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공동주택 생산기술 변천사(13)
3.2 70년대 아파트 건설사례(계속)
■ 기술개발 및 개선
1)고압벽돌
1973년은 국내 건설활동이 유례없는 활황을 보여 71년과 72년의 불황을 완전히 벗어나 72년의 -1.4% 성장에 비해 73년은 21.7%의 성장률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10월의 석유파동을 정점으로 하는 세계적인 자원파동으로 한국경제는 최대의 혼란과 시련을 겪게 되었으며 인프레의 압박으로 철근, 목재를 비롯한 각종 건축 원자재의 가격이 상승하였고 품귀현상이 극심하였다(한성, 1982)
고압벽돌은 생석회 분말과 모래를 혼합하여 고압프레스(1,000톤)로 성형한 후 autoclave로 양생한 강도 높고 규격 정밀한 석회벽돌로서 한성 프리훼브가 75년 서독 Dorstener사로부터 생산시설을 도입하여 생산케 된 국내 최초의 석회벽돌이다. 고압벽돌은 모래와 생석회를 중량비 93:7의 비율로 혼합하여 일정한 형틀에 넣어 가압성형시킨 다음 고압증기로에 넣어 양생시킨 것이다. 증기양생을 시킬 때 모래의 규소질과 석회가 화학반응을 일으켜 다른 분자상태를 형성함으로써 모래의 입자를 강하게 연결시켜 견고한 벽돌이 나온다. 고압벽돌의 강도는 150㎏/㎠이었는데 내화성이 우수하고 색깔과 질감이 미려했으며 단열성이 우수했다.
석회사 고압벽돌은 1880년대에 독일에서 처음 개발되었으며, 그 후 양질의 모래가 풍부하나 진흙이나 자갈 등의 재료를 구하기 힘든 국가나 지방에서 생산되었다. 고압벽돌은 주원료가 모래이며 소량의 석회로 구성되어 있어 원료의 취득이 용이하며 따라서 생산원가가 저렴하며 벽돌개체가 갖는 물성도 우수하기 때문에 독일을 위시한 구라파 제국에서 대량생산되었고, 미국, 오스트랄리아, 카나다, 칠레, 쿠웨이트, 남아연방, 싱가포르 등에서도 생산되었다. 한국에서는 1975년에 독일 Dorstener사에서 생산시설을 들여와서 공장건설을 하고 1976년 6월부터 본격적인 생산을 하였다. 년간 생산능력은 NF기준 1억 2천만매를 생산할 수 있었다(독일 50억매, 화란 16억매, 영국 27억매 년간 생산)(건축-뉴스리뷰 1975.2, 10권 62호)
표1. 고압벽돌종류에 따른 줄눈 크기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20.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yInE%26fldid%3DEbTG%26dataid%3D17%26fileid%3D1%26regdt%3D%26disk%3D32%26grpcode%3Dranijiniroom%26dncnt%3DN%26.jpg)
출처:대한주택공사(1979), 주택공사 20년사
76년도에는 국내에서 생석회 물량을 충분히 구입할 수 없어 고압벽돌 제조시 소석회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소석회를 사용함으로써 비만 오면 모래의 수분 과다로 공장가동이 중지되었고 겨울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모래가 얼기 때문에 공장가동이 중단되곤 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소석회 내에 아주 미량이라도 생석회의 성분이 포함되어있을 경우 이것으로 고압벽돌을 제조하면 autoclave내에서 생석회가 반응을 일으켜 벽돌에 균열현상이 빈번하였다.
표2. 고압벽돌의 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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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문제점과 함께 제품 선전활동에도 불구하고 고압벽돌의 시판 물량은 커다란 증가를 보이지 않았다. 계속되는 건설경기의 침체도 한가지 원인이 되겠으나 수요자들이 가지고 있는 벽돌에 대한 고정관념 - 고급벽돌은 붉은 벽돌임, 벽돌 중 제일 싼 벽돌은 시멘트 벽돌임 - 이 아직도 바뀌지 않았고, 고압벽돌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 즉 최고급 벽돌도 아니고 아주 값이 싼 벽돌도 아니고 너무 깨끗하고 정밀한 규격의 제품이어서 오염이 쉽고 모서리 손상이 눈에 잘 보여 취급이 까다롭고 또 방수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 그 원인이었다(한성, 1982)
2)한성 P.C 공법개선
①생산라인의 증설
1975년 최초의 P.C 생산회사인 한성에서는 P.C 부재 생산방법을 일부 변경하여 아파트 소부재인 P.C판 계단식 계단판, 온돌카바 등을 별도로 제작하는 생산라인 설계를 시작하여 C라인을 설치했다. 주택 내부 중 소부재인 이들 P.C판은 전체 물량은 적으나 작업과정이 복잡하고 생산장소를 많이 차지하며 중장비의 가동률도 일반 P.C판의 생산 때 이상으로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별도의 생산라인의 설치가 불가피하였다. 이 생산라인을 순수한 우리 기술진과 국산장비로 착공하여 1975. 6.15에 준공을 본 것이다. 이와 같은 C 라인의 설치로 1일 13평형 P.C부재의 공장생산량이 10호분에서 12호분으로 늘어났다. 이즈음 국내의 각종 고층 건축물의 건설공법이 변화를 일으켰다. 일반 라멘조 구조체를 지양하고 선진국에서 널리 시행하고 있는 라멘 철골조로 바뀌어져 외벽 및 상판을 P.C 콘크리트(커텐월)로 시공하는 공법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한성, 1982)
②P.C 아파트 조립용 방수재 생산
한성 프리훼브는 1973년에 들어서서 그 때까지 일본에서 수입하여 사용하고 있던 P.C 아파트 조립용의 방수재를 생산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진행시켰다. 그 때까지 한성이 도입하여 사용한 방수재는 아스팔트 고무를 주성분으로 하고 기타 수십종의 원료를 혼합하여 제조한 Gum化 아스팔트였다. 이것은 변형되지 않으며 판 상호간의 신축작용에 적응하고 龜裂이 생기지 않는 우수한 것이었다. 일본에서도 이것을 생산하는데 7-8년 간을 소요한 만큼 우리나라에서 이를 개발하자면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되었다. 더욱이 국내 수요가 한성에 한정되어 있으므로 기술용역에 의한 생산이 불가피한 실정이었다.
방수재 공장의 건설은 이해 6.15일부터 약 4개월에 걸쳐 준비작업 및 기계제작 설치공사를 한 끝에 준공을 보았다. 이로써 년 2,000세대분의 특수 방수재를 우리의 기술진에 의하여 생산하게 되었다. 방수공장의 가동과 동시에 회사는 그간 수입하여 쓰던 에바씰 후지쉬트 후지그라쉬트 콜드씰과 같은 품질이 우수한 방수재를 생산하기에 이르렀고 방수재의 명칭은 한성코킹, 한성씰, 한성쉬트, 한성그라스쉬트, 한성콜드씰로 정하였다(한성, 1982)
벽식철근 콘크리트 구조를 precast化하여 상판 벽판 지붕판 등의 대형 P.C판을 공장에서 제조하여 현장에 운반 조립하는 한성 틸트업(Tilt-up)공법에서 각 접합부분에 사용되는 방수재는 콘크리트 접착이 잘 되고 동절기나 또는 하절기에도 외기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신축성과 탄력성이 극히 양호한 액체 또는 반액체 등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품질이어야 하는데 1973년 당시 국내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는 액체방수 또는 아스팔트 방수는 구조체의 수축 팽창현상이 일어날 경우 龜裂이 생기므로 접촉부문이 많고 방수재가 외부에 노출되는 조립주택에서는 전혀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성에서 도입하여 사용한 방수재는 아스팔트와 고무를 주성분으로 하고 기타 수십종의 원료를 혼합하여 제조한 Gum化 아스팔트로서 변형되지 않으며 판 상호간 신축작용에 적용하고 균열이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
일본에서도 1960년도부터 조립주택을 건설하기 시작하였으나 방수재의 기술개발이 늦어 수년간 고층이 많았으며 원료 배합 가열문제들을 조정하면서 연구한 결과 7 - 8년 후 비로소 완제품을 생산할 수 있었으므로 우리나라에서 이를 개발하는데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되며 더욱이 국내의 수요가 당사에 한정되어 있어 기술개발에 의한 당사 생산이 불가피한 실정이었다.
③계단실 마감개선
한성에서는 1976년 계단판의 논슬??을 개선한 후 계단실 부분의 마감개선 및 공법개발이 다양하게 시도되었다. 당시의 계단판 논슬??은 타일제품을 사용하였는데 가격이 비싸고 깨지기 쉬웠으므로 부재의 제작에서 설치까지의 과정에서 파손율이 높았으며 한번 파손된 부분은 보수가 까다로워 불편한 점이 있었다. 이것을 고무 논슬??으로 대체 사용하는 방안을 검토하여 시험 제작해본 결과 가격이 저렴하고 탄력성과 내구성이 우수한 것으로 판명되어 그후부터는 모든 제품에 확대 실시하게 되었다.
1977년에는 계단판 표면의 철근고리부분 및 접합부붐의 몰탈채움을 한 곳이 미관상 좋지 않은 것에 착안하여 그 위에 현장에서 아스타일을 붙임으로써 외관을 미려하게 하는 방안을 시도하여 시행하였으나 현장공사가 많아짐과 아울러 열에 약한 결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연탄을 사용하는 13평 아파트에서는 입주자의 부주의로 연탄불에 의해 손상을 입는 일이 있는 등 결점이 노출되었다.
1979년 영동 고동에 건설한 15평과 18평의 군인아파트는 설계 당시 이와 같은 결점을 보완하고 계단실의 미관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청동체 논슬??을 테라조판에 미리 부착하여 제작한 후 이것을 다시 계단판 제작시 콘크리트와 부착시켜 제작하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 시도중이던 계단판의 무용접 방식과 병행하여 제작된 계단판은 색상과 미관이 월등히 우수하여 좋은 효과를 얻었으나 가격이 상승하는 경향이 있어 그 후 확대실시를 보류하여 무용접 공법만 전국에 확대 실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한성, 1982)
3)민간 P.C 아파트 생산
70년대 후반 건설인력의 해외진출에 따른 인력난이 가중되자 인간주택건설업체에서도 P.C주택 시스템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정부에서도 조립주택의 양산체제 구축을 위해 조립식 주택건설을 지원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즉 건설부장관은 K.S 우수 건설자재의 양산을 위해서 조립식 자재의 개발을 적극 지원하였으며 그동안 5층 이상을 시공하지 않은 조립식 아파트를 18층까지 조립식으로 시공하도록 하였다.
1978년 (주)삼환까뮤는 프랑스의 꺄뮤(Camus)사로부터 고층건설도 가능한 연산 2,400호(25-33평형) '꺄뮤공법시스템'을 도입하였다. 이 공법은 바닥판, 지붕판, 벽판 등을 공장에서 생산, 운반용 특장차로 현장에 운반하여 12t 타워 크레인으로 조립, 접합하는 공법으로 5-15층까지 아파트에 적용가능하며 1방향 슬라브(2변지지) 시스템이었다. (주)한양주택도 경기도 이천에 P.C아파트 생산공장을 설립했고 (주)건설화학은 경기도 여주에 스판크리트 생산시설을 설치, 건물의 바닥판과 외벽 커튼월 용의 스판크리트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와 삼호주택은 쿠웨이트에서의 P.C 콘크리트 생산경험을 살려 국내에서의 조립식 공법을 개발하였고, 삼익주택도 1978년 하반기부터 P.C 공법에 의한 아파트 건설을 시도했고, 율산건설은 이동식자재공장을 세워 조립식 건설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closed system으로 시장 수요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융통성이 적었고 고정시설비 부담을 극복하지 못했다. 더욱이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의 주택시장의 침체기에 이들 P.C시스템들은 활성화되지 못했다. 다만 (주)우림콘크리트만은 주택이 아닌 상업용 건물의 외벽 커텐월을 위주로 다양한 여건에 적용될 수 있는 부품생산으로 활발하게 생산활동을 했다. 이는 외국의 특정 시스템을 그대로 도입하기 보다는 국내의 여러 수요여건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부재나 부품생산시스템으로 설계, 플란트를 시설하는 것이 필요함을 보여준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