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초기의 중국 산동 선교에 관한 연구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이 약 로
한국교회 초기의 중국 산동 선교에 관한 연구
指導 서 정 운 敎授
이 論文을 碩士學位(M. Div) 論文으로 提出함
1998년 12월 일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이 약 로
이약로의 神學碩士 論文을 認准함
主審
副審
副審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1998년 12월
謝 辭
본 論文을 작성함에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친절하게 지도하여 주신 서정운 교수님께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1998년 12월 일
제 출 자
<목 차>
I.서 론 1
A.연구의 동기와 목적 2
B.연구의 범위와 한계 3
II.중국 산동성의 선교지 이해 4
A.중국의 사회 문화적 배경 5
B.중국의 종교적, 영적 배경 7
C.선교지 산동성의 형편 12
1.산동성의 사회, 문화적 배경 12
2.산동성의 종교적, 영적 배경 13
III.1912년 전후의 한국교회의 산동 선교 14
A. 산동 선교 이전의 한국교회 선교 15
1. 독립노회 창립과 선교 15
2. 총회의 창립과 선교 16
B. 산동성 선교의 결정 및 준비기 17
1. 산동성 선교의 의의 17
2. 산동성 선교사 파송 19
3. 산동성 선교의 부흥 성장시기 24
4. 산동 선교의 시련기 28
IV.한국교회의 산동 선교 전략 29
A.총회 선교국의 선교정책 29
1.선교사 선정방법 29
2.선교사 훈련 31
3.선교사회의 규칙 32
4. 선교사 소속문제 35
B.본국의 선교사 관리 37
1.선교사의 재정문제 38
2.선교사 자녀교육 40
3.선교사의 안식년 42
C.산동 선교의 선교 전략 43
1.네비우스 선교정책 44
2.연합을 통한 선교 46
3.전도대를 통한 선교 48
4.교육을 통한 선교 49
5.교도소, 병원 선교 52
V.산동 선교를 통해 본 한국교회의 21C선교전략 54
A.산동 선교 정책의 장단점 55
B.산동 선교가 한국교회에 준 영향 57
VI.결론 59
참고문헌 61
Ⅰ.서 론
1879년 스코틀랜드 선교사인 로스목사에 의해 처음 복음을 받은 지 30 여년만에 선교사를 파송한 한국교회는 세계 역사상 전례 없는 경이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올해로 중국선교를 시작한 지 86년의 역사를 가진 이 시점에서 중국선교를 다시 한번 진단해 보는 것은 오늘의 한국교회의 미래를 바라보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IMF라는 국가적인 위기 속에 서 한국교회는 초기의 한국교회가 외세의 침략과 도전에 굴하지 않고 선교의 시대를 열었던 역사를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의 기독교회는 오랜 역사를 걸어왔다. 당(唐)나라 시대에 들어왔던 경교(景敎)에서 시작(A. D. 635년)하여 몽고제국 시대에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사절단과 선교사가 파견되기도 했다. 16세기에는 명(明), 청(淸)시대를 걸쳐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들도 들어왔다. 또한 1807년 런던선교회가 파송한 모리슨(Robert Morrison)을 효시로 영국, 미국 교회의 종교적인 부흥의 영향을 덧입어 개신교 선교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허드슨 테일러의 중국내륙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는 중국선교의 불을 한층 지폈다. 하지만 아편전쟁, 태평천국의 난, 의화단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중국이 겪은 서방제국주의 국가는 곧 기독교국가라는 이미지로 새겨져 결국 기독교는 배척 당하는 결과를 맺었다.
이런 중국과 한국은 2,000 여년 동안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고 결국은 신구교의 전파과정에서도 중국은 매개자 역할을 함으로 우리 민족은 복음의 빚을 진 것과 다름없다고 본다. 하지만 1912년에 총회가 창립되면서부터 중국 산동성 선교를 시작함으로 한국교회는 복음의 빚을 갚아 나갈 뿐만 아니라 타문화권 선교를 시작했다는 선교사적 의의를 갖는 것이다. 산동성 선교는 한국교회의 세계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시작한 계기인 것이다.
A.연구의 동기와 목적
이런 중국 산동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R. J. Thomas1)를 연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LMS에서 중국 선교사로 파송하여 1863년, 상하이에 도착한 R. J. Thomas는 한국의 선교에 보이지 않게 큰 영향을 준 선교사이다. Thomas는 중국에 도착한 이듬해인 1864년에 사랑하는 아내를 여의고 난 뒤에 LMS를 탈퇴했다. 그 후 Chefoo에 있는 중국세관에서 일하다가 1865년 1월 LMS로부터 재허입을 허락 받았고 그해 9월부터 12월까지 한국땅을 밟게 되었다. 넓고 광대한 땅인 중국의 선교사로 파송받았지만 선교회와 마찰로 인해 선교의 어려움을 겪었던 R. J. Thomas에게 있어서 한국땅은 새로운 선교지로 희망을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1866년, 상선인 General Sherman호의 통역관이자 안내자로 한국에 도착하였지만 대동강에서 순교하고 말았던 것이다.
R. J. Thomas의 생애를 공부하면서 필자는 선교의 성공이 무엇인가에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중국선교사로 파송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다가 한국 천주교인을 만나면서 품게 된 한국에 대한 열망도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순교의 피는 오늘 한국교회를 유례없는 부흥의 땅으로 만들었음을 볼 때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선교는 Incarnation이라 할 수 있다. 한 알의 밀알처럼 심어질 때에 열매로 맺혀진다. 특별히 한국교회는 복음을 받은 지 30여년만에 산동 선교를 시작했다. 이 산동 선교를 연구한다는 것은 초기 한국교회와 신앙의 선배들의 선교, 신학, 삶을 따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오늘 한국교회가 직면한 어려움 속에서 나아갈 방향을 보게 할 것으로 믿는다. 일제 식민지의 백성이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대사로서 복음을 증거한 선교사들을 통해 IMF라는 치욕에도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한국교회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산동성선교가 오늘 한국교회와 선교에 주는 메시지를 찾길 원하며 논문을 전개하고자 한다.
B.연구의 범위와 한계
본고는 한국교회 초기의 첫 타문화권 선교지인 산동성 선교를 중심으로 선교사들의 사역, 정책 및 실상을 알아볼 뿐만 아니라 총회와 교회의 태도, 정책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럼으로 IMF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중국 산동 선교를 통해 오늘 한국교회의 선교의 방향을 점검해 보고자 한다.
이 논문에서 사용하는 1차자료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회록을 중심으로, 선교사들의 보고와 기록, 기사를 참고로 할 것이다. 기독신보, 신학지남, 게자씨, 신앙생활, 기독공보등을 통해 선교사들의 생생한 증언을 간접적으로 들을 뿐 아니라 직접 산동 선교를 감당한 선교사들을 통해 필요한 자료를 얻으려 한다.
제2장에서는 한국교회가 첫 선교지로 정한 산동성과 중국의 상황(사회, 문화, 정치, 종교, 영적)을 살펴봄으로 선교지를 이해하려 한다. 제3장에서는 한국교회의 선교가 이루어진 1912년을 전후하여 산동성 선교가 이루어진 배경과 준비 및 선교사들에 의한 선교를 살펴봄으로서 산동 선교의 내용을 알려한다. 제4장에서는 산동 선교사를 파송한 한국교회의 총회와 교회의 정책을 파악해 보고 이런 관점에서 한국교회의 21세기 선교전략 및 선교 1세기를 바라보는 한국교회의 방향성을 모색하며 논문을 마무리하려 한다.
Ⅱ.중국 산동성의 선교지 이해
산동성은 중국 화북지방(華北地方)에 있는 성으로 면적 15만 3000 km2이고 인구가 약 8,600만 명(1992년)이다. 성도(省都)는 지난[濟南], 북쪽은 보하이해[渤海], 남동쪽은 황해(黃海)에 면하고, 남쪽은 장쑤[江蘇]·안후이[安徽], 남서쪽은 허난[河南], 북서쪽은 허베이[河北] 성에 접한다. 농경지가 전체의 60 %를 차지하고 노동력도 풍부하여 농업이 발달되어 있다. 밀·옥수수를 비롯하여 목화·땅콩·잎담배 등의 경제작물도 풍성하게 재배되고 있다. 교통은 자오지[膠濟:靑島-濟南], 징후[京?北京-上海] 철도를 동맥으로 하여 톈진[天津]·난징[南京] 등 중국 주요도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성내 각지도 그 지선(支線)·공로(公路) 등으로 교통망을 형성하고 있다. 대운하(大運河) 등 수운도 편리하다. 지난의 바오투천[突泉]·첸포산[千佛山] 등 사적과 명승도 풍부하다.2)
방효원 목사가 1937년에 언급한 산동지역은 다음과 같다.
"산동에 선교구역은 화양현이 중심이 되어 즉묵현, 평도현, 초원현, 누로현, 해양현 모두 6현인대 南至北 2백 7-8십리오 인구는 3백 7-8십명이다."3)라고 하였다.
폴 히버트가 "모든 문화는 복음 전달을 위한 통로로서 적절히 봉사할 수 있다."4)고 한 것처럼 각각의 문화는 복음을 수용하기 위한 통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먼저 중국의 정치, 사회, 종교적인 측면에서의 변화를 살펴본 후에 한국교회 초기의 선교지인 산동성의 문화를 이해함으로서 복음이 접목된 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중국 대륙의 사회·문화·종교·영적 배경을 살펴본 후에 선교지역인 산동에 관해 알아보고자 한다.
A.중국의 사회 문화적 배경
19세기는 중국에 있어서 비운의 연속이었다. 아편전쟁(1839-1842), 태평천국운동(1851-1864), 청일전쟁(1894-1895)에 이르기까지 청조는 외세의 침략을 그대로 방치하여 점점 국가의 통제력을 잃어갔다. 1898년의 변법자강운동은 청국에 어떠한 변화의 바람도 가져오지 못했으며, 1900년대의 반외세, 반그리스도교를 표방한 의화단사건은 열강의 군대가 중국 땅에 진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조는 1911년에 붕괴되고 쑨원(孫文)의 지도아래 공화정부가 들어섰으나 정치적인 배신과 지역 군벌주의에 의해 공화정은 곧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쑨원이 이끄는 국민당은 중국을 재통일하려고 노력하였고 1920년대에 장개석과 중국공산당과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어느 정도 재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공산당과 갈라섰고 공산당은 산악으로 철수하여 스스로의 군대와 정부를 조직하였다. 1932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했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한편 중국공산당 세력은 남부 허난성에서 북부 산시성에 이르는 약 1만 km의 대장정(12934-1935)에 성공하면서 농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이때 모택동(毛澤東)은 공산혁명의 절대적인 지지자로 등장하게 되었고 주은래(周恩來)는 모택동의 협상가로 이름을 날렸다. 제2차대전 중 일본이 중국 본토를 침략하자 공산당은 국민당과 동맹하여 항일전선에 나섰고 일본이 항복한 후 공산당은 장개석의 권위에 도전하여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고 패배한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달아났다.
1958년 쇠퇴하는 기미를 보이는 모택동의 지휘 아래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중국 근대화를 가속하려는 대약진운동을 벌였으나 이 운동은 지도부 내에 심각한 분열을 가져왔다. 1966년 모택동은 과격파의 요청을 받아들여 문화대혁명을 전개했고 그 결과 폭력과 혼란만이 뒤따랐다. 1976년 모택동이 사망하자 4인방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문화대혁명은 모택동이 저지른 실수라고 비판되었다. 1982년 등소평(鄧小平)의 온건한 지도아래 새로운 당헌을 제정했고 이후 중국은 경제 현대화에 진력하여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으나 1989년 경제발전에 따른 정치발전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과격한 시위가 일어났고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천안문(天安門)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중국의 개혁은 잠시 뒷걸음치는 듯 했으나 등소평은 강택민(江澤民)을 등용하여 변함없이 경제개혁의 길을 걷고 있다.5)
중국의 근대화 과정은 험난하고 복잡했다. 커다란 몸집에 맞지 않게 많은 서구 열강에 의해 좌지우지되었고 결국은 공산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와 함께 들어간 복음은 뿌리를 내리기 힘들었지만, 헌신된 복음의 일꾼들로 말미암아 1949년에 84만 명이라는 세례교인이 생겼지만 곧 불어온 공산화의 바람에 복음의 불씨는 꺼져갔다. 하지만 연단의 과정을 거친 중국의 교회는 오늘 다시 일어서고 있음을 볼 때 심기어진 복음의 씨앗을 주님은 결코 내버려두시지 않으면 알게 된다.
B.중국의 종교적, 영적 배경
중국은 서구 제국주의의 압력으로 말미암아 서구세계에 문을 열게 되었고 그에 따라 복음의 문도 열리게 되었다. 1842년에 남경조약으로 다섯 항구가 외국인 거주지로 개방되자 런던선교회, 미국해외선교회, 미국 북장로회, 영국 장로교선교회 등의 선교사들이 정착하여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다. 1860년의 천진 조약의 '관용조항'은 선교사들이 중국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허드슨 테일러는 1865년에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을 설립하여 많은 선교사들이 중국내륙으로 들어가도록 호소했다. 기본적으로 선교사역은 의학적, 교육적, 복음적 접근이라는 삼중의 접근 방법6)에 의해 이루어졌다.
1895년에서 1911년은 중국으로서는 정치적, 문화적 분열의 시기였다. 1895년의 청일전쟁의 패배, 1898년의 개혁운동이 일어났고 반민주·반외세적 성격의 의화단 사건은 북부지방에서만도 거의 200여명에 이르는 선교사들의 죽음을 가져왔고 1905년에 과거제도가 폐지되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11년 청 왕조는 손문의 민주주의 혁명에 의해 붕괴되었다. 이 공화국은 강하지 못하여 1916년에서 1928년까지 중국에서는 여려 군벌들이 싸우는 군벌정치시대로 전락했다. 그럼에도 독립정신은 중국인교회 운동을 일어나게 했고 유학을 다녀온 학생들은 신사조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의 '5·4운동'은 지식인 혁명의 효시가 되었고 신문화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과학에 매료된 지식인들에 의해 1922년 3월 마침내 반기독교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의 국공합작 기간인 1924-1927년에 매우 격렬하게 중국 전역에 확대되어 기독교는 서구제국주의의 문화적 침략의 도구로 공격을 받았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은 기존 외국선교회와 관계를 단절하고 독립적인 교회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장개석의 혁명군은 공산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선전에 선동되어 교회를 공격하였고 일부 성직자들을 희롱거리로 만들었다. 1927년 3월에는 8,000명에 이르는 개신교 선교사들 거의 전부가 무역항이나 필리핀, 일본으로 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7)
장개석은 1928년 6월에 일단 북벌을 완수하고 10년 동안 경제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 10년 동안 호의적인 입장에 의해 교회는 회복되기 시작하여 왕명도, 송상절, 워치만 니 같은 중국인 복음전도자들이 나타났다. 1937년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선교사들은 철수해야 했고 신자들은 많은 고통을 겪었으나 신자수가 1936년 56만 명에서 1945년에는 거의 70만 명으로 늘어났다. 1949년 내전에 승리한 모택동은 1949년 10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1949년까지 중국에는 2만개의 교회들과 84만 명에 이르는 세례교인이 있었다. 그들은 5,600명의 선교사들과 8,500명의 중국인 복음전도자들, 3,500명의 전도부인들, 그리고 약 2,100명의 중국인 목사들의 지도8)를 받고 있었다.
중국이 공산화된 후 개신교는 국가의 완전한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고 중국인 교회들은 서구의 모교회로부터 단절되었다. 1950년 7월 28일, '기독교인선언'이 40명의 저명한 교회지도자들의 서명에 의해 공포되었고 1954년 삼자애국운동에 대한 지지의 표로 교회는 가입하도록 요구되어 거부한 사람들은 1955년과 1958년에 걸쳐 투옥되었다. 또한 교회 합병이 전개되어 상해의 200개 교회가 8개로, 북경의 66개 교회가 4개로 줄었다.
1958년 이후 중국에는 상이한 두 종류의 교회가 존재했는데 삼자교회와 가정교회이다. 삼자애국운동에 소속된 공인교회인 삼자교회에 반대하여 고난중의 성도들은 비밀리에 개인가정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린 것이다. 1966년 8월, 모택동의 선동으로 문화대혁명이 일어났고 홍위병들은 사찰, 수도원, 교회들을 파괴하고 습격했다. 결국 거의 모든 기독교인이 공격을 받음으로 비밀가정교회 활동조차도 잠시 동안 중단되었다. 그러나 3년의 공세가 지나간 후, 성령에 감동된 젊은 청년들이 교회의 영적인 폐허상태를 슬퍼하며 소생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여 50명에서 200명에 이르는 성령이 충만한 가정교회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1976년 모택동이 사망하고 '사인방(四人幇)'이 체포되면서 중국은 변화하기 시작했고 지하의 가정교회들은 반공개적인 활동으로 표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1979년 3월 중국공산당의 다소 관용적인 종교정책은 삼자교회들이 다시 문을 열도록 했고 1979년에서 1980년까지 짧게나마 가정교회들은 자유를 누렸다. 1980년 12월, 새지도부에 의해 세워진 '4개 견지'는 가정교회의 활동이 압력받도록 했고 1982년에 작성된 종교정책에 관한 문서인 '19호 문건'은 삼자교회 이외의 교회들의 폐쇄를 명령했다. 중국의 기독교인은 1949년에 채 100만 명이 안 되던 숫자에서 1982년에는 최소한 3,500만9)이 훨씬 넘는 숫자로 증가해 있었다.
대다수의 외국 선교사들은 본국 교회의 행정이나 제도를 그대로 선교 현지에 적용했다. 그러나 자립교회들은 선교부의 제도적 장치에서 벗어나 지역상황을 고려하여 인력을 안배하였다. 당시 선교사와 사역자의 수를 나타내는 표10)는 아래와 같다.
연도 |
선교사 |
전도인 |
여전도인 |
목사 |
중국인 총수 |
목사의 백분율 |
1876 |
473 |
587 |
90 |
73 |
749 |
9.7 |
1889 |
1,296 |
1,266 |
180 |
211 |
1,657 |
12.7 |
1893 |
1,324 |
1,157 |
326 |
253 |
1,736 |
14.6 |
1905 |
3,445 |
5,722 |
887 |
345 |
6,954 |
5.0 |
1910 |
5,144 |
5,364 |
1,789 |
548 |
7,701 |
7.1 |
1915 |
5,338 |
7,667 |
2,697 |
764 |
11,128 |
6.9 |
1917 |
5,900 |
8,220 |
2,579 |
846 |
10,799 |
7.8 |
1920 |
6,204 |
9,663 |
3,304 |
1,306 |
14,272 |
9.1 |
1936 |
6,059 |
7,100 |
2,427 |
2,135 |
11,662 |
18.3 |
1949 |
6,204 |
8,508 |
2,396 |
2,155 |
13,059 |
16.5 |
이 표를 보면 1920년까지 중국인 사역자들(전도인, 목사)이 계속 늘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1876-1889년 사이와, 1983-1905년 사이에는 전도인이 크게 늘어났음을 볼 수 있고 1920년-1936년 사이에는 전도인이 줄어들게 되어 백분율이 높아졌다. 선교사의 수에 대한 중국인 현지 사역자의 증가는 중국교회가 얼마나 자립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915년 이후에 그리 큰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915년 총회에서 김영훈 목사는 중국의 풍속에 관해 이렇게 보고했다.
"…쥼화민국 풍쇽이 고담을 됴화힝으로 젼도힝다 말을 잘 듯고 글짜잇다됴희를 공경힝야 앗기다고로 젼도지를 밧으면 위힝야두니 필경보고 믿을터인즉…"11)
이는 중국인들의 습성에 의해 전도지를 받으면 귀히 여김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쉬웠고 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그리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중국의 상황은 유교와 정치가 결별하던 시기였다. 1905년에 이루어진 과거제도 폐지는 사실상 유교와의 결별을 의미했다. 공자가 신의 지위로 높여졌으며 하늘과 땅에 바쳤던 것과 동일한 제사들이 그의 특권으로 규정되었다. 그의 말은 신의 직접적인 계시라고 선포되었다. 정서적인 면에서는 아직도 유교에 크게 사로잡혀 있는 중국인들은 이러한 감상적인 몸짓과 서구의 종교관습을 모방한 이러한 행위 속에서 정치생활의 기반으로서의 유교를 배척한 것에 대한 보상을 구했으나 1912년 이후의 혁명지도자들은 이전보다 더 분명한 배척을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볼 때 유교는 봉건적, 가부장적, 반민주적 절대주의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1916년에 유교를 국교로 헌법에 게재하려고 하는 노력이 이루어졌으나 이 계획은 중국에 있는 다른 종교들의 반발에 좌절되었다.12) 중국인들이 유교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는 경향을 볼 수 있으나 반면 서구에 대한 불신은 그들의 공허함을 채우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중화민국 초기 1912-1919년에는 기독교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1912년에 성경이 450만 권이 보급되었고 1910년-1915년에는 중국인으로서 전도사가 된 사람이 7,701에서 11,128명으로 증가했고 신자수도 167,075에서 286,652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후 1935년에 중국 전지역은 6,310개 교회와 481,227명의 신자를 확보하게 되었지만13) 아쉽게도 중국대륙이 공산화됨으로서 중국선교는 지하로 숨어들게 된 것이다.
C.선교지 산동성의 형편
1.산동성의 사회, 문화적 배경
중국의 동부 산동반도와 화북평야에 위치한 산동성은 노성(魯省)이라고도 불리웠다. 북동에 걸쳐 황하가 흘러 농토가 비옥하므로 인구밀도가 높았다. 한편 한국과는 황해를 사이에 두고 있어 옛부터 수로를 통한 빈번한 내왕이 있던 곳이어서 더욱 의미가 있는 지역이다.14)
산동은 토지가 윤택하지 못하여 비료를 주지 않으면 불가능하였고 논농사는 보기가 힘들었다15)고 1916년 총회 전도국의 이일영 목사는 산동 선교지를 시찰하면서 묘사했다. 황하 유역은 매우 비옥한 땅이었으나 한국 선교사들이 사역한 지역은 매우 척박한 땅 이었던 것을 선교지를 시찰한 보고를 통해 알 수 있다.
산동성에 2대 선교사로 파송한 홍승한 목사는 산동에서 전도하기 어려운 점을 사상적 관계, 문자적 관계, 풍속의 관계로 보고했다.
"1.사상적 관계이니 자고로 중국에 유명한 성현군자와 영웅열사가 십에 팔 구는 산동성에서 출생힝고 도덕과 문화의 발달도 산동성에서 시작된 거시 다수 임으로 산동성인의 사상은 자연히 자존자대(自尊自大)힝여 자기의 지방과 자기의 성인과 자기의 도덕과 자기의 문화 외에는 更好한거시 再無한줄노 자신힝고…
2. 문자적관계이니 …學키 甚難힝여 십년 이상을 학습힝여야 서책을 착수힝고 章句를 製作힝다 고로 富家子弟나 능히 入學하고 貧家子弟는 능히 學지 못힝으로 有識한人은 천명에 이삼인이 불과하고…
3. 習俗적관계이니 산동성인은 본시 본국인이라도 他省人이면 一層下待다 習俗이 有한중 모양과 언어와 의복이 不同한 외국인은 不言可想이라. 고로 50여년전에 미국 목사 방현덕씨가 初來 전도시에 무한한 멸시와 능욕과 핍박을 당하였도다."16)
산동성은 성현군자가 많이 나온 땅이어서 다른 사고, 문화, 종교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땅이었다. 또한 중국 한자가 어려움으로 인해 배운 사람이 적다는 것과 타성인을 멸시하는 태도는 복음을 전하기에 곤란한 환경이었음을 보여준다.
2.산동성의 종교적, 영적 배경
산동은 중국의 대철학자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지만 중국 전역을 휩쓸었던 많은 부흥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1800년 말 이래로 선교사들은 주를 위해 신실하게 일하면서 여기에서 활동해 왔다. 남침례교의 활동이 매우 두드러졌으며 그 중에서도 로티 문(Lottie Moon)의 활동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녀는 1873년에 도착하여 주로 청도(靑島;칭따오)의 북동쪽에서 거의 40년간을 봉사했다. 조나단 고포올스(Jonathan Goforth)도 1900년대초 여기에서 설교하면서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며 교회가 획기적으로 성장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17)
산동성은 중화의 종교, 도덕, 예의, 문학, 문학, 문명, 정치, 산업, 미술, 혁명, 기타의 모든 것이 다 산동에서 발원이 되었다. 오늘까지 만인의 존대를 받는 공자의 출생지가 산동인 것이다. 래양성에는 공자의 사당이 있고 공자를 숭배했음을 총회시찰단인 마로덕 목사는 이렇게 기술했다.
"북편으로 제단이 있고 그 앞에 獸를 잡아드리다 상이 있고 제단에 血을 뿌리는 표가 多힝고 그 다음에 우리가 남편을 향힝야 圓한 문구멍으로 다려가셔 공자의 書像이 잇는 곳에 入힝야 身을 돌이킨즉 공자의 큰 書像을 향힝였는데 그 좌우편에 네 수제자의 書像압헤 제단이 있고 향로가 잇으며 새血한 痕跡이 多힝데다."18)
산동성이 공자의 출생지이고 많은 사상의 발원지라고 하는 것이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장점이 된다는 것을 산동성 선교사들의 사역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산동 사람들에게는 종교성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복음이 전해지는 통로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Ⅲ.1912년 전후의 한국교회의 산동 선교
A. 산동 선교 이전의 한국교회 선교
유학자들의 서학(西學) 접촉후 이승훈의 영세(1784년 2월)로부터 한국의 천주교회는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수난 속에 생존한 한국의 천주교회는 1831년 9월에 중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독자적인 교구로 확정되었다. 이는 "갖가지 장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의 말이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순교자들이 기구하여 주신 덕택이다."19)는 말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순교자들의 피를 공급받아 한국의 천주교회는 성장했고 선교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1. 독립노회 창립과 선교
은둔의 왕국인 조선에 개신교선교사로 언더우드가 마가복음을 들고 들어오기 전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지(整地) 작업이 이루어졌다. 1902년 장로회신학교가 시작되어 1907년에 길선주, 방기창, 송인서, 한석진, 이기풍, 양전백, 서경조 등 7명의 졸업시켰고 마침내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선교사 38명, 한국인 장로 40명, 도합 78명이 모여 창립노회를 개최했던 것이다.20)
"선교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21)라는 말에 따라 새로 설립한 노회는 전도부를 설립하고 전도에 박차를 가하기로 하고 그 첫 사업으로 7인 목사 중에서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에 파송하였다. 이어 1909년에 시작된 백만 명 구령운동의 일환으로 김영제 목사를 북간도에, 김진근 목사를 서간도에 전도목사로 파송하였다. 1909년 제2회 졸업생이 9명 졸업했을 때에도 그 중에 최관홀 목사를 블라디보스톡(海蔘威)에 파송하여 선교한 결과, 후에 50여 교회가 창설되어 노회가 설립되기까지 하였다.22) 같은 해 1회 졸업생인 한석진 목사는 동경에 파송되어 유학생을 상대로 전도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23) 또한 구미지역, 즉 캘리포니아와 멕시코에 사는 동포들을 위해 방화중 목사를 파송하였고 평양 여전도회24)에서는 이선광 목사를 제주도에 파송하여 이기풍 목사를 도와 5년간 전도하게 하였는데 이는 나이 어린 한국교회로서는 이적(異蹟)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2. 총회의 창립과 선교
1911년에 7대리회를 7노회로 조직하였고 1912년 9월에 역사적인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비록 국가는 일제에 의해 독립권을 빼앗겼어도 교회는 당당한 독립적인 기구로서 세계교회의 일원이 된 것이다. 총회 창립 후 가장 첫 번째 일은 해외 선교부의 조직이었다. 독노회가 조직된 당시에 제주도, 만주, 동경, 시베리아, 미국, 멕시코까지 전도인을 파송한 것은 어디까지나 해외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을 위한 것이었지 이민족(異民族)에게 선교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에 엄격한 의미에서는 해외선교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25) 그러나 일제하에서 이민족(異民族)에게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은 한국의 정체성(identity)을 확인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총회는 사전조사차 김찬성 목사를 파송하여 중국교회의 장로회독회(長老會督會)와 협의하여 선교지를 중국 산동성 래양현(萊陽縣)으로 확정짓고 첫 선교사로 김영훈, 사병순, 박태로 등 세 목사를 이듬해에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26)
B. 산동성 선교의 결정 및 준비기
한국 목사들의 산동성 선교는 서양 선교사들보다 무척 용이했는데, 그것은 한국 목사들은 한자를 읽고 쓸 수 있어서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언어도 한자음과 비슷해서 무척 쉽게 습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산동성은 공자와 맹자가 태어난 고장으로 미국 선교부가 유일하게 선교의 어려움을 겪고 있던 곳이었다. 우리 총회는 남들이 들어가서 성공한 곳에 가는 것보다는 실적이 없는 곳에 가는 것이 좋겠다고 여겨 이곳을 택하게 되었고, 중국교회는 이 곳을 천거하였던 것이었다. 전도부장으로 있던 길선주 목사는 중국 선교의 시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국교회가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것은 여러 모로 힘에 겨운 일이다. 그러나 나라를 잃을망정 국외에 선교하는 교회로서 세계 선교국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가장 의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복음운동에 대한 한국교회의 의무인 동시에,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말씀에 순응하는 믿음의 실천이다. 우리는 이를 이행하기 위해 최대의 힘을 다할 뿐이다."27)
1. 산동성 선교의 의의
중국 산동 선교는 한국교회가 세워진지 불과 25년만에 타문화권 선교를 감당하였다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에 대해 방효원 목사는 4가지로 그 중대성을 기술했다.
① 산동 선교는 주님의 부탁하신 최후의 극귀극중(極貴極重)하신 부탁이다.
②산동 선교는 성령의 역사요, 성령의 공작(工作)이다.
③한국교회의 산동 선교는 세계적 신기록이다.
④산동 선교는 한국교회의 희락이며, 영광이요, 면류관이다.28)
산동 선교를 감당할 수 있게 하신 것은 성령의 역사이며 한국교회에 유례없는 부흥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증거였던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가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으며 피선교국에서 선교국으로 위치를 바꾸는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복음의 불모지였던 아시아에 아시아인에 의한 선교가 이루어졌다는 면에서도 큰 의의를 갖는다. 채은수는 "한국의 장로회총회가 산동 선교를 시작한 것은 한국교회의 해외선교의 시초였을 뿐 아니라 아시아 선교사에 의한 아시아 지역 선교의 시초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29)고 했다. 이는 선교의 중심이 서구지역에서 아시아권으로 이동하게 될 것임을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약간 이른 면도 있지만 서구 선교사들의 한국선교 사명이 끝난 것으로도 이해할 수도 있다. 서구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이 선교하고 있는 현지인들의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중대한 변혁이 아닐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한국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사실은 서구인들의 한국에서의 선교의 사명이 끝난 것을 의미하는 것30)이라고도 보여진다.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중국 산동 선교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는 신앙적 비약이라 보는 견해31)도 있다. 하지만 국내의 정치적, 사회적 탄압 속에서 도피가 아닌 복음 전파에의 열망과 한국교회를 부흥케 하셔서 총회를 창립케 하신 은혜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올바르다. 또한 억압 속에서도 움츠리지 않고 비상(飛上)하는 한국교회의 저력을 보여준 것이다.
2. 산동성 선교사 파송
1912년 9월 중국 선교에 대한 청원이 일치 가결됨으로 창립총회는 재령교회 박태로 목사를 한국교회의 첫 중국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1913년 5월 5일에 선교지 답사와 선교지 선정 문제로 중국과 교섭하기 위해 박태로 목사와 안주교회의 김찬성 목사를 중국에 보냈다. 당시 중국교회는 중화예수교장로회 화북대회가 회집되는 시기였기에 한국교회는 산동 선교에 관한 안건을 제출했다. 당시에 화북대회에서 중국교회는 '고대문명국이며 장구한 역사와 세계 인구의 1/4을 가진 중국은 소국(小國)을 멸시할 뿐 아니라 중국교회의 역사는 130여 년 인 것에 비해 한국교회는 25년이니 불가하다'는 입장이 있었다. 하지만 기도하여 성령의 지시를 받자고 하여 기도하는 중에 화북대회는 일치 가결하여 한국교회가 산동에 선교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산동반도의 중심지인 5현을 선교구역으로 정하게 되었다고 방효원 목사는 회고32)했다.
당시 산동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한 사람은 1862년에 미국 북장로회 전도국에서 파송한 곽현덕 목사33)였다. 그러므로 중국 문화의 중심지인 산동을 선교지로 정하는 것은 미국 북장로교회와 중국교회와 한국교회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곽현덕 목사가 처음 전도를 해서 믿은 사람이 래양성내의 王某였고 그 후 4,50년간은 성안에는 한사람도 생기지 않다가 1920년에 이르러 福音堂을 설립하였다. 1913년에 조선선교사들에 의해 附近 각처에 있는 교인들을 합하여 교회가 시작되었다. 한국장로교회가 파송한 중국 산동성 선교사의 파송시기와 사역기간은 다음의 표34)와 같다.
|
파송시기 |
선교사명 |
소속노회 |
사 역 기 간 |
파송지 |
제1대 |
1913 |
박태로 |
황해 |
1913. 5-1916. 4. 26. 1917. 5. 7이후 1,2주간 |
래양 |
김영훈 |
평북 |
1913. 11-1917. 4. |
래양 | ||
사병순 |
평남 |
1913. 11-1917. 4. |
래양 | ||
제2대 |
1917 |
방효원 |
평북 |
1917. 5-1935. 10. |
래양 |
홍승한 |
경북 |
1917. 10-1925 |
즉묵 | ||
제3대 |
1918 |
박상순 |
평남 |
1918. 11-1940 |
래양 |
제4대 |
1922 |
이대영 |
경안 |
1922-1955 |
즉묵 |
제5대 |
1931 |
김순호 |
여전도회 |
1931. 9. 11-1939. 9. 20. |
래양 |
제6대 |
1937 |
방지일 |
평북 |
1937-1957 |
청도 |
a)제1차 파송(1913) :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
초대선교사인 박태로 목사는 래양성내에 로마교, 루터교, 침례교, 장로교(미북장로교)가 있음을 보고하였다. 한국의 첫 선교사들은 산동에 관한 특별한 사전지식도 부족하였고 언어가 통하지 않는 데다가 도착 후 곧 닥친 큰 기근으로 동행한 가족들이 질병에 걸리는 등 수 없는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이에 첫 선교사들은 별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1917년 모두 사면하고 귀국하였으며 박태로 목사는 귀국 후 곧 별세하였다. 산동성 선교에서 첫 수세자는 장수명이라는 70세된 학자로써, 그는 김영훈 목사가 그 지방관에게 보낸 한시를 읽고 감동하여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 첫 선교사의 파송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지만 한국교회가 최초로 본격적인 외지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는 점, 외국에 있는 한국인들을 위한 선교가 아니라 완전히 외국인을 상대로 한 선교 사업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b)제2차 파송(1917) : 방효원, 홍승한 선교사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선교사업에 사실상 실패한 세 목사에 대해 징계를 논의하던 중 방효원 목사의 주장에 의해 사전조사가 불충분했던 총회의 불찰을 시인하고 재차 산동 선교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사위원으로 선임된 방효원 목사는 조사 겸 통역으로 김병규를 대동하고 현지로 파송되었다. 그는 조사결과를 총회에 보고하였고 총회는 그를 제2차 산동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방효원 선교사는 가족을 대동하고 현지에 부임하였고 도착 즉시 셋집 한 칸을 얻어 '복음당(福音堂)'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본격적인 전도활동을 벌였다.
그 후 그곳의 양반으로 한학자요, 한의사인 중국인 왕국남(王國南)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 그는 본래 기독교를 몹시 싫어한 자로 서양인이 와서 전도하는 것을 꺼린 터였는데 같은 동양인인 방목사의 전도에 감화를 받고 성서에 깊이 심취했고 마침내는 전도자가 되었다. 방지일 목사는 왕국남을 세례 받은 고집불통의 향반(鄕班)이란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매우 솔직한 어른으로 필자의 가친과 같이 전도사로 활동했으며 필자가 그곳에 파송된 후에도 여전히 농촌교회를 돌보는데 충성했다. 그는 아들 없이 딸 여덟을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활발하고 공산치하에서도 그 딸들 중에 은밀하게 전도한 이들이 여럿 있었다.…양교라고 거부만 하던 왕전도사가 우리 나라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들여 예수를 믿고 3대째 신앙을 유지하고 있으며, 공산정부 아래서도 전도활동을 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왕전도사는 의사의 직분을 포기하고 전도사로 일생을 마친 분이지만 의사로서도 돈을 버는 일에는 멀리한 사람이었다. 인술(仁術)을 펼쳤던 의사였지만 입신하여 헌신, 전도사로 종신 했고 그의 후손들이 그의 신앙을 계승함을 본다. 선교초창기에 이 같은 신앙인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큰 축복이다."35)
왕국남의 입교와 함께 서서히 성과가 보이기 시작했고 1년이 지난 후 조사 김병규가 총회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산동 선교지 안에 예배처소가 26처가 있다. 이곳은 전도하기가 어려운 곳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구주탄일에 특별한 재미스러운 예배회(禮拜會)를 하였다. 우리가 감옥에 들어가 전도할 때에 만흔 결과를 보았다. 우리 지방 안에 잇는 침례교회의 지방회와 대회에서 우리를 청하기로 우리는 그 會席上에서 우리의 래양에서 하고저 하는 사업방침에 대하야 설명하였다. 작년 우리 傳道室이 화재당하였을 때 중국 병정들이 우리를 만히 도아주엇스며 군병 중 오십부장이 한 분이 밋기로 결정하엿습니다."36)
이어 그 해 홍승한 목사가 현지로 파송되었다.
1922년 중화기독교 전국대회 즉 총회가 설립되기 전까지의 상황에 대해 방효원 목사는 이렇게 기술했다.
"중화에 선교한지 116년에 각처에 노회대회는 조직한지 3,40년이 되었으나 총회는 조직치 못하야 선교사가 미국이면 미국총회에 속힝고 영국이면 영국총회에 속하야 幾年에 1차 보고하고 완전한 교회 독립이 되지 못하야 중화 全地에 6대회가 있으나 규칙이 不一힝야 혹여 어떤 대회는 堂會를 督會라힝고 老會를 督會혹은 中會, 區會라 힝기도 힝고 또 장로회라도 범사가 통일치 못힝야 선교사 측이나 중화교회측에서 大遺憾으로 생각힝야 다년간 총회를 조직힝랴힝되 지방이 광대힝고 재정이 곤란하며 언어불통힝으로 有心不成힝며…"37)
처음 한국교회의 선교구역은 두 노회에 속한 사방 30리 이내였다. 즉 산동성 래양현 서남은 교동노회, 동북은 산동노회에 속하고 조선 선교사의 선교구역은 양노회 중간 즉, 성의 30리 이내였던 것이다. 하지만 후에 계속 확장되었다.
시기 |
이 름 |
직 업 |
비 고 |
1917-1918 |
김병규 |
조사, 전도인 |
방효원 목사와 사역 |
1918-194? |
김윤식 박희복 |
의사 |
계림의원, 부인, 선교사 자녀교육 |
1922-1924 |
조소임 |
교사 |
대구출신 |
1923-? |
주현식 |
의사 |
선천북회 장로, 즉묵삼일의원 |
1924-? |
리영애 |
교사 |
평양숭의여학교 출신 |
1930 |
편순남 |
교사 |
경북김천, 동경청산신학원입학 |
1931-1945 |
안중호 |
의사 |
경북 선산, 즉묵에 병원 개업 |
또한 선교사와 함께 자비량으로 협력한 의사와 학교 교사와 선교사 자녀교육을 위한 교사들의 역할은 한국 최초의 전문인 선교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선교사들의 파송과 더불어 이루어진 이들의 역할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평신도 선교사들의 중요성은 오늘날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3. 산동성 선교의 부흥 성장시기
a)제3대(1918) : 박상순 선교사
1918년에는 박상순 목사가 다시 부임하여 사업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한국인 선교사들은 현지에 부임하면 곧 중국교회로 이명하는 절차를 취했고 교회를 설립했을 때에도 현지 노회의 지교회로 개척하므로 중국교회로부터 큰 호감을 샀다. 1919년에는 평양 여전도회에서 산동 선교를 지원하기로 결정되었고 한편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출신의 의사 김윤식은 의료선교사로 지원하여 산동 선교에 합류하였다.
1920년에 방효원목사가 중국교회의 화북대회 총대로 뽑혀 대회에 참석하였고 평도와 즉묵현의 일부분을 한국 선교사들의 선교지역으로 이양 받으므로 선교지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래양성 안에 새 예배당 건축계획을 마련하였고 평양의 제직회와 대구의 기독교계 여학교 학생들을 비롯한 전국교회가 합심으로 전도비용을 헌금하였다. 특히 중국교회는 헌금제도가 없었으나 한국 선교사 관할 지역에는 헌금제도를 마련하여 선교사업의 확장과 교회의 부흥이 용이하게 되었다. 성탄절에는 불우한 자들을 교회로 초대하여 래양성 내의 걸인 200여명이 운집하였고 교회는 그들에게 푸짐한 음식을 대접하여 인근 주민들의 큰 신뢰를 받았다.
1920년에 산동노회와 산동의 미국선교회는 이루어진 사역에 대해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또 하나의 거대한 인접 영역을 한국 선교사들에게 넘겨주었다. 한국의 교회는 네 번째로 또 한 사람의 선교사를 파송해 여분의 일을 돌보게 하였다. 1921년에는 선교사들이 16개 지역에서 부흥 사경회를 개최하였고 제직 사경회도 열었다. 1923년 말에 한국인 선교사들은 591명의 중국 성인 수세자, 도합 815명의 그리스도인, 25개의 예배 처소를 산하에 거느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 일부는 그 현장의 옛 사역자들로부터 접수한 것이었다. 그리고 19개의 사립학교에, 436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모두 자립을 하고 있었다. 그 해에 그들은 22회의 사경회를 개최하였고 그 해의 헌금 총액은 741달러에 달하였다.38) 홍승한 목사는 남경에서 개최한 중국장로회 총회에 참석하여 한국교회의 산동성 선교사업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였다. 특히 김윤식 의사의 의료선교에 대한 현지인들의 호응과 감사가 컸다.
b)제4대(1922) : 이대영 선교사
1922년에는 선교지역이 너무 넓어서 래양지역과 즉묵지역으로 분할하여 관할하기로 결정, 이대영 목사가 현지에 도착했다. 이대영 목사의 생활비는 평북 여전도회가 담당했다. 1923년 선천에서 활동하던 의사 주현식이 의료선교를 자원하여 산동으로 부임하여 래양에 진료소를 개설하므로 김윤식 의사와 함께 의료선교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24년에 선교사업은 계속 확장되었고 각 지방의 유력 인사들이 입교하여 선교에 큰 도움을 주었다. 1925년 총회 전도국의 재정적 곤란으로 산동 선교사업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일어 홍승한 선교사와 이대영 선교사가 철수하려 했으나 홍승한 선교사는 사면하여 귀국하고, 이대영 선교사는 계속 활동할 것을 청원하므로 전국 각 노회, 여전도회의 도움으로 이대영 목사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년도 |
학습자수 |
세례자수 |
세례자합계 |
신도수 |
연간성장율(%) | |
1915 |
|
3 |
|
40 |
0 | |
1916 |
30 |
|
12 |
40 |
0 | |
1917 |
35 |
|
28 |
60 |
50 | |
1918 |
36 |
5 |
32 |
85 |
42 | |
1919 |
48 |
19 |
49 |
89 |
4.7 | |
1920 |
91 |
41 |
416 |
520 |
484 | |
1921 |
166 |
31 |
425 |
618 |
18.8 | |
1922 |
228 |
34 |
494 |
746 |
20.7 | |
1923 |
224 |
58 |
591 |
815 |
9.24 | |
1924 |
226 |
26 |
585 |
818 |
0.37 | |
1925 |
167 |
43 |
652 |
823 |
0.61 | |
1926 |
164 |
55 |
720 |
884 |
7.41 | |
1927 |
171 |
42 |
798 |
971 |
9.84 | |
1928 |
150 |
52 |
898 |
1006 |
3.60 | |
1929 |
221 |
48 |
902 |
1123 |
11.63 | |
1930 |
236 |
60 |
970 |
1207 |
7.48 | |
1931 |
313 |
34 |
1004 |
1308 |
8.37 | |
1932 |
266 |
70 |
1021 |
1292 |
-1.22 | |
1933 |
265 |
73 |
1041 |
1324 |
2.48 | |
1934 |
334 |
73 |
1090 |
1416 |
6.95 | |
1935 |
318 |
38 |
1073 |
1331 |
-6 | |
1936 |
310 |
31 |
1088 |
1395 |
4.81 | |
1937 |
|
|
|
|
| |
1938 |
|
11 |
|
1352 |
-3.08 | |
1939 |
279 |
37 |
1160 |
1479 |
4.96 | |
1940 |
|
61 |
|
1569 |
6.09 | |
1941 |
|
116 |
|
1662 |
5.93 | |
1942 |
|
101 |
|
1716 |
3.25 |
c)제5대(1931) : 김순호 선교사
1931년에는 경북지역에서 활동하던 의사 안준호가 즉묵으로 가서 의료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즉묵에 선교회 직영으로 맹인학교를 개설하여 맹인교육에도 성과를 거두었다.
여선교사인 김순호가 파송되었고 방효원 선교사는 래양성경학교를 정비한 후 교장으로 활동하였다. 래양에는 애린(愛隣)학교, 즉묵에는 애도(愛道)학교가 발전하였다. 산동지역의 선교사업이 확장되자 1933년에는 산동대회의 승인을 얻어 래양노회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산동 선교 20년만에 이룩한 쾌거로 중국교회와 각 서양의 선교회에서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산동 선교는 크게 성공하여 선교가 시작된 지 15년 후인 1928년에 수세자가 898명, 예배당이 13개, 기도처 20곳, 장로 10명, 전도사 15명, 244명의 학생을 수용하는 12개의 주간학교가 있었다.39)
년도 |
예배처소 |
복음당수 |
예배당수 |
합 계 |
장로 |
조사 |
집사 |
1915 |
|
|
1 |
1 |
|
|
|
1916 |
|
|
1 |
1 |
|
|
|
1917 |
6 |
|
1 |
7 |
|
1 |
2 |
1918 |
7 |
|
1 |
8 |
|
|
|
1919 |
6 |
|
2 |
8 |
|
|
|
1920 |
8 |
7 |
10 |
25 |
7 |
18 |
11 |
1921 |
23 |
9 |
10 |
42 |
10 |
17 |
|
1922 |
25 |
10 |
9 |
44 |
|
|
|
1923 |
25 |
10 |
10 |
45 |
|
|
|
1924 |
30 |
5 |
12 |
47 |
|
|
|
1925 |
27 |
6 |
12 |
45 |
10 |
|
|
1926 |
26 |
6 |
11 |
43 |
|
|
|
1927 |
20 |
4 |
13 |
37 |
10 |
|
|
1928 |
20 |
4 |
13 |
37 |
10 |
|
27 |
1929 |
30 |
7 |
15 |
52 |
|
|
|
1930 |
34 |
7 |
15 |
56 |
|
|
|
1931 |
36 |
4 |
15 |
55 |
9 |
|
30 |
1932 |
35 |
4 |
16 |
55 |
|
|
|
1933 |
30 |
1 |
17 |
48 |
13 |
|
39 |
1934 |
30 |
|
19 |
49 |
|
|
|
1935 |
30 |
|
21 |
51 |
|
|
|
1936 |
32 |
|
21 |
53 |
|
|
|
1937 |
|
|
|
|
|
|
|
1938 |
36 |
36 |
|
|
| ||
1939 |
13 |
|
19 |
32 |
|
|
|
1940 |
33 |
33 |
|
|
| ||
1941 |
34 |
34 |
|
|
| ||
1942 |
35 |
35 |
|
|
|
선교구역이 평도, 즉묵, 해양, 누하 등 5개현으로 확대되었다. 1932년에는 래양 남관교회에서 래양노회가 창립되어 중국교회의 산동대회 산하 16개 노회 중 하나로 가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곳에서 선교를 시작한 지 30년이 지난 후 교회가 35개소, 교인이 1,716명으로 중국 선교사상 최대의 기록을 남겼다.
4. 산동 선교의 시련기
a)제7대(1937) : 방효원 선교사
1937년에는 초기 선교사인 방효원 목사의 아들 방지일 목사가 총회 파송으로 산동 선교사로 부임하여 중국 선교의 대를 이었다. 방지일 목사는 대양에 도착하여 과감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고 대양 서쪽인 편도와 청도 에도 선교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중국선교는 난관에 부딪쳤다. 특히 1945년 제2차대전 종전이후 중국공산당이 중국본토를 장악하면서부터 중국 선교는 중단상태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방지일 목사는 1957년 중공 당국에 의해 강제 추방될 때까지 산동지방 선교를 계속하였다. 공산정권이 수립된 후 래양노회 소속의 모든 교회들은 폐쇄되어 학교나 사무실, 공장, 마구간으로 사용되었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참혹한 박해를 당하였다. 그러나 방지일 목사가 개척한 바 있는 청도의 5개 교회는 명맥을 유지하였고 담대한 자세로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 1957년 6월 홍콩으로 추방됨으로 한국교회 최초의 외국선교인 산동지방 선교는 사실상 중단되고 말았다.
Ⅳ.한국교회의 산동 선교 전략
A.총회 선교국의 선교정책
1.선교사 선정방법
초기 한국교회의 선교사 선정은 자원자를 보낸 것이 아니라 위원회가 있어서 선교사를 선정하였다. 곽안련 목사는 위원회에 의해 선정된 사람은 선교사를 거부하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외지의 선교사역을 위해 사람을 선정할 때는 각 경우마다 담당위원회가 선교지에 선택 가능한 사역자를 조사하여 그 선교사업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선정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때 선택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선교사로 가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한번은 담당위원회가 대구에서 1,000명의 교인을 맡고 있는 목사를 선택하여 중국에 파송한 일도 있었다. 물론 그는 기꺼이 갔다."40)
하지만 위원회에서 결정하였으나 파송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1920년 총회전도부에서는 차재명 목사를 선교사로 선정하였지만 경충노회에서 반대하여 파송되지 못하였다.41) 1936년 산동 선교 후임자를 선택하기로 하고 최재화, 정재호, 김진수, 송창근, 백영엽, 윤응팔, 신후식, 한종선을 교섭하였으나 허락되지 못하였다.42) 그 중 최재화 목사가 사의를 표명한 이유는 이러했다.
"중국선교사로서 적임자의 조건으로 제가 생각한 것은 독특한 신앙과 창조력이 풍부한 자, 년령은 30내외 청년으로 다른 사업에 착수치 않고 처녀식으로 깨끗이 전심전력으로 선교에 헌신할 희생적 정신이 있는 자, 단순한 자이어야 한다. 신앙과 동력이 풍부치 못한 나, 50의 고개를 넘은 나, 근 10명의 식구를 가진 나, 사면을 허락치 않는 우리 교회의 사정에 처한 나로써는 중대한 직분을 감당하겠다는 것은 과도한 무리와 고집이 되지 않을 수 없다."43)
방지일 목사의 경우, 총회 외지선교부원인 의주 김석항 목사로부터 초청장을 받았다. "총회 외지선교부에서는 방목사가 대학을 나온 신학도 이면서 효원 목사의 아들이니 아버지의 대를 잇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방목사를 선교사로 택했으니 방목사가 이를 받아들여야 다시 실행부에서 이를 결정하여 확정하겠다."44)는 것이었다. 이때에 방지일 목사는 미국 유학의 길을 포기하고 부친의 뒤를 이은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다.
초창기에는 개인의 선교에 대한 소명이나 헌신이 아닌, 총회 선교부의 추천에 의해 선교사로 헌신했으나 1931년 기독신보의 선교사 모집공고는 선교사의 길이 자의에 의한 헌신으로 발전되었음을 보여준다. 1931년에는 기독신보에 여선교사의 자격과 지원자 모집 공고45)를 이렇게 발표했다. 그 규정은 조선 예수교장로교회의 교인인 여자, 중등이상의 학교를 졸업하고 성경학원(혹은 동등이상 정도의 신학)을 졸업한 자, 내외지에서 현재 교역(사역)에 종사하는 자, 연령 만 25세로 만 30세까지의 독신자 이어야 한다고 했다.
총회가 선교사를 파송할 때의 서약문답46)을 보면 선교사를 선정하는 기준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을 것 같다.
ㅡ.노회에서 목사시험시에 답한대로 장로교회의 신경을 그대로 승인하냐뇨?
ㅡ.외국 전도부의 규칙을 준행하기로 서약하냐뇨?
ㅡ.외국 선교사의 직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아냐뇨?
ㅡ.범사에 충실히 하고 단정이 하야 선교사업에 적합하기로 노력하냐뇨?
ㅡ.이미 위임받은 선교사와 타협(妥協)하야 직히여 나가기로 결심하냐뇨?
초기 선교사들의 헌신과 순종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도전을 준다. 개인의 소명과 형편에 얽매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교사의 자격은 개인의 소명 뿐만 아니라 동역자를 통한 부르심, 성령의 강권하심에 잇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선교사 훈련
한국 선교사들은 정식적인 훈련은 받지 못했다. 단지 훈련이 있었다면 한국에서 외국 선교사들과 함께 동사목사로, 안수받지 않은 목회자로 신학교에서의 생활 경험이 전부였다. 선교사들과 함께 생활하므로 선교훈련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신학교 때에 매 학기마다 학생들은 다섯 종류의 복음전도를 체험하였다. 시내 세 곳의 가두예배 처소 중 어느 한 곳에서 전도사역을 행하기, 시내 공장들에서의 전도하기, 철도역 근방이나 넓은 거리에서 전도하기, 시내에서 축호전도하기, 시내의 가게와 병원에서 복음을 전하기를 한 후 모든 학생은 레포트를 작성하였다. 특별히 자신이 접촉하여 결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의 주소와 이름을 기록하였다.47) 즉 초기 선교사들은 신학교 시절부터 철저한 복음전파 훈련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체계적인 훈련을 받고 파송받지 못함으로 인하여 1913년에 첫 파송을 받은 선교사들(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목사)은 현지 적응을 하지 못하였고 언어와 생활 습관을 익히지 못함으로 인하여 실패하고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첫 선교사들이 큰 결실없이 돌아왔다는 사실이 선교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2차로 파송한 방효원, 홍승한 목사에게는 그 기반 위에서 사역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열정도 중요하지만 열정에 합한 훈련과 준비가 되어야 한다.
3.선교사회의 규칙
1913년부터 선교사를 파송하여 해외 선교가 이루어졌지만 1918년이 되어서야 "선교사회 규칙"이 제정되었다. 선교사회 규칙을 살펴보면,
宣敎師會 規則48)
제1조 본선교회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로서 조직힝
제2조 본회다 更正基督敎長老會의 정신과 은택을 일반 人生에게 보급케함 을 목적함
제3조 본회에 如左한 직원을 선정힝야 일반사항을 관리힝
一.회장 1인 二.서기 1인 三.회계 1인
제4조 본회의 정기회다 매1개월에 1會 式開힝되 회록을 調製힝야 일반의결 사항을 명백히 기록힝야 後考에, 更케힝이 可힝.
제5조 본회다 매년 제1전도국 정기회에 左記事項을 보고힝이 可힝.
一.각항 用費에 관한 회계의 보고서(각 조목을 상기힝거시오 又다 선교 회장 서기나 혹 기타 可信者의 검사를 經한 것으로 힝 것.)
二.선교회에서 일년간 행한 사건과 총계표.
三.목사급 부인도 개인으로 행한 사건을 각기 보고힝 것.
四.익년도 用費에 관한 예산
1)각 선교사의 봉급과 子女費와 기타 각인의 應受金額 幾何
2)本國往返旅費 幾何
3)外村巡行費와 기타 전도에 관한 用費 幾何
4)家屋貰及 수리비 幾何
5)語學敎授의 手數料金 幾何
6)何 新事件經綸에 관한 用費幾何
제6조 선교회 재정은 좌기방법에 의하야 처리함이 可힝
1)선교회 회계다 전도국에서 支撥힝다 금액을 수령한 후 즉시 은행에 예 치힝고 전도국규칙 及其命令대로 支撥힝이 可함
2)선교회 회계는 금전을 사용할시는 銀行折受로서 지출함이 가하고 영수 인의 영수증을 수취하여 後考에 更케하며 출납장부를 調製하야 검사에 편케함이 가함
3)선교회 회계는 특별긴급사건이 없을 경우에는 각인의 봉급 혹 他錢을 預給지 말것이요 매 3개월에 일차식 지출액의 幾何와 각 조목의 잔액의 幾何를 선교회에 보고하되 基 잔금이 何樣으로 존재할 것을 明記함이 可함
4)선교회 혹 선교사는 전도국의 허락을 得하지 못하면 전도국의 명의로 負債하지 못할 것이요, 전도국의 예산외에는 一分이라도 사용함을 得지 못함. 특별한 사고로 인하여 전도국의 예산외에 지출하기로 작정할지라 도 사무국장에게 番號簿通知書를 受時까지는 支用함을 得지 못함.
5)선교회는 긴급한 事를 인하여 선교회 회계에게 예치한 예치금을 사용할 시에는 전도국에 즉시 통지함이 가함
제7조 선교사가 전도국 예산 외에 특별히 타인에게 연보를 청구하거나 타인 의 자의로 연보하는 금액을 받게 될 때에는 전도국의 認許를 得한 후 사용함이 可함
제8조 선교사는 선교지방에 있을 시에는 예정한 자기 봉급과 자녀비만 매월 에 受取함이 可함
제9조 선교사가 본국에 來往할 시에는 各項旅費汽車에 대하여는 조선 각지 에서는 3등, 支那 각지에서는 2등, 기선은 何處를 물론하고 2등만 영 수할 것이요 임지에 歸着일부터는 봉급만 수령할 것 선교사의 本國來 往旅費는 直路로써 계산할지니 誰某를 불문하고 直路로 不行하거나 中路에서 체류할 시에 加用되는 여비는 각기 自擔함 선교사는 여비 명세서를 作하여 전도국의 검사를 받음이 가함
제10조 선교사가 전도차 순행할 시에 식비는 반액, 車馬費는 實費대로 支撥 하고 行李品과 의복은 自擔함이 可함
제11조 初次發行하는 선교사에게는 束裝費를 量宣支給함 家眷의 수에 의하 여 상당하게 계산함
제12조 선교사는 매 3개년에 5개월씩(來往시간은 除함) 順次귀국하여 휴식 함을 得함 선교사가 귀국 휴식시에 봉급과 가족비는 受取할 수 있으 되 講說하기 위하여 순행하는 여비는 該교회에서 담당할 것
제13조 誰某를 불문하고 선교사로 被任되어 發行하기 전에 자녀와 其가족 이 醫生에게 신체진단을 받음이 可함
제14조 선교사는 發行하기 전에 전도국 규칙과 선교회 규칙을 준수하기로 전도국에 대하여 契約함이 可함
제15조 선교사의 語學은 3개년 爲限하되 매년 1차씩 試講하여 전도국에 보 고함이 可함
이 선교회의 규칙은 2번의 개정(1935년, 1938년)이 있었는데 선교사의 안식년이 3년에 5개월씩에서 7개년에 1개월씩으로 개정되었다. 선교사의 재정적인 문제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였는데 좀 더 선교사의 자녀교육과 복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것이 아쉽다.
4. 선교사 소속문제
산동에서 사역이 시작된 지 2년이 지난 후 산동의 중국교회가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교회와 동떨어진 어떤 교회를 설립한다는 생각을 가짐으로써 약간의 혼란과 흥분이 일어났다. 한국의 총회는 이러한 혐의점을 진정시키기 위해 1916년에 선교사들에게 한국 노회로부터 이명증서를 받아 산동의 노회에 제출하라고 명하였다.49) 그러나 이명증서를 보내면서 총회는 "미래에 그 사람들에게 징계를 시행할 어떤 필요성이 발생할 경우 판결을 내리기 전에 국내 총회에 자문을 구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하였다."50)
먼저 한국교회에 속한 외국선교사들의 소속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노회는 전국을 함경, 평북, 평남, 황해, 경충, 전라, 경상 등 7대리회(代理會)로 구분하여 노회의 위임사항을 처리하게 하였다. 노회가 구성되자 선교사들의 소속문제가 대두되었는데, 노회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한국 예수교 장로회와 관계를 가지고 일하고 있는 외국인 선교사들은 조선노회와 총회의 회원권을 가진다. 그러나 그들의 징계와 임명은 종전대로 그들을 파송한 모교회와 동 선교부에 속한다. 만약 선교회원 3분의 2이상의 투표로서 조선노회와 총회의 회원권을 포기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결정할 때에는 교회의 최고 치리기관인 총회에서 교회에 가장 좋을 대로 판정한다.51)
이것은 선교사들이 조선노회에서 권리를 확보하면서도 그 징계나 임명은 본국 노회에 유보함으로써 그들이 한국교회에 완전히 속하지 않겠다는 뜻을 명시함으로써 선교사들의 치외법권을 인정한 것이었다. 이는 한국에 와 있던 선교사들이 자신들은 한국 목사들과 구별되는 특권의식을 가진 것으로 비판받아 마땅한 대목이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산동 선교사의 치외법권을 인정하지 않고 중국에 위임하되 본국과 조정할 것을 요구하였던 사실은 매우 올바른 판단이었다. 그럼으로 한국 선교사들은 중국교회와 마찰 없이 연합하여 선교를 감당할 수 있었다.
당시의 선교사 파송에 관하여 방지일 목사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선교사는 총회의 파송장을 지참하고 중국에 들어가 이를 중국교회 총회에 제출했다. 총회가 선교상대국 총회에 파송선교사의 증빙서를 제출하여 파송 목사의 직능을 상대국 총회에서 받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 총회는 전도부장이 내지(국내)와 외지(해외)선교의 행정을 모두 주관하도록 하고 있었다.52)
방지일목사가 소지했던 파송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證 憑 書 今以方之日派定中華民國山東省宣敎師者 主後壹千九百參拾七年 四月 拾四日 朝鮮耶蘇敎長老會總會 傳道副長 李 自 益 |
B.본국의 선교사 관리
1.선교사의 재정문제
총회가 창립되면서 기념사업으로 시작한 산동성교의 재정은 추수감사절 헌금으로 하기로 결의했다. 이렇게 해서 헌금한 것을 전도국에서 일괄적으로 모아 선교사회의 규칙대로 사용했다. 방효원 목사는 산동성 선교비에 대해 "한국교회의 감사의 헌물이다.…주의 자녀들이 1년간에 받은 은혜를 감사함으로 주께 드리는 물질이라. 이는 진실로 주의 축복한 물질이었다"53)
1912년 9월 창립총회의 전도국에 상정된 청원서에 외국 선교를 위해 전국교회가 헌금하고 창립 기념으로 지나(支那) 등지에 선교사파송을 청원하였다. 이 청원서는 한국교회의 선교적 성격을 보여준다.
"우리 교회에서 주일마다 구주의 도를 전파할 뜻으로 가르치는 것인데 총회에서 1년 중 한 주일을 택정하여 각 교회에 하달하고 전도국을 위하여 예배 보게 하되, 그 주일에 전도 설교와 선교를 위한 기도, 선교 감사헌금을 드림으로 선교 주일을 지킬 것을 청원하고 총회 시작시부터 지나(支那) 방면으로 타문화권 선교를 감당할 선교사 파송을 청원하였다."54)
산동 선교를 위해 한국교회가 보여준 헌금은 다양했다. 헌물을 후원하기도 하고, 정기적으로 헌금을 하기도 했고, 사경회 헌금을 드리기도 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평남노회 서면구역 전도회에서는 중화민국 선교사 1인의 월급을, 경상노회 대구에서는 중화민국의 여전도인 1인의 월급55)을 담당하였다. 서울의 정신여고, 대구 신명여학교, 평양의 숭의여학교 학생들이 풍금56)을 사서 래양과 즉묵교회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평양의 최억태씨는 고현교회에 종을 사서 기증하였고 평북노회 부인들도 사경회지 300여명이 중국 래양현 선교사업을 위해 1,200원을, 자녀교육 기본금으로 1,100원을 출의하였다.57) 평양 부인전도회에서는 1,600원을 연보하여 박상순 목사의 사택을 건축하였고 그 후에 전국교회에서 1,800원을 연보하여 방효원 목사의 사택을 건축하였다.58) 대구 동삼성경학원 학생 60인은 대구의 3개 교회와 연합하여 12월초에 산동 선교후원회59)를 발기하였다. 한국이 해방된 후인 1949년에도 산동 선교사업을 계속하기 위해 산동 선교후원회60)가 구성되어 총무 안상기장로의 맹활약으로 회원 4,000여명과 후원금 330만원을 모으기도 했다. 이처럼 한국교회의 중국산동성 후원은 개인, 단체, 교회, 노회가 힘을 합하여 이루어졌다. 하지만 선교회의 규칙대로 선교비가 사용되지 않아 총회에서 監査61)한 경우도 있었고 일제가 선교비 지출에 제동을 걸기도 했지만 총독부와 원만하게 교섭하기도 했다.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전 교회의 기도와 정성의 결정체요, 참여의 영적 사업이었다. 모든 선교사들의 파송과 선교비 조달은 장로교 총회 선교부의 관할 아래 이루어진 일로서 전체 교회의 일로 받아들여졌다.62) 그것은 오늘날 한국 선교사가 어떤 후원교회나 선교회와만 관계하고 있는 이상하다고 할 수 있는 것과는 성격이 달랐다. 오늘날 후원교회와 선교부는 소속 선교사를 하나의 고용된 인원으로 여기고 선교사는 후원교회나 기관에만 신세를 지고 있는 듯이 생각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그 당시 한국교회는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선교사 가족들뿐만 아니라 현지 선교 인원들의 총 경비를 30여 년간 지속하여 후원하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아니라 선교에의 열의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 있다는 것을 산동 선교사의 재정문제를 봄으로 가능하다. 1932년은 중국 산동성의 한국선교지에서 세례받은 교인이 1021명이 되는 해였다. 이 해에 사용된 선교비의 항목과 지출내역은 다음과 같다.
종 별 |
대 양 |
금 화 |
사 유 | |
작년도 지출 |
금년도 지출 |
금년도 예산 | ||
1.선교비 |
4200.00 |
3610.00 |
3610.00 |
|
2.전도서적비 |
50.00 |
23.75 |
23.75 |
|
3.순행비 |
550.00 |
427.50 |
427.50 |
|
4.여비 |
320.00 |
285.00 |
285.00 |
노회,대회,총회 |
5.복음당비 |
130.00 |
61.75 |
61.75 |
|
6.수리비 |
420.00 |
285.00 |
285.00 |
|
7.선교사업비 |
3500.00 |
2375.00 |
2375.00 |
|
8.종교교육비 |
378.00 |
142.50 |
142.50 |
성경학교 |
9.선교잡비 |
200.00 |
95.00 |
95.00 |
통신비환전비 |
10.전도국비 |
150.00 |
190.00 |
190.00 |
|
11.전도부잡비 |
150.00 |
142.50 |
142.50 |
|
12.예비비 |
1098.00 |
300.00 |
300.00 |
|
합계 |
11146.00 |
7938.00 |
7938.00 |
|
2.선교사 자녀교육
선교사에게 있어서 선교를 감당함에 있어서 어려운 문제는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닌, 자녀교육의 문제라 할 것이다.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의 경우 자녀교육에 대한 총회나 한국교회, 그리고 선교사들의 대책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방효원 목사도 1920년 래양의 선교보고를 하는 중에 어려운 점의 하나를 자녀 교육문제라고 지적63)했다. 한국 선교사들이 선교사 자녀들을 위해 주일학교를 시작한 것은 1919년이다. 김윤식 의사의 부인인 박희복64)씨는 한국선교사의 자녀들을 자신의 집에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교실과 교사가 없어 계속 되지는 못했다. 1922년 4월에 대구의 조소임씨를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교사로 청빙하였고(1924년 사임) 1924년 6월부터 평양 숭의여학교 출신인 리영애씨를, 1930년 10월 15일에는 경북 김천에 있는 편순만씨가 교사로 초빙하기도 하였다. 한국선교사 자녀들은 그 외에도 현지인 학교나 모국의 학교, 아메리카 학교에서 학업을 하였다. 이는 총회 회록을 보면 알 수 있다.
"홍목사의 맏아들은 청도 미국인이 설립한 아메리카 중학교에, 리대영 목사의 장남은 대구 계성학교에, 방효원 목사의 장남은 선천학교에, 박상순 목사의 장녀는 평양 숭현여학교에 각각 입학수업하오며65)… 박상순 목사의 장녀 은숙은 본국 승현학교에서 졸업하고 금년 5월에 들어와 중국여자고등학교에서 수업중이오며66)…"
선교사 자녀학교를 설립하여 체계적인 자녀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총회에 자녀들의 교육 상황을 보고한 것으로 볼 때 총회적으로 자녀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자녀교육 문제를 위해 기금을 준비하고 계획하는 장기적인 노력이 없었던 것이 아쉽다.
3.선교사의 안식년
타문화권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안식년은 매우 중요하다. 안식년의 목적에 대해 허버트 케인은 첫째, 육체적인 회복뿐만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 문화적, 영적인 회복을 해야 한다고 한다. 둘째는 다음 임기를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선교부는 선교사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격려하며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셋째는 후원자 모집업무이다. 선교사들이 안식년을 통해 후원교회를 방문하여 사역을 보고하고 헌신할 선교사를 모집하고, 기도후원 및 재정적인 보충을 해야 한다.67)
한국장로교회 선교사회 규칙에도 안식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제12조 선교사는 매 3개년에 5개월씩(來往시간은 除함) 順次귀국하여 휴식함을 得함 선교사가 귀국 휴식 시에 봉급과 가족비는 受取할 수 있으되 講說하기 위하여 순행하는 여비는 該교회에서 담당할 것"68)
안식년에 관한 규칙은 1922년에 3년에 5개월씩 귀국하여 안식년을 갖도록 하며 휴식 시에 여비는 해당 교회에서 담당하도록 하였다. 1935년에는 7년에 1개월씩 순차 귀국하여 안식년을 갖도록 개정하였는데 이는 선교사들의 필요를 인식하지 못한 결과로밖에 볼 수 없다. 1936년 제25회 총회에서는 선교사의 귀국기간을 1년으로 하여 6개월은 안식하고, 6개월은 전국교회를 순행하도록 하였고 동시에 산동 성경학원의 건축 연보를 모금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69)
선교사들이 안식년에 귀국하여 한 일은 이러하다. 방효원 목사는 사택 연보로 전국 교회에서 1,431원 31전을 모금하였고, 이대영 선교사는 선교상황 보고를 하면서 각 교회에 순회보고 중 사택건축비 1,500원, 연보금액 5,000원, 장막 1좌대 500원, 전도인 3인 330원, 교사 1인 180원, 종각 100원, 즉묵 주일학교 렴긔품 50원, 종 4개, 풍금 2좌, 축음기 2좌, 활동사진기 1대, 급필님 15필70)을 모금했다. 이대영 목사는 사경회와 부흥회를 38처에서 인도하는 중 선교사업을 보고하였고 많은 물질적인 협조를 얻은 것이다.
하지만 안식년에 선교사의 교육과 육체적인 쉼을 위해서는 어떤 구체적인 대안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1925년 제14회 총회에서 안식년에 재교육하는 안건이 허락71)되었지만 구체적으로 누가 재교육을 받았는지 알 수 없다. 선교사의 재정적인 문제만을 후원교회나 총회가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영역(정신, 신체, 영적인 부분, 생활 여건, 휴식)까지 기울여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C.산동 선교의 선교 전략
한국선교의 기본정신은 馬布三悅(S.A.Moffett)박사가 禧年기념예배 석상에서 한 연설에 잘 나타나 있다.
"내가 한국에 들어와 선교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결심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도 이외에 다른 것은 절대로 전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죽든지 살든지 구원의 복음만을 전하기로 굳게 결심하였습니다."72)
만일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이 헬라의 문화도시에 나타났던 사도 바울과 같이 십자가의 도 이외에는 전하지 않으려는 단순한 신앙의 소유자가 아니었고, 16세기의 중국 가톨릭 선교사들과 같이 과학의 계몽으로써 그리스도교를 이해시키려는 지식편중의 인위적인 방법에 의존하는 전도자였다면 한국의 중국선교는 결코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1.네비우스 선교정책
중국 산동의 미국 북장로교의 존 네비우스(John L. Nevius)는 1880년대에 이 방법을 고안하여 자기 선교회의 사람들에게 처음 제시하였지만 거절당했다. 하지만 한국교회에는 이 네비우스 선교방법이 적용되어 큰 효과를 보았던 것이다.
네비우스는 중국사역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옛방식과 새방식인데 둘 다 궁극적으로는 자립적이며 적극적인 현지교회의 설립을 추구하는 인데 그 차이는 이러하다.
"1.옛방식은 주로 유급 현지인 대리자에 의존한다. 외국자금을 사용함으로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 현지 교회들의 성장을 복돋우고 자극하며 그 후에 점차적으로 자금의 사용이 중단되기를 바란다. 옛방식은 현지 교인 가운데 진보적이고 지성적인 사람들을 유급매서인73), 성경중개상, 복음전도자 혹은 선교 거점의 지도자로 이용한다.
2.새방식(네비우스 방식)은 유급 현지인의 가치를 덜 인정하며 최소화한다. 그리고 독립과 자기 의존의 원리를 아예 처음부터 적용할 때 독립적이고 자립적이며 적극적인 현지인 교회의 설립이 가장 빨리 이루어진다고 믿는다."74)
선교사들은 선교사역을 수행할 때 한국의 네비우스 방법을 사용하라는 지시를 받고 현장에 가서 그 정책을 사용하였다. 그 지방의 다른 교회들은 주로 옛 방식에 의존해서 운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 선교사들은 중국어를 빨리 습득하여 1년이 지나서는 그런 대로 중국어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물론 그들 모두는 선교사로 임명받기 전부터 한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널리 순회하고 시장과 가정, 도로변에서 복음을 전하였으며 사경회를 개최하였다. 이 사경회의 참석자들은 자신의 비용 전체를 부담하였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비용만을 제외하고 처음부터 사역을 자립시키고자 노력하였다.75)
한국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선교방법대로 중국에서도 교회, 병원, 학교를 세웠고 당회를 조직하여 교회가 자립하여 견고하게 되는 일에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 또한 중국인들은 자발적으로 전도대를 조직하여 전도하였고76) 대광, 석수두교회는 60여 원을 연보하여 전도인 1인을, 손가광, 사격장교회는 여전도인 1인을, 남관교회는 다른 두 교회와 합해 126원을 연보하여 목사 1인과 여전도인 1인을 세웠으며, 왕촌도 픗성교회는 은혜를 받아 중국인 1인을 청빙하였다.77) 한국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에서 이루진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선교지에 적용함으로 중국교회는 더 든든히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선교사가 개인적으로 널리 순회하며 전도하였으며 사역의 모든 분야에서 성경을 중심으로 삼았다. 자치에 의해, 스스로 마련한 예배당을 소유함으로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다른 선교단체와 협력하고 연합함으로 한국 선교사들의 산동 선교는 결실을 맺었다.
2.연합을 통한 선교
중국에서 15개 선교단체가 합하여 17개 대회, 121개 교회로 중화기독교회를 형성했다. 중화기독교회는 『중화기독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소책자를 발행하여 여기에 참여한 교회를 설명해 주었다. 그 책에는 외국의 15개 선교회의 이름이 있다. 주로 장로교회로서 미국의 남북장로교회를 비롯해 영국런던교회, 캐나다장로교회, 영국침례교회,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영국장로교회, 뉴질랜드장로교회, 미국공의회, 미국 귀정(歸正)교회, 미국부흥교회, 미국동인회, 조선장로교회, 미국감리교회 등 15개 단체가 한 이름 아래서 총회를 조직했다. 대회는 각각 다른데 모두가 산동대회에 속했고 산동대회는 16개 노회로 되었다.78)
중화기독교회 산동대회 16 노회 중에서 한국교회가 속했던 래양노회는 래양, 지미, 해양, 치하, 평두 등의 다섯 현을 지역으로 하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연태를 중심으로 하는 동해노회가 있었고, 서쪽으로는 청도를 중심으로 하는 교동노회가 있었다. 중화기독교회는 하나의 통일된 조직으로 전국적으로 여러 교단이 가입하여 한 교단을 이루었으나 침례교단이나 루터교에서는 자기들의 교유한 예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한 총회, 한 대회, 한 노회 산하에 함께 모였다. 조선 선교부도 이 교단의 창립에 합류하였던 것이다. 산동대회 16개 노회 중에서 조선 선교부는 두 노회와 관련되어 있었다. 래양노회는 조선 선교부 단독 노회였고 교동노회에는 개척한 5개 교회가 속해 있었다.79)
선교지를 정함에 있어서 한국 선교사는 중국교회가 정해주는 지역에서 선교했음을 방지일 목사는 회고했다.
"산동지방의 해안지역은 중국과 미국 총회가 이미 자기들의 선교사를 파송한 곳이어서 그들은 조선 총회에 산동의 한복판인 태양고을에 파송토록 했다. 해안의 연태로부터 270리, 청도로부터는 280리나 멀리 떨어진 오지중의 오지였다. 태양고을은 인구 2천의 산동 108개 현 중에서도 모범적인 곳이었다. …중국이라는 나라만을 정하고 구체적인 지역은 중국인들이 정해준 대로 순응했으나, 쌀밥이 주식인 우리 선교사들은 쌀이 한 톨도 나지 않는 곳이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초대 한국교회 선교사들이 분산적으로 일하지 아니하고 협력하여 일하였다는 점은 그렇지 못한 오늘의 한국교회의 선교사업과 대조적이었다. 그들은 외국선교 단체와도 공동목표를 위해서 도움을 주는 협력의 관계를 지속하였다. 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를 포위한 영·미·독의 선교사들은 사업경영상 피차에 우의적으로 연락이 왔다. 그의 선교사들이 우리 선교구 내에 와서 셩경학교도 교수하고 부흥회도 인도하여 준다. 각방으로 우리를 돕고 노력을 불사한다. 우리 선교사들 중에서도 그들의 청함을 입어 부흥회, 사경회 등을 인도한 분이 있다. 이대영 목사는 수 년 전에 미국 북장로회, 미국 침신회 구역 내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방효원 목사는 화북신학교 이사로 노력을 불사한 일이 있다."80)
산동 선교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을 통해 볼 때 다른 선교회뿐만 아니라 중국교회와의 협력 선교는 한국 선교의 성공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3.전도대를 통한 선교
박상순 목사의 보고에 의하면, 당시 그 지역에서 사용되었던 두 가지의 전도유형을 하나는 유행전도(遊行傳導)요, 다른 하나는 좌당전도(座堂傳導)였다고 한다.
"보통 개인전도, 공중전도 외에 산동에서 유행하는 것은 1.유행전도, 2.좌당전도라 하겠다. 유행전도는 하나의 단체를 조직하고 천막과 환등, 유성기, 활동 사진기, 성경 화본, 칠판기 등 기타 단원들의 행리, 식량, 취구(炊具) 등을 대(帶)하고 대개 신자가 없는 촌락을 찾아 전도 강설로 복음을 선전하는 것이다.
좌당전도란 것은 일정한 장소, 즉 가옥을 임득(賃得)하고 등자(橙子), 의자(倚子), 탁자 등 서화 기타 전도에 수용할 약간의 기구 등을 설치하고 예배일 시일(市日) 등의 시기에 예배의식을 거향하고 복음을 강연하며 평일에는 개인을 심방하여 교의를 결(結)하며 주 앞으로 흡인하는 공작이다. 점차 신자가 생기고 교회가 조직되고 예배당이 건설된다."81)
이대영 선교사는 유행전도 중에 강도(强盜)의 위험을 잘 모면하기도 했다82)고 한다. 거기에는 기후에의 적응문제, 사람들의 박해, 강도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이전에도 순회전도를 하였지만 처음 전도대를 조직하여 전도한 것은 1928년이다. 그 당시 4개월간 107곳에서 5만 여명에게 전도하였고 배부된 전도지가 33,000장이요, 단권복음 발매수가 4,700권이었는데 믿기로 작정한 사람은 99명이 되었다. 그곳에 예배당과 처소가 세워졌다. 어떤 곳에서는 환영하였지만, 어떤 곳에서는 거절하고 식료품을 팔지 않음으로 인해 곤란을 당하기도 했다83)고 보고했다.
포교단 사업과 효과를 총회에 보고한 것은 다음과 같다.
북포교단의 사업은 단원이 방효원 목사, 류세법 목사와 남녀 전도인으로 3월 18일-7월 15일까지 이루어졌다. 인수 전도자는 22,500명, 신도자 67명이었고 신설 예배소가 1곳이 생겼다. 흑입촌 유숙 중에 토비의 습격한다는 위험과 무극회와 관병간에 충돌하는 위험을 느꼈다.
남포교단의 사업은 단원이 리대영목사와 중국인 남녀전도인으로 구성되어 작년 10월 2일로 금년 1월 23일까지와 2월 14일부터 7월 18일까지 인수전도자가 45,165명이었다. 복음책 40부를 팔았으며 전도지를 배부한 것이 39,000장이나 되었다.84)
이러한 순회전도도 한국교회가 시행한 네비우스 선교방법의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포교단을 조직하여 복음을 전함으로 중국 교인들의 신앙을 성장하도록 도와주었고 교회가 스스로 전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4.교육을 통한 선교
중국교회의 교육은 큰 문제 중의 하나였다. 타선교회는 학교를 시작하여 인심을 얻은 후에 교회를 설립하는 편이었는데 한국 선교부는 교회를 설립한 후에 교인의 자녀들을 양성키 위해 학교를 설립하는 것을 보며 중국인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였다.85)
한국 선교부는 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즉 한국 선교부는 지역 가운데 있는 초등학교 수준의 학교들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5년제 성경학교를 세웠다. 그곳에는 16, 17명의 학생이 등록하였다. 그 학교는 수십 년간 계속되었다. 졸업생들은 교회의 영수가 되며 신학교에 입학하기도 하였다.86)
보통교육과 종교교육의 양종(兩種)을 거론하면 1927년까지 全境普通정도의 학교가 12곳이고 학생 총수가 281명이었다. 1928년에 선교회로부터 지급되던 보조금이 끊기면서 경비 곤란으로 폐지된 학교도 많았으나 남은 6개 학교는 전부 자력으로 경영하였다. 당시 중국교회학교는 많은 어려움을 당하였는데 정부에서 반포한 사립학교 규칙중 교회학교와 관계되는 몇 가지는 아래와 같았기에 교회학교에서는 속히 사립학교의 규칙이 완화되기를 희망했다.
1. 학교 내에서 종교의식을 거행치 못할 일
2.성경을 필수과로 편제치 못할 일
3. 학교장이나 이사장의 직은 외국인이 되지 못할 일
4. 其 사립학교 규칙은 아니지마는 각 학교로서는 매 월요일 첫시간을 기 념주로 하여 국민당의 의식을 거행하고 손문씨 遺像에 향하여 最敬禮를 하는 等事이다.87)
그 외에도 도리반, 면려회, 주일학교를 조직하고 운영함으로 교회를 든든히 할 수 있었다. 특히 도리반(사경회라고 할 수 있음)은 성도들에게 큰 유익을 주었다. 도리반은 약1개월씩 기간으로 성경, 음악, 문자 등을 가르쳤다. 한번에 약 30-40명이 입학하였다고 한다. 그 성과는 이러했다.
년도 |
남학교수 |
여학교수 |
남학생수 |
여학생수 |
남 교사 |
여 교사 | |
1915 |
|
|
|
|
|
| |
1916 |
|
|
|
|
|
| |
1917 |
3 |
|
|
|
3 |
| |
1918 |
3 |
|
|
|
|
| |
1919 |
3 |
|
|
|
|
| |
1920 |
9 |
2 |
148 |
28 |
9 |
2 | |
1921 |
11 |
2 |
242 |
17 |
10 |
1 | |
1922 |
9 |
2 |
245 |
44 |
9 |
2 | |
1923 |
15 |
4 |
358 |
77 |
16 |
4 | |
1924 |
11 |
2 |
303 |
55 |
12 |
2 | |
1925 |
10 |
2 |
266 |
49 |
13 |
2 | |
1926 |
11 |
4 |
344 |
91 |
13 |
4 | |
1927 |
8 |
4 |
189 |
92 |
9 |
4 | |
1928 |
8 |
4 |
174 |
68 |
9 |
4 | |
1929 |
7 |
2 |
148 |
33 |
7 |
2 | |
1930 |
4 |
3 |
93 |
67 |
5 |
4 | |
1931 |
3 |
3 |
89 |
50 |
3 |
3 | |
1932 |
4 |
3 |
106 |
44 |
5 |
3 | |
1933 |
5 |
2 |
110 |
59 |
5 |
2 | |
1934 |
5 |
4 |
123 |
67 |
6 |
3 | |
1935 |
3 |
3 |
93 |
60 |
4 |
2 | |
1936 |
3 |
1 |
77 |
30 |
3 |
1 | |
1937 |
|
|
|
|
|
| |
1938 |
1 |
|
25 |
|
1 |
|
"즉묵 도리반과 같이 래양에서도 1932년에 부녀들을 모아 1개월간 도리반을 개(開)하였던 바 성적은 매우 좋았다. 무슨 상식을 얻는 것 뿐 아니라 서로 모여 지내는 중 피차에 받은 은혜가 퍽 많았다."88)
종교교육에는 고등교육을 시행하는 것은 없었다. 신학교육은 화북신학에 의탁했다. 래양에 성경학교 1곳이 있어 10여 년을 계속하여 왔다. 수업생은 매년 16, 7명에 불과했고 1935년까지 졸업생은 56명밖에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지역의 교회는 큰 이익이 되었는데 이 학교의 학생 다수가 자기 교회의 영수로 예배의식 인도, 교회사무 등에 근면하는 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5.교도소, 병원 선교
한국 선교사들은 약소국의 선교사였기에 무시를 당하였다면 누구보다도 많이 당하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 선교사들에게 자랑할 것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한국 선교사들의 자랑은 파송교회의 영적인 부흥이었다.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한국교회 발전 상황, 특수 성적이 신문에 이따금 보도되고 조선을 친히 보고 간 인사들은 각지에서 한국교회의 상황을 들어 자기 교회를 격려하는 공구로 삼는다. 이처럼 한국교회의 일이 널리 알려지는 동시에 조선 선교사들은 많은 귀애를 받는다.89)
반면에 수량 면에서나 질적으로 다른 어느 나라의 선교사업보다 약하였다. 중국은 백 수십 여 종파의 선교사들이 각기 활동하였기에 조선 선교사들은 아무리 보아도 내놓을 것이 없었다. 사도 바울이 약한 것을 자랑하였던 것 같이 조선 선교사들도 약한 것을 고백하기에 숨김이 없었다. 조선인으로 된 선교사, 황색인으로 된 선교사90)였기에 더욱 약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선교의 대상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1918년 기독신보에 보도된 내용을 보면 성탄일에 교우들이 특별 연보하여 복음책과 식료품을 많이 사가지고 감옥에 가서 죄수들에게 나눠주고 전도하였다91)고 한다. 홍승한 목사의 편지에는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성탄축하식을 거행하는 중에 새로 믿기로 작정한 사람이 10여명이 되었고 교우들에게 구제도 하고 걸인에게도 약간의 음식을 먹인 일도 있었다. 오후에는 전도하고 목사와 어학선생은 래양감옥에 들어가서 70여명의 죄수에게 전도하고 복음책을 나눠주며 약간의 음식을 대접함으로 죄수들이 감동되어 믿기로 작정도 하고 또 우리도 성경과 찬미책이 있으면 이 안에서 예배보겠다 하기에 서장과 교섭하고 성경, 찬미책을 주고 왔는데 1개월 동안에 몇 번씩 우리가 들어가서 전도하고자 하오며…"92)
김윤식 의사는 죄수의 치료를 통해 감옥전도를 하기도 하였다. 이는 한국 선교사의 선교 대상이 제한되어 있지 않았음을 보게 하는 것이다. 감옥에 있는 소외되고 고통 당하는 이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일은 마태복음 25장 35절의 말씀처럼 주님께서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는 것과 같은 귀한 일이었던 것이다.
산동 선교에서 의료사업은 복음의 전파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것은 처음부터 자립적이어서 선교사들은 때때로 의학 처방의 목적을 알기 위해 방을 빌려주기만 했다. 1918년 서울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졸업생인 의사 김연식은 중국으로 건너가 래양에 자리를 잡고 그곳의 사역에 중요한 인물이 되었으며, 말씀 전파에 대해 모든 중국인들로부터 호감을 얻었다. 중국인들은 고마움의 표시로 큰 간판을 달도록 비용을 담당하기도 했다. 1923년에 선천의 의사 조견직이 다른 중심지인 정멱에 자리를 잡았다. 1931년에는 안춘호씨도 그곳에 자리를 잡고 우리 선교사들과 충실한 조력관계를 유지하며 사역을 하였는데 이는 전적으로 자립적인 사역이었다.93)
복음은 자비와 박애적인 행위와 연결되어 병든자를 살리며 환난 당하는 자를 위로하는 가운데 선포되었던 것이다. 한국 선교사들이 의사의 필요성을 알고 처음으로 총회에 요청94)한 것은 1915년의 일이었지만 1918년에 가서야 김윤식 의사가 파송되었다. 처음에는 환자가 매일 3-4명에 불과했으나 차차 신용을 얻어 1921년에는 1년 동안 6,000명에 달하였고 수입도 2,000원에 달하였다.95)
한국의 의사들은 자비량 선교사라고 할 수 있다. 당시 한국의 상황도 의료 혜택이 어려웠지만 선교지의 선교사와 협력하여 복음의 진보를 가져오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헌신한 그들의 선교정신은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도 큰 도전이 된다. 한국이 진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해 타문화권 선교지를 향했던 일은 선교사의 사역에 결코 가려질 수 없다.
Ⅴ.산동 선교를 통해 본 한국교회의 21C선교전략
홍콩선교사인 전진휘는 공산치하 핍박 속에서도 중국교회가 보여준 경이적이고 건실한 성장을 보면서 21세기 중국교회가 전세계 복음화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 이런 전망을 했다.
첫째, 중국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것은 가장 큰 미전도종족이 주님께 돌아오는 경우가 되기 때문에 세계 교회의 성장률을 결정할 것이며 둘째, 중국교회의 부흥과 말씀을 통한 그들의 지혜는 한 세대를 관통하고 지내온 그들의 공산주의 낡은 이론에서 벗어나 선진국 국가로 발전하는 데 있어서 사회적인 공헌을 하게 될 것이며 셋째, 중국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 확장 운동은 중국교회를 지켜보고 있는 세계교회들을 향해서 새로운 활력 및 성서가 말하는 참된 교회 조직구조의 모델이 될 것이며 넷째, 중국교회는 세계 교회의 신학과 자기 이해에 주된 공헌을 하게 될 것이다.96)
총회의 창립을 기념으로 시작된 중국 산동성의 타문화권 선교는 한국교회의 미래를 보여주는 불꽃이었다. 오늘 한국은 일제 식민 치하 이후 '제2의 설욕'이라고 할 수 있는 IMF 관리체제하에 있다. 그런 가운데 교회의 환율인상에 따른 선교비의 삭감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일제 시대에 한국교회가 산동성 선교를 감당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럼 산동성 선교를 통해 오늘 우리가 무엇을 발견해야 할 것인가?
A.산동 선교 정책의 장단점
산동 선교는 한국교회 최초의 타문화권 선교였기에 많은 부족함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부족한 면은 산동 선교의 빛에 가리워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제 선교 2세기를 바라보는 한국교회는 분명히 산동 선교를 통한 교훈을 얻고 새(新) 산동 선교시대를 열어야 할 것이다.
산동 선교에는 한국에서 성공을 거둔 네비우스 선교방법이 도입되었다. 자치(自治:Self-Government), 자립(自立: Self- Support), 자전(自傳:Self- Propagation), 즉 3자 정책(三自政策)은 헨리 벤(Henry Venn)의 이론에 근거한 것으로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교회를 운영한다는 것과, 원조 받지 않고 자기 교회를 운영한다는 것과, 그리고 스스로 전도한다97)는 것이 산동성의 중국교회에 도입되었지만 한국에서 적용된 것처럼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하지만, 중국교회의 성장에 유익한 선교방법이 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선교사들을 이명하여 중국교회에 소속하게 함으로써 한국교회는 중국교회와 협력하는 동반자의 입장에서 선교를 했으며, 다른 선교회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갖었다.
무엇보다도 국내적으로도 약하고 어려운 상황에 있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복음을 받은 지 가장 빨리 세계선교를 감당하는 신기록을 수립했다는 사실이다. 오늘 복음을 받아들이는 민족과 족속들에게 한국교회의 선교 역사는 계속 전파되어지고 도전되어 제3세계의 국가들 가운데도 이런 역사가 계속 일어나길 바래본다. 산동선교는 한국교회의 힘이 아닌 주님의 은혜와 깨달음으로 인한 결과일 뿐이다.
하지만 선교의 초기 역사 속에서 한국 선교사들은 많은 혼돈을 겪었다. 아무런 준비없이 선교사를 파송함으로 인해 1913년에 파송한 3명의 선교사들이 사임하고 돌아오는 아픔을 겪기도 했던 것이다. 오늘날도 준비와 훈련이 부족하고 본국 교회와 파송단체의 몰이해로 인해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의 문화인류학적인 이해와 준비 없는 헌신으로 인해 피선교지의 영혼들이 상처입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 선교는 incarnation이 이루어질 때 이루어진다. 동화(同化)되지 않은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가 될 수 없다. 복음의 통로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파송한 교회와 선교단체는 선교사의 필요에 민감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파송한 선교사들의 자녀문제, 안식년, 선교사 계속교육, 퇴임후의 생활의 영역까지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본국은 재정적인 후원과 기도 외에 선교사들의 복지와 고통까지도 함께 함으로써 선교사들이 전심전력하여 선교의 사명을 감당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B.산동 선교가 한국교회에 준 영향
21세기는 서방교회 위주로 계속되어 온 선교가 전통적인 피선교지 교회들의 시대로 바뀌게 된다. 그 중에 한국교회의 책임은 매우 크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교회가 타문화권 선교를 시작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1세기의 세계선교를 담당할 한국교회의 책임이 부과되기 시작했고 한국교회가 세계 선교 역사에 떠오르기 시작한 역사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중국 산동성 선교는 한국이 피선교국에서 선교국으로 바뀌는 계기가 된 시점인 것이다. 나라 잃은 백성의 신분이지만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하나님의 대사로 파송받은 위대한 민족이 된 것이다. 나라 잃은 슬픔을 잊고 역사적으로 임금(君)의 나라요, 유교의 나라인 중국의 산동에 복음을 증거하고 빚을 갚는 민족이 되었다는 사실은 오늘을 사는 우리를 각성케 한다.
한국에 닥친 IMF는 한국교회와 사회를 위축하게 만들고 있다. 실업자 200만 명을 양산하고 길거리에는 노숙자가 추위에 떨고 있는 이 시대에 한국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오늘의 시대는 나라를 잃은 일제하의 우리 민족과 별다를 바가 없다. 문제는 그 가운데 일어난 이 민족의 영적인 부흥과 각성, 열정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1907년 일어난 대부흥운동의 직접적인 결과 중의 하나가 산동 선교였다. 김인수 교수는 대부흥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을 두 가지로 본다. 첫째는 선교사들의 자성하는 성경공부와 길선주 장로의 새벽기도회에서 비롯되었다98)는 것이다. 이 운동은 '말씀공부'와 '기도'가 어울어진 성령의 역사였다. 오늘 한국교회는 산동 선교를 가능케 한 그 밑거름이 대부흥운동이었고, 대부흥운동을 가능케 한 사건이 말씀과 기도에 기인한 성령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살펴야 한다. 말씀으로 돌아가고, 하나님 앞에 자복하며 무릎꿇고 나아갈 때 한국의 미래는 희망이 있다. 일제의 압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총회의 창립을 기해서 전국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던 사실을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IMF에 요동하지 아니하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한국교회를 하나님은 요구하신다.
특히 선교사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자비량 선교사(tent maker), 즉 평신도가 감당해야 한다. 의사의 전문직으로, 교사로 선교사와 협력하며 복음이 온전히 증거되도록 도와야 한다. 한국의 고등교육울 받은 평신도 사역자들이 선교사가 들어갈 수 없는 제3세계와 이슬람 지역에 나가야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 즉, 소명(calling)을 확인하는 것 보다,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처럼 부르는 사람, 부르는 곳이 있을 때 나아가는 헌신과 자원하는 마음이 더욱 중요하다. 현재 그리스도인들은 미복음화된 지역에 잇는 11억의 사람들을 위해 전체 해외선교사와 재정의 1.2%만을 배당하고 있다.99) 1997년 현재 한국에서 파송한 선교사수는 4,600여명에 이르는데, 이들이 12억의 모슬렘과, 5억의 흰두교도와 4억의 중국인, 1억 3천명의 부족들을 향해 재배치되고 계속 파송되어야 한다. 이 사명을 감당하는 중심이 한국임을 재 기억해야 한다.
Ⅵ.결론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큰 사명을 가르쳐주고 있다. 하나는 문화적 사명이요(창1:28), 둘째는 선교적 사명(마28:19-20)인 것이다. 선교는 M-1, M-2, M-3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사도행전의 선교방법을 보면 유대인이 유대인을, 이방인이 이방인을 선교하는 사역으로 진행된다. 즉 자기 민족이 동질의 민족에게 선교하는 M-1, 타민족에게 선교하는 것은 M-2, 현지인으로 하여금 현지인에게 선교하는 것을 M-3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본다면 동시성을 갖는다.
복음은 동에서 서진(西進)하고 있다. 시계 방향으로 복음은 진행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로마로, 로마에서 유럽전역으로 확산되며 아메리카에서 태평양을 건너 한국까지 1900년이 걸리면서 복음이 닿는 곳마다 놀라운 번영과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어 왔던 것이다. 이제 어디로 이 바톤을 넘겨 줄 것인가? 한국의 서쪽인 중국대륙 11억 인구, 그리고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의 인구가 전 세계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사역이 한국에게 있지 아니한가 하는 기대를 가지게 된다.
1913년 총회가 창립되면서부터 타문화권 선교를 시작한 것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이며 한국교회를 사용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본다. 비록 현재의 한국 상황이 IMF라는 장벽이 가로놓여 있어 어렵지만 더 어려운 시대에, 나라 잃은 믿음의 선배들에 의해 이루어진 산동 선교를 통해 21세기 한국 교회는 신(新)산동 선교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이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제2의 산동성'은 어디일까? 가장 비기독교인이 많은 인구 국가인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일본,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나이지리아, 터키, 이란100)이며 10/40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미전도종족일 것이다. 다시금 한국교회의 사명은 무겁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에 이루어진 역사를 오늘에 다시 구현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재응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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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oo-Song GOH, "Western and Asian Portrayals of Robert Jermain Thomas(1839-1866), Pioneer Protestant Missionary to KOREA" (Ph. D. , University of Birmingham, 1995), pp. 89-90
2)『동아대백과사전』, (서울 : 동아출판사, 1997)
3) 방효원, "산동 선교에 대하야", 『게자씨』 제68호, (1937.4.), p.17.
4) 폴 G. 히버트, 채은수 역, 『문화속의 선교』, (서울: 총신대출판부, 1991), p. 67.
5) 『브리태니커』 제 11권, (서울: 브리태니커사, 1993), p.719.
6) 조나단 차오/ 중국어문선교회 편역, 『중국선교핸드북』, (서울: 두란노, 1993), p. 58
7) Ibid., pp. 59-60
8) Ibid., p. 61
9) Ibid., p. 67
10) 이병길, 『중국 선교의 어제와 오늘』, (서울: 개혁주의 신행협회, 1993), p. 114.
11) 『죠션예수교장로회총회 데4회 회록』, 1915, p. 10.
12)헨드릭 크래머, 최정만역, 『기독교선교와 타종교』,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p. 275
13) 쉬더싱, "중국선교(대륙 및 대만)", 『크리스챤 인천』 제13호(1989. 10.), p. 60.
14) 『기독교대백과사전』 제8권, (서울: 기독교문사, 1983), p. 707.
15) 이일영, "중국산동여행기", 『기독신보』 1916. 9. 6.
16) 홍승한, "중국산동성 래양현 선교소식", 『신학지남』 1920. 7, p. 241
17) 조나단 차오, op. cit., p.151
18) 마로덕, "조선예수교장로회 중국산동 선교사업 視察事 ", 『신학지남』제4권3호(1922. 5), p. 123
19) 달레, 『한국천주교회사』上권, p. 619.
20) 『韓國예수敎長老會史記』 上권, (서울: 한국예수교장로회 총회, 1928), pp.182-183
21) S. A. Moffett, The Christians in Korea(New York : Friendship Press, 1962), p.346
22) 곽안련 편집, 『長老敎會史典彙集』,(북장로교회선교회, 1935), p.101
23) 일본 유학생 전도는 1909년 한석진 목사, 1911년 주공삼 목사, 1912년 임종순 장로, 1925년 오기순 목사를 파송하였다.
24) 평양 여전도회는 1898년 2월에 창립되었다.
25) 곽안련 편집, 『長老敎會史典彙集』,(북장로교회선교회, 1935), p.8
26) 『예수교장로회 조선 총회 제2회(1913) 회의록』, 야소교서회, p.25
27) 길진경, 『靈溪吉善宙』, p.243
28) 방효원, "산동 선교에 대하야",『게자씨』 제65호,(1937.1.), pp. 13-16
29) 채은수, 『선교의 이슈들』, (서울: 광야, 1988), p.255
30) 조동진, 『민족과 종교』,(서울:별, 1991), p.323
31) 전택부,『한국교회 발전사』,(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1991), p.193
32) 방효원, "산동 선교에 대하야",『게자씨』제66호, (1937.2.), p. 30
33) 곽현덕(郭顯德; Hunter Corbett) 목사는 제네럴셔먼호의 진상을 규명하도록 급파된 Wachusett호의 통역관으로서 조선에 7일 머무는 동안에 전도문서와 한문성서를 배포하였다.
34) 이윤호, "한국장로교회와 중국 산동 선교", (장로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 1994), p,25.
35) 방지일, "회고록 44", 『한국기독공보』, 1997. 9. 13.
36) 『예수교장로회 조선 총회 제6회(1917) 회의록』, 야소교서회.
37) 방효원, "중화민국 산동래양 선교소식", 『신학지남』 제5권1호(1929. 2.), p.149
38) 『중국 선교회들의 연감』, p.224
39) G. T. Brown, Mission to Korea, p.95
40) 곽안련,『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정책』, 박용규역,(서울:대한기독교서회,1994) , p.212
41) 『조선예수교장로회 데9회 회록』,1920, p.12
42)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5회 회록』, 1936. p.42
43) 최재화, "선교사로 가라는 교섭을 받고", 『기독교보』제92호, (1937. 1. 26.)
44) 방지일, "회고록 32", 『한국기독공보』, 1997. 5. 24. 6면
45) "중화민국 산동女선교사 지원자 모집", 『기독신보』, 1931. 3. 4.
46) "선교사 파송식을 보고", 『게자씨』 제69호,(1937. 5.), p.44
47) 곽안련, "곽안련 선교사 60년 회고록", 『신학지남』제60권 4집, 통권238호
48)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데7회 회록』, 1918, pp.73-77
49) 『총회 회의록』, 1916에 대한 장로교 공의회 번역판, p.57
50) Ibid., p. 38.
51) The Annual Report, Presbyterian Church, North, 1910, p.61
52) 방지일, "회고록 38", 『한국기독공보』 1997. 7. 12. 6면
53) 방효원, 『산동 선교에 대하야』, p.31
54) 『예수교장로회 조선 총회 제1회 회의록』, 야소교서회, 1913, p.921
55)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 뎨5회회록』, 1914, p.67, 71
56) 박상순, 『산동 선교 과거와 현재』, 신학지남, 제17권6호,(1935. 11.), pp.28-29
57)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6회 회록』, 1937, p.51
58) 『중국의 선교사업』, 기독신보, 1922. 1. 25.
59) 『중국선교 후원회 조직』, 기독신보, 1924. 1. 2.
60)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35회 회록』, 1949, p.49
61)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12회 회록』, 1923, p.46
62) 채은수, 『선교학총론』, (서울: 기독지혜사, 1991), p.300
63) 방효원, 『중국 산동 래양 선교소식』, (조선예수교서회, 1920), p.15.
64) 숭의여중을 졸업하고 대구 신명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한 경력이 있다.
김교철, "한국장로교회와 중국선교역사연구", 『중국선교Ⅲ』,(중국연구협회, 1994), p.54
65)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12회회록』, 1923, p.85
66)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13회회록』, 1925, p.78
67) 허버트 케인, 백인숙 역, 『선교사의 생활과 사역』, (서울 : 두란노서원, 1986), pp. 295-299.
68)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데7회 회록』, 1918, pp.73-77
69)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 제25회회록』, 1936, p. 27
70)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19회회록』, 1930, p.69.
71)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14회회록』, 1925, 부록 p. 9.
72) 김양선, "한국선교의 회고와 전망", 『기독교사상』,1959. 7., p.10
73) 기독교 서적을 판매하는 사람
74) 곽안련,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정책』, p. 25.
75) 곽안련,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정책』, p.213
76)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19회회록』, 1930, p. 69
77)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3회회록』, 1934, p. 112
78) 방지일, "회고록 41", 『한국기독공보』, 1997. 8. 16.
79) 방지일, "회고록 48", 『한국기독공보』 1997. 11. 8.
80) 홍승한, "산동성 태양 선교소식", 『신학지남』 7월호(1920), 제3권, 2집, pp. 242-243.
81) 박상순, "산동 선교의 과거와 현재", 『신학지남』11월호(1935), 제17권, 6집, p.27
82) 채은수, op. cit., p.304
83)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제17회회록』, 1928, p.52.
84)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제18회회록』, 1929, p.74.
85) 마로덕, "조선예수교 장로교회 중국선교사업시찰사항",『신학지남』,1922. 5., p.130
86) Ibid., p.3.
87) Ibid., p.32.
88) Ibid., p.33.
89) 박상순, "산동 선교의 현재와 장래(속)",『신학지남』 제17권, 6집(1936. 5.), p.46.
90) Ibid., p.45.
91) "중화민국 산동성래양성 전도형편", 『기독신보』, 1918. 9. 4.
92) "홍승한 목사의 편지", 『기독신보』, 1919. 2. 5.
93) 곽안련,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정책』, p.297
94)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데4회회록』, 1915, p.34.
95) "산동 선교 3년간 조선선교회 의사 김윤식의 감사담", 『기독신보』, 1922. 1. 11.
96) 전진휘, "중국의 이해와 영적 필요(3), 『어린이선교』, 1994, p.75
97) Stephen Neil,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Penguin Books, Ltd., 1986), p. 221.
98)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서울 :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7), P. 247.
99) B. L. Myers, 『The New Context of World Mission』,(California : MARC, 1996), p. 48.
100) B. L. Myers, 『The New Context of World Mission』, p. 33.
101) 신 9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