 욕구를 억제해야 한다는 모순이 자리하게 된다. 반면에 현실모순의 장벽을 뛰어넘어 자기 동일성의 세계를 추구하는 데에는 많은 위험이 도사리게 된다. 결국 운영은 안평대군의 자애로움과 김진사의 사랑의 틈바구니에서 방황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속적 사랑(어느 정도 충의 개념임)에서 벗어나려고 하니, 안평대군의 자애로움이 마음에 걸리고, 개체적 사랑을 취하려고 하니 궁녀라는 신분적 제약이 장애요소로 등장하여 심적 갈등을 야기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운영은 남자로 태어나서 자신의 능력과 기개를 떨쳐볼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됨을 한탄하며, 深宮에 들어와 인간적인 욕정을 펴보지도 못하고 古木과 같이 썩게 됨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로 파악한 것이 바로 김진사와의 사랑의 성취인 것이다. 마음은 초월의 논리로 이끌리고 있으나, 현실의 논리의 견제로 인하여 그녀는 쉽게 결단을 못 내리게 된다.
3. 世界觀의 확대와 축소
<운영전>은 여타 고소설과는 다른 세계관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천상계의 인물이 실제로 謫
降하여 地上界 인물과 대화를 나눈다는 점에서 특이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흔히 다른 고소설에서는 남녀주인공이 천상계에서 得罪하였기 때문에 그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의미에서 지상계로 축출되게 된다. 그리고 일정한 기간이 끝나면 그 징벌의 원인이 소멸하여 다시 천상계로 올라가게 된다는 줄거리가 대종을 이룬다. <운영전>도 지상계로의 축출과 천상계로의 복귀까지는 일치하고 있으나, 천상계의 인물이 다시 하강하여 지상계 인물인 유영과 私談을 나눈다는 것이 변이된 모습인 것이다.
<운영전>의 대체적인 골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柳泳; 醉-夢-覺-> ㉡柳泳? 金進士? 雲英의 만남-> ㉢金進士와 雲英의 과
거지사 -> ㉣ 취-몽-각
위의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운영전>은 지하계가 잠재되어 있는 三元的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에서 지상계 인물인 유영은 醉-夢의 상태에서 ㉡의 김진사, 운영을 만난다. 이러한 꿈처리는 현실을 초월하는 세계를 보여줄 때 흔히 쓰는 방법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꿈처리는 현실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宮女와 宮外野人과의 로맨스를 승화시켜 보여주기 위한 한 방편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에서 천상계인물인 金進士와 雲英이 다시 현세에 나타나 지상계 인물인 유영을 만난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다른 소설에서는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죽어 지하계에 갔던 인물이 소생하는 경우는 있어도 천상계로 승천했던 인물이 지상계로 나타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두 인물이 지상계에서 사랑을 성취하지 못하고 천상계에 복귀해서 소원을 성취하는 이야기는 <운영전>의 작품 말미에 유영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 언급되어 있다.
<운영전>은 다른 고소설과 마찬가지로 세계관의 확대가 나타나 있다. 단순한 일원적인 세계관이 아니라, 삼원적인 세계관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관의 확대는 운명론적인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것은 한국인의 사상에 뿌리깊게 박혀 있는 天思想에 바탕을 둔 유토피아적 생각의 반영인 것이다. 두 인물이 만나 로맨스를 나누고 결국은 세계와의 대결에서 실패하여 좌절을 맛보고 죽는다는 줄거리는 두 사람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조절과 죽음의 선행적 과정을 두 인물이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 과정을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가) 본래 天上界의 仙官, 仙女-得罪(蟠桃瓊實을 많이 따먹고 사사로이 雲
英에게 줌)-地上界로 축출(징벌)-天上界로 복귀
(나)
(나)남녀주인공의 로맨스-장애요소등장-세계와의 갈등에서 패배-죽음
위의 (나)는 지상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나, 이것은 (가)에 있어서 징벌로 지상계로 축출되는 부분에 해당된다. <운영전>은 이러한 구조를 지니고 있음에 따라 운명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나타나는 죽음은 순환적인 세계관과 관련맺는 신화적인 차원에서의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죽음은 인생의 종말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을 상징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운영전>에는 이와 같은 운명적인 세계관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연적인 본능, 욕구에 따라 행동하려는 자기확인의 논리도 등장하며 그에 따라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여 인간의 본질성을 되찾으려는 實存的인 세계관도 나오고 있다.
4. 갈등과 화해의 변주곡
<雲英傳>에는 인물간의 세 가지 갈등양상이 나오고 있다. 우선 雲英이 안평대군과 김진사 사이에서 忠과 愛情의 갈림길에 서서 방황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러한 심리적 갈등양상은 이 소설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부분으로 여기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나머지 부수적인 두 가지 갈등양상은 안평대군과 궁녀 사이와 金進士와 그 하인인 特 사이에서 빚어진다. 전자는 인간의 본능과 욕정의 자연스러운 표출을 억압하는 사회규범 및 유교적 윤리(私宮 속의 궁녀들은 大君에게 일종의 忠을 바쳐야 하므로)에 대한 반항적 언행에서 나타나고, 후자는 하인인 特이 상전인 김진사를 능동적으로 이끄는 행동도 하고, 모해할 흉계를 꾸미는 데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즉 후자는 양반과 종 사이의 갈등양상으로 조선사회의 모순을 잘 반영하는 일면이다. 두 갈등 양상의 공통점은 모두가 양반?귀족 중심의 사회에서 비롯되는 모순에 기인한다는 데에 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전자보다 후자가 좀더 갈등양상이 심각하기는 하나, 궁극적으로 보면 두 대립 인물간의 갈등은 파국으로까지 치다지 않고 지배자의 아량 내지 선심으로 인해 화해국면을 맞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운영전>의 원본이 한문본일 가능성이 높고, 그 독자층이 주로 양반층이었을 것임에 기인하는 것이다.
안평대군의 私宮의 궁녀들이 인간적인 애욕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고 깊은 궁궐 속에서 젊음을 억누른 채 썩어가고 있는 것을 한탄하며, 자유로운 애정표출을 기대하는 동시에 신분에 따른 구속상태를 벗어나고 싶은 감정을 표현하는 대목은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임란 이후의 당대현실의 모순 속에서 여성계층이 어느 정도 자아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을 의미하며, 유교윤리에 입각한 남성 위주의 사회의 모순에 대한 여성계층의 자각 내지는 사회의식의 변화를 반영해 주는 현상이다.
한편 김진사와 특과의 갈등양상은 좀더 심각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하인 특의 언행에 의해 여주인공의 죽음까지 야기하게 되는 소설의 스토리 전개와 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특히 하인 특은 수동적인 金進士에게 월장할 계획을 알려주고, 사다리 등을 만들어주는 동시에 雲英을 궁 밖으로 이끌어 탈출시킬 방도까지 마련해 줌으로써 사건의 전개를 긴박하게 하고, 클라이막스를 향해 스토리 전개가 상승국면으로 치닫게끔 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또한 특은 결국 순진한 文人才士인 상전을 배신하여 함정에 빠뜨릴 흉계까지 꾸미는 흉악한 인물로 묘사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의 양반중심의 유교사회에서 빚어지는 모순된 신분계급간의 갈등이 노정된다. 그렇지만 이 작품이 증세를 반영하는 작품이란 점이 분명한 것은 서민계층의 신분상승욕구를 반영하는 조선후기 판소리계 소설 등과는 달리, 양반은 ‘착하고 인품있고 자애로운 인물’인 데 비해 하인인 천민계층은 ‘흉악하고 잔인하며 잔꾀나 부리고 악행을 도모하는 못된 인물’이란 도식을 도출하고 있는 점에서이다. 이는 중세에 위치한 조선조를 무리없이 이끌어나가기 위한 양반들의 지배자적인 논리인 것이다. 결국 소설에서 하인 特을 하늘의 노여움을 사 함정에 빠져 죽는 것으로 플롯을 짠 것에서도 이는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에 앞서 오히려 김진사는 특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고 雲英의 齋를 위해 다시 한번 노력해 줄 수 있겠는가 하고 자애로운 면모를 보임으로써 양반의 인격 및 존재위치를 고양시키고 있다. 이에 따라 이 소설은 葛藤과 和解의 變奏曲의 양상을 지니지만, 결국 이것은 <운영전>을 소수의 양반독자에게만 인기있는 소설로 굳히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함으로써 그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하인 特의 인물성격은 다음과 같이 상전에게 좋은 꾀를 알려주는 謀事家 및 智略者 역할도 하면서 동시에 상전인 양반을 흉악한 꾀로써 몰락시키려고 하는 이중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V. 최척전
?최척전?은 중종에서 인조때까지 활동했던 조위한이 지은 애정소설이다. ?최척전?의 창작은 1621년(광해군)에 창작되었고, 이 시기가 허균이나 권필의 사망 뒤이므로 ?최척전?은 ?주생전?이나 ?홍길동전?보다는 후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최척전?의 이본에 대해서는 그간 학계에 알려졌던 일사본<최척전>과 최근에 발견된 고대본 그리고 정명기교수가 새로 소개한 천리대본이 알려져 있다.
?최척전?은 특히 임진왜란의 참상을 고발한 포로문학이라는 데에 그 문학적 가치를 둘 수 있다. 아울러 ?최척전?은 전쟁이라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는 인간의 숭고한 사랑과 강한 가족애를 다룬 애정소설이라는 데에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최척전?의 가치는 뭐니뭐니해도 ‘옥영전’이라고 할 정도로 여주인공의 전쟁에 따른 수난과 가족의 헤어짐의 고통, 그리고 남편과의 재회를 통한 사랑의 성취모색 등을 다룬 애정소설이라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임진왜란 관련실기는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임란 종군실기, 임란 피란실기, 임란포로 실기가 그것이다. 임란 포로실기는 포로체험 당사자의 직접 체험이 담겨 있어 수난과 고통으로 얼룩진 삶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 실기는 ?최척전?의 포로이야기와 많은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실기로 강희맹의 5세손인 강항의 ?간양록?이 있다.
한편 임진왜란 관련 서사물로는 ?홍도이야기?의 야담, ?간양록?으로 대표되는 임란실기, ?난중잡록?으로 대표되는 야사, ?최척전?이라는 역사소설 내지는 사실주의 소설 등 실로 다양한 장르가 모색 실험되었다.
끝으로 ?최척전?은 16 -7세기의 동아시아의 변혁의 시대의 변화양상을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접이 특징이다. 특히 전쟁과 국제무역과 전쟁에 의해 훼손된 인간실존의 당위성 문제를 심도있게 다룬 수작이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다섯 차례의 만남과 네 차례의 헤어짐을 통해 사랑의 성취를 위한 긴장관계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것은 ‘헤어짐’의 과정에 당대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모두 등장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작가의 투철한 역사의식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V. 박씨전
?박씨전?은 여호걸계소설의 범주에 들어가는 역사소설이다. 따라서 ‘상위적 여성’과 ‘하위적 남성’이 등장하여 스토리가 전개된다. ?박씨전?이 형성되는 데 영향을 준 설화에는 이와 같은 천상계 여자와 지상계 남자와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온달, 서동설화와 나무꾼과 선녀이야기, 천상선녀로서 우렁이로 변신한 여자와 어부가 등장하는 욕신금기 설화를 비롯하여 백조소녀 설화, 고려 태조의 조부인 의조와 그 왕비인 용녀의 설화, 중강진 운림지 설화, 지하국대적퇴치설화 등이 있다. 또 불경에 나오는 파사닉왕의 추녀 금강공주의 고사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소설은 우선 조선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그리고 소설의 구조는 크게 이시백의 집안을 배경으로 하는 한 가정의 이야기가 전반부를 차지하고 국가적 이야기인 전쟁담이 후반부를 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전반적인 구조는 ‘혼인 - 박해?시련 -시련극복-도술적인 무영담 -행복한 결말’로 되어 있다. 또 이 소설은 여주인공 박씨부인이 추에서 미로 변하는 변신모티프를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박씨전?의 창작동기는 조상 대대로 지켜온 아름다운 국토를 무자비하게 유린한 호적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의 감정을 불어넣으려는 데에 있다. 그것은 이 소설의 배경에 병자호란이 자리잡고 있고, 이시백이라는 당대의 명신을 등장시키고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IV. 구운몽
1.작가
서포(1637 - 1692 숙종 18)의 자는 重叔,호는 西浦였다. 서포의 소설이 등장한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서포의 생애와 당대의 정치적 현실을 파악해야 한다. 왜냐하면,서포 김만중이 소설창작에 몰두하게 된 이유는 그가 현실정치에서 어려운 시련기를 맞이하였을 때이기 때문이다. 서포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그의 어머니 윤씨부인이다. 어머니에 대한 효행으로 인하여 그는 죽은후 숙종 32년 1706년에 국가로부터 정표가 내려졌다. 그의 어머니가 항상 서포와 더불어 거론되는 이유는 그가 유복자이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으로 정축년 정월 22일 강화도가 함몰되자 그의 선고 김익겸은 세자와 비빈의 몽진을 옹위하는 중임중에 순절하니 이 때에 만중의 백형 만기는 5세였고 만중은 태중에 있었다. 이 때부터 집안은 가난하여 윤씨부인은 두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안으로는 홍부인(서포의 외조모)을 도와 가사를 보살피며 밖으로는 참판공(서포의 외조부)을 받들어 옛 효자같이 섬겼고 틈이 나면 書史를 읽어 심사를 달래며 오직 두 아들의 훈육에 모정을 쏟았다.
이러한 모정은 서포집 권 10 先娥貞敬夫人 行狀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이로부터 집안이 더욱 가난하야 몸소 다희 짜고 수놓아 조석을 니우되 常해 태연하야 일직 근심하는 빛이 없고, 또한 불초 형제로 하야곰 알게 아니하니,대개 일작이 가사에 골몰하야 서적 공부에 방해로울까 염려함이러라 불초 형제 아해쩍에 밧스생이 없으니 소학 史略 당시 같은 류는 대부인이 다 손소 가라치시니 비록 사랑하시기를 과히 하나 그 글 전하시기는 심히 엄히 하사 常해 닐오되,너해 무리 다른 사람에 비길배 하니라 반다시 재조 ㅣ 남에서 한 층이 지나야 겨우 남에게 참여하나니,사람이 행실없는 자를 꾸지자매 반다시 갈오되 과부의 자식이로다 하는지라.
위에 나타나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윤씨 부인은 자녀교육에는 엄격하였으며, 특히 애비없는 자식이란 말을 듣지 않게 하기 위해 더욱 무섭게 자식들을 재촉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윤씨부인은 조선조의 여성의 부도와 열녀상의 한 표본이 될만하다. 이러한 엄격하면서도 자상한 어머니상이 정립된 배경에는 윤씨부인의 혈통을 빼놓을 수 없다. 윤씨부인은 참판공과 홍씨부인 사이에 무남독녀로,애지중지하는 할머니 정혜옹주의 사랑과 훈육에서 여성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본다. 물론 윤부인의 고조부인 문정공은 영의정을 지냈고 증조부 문익공 또한 영의정을 지냈으며,조부는 선조대왕의 부마인 문목공이요,선고는 인조조의 명신이며,이조참판을 지낸데서 나타나있듯이 그녀의 집안은 누대에 명환들을 배출한 해평 윤씨의 가문에서 태어 났으니 남부럽지 않게 배우고 자라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윤씨부인 가문만이 아니라 김만중의 부친 가문도 광산 김씨로 화려한 집안이다. 윤씨부인의 시고조부는 사계 김장생이요,신독재 김집이 그녀의 시종조였다.
서포 김만중의 집안은 사실상 정축년(1637)에 이미 몰락했고,외가는 참판공에 이어 홍부인의 하세 이후부터 몰락하였으니 서포 나이 아홉살에 소학을 배웠고 열세살에 사서,시경언해를 홍문관에서 빌렸음을 보아 정확히는 기축년(1649)이니 약 10년간에 양가가 몰락하여 “몸소 다회(양말) 짜고 수놓아 조석을 니우되 常해 태연하야”에서 알 수 있다.
이런 가난 속에 오직 두 형제를 위하여 모든 생명을 바쳐 키운 보람은 만기가 스물 한살에 급제한 갑오년(1654년)이었으니 그때 윤씨부인의 나이 37세이었다. 서포는 만기보다 한해 앞인 임진년에 진사에 합격했지만 만기처럼 21세에 문과에 오르지 못했다. 서포는 21세에는 낙방했다가 29세에 장원급제했으니,윤씨부인의 나이 49세였다. 윤씨부인이 14세에 시집와서 17세에 만기를 낳았고,21세에 과부가 되었던 것이다. 21세의 청상으로 약 20년간 서포 형제를 키우기 위하여 피나는 고생을 했다. 그러니 만기가 21세에 급제하고 부터 생활이 다소 윤택해 지기 시작했다고 보면 서포는 17세가 되니 서포의 수학은 어머니에게서뿐이었다고 봐야 되겠고,또 서포 형제의 감수기는 말할 수 없는 빈궁기였기 때문에 서포의 성격형성은 자연 공명심과 효행심이 그의 생애를 통하여 강하게 발동되었을 것이다.
서포 김만중은 29세에 정시갑과에 장원급제하여 첫 출사가 성균관 전적이었다. 30세에 정언,司書를 지냈고 31세에 持平을 거쳐 修撰에 올랐다. 32세되는 3월(현종 9년)에 낙향한 대신을 입조케 할때 특별히 中使를 보내지 말고 승지나 史書를 보내자고 주장하다가 승지 이정과 함께 현종의 꾸중 ‘萬重之言 甚奸惡也’을 듣고 파직을 당했다. 실로 이때부터 서포의 파란만장한 정치활동은 막을 올렸다. 끝없는 色目의 갈등속에서 자연 서인에 가담했고 드디어는 서인의 居孼이 되기까지의 그의 생활은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었다. 한마디로 서포 김만중은 정치인이 지니는 포용과 술수가 만년에는 출중했지만 초기에는 御前 직언으로 강직성탓으로 시대의 풍운아로 일생을 마쳤을 뿐이다.
서포 김만중은 35세때 암행어사로 賑政을 살피는 중임을 맡기 전까지 31세 8월에 성균관 교정관으로 발탁되어 당대의 소장 문사들로 앞날이 촉망되는 신진들 속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현종의 侍講官으로 왕에게 경서를 강론하고 부터 현종의 재신임을 받았다. 이로부터 누진하여 경기,삼남지방의 암행어사로 떠난 것이 서포가 생후 처음 어머니 슬하를 떠나는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특유의 직언으로 인해 37세때 첫 유배생활을 떠나게 된다. 현종 14년 9월에 어전에서 遷陵의 일로부터 민업의 가사에 대한 喪禮문제와 許積을 논박한 소운길의 상소를 두둔하다가 현종이 당파에 치우친 언사라고 꾸짖자 ‘신은 그릇된 말을 그르다고 하였을 뿐 어찌 색목으로 혐의로운 말씀을 사뢰겠습니까’라고 대담하게 어전에서 허적의 파직을 주장하여 현종의 진노를 사 금성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러나 다음해인 38세때 校理를 거쳐 숙종 원년에 부승지가 되었으나 남인의 대거 발탁으로 그의 강직한 성품과 과격한 언사로 그해 5월 27일 다시 관작을 삭탈당하고 ‘김’자 성을 못쓰게 하는 벌을 받았다. 그러다가 삭작당한 지 5년만에 즉 서포 나이 43세에 예조참의로 복작되어 46세까지 대사간,대사성,부제학,도승지 등을 역임하고 47세에 부제학의 자리에 올랐다.그후 50세까지 공조판서,대사헌,우참찬,예조판서,의좌참찬,의금부판사로 전보되었다가 숙종 12년에 다시 대제학을 지냈다. 이 시기의 7년동안이 서포 김만중의 전성시대인 셈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조선조의 당쟁의 원인과 발전양상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쟁은 조선조 연산군때부터 말기까지 약 360년간에 걸친 정권 탈취를 위한 당파싸움으로 노론,소론,남인,북인의 4가지 당파로 분파되어 사색당파라고 불리었다. 당쟁의 근본원인은 3가지인데 첫째로 유학파의 대립이었고,둘째로 왕실외척의 내홍이었으며,세째로 정치제도의 결함이었다. 당쟁의 기원은 선조때의 김효원과 심의겸의 사류들에 의한 동,서 양파의 대립항쟁에 두고 있으나 그원인을 살펴보면 고래로부터 한국의 유학은 주자학이 조종이었으며,고려 후반기에 충청도 남포의 백이정이 원나라로 부터 주자학을 도입한 후 고려말기에는 정몽주가 계승하였고 조선에 들어와서는 점필재 김종직이 정통을 이어 받았다.그리하여 그의 문하에는 김굉필,정여창,김일손,조광조 등 석학이 배출되어 자연적으로 유종을 이루게 되었으므로 은연중 정계도 이들이 좌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정내에서는 이들을 대표로 한 유학파와 비유학파 간에 알력과 대립이 생기게 되었고 그 여파는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라는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 등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비유학파에 의해 유학파가 몰락된 후에는 외척 사이에 정쟁이 벌어지게 되었고,또하나 후세 당쟁의 소인이 되었다.
한편 당쟁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1575년(선조 8)에 사류가 동서로 분당됨에 따라 당시의 부제학 율곡 이이는 서인이면서도 1584년(선조 17)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전후 약 10년간에 걸쳐 조정에 있으면서 양파의 대립을 완화하기에 노력하여다. 그가 죽은 후에는 이 산해,노수신,유성룡 등 동인의 쟁쟁한 인물들이 등용됨으로써 서인의 세력은 점차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동인이 세력을 잡게 됨에 있어서 내부분열이 생기어 1591년(선조 24)에 동인은 남인과 북인의 두 갈래로 분파되었다. 남인은 우성전,유성룡 등이 중심이 되었고,북인은 이발,이산해 등이 영수가 되었다. 남인,북인의 명칭의 유래는 우성전은 집이 남산밑에 있었으므로 남인이라 하였고 이발은 북악산 밑에 살았으므로 북인이라 불렀던 것이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그로부터 7년간은 국가와 민족이 존망의 위기에 직면하였던 관계로 파쟁을 일삼을 겨를이 없었으나 전란이 끝나자 곧 남인인 유성룡은 화의를 주장하였다는 구실로 실각되었고 북인의 남이공이 정권을 쥐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남인은 갑자기 몰락되었고,북인이 세력을 잡게 되었다. 북인의 득세와 더불어 동인의 명칭은 없어지고 북인의 세상으로 변하였으나 곧 내분이 일어 대소 양북으로 나뉘어 진다. 광해군의 즉위로 이이첨 등의 대북이 세력을 잡았고 소북을 숙청하여 광해군의 재위 15년간은 대북인의 천하를 이루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고 서인이 정권을 잡아 대북은 여지없이 몰락된다.1649년 인조가 사망한 후 병자호란에 패하여 심양으로 잡혀가 오랫동안 볼모생활을 하게 되었던 까닭에 한층 북벌사상을 굳게 품게 된 효종이 즉위하자,이제까지 서인의 집권자였던 김자점은 역모사실이 탄로되어 실각하고 송시열파가 등장하였다.그리하여 서인 내부에는 형세의 변동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나 다음 현종 초에 이륵까지에는 서인의 집권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서인이 집권하고 있던 동안에도 남인은 이원익의 등용으로 명맥을 이어왔고 북인 중 대북은 전멸되었다고 하나 소북은 남아있어서 서,남,소북의 3파 대립의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것을 3색이라 일컬었고 후에 서인이 노소 양론으로 분파되니 남인,소북,노론,소론을 4색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1650년에 효종이 붕어하고 현종이 즉위하자 예절문제로 인하여 송시열이 밀려나게 되자 곧 서인이 세력을 잃고 윤휴,허적 등의 남인 일파가 다시 세력을 회복하게 되었던 것이나 청탁 양파로 다시 분열되었다. 1675년에 현종의 뒤를 이어 숙종이 등극하자 정권은 다시 김석주,김익훈,송시열,윤증 등을 중심으로 한 서인파로 넘어갔다. 이 기간에 왕자저사 문제로 송시열의 유배賜死를 비롯하여 서인일파가 숙청되었고 남인이 한때 세력을 회복하였으나 6년의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았고,정권은 다시 서인에게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노,소 양론의 대항속에서 노론의 집권으로 숙종일대를 마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속에서 김만중은 다시 당쟁의 소용돌이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51세되던 해에 인조의 계비 복제문제의 주인공 조사석과 장씨 희빈의 문제를 들어 어전에서 왕의 모든 실책과 정국의 불안정은 오로지 女寵이 근원이 된다고 따지다가 숙종의 격분을 사 당장 투옥되었다가 숙종 13년 51세의 나이로 다시 선천에 유배를 가게 된다. 그러나 영의정 김수흥의 건의로 다음해에 겨우 풀려나왔다가 숙종 15년(1689)에 인현왕후 민비를 폐출하고 장희빈의 책봉을 반대하다가 다시 남해 絶島에 유배를 가게 되고 그화는 아들과 손자에게 까지 미치어 제주도,거제도로 유배가게 된다.
이러한 정치현실속에서의 서포는 두 가지 성격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그 하나는 야망의 실현을 추구하는 정통 유교관료로서의 성격이고 다른 하나는 강직한 성품에서 비롯되는 당대 사회의 모순에 대한 비판과 풍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은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로 미학적으로 형상화된다고 할 수 있다.
2.서포의 학문세계와 세계관
당대는 유교사회였으므로 역시 서포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성리학을 비롯한 그의 학문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서포는 동방의 예가인 김사계의 후예로 태어 났다. 그러나 집안이 어려워 외가에서 자라났다. 그의 어머니가 쓴 尹氏行狀에는 “집안이 더욱 가난하야 몸소 다회(布)짜고 수놓고 가사에 골몰하야 서적공부에 방해로울까 염려함이러라 불초 형제 아해쩍에 밧스생이 업으니 소학,사략,당시 같은 류는 대부인이 다 손소 가라치시니 비록 사랑하시길 과히 하나 그 글 전하시기는 심히 엄히 하사”라고 하여 그의 어머니 윤씨부인이 스승이었음을 전하고 있다. 그다음의 스승은 외조부였고,세번째가 백형 서석과 숙부 김익희였다. 성리학과 역학은 숙부에게서 배웠고,한시와 패간지설은 백형에게서 배웠다. 서포는 천재요 다재였다.그는 고명한 스승도 없었는데 16세에 진사에 합격했다. 문과만은 21세에 낙방했다가 29세에 庭試 甲科에 장원급제하였다. 30세부터 출사하였는데 그때부터 그의 학문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선학들에게 배우기도 했고 또 영향을 주기도 했을 것이다. 그것은 백형 瑞石의 사우관계를 보면 沙溪 김장생의 고제 송시열,송준길을 위시하여 김수항,이광직,이민서,민유중,이단하 등의 인사들과 교유하였음을 볼 때 상대 선학이 모두 서인의 거벽이고 보면 서포 또한 다분히 학문과 정치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본다.
서포의 학문에 대한 조예가 깊다는 평자는 없다. 그러나 그가 대학자가 아니면 오를 수 없는 대제학을 두번이나 한 것을 보면 그의 학문의 수준을 짐작하게 된다. 이제 그의 문집과 만필을 통해 그의 학문적인 내면을 살펴 보기로 한다. 첫째 서포는 한시의 대가였다. 그도 말했듯이 시를 잘 읊기는하나 이론을 세워 논평하지는 못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남의 시를 평하기는 잘하나 읊지는 못하는 사람이 있다. 서포는 양자를 겸한 시인이다. 그의 문집에 수록된 한시는 양적으로나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더욱 그의 만필은 당대에 나온 문학평론집으로 자랑해야 할 최고의 문헌이 아닌가한다. 그의 시를 보면 五言古詩 34수,칠언고시 26수,오언율시 58수 칠언율시 56수 오언절구 8수 칠어절구 42수나 되는 분량으로 도합 224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서포는 절행과 만가와 신변시를 많이 읊었다. 다시 말하면 서포는 서경 보다는 자연을 자연보다는 인생을 노래한 시인이다. 그래서 그의 시어에 주로 구름과 꿈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둘째는 疏文이 많다. 소문은 원칙적으로 모든 민중의 것이다. 백성이 왕에게 올리는 글이다. 곧 백성의 의견을 듣고 국정에 반영하는 민주적 방법이다. 다시 말하면 심눈고와 같은 직소제가 아니고 문자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올리기 때문에 관인과 사림들로 그 범위가 제한되어 있었다. 백성의 상소를 깊이 이해하던 세종이나 숙종조때에는 그 폭이 넓었으나 폭정이 심하던 광해군 때에는 언로가 거의 차단되었다. 그 간접적인 전달방법에 있어 승정원에 직정제와 지관을 통한 종현도 상류가 있고 그 처리는 승정원에 접수되면 국왕은 반드시 회시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상소 형식은 上疏,답자,봉사,서계,장계 등이 있는데 서포의 경우는 소문이 가장 많았고 다음이 어전 직언이 둘째로 많았다.
그의 문집 권 7,8은 모두 상소문이었다. 사소가 28회,답문이 1회,상계가 2회,기타가 3회,모두 34회인데 서포가 병조판서때 무려 7회나 辭疏를 내었고 또 대제학 때도 7회나 사소를 상정했으나 不允의 비답이었다. 이는 서포가 숙종 5년 때 예조참의로부터 누진하여 숙종 12년에 두번째 대제학으로 있을 때까지 그의 나이 43세 부터 50세인 7년간은 전생애의 황금기였고 이때 상소를 많이 하였다. 그가 32세때 하향한 대신의 환소에 특히 중사를 보낼 필요가 없이 승지나 사관으로도 족하다는 직언에 현종은 만중을 간악한 사람이라 대노하고 선파후추하라는 명을 받을 때가 그의 첫번째의 설화였고,두번째가 현종 14년 9월에 허적은 종실의 정담(인조의 왕손)와 또 남인이었던 외가 오씨들과 합세하여 당시 영상 송시열을 물리치고 허목이 영상이 되었다. 이때 서포는 어전에서 뒤에는 불미스러운 세간의 말들을 이야기하면서 허목의 인품을 공박하고 허목을 하야케하는 직언을 했다. 현종은 서포의 말을 받아 당파에 치우친 언사라고 꾸짖으니 서포는 굽히지 않고 신은 그릇된 일을 그르다고 하였을 뿐 어찌 색목으로 혐의로운 말씀을 사뢰겠읍니까 하면서 대들었다. 이에 현종이 진노하여 당장 서포를 파직시켜 금성으로 정배하엿다. 이것이 두번째 설화였고,세번째 설화가 바로 기이환국의 불씨다. 그때 귀인 장씨(희빈)를 숙종이 총애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총권에 편승한 조사적의 문제를 들고 완에게 또 대들었다. 왕은 금시초문인듯 모른채 하려 하였고 또 김수환(서인의 원로)의 직위문제도 회피하였다. 그러나 서포는 왕의 모든 실책과 정국의 불안정이 오로지 여총이 그 근원이 된다고 하니 숙종은 노기충천하여 서포를 선천으로 유배시켰다가 다시 남해로 위리정치케 한 것이 그의 마지막 설화였다. 그의 특징은 주로 상소와 직언에 의한 충간인데 그것의 내용은 독직사건이 아니라 오로지 서인과 국정을 위한 직필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세째로 그의 악장,문학,시화를 거론할 수 있는 데 그것보다 여기에서는 성리학과 道佛사상에 대해 살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서포는 육곡을 그 연원으로 한 예학이 사계,신독재로 거쳐 누대에 이름높은 예가의 후에이다. 그러므로 말할 것 없이 서포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음은 사실이다. 그의 백형의 瑞石集에 보면 서포는 간반에 가득한 많은 고서책을 탐독하는데 낙을 삼고 세속에 눈을 팔지 않고 고요히 심회에 잠겨 한거하기를 좋아하고,형제가 切磋琢磨하며,세상일은 마음에 두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고훈의 이치와 도의를 탐구하고 천년에 바탕한 유학을 닦으며 영리를 생각치 않고 소식도 배부르게 여기고 베옷도 따뜻하게 여기며 시를 창주한다 했으니 서석은 아우를 두고 안빈낙도하는 유자였음을 말한다. 또 서석의 아들이 쓴 글에 보면 서포가 성리학을 위시한 國廟古實에 관천하는 박식이라 했음은 곧 서포가 그의 백형 瑞石集 발문에 ‘萬重自童年 學於先生’이라 함은 마땅히 서포는 서석으로부터 성리학을 배웠다는 말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예학의 가문에서 가학의 풍토에 젖어 자란 서포는 예학에 해박한 식자였음은 또한 말할 나위도 없다.
서포의 主氣論的인 세계관은 사실상 순환론적인 우주관을 바탕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가 불교의 ‘천지수화’의 우주관을 가미한 것에서 윤회설에 입각한 불교의 三界六道說을 추종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또 서포는 명나라를 통해서 들어 온 서양의 地球說을 이미 섭렵하고 있었는데, “明 萬曆 연간에 서양의 지구설이 나타나서 혼천, 개천설이 비로소 하나로 통일되었으니 역시 한 쾌사이다. 대저 고금의 천문을 말한 사람들은 코끼리를 만지는데 각각 한 부분만 만진 격이라면, 서양역법은 비로소 그 전체를 만졌다 하겠다”고 한데에서 확인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서포는 동양의 순환론적 운명론과 서양의 과학적 우주관을 절충한 세계관을 가진 셈이 된다.
3.서포의 문학관
서포는 다른 조선조의 사대부들과 달리 훈민정음의 우리 글에 대한 의식이 투철한 작가이자 정치가였다. 그래서 천태산인 김태준은 그를 가리켜 국민문학적 견해를 가진 소설가로 칭하였다. 그는 한시 뿐만이 아니라 악부,가곡,잡영 등도 즐긴 것으로 보아 문필력이 대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포집>>의 서문을 쓴 삼연옹은 다음과 같이 서포의 사상의 폭넓음과 문필력의 힘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공은 글을 잘 쓰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좋은 글이 나왔다.....비록 餘事末藝라하더라도 이처럼 淸通한 가슴속에서 흘러나오지 않음이 없었다.....精하게는 불교와 도가의 사이에서 유무에 출입하였으며 粗하게는 패관소설의 굉박,허탄함에 이르기까지 역력히 꿰뚫지 못한 것이 없었다. (西浦集 序)
또 북헌 김춘택은 諺詩를 탐음한 문인이었다. 북헌은 그 종조부인 서포에게 학을 배우고 그의 <<잡설>>을 보더라도 그는 서포를 배운 한 사람이다. 素性이 탕달하여 낙척불우로 일생을 시종하였으니 그는 무관의 명사로서 벌써 십여 성상을 적소에서 보내게 되어 북헌으로서는 한 消閒之策으로 문예방면에 나서서 제1보로 착수한 것이 <사씨남정기>의 한역이다. 문예에 정곡한 견해를 가진 북헌이 “<서유기>,<수호전>은 기변굉박하다”라고 하면서 서포의 <남정기>는 “백성의 착한 본성을 돈독히하고 세상을 교화하는 데 보탬이 되는 것”이라고 논한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소설에 대하여 탁월한 견해를 가진 서포와 북헌은 서포의 <<서포만필>>에서 당대의 사대부들이 인격도야의 큰일에 쓸 수 없다라고 하면서 소설창작을 꺼려한 데대해 오히려 소설의 존재가치를 두둔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동파지림>>에 말하였으되,“여항에서는 자기집 어린애가 용렬해 집에서 귀찮게 굴면 문득 돈을 주어 내보내 모여앉아 옛날 이야기를 듣게 하는데 삼국사 대목에 이르러 유비가 패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찡그리며 눈물을 흘렸고,조조가 패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뻐하며 쾌재를 불렀다”라고 하였는데,이것이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의 始源인지 모르겠다. 이제 진수의 <<삼국지>>와 사마온공의 <<資治通鑑>> 같은 것으로 사람을 모아놓고 이야기해 보았자 눈물을 흘릴 자 없으리니 이래서 통속소설을 짓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소설의 존재가치를 높이 평가한 서포는 조선 사람이 한문,한시를 앵무새처럼 흉내낼 것이 아니라 조선말로 쓴 문학을 왜 갖지 못하느냐라고 <<서포만필>>에서 논하고 있다. <<북헌잡설>>에 나와있듯이 그가 한글로 쓴 시조를 즐기기도 한 것에서 그의 우리 말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여러 詞 중에서도 정송강의 전 후 사미인사는 가장 뛰어나다. 일찍이 들으니,김청음이 이 사 듣기를 대단히 좋아하여 집안의 비복으로 하여금 모두 외우게 하였다. ....이 사는 속언으로 지었는데, 정송강이 유배가 울울할 새,군신의 이합을 남녀의 애증에 비유한 것이다. 그 심지는 충결하며 그 절개는 곧고, 그 말은 정아하고 곡진하며,그 곡조는 슬프되 단정하여, 거의 굴원의 離騷에 짝할 만하였다. 우리 집안의 서포옹께서 일찍이 이 사를 한 책에 베껴 써두고 서명을 언소라 하시었다.
4. ?구운몽?의 창작동기
서포 김만중은 숙종초 그의 나이 43세부터 50세까지는 관직생활이 비교적 순탄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이후 당쟁의 와중에 서인으로 가담한 연고로 세 차례의 유배생활을 해야만 한다. 특히 51세때인 숙종 13년 趙師錫이 장희빈과 결탁하여 왕의 총애를 받고 파격적으로 승진하는 것을 보고,이를 직접 왕에게 공박하다가 선천에 유배되었고,다시 방송되었다가 숙종 15년 다시 이 문제로 남해 絶島에 안치되었다가 숙종 18년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구운몽>은 남해 유배시절인 숙종 15년 전후하여 창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한편 <구운몽>의 창작동기에 대해서는 1)서포가 유배되었을 때 대부인의 破閑을 위해 하룻밤만에 지었다“는 李圭景의 <<五洲衍文長箋散稿>>에 나오는 기록과 서포가 玄妙하고 深度있는 三敎의 이상화를 실제로 정치에,생활에 방영하고 싶었으나 시간이 너무 없었으므로 2)三敎의 이상적 실천화를 위하여 창작하였다는 학설이 있다.
5. <구운몽>의 배경사상
<구운몽>의 배경사상으로는 동양의 三敎思想 즉 儒,佛,道 사상의 교묘한 융합으로 이루어졌다는 삼교사상혼합설과 <구운몽>은 삼교사상의 융합에 의한 것이 아니라,순수한 불교사상으로 이루어진 불교소설이며,그중에서도 迷에서 幻을 통하여 覺에 도달하는 과정을 다룬 金剛經의 空思想이 바탕이 되었다는 학설로 나뉘어 진다. 또 최근에는 般若사상의 空이 지닌 구조와 대응되는 것,또 금강경의 空사상설에 대한 반박으로 불교사상 일반의 초보적 단계를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들이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중 통설적인 견해인 정규복교수의 ‘空’사상을 자세하게 설명하기로 한다. 그는 <구운몽>을 유,불,선 삼교사상의 융합으로 보지 않고 순수한 불교소설로 파악한다. 금강경은 공사상이 중심으로 된 諸般若經 중 중심경이거니와 구운몽이 금강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함은 구운몽 작품의 전 스토리의 전개가 금강경의 풀이라고 할 만큼 금강경과 부합될 뿐만 아니라,또한 구운몽 가운데 금강경에 대한 언급이 누누히 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구운몽 초두에 육관대사가 전도차 서역으로부터 중국에 들어와 남악형산 연화봉 위에 암자를 짓고 전도할 때에 오직 금강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空사상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 원래 불교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공사상은 불교의 정통적인 사상이다. 왜 그러냐 하면,無師獨悟하였다는 소위 법이라는 것이 즉 緣起요,이 연기의 법이 佛陀의 근본사상인 이상 이것이 즉 불교의 정통사상인바 이 緣起의 바탕이 즉 空인 것이다. 空사상은 迷에서 幻을 통하여 覺에 도달하는 과정을 말한다. 각의 세계가 말하자면 眞空妙有인 것이다. 그런데 본시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가진 각체이며 만물은 실상을 나타내고 있는 如如다. 이것은 見思惑에서 생기는 편집때문에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覺과 迷의 차이는 0도는 360도라는 이론과 같다. 즉 불과 범부의 차는 가장 멀면서도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모두 佛이다. 다만 一念의 迷로 覺의 자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覺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 심성의 본자리에 있는 것이다.
自他分別이 없던 如如의 세계에서 갑자기 대립의 세계로,무한에서 유한으로,覺자리에서 迷로,급변한 境我의 分,이보다 더 큰 전환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은 경악의 소리를 치게 되는 것이다. 생명이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보는 세계는 모두가 有이다. 그것은 자기의 존재가 무엇인가에 의해서 구별지어 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有도 假有요,無도 假無다. 그러므로 非有非無이며 또는 有는 無가 있기 때문에 이름지어지고 無도 有가 있는 것을 전제해서 불리어지는 것이므로 有를 부정하면 無自身이 긍정되는 게 아니라 역시 부정되는 것이므로 또한 非眞有 非眞無다. 즉 절대의 有나 無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無가 有를 긍정하게 되면 無 자체는 따라서 긍정되는 것도 또한 아니고,역시 無 자신이 無라야 하므로 有亦無 無亦有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구운몽>에 적용시켜 보면 구운몽의 주인공 性眞이 楊少游로 幻生하여 인간의 부귀공명을 마음껏 누렸으나 만년에 그의 ?日을 당하여 취미궁 고대에서 인생의 무상을 느낀 것은 금강경에 이른바 모두가 幻인 것이다. 그리고 양소유가 인생의 무상을 느껴,금강경에 이른바 幻夢을 통하여 覺한 후 양소유는 없어지고 다시 性眞으로 되돌아 가는데,이것은 금강경에 <佛告須菩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 한 바와 같이 무릇 相있는 바 모두 허망한 것이니,諸相을 相아닌 것으로 본다면 如來를 본 것과 같다고 한 즉 성진이 과거에 양소유로 환생하여 인간의 부귀공명을 마음껏 누린 것은 實相이 아니요 일체가 환몽으로 보고 覺한 후에는 상 아닌 것으로 본 것이다. 즉 성진은 八仙女의 미모와 부귀공명을 실상으로 받아들이려 했다. 여기서 성진은 혼미한 현상 가운데 헤매는 것이다. 성진의 스승 六觀大師는 성진을 꿈을 통하여 양소유로 환생시켜 인간의 富貴功名을 마음껏 누리게 하고 나서 覺夢하여 인간의 모든 부귀영화가 일장의 환몽임을 깨닫게 한다. 이로 인하여 성진은 양소유 이전의 성진으로 환원하되 그것은 제 자리에서의 성진이 아니라 360도로 변한 성진인 것이다. 즉, 迷한 성진과 覺한 성진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장 먼 거리에 있는 것이다. 迷의 성진은 有요,無요,양소유는 非有요,非無요,覺한 성진은 非非有요,非非無인 것이다.
즉 구운몽은 迷에서 환몽을 통하여 覺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이것은 금강경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구운몽의 주제인 것이다. 구운몽이나 금강경은 모두 迷에서 幻을 통하여 覺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것이다. 覺한 이후의 세계는 구운몽에도 언급되어 있지 ㅇ낳으려니와 금강경에도 언급이 없다. 이것이 구운몽과 금강경이 공통하는 空사상인 것이다. 覺한 이후의 세계는 眞空妙有인 것이다. 覺하면 眞空妙有이다. 즉 구운몽은 眞空妙有에서 스토리는 끝나는 것이다.
6. ?구운몽?의 형성과정과 작품구조
?구운몽?은 전통적인 요인과 외래적인 요인의 영향으로 완벽한 짜임새를 갖춘 이상적인 귀족소설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우선 ?구운몽?은 ??삼국유사?? 낙성이대성 관음조에 나오는 調信說話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지하계의 염라대왕 방문이나 용궁출입 등이 등장하는 김시습 작 ??금오신화?? 중 ?남염부주지?와 ?용궁부연록?으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외래적인 요인으로는 ??太平廣記??소재 ?玉枕記?와 三藏法師 일행이 流沙河를 건너 西域을 가는 도중에 일어난 일과 송림속에서의 꿈과 覺 등을 다룬 ?西遊記?의 영향을 들 수 있다. 그밖에 근원적으로 몽환구조는 불경 雜寶藏經의 ?娑羅那比丘?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구운몽>의 작품구조는 주인공 성진이 양소유로 바뀌면서 나타나는 <현실구조>와 <꿈의 구조>로 크게 쪼개진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스토리의 95%이상은 <꿈의 구조>속에 담겨 있지만,가장 핵심적인 장면은 성진의 대각장면인 말미부분에 나온다.
* 현실구조: 성진의 修道 - 夢 - 覺 : 성진의 삶
꿈의 구조: <출생 - 결연 - 고행 - 시련극복 - 행복> : 양소유의 삶
<꿈의 구조>의 삽입으로 인해 이 소설은 영웅소설,적강소설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대체적으로 <현실구조>,<꿈의 구조>의 전개과정을 종합해 볼때 <理想小說>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구운몽?의 사건 전개는 윤회사상을 축으로 주인공의 하룻동안의 체험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특히성진에게 일어난 하룻동안의 사건은 낮의 체험, 밤의 체험, 새벽의 체험이란 세 계기적 사건을 축으로 하고 있다. 이중에서 낮과 새벽의 체험은 외적 체험인 현실사건으로 된다. 그러나 낮의 체험은 성진이 선방에서 행하는 참선 속의 내면적 의식체험인 사유란 형식을 빌어서 전개되는 내적 체험이다.
<낮의 체험> ------> <밤의 체험> -------> <새벽의 체험>
실제의 사건 심리적 사건 실제의 사건
VII. 배비장전
?배비장전?은 남성의 훼절과 봉욕을 주로 다루고 있는 판소리계열의 풍자해학소설이다. ?배비장전?은 판소리 ?배비장타령?에서 발전된 작품이다. 원래 ?배비장타령?은 판소리 12마당에 속한다.
?배비장전?은 서거정의 ?태평한화골계전?에 나오는 발치설화와 이원명의 ?동야휘집?에 나오는 미궤설화가 근간이 되고 그위에 비슷한 내용을 지닌 평양기생이야기, ?실사총담?중 ?풍류진중일어사? 등의 실사와 설화가 덧보태어져서 한편의 소설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소설의 작품구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전반부의 정비장과 애랑의 이별답과 후반부의 배비장 봉욕담이 그것이다. 이러한 장면분화는 판소리의 특성과 관계가 있다. 이 소설에서는 특히 방자의 인물설정이 뛰어나다. ?춘향전?에서의 방자와는 달리 이 작품에서의 방자는 김목사의 묵계 아래 배비장을 개, 거문고, 업궤신 등으로 비속화시키는데, 중개자의 위치에서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것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