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류(申瀏, 1619년~1680년)
조선의 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평산이고 현재의 경상북도 칠곡군 지역에서 양반으로 태어났으며, 1645년에 무과에 급제했다. 1654년에 함경북도 혜산의 첨사로 임명되었다. 1658년, 200여 명의 함경북도 출신 조선군을 이끌고 청나라 병사들과 함께 예로페이 하바로프가 지휘하는 러시아군의 침략을 저지했다.
신류 사당.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남계리 소재.
1658년 2차 나선 정벌에 참전한 신류 장군의 조총부대는 흑룡강에서 러시아군을 물리쳤다.
이후 러시아군은 청·러 국경 지대인 흑룡강을 넘지 못했다.
출병 84일 만에 개선한 신류 장군은 나선 정벌을 일기 형식인 『북정일기』로 남겼다.
(『조선 왕을 말하다 2』, 이덕일 지음, 역사의아침,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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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싸움
1658년 6월 10일 아침, 남자*는 적들과 처음으로 마주쳤다. 강 한가운데 닻을 내리고 있던 적들은 자신들보다 몇 배는 많은 선단의 출현에 놀라 급히 돛대를 세우고 후퇴했다. 어렵게 만난 적들이었다. 그냥 보내어서는 안 되었다. 청과 조선의 연합군은 그들을 턱 밑까지 추격한 후 대포를 쏘았다. 생존이 걸린 문제였으니 적들도 그냥 물러나지는 않았다. 검은 강은 이내 대포의 향연장으로 바뀌었다. 대포 공격은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만큼 강한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모호한 포격전의 와중에서 빛을 발한 것은 조선인 포수들이었다. 포수들은 코앞에서 창을 꽂는 듯한 위력적이고 정확한 사격 솜씨를 발휘해 적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사수들의 지원까지 이어지자 판세가 빠르게 결정됐다. 적들은 우왕좌왕했다. 일부는 배 안으로 숨어들었고, 일부는 배에서 뛰어내려 가까운 숲으로 몸을 숨겼다.
가까이 있는 적선을 병사들이 갈고리로 끌어당겼다. 제일 먼저 배 위로 올라간 이들은 포수였다. 포수들이 배를 불태우려는데 청의 대장 사이호달의 명령이 떨어졌다. 배를 손상시키지 말라는 것이었다. 남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승부가 기울었다고는 하지만 끝난 것은 아니었다. 기회가 왔을 때 완벽하게 적을 제압하는 것은 병법의 기본이었다. 사이호달은 병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대장은 남자가 아니라 사이호달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명령도 명령이었다. 남자는 조선인 포수들에게 다시 배로 돌아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적들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포수들이 허둥대며 건너오는 동안 배 안의 적들과 숲속의 적들이 반격을 가했다. 화공을 생각해 지나치게 근접해 있던 것이 문제였다. 거리가 가까우니 적들의 보잘것없는 사격 실력도 커다란 위협으로 작용했다. 조선인 포수들이 잇따라 쓰러졌다. 사이호달은 청의 병사들과 사공들까지 피해를 입자 비로소 화공을 지시했다. 불화살이 공중을 빈틈없이 채웠다. 적의 배 일곱 척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조선인 사수와 포수 들이 적의 배 한 척을 골라 줄줄이 올라탔다. 남자가 탄 배는 조선인 병사들을 태운 채 상류로 향하는 적의 배를 앞장서서 추격했다. 도망갈 길이 없음을 깨달은 적들은 배를 버리고 숲속으로 숨어들었다. 탈출하지 못한 적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밤이 깊었다. 가랑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어둠과 함께 싸움도 끝이 났다. 살아남은 적들은 배 한 척에 함께 타고 도망쳐버렸다. 승리에 만족한 사이호달은 그들을 추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남자는 조선인 병사들의 피해 상황을 확인했다. 사망자가 일곱이었고, 부상자가 스물여섯 명이었다. 싸움은 끝났지만 남자의 울분은 한창이었다. 이토록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한 것은 사이호달의 오판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오판이 아니라 욕심이었다. 남자는 사이호달이 화공을 꺼린 까닭을 잘 알았다. 사이호달은 배 안에 든 모피에 욕심이 났던 것이다. 결국 그 욕심 때문에 무고한 조선인 병사들의 목숨이 낯설고 검은 강에서 사라져야만 했던 것이다. 간신히 울분을 가라앉히자 무기력함이 찾아왔다. 사이호달의 잘못은 명명백백했지만 뭐라 항의할 수도 없었다. 그는 청의 장수였고 싸움의 책임자였다. 남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조선인 병사들의 생사를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정작 그들의 목숨이 이승과 저승 사이를 오갈 때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다음 날 사이호달은 전사한 병사들을 화장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남자는 정신이 멍했다. 화장은 청의 풍습이었다. 죽은 병사들을 조선으로 데려가지는 못할망정 이국의 풍습에 따라 재로 만들라는 말인가. 남자는 사이호달에게 간절히 요청했다. 자신의 목숨을 다해 싸운 이들이니 조선의 관습에 따라 처리하게 해달라고 말이다. 사이호달은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흑룡강가의 야트막한 언덕에 일곱 명의 조선병사를 묻었다. 적당한 만사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감정이 북받치는 대로 이렇게 한탄했을 뿐이었다.
“멀리 이국땅에 와서 모래펄 속에 묻힌바 되었으니 측은한 마음 이를 데가 없구나!”
사이호달은 계산에도 철저했다. 조선인 병사들이 포획한 적의 물건들을 모조리 가져간 것이다. 그중에는 조총도 있었다. 적의 조총은 쇠붙이와 돌을 부딪쳐 점화를 하는 수석식(燧石式) 조총이었다. 화승식(火繩式) 조총만을 보아왔던 남자에게 그 총이 매우 신기하게 보인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조선에 가져가려했던 것인데 그 조총마저 빼앗겼다. 남자의 우울한 마음을 아는 것은 하늘뿐이었다. 가랑비는 끊일 듯 끊일 듯 쉬지 않고 내렸다. 남자는 그 가랑비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다음 날 중상을 입었던 포수 한 명이 세상을 떠났다. 남자는 이미 죽은 동료들 곁에 그를 묻어주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청의 병사들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풀숲을 뒤졌다. 적의 병사 10여 명이 발견되었다. 사이호달은 그들을 죽이지 않고 배에 실었다. 남자는 비로소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볼 기회를 얻었다. 얼굴 모양과 머리털은 남만인(南蠻人)들과 비슷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더 영악해 보였다. 청의 통역관은 그들이 차한국인(車漢國人)이라 했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나라는 일찍이 들어본 적도 없었다. 풀숲에서는 즐거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이미 죽은 시체들을 난도질하면서 내는 소리들이었다. 남자는 눈을 감았다. 어찌 되었건 싸움은 끝났다. 정체도 모르는 적들을 상대로 한 싸움을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남자의 뜻대로 일이 돌아가지는 않을 터였다. 싸움을 계속하느냐 마느냐는 사이호달이 결정할 일이었다. 다행히도 사이호달은 싸움을 끝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송화강으로 돌아가는 배에 올라탄 남자의 마음은 오래간만에 가벼워졌다. 귀향길은 항상 즐거운 법이었다.
두 번째 싸움
송화강 어귀에 도착한 직후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사이호달의 지시는 다음과 같았다.
‘도적들이 아직 남아 있으니 조선군은 철수해서는 안 된다. 군관을 회령에 보내 군량을 실어 오도록 하라.’
남자는 입술을 깨물고 침착하려 애썼다. 흥분을 잠재운 남자는 청의 통역관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했다.
“적을 다 무찌르지 못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군량을 가져와 싸움을 계속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소. 그러나 이미 적을 다 섬멸했는데 무엇 하러 군량을 가져오라 명령하는 것이오? 이는 우리 북쪽 땅 백성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이오. 귀국에서 40일치 군량을 빌려주시면 어떻겠소? 그리만 된다면 먼 곳에서 실어오는 수고를 덜게 되니 참으로 고마운 일을 해주시는 것이오.”
통역관들이 돌아간 후 남자는 나름대로 돌아가는 상황을 분석해보았다. 사이호달이 염려하는 것은 소문이었다. 적들이 흑룡강 상류에서 수십 척의 배를 만들고 있다는 소문.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몰랐다. 남자 또한 자신의 배에 탄 포로에게 그 점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확실한 대답은 듣지 못했다. 남자의 마음이 어두워졌다. 소문이 사실로 밝혀지는 날에는 웬만해서는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을 터였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북경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온 부사령관이 사이호달과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부사령관의 논리는 명쾌했다.
‘조선군은 이미 적을 무찔렀으니 주둔할 이유가 없소. 군량까지 실어오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니 어서 빨리 돌려보내시오. 적들이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타국의 병사들을 잡아둔다면 앞으로 어떻게 파병을 요청하겠소?’
타당한 이야기였으나 사이호달은 끝내 수긍하지 않았다. 사이호달은 그저 남자에게 소 한 마리만을 보냈을 뿐이었다. 오래간만에 병사들이 포식하는 것을 보니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지기는 했다.
북경 부사령관은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남자는 통역관들을 통해 부사령관과 사이호달의 논쟁을 빠짐없이 전해 들었다. 부사령관의 설득이 조금씩 먹혀들어가는 것 같았으나 쉽사리 결정은 나지 않았다. 남자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군량이 도착한 후 철군이 결정될 수도 있었다. 그 군량을 가지고 철수할 수도 없는 일이니 결국은 그대로 청에게 바치는 꼴이 되고 만다. 남자는 다시 한 번 대장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심경을 전했다.
‘가을이 가고 해가 가도 이곳에 주둔하는 것이 괴롭지는 않소. 다만 군량의 보급만을 염려할 뿐이오. 회령과 영고탑 사이의 도로는 험난하고 물길도 여러 차례 지나야만 하오. 더욱이 지금은 장마철이라 비라도 맞는 날엔 군량이 다 썩어버릴 것이오. 40일치 군량을 우리가 먹을 수 있게 해준다면 그 은혜 정말로 크다고 할 것이오.’
통역관을 통해 돌아온 답변은 간결했다.
‘잘 생각해보겠소.’
허무한 날들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귀가 아파왔다. 귀의 통증이 사라지자 몸살과 복통이 찾아왔다. 의원의 치료를 받는다면 금세 없어질 병이었다. 그러나 진중의 상황은 달랐다. 아픔은 그저 스스로 이겨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간신히 몸을 추스른 남자에게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왔다. 가져온 군량이 다 떨어져 청의 군량을 먹어야만 하는데 그들이 준 군량의 질이 형편없다는 것이었다. 남자는 사이호달에게 담배를 선물로 보내면서 문제 해결을 요청했다. 뇌물은 효과가 있었다. 사이호달은 개선을 약속했다. 그러나 남자가 생각 못한 것은 통역관들이었다. 청의 통역관들은 자신들을 통하지 않고 직접 대장에게 교섭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불같이 화를 냈다. 남자는 다시 한 번 울분을 삼켰다. 청의 통역관들은 거개가 조선 출신이었다. 그런데도 조선인의 안위에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조선에 들어올 때마다 편의를 봐준 사실은 기억에 존재하지도 않는 듯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8월 초 철군이 거의 확정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조선에서 군량을 가져올 필요는 없게 될 터였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청으로부터 빌려 먹은 군량에 대한 계산을 마쳐야만 했다. 작은 말[小斗]로 받은 것을 큰 말[大斗]로 갚는 셈이라 적잖이 배가 쓰렸지만 그 정도로 끝내는 것만 해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군량 문제를 해결한 남자의 머릿속에 총 한 자루가 떠올랐다. 싸움에서 승리하고도 가질 수 없었던 바로 그 총, 수석식 소총이었다. 남자는 잠시 고민하다 사이호달을 찾았다. 남자 딴에는 간절하게 청했다고 생각했으나 사이호달의 반응은 냉정했다.
“노획한 무기는 일일이 숫자를 적어 북경에 보고했소. 북경의 선처를 바랄 수밖에는 없소.”
남자는 말없이 밖으로 나왔다. 잔뜩 흐린 하늘에다가 괴로운 심사를 토해냈다.
“괘씸한 놈 같으니.”
하늘은 말이 없었다. 차가운 바람 한 줄기만이 남자의 가슴을 서늘하게 할 뿐이었다.
남자가 두만강을 건넌 것은 8월 26일 저녁이었다. 그리던 조선에 돌아왔으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이호달은 남자가 떠나기 전 내년에도 싸움이 있을 것이라는 불길한 말을 던졌다. 물론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고, 싸움이 일어나도 청의 병사들로만 치룰 수도 있었다. 조선이 또다시 싸움에 휘말릴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도 위안은 되지 않았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수석식 소총을 보았다. 떠나기 전 사이호달이 선심 쓰는 척하며 내준 것이었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이국의 소총 한 자루만이 지금의 남자에게는 유일한 위로였다.
『북정일기』 해설
1654년 2월 2일, 청의 사신 한거원은 조선을 방문해 나선정벌을 위한 소총수 100명을 보내달라는 문서를 효종에게 제출했다. 효종은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선은 어떤 나라요?”
한거원이 답했다.
“영고탑 옆에 별종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나선입니다.”
효종은 변급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150여명의 병력을 함께 파견했다. 싸움은 승리로 끝났다. 효종은 변급이 귀환한 후 작성한 보고서를 통해 비로소 나선이 서양의 나라임을 알게 되었다.
청의 요청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1658년 3월 3일, 청의 사신 이일선이 조선을 방문해 2차 파병을 요구했다. 조건은 1차 때보다 더 나빴다. 소총수의 수는 100명에서 200명으로 늘어났으며, 군량 전체를 조선이 직접 조달해야 했다. 신류의 『북정일기』는 바로 이 2차 나선정벌의 전말을 담은 기록이다. 4월 6일부터 8월 27일까지의 일기가 실려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실제 싸움이 벌어진 것은 6월 10일 단 하루뿐이다. 싱거운 싸움이었다고 폄하하면 곤란하다. 물리적 싸움은 하루였으나 심리적 싸움은 141일 내내 벌어졌으니. 심지어 귀환 후에도 그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8월 27일자 일기 뒤에 붙은 ‘출병 중에 보고 들은 것’이라는 항목의 내용이 정신적 싸움에 내몰린 장수의 심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내년에 전쟁을 한다면 혹시 또 우리 조선 포수의 출병을 요구할 것인가 하고 물은 바, 어떤 자는 파병 요청을 어찌 미리 알 수 있겠는가라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자는 비록 전쟁이 다시 일더라도 영고탑 군사들만 동원할 것이며 조선 포수의 파병을 요청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 하는 등 여러 오랑캐들의 이야기가 하도 구구해서 어느 말을 믿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남자의 이름은 신류(申瀏)로, 제2차 나선정벌(羅禪征伐)의 전말을 담은 『북정일기(北征日記)』를 썼다. 박태근이 번역하고 해제를 단 『북정일기』(정신문화연구원)에서 지식을 얻었다.
- 설흔(『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공저)』, 『퇴계에게 공부법을 배우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 저자)
- 출처 : 기획회의 304호(2011년 9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