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최승자
세월만 가라, 가라 그랬죠
그런데 세월이 내게로 왔습니다
내 문간에 낙엽 한 잎 떨어뜨립디다
가을입디다
그리고 일진광풍처럼 몰아칩디다
오래 사모했던
그대 이름
오늘 내 문간에 기어이 휘몰아칩디다
가을 함민복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가을 허난설헌
붉은 비단 저 너머 밤 등잔 붉은데
꿈을 깨니 비단이불 한쪽이 비었구려
새장의 앵무새 서리 차다 울어대고
섬돌 가득 오동잎 서풍에 떨어지네
가을 헤세
덤불 속에는 너희 새들
너희의 노래 얼마나 퍼덕이는지
누렇게 물드는 숲을 따라 ㅡ
너희 새들아, 서둘러라!
곧 온다 부는 바람이
곧 온다 베는 죽음이
곧 온다 무서운 유령이 그리고 웃는다
우리 가슴이 얼어붙도록
정원이 그 모든 호화로움을
또 삶이 그 모든 광채를 잃어버리도록
이파리 속의 새들아
작은 형제들아
우리는 노래하자 즐겁자꾸나
머니않아 우리 먼지이다
가을 흄
가을밤의 싸늘한 감촉 ㅡ
밖으로 나왔더니
얼굴이 붉은 농부처럼
불그레한 달이 울타리 너머로 보고 있었다
나는 말은 건네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가장자리에는 생각에 잠긴 별들이
도시의 아이들처럼 창백했다
Thomas Hulme(1883-1917) 영국
가을날 노천명
겹옷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산산한 기운을 머금고...
드높아진 하늘에 비로 쓴 듯이 깨끗한
맑고도 고요한 아침 ...
여기저기 흩어져 촉촉히 젖은
낙엽을 소리없이 밟으며
허리때 같은 길을 내놓고
풀밭에 누어 거닐어보다
끊일락 다시 이어지는 벌레 소리
애연히 넘어가는 마디마디엔
제철의 아픔이 깃들였다
곱게 물든 단풍 한 잎 따들고
이슬에 젖은 치마자락 휩싸여쥐며 돌아서니
머언 데 기차 소리가 맑다
가을날 릴케(1875-1926)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하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매일 것입니다
가을날 서거정(1420-1488)
띳집은 대숲 길로 이어져 있고
가을 햇살 말고 곱게 빛나네
열매가 익어서 가지는 늘어지고
마지막 남은 덩굴에는 오이도 드무네
여전히 벌은 날개짓 그치지 않고
한가한 오리는 서로 기대어 졸고 있네
참으로 몸과 마음 고요하구나
물러나 살자던 꿈 이루어졌네
가을날 손동연
코스모스가
빨간 양산을 편 채
들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ㅡ얘
심심하지?
들길이
빨간 양산을 받으며
함께 걸어가주고 있었다
가을날 정희성
길가의 코스모스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나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
선득하니,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그림자가 한층 길어졌다
가을날 황인숙
"난 몰라, 이게 뭐에요!"
눈을 꼭 감고, 울려는 듯 비죽거리는
입을 뾰로통히 꼭 다물고
앞뒤 양다리를 뻣뻣이 모으고
옆으로 누워 있었다
새벽이면 쓰레기봉투들이 수거되는 곳 근처에서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던 어린 고양이
어디를 찾아봐도 보이지 않음으로
여름이 가버린 걸 알 수 있듯
아, 그렇게
죽음이 시체를 남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애도 속에서 질겨지는 시체들을
가을에 기형도
잎 진 가지에
이제는 무엇이 매달려 있나
밤이면 유령처럼
벌레 소리여
네가 내 슬픔을 대신 울어줄까
내 음성을 만들어 줄까
잠들지 못해 여윈 이 가슴엔
밤새 네 울음 소리에 할퀴운 자국
홀로 된 아픔을 아는가
우수수 떨어지는 노을에도 소스라쳐
멍든 가슴에서 주르르르
네 소리
잎 진 빈 가지에
내가 매달려 물어볼까
찬바람에 떨어지고
땅에 부딪혀 부서질지라도
내가 죽으면
내 이름을 위하여 빈 가지가 흔들리면
네 울음에 섞이어 긴 밤을 잠들 수 있을까
베네치아 가면
가을에 김정환
우리가 고향의 목마른 황토길을 그리워하듯이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가 내게 오래오래 간직해준
그대의 어떤 순결스러움 때문 아니라
다만 그대 삶의 전체를 이루는 아주 작은 그대의 몸짓 때문일 뿐
이제 초라히 부서져내리는 늦가을 뜨락에서
나무들의 헐벗은 자세와 낙엽 구르는 소리와
내 앞에서 다시 한번 세계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내가 버리지 못하듯이
내 또한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가 하찮게 여겼던 그대의 먼지, 상처, 그리고 그대의
생활 때문일 뿐
그대의 절망과 그대의 피와
어느날 갑자기 그대의 머리카락은 하옇게 세어져버리고
그대가 세상에게 빼앗긴 것이 또 그만큼 많음을
알아차린다 해도
그대는 내 앞에서 행여
몸둘 바 몰라하지 말라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의 치유될 수 없는 어떤 생애 때문일 뿐
그대의 진귀함 때문은 아닐지니
우리가 다만 업수임받고 갈가리 찢겨진
우리의 조국을 사랑하듯이
조국의 사지를 사랑하듯이
내가 그대의 몸 한 부분, 사랑받을 수 없는 곳까지
사랑하는 것은
가을에 서정주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 아는 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
문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오게
저속에 항거하기에 여울지는 자네
그 소슬한 시름의 주름살들 그대로 데리고
기러기 앞서서 떠나가야 할
섧게도 빛나는 외로운 안해으 이마와 가스으로 걸어야 하는
가을 안행이 비롯해야 할 때는 지금일세
작년에 피었던 우리 마지막 꽃 ㅡ 국화꽃이 있던 자리
올해 또 새격이 자넬 달래 일어나려고
백로는 상강으로 우릴 내리 모네
오게
지금은 가다듬어진 구름
헤매고 뒹굴다가 가다듬어진 구름은
이제는 양귀비의 피비린내 나는 사연으로는 우릴 가로막지 않고
휘영청한 개벽은 또 한번 뒷문으로부터
우릴 다지려
아침마다 그 서리 묻은 얼굴들을 추켜들 때일세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 아는 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
문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충북 영동 영국사
가을에 오세영
너와 나
가까이 있는 까닭에
우리는 봄이라 한다
서로 마주하며 바라보는 눈빛
꽃과 꽃이 그러하듯 ...
너와 나
함께 있는 까닭에
우리는 여름이라 한다
붑뎌대는 살과 살 그리고 입술
무성한 잎들이 그러하듯 ...
아, 그러나 시방 우리는
각각 홀로 있다
홀로 있다는 것은
멀리서 혼자 바라만 본다는 것
허공을 지키는 빈 가지처럼
가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첫댓글 아름다운 가을 단풍을 미리보게됐네
정숙이는 카페에도 앞장서고
계절에도 앞서서 가나보다
그렇게 얘기 하시니...고마우이...겁데이...
순영아
니로 인해 나는 늘
고마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