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나게 하는 열정은 무엇일까?
인생의 세 가지 열정 :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는 자문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추구하는 욕망과 체험의 실체는 환희인가? 혹은 고통인가?' 사람들은 행복하기를 바란다. 단 한번 뿐인 인생에서 행복한 족적을 남기기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삶이란 ,날줄과 씨줄처럼 교차하는 행복과 불행 그리고 욕망과 후회의 되풀이 과정임을 체험하게 된다. 사는 동안 줄곧 행복하기는 거의 불가능다. 행복 뒤에는 반드시 슬프거나 불행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또 한 번 얻어진 행복감은 계속 유지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가지 행복에만 만족하지 않고 ,곧, 새로운 행복을 찾아 나서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끊임 없이 새로운 행복을 원하는 인간의 욕망은 발전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최선의 삶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과거 수천 년간 인간의 지혜, 지식, 철학은 이 명제에 천착했다. 그럼에도, 선현들의 노력으로 얻어진 금과옥조의 가르침들을 가슴으로 이해하고, 실천 가능할 무렵이면 이미 인생의 황혼과 함께 그 의미가 퇴색되고 만다. 그리고 그 다음 세대 역시 같은 고뇌와 깨달음의 반복과정을 겪게 된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열정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열정은 삶의 에너지이며 생명을 태우는 불꽃이기 대문이다. 열정 없는 삶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어떠한 열정을 선택하는가에 따라서 한 사람의 인생 길이 바뀌게 되고 ,행복하려면 반드시 열정이 필요하다. 또한, 열정은 인생 행로와 함께 변한다. 대체로 젊을 때는 짝짓기를 위한 열정, 중년에는 출세, 돈, 인정욕구가 지배하기 쉽다.
일반적으로 행복이란 곧,출세, 돈, 좋은 직장, 완벽한 배우자. 훌륭한 아파트 등의 소유를 말한다. 그런데, 성공한 사람들은 많지만 그들은, 충만감 대신 불안감을 호소하고 삶의 목적을 잃고 표류하는 경우가 많다. 세속적인 성공의 달성이 꼭, 행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일부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이, 인생(삶)의 의미를 느낄 때 행복감 내지 흔들림 없는 삶이 가능해 진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를 느끼게하고, 살맛나게 하는 열정은 무엇일까?
1. 사랑
젊은 날의 열정적인 사랑보다 더 크고 강렬한 쾌락은 없다. 그보다 더 광(狂)적인 것도 .. 인간의 원초적 감정과 의지의 발로는 원색적 행복을 선사한다. 사랑이나 술에 의지하는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삶을 '디오니소스적'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에게 디오니소스적인 삶의 요소는 가끔 몰입이나 망각을 통해 창조력 ,예술, 자유정신을 고양시킨다.
나이가 들면서 젊은 시절의 맹목적인 열정은 이성으로 대치되고 이성은 '선량하고 부드러운 새로운 정열'을 자각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일이 곧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진리의 발견이다. 새로운 정열은 이성 간을 넘어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게 되며 용서,베풂, 봉사 ,배려, 온유의 형태로 변주되고, 타인과의 교감, 친밀한 관계, 우정 등, 성숙된 사랑은 행복의 키워드가 된다
2 지식
인간이 다른 생물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생물학적인 생존을 추구하는 것 외에 정신적인 사유를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지식의 나무는 생명의 나무를 감싸고 있다'. 지식은 인간을 가치 있게 만든다. 지식은 자연과 사회의 운행법칙과, 자신의 우주적 좌표와 존재 이유 ,타인과의 관계망 형성에 대한 이해를 통해 자존감을 갖게 해 주며 의미 있는 삶의 방법을 터득하게 해 준다. 앎은 곧, 생의 희열이다. 젊은 날, 지식에 대한 열정은 점차, 지혜와 관용을 거쳐, 궁극적으로는 무경계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인생의 가치는 공부를 통해 얻어진다. 지적인 삶은 '아폴로적'이라고 하며 완벽하고 이성적인 특징을 가지며 문명, 과학, 문화, 제도의 발전과 관련이 깊다.
3. 초월성
인간은 의식 속에, 항상 유한성(죽음)에 대한 불안감이 내재해 있다. 이를 잠시나마 극복하기 위해서는 초월적이고 탈아적인 경험이 필요하다. 행복에 관한 TED 강연으로 유명해진 미국의 심리학자 Emily Esfahani Smith는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잠시,복잡한 일상의 현실과 시 공간을 벗어 나는 일이다. 교회나 성당, 혹은 위대한 자연과 접했을 때도 현실 밖의 높은 차원에 연결된 자신을 발견하며, 자기 중심적 사고를 벗어나 ,겸손함과 타인에 대한 관심이 고양된다.
사람들은 예술, 문학같은 창조적인 작품 감상을 통해서 높은 차원의 위안을 느낀다. 반드시, 전문가일 필요는 없다. 보통 사람이라도, 예술 감상, 글 쓰기, 그림 그리기, 노래, 춤, 스포츠 등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 세계를 표출하는 동안, 불안으로 부터 잠시 해방될 수 있다. 즉, 초월적 자유의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25세에 요절한 영국 낭만주의 대표시인 시인 존 키츠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 것은 글쓰기, 마법같은 천상의 사랑(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지만..) 그리고 큰 명성에 대한 욕망과 아쉬움 때문이었다. 그는 자연 앞에 홀로 서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죽음 전에는 결코 얻을 수 없음을 알고 절망 한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는 그것들이 모두 덧없음을 깨달았다. 그가 죽기 전 불과 몇년 전 일이다.
러셀은 그의 자서전 서문에서 자신의 인생을 지배한 세 가지 열정을 털어놓았는데,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그리고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그것이었다. 사랑에 탐닉한 것은 그 엄청난 황홀감과 함께 차거운 죽음의 심연으로 빠져드는 듯한 지독한 외로움을 덜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랑을 통해 천국의 예시적, 환영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사랑만큼이나 빠져들었던 것은 지식에 대한 열망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알고 싶었고, 하늘의 별이 왜 반짝이는지 궁금했으며,세상의 변화를 지배하는 피타고라스의 수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귀착점은 타인에 대한 관심이었다.
공자님 역시 學而 학이 편에서 지식과 고양된 사랑(우정)을 무엇보다도 강조 하였다.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하랴'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랴'
다만, 공자는 남녀 간의 열정적 사랑은 언급 안하고 대신 성숙된 사랑(우정, 친교)만을 강조하였다. 또한, 부와 명예는 강조하지 않았다.
공자님은 또한 초월적 자유 공간을 언급한다. '詩에서 일어나고 禮에서 서며 樂에서 완성한다.' 그는 위의 문장에서, 시를 읽으며 감흥을 일으키는 것이 교양의 첫걸음이며 인간의 품격은 조화롭게 절제된 즐거움의 경지에 다다를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말하고 있다. 공자님이야말로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열정을 다 열거한 셈이다.*
인간은 인생 후반부로 육신의 쇠퇴가 진행될수록, 젊었을 적에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열정과 가치는 점점 사라지고 삶에 대한 회의와 외로움이 커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사람은 나이에 상관없이 열정을 놓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것의 배움과 관용, 봉사와과 같은 타인에 대한 관심이나 영성, 예술 같은 초월적 경험을 지향하는 활동들이 바람직하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지만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