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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창세기 13장 9절, 마태복음 25장 40절, 누가복음 10장 37절 야고보서 2장 15~17절
네가 보는 앞에 땅이 얼마든지 있으니, 따로 떨어져 살자.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창세기 13장 9절, 새번역>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40절, 새번역>
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누가복음 10장 37절, 새번역>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5~17절, 새번역>
부르심에 순종하여 떠난 길고 긴 여행 끝에 드디어 아브람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의 땅에 도착했습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의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 아브람은 거기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쳤다. <창세기 12장 7절, 새번역>
그런데 거기서 제단을 쌓아서 바친 아브람의 다음 행보가 너무도 이상합니다. 그 땅에서 정착하지 않고 거기에서 떠난 것입니다. 베델의 동쪽에 있는 산간지방으로 옮겨 간 후 장막을 쳤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제단을 쌓고, 주님께 바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도 정착하지 않습니다. 또 길을 떠납니다. 줄곧 남쪽으로 가더니 네겝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네겝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너무도 심한 기근 때문에 아브람은 이집트에서 얼마 동안 몸붙여서 살기위해 내려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땅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더 움직이라고 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계속해서 머물지 못하고, 자신의 방법대로 움직여 다닙니다. 그래서 그 결과 이집트까지 내려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도착한 이집트 초입, 아브람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고자 아내인 사래를 누이라고 속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래가 너무도 아름다웠기에 남편이라고 했다가는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아직 분명한 믿음이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자신을 '복의 근원'이 되도록 반드시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인도해 주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대로 사래를 누이라고 말하자 이집트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잠시나마 아브람의 방법과 생각이 통하는 듯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곧 아브람의 거짓말을 만방에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안에 무서운 재앙을 내리셨으므로,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꾸짖었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이렇게 대하느냐? 저 여인이 너의 아내라고, 왜 일찍 말하지 않았느냐? 어찌하여 너는 저 여인이 네 누이라고 해서 나를 속이고, 내가 저 여인을 아내로 데려오게 하였느냐? 자, 네 아내가 여기 있다. 데리고 나가거라." 그런 다음에 바로는 그의 신하들에게 명하여, 아브람이 모든 재산을 거두어서 그 아내와 함께 나라 밖으로 나가게 하였다. <창세기 12장 17~20절, 새번역>
바로에게 사래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에게도 '사래'에 대해서 분명하게 일깨워주시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사래보다 자신의 목숨을 선택했습니다. 자신이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서 필요한 존재가 '사래'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듯 합니다. 임신을 하지 못하는 사래에 대한 아브람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사래는 남편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신을 누이라고 말하고, 자신을 바로에게 들여보내는 것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정말 '남'편이 확실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다른 여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사래를 통하여 '약속의 자녀'를 허락하실 계획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아내 사래를 이제 사래라고 하지 말고, 사라라고 하여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겠다. 내가 너의 아내에게 복을 주어서,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들이 그에게서 나오게 하겠다." <창세기 17장 15~16절, 새번역>
아브람은 자신의 목숨을 택하느라 앞으로 약속의 자녀를 태어나게 할 '사래'를 버리게 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말씀하신 땅에 머물러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 스스로를 탓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 아브람은 오히려 아내를 버리는 것으로 자신의 방법을 의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래'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에게도, 아브람에게도 모두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바로가 모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거짓말을 한 댓가가 죽음인 줄 알았던 아브람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아내 사래를 데리고 나가라는 말은 너무도 이상한 말이었습니다. 바로를 속였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서, 그것도 하사 받은 모든 재산을 가지고 나가게 해 준다니, 이런 일들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렇게 아브람은 아내 사래를 자신의 누이라고 속이는 바람에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네겝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브람은 집짐승과 은과 금이 많은 큰 부자가 되었다. <창세기 13장 2절, 새번역>
하지만 좀처럼 정착하지 못하는 아브람은 다시 네겝을 떠나 예전에 장막을 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던 베델 부근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려는 듯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예배를 드리는 아브람에 대해서는 일체 반응하지 않고 갑자기 이야기를 전환시킵니다. 이런 상황은 언제나 우리를 긴장하게 만듭니다. 분명히 무엇인가 잘 못 되어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아브람과 함께 다니는 롯에게도, 양 떼와 소 떼와 장막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그 땅은 그들이 함께 머물기에는 좁았다. 그들은 재산이 너무 많아서, 그 땅에서 함께 머물 수가 없었다. 아브람의 집짐승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집짐승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곤 하였다. 그 때에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도 살고 있었다. <창세기 13장 5~7절, 새번역>
아브람만이 아니라 롯도 꽤 부자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재산이 너무 많아서 그 땅에서 함께 머물 수가 없게 될 정도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좁은 땅에서 서로의 집짐승을 먹이기 위해 목자들의 다툼이 빈번히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브람은 별로 슬기롭지 못한 선택을 진행합니다. 오늘의 포인트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슬기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서 아브람은 자신의 재산이 아니라 '롯'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사람'을 선택해야 합니다. 온갖 어려움을 같이 겪으며 보낸 세월을 지나 이제서야 제법 자리를 잡고 잘 살게 된 아브람과 롯입니다. 당연히 자신들의 목자들을 화해시키면서 사이좋게 양보하며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리는 아브람입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였다.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너의 목자들과 나의 목자들 사이에, 어떠한 다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핏줄이 아니냐! 네가 보는 앞에 땅이 얼마든지 있으니, 따로 떨어져 살자.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창세기 13장 8~9절, 새번역>
한 핏줄이라고 하면서 '헤어짐'을 선택합니다. 한 핏줄이라면 함께 살아야 하는데 따로 떨어져 살자고 말합니다. 이유는 한 가지, 바로 '재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진 재산이 아니었습니다. 그 땅에 함께 살고 있던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면 그 땅에서 더욱 화평을 누리며 잘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말과는 다르게 따로 떨어져 살 것을 롯에게 제안합니다. 그리고 롯 역시 그 제안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 결정으로 인하여 롯이 결국 '소돔과 고모라'까지 가게 되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동거동락해온 가족을 버리고, 돈을 선택했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힘으로 노력해서 얻은 재산이 아니라, 거짓말을 한 댓가로 얻은 재물을 선택합니다. 함께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기 위해서 길을 떠났던 '롯'을 버리는 순간입니다. 목자들의 중재자가 되어야 했고, 재산을 버리거나 주변 사람들과 나누어야 했는데, 오히려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따로 떨어져 살게 된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해도 너무 크게 오해한 것 같습니다.
우리 역시 '복'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생각합니다. '만사형통'이라는 복을 누구인들 누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부자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사람',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관계를 깨면서까지 허락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사람'과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복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슬기로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어떠한 순간에도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우선입니다. 여느 사람과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이 '재물'이라는 녀석은 결국 '하나님'마저도 버리게 만드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재물 앞에서 사람을 버리는 것은 오늘 아브람의 결정처럼 너무도 쉬운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장 24절, 개역개정>
아브람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과 전적인 신뢰가 있었다면 크게 불어난 재산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 힘으로 얻지도 않은 재물에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카 '롯'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래야 했습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아브람과 롯은 등을 돌리고 헤어지게 됩니다. 다행히 아브람은 곧 이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창세기 14장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참 다행입니다.
현 시대는 '물질 만능 주의'가 판치고 있는 세상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슬기로운 신앙 생활이 더욱 필요합니다. 빛과 소금이 될 찬스입니다. 말씀에 기초하여 순간순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물질'을 택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택하셔야 합니다. '물질 만능 주의'가 아니라 '사랑 중심 주의'로 그리스도인들이 방향을 바꾸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물질이 최고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라고 말하는 세상 속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베푸는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몸소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40절, 새번역>
우리는 예수님이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담겨 있다고 말씀하신 두 계명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첫번째입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다. 재물을 선택하고서는 이 계명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선택한 사람만이 이 계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지켜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5~17절, 새번역>
진짜 믿음이 있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 이웃을, 즉 '사람'을 사랑함으로서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주변에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이 믿음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재물에게 아무리 사랑을 베풀어도 그건 그저 썩어 없어질 재물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부요한 사람은 주신 재물을 통하여 사람을, 이웃을 사랑하는데 반드시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진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 <누가복음 12장 20~21절, 새번역>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여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자를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장 27절, 새번역>
오늘도 '어떻게 하면 슬기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모든 존경하고 축복하는 동역자 여러분들과 이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방법과 물결과 다르게 오히려 '사람'을 선택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재물이 필요하고, 아무리 재물이 중요하고, 아무리 재물이 좋아도, 사람이 더욱 필요하고, 사람이 더욱 중요하고, 사람이 더 좋다는 것을 증명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이 사실을 이미 보여 주셨습니다. '나'라는 정말 죄 많고, 부족하고 쓸모 없는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과 결정은 당연히 '사람'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를 나누면서 짧은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누가복음 10장 30~37절, 새번역>
https://www.youtube.com/watch?v=LeFoUir7HwI
https://www.youtube.com/watch?v=CEZcJSOIQWg
https://www.youtube.com/watch?v=2Y113tgPkmw
https://www.youtube.com/watch?v=L0Xhauzgh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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