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구름의 말
정채봉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보렴.
비가 오고 있는 곳에서는 내 얼굴이 보이지 않을 테지. 그러나 남색의 하늘이 트여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야.
파란 하늘 한족에 하얀 솜처럼 두둥실 떠 있는 흰구름, 그 흰구름이 내 모습이거든.
내가 왜 이렇게 하얀지 궁금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는 걸 나도 알아.
어떤 아이는 깊은 산 속 옹달샘물을 먹고 살아서 그렇다 하더군. 또 다른 아이는 수평선 너머 파아란 바닷물로 멱을 감고 다녀서 하얗다 하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구정물도 곧잘 먹는 걸, 흙탕물로 목욕을 하기도 하고.
거짓말 같다고? 아니야, 정말이야.
지금 당장 부엌문 곁에 있는 구정물통을 들여다 봐.처마 끝을 비집고 나와서 구정물통 속에서 머리를 감고 있는 나를 볼 수 있을 테니.
구정물통이 다로 없는 사람은 비 온 다음에 길가에 물웅덩이를 가만히 지켜보면 알게 돼. 빗물 속에 얼굴을 들이밀고 세수를 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될 테니까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해서 하얀지, 그 비밀을 알려 달라고? 그건 간단해. 아주 쉬운 일이야.
나는 푸른 하늘을 오고 가면서 땅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일들 가운데서 많은 것만 가려서 보고 있어.
꽃잎에 티묻은 발자국이 생길까봐 발을 열심히 닦고 있는 아기 나비하며, 풀잎 사이로 너무 좋아서 숨도 크게 쉬지 못하는 아기 거미하며.
그래. 이들을 보는 것만으로 내 가슴은 하얗게 부풀어. 서로 미워하기도 하겠지. 그러나 이 지구가 우주의 어느 별보다도 아름다운 것은 곳곳에 숨어있는 이런 소중한 풍경 때문이 아닐까. 모래능선의 사막에 있는 한 점 오아시스처럼.
자, 그럼 이야기를 시작할게.
꽃그늘 환한 물
정채봉
흰구름이 이야기하였습니다.
골 깊은 산 속에 작은 암자가 하나 있었지.
푸른 바다 가운데 떠 있는 한 점 바위섬처럼 숲과 산바람에 둘러 싸여 있는 이암자에는 큰 스님이 한 분 계셨는데, 나는 때대로 이 조용한 암자가 좋아서 지붕 위를 맴돌며 한참씩 쉬어가곤 하였어.
스님은 일찍 일어나셔서 부처님께 불공을 드린 다음, 혼자서 나무를 하고 밭 매고, 밥 짓는 틈틈이 책을 보시지.
어떤 날은 스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염불 소리만 바깥으로 흘러나오기도 해. 스님의 낭랑한 염불은 새 소리, 솔바람 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풍경을 흔드는데 간혹 다람쥐들이 귀를 세우고 듣는 걸 본 적도 있지.
때로 스님은 빨랫감을 가지고 개울가로 나와서 빨래를 하다말고 물끄러미 흘러가는 개울물에 눈을 준 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마냥 앉아 있기도 해. 그러다 일어나실 때 보면 스님의 눈빛은 물빛보다도 더욱 맑아 있곤 하는데, 아마도 스님께 선 쉬지않고 흘러가는 물에서 어떤 새로운 것을 깨닫지 않았나, 나는 그렇게 짐작하지.
하루는 장난끼가 심한 새들이 날아와서 스님이 잘 닦아 놓은 마루위에 발자국들을 옹기종기 어질러 놓고 날아가더군.
나는 스님이 어떤 얼굴을 하실까, 궁금했지.
한참을 있으니 밭에 나간 스님이 괭이와 삽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셨어.
스님은 괭이와 삽을 광 속에 집어 넣고 옷을 훌훌 털면서 토방 위로 올라오셨지. 그러고는 이내 마루에 어질러져 있는 새들의 발자국을 보시고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어.
"내 없는 사이에 콩새네가 다녀간 게로군."
어느 겨울인가 눈이 아주 드물게 많이 왔을 때의 일이야.
스님은 저녁 예불을 마치기가 바쁘게 마당 귀퉁이를 파는 것이었어. 거기에는 갈무리해둔 무가 나왔었는데 스님은 그 무들을 한 삼태기 담아 가지고는 숲이 짙은 뒤란 쪽에 듬성듬성 놓아두는 것이었어.
나는 처음에는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왜 저러시는가 했지. 그런데 이날 밤에 밤마을 나와서야 비로소 스님의 깊은 마음을 알아차렸지.
마침 달이 떠올랐기 때문에 눈 덮힌 산천은 대낮보다도 환하고 아름다웠어.
그때 나는 배가 고픈 토끼가 암자쪽으로 살금살금 기어 내려오다가 눈을 화들짝 왕밤만하게 뜨는 것을 보았지. 무가 여기 저기 놓여 있으니까 글쎄 이 녀석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는 것이었어.
얼마 후 토끼의 기별을 받고 몰려든 오소리며 너구리며 고라니들이 순이 노오란 무를 맛있게 먹고 있었는데 이를 보면서 나는 산식구들과 나누는 스님의 잔잔한 인정이 가슴 속속들이 지며옴을 느끼었지.
그런데 정작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지금부터야. 그러니까 지난 가을이었지.
낙옆이 어찌나 많이 내렸는지 산 속도 길도 묻혀버린 어느 날이었어.
장에 갔다 오시던 스님은 징검다리를 건너다 말고 문득 발을 멈추셨지.
무슨 일일까. 발이라도 씻으시려나 했더니 그게 아니더군.
스님은 개울의 한쪽 귀퉁이에서 파란 융단 같은 이끼를 쓰고 다소곳이 엎드려 있는 작은 돌 하나를 집어 드시는 것이었어. 그리고는 이웃한테, 마치 사람들에게 이르시듯 조용조용히 말씀하셨지.
"올해는 무 껍질이 두터운 걸로 봐서 동장군이 제법 기승을 부릴 것 같으이. 그렇게 되면 이 이끼도 얼어 죽지 않겠는가. 그래서 내가 묵고 있는 거처로 데려가려고 하네. 이해들 해주겠지. 그렇다면 서로 작별의 인사를 나누게나."
개울가의 마른 풀잎들이 서걱이었지. 바위를 도는 물줄기는 돌돌거렸고, 작은 물고기 한 마리가 물 위로 반짝하고 뛰었어. 마치 돌아서 가는 스님을 배웅하기나 하는 것처럼.
이 날 석양 무렵이었지.
암자에 올라오신 스님은 소반 위에 이끼 덮힌 돌을 올려들고 방으로 들어가시더군.
나는 방에서 흘러나오는 스님의 조용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지.
"처음은 좀 낯이 설어서 서먹서먹 할 지 모르지만, 이내 서로 정이 들걸세. 저건 차를 끓이는 주전자이고 저건 찻잔일세."
나는 그만 바람을 타고 산을 넘어갔어. 이끼가 들어섬으로 해서 푸른 섬이 생겼을 스님의 단출한 방안을 생각하면 여간 즐겁지가 않았지. 이끼 또한 스님 덕분에 무사히 겨울을 날테니 이 또한 내 마음을 아늑하게 하였었고.
삭풍이 부는 겨울이 오는가 했더니 눈을 못이긴 소나무 가지가 부러지면서 겨울은 차츰 깊어져 갔어.
나는 이즈음 어쩌다 암자를 지날 때면 스님이 묵고 계시는 방 미닫이를 천천히 살펴보곤 했지. 그럴 때면 미닫이에 스님의 오롯한 그림자가 비치고 그 곁에는 이끼가 얹혀 살아가는 소반의 돌 그림자가 따라 있곤 했어. 이 얼마나 든든한 안부인지.
어느덧 겨울이 물러가고 움이터오르는 봄이 되었어. 얼음 풀려 흐르는 물 소리가 개울에서 제법 커지고, 진달래꽃 빛이 산을 덮어가는 봄날의 오후였지.
나는 이 날 무심히 이 골 깊은 산골짜기의 개울물에 내 몸을 비춰보며 놀고 있는데 발소리 하나가 가까이 다가왔어.
아, 바로 그 눈이 크고 키가 큰 스님이었어. 스님이 두 손으로 소중히 싸안고 온 것은, 그래 맞아, 바로 그 이끼가 덮인 돌덩어리였지. 이끼는 그동안 잘 지낸 모양이야. 아주 새파래.
스님은 징검다리를 건너서 개울 귀퉁이로 내려왔지. 바로 그 자리는 이끼의 돌덩어리가 박혀 있던 곳이였어.
거기에 예전 모습 그대로 돌을 놓으면서 스님은 말씀하셨어.
"자, 약속대로 자네들의 친구를 다시 데려왔네. 반갑겠지? 암 그렇고 말고, 이제부터는 또 사이좋게들 지내게나. 그리고 자넨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야 하네. 자기의 삶을 남에게 평생 의지해 살면 뿌리가 썩어 버리는 법이야. 아마 가뭄이 들거나 큰 물이 질 때도 있을테니 힘은 들겠지. 그러나 그런 어려움쯤은 견디어 내야 하네. 그래야 살아간다는 보람이 생기는 걸세. 자, 그럼 잘 있게. 궁금하고 보고 싶으면 간혹 올께."
스님은 왔던 길을 되짚어 갔지.어깨가 보이다가, 등이 보이다가 나중에는 가사 자락마저도 산수유꽃가지 속으로 묻혀 버렸지.
나는 이 아름다움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높은 산 위로 올라갔어.*
첫댓글 정채봉님의 <오세암>은 책으로 볼때나, 에니메이션으로 보거나 항상 눈물이 나는 책이에요. 길손이와 누나의 정감어린 대화가 생각나네요. "누구니?"“스님이야. 머리에 머리카락씨만 부려져 있는 사람이야.” “누나, 오늘 하늘이 저 스님이 입은 옷색깔 하고 같아. 저런 색을 뭐라 하더라?” “재색이라고 하지" “우리 누나는 그런 말 못 알아들어. 맞아, 생각났다. 맛없는 국 색깔이야.” “알겠다. 그러니까 때 지난 나물국빛이다 이거지?” ...
남매의 순정한 생각과 천진한 행동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동화..소중한 동심의 상징물이지요~ 이솝 제자님은 형제간이 어떻게 되나요? 겨울새 선생님은 늘 혼자서 비상하고 혼자 떠 날을 때가 많았어요. 혼자이니까요..그래서 형제가 많은 주위 분들은 늘 호기심으로 바라보게 되었죠~.
아하~ 큰딸이셨구나~ 흔히들 큰딸은 살림밑천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 ^ 한국적 분위기에서 큰 딸의 위치..좀 책임감도 있고.점잖도 해야 하고..마음씀이도 넓어 보여야 하고.,속이 꽉 차 있을 거리는 기대도 있고 해서 ..얼마간 짐스러운 점도 없지 않을 터..우리 이솝제자님은...그런 분위기도 있지만..막내 같은 귀여운 대목도 꽤나 느껴지는 듯..해서 친밀감도 촉촉히 젖어 다가오는 듯..넘 좋아요~ㅎㅎ
예쁜 여동생은 지금 어디 사실까...시집 갔겠죠? 신랑되시는 분...대박 터뜨맀다고 말들 하지 않았나요~ㅎㅎ
자유와 정직..자기 자신에 대해 냉엄할 정도로 정직했던 50년대 모더니스트..김수영 시인이 자연스레 떠오르네요~ 생활을 뚫고 나아가리라 폭포처럼 곧은 소리로 이야기하며 새벽 눈처럼 청결함으로 세계를 맞이하고자 했던 천재 시인이였죠..그의 관심은 늘 자유!1! 해방감!1 자유주의자 동생..혹시 이름은 승리? 승정? 승아? 승지? 승희? 승미? 승자가 들어가는 걸 전제삼는다면..대개 이런 경우의 수가.. 하나도 안 맞았을까ㅎㅎ
대전에 다녀오셨는데...대전 한여름 소식을...많아많이 담아 오셨나요? 그럼 한 말씀~ 안타깝네~ 예감이 있었는데...가끔 엉터리 예측이 턱하니 맞아떨어지는 행운이 주어졌거든요~ㅎㅎ
부모님 연세는...60대 후반 혹은 70대초반 쯤 되시겠지요~~~채집을 전문적인 소양을갖춘 학생보다 더 잘해내시는 안목과 솜씨.. 그리고 절대적인 큰딸에의 사랑과 성원!!!.놀라우셔라~~~그러니 외갓집에 들러 채집이야기로 몽땅 도배해도...부족함이 있지요~~~나의 어린 시절 풍경을 보는 것같아..ㅎㅎ 겨울새선생님은 도롱테 (굴렁쇠)굴리기를 좋아해서 늘아버지를 졸랐죠..아버지 공작솜씨가 대단했거든요..깔끔하고 창의적이고..엔지니어출신이라...(자그만 정미소 운영 경력)..덕분에 원없이 도롱테를 굴리고 다녔죠...한번은 쇠도롱테를 굴리다 큰집 장독을 깨서 큰엄마에게 야단 맞던일도..ㅋㅋ
추억을 되살리며 추억을 곱씹으며 은근한 미소를 짓는 순간...그게 행복한 순간이지요~겨울새는 행복이 뭘까..생각한 적이 있어요..아하 아름다운(즐거운) 추억을 많이 간직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야라고...보람있고 알친 추억을 그래서 알뜰살뜰 쌓아가고 있거든요..문서로, 자료료, 사진으로, 실물로, 남기면서요~~집안이 좀 정리가 안돼있는 게 사실이지요 ㅎㅎ 당연히 이유가 있죠..우리 이솝제자는 행복을 어떻게 얘기하실까???
얼마 후면 처서가 오지요..처서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는 절기..이솝제자님과는 달리 겨울새는 간절하게 계절의 바뀜을 갈망하고 있답니다...물론 겨울에는 애타게 태양을 바라보긴 마찬가지지만...가을엔 다른 계절과 달리 간절한 그 무엇을 추구하지 않아도..절로 내 안이 채워지기 때문이랄까...그냥 가만 있어도 먼 산 그리움 에 젖어들고..나도 모르게 벤취위에 떨어지는 낙엽에 뭉클해지고..마음은 가만 있는데 노래곡조가 마음을 움직이며 솟아나 금방 충만하게 만들어 버리죠...비로소 세상의 주인공이 된 기분 있잖아요? 그래서 추남이랍니다..ㅎㅎ
저와 공부하는 중학생 형제가 의료봉사 떠나는 엄마와 4박5일의 일정으로 베트남으로 갔어요. 가기전, 기후가 어떠냐고 조심스레 묻기에 제가, "베트남 참 좋아. 내가 몇년전 갔는데 어찌나 따뜻하던지...." 했더니, 저를 신기하게 쳐다보더군요. 더위를 무척 많이 타는 아이들이거든요. 더위에 지치지 말라고 한 격려가 너무 장난스러웠을까요? ... 시인 선생님처럼 많은 감흥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새로운 계절을 너그럽게 편안하게 맞이해야 겠지요? 그래도 따스한 여름이 가는건 조금 쓸쓸하네요..ㅋ ㅋ
따스한 마지막 여름을 즐겨보려고...부담스러움..제로...요즘은 한여름을 넘기려면 사복을 견뎌야 한다고...초복, 중복, 말복, 광복..사복더위란 말이,,,아,,재미나~오늘은 광복절..드디어 무더위의 정점에 와 있어요~이제는 클라이막스도 겪었으니 내려가는 일만...수은주와 함께..그리고 기쁨과 희열로 9월을..제자님은 세계 일주를 끝내셨나 봐~ 아니 가본 데가 없으니..ㅋㅋ 축하!!
아하! 우리 제자님을 외롭지 않게 해주는 꼬마친구들이 또 거기 있었네~ 재원이가 3-2 도우미였나 보네~ 도우미란 호칭은 살레시오에서도 사용했지요~ 그러다가 공립에 나오니 여간 혼란스럽지가...삼정에 근무할 때 도우미 일어나! 하면 멀뚱멀뚱~ 대화가 안통했거든요~ 교장선생님을 부른다는 게 교장수녀님이라 해버리고..ㅋㅋ
수지는 중앙도서관엘 갔을까? 지산유원지 돌아 귀가하셨다면..장원초등학교쪽으로 통과하셨구만..^ ^ 신양파크 부군에 배롱나무가 많아요.. 지난번 섬진강 다녀오다가 금호타이어공장 부근 도로 양쪽에 배롱나무 천지더라구요? 여름이 주는 미학적 풍경에 많은 느낌표를 채우고 돌아왔답니다. 마당에 배롱나무 한 그루 심어볼까? 작은 연못도 만들어도 괜찮고 단독주택잇점을 살려..하는 생각을..연못은 두암동 오얏비빔밥집 뜰에 만들어놓은 연못을 보고 우리집에도..충동을 받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