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문화에 대하여
이 천 우
문화
기독교문화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기독교문화란 용어에 앞서 먼저 ‘문화’란 용어부터 설명해야겠습니다. 문화란 ‘문명’이란 말로도 할 수 있는데. 이것의 사전적인 문자의 의미는 “진리를 구하고 끊임없이 진보·향상하려는 인간의 정신적 활동, 또는 그에 따른 정신적·물질적인 성과(학문·예술·종교·도덕 따위)라고 할 수 있는 까닭에 인간이 살아가는 삶에서 있게 되는 학문·예술·종교·도덕 등 모든 영역에는 문화란 속성을 띱니다. 학문 분야에서, 예술분야에서 종교분야에서 도덕분야에서 그 모두에서 인간이 구현해 낸 문화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문화란 빛 안에 스펙트럼을 구성하고 있는 학문이란 색깔, 예술이란 색깔, 종교란 색깔, 도덕이란 색깔의 무지개색을 띠고 있다고 할 것이므로, 문화는 그 모든 분야를 종합적으로 아우르고 있는 용어입니다. 해서, 문화를 말하고자 하면 그 범위의 영역이 전체이므로, 이를 나누어서 하나하나 분야별로 세부적으로 다루게 됩니다. 우리가 이번에 다루고자 하는 것은 문화에서 종교분야에 대한 것이며, 이 중에서도 ‘기독교’에 한정해서 문화를 다루는 것이기에 ‘기독교문화’라고 말하게 됩니다.
문화의 기원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심으로 우주가 있으며, 그 중심에 지구가 있고, 지구란 땅과 그 위의 하늘, 그 아래의 바다가 있으며, 땅과 하늘과 바다 그 안에 만물이 존재하는 기원은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신적근원(神的根源)이기에 과학으로나 합리적 이성으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신지식에 의한 믿음의 문제로 신앙고백에 의해서 인정되고 있습니다. 문화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 있게 된 세상에 펼쳐지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만물과 함께 하며 그것들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것에서 구현해 내는 결과물입니다. 그에 따른 인간 문화의 첫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 에덴동산에 있게 된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언약적 명령을 받아 실현해 나가는 것에서 있게 되는 일곱째 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 날을 거룩하게 여기신 안식에 참여함에 있으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인 영광의 자리에 있는 최고의 기쁨이 합창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시편 148편에서 보는 바인 해와 달이 찬양하고 반짝이는 별들이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니 지정해 주신 자리를 길이 지키어 하나님께서 내리신 법을 따름에 있는 것에서였습니다. 그와 같이 인간 또한 하나님의 백성인 영광을 드높이니 그 찬양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심에 있는 자랑입니다. 이 에덴동산을 이룸에 있는 것에서 하나님과 그의 형상인 인간이 함께 한 나라의 속성을 보게 되는 것이니, 하나님 나라를 잘 구현해 나감에 있는 문화(문명)를 이룸에 있는 문화의 시작이 되었어야 했습니다. 해서, 하나님의 생기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감에 있게 된 데 따른 언어 구사 능력, 창의성과 믿음 체계, 예술성, 도덕성, 사회성, 문화 생산성 등이 남자의 갈빗대에서 나온 여자와 함께 한 몸 된 특성에 의해서 자신들에게 허락된 만물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문화를 이룸에 있어야 했습니다. 이는 아담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로 나아오게 한 각 생물들의 이름을 짓는 것에서 돕는 배필에 대한 이해를 갖게 한 것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창 2:19). 타락하기 이전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아담과 하와의 문화는 하나님의 언약 체결에 의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있는 생명의 문화였으니, 여기에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문화를 보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이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 문화의 기원이 됩니다.
문화의 타락
하지만 첫 사람 아담이 선악과에 의한 하나님의 언약적 명령을 불순종하므로 그에게 죄가 들어와 죽음의 심판에 있게 되는 부패한 타락에 있으면서 함께 문화의 타락이 일어납니다. 아담은 아내 하와와 함께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나고 이후로부터 만들어지는 인간의 문화는 인간의 죄의 본성에 따른 영향력에 놓여 비교와 갈등과 시기와 살인과 거짓과 다툼과 우상숭배의 요소들로 얼룩지게 됩니다. 가인과 그 후손들에게서 보는 아담의 후손들에게서 왕성한 문화의 발달을 보게 되는데 건축, 유목, 음악, 철기, 혼인 등에서 보는 다양한 문화의 발달이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그 문화는 죄 아래에 있는 어두운 그림자의 영역 안에서 인간에게 죄로 인한 고통과 전쟁과 기아와 죽음을 전제로 하는 문화였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 세상에서 보게 되는 문화의 참모습입니다. 이 문화에는 여호와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이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단지 흙으로서의 형상인 육의 인간으로만 살아가는 것에서 문화를 생각하고 발전시켜 나가기 때문에 육의 본능에 의해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욕구를 따라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며 살아갈 뿐입니다.
기독교문화의 형성
세상 만물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창조되었기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하지만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부패한 죄가 사람의 본성에 자리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만물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죄로 물들음으로 악한 죄의 문화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세상은 그 죄의 문화로 물들어 있으며, 사람이 죄값인 사망의 결과에 처함으로 인해서 함께 흙먼지 같이 사라집니다. 그에 따라서 인간 세상에서는 생명이 어우러진 문화를 대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 활동에서 “생명을 불어넣었다”, “정신을 쏟아 부었다”,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표현을 하는 것을 봅니다. 이는 마음을 집중해서 온 힘을 다했다는 것에서이지 문화 그 자체가 생명을 띠고 영적인 것에서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 문화가 생명의 문화로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 문화에서는 그 문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의 욕망의 특성을 볼 수 있을 뿐이며, 역사와 전통이 있고 고유한 가치를 지닐지라도 타락한 사람에 의한 부패의 문화요 생명 없는 죽음의 문화입니다.
그러한 세상 문화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기뻐하신 보시기에 심히 좋은 문화로 있게 되는 것은 기독교문화를 형성하는 것에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구원에 이르도록 생명의 길을 열어 놓았으며(요 3:16), 이를 십자가에 달린 자가 되어 죽음을 당하시는 것에서 쏟으신 피로 죄 사함의 언약을 세우시고 그 피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참 생명인 영생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 그와 연합한 자의 죄도 함께 죽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에는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라고 하신 뜻을 품고 그 따름에 있는 문화를 형성하며 삽니다. 해서, 기독교문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는 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문화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함의 ‘섬김’에 있는 것에서 하나님 나라의 고유한 특성을 발휘하는 문화입니다. 이는 온 세상에 선양되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섬김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정신이 그리스도인의 활동에 의해 펼쳐지는 문화에 그대로 들어있습니다. 세상 문화는 그 기독교문화의 영향 속에 있으나 그 빛을 알지 못할 뿐입니다(참조. 요 1:5).
인본주의에 의한 기독교문화의 팽창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마 5:13, 14)는 자주 그리스도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말입니다. 이를 보통 그리스도인은 인격과 삶으로 이해하며 세상의 소금과 빛 역할을 해야 하는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따르는 제자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다”란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의 원리 속에다 두고서 제자들이 소금과 빛의 주체인 것에서가 아니라 세상의 소금이신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자로 있는 것에서 예수님과 같은 소금이라는 것이요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은 자인 것에서 빛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소금과 빛의 주체이십니다. 예수님이 소금이시며 빛이시므로, 그와 함께 하는 제자는 그 속에 그분의 형상이 있는 자이니 그 또한 소금으로 빛으로 규정됩니다. 이렇게 제자를 ‘세상의 소금’으로 비유하시며, 또한 ‘세상의 빛’으로 비유하시는 것은 이것이 지니고 또한 드러내는 ‘맛’과 ‘밝힘’의 특성을 가지고 설명하시는 것에서이니 팔복 선언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 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 있다’, ‘온유한 자는 복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 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 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 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 있다’를 선언한 ‘예수님’과 그분이 선언한 복인 ‘천국’입니다. 곧, ‘예수님과 그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예수님이 그들의 주이시며 그의 나라가 그들의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소금과 빛을 들어서 그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의 나라를 드러내어 모든 사람이 소금인 예수님과 그의 나라를 알게 하시고 빛을 예수님과 그의 나라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그의 나라를 드러내는 일을 하는 것에서 하나님께서는 찬양을 받으십니다. 그러한 것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고유한 특성이 문화에 고스란히 녹아 있게 되니, 말과 글을 비롯한 그리스도인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문화에는 그 고유한 특성이 배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활동해 나가고 있는 문화, 곧 기독교문화에서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품은 마음, 그 정신세계, 육적이지 않은 영적인 감동과 그 힘을 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 의해 공인되고 또 국교가 된 이후의 1,200년은 네로 황제에 의해서 시작된 기독교 박해에 따른 카타콤으로 숨어든 그리스도인에 의해서 표출된 신본중심의 예배에 서 있는 신앙이 다양한 형태의 문화 발전에 의해 기독교신학, 기독교음악, 기독교미술, 기독교건축 등 기독교문학을 꽃피우며 기독교문화의 세계를 형성해 온 것처럼 사람들에게서 인식되어왔는데, 그 실상은 인본주의가 지배하는 것에서였습니다.
기독교인의 탈기독교문화
화란(네덜란드) 출신의 신학자이자 목사요, 교육가, 저술가이며, 자유대학교 설립자이기도 하고, 정치가이자 수상이기도 하는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한 사람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측면에서 창조세계에서의 하나님의 주권과 그 책임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피력했습니다. 그는 교회와 신앙의 영역뿐만 아니라 세상에 속해 있는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예술 등 모든 영역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그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선포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의도대로 그러한 영역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독교세계관으로 변혁시켜 나가야 할 책임이 있다는 '하나님의 영역주권사상'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작금에 이르러서는 아브라함 카이퍼에게서 보는 기독교세계관으로 말해지는 ‘하나님 나라적인 세계’의 기독교문화는 탈기독교문화에 있습니다. 이는 로마의 이교도들이 태양을 섬기는 날이자 농신제로 지키던 축제일을 기독교가 “진정한 신은 태양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면서 경배를 받아야 할 분은 태양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라고 하며 태양신 축제일을 가졌던 12월 25일을 성탄절기로 가짐으로 성탄절 –성탄절을 비롯한 기독교절기 –을 기독교문화로 가져왔으나 타락한 기독교문화로 있으므로 이교적인 특성을 띤 탈기독교문화로 남게 되었듯이,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문화에 있어야 할 것에 있지 못하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가 없는 이교적인 세상문화에 속해 있는 실정입니다.
더욱이 2022년 10월 29일에 있었던 158명의 사망자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분들이 고통의 병상 신세를 져야 했던 ‘이태원 할로윈 축제 참사’에서 보는, 할로윈 축제 참가에 있었을 기독교인들이 보인 탈기독교문화는 오늘날의 기독교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할로원 축제에 참가하는 것은 할로윈 축제의 유래에 따릅니다. 이에 대한 글로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한 분의 글을 소개해 봅니다.
할로윈은 본래 약 2500년 전 아일랜드의 켈트(Celt)족이 사메인(Samhain)이라는 죽음의 신을 섬기면서 죽은 후 인간의 영혼은 사메인에 의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종교에서 비롯되었다.
켈트족은 일년에 한 번씩 사메인 신을 달래기 위하여 희생제사를 드렸는데 그 날이 일년의 끝 날인 10월 31일에 행해졌다.
켈트족은 거칠고 강퍅한 민족이므로 희생제사를 드릴 때 사람까지 번제로 드린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그 종교집단은 밤에 검은 옷과 검은 두건을 쓰고 횃불을 밝히고 마을마다 다니며 강제로 처녀를 제물로 받아 인신제사를 드렸는데, 마을에 가서 “처녀를 바칠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
다그치고 처녀를 바치지 아니하는 마을은 전체 불살라 버렸다. 지구 북반구에 있는 아일랜드는 겨울과 여름이 대부분인데 10월 31일을 여름의 끝이고, 11월 1일은 겨울의 시작으로 여겼다. 그리고 여름이 끝나는 10월 31일에는 각종 유령과 마귀와 귀신들이 찾아와 산 사람 속에 들어가 다음 해에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켈트족은 그 유령과 귀신들을 속이기 위해서 집 안의 불을 끄고 사람이 안 사는 집처럼 꾸미고, 동물의 가죽을 뒤집어 쓰기도 하며, 또는 귀신들이 도망가도록 하기 위해서 귀신보다 더 무서운 복장이나 가면을 쓰고, 밤에는 동네마다 장작더미를 쌓고 불을 피웠다고 한다.
한편 4세기경 로마제국이 세계를 장악하였을 때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로마의 속국이 되었고 로마 황제가 정책적으로 기독교를 국교화 하자 속국으로 있던 나라들이 자신들의 종교도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켈트족의 사메인 숭배 풍습도 인신제사를 제외하고 그대로 기독교 안에 들어왔으며, 그 사메인 의식은 몇 세기에 걸쳐서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악습이 퍼지는 것을 염려한 로마 카톨릭의 교황 그레고리 4세는 주후 840년에, 5월 13일로 지키던 “모든 성인의 날”(All Hallows Day)을 11월 1일로 바꾸고, 그 전날인 10월 31일을 그 전야제(All Hallows Evening)로 정하여 로마 카톨릭의 죽은 자 숭배일과 켈트족의 사메인 종교풍습과 연계시켰다.
그 전야제를 All Hallows E’en으로 표기하다가 나중에는 Halloween으로 바뀌었다. 아일랜드와 스콧틀랜드 사람들이 미국에 이주하면서 그 풍습이 대대적으로 미주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현재 Halloween Day는 사탄숭배자나 악마주의자들의 최고 명절로 자리 잡았고 매 할로윈 때마다 세계 각처에서 사탄 숭배자들이 옛날 켈트족들이 행하던 대로 동물제사를 드리며 심지어는 몰래 인신 제사를 드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할로윈 파티에서 사탄숭배자에 미혹되어 가입하는 자들도 많아진다.
이 할로윈 데이는 개신교와 정 반대되는 날이기도 하다. 마르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로마 카톨릭을 대항하여 카톨릭의 타락상을 고발하는 95개 조항이 기록된 문서를 독일의 위텐베르크에 있는 성당의 문에 계시함으로써 종교개혁을 일으킨 날이다.
그 종교개혁으로 인해 잃어버렸던 성경을 다시 평신도들의 손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참 신앙의 길이 열리게 된 중요한 날이다.
그런데 그 중요한 날에 많은 크리스챤 가정의 자녀들이 이방종교의 나쁜 풍습에 젖어 들고 있다. 그래서 지금 개신교의 교회에서는 Halloween Day에 크리스챤 자녀들이 이방 민족의 풍습을 본받지 않게 하려고 교회 내에서 10월 31일을 “종교개혁일”로 지키면서 자녀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부활 신앙을 조롱하는 할로윈 데이는 이처럼 본래 사탄을 숭배하던 이방인의 풍습이 ‘죽은 자를 숭배하는 날’ – ‘할로윈 데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교회(로마 카톨릭) 안에 자리 잡게 되었고, 이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원과는 상관없이, 오늘날의 할로윈 데이는 ‘할로윈 코스튬’이라고 해서, 사람(귀신)들을 놀래키기 위해서 얼마나 기발하고 기괴한 분장을 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프랑켄스타인, 뱀파이어, 좀비로 분장한 사람들이 길거리를 활보하며, 파티를 열어 웃고 즐기는 날로 변모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할로윈 데이를 전후해서 개봉하는 헐리웃의 영화들과 할로윈 코스튬의 단골 주제인 살아 있는 망자, 바로 ‘좀비’에 대한 이야기는 기독교 부활 신앙에 대한 일종의 ANTI-TYPE이요, 조롱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할로윈 데이에 맞춰 개봉하는 팀 버튼 감독의 좀비 강아지에 대한 영화 ‘프랑켄위니’ – 이것이 부활을 묘사(조롱)하는 헐리웃(일루미나티)의 방식이다.
성경은, 죽은 자의 부활을 부활의 첫 열매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썩지 아니할 영광스런 몸’으로 다시 사는 것(고전 15:51-54)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사탄의 문화로부터 비롯된 할로윈 데이에서는 ‘죽은 자의 부활’을 ‘프랑켄슈타인’, ‘뱀파이어’, ‘좀비’와 같이 ‘썩고 천박하고 저주받은 몸으로 다시 사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사건을 예표(소망)하는 이스라엘의 절기들(나팔절, 속죄일, 장막절)이 펼쳐지는 가을마다, 사탄 마귀는 자신을 숭배하고 추종하는 자들을 통해 만들어낸 마녀들의 절기 – 할로윈 데이를 통해,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의 신앙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할로윈 데이의 단골 분장인 ‘좀비’ –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Anti-Type이요 조롱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다음 세대들이 악하고 음란한 이 세대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자존심을 세우고 주의 영광을 선포하기 우리의 자녀이기 전에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람들로 세워야한다.‘
- 박광석 선교사 -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문화가 있고, 결코 그럴 수 없는 문화가 있습니다. 단지 이교적이어서 문화를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 숭배에 있거나 할로윈 데이와 같이 이교적 귀신 놀이에 있는 따위를 즐기는 문화와 같은 것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문화의 진정성
김경완은 '기독교문화란 무엇인가?' 에서 "기독교문화의 미래는 ‘기독교문화’에서 ‘기독교’라는 글자를 뺀 ‘문화’로서도 ‘기독교문화’의 의미를 함축하는 것을 추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이 있기까지 인류는 문화의 발전 속에 있다. 지구촌은 기독교문화 외에도 타종교의 문화가 있다. 불교문화, 이슬람문화, 유교문화, 힌두교문화 등, 그리고 무종교에 있는 무신주의문화, 물신주의문화, 과학주의문화, 포스트모던문화 등이 있으며 이 모든 문화와 공존한다"고 하였는 바, 그 영향이 끼치는 죄의 힘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가운데서 사람들이 추구하고 만들어내는 문화를 보면서 이 모든 것에 생명 없음을 보며 전도자가 이해한 가운데서 탄식하는 것에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사람이 그토록 온갖 수고를 하지만 도대체 무슨 유익이 있는가?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는 오지만 이 땅에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 해는 떴다가 지고 또다시 뜨려고 서둘러 제자리로 돌아간다. 바람은 남으로 북으로 이리저리 휘돌아 불며 헤매지만, 어느 한 곳 머무를 자리가 없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지만 바다를 다 채우지 못하고 그 물은 강으로 되돌아가 다시 바다로 흘러간다. 말은 아무리 많아도 충분히 표현하기에는 부족하고 어느 누구도 할 말을 다 할 수가 없다. 눈은 아무리 많은 것을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며 귀는 아무리 많은 것을 들어도 후련하지가 않다. 역사는 그저 반복될 뿐이다. 진실로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무슨 일이든지 누가 이미 해보았거나 말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것이다.'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과연 무엇인가? 그런 일이 이미 옛날에 없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옛날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지 못하듯 앞으로 오는 세대가 하는 일을 그 다음 세대들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삼라만상의 모든 이치를 깨달으니 그 모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누어 주신 인생의 몫이라. 괴로움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벌여 놓는 일이라. 모두 바람을 잡듯 허황되고 어리석은 일이다.(전 1:3-14, 현대어성경 )
젊은이여, 네 젊음을 즐겨라. 젊은 시절을 즐거운 마음으로 보내라. 네가 가고 싶은 데는 어디든지 가고, 네가 보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보아라. 다만 모든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그러므로 네 마음이 쓰라리도록 근심도 하지 말고 네 몸이 상하도록 수고도 하지 말아라.(전 11:9-10, 현대어성경)
해서, 그리스도인은 머리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봅니다. 그곳 영광스런 하나님의 보좌에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비로소 소망을 갖습니다. 주와 함께 함이 없는 문화에서는 소망이 없으며, 설사 기독교문화를 말하며 그 문화를 이루는 활동을 하는 삶을 살지라도 인본주의에 의한 기독교문화에 있는 것인 한에는 그 역시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다음과 같이 인생의 본분과 그에 따른 인생의 궁극적인 결과를 말합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 13-14). 기독교문화의 진정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
*글을 작성함에는 글의 흐름과 내용 전개에 "김경완(숭실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기독교문화란 무엇인가?"의 도움을 받았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