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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 친환경 귀농희망자를 위한 괴산군귀농설명회 자료집> 에 실린 글입니다 ***
지역사회와 더불어 하는 유기농업
- 충북 괴산군 청천면 솔뫼농장 -
안 혜령(청천면)
심란한 여름이었다. 번갈아 드는 가뭄과 폭우로 나라 안 곳곳이 쑥대밭이 되었고, 쩍쩍 갈라지고 물에 잠겨버린 논밭이 부지기수였다. 사람 또한 자연 앞에 한낱 미물임을 절감하게 하던 자연의 위력이 결코 수그러들 것 같지 않더니, 그러나, 입추를 코앞에 두고는 한풀 꺾였으니, 눈 시리도록 청명한 하늘이 까마득하게 높다. 괴산 지역은 예사롭지 않던 그 기세에서 조금은 비켜났던 듯싶다. 그 모진 가뭄에도 수맥을 찾고 양수기로 물을 퍼올리는 고된 수고를 들이지 않고 별 탈 없이 모내기하는 걸 보았기에 말이다. 그게 바로 엊그제 같건만, 그새 허리 아래께로 자란 볏잎들이 청청한 논에서 언뜻 이삭 패인 것이 보인다.
괴산군 쪽에 앉은 속리산의 품안에서 경치가 빼어나다는 화양구곡과 선유동 계곡, 쌍곡 계곡 등을 곁눈으로 보며 경상북도 상주 쪽으로 가다 보면 정확히 두 도의 경계 지점에 솔뫼농장이 있다. '건강한 먹을거리로 세상을 열어가는 유기농산물 나눔터'. 입구에 세워진 깔끔한 간판에 적혀 있듯, 흙살림 연구소, 충북농촌개발회, 자연농업학교와 더불어 괴산 지역의 유기 농업을 대표하고 있는 곳이다.
솔뫼골에서 이루어진 '유기농산물 나눔터'
솔뫼농장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94년으로, 솔뫼골 또는 솔멩이골이라 불리던 충북 괴산군 청천면 이평리와 경북 상주군 화북면 입석리 일대의 유기농사꾼 다섯 명이 어우러져 만든 친목 모임이 그 효시였다. 그 전에 이 지역에서 서울의 소비자들과 직거래 운동을 하는 소비자협동조합 운동이 크게 일어난 바 있었다. 솔뫼골 일대의 젊은 농사꾼들이 거의 다 참여할 만큼 야심차게 시작한 이 운동은 그러나 오래 못 가 깨져 버리는데, 이들 중 협동조합에 대한 아쉬움이 남은 몇 사람이 다시 모였다. 솔뫼골 토박이인 정천복씨나 김철규씨, 가톨릭 농민회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김의열씨, 모두 농약을 치지 않는 이른바 환경농업을 실천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특히 지금 솔뫼농장 회장을 맡고 있는 김철규씨는 농약 중독으로 큰 위험을 겪은 뒤 무농약 농사로 전환한 터였다. 이듬해 2월, 이들과 귀농자들이 포함된 일곱 명이 모여 '유기농업 영농조합법인'인 솔뫼농장을 정식으로 탄생시켰다. 영농조합인 만큼 '조합원의 소득 증대'라는 일차적인 목표와 함께 '생명농업 실천을 통한 땅 살리기', '서로 돕고 위하는 공동체적 삶'이 그들이 지향해 나갈 바였다.
그 뒤 몇 해 동안 사람들의 들고남을 거쳐 현재 솔뫼농장의 정식 회원은 8가구 13명이다. 거의가 삼사십 대 젊은 층인 회원들은 귀농자와 토박이가 반반인데, 이것은 이 지역 전체에 공통된 현상으로, 그 덕에 외지인에 대한 텃세가 적은 편이다. 그런 영향도 있어서인지 전체적인 농장의 분위기는, 김관식 농장 총무의 말을 빌자면 "널럴하다." 그렇듯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분위기는 또한 '개별 영농, 공동 판매'라는 농장의 운영 방식과도 관계가 있어 보인다. 초기에는 회원들이 출자하여 구입한 농장 공동의 장인 시범재배단지 안에 농장 소유의 논을 마련하여 함께 농사를 짓기도 하였으나,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현재는 모두 각자 제 농사만 짓고 있다.
그 농사 규모가 오리농법과 우렁이농법으로 짓는 논 1만8천여 평과 밭 1만6천여 평에 이른다. 유정란과 여러 채소류를 내는데 아무래도 밭농사로는 고추가 주를 이룬다. 속리산의 한 줄기인 대야산을 마주한 주위 경관이 수려하며 국립공원 지역이라는 특성으로 환경오염이 덜한 덕에 생태 농업을 실천하기에는 조건이 좋다 하겠으나, 일조량이 짧고 서리가 내리는 기간이 길어 작물 선택이 그다지 자유로운 편이 아니며, 높은 생산량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시설로는 비가림 하우스를 세워 완숙토마토를 많이 생산한다.
각자 생산한 쌀과 채소류를 '솔뫼농장'의 이름을 달고 공동 판매하는데, 주 거래처는 청주 한살림과 예수회 쪽의 성당들이다. 농장의 공동 논을 처분하고 남은 시범재배단지는 모두 1,200평 정도로, 공동 퇴비장과 사무실, '소비자의 집'이라 불리는 가건물, 농산물 집하장 등이 들어서 있다. 사무실은 농장 사무실이자 가톨릭농민회 청천 지역 분회 사무실, 그리고 '속리산 자락을 지키는 사람들'의 사무실로 함께 쓰이고 있다.
정체성의 혼란을 거쳐
한국불교환경교육원에서 펴낸 {공동체를 찾아서}에서는 공동체를 '집단적으로 인간성 개발과 생태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공동체성을 추구하는 곳'이라 포괄적으로 정의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다양한 형태로 활발하게 전개된 우리 나라의 공동체 운동은, 개중에는 오랜 역사와 튼실한 결속이 돋보이는 곳도 있으나, 많은 곳에서 공동체 자체의 정체성 확립과 구성원 확보 등의 문제로 혼란을 겪어왔다. 애초부터 공동체를 표방하지는 않았으나, '생명 농업'과 '공동체적 삶'이라는 그 지향점에서 포괄적 의미의 공동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솔뫼농장 또한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적지 않은 갈등과 시련을 겪었다.
1999년에 열린 한살림 생산자 연수회에서 솔뫼농장은 그동안의 문제점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즉, "내부적으로는 회원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충분하지 않았으며, 농장 구성원들 사이에 공동의 이익보다는 자신을 앞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조차도" 아마도 제 이익 챙기느라 "별 스스럼없이 무시해 버리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심각한 것은 유기농사를 짓는다는 애초의 취지와는 달리 "생명을 살리는 유기농업을 한다는 말조차 꺼내기 어려울 정도로 부끄러운 경우도 많았"으니, 건너뛰기 농법이라고 무농약 농사를 한 해씩 걸러 한다든지, 내다 팔 작물에만 농약을 치지 않는 일들이 다반사였다. 유기농업이 요새만큼도 알려져 있지 않을 때여서 주위의 비웃음과 편견이 심했다. 그럼에도 의욕적으로 뛰어들어 농사 원칙이며 체계를 잡으려 노력했지만 유기농사에 대한 영농 기술이며 방법도 익숙지 않았다. 실패도 많았고, 그러자 모이면 술 마시고 울분을 토로하는 데 시간을 보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건달 농사꾼"이란 소리를 들을 만했다.
대외적으로는 "소비자나 유통단체와의 약속을 조그마한 이익 때문에 파기하는, 말도 안 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더불어 나누려는 마음이 아니라 우리의 편익만을 지키려고 하는 잘못된 이기심"이 마음속에 있었다고 고백했다. "늘 생산자의 입장만을 생각하고, 생산자는 언제나 정당한 것처럼 교만한 마음으로 소비자와 유통단체에 희생과 책임을 전가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솔뫼농장이 스스로 진단한 문제들의 근본은 정체성의 혼란이었다. 솔뫼농장이라는 이름을 걸고 할 일이 무엇인가. 유기농산물 생산과 판매로 족할 것인가. '공동체적 삶'이란 무엇인가. 자연을 살리고 땅을 살리며 사람도 살리는 유기농사라면 '나'를 앞세우는 상투적인 삶의 자세를 벗어버려야 할 터이나, 그것은 이론일 뿐, 삼사십 년 동안 젖어든 상투적인 세상살이의 법칙에서 솔뫼농장 사람들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듯하다. 원칙이 흔들리다 보니 때로는 참으로 하찮은 문제조차 내부 갈등의 요인으로 불거지기도 하였으니, 예컨대 행정구역으로 따져 경상도 사람이냐 충청도 사람이냐, 귀농자냐 토박이냐 하는 편가름이 생기기도 했다.
거듭나다
1999년은 솔뫼농장이 거듭나는 해였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듯, 갈등과 혼란의 시기를 겪으며 농장은 더욱 탄탄한 모습으로 새로 태어나게 되었다. 회원들은 "부끄러운" 모습이었던 지난 몇 해를 "자기 단련의 시간들로 받아들이고" 마음가짐을 새로 하여 "생명농업의 철저한 실천, 이웃과 공동체를 위하는 삶,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사는 세상 건설"이라는 지향점을 분명히 하였다. 결의를 새롭게 다지기 위하여 회장단을 새로 구성하고 다달이 한 번씩 월례회의를 열어 모든 현안을 함께 의논하고 해결하기로 했다. 엄격한 품질 기준과 생산 원칙을 새롭게 정했으며,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품질관리위원회를 두어 더욱 확실하게 생산물의 투명성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뒤로 솔뫼농장 회원들의 생산물은 이 품질 기준에 맞추어 생산된다. 모든 농산물은 농장 이름으로 판매되며, 회원들은 제 작물이라 하여 사사로이 내다 팔 수 없다. 또 제 마음대로 가격을 정하지 못한다. 개개인의 과욕을 막고 농장의 이익을 우선하도록 하기 위한 조처이다. 그때까지 내부적으로 묵인되던 양다리 농법, 관행농법과 생명농법을 병행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버리며, 최소한의 저농약 농업만을 인정해주되 그 생산물은 농장 이름으로 판매하지 않는다. 이 생산물 판매 대금에서 일괄적으로 5퍼센트씩을 떼어내 농장의 운영 자금으로 쓴다.
회원들 사이의 사적인 분위기야 "널럴하다"지만, 교육만큼은 철저히 이루어진다. 특히 자신들의 유기농업 수준이 아직 "초보"라고 여기기에 더욱 그렇다. 모든 회원은 의무적으로 1년에 두 번 이상 유기농업에 관한 교육을 받아야 하며 농장 자체 교육을 한 차례 받음으로써 "바른 마음으로 올바른 농사를 짓는 참된 농사꾼의 자세"를 갖추도록 하고 있다. 누구든 들어올 수 있던 회원 자격도 강화하여 거주지는 '솔뫼골 안'이 되어야 하며, 모든 농사를 적어도 2년 동안 유기농법으로 지어야 한다.
1999년의 매우 진솔한 자기 반성에서 느낄 수 있듯 '함께 사는 삶'이란 그토록 어려운 일인즉, 솔뫼농장이 초기 몇 해 동안의 혼란을 벗어나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되기까지에는 그 갈등 속에서도 꿋꿋이 초심을 잃지 않으려 애쓴 회원들의 힘이 클 터이다. 여기에 한 힘을 보탠 사람이 예수회 소속의 정 일우 신부라 할 수 있다.
미국 사람으로 서강대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며 20여 년 동안 빈민 사목의 길을 걸었던 그는 1994년 말께 우연찮게 이곳을 방문한 뒤로 농장 식구들의 "뜻도 좋고 자연도 좋고" 하며 아예 농장 식구로 눌러앉았다. 외국인에 전직 교수이며 신부인 그의 존재가 농장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예컨대 시범재배단지 안에 가건물일 망정 '소비자의 집'을 세운 것이라든지, 예수회 소속의 성당들을 판매처로 확보할 수 있었던 일들은 정 일우 신부가 직접 발 벗고 나서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들의 지원이 큰 도움이 되었음이 사실이다.
상식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정 일우 신부는 능히 솔뫼농장의 지도자가 될 만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농사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러나 정 일우 신부는 결코 자신을 지도자로 여겨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솔뫼농장의 한 회원일 뿐이며, 규모는 작다 하나 논과 밭을 일구는 평범한 농부로서 만족한다. 제가 나서서 특별한 일을 하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제 힘 닿는 한 늘 다른 회원들 "뒤를 봐주는 것"으로 만족하는 그는, 그러나 솔뫼농장 다른 식구들에게는 "큰어른"이자 "거울"로서 소중한 사람이다. 자연의 모든 존재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감사하며, 날마다 흙을 만지며 생명을 가꾸는 농부의 영성을 믿는 그의 겸허함이 회원들 각자의 일상생활과 농장 운영에서 본이 되는 것이다. 고추 값 하나를 결정할 때도 "이 가격이 그저 내 욕심 차리자는 게 아닐까", "농장이 경제적인 문제, 돈에 치중하게 되는 게 아닐까" 되돌아보고 또 따져 보는 것은 눈으로 드러나지는 않으나 회원들 마음속에 깊이 자리한 그 거울의 빛 때문일 터이다.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서
1999년에 솔뫼 농장은 청주 와이엠씨에이와 한살림 회원들, 지역민들을 초대해 추수감사절 행사를 지냈다. 그 전에도 종종 '끝물고추 따기 행사'라는 것을 열어 소비자들과 함께 하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던 터였으나, 그 해의 행사는 좀더 뜻 깊었다. 농장이 새롭게 태어나는 때가 아니던가. 지향점을 분명히 세워 내부적으로 흔들리던 정체성을 확고히 하면서 이들이 세운 큰 결심의 하나가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삶'이다. 공동체적인 삶이란 농장 식구들끼리 유기농사 짓는 것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으니, 지역사회 안에서 지역을 위해 일하는 삶이야말로 농장이 가야 할 바른 길, 제대로 된 삶이라 굳게 다짐하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소비자의 집'을 지역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으로 개방한 일이다. 이른바 농활이란 것이 농부들로 하여금 의존적인 태도를 부추긴다는 생각으로 썩 반기지는 않는데, 그럼에도 "여기가 좋다"며 꾸준히 이 농장으로 농활을 오던 대학생들이 방학이면 이 집에서 지역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열고 있다. 아이들만 드나들겠는가. 제 자식 데려다주고 데려오려고 그 부모들도 기웃거리며, 그러다 보면 농장 식구들과 좀더 스스럼없이 지낼 수 있을 터다. 공부방이 열리는 동안 대학생 선생님들의 숙소이자 식당이 되기도 하는 이 집의 부엌에는 회원들이 슬그머니 들여놓은 쌀이며 채소류가 늘 떨어지지 않고 준비되어 있다. 밥값이니 잠자리 비용 같은 것을 굳이 받을 생각이 없으니, "돈 줘도 그만, 안 줘도 그만", 그저 "누구든지 와서 활용"하기를 바란다.
또, 회원이 아니더라도 이 지역으로 귀농한 사람들이나 농약을 치지 않고 농사를 짓겠다는 의지가 있는 주민들에게는 유기농의 의미와 농사 방법과 기술을 아는 대로 성심껏 일러주며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 애쓴다. 최근에 이르러는 유기농에 대한 인식도 높아졌으며, 출하 조건도 예전보다 한결 나아져 특히 쌀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이 높고 농장에서도 주민들에게 권하고 있다. 그 중에 '협력생산자'로 부르는 집이 네 집 있는데, 농장에서는 농t일뿐만 아니라 그들이 생산해 내는 농산물들에 보증을 섬으로써 판매를 돕는다. 안타까운 것은 관광지에 인접한 지역이라 땅값이 비싸다는 점이다. 귀농자들이 가장 애먹는 부분이 땅을 장만하는 일일 터인즉, 이곳으로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생기면 회원들이 함께 방법을 찾느라 머리를 싸맨다.
앞으로 할 일이 많다. 우선 당장 올 겨울에는 지난겨울에도 그랬듯 2박 3일 정도 일정으로 회원 교육 시간을 가질 것이다. 회원 모두가 '소비자의 집'에 모여 함께 밥 끓여 먹고 잠자면서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다. 유기농업의 선구자나 유통업 종사자를 모셔오기도 하고, 유전자 조작 식품에 관한 강의를 듣고 토론의 시간도 마련한다. 가건물인 '소비자의 집'을 흙집으로 증개축하는 일도 농장의 큰일로 남았고, 굳이 알릴만한 내용이 없어 널리 농장 이름을 소개한 일도 없건만 자꾸 찾아드는 손님들을 추스리는 것도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백두대간 장엄한 산줄기의 하나인 속리산을 자연 상태로 보존하기 위해 속리산을 지키는 일에도 한 힘을 보탤 것이며, 특히 올해 "풀 많이 못 잡아" 고생했던 기억을 되살려 유기농법도 치열하게 공부해야 할 것이다.
솔뫼농장이 궁극적으로 그리는 농장의 모습은 "단순한 생산물 판매 창구"가 아니라 "이웃과 소비자, 모든 이들이 서로 돕고 나누는 공동체적 삶의 현장"이다. 새롭게 시작한 지 2년, 농사에 대한 바른 생각을 키우고, 이웃과 지역사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넓히며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우리 솔뫼농장이 새롭게 자리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니, 계속 그 상생의 정신을 다져나간다면 머잖아 속리산 자락 아래에서 단순 소박하고 평화로운 "마을 공동체" 하나를 보게 될 것 같다. ♣
* <귀농통문> 2001년 가을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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