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용산 전자상가에서 20년간 ‘배터리 재생’ 한 분야에만 전념, 넉넉한 사업기반을 다진 안재훈 사장. 손에 쥐고 있는 동그란 막대형 충전지(배터리셀)를 갈아끼우면 중고 배터리가 새것으로 변신한다. / 이명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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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불황 시대를 맞아 ‘리사이클링’(재활용)과 관련된 틈새시장을 개척한 ‘블루칼라’ 창업자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수명이 다한 2차전지를 새것으로 부활(?)시키거나, 여러 번 쓴 식용유를 새 식용유나 다름없도록 만드는 기술을 개발한 여성 창업자도 있다.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기 위해 열정을 쏟아 부은 ‘틈새시장 1인자’들의 성공담을 소개한다.
서울 용산 선인상가 22동 건물은 용산역 철로와 담 하나 사이다. 철로변이 으레 그렇듯 담벼락 밑에는 누런 휴지조각에 담배꽁초, 비닐 봉투 쓰레기가 나뒹군다. 녹슨 철계단을 밟고 올라간 2층 ‘두성파워’ 사무실은 5평으로 비좁고 남루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 보니 정반대다. ‘전자 배터리 재생(리필·refill)’이라는 틈새분야에서 20년째 홀로서기로 버텨 온 안재훈(安滓勳·51) 사장은 ‘리필 인생’에 대만족이다. ‘리필‘이란 배터리의 충전지(배터리셀)를 교체하는 작업을 뜻한다.
안 사장은 하루 20~30개의 2차 전지(충전해 다시 쓸 수 있는 배터리)를 새 것으로 탈바꿈시킨다. 노트북 컴퓨터와 디지털 카메라, 캠코더, 청소기, 면도기 등의 모든 2차 전지가 수입원이고, 먼 길을 마다 않고 수소문해 찾아오는 알뜰 소비자가 고객이다.
“400회 가량 충전 또는 방전하면 배터리 수명은 끝납니다. 그러면 제품도 수명을 다했다고 생각하기 쉬워요. 하지만 천만에요! 새 배터리 3분의 1 값이면 다 쓴 배터리를 새 것처럼 재활용할 수 있어요.” 리필 수요가 가장 많은 노트북 컴퓨터의 경우 새 배터리 1개 값은 16만~18만원선. 리필하면 4만~8만원이면 OK다.
리필은 ‘분해→교체→조립’의 3단계 과정으로 얼핏 간단해 보인다. 잘 드는 칼로 배터리 케이스(배터리팩)를 뜯어 전자회로의 이상 유무를 점검한 뒤, 주로 리튬이온인 배터리셀을 새 것으로 바꾸고 다시 배터리팩을 조립하면 끝이다.
“쉬운 것 같죠? 하지만 손에 익으려면 족히 3~4년은 걸립니다. 전 18년 동안 이 일만 했습니다.”
안 사장이 ‘리필‘에 뛰어든 것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1985년부터 각종 배터리를 판매하다 호기심에 한두 개씩 뜯어본 것이 그만 직업으로 굳어졌다. 조치원종고 전자과 출신이라는 경력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사업은 쉽지 않았다. ‘배터리 재생업’을 평생직업으로 삼으려던 1988년은 2차 전지가 거의 보급되지 않았던 때. 한 달에 두세 개가 고작이었고, 손님이 맡긴 배터리를 망가뜨려 변상한 적도 셀 수 없이 많다. “고민했죠. 잠도 오지 않았어요. 사무실에 틀어박혔죠. 그러던 중 배터리 케이스를 초음파 기술로 감쪽같이 붙이는 접합기를 직접 고안했어요. 정말 일류 기술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안 사장은 이 기계를 다른 업체에 판매하기도 했다.
“한 달에 2000만원 이상은 집으로 가져갑니다. 물론 4~5명의 직원들에게 월급 주고, 세금도 내고, 자재 값을 지불하고 남은 돈이지요.”
얼마 전부터 안씨는 체인점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알뜰 소비의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사업 전망이 밝다고 본 때문이었다. 최근 서울 역삼동에 2호점을 냈고, 부산과 대구에도 점포 개설을 준비 중이다. “10년은 끄덕 없을 겁니다. 배터리가 많아지니 손님도 늘어나겠지요.”
배터리 재생업체는 서울 용산의 4~5개를 비롯, 전국적으로 10여개 업체가 성업 중이다. 안씨를 거쳐간 직원들이 독립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외길인생의 변(辯)이 흥미롭다. “배터리는 ‘리필(refill)’할 수 있지만 인생(人生)은 리필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