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장소 |
운동상황 |
3월 1일 |
수원면 화홍문 방화수류정 부근 |
김세환․김노적 등의 지식인과 젊은 학생들의 주도로 수백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였다. 서울의 3․1운동과 더불어 최초로 시작된 만세운동이었다. |
16일 |
수원면 |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이 벌어졌으며, 팔달산 서장대와 동문 안 연무대에 수백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면서 시가지 종로를 통과하던 중 시위군중들은 일본 경찰과 소방대, 헌병대와 충돌, 주동자가 체포되자 석방을 요구하며 철시투쟁을 벌여 체포되었던 사람들이 풀려남. |
21일 |
동탄면 오산리 |
오산리 천도교인 박두병․김재천․김진성 등이 인근 마을과 기독교인들과 연락하고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며 평화적으로 만세를 불렀다. |
23일 |
수원면 수원역 부근 서호 |
수원역과 서호부근은 일본인과 지주들이 많이 살던 곳으로 소작농 등이 중심이 되어 7백여명이 만세운동을 일으킴 |
25일 |
수원면 |
장날을 이용하여 청년학생들의 주도로 학생과 노동자 시위 |
성호면 |
오산에서 보통학교 졸업생들과 천도교도들이 금융조합과 일본인, 중국인 가옥을 파괴하며 만세를 부름. | |
26일 |
송산면 사강리 |
오후 5시경 송산면사무소 부근에서 주민 1백여명이 태극기를 게양하고 만세를 부름. |
28일 |
송산면 사강리 |
오후 2시경 송산면사무소 뒷산 및 부근에서 1천여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를 부르고 순사 1명을 처단함. |
29일 |
수원면 |
김향화의 주도아래 기생 30여명이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던 중 자혜의원 앞에서 만세운동을 벌였고, 야간에는 상인과 노동자 등이 합세하여 곳곳에서 만세를 부르면서 일본인 상점에 투석하여 창유리를 파괴하였다. |
성호면 오산리 |
오산장터에서 8백여명이 만세를 부르며 우편소, 주재소, 면사무소 등을 파괴함. | |
양감면 |
수백명이 평택군 청북면 율북리 주민들과 협력하여 산상에 횃불을 놓고 만세를 부른 후 각각 해산 | |
태장면 |
등불과 태극기를 휘두르며 산상 횃불 시위를 전개함. | |
30일 |
안룡면 |
군중 수백명이 북을 치며 등불을 들고 만세를 불렀고, 산상 횃불 시위를 전개함. |
31일 |
향남면 발안리 |
1천여명의 천도교인․기독교인과 농민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를 부르면서 일본인 가옥과 일본인 소학교를 파괴함. |
의왕면 고천리 |
고천리에서 800명의 천도교도․기독교도․농민 등이 면사무소와 고천경찰관주재소 앞에서 만세운동을 펼침. | |
4월 1일 |
반월면 반월장 |
6백여명의 천도교인․기독교인․농민이 평화적으로 만세운동을 벌임. |
3일 |
우정면 장안면 |
주민들과 천도교도, 기독교도가 주동이 되어 장안면사무소, 우정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약 2천 5백명의 군중이 참여함. 시위 군중들은 우정․장안면사무소를 파괴하고, 화수경찰관주재소를 불태워 버렸고, 그 곳에 근무하고 있던 순사를 처단함. |
5일 |
향남면 발안리 |
4월 5일 발안 장날 약 8백여 군중이 다시모여 만세운동을 벌이고 주재소를 파괴함. |
6일 |
비봉면 |
천도교인들과 기독교인 다수가 합세하여 만세를 부름. |
7일 |
마도면 |
천도교인과 기독교인들이 연합하여 만세운동을 벌임 |
15일 |
향남면 발안리 |
발안장을 이용하여 4백여명이 만세운동을 펼침. |
제암리 |
우정․장안면의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지고 순사들이 처단 당하자 일제는 무자비한 보복을 감행하여 제암리 교회에 무고한 주민 30여명을 가둬놓고 불을 질러 많은 희생자들을 낸 야만적 학살사건이 발생함. |
꽃다운 나이에 순국한 열사, 이선경
"석방되도 다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소!"
소녀의 관심은 언제나 조국독립
1904년 4월 30일 경기도 수원면 산루리(현 수원시 팔달구 중동)에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그 여자아이의 이름은 이선경. 그녀는 스무살도 채 살지 못하고 이 땅을 떠나야했다. 이 땅의 독립을 위해 그녀는 자신의 여린 몸을 바친 것이다.
이선경은 집안이 수원에서 큰 부잣집이었던 덕에 일찍부 수원 산루리에서 서울까지 통학을 하였다. 삼일여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한 이선경은 1917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에 입학하였다. 10대 소녀는 또래 친구들과 나라의 장래를 이야기하고 독립을 이야기하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선경은 당시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2학년이었던 임순남과 최문순과 더불어 수원에 거주하면서 서울로 통학하면서 선배들과 조국의 독립에 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선경은 이들과 함께 항일운동의 요람이었던 수원교회의 교사로 활동하였고 더불어 비밀리에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3ㆍ1운동이 발발하자 당시 수원 청년운동의 주요한 인물이었던 김노적, 박선태 등과 같은 산루리 출신이었던 이선경은 김세환 밑에서 각지의 연락임무를 담당하였다, 그녀는 치마 속에 혹은 앞가슴에 비밀문서를 넣어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대전, 청주, 안성 등지로 수십 차례에 걸쳐 비밀지령을 전달하였다. 김세환과 김노적 아래에서 만세운동의 행동대로 활약했던 이선경은 박선태와 더불어 독립운동 활동을 주도적으로 담당했다.
3ㆍ1운동 이후 이선경은 임순남, 최문순과 함께 박선태, 이득수를 1920년 6월 7일 수원면 서호(西湖) 부근에서 만나 혈복단(血復團)을 구국민단(救國民團)으로 개칭하는 논의에 참여하였다. 이후 6월 20일 구국민단의 조직을 개편하게 되었는데, 이에 단장 박선태, 부단장 이득수, 서무부장 임순남, 재무부장 최문순, 교제부장 차인재, 이선경은 구제부장을 맡았다.
구국민단을 결성, 독립운동 전개
당시 구국민단은 2대 목표를 설정하여 추진해나갔다.
1. 한일합방에 반대하여 조선을 일본 제국 통치하에서 이탈케하여 독립국가를 조직할 것
2. 독립운동을 하다가 수감되어 있는 사람의 유족을 구조할 것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1920년 7월까지 1주일에 한번씩 금요일마다 수원 읍내에 있는 삼일학교(현 매향여고)에서 회합하여 독립신문의 배포 등을 논의하고, 동시에 상해로 가 임시정부의 간호부가 되어 독립운동을 도울 것을 맹세하였다. 이에 이선경을 비롯한 여학생 3명은 상해 임시정부 적십자회에 들어가 간호원이 되어 후일 독립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그 힘을 다하고자 철저한 준비를 하였다.
이렇게 활발하게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활동하던 중 1920년 8월 박선태, 이득수, 임순남 등과 함께 이선경은 체포되었다.
이선경의 체포 당시 심문과정을 보면 그녀의 애국심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 수 있다.
"언제부터 조선 독립에 대한 생각을 가졌는가?"
"어른들로부터 어렸을 때부터 들었으니 태어났을 때부터요"
"그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정의의 길이라 생각하오"
"만일 석방된다면 다시 이 운동을 벌일 생각인가?"
"그렇소. 석방되도 다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소"
1921년 4월 박선태와 이득수는 징역 2년을 언도 받았고, 이선경을 비롯한 여학생은 징역 1년, 집행유예3년을 선도 받았다. 이에 구류 8개월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선경은 일제경찰의 혹독한 고문으로 석방되어 집으로 옮겨지자마자 19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수원천변 수원기생 이야기
봉수당 진찬연의 꽃, 기생 계섬
요즘 대중적 관심을 끌고 있는 것 중 하나가 기생(妓生)이다. 기생은 역사 속에서 천민이었지만 우리에겐 가까운 대중적 역사이기도 하며, 해방 이후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옛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기생하면 천한 여성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릴지 모른다.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다른 사람을 위해 웃음을 흘리는 여성을 그리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 속에서 아름다움과 지성을 겸비한 황진이, 의기가 충만했던 논개 등을 먼저 떠 올리기도 한다. 기생은 다른 말로 ‘해어화(解語花)’라고도 부른다. 해어화란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으로 본래 미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를 데리고 연꽃을 구경하다가 양귀비를 가리키며 주위에 있는 신하들에게 “연꽃이 어찌 나의 해어화만 하겠느냐?”고 하여 생긴 말이었다.
최근 기생이라는 주제로 ‘100년전 엽서 속의 기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전시회가 열리고 사진집 등이 만들어 지면서 대중적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또한 역사드라마로 제주도민의 영웅인 만덕(萬德)이라는 기생의 이야기가 방영되기 시작했다. 만덕은 기생의 신분으로 거상(巨商)이 된 뒤 평생 모은 재산을 제주도민을 위한 빈민구휼에 써 이름을 떨친 유명한 인물이었다. 정조대 화성(華城) 축성의 대역사를 총 지휘했던 번암 채제공이 만덕의 전기를 손수 지어 「만덕전(萬德傳)」이라는 글을 남겨 문집인 『번암집(樊巖集)』에 실려 있다. 채제공은 만덕의 일화 외에도 수원 화성 축성 당시 기생과 관련한 시문을 남겼는데, 화성행궁의 봉수당 진찬연 등에서 펼쳐진 기생들의 모습을 꽃과 같이 아름답다고 기록하고 있다. 번암이 남긴 시문을 보면,
봉수당에서 진찬의를 익히다.
풍악이 울려 퍼지는데 기생은 꽃같이 아름다워
채색주렴이 봉수당에 높이 걸려있네
땅의 신령함이 성대에 보효하고
하늘의 상서를 내려 우리 왕을 기쁘게 하네
남산 북두 같은 끝없는 복록 누리소서
금척 요도의 상서 다함이 없으리
오래오래 이것을 잡수시고
덕을 기리는 속에 봄빛을 누리소서
화성 축성 당시 제일 큰 행사였던 화성행궁의 정궁인 봉수당에서 진찬을 연습하는데 기생이 춤을 추는 모습을 꽃과 같이 아름답다고 감탄하고 있다. 이렇듯 전통 사회의 풍류와 예악에서는 기생이 꽃과 같이 아름다워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제 그 봉수당 진찬연을 빛냈던 천민이지만 너무나 아름다웠던 화성부의 기생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앞서 얘기한 만덕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조선후기 영․정조대 노래 기생으로 이름을 날렸던 계섬(桂蟾)이라는 여인이 있다. 계섬은 1795년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진찬연이 열렸을때 화성부 소속의 기생으로 당시 나이 60세였다. 그녀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에 동원된 기생들을 총 지휘하며 잔치의 시작을 알리는 노래를 제일 먼저 부른 여인이었다.
계섬은 아전 집안 출신으로 7세때 부친을 여의고 뒤이어 12세때 모친을 잃고 고아가 되어 노비가 되었다. 이후 16세때부터 창(唱)을 배워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양반 사대가들의 잔치판에 불려나가며 명성을 얻기 시작한 그녀는 시랑 원의손의 노비가 되었다가 이정보(李鼎輔, 1693~1766) 수하에 들어가 그 문하의 추월(秋月), 매월(梅月)과 함께 당대 최고의 소리꾼이 되었다. 이정보는 영조때 대제학과 예조판서를 지낸 인물로 서울 종묘 동쪽에 있는 황교 다리 부근에 살았다. 그는 경화세족(京華世族) 출신으로 음악에 뛰어난 실력이 있어 스스로 곡을 만들기도 하였는데 현재 80수 정도가 전하고 있다. 그는 고관을 지내는 중에도 가객과 가기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후원자였다.
이정보의 든든한 후원 아래 계섬은 나날이 실력이 늘어 온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고, 계섬에게 노래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도 많아졌으며, 선비들도 노래와 시로써 계섬을 칭찬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계섬은 40이 넘은 나이에 평양감사 회갑연에 참석하여 대동강 선상(船上)에서 빼어난 노래 솜씨를 널리 알리기도 했다.
계섬은 홍국영(洪國榮, 1748~1781)의 노비로도 있었는데, 홍국영이 권력을 지나치게 휘두르자 정조가 물러가게 하며 노비를 하사했는데 계섬도 그중에 끼어 있었다. 홍국영이 부르자 할 수 없이 산중에서 나온 계섬은 고관들의 잔치에 나가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계섬은 홍국영과 더불어 잔치를 벌인 이들을 재주도 사랑할 줄 모르는 아첨꾼들로 홍국영의 일은 가소로운 일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이후 홍국영이 완전히 실각하자 계섬은 기생명부에서 빠져나와 자유의 몸이 되었다.
정조대 수원은 1789년 팔달산 아래로 수원부 읍치가 이전됨에 따라 화성행궁이 지어지고, 1793년 수원부가 ‘화성유수부’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1794년부터 본격적으로 화성 축성이 시작되어 1796년 공사가 마무리 되고 새로운 도시가 탄생되었다. 이 과정에서 계섬은 그녀의 명성을 토대로 노년에 화성유수부의 소속 기생이 되어 화성 기생들을 가르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1795년 윤 2월 13일 정조 원행의 가장 중요한 행사였던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에서 다른 기생들을 이끌며 공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회갑 잔치는 진시 3각(오전 8시 45분경)부터 행궁의 정전 건물인 봉수당에서 거행되었다. 이 행사에는 혜경궁의 내외친척들이 초대되었고, 정조임금과 신하들은 차례로 혜경궁에게 술잔을 올리며 ‘천세’를 불러 축하했고, 그때마다 음악과 무용이 공연되었다. 또한 정조와 신하들은 시를 써서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축원하였다.
당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의 기록에 보면, 서울과 화성유수부에서 선발된 여령(기생)들이 도기(都妓) 2명의 지휘를 받으며 춤과 음악을 선보였다. 도기 중 한명이 당시 60세였던 화성유수부 기생 계섬이었다. 처음 헌선도의 정재(궁중무용)가 추어지기 전 계섬의 노래 가락이 울려퍼지며 공연의 시작을 알렸다. 화성부에서는 계섬에게 가르침을 받은 노래 기생 모애(35세), 분단(29세), 윤애(27세), 동월(25세), 계월(25세), 매열(22세), 경희(17세), 금례(16세), 복혜(15세) 등 9명과 춤을 추는 기생으로 명금(32세), 연애(31세), 금련(25세), 옥혜(21세), 복취(21세) 등 5명이 진찬연에 참가하여 저마다의 아리따운 목소리와 모양새를 한껏 아름답게 펼쳐보이며 잔치를 흥겹게 하였다.
기생들의 노래소리와 각종 정재 헌선도(獻仙桃), 몽금척(夢金尺), 하왕은(荷皇恩), 포구락(抛毬樂), 무고(舞鼓)가 행해지며, 마지막에 모든 기생들이 동원되어 선유락(船遊樂)이 펼쳐지면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 공연은 마무리가 되었다. 여령들은 머리에 화관(花冠)을 쓰고, 노란 단삼(單衫)에 붉은 치마를 입고, 검은 바탕에 금실로 수를 놓은 띠를 매고, 오채 한삼(五彩汗衫)을 입고 예쁜 꽃이 바람에 하늘거리듯 진찬연의 아름다움을 온 세상에 수놓았다.
이렇듯 화성의 아름다움을 더 한층 빛내었던 화성부 기생들의 스승과도 같았던 존재 계섬은 이후 경기도 파주의 시곡촌 산마을의 초야에 묻혀 살다가 1797년 여름 62세 되던 해 심로숭(沈魯崇, 1762~1837)을 만나 자신의 평생이야기를 털어놓게 되었는데 그것이 「桂蟾傳」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계섬이 지엇다고 하는 시조 한편이 전한다.
청춘은 언제 가며 백발은 언제 온고
오고 가는 길을 알았다면 막을 것을
알고도 못 막는 길이니 그를 슬퍼하노라
의로운 수원기생 김향화의 ‘대한독립만세’
기생(妓生)하면 천한 여성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다른 사람을 위해 웃음을 흘리는 여성이 그려진다. 그러나 이 기생들이 일제강점기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못하다. 자본주의적 상품화 과정 속에 희생되어간 존재이며 해방이후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져갔기 때문이다.
기생은 ‘해어화(解語花)’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으로 본래 미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전통시대의 기생들은 신분적으로는 천민이었지만 관기(官妓)로서 빼어난 미모뿐만 아니라 예술적 재능과 서사(書史)와 시가(詩歌)에 능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아름다움과 지성을 겸비한 황진이, 의기가 충만했던 논개 등의 기생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의 절정이었던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고종의 돌아가심을 누구보다도 슬퍼하며 곡을 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친 수원기생 30여명이 있다. 이 수원기생들을 이끌었던 인물이 수원기생의 꽃 ‘의기(義妓) 김향화(金香花, 金杏花)’이다.
김향화는 1896년 7월 16일 생으로 본명이 순이(順伊) 였다. 향화는 기명으로 꽃과 같이 아름다운 그녀의 명성에 걸 맞는 이름이었다. 원래 서울에서 태어나고 어느때부터인지 수원에 내려와 기생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향화는 당시 1918년 발행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이라는 홍보 책자에 수원예기조합 기생 32명과 함께 다음과 같이 소개되었다.
○ 金杏花(22세)
百計留春하되 春不留人하고 萬金惜花하되 花不惜人하야 把我綠鬟紅袖하야 一直蹉跎了兩十光陰이로다. 誰道歌曲이 能解愁오 歌曲是一生的業冤이로다.
온갖 계책으로 봄을 머무르게 하되 봄은 사람을 머무르게 하지 못하고 만금은 꽃을 애석해 하지만 꽃은 사람을 애석해 하지 않아, 나의 푸른 쪽진 머리, 주홍 소매를 쥐고서 한번 넘어지면 이십 광음이 끝나도다. 누가 가곡이 근심을 능히 풀 수 있다 말하는가. 가곡은 일생의 업원(전생에서 지은죄로 이승에서 받는 괴로움)이로다.
본디 경성 성장으로, 화류간의 꽃이 되어, 삼오 청춘 지냈구나, 가자가자 구경 가자, 수원산천 구경 가자, 수원이라 하는 곳도, 풍류기관 설립하여, 개성조합 이름 쫒네, 일로부터 김행화도, 그 곳 꽃이 되었세라, 검무, 승무, 정재춤과, 가사, 시조, 경성잡가, 서관소리, 양금치기, 막힐 것이 바이없고, 갸름한 듯 그 얼굴에, 죽은깨가 운치 있고, 탁성인 듯 그 목청은, 애원성이 구슬프며, 맵시동동 중등 키요, 성질 순화 귀엽더라.
김향화는 경성에서 나고 자라서 수원기생이 된 후 수원기생조합의 꽃이 되었다. 갸름한 얼굴에 주근깨가 있으나, 목청은 탁 트여서 애절하면서도 구슬프게 노래를 잘하며 순하고 귀여운 기생이었다. 그러나 사진을 가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왠지 모를 굳셈이 느껴진다.
수원에서는 예부터 기생들의 풍류와 예악이 울려퍼지던 곳이었다. 조선 정조대에 채제공이 화성(華城)을 축성하면서 제일가는 풍경으로 일컬어지는 방화수류정에 올라 용두암 아래 연못 용연(龍淵)에 배를 띠우고, 기생이 춤을 추며 흥을 돋았다. 또한 화성행궁의 정궁인 봉수당에서 열린 진찬연을 아름답게 빛냈던 것은 기생들의 가무와 고운 자태였다. 전통 사회의 풍류와 예악에서는 기생이 꽃과 같이 아름다워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이러한 전통적인 기생들의 삶의 변화는 조선 사회의 붕괴와 함께 직제상 1907년 관기제도가 폐지되었다. 이후 1908년 9월 일제에 의해 ‘기생 및 창기 단속령’이 제정되면서 기생들의 삶은 공창제의 확산과 함께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였다. 일제는 경시청에 의해 모든 기생들이 기생조합에 가입하여 영업 허가를 받아야만 활동할 수 있게 하였다. 이때부터 기생들은 식민지배의 통제아래에서 감독과 관리를 받으며 상업적 기생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식민지 통제 속에 수원기생조합이 만들어졌는데 1910년대 초반으로 보이며 공식명칭은 ‘수원예기조합(水原藝妓組合)’이었다. 수원예기조합은 수원면 남수리에 있었는데 지금의 화홍문 아래 수원천을 따라 있는 남향동 일대이다.
수원 기생들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강압적 식민 통치와 경제적 예속관계에 강력한 저항으로 맞섰던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김향화를 중심으로 일제의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수원 기생들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9일 일어났다.
당시 화성행궁 봉수당을 사용했던 자혜의원으로 건강검진을 갔던 김향화와 30여명의 기생들은 자혜의원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자혜의원 앞에는 수원경찰서가 있어 일본 경찰과 수비대가 총칼을 차고 근무하고 있었으나, 김향화와 수원기생들은 일제의 총칼에 굴하지 않고 만세를 부르는 기개를 보여주었다. 당시 꽃다운 나이 스물셋의 기생 김향화는 기생들의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이들을 이끌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2개월여의 감금과 고문 끝에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 검사분국으로 넘겨져 재판을 받고 징역 6개월에 처해져 옥고를 치렀다. 재판 과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방청객으로 참석하여 김향화의 의로움을 지켜보았다.
김향화와 수원기생들의 3․1운동은 관기의 후예와 전통예능의 전수자로서 보여준 민족적 항쟁이었으며, 일제의 강압적인 기생제도와 식민통제에 대한 생존의 몸부림이었다. 오늘날 기생의 존재는 옛날이야기로 묻혀버렸다. 하지만 기생도 우리 민족의 일원이었으며, 이 여성들의 재능은 대중예술이라는 장르로 계승되었고, 당시 식민지 권력에 대항하며 보여주었던 수원기생들의 민족적 의로움은 오늘의 교훈으로 이어지고 있다. 김향화는 지난해 4월 국가보훈처로부터 대통령표창을 받고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