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새날입니다.
1주차는 책 소개와 ‘01 집단 어리석음의 실체’
2주차 ‘‘02 ~ 04’의 주제
3주차 ‘‘05 ~ 09’의 주제를 같이 읽어 보았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 주차인 이번 주는 ‘10 ~ 12’의 주제를 살펴보겠습니다.
〈 읽고, 정리하기 〉
10 바벨탑을 쌓는 의사소통
메타 커뮤니케이션은 ‘커뮤니케이션을 내려다보는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자신의 본래 동기가 무엇인지를 솔직하게 이야기할 때 메타 커뮤니케이션을 합니다.
인간 혹은 당파는 합의 정신을 중시하며 신뢰감을 키우는 쪽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입장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그 차이를 조금씩 좁혀나갈 때 건강한 관계를 꾸릴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동기를 진솔하게 털어놓으며, 이해관계, 우선순위, 목표, 능력, 개인적 관심사 등 모두 놓고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자신의 세계관과 시각을 설명해가며 견해 차이를 좁혀나가면 공감 능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일지라도 이런 상호 이해 과정을 거치면 바벨탑에서도 얼마든지 공존하며 함께 소통하고 일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메사 커뮤니케이션은 오로지 자신의 생각에만 사로잡힌, 즉 집착이라는 감옥에 갇힌 커뮤니케이션입니다. 메사 커뮤니케이션은 두 명 이상의 대화 참여자 혹은 당파 사이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양쪽은 각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관점으로만 소통합니다. 그로 인해 진정한 소통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모든 대화에 갈등이 촉발됩니다. 싸움은 다시 싸움을 낳고 우격다짐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이에 비해 메타 커뮤니케이션은 서로에게 이야기할 기회를 충분히 주고 항상 모두가 동의하는 합의를 도출할 수 있게 해줍니다. 메타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면 단 한 번의 회의로도 충분히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으며 때마다 벌어지는 다툼도 막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메사 커뮤니케이션을 하게 되면 모든 개별 사안에서 각자가 자신의 이해관계만 따지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사실 메사 커뮤니케이션이 그때그때 임시방편으로 찾는 해결책은 메타 커뮤니케이션이 이끌어내는 합의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메사 커뮤니케이션은 여러 차례의 회의로 시간을 낭비하게 하고 관련자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듭니다. 메타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가진 사람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아예 싸움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조직을 가장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것은 메사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이런 잘못된 소통 방식이야말로 집단 어리석음을 만드는 주범입니다. 이에 대해 기업에서 하는 전략회의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전략회의는 본래 전체 경영진이 일상 업무에서 벗어나 서로 대화를 나누기 위해 고안된 것입니다. 서로 거리를 좁히고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며 메타 커뮤니케이션을 이룰 수 있다면 이런 회의를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경영진이 모두 모여 전체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적극 권장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요? 전략회의 당일 오전 내내 간부들은 목표 대비 실적을 놓고 매번 똑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사장이 원하는 초과 실적을 반드시 달성하자는 말만 지루하게 반복합니다. 정말이지 실제 업무 현장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논리이자 압박입니다.
그런 회의가 항상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문제는 심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각각의 부서를 책임지고 있는 중간 간부들이 좀처럼 자신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 갇혀버리고 맙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메사’로 남습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실적만 따질 것이 아니라 흉금을 털어놓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눠가며 ‘메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왜 매번 당장 눈앞에 결과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면서 회의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까요? 적어도 한 달 전에는 토론 과제를 공유한 후에 회의를 한다면 생산적인 토론을 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실적 얘기만 하는 회의는 그저 시간 낭비에 불과합니다. 전체를 위한 메타 커뮤니케이션의 기회는 그렇게 물거품이 됩니다. “해내야 한다! 할 수 있다! 하자!” 이런 구호 이상의 것은 결코 나오지 않습니다. 전체는 전혀 정리되지 않습니다. 함께 힘을 모아 목표를 이루자는 공동 의지 역시 전혀 생겨나지 않습니다. 회의를 하면서 메타 커뮤니케이션을 염두에 두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최고 경영진은 그저 중간 간부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그들을 쥐어짤 뿐입니다. 결국 간부 역시 직원을 쥐어짜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왜 메타 커뮤니케이션의 필요성을 알아차리지 못할까요? 집단 어리석음이 철저하게 ‘메사’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11 집단 어리석음은 모두를 미치게 한다
우리는 파놉티콘에서 끊임없이 감시당하며, 자극받고 평가받습니다. 모두가 기회주의에 빠져 최대 실적을 내기 위해 애씁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집단 어리석음이라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인간은 적응하는 존재입니다. 지성을 포기하고 적당한 신경증을 골라 그럭저럭 견디는 식으로 고통을 삭일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어떤 신경증이 견딜 만한 것인지는 개인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결국 집단 어리석음은 모두를 미치게 만듭니다. 어리석음은 더 깊게 뿌리를 내려 집단은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공격적인 스트리트 스마트가 되거나 강박에 사로잡힌 채 자기도취에 빠지는 나르시시스트가 됩니다.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한 노예처럼 무기력하게 우울증을 앓습니다.
그렇게 집단은 어리석음을 키워 그 폐해를 고스란히 개인에게 떠넘깁니다. 개인은 집단처럼 어리석게 변하지는 않을지라도 신경증에 걸려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기회주의자로 전락하고 맙니다. 달성할 수 없는 목표에 짓눌려 전후좌우를 살피고 맥락을 파악할 감각을 잃고 맹목적으로 행동합니다. 집단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다른 쪽의 이해관계는 완전히 무시해버립니다.
마침내 전체는 자질구레한 싸움으로 얼룩져 엉망진창으로 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복잡성’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집단 어리석음은 항상 이런 복잡성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웁니다. 복잡성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집단 지성은 이제 찾아보기 힘든 예외가 되었습니다.
12 함께 스마트해질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모두 어리석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집단 어리석음은 경제 지상주의라는 명분으로 인생의 중요한 터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자연 상태가 절대 아닙니다. 어리석음이 비현실적인 목표를 강제하며 인간을 무의미하게 다그치고 독촉하는 바람에 빚어진 상황일 뿐입니다.
오늘날의 정치인은 압력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오로지 유권자의 표심만을 쫓아다닙니다. 경영자는 실적에만, 학생은 성적에만 목을 맵니다. 이런 태도는 권력이나 성공을 향한 탐욕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인위적으로 조작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즉 무한 경쟁이 진짜 원인입니다.
우리는 경쟁만이 살 길이라는 착각에 빠져, 허황된 목표를 세우고 배움이 아닌 시험공부에만 열중하며, 숫자로 ‘객관적인 실적 등급’을 매기고 그 점수로 인간을 속단했습니다. 스트레스만 가득한 무한 경쟁은 이렇게 인위적인 싸움을 강제합니다.
사람들은 이 싸움이 못마땅하면서도 낙오가 두려워 어쩔 수 없이 경쟁에 동참합니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 점수를 구걸할 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집단 어리석음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집단 어리석음은 즐거웠던 우리의 일을 생존 경쟁으로 내몰았습니다. 반면, 집단 지성은 공동의 목표를 추구함으로써 생겨납니다. 그런 팀은 불타는 의지를 자랑합니다. 의지를 불태우며 추진하는 일과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만 하는 의무는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선의의 경쟁’과 ‘무한 경쟁’으로 둘의 차이를 잘 나타낼 수 있습니다.
선의의 경쟁은 더 발전하기 위해 자신의 실력을 측정하고, 서로를 북돋워가며 아름다운 승부를 펼치며 퍼스트클래스의 갈망을 담아냅니다. 게다가 우리의 심장을 따뜻하게 채웁니다.
반면에 무한 경쟁에서는 무조건 이기려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으며 현재 상황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지금 당장, 이번 분기만큼은 꼭 목표 실적을 달성해야만 합니다. 방법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렇게해서 상대방을 꺾고 우승컵을 차지해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반드시 선의의 경쟁만을 해야 하며, 무한 경쟁은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양쪽 모두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여기까지 되짚다 보면 선의의 경쟁이 점점 사라져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최고를 향한 갈망도 점차 증발하고 말았습니다. 곧 ‘최고’라는 것도 사라질 것입니다. 무한 경쟁은 오로지 이기려고만 합니다. “승리면 충분해, 그거면 돼!” 이런 의미에서 선의의 경쟁이 사라지는 것은 그만큼 집단 어리석음이 커졌다는 방증입니다. 하지만 뒤집어 이야기하면, 선의의 경쟁이 다시 싹을 틔울 수 있다는 희망의 조짐이기도 합니다. 선의의 경쟁이 되살아나면 우리도 함께 스마트해질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집단 어리석음이라는 애컬로프의 소용돌이에 완전히 갇혀버렸습니다. 집단 어리석음에서 집단 지성으로 방향을 돌리는 일은 정말이지 어렵고 힘든 과제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의회에서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우리는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고, 또 무사히 지구까지 귀환시키는 목표를 위해 헌신할 것입니다. 다른 어떠한 우주 탐사 프로젝트도 인류에게 이보다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수 없습니다. 이는 광활한 우주를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을 위해 온갖 어려움과 막대한 비용을 감수하겠습니다.”
이런 식의 구체적이고 명료한 발언은 집단 어리석음을 퇴치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입만 열었다 하면 ‘클라우드 컴퓨팅’, ‘소셜미디어’, ‘빅 데이터’, ‘스마트 시티’, ‘산업 4.0’, ‘사이버 피지컬 시스템’, ‘사물 인터넷’, ‘모든 것의 인터넷’, ‘지식사회’ 등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아리송한 말만 합니다. 모두 구체적인 것을 떠올리기 어렵게 하는 껍데기 같은 말입니다. 반면 “십 년 뒤에 우리는 달에 착륙할 겁니다!”는 얼마나 선명한가요!
새로운 도전을 향해 나아갈 때 인간은 함께 똑똑해집니다. 성공 비결은 집단 지성입니다. 이 집단 지성은 회의와 기회주의에 끄떡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집단의 유능함을 보며 경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일을 통해 생산적인 변화를 일으키려는 의지를 가진 직원을 상상해 보세요! 그저 유토피아적인 상상에 불과할까요?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일이라면 신이 나서 합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하고, 잘하려 하고,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배우려 합니다. 그럼에도 집단 어리석음은 어느 순간 아이를 집어삼키려 듭니다. 우리는 이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해 미뤄야만, 아니 막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똑똑해질 수 있습니다. 바로 지금, 그리고 미래에도 이런 노력이 끊이지 않아야 합니다.
더 많은 집단 지성을 회복하는 일은 분명 가능합니다. 다만 그 길이 멀고 험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집단 어리석음이 만들어내는 소용돌이를 저지할 방법을 하루 빨리 찾아야만 합니다.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모두의 응원을 받아 용감하게 출발할 수 있는 비전이 필요합니다. 함께 지혜를 모아 비전을 찾아야 합니다!
〈 새날의 생각 나누기 〉
마지막 주차인 이번 주는 의사소통, 집단 어리석음과 그것을 넘어선 집단 지성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이 중에 저는 저자가 집단 어리석음의 해법으로 제시한 ‘집단 지성’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뉴욕 타임스〉, 〈월스트리트 저널〉의 저명한 경영 컬럼니스트인 제임스 서로위키가 저술한 책, 『대중의 지혜』에 있는 적당한 사례를 소개합니다(이하 출처1 참조).
영국의 인류학자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 1822년 ~ 1911년)은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자질을 갖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그 자질을 찾아내는 일에 평생 매달렸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자질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좋은 교육을 받은 선택된 사람들이 권력과 통제력을 쥐어야 사회가 건강하고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그는 매년 열리는 영국 서부의 가축·가금류 품평회장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곳 전시장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소의 무게를 알아맞추는 대회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소가 '도살되어 손질된' 상태의 무게를 추측하는 게임이었습니다. 참가한 사람들은 한 장에 6펜스씩 하는 티켓을 사서 이름과 주소, 추정치를 적어냈습니다. 그 중에 가장 근접한 수치를 적어낸 사람이 상금을 타게 되어 있었습니다. 내기에 참가한 사람들은 800명에 달했습니다. 참가자들의 직업과 지식 수준은 천차만별이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푸줏간 주인이거나 농부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가축 무게를 판단하는 데는 어느 정도 전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는 소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내기가 끝났을 때 그는 진행자에게 티켓을 전부 넘겨받아 모든 추정치의 평균값을 계산했습니다. 그 수는 집단 전체의 지혜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골튼은 사람들이 써 낸 추정치의 평균값이 실제 값과 다를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일부 현명한 사람과 보통 사람, 우둔한 사람들을 섞어놓았으니 그 집단은 반드시 잘못된 답을 내놓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빗나간 것은 골든의 생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소가 도살되고 손질된 상태에서 1197파운드가 될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실제로 소의 무게를 측정하자 1198파운드로 나타났습니다. 아무 기준도 없이 모인 군중의 판단이 거의 완벽했던 것입니다.
사실 골튼은 ‘소 무게 맞추기 게임’을 민주주의와 연관시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기 참가자들의 평균 추정치가 소의 무게와 거의 같다면 유권자들은 정치 문제에 대해 투표할 때도 올바른 판단을 내릴 것이다." 알다시피 민주주의체제에서는 능력과 관심사가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똑같이 한 표씩 행사합니다. 그래서 그는 '평균 유권자들'의 무능력함을 밝혀내고 싶어했고, ‘소 무게 맞추기 게임’을 실험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의 기대와는 반대로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후에 그는 "그 결과를 보면 민주주의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신뢰할 만한 구석이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프랜시스 골튼의 경험에는 단순하지만 분명한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집단은 놀랄 만큼 똑똑하며, 때로는 집단 가운데 가장 똑똑한 사람 보다 더 현명한 판단을 내립니다. 따라서 특별히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집단을 지배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심지어 구성원 대부분이 특별히 박식하거나 합리적이지 않더라도 집단적으로는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권자로서든 투자자나 소비자로서든 혹은 경영자로서든 소수 엘리트의 지식이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전문가만 찾으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엘리트는 정답을 갖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보통사람들이 모여서 경마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놀라운 일을 해낼 때조차 우리는 대중이 아닌 일부 현명한 사람들의 공으로 돌립니다. 흔히들 "전문가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위 전문가 말만 듣고 행동하면 엉뚱한 데 비용을 낭비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천재인지 찾아다니기보다는 대중에게 답을 물어 보는 것이 현명합니다. 물론 대중이란 개념에는 천재들도 포함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답은 천재가 아닌 대중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 기업의 사례도 알아보겠습니다. 자라ZARA는 스페인에 본고장을 둔 전세계서 가장 큰 패션 브랜드 중 하나입니다. 자라는 다품종 소량생산, 생산까지의 짧은 시간, 상대적으로 낮은 품질, 빠른 회전율 등이 특징으로 제품 기획에서 생산까지 평균 2주 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는 의류 판매업에서는 전례가 없던 일입니다. 보통 소비자들이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을 신속하게 반영하기 어렵기 때문에 6개월 내지 9개월 전에 미래 패션 동향을 예측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잘 나가는 의류회사라도 산더미처럼 쌓인 재고 물품을 '땡처리'로 할인매장에 넘기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자라가 들고 나온 전략은 이렇게 비효율적인 시스템을 완전히 새롭게 뜯어 고치자는 것이었습니다. 자라는 계절에 맞춰 상품을 한꺼번에 배송하는 대신 전 세계 400개 매장에 주 2회 배송하는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매년 새 디자인을 2~300개씩 내놓던 수준을 넘어 2만 가지로 늘렸습니다. 최대한 재고를 줄여서 할인 판매하는 일이 없도록 반응이 좋지 않은 디자인은 바로 매장에서 치워버렸습니다.
자라의 매장 관리자들은 모두 스페인 본사에 있는 디자인실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작은 이동형 단말기를 지급받았습니다. 그래서 고객들이 어떤 옷을 사는지, 어떤 옷을 싫어하는지, 어떤 디자인을 찾는데 없다든지 하는 사항을 매일 보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새롭게 디자인한 옷이 매장에 전시되기까지 10~15일 정도밖에 걸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말만 하면 곧바로 자라 매장에 그 옷이 전시되기 시작했습니다. 속도, 디자인, 가격 면에서 3대 혁신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자라가 이렇게 신속한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은 초기 단계부터 속도와 유연성을 강조한 덕분입니다. 다른 의류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자라도 90%는 수입 원단을 씁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다른 회사들이 아시아나 중남미의 하청 회사에 생산을 맡기는 데 반해 자라는 거의 대부분 직접 생산한다는 점입니다. 고도로 자동화된 시스템을 갖춘 스페인의 14개 공장에서는 로봇이 24시간 본뜨기, 재단, 염색까지 다 알아서 처리합니다. 결과적으로 무엇을 생산하고 무엇을 생산하지 않아야 할지 통제하는 일이 한결 손쉬워진 것입니다. 신상품 바지를 1만 장씩 생산해 놓고 팔리기만 기다리는 도박을 벌이느니 처음에 수백 개 정도만 생산해서 고객들의 반응을 살핍니다. 매장에서 반응이 좋은 것 같으면 공장에서 철야 작업을 해서라도 당장 다음날이면 추가분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독립 수공업자처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었고, 매장들과도 일방적인 수요-공급 관계가 아닌 동반자 관계를 맺게 되면서 직접 관리할 수 있는 부분도 늘어난 것입니다.
자라의 강점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고객들의 변덕스러운 수요를 예측하고 그에 따라 조정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소비자들은 자라 매장에 가면 언제든 내가 찾는 옷을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르게 설명한다면 자라가 소비자들의 행동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조정하려고 노력한 셈입니다. 둘째, 수만 명에 달하는 직원들의 행동과 판단을 하나로 잘 조화시켜 "고객이 원하는 옷을 만들어 판다"는 단 한 가지 목표를 놓고 매진하게 한 것입니다.
정리하면, 자라는 고객의 행동을 직접 통제할 수 없는데도 고객의 행동에 맞게 판매를 조정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런 조정 기능은 고객의 니즈를 수렴하여 옷을 만드는 과정에 반영하고 판매에 연결시키는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토대는 고객의 반응과 이를 조화시키려는 직원들의 노력이 함께한 대중의 지혜가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 버나드 바루크(Bernard Baruch, 1870년 ~ 1965년)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개인은 누구든 현명하고 합리적이다. 그러나 집단의 일원이 되면 바로 바보가 된다." 이 책에서 말하는 바와 일맥상통한 말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대중의 지혜를 모아 저자의 주장처럼 집단 지성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 책 닫기 〉
지금까지의 내용들을 되짚어보면 간단히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갈수록 복잡해지는 업무에 관한 것입니다. 글로벌 사회가 되면서 기업의 규모 또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습니다. 이로 인해 조직과 일이 세분화되면서 단위 조직 또는 각자의 일 속에 갇혀 이제는 전체의 모습을 알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각 개인은 자신이 맡은 업무를 훌륭하게 해낼 수 있을 만큼 똑똑함에도 각자의 성과가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원인은 복잡함에 있습니다. 이 복잡함의 해결 방법은 ①복잡함을 확 줄여 ‘평범하게 만들’거나 ‘수준을 끌어내리’거나 ‘우둔하게 하는’ 것과 ②복잡함을 간단히 도식화한 이미지로 누구나 한눈에 이해할 수 있게 ‘천재적으로 단순화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후자를 기준으로 단순화해야합니다.
두 번째는 전체가 아닌 부분에만 집착하는 것입니다. 기업은 대개 인사, 법무, 연구 개발, 생산, 판매 영업 부서 등으로 구성됩니다. 각 부서는 맹인처럼 회사 전체를 둘러싸고 손을 더듬거릴 뿐입니다. 그저 자신의 부서에서 보고 느끼는 것으로 전체를 희미하게 그릴 뿐입니다. 그러니 모두가 전체를 보지 못하고 각자의 관점만 고집하며 싸우며 서로 협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탁월한 기업은 항상 “무엇이 코끼리인가? 더 크고 더 빠른 코끼리란 무엇일까? 그런 코끼리는 대체 어떤 모습일까?”하는 질문을 놓고 거듭 토론을 벌입니다. 만약 모두가 거대한 전체를 바라본다면, 공동 접근이 가능할 것이고 그러면 함께 머리를 맞대어 전체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세 번째는 집단의 어리석음에서 기인한 죽음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비전을 갖고 집단 지성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업이 자신의 가치를 끌어올리려는 목적만 가지고 기회주의에 사로잡히게 되면, 모두 이 흐름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장기적으로 볼 때 함께 죽는 길입니다. 기회주의에 빠진 기업은 소비자로부터 가능한 모든 것을 쥐어짜내려 합니다. 그러면 소비자도 이를 눈치채고 빠르게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반응합니다. 한때 높은 신뢰도를 자랑했던 관계는 냉철한 계산이 지배하는 적대적인 관계로 변합니다. 그래서 모름지기 기업이라면 어떤 상품을 어떤 고객에게 판매하고자 하는지, 또는 어떤 서비스를 누구에게 제공하고자 하는지 구체적인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명확한 비전이 있어야 고객이 만족하며, 기업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논리는 가능한 한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사실을 부차적인 문제로 간주합니다. 결론적으로 집단의 어리석음은 우리 대다수가 계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버리고 다시금 집단 지성의 의미를 회복할 때에만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런 집단 지성은 공동의 목표를 추구함으로써 생겨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다음의 문장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모두의 응원을 받아 용감하게 출발할 수 있는 비전이 필요하다. 함께 지혜를 모아 비전을 찾자.
이때의 비전은 “우리 기업의 유일한 목표는 매년 수익률을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올해의 수익 증가율을 12%로 잡았습니다.” 등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빌게이츠의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컴퓨터 운영체제를 만들어 사람들이 컴퓨터를 완전한 멀티미디어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십 년 뒤 우리는 달에 착륙할 겁니다", 독일 교통부 장관이었던 게오르크 레버의 "독일 국민 누구도 아우토반 진입로에서 20km 이상 떨어져 살게 하지 않겠습니다" 등과 같은 선명하고 구체적인 비전입니다. 마치 머릿속에 하나의 그림이 그려지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이렇게 구성원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가치가 있다면 모두가 공통의 자부심을 갖고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다음 주에는 새로운 책, 사이먼 시넥 지음의 『스타트 위드 와이(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로 함께 하겠습니다.
〈 참고 도서 〉
O 출처1: 『대중의 지혜』, 제임스 서로위키 지음, 홍대운ㆍ이창근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출판, 2005.01.05 출간, 358 쪽, 대중의 지혜 - 교보문고
〈 소통과 성장의 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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