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JOY YOUR ESSAYLIFE
언양에세이포럼
22기-3차시
일시 : 2024년 3월 5일 (화) 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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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 제 목 | 작 가 | 편수 | 합평 담당 |
1 | 손녀의 나라 | 민창현 | 2 | |
2 | 이쁜아! | 김순향 | 1 | |
3 | 귀한 우리 아이들 | 김인옥 | 1 | |
4 | 옹이 | 박희자 | 1 | |
5 |
합평순서 / 권춘애 김기람 김선애 김인옥 민창현 박동조
박희자 배정순 예수백 이경자 이혜경
1. 손녀의 나라 - 민창현 2
1. 요즘 매일 아침마다 색다른 행복을 맞보고 있다. 커 가는 손녀 덕분이다. 엄마도 일을 하는 손녀는 유치원 등원하기 전에 우리 집에 와서 아침 식사를 같이 한다. 이 시간에 많은 대화가 오고 간다.
2. 며칠 전 아침은 아이의 기분이 유난히 좋아 보였다. 이유를 물어보니 유치원에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있는데 자기와의 결혼을 드디어 동의했다는 것이다. 언제는 아빠와 결혼할 거라고 했는데 세상 이치에 눈을 떠가는지 결혼은 남자 친구와 하는 것으로 바뀐 모양이었다.
3. 순진무구한 손녀를 볼 때마다 하얀 도화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밑그림을 그리고 무슨 색 물감으로 곱게 칠해 나갈까. 완성될 그림이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우리가 완성된 그림을 보기는 힘들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4. 아이가 저렇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좋은 시절에 좋은 곳에서 태어나서 자신을 사랑해 주는 부모 잘 만난 덕분이다. 거기에는 물론 조부모인 우리도 일조를 하고 있을 테지만.
5.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백 년 전에만 태어났어도 여자로서 삶이 어땠을지 대략 난감하다. 여자가 남자와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상이었으니 참정권은 말할 것도 없었다.
6. 여성 투표권이 세계 처음으로 인정된 것은 1893년 뉴질랜드서였다. 민주주의의 대명사인 미국과 영국도 1920년과 1928년(영국은 1918년에 여성의 참정권이 처음 인정되었지만, 30세 이상이라는 조건이 달려 제한적이었다)에야 각각 인정되었다. 그 후 일본 1945년, 프랑스 1946년, 우리나라는 1948년부터였다.
7. 얼마 전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우리보다 선진국이라고 배워 온 스위스(스위스는 1971년)보다도 우리의 여성 참정권이 훨씬 일찍 열렸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여성 참정권이 제한되고 있는 나라들을 생각할 때 우리나라에 태어난 것은 축복이지 않겠는가.
8. 더 가까이로는 남쪽이 아니고 북쪽에 태어났으면 과연 아이가 오늘과 같은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가 자유 대한민국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9. 얼마 전에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을 보았다. 위성으로 찍은 한반도 야경이었다. 그런데, 지도상의 한반도 사진과는 그 모습이 판이했다. 남쪽은 밝은 전기 불빛이 켜지지 않은 데가 없어 그 형상이 지도상의 그것과 같았다. 북쪽은 한곳만 빼고는 검은 숯덩이를 칠해놓은 것 같은 칠흑의 어둠밖에 없었다.
10. 이 한 장의 사진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2차대전 후 열강들의 아귀다툼 속에서도 귀신같은 외교력을 발휘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이끌어낸 이승만 박사를 잊을 수가 없다. 남북이 분단된 후 남쪽의 자유민주 체제를 지켜내는 데는 수없이 많은 사람과 사건들이 연결되어 있다. 그중 제일 중요한 것은 이 박사가 미국과 맺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11. 이로써 대한민국을 북한의 침략 위협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자주국방의 힘을 키우고 경제 발전을 이루어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것이다. 물론 인간은 완벽한 사람이 없기에 공(功)과 과(過)가 다 있다. 하지만 나라 잃은 고통에 견주어본다면 건국과 자유민주 체제 수호에 대한 고마움을 과로 그냥 다 덮어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12. 나라란 과연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나라는 국민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고 운영되어야 한다. 나라가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고, 스스로 움직일 힘을 잃게 되면 남에게 끌려다니고 속박을 받게 된다. 그 결과가 어떤지는 36년간의 일본 식민지 시절을 거치면서 뼈아픈 경험을 했다.
13. 그 뒤따라 온 남북 간의 체제 싸움에서도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내었다. 전쟁을 통한 무력만이 남한을 적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 북한이 일으킨 6.25 남침도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막아내었다.
14. 무엇 때문에 이런 희생을 치러서라도 나라를 되찾고 지켜내려고 했을까. 그 답을 손녀의 행복한 모습에서 발견했다. 자유다.
북한 이탈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갖고 싶었던 바로 그것이다.
15. 인간은 누구라도 자유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가 있다. 원하는 바대로 하고 싶은 것이다. 자의로 선택하고, 구속받지 않고 마음대로 다니고, 내적으로 자유롭고 싶은 욕구를 말한다. 자유는 사람에게 매우 기본적인 것이어서 이것을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한다.
16. 우리는 지나 온 역사와 현재를 통해 확신할 수 있다. 우리의 선택과 이를 지켜내기 위한 힘든 투쟁이 모두 가치 있고 옳았다는 것을. 또한 앞으로도 영원히 지켜져야 할 소중한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17. 얼마 전에 본 이 박사의 독립운동과 건국에 관한 영화와 함께 손녀 이야기가 오버랩 되어 아이가 살아가야 할 나라에 대한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간다.
2. 이쁜아! / 김순향1
1. “이쁜아!” 뜬금없는 남편 말에 주위를 휘휘 둘러본다. 예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잘못 들었나 싶어 그를 바라보니 재차 이쁜이를 부르는 눈은 나를 향하고 있다.
2. 피식 웃음이 나오다가 갑자기 뇌리를 스치는 불안함으로 정신이 아득해진다. 몸이 더 아픈가? 또 선망증세가 나타난 것인가? 불안함으로 그를 세차게 흔든다. 평소에 지분지분 장난이라도 치던 사람이면 이해라도 하련만, 둘이 사는 집에서조차 허튼소리를 하지 않아 어렵기조차 하던 남편이다.
3. 육 년 전, 남편은 119구급차를 타고 P 대학 응급실로 달렸다. 구급요원은 계속 환자에게 말을 걸고 답을 유도했으나 남편은 두 눈을 감은 채 숨만 팔딱거리고 있었다. 나도 생과 사의 경계에 있는 그가 행여 선을 넘을까 봐 미동도 하지 않는 그의 팔다리를 쉼 없이 주물렀다. 언젠가 들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사람이 딸이 엄마를 애달프게 불러대는 소리에 되돌아왔다는 말이 생각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를 불러댔다.
4. 응급실에 도착한 남편은 온갖 검사를 했다. 약물을 투입하는 호스와 무통제, 이름조차 생소한 기구들을 달았다. 몸을 전혀 움직여서는 안 되는데 얼마나 힘든지 자꾸만 침상에서 내려오려 했다. 간호사의 주의가 있어도 발버둥은 반복되었다. 그러자 건장한 청년 간호사 네 명이 들어오더니 사지를 묶는다고 윽박질렀다. 이미 무의식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 남편도 어쩔 수 없어 보였다. 결국 의료진들은 내게 환자를 묶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 서류에 서명하게 하더니 남편의 사지를 침대에 묶어 버렸다. 자유를 잃은 채 버둥거리는 그를 보는 일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5. 남편에게 나는 메시아로 보였을 것이다. 희미하게 눈을 뜬 그가 내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저러다가 더 심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간호사 몰래 한 손만 살짝 풀었더니 간호사는 남편을 살리려면 이 과정을 참아야 한다고 나를 나무랐다. 결국 나는 그의 메시아가 되지 못한 채 가슴만 뜯어야 했다.
6. 어쩌면 그리도 날은 더디게 새는지, 하얗게 밤을 지새웠지만 차도가 없었다. 새날에도 남편의 고통은 계속되었다. 차라리 잠이라도 들면 고통이 덜할 텐데, 사지가 묶여 버둥거리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했던 고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7. 같이 응급실로 들어온 환자들은 대부분 중환자실과 일반병실로 옮겨갔고, 간혹 흰 천에 덮여 나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오열하는 가족들이 어쩌면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그러졌다. 검사는 왜 그리 많은지, 어제도 오늘도 의식이 명료하지 않은 그가 나무둥치처럼 침대에 실려 각종 검사실로 다닌 후, 나온 병명은 뇌출혈이었다.
8. 발병한 지 열흘,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거쳐 일반병실로 왔다. 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발병한 터라 골든타임을 놓쳤다고 한다. 입원한 지 보름이 되자 혼자서 일어나 앉았다. 여전히 차고 매달고 있는 기구들로 불편하지만,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이제는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9. 신경외과에서 한 달을 보내고 재활병동으로 옮겨 다시 재활치료를 받았다. 연구에 참여하는 사례자가 되어 석 달 입원 치료를 받자 더는 입원이 허용되지 않는다며 퇴원 명령을 내렸다. 아직도 갈 길이 먼데, 불안했으나 더는 매달릴 수 없었다.
10. 빨리 회복시켜 보려는 욕심에 의술이 가장 좋다는 서울의 명의를 찾아가기도 했었고, 이름난 한의원도 찾아가 보았으나 이미 망가진 몸을 곧추세우기는 어려웠다. 병마 앞에서도 의연했던 그의 자존감은 세월 흐를수록 낮아졌다. 그동안 맺었던 인연을 대부분 정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아렸다.
11. 나는 모든 일상을 남편에게 맞추느라 각종 모임에 매번 결석하게 되었다. 그동안의 정으로 연민하고 걱정해 주는 이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 급기야 언제까지나 함게 할것 같았던 대부분의 인연 줄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12. 그러구러 발병한 지 여섯 해가 되자 세상에 우리 둘만 남은 느낌이었다. 지금도 끊임없이 치료와 재활에 임하고 있지만 완치는 요원하다. 요양 등급을 받아 주간 보호센터에 나가 열심히 따라 하는 모습을 보면 눈물이 난다. 세상에서 제 짝지가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몸도 마음도 신사였던 그와 함께했던 세월을 되돌려 보며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13. 오늘은 그간 아내의 노고에 치하를 하고 싶었을까! ‘예쁜아!’라는 말은 차마 쑥스러워 말 못 했던 ‘고생했다, 애썼다’라는 말을 대신하는 그의 고마움의 표시 일 게다.
14. 사람의 수명은 인력대로 할 수 없는 일, 남은 세월 그의 이쁜이가 되어 남편의 황량한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으며, 윤기 흐르는 삶을 가꾸어 가는 일이 내가 할 일임을 절감한다.
15. 거울 앞에 서서 찬찬히 거울 속을 쳐다본다.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묻은 얼굴, 남편의 이쁜이가 웃고 있다.
3. 귀한 우리 아이들/김인옥1
1. 초등학교 입학식이 지난 4일 전국에서 일제히 거행되었다. 집 부근에 초등학교가 있어서 아침 산책길에 생애 처음 등교하는 어린이들을 보러 갔다. 10시가 가까워오자 엄마나 할머니의 손을 잡은 어린이들이 교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제 몸집보다 큰 가방을 거북이 등딱지처럼 등에 붙인 모습이 하나같이 귀여웠다. 내 눈엔 아직 아기인데 가입학식 날 자기의 교실을 알아둔 듯 엄마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씩씩하게 현관 안으로 사라지는 어린이들이 의젓하고 대견스러웠다. 한 명 한 명에게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길 마음속으로 빌었다.
2. 나는 일을 하는 엄마였으므로 우리 아이들은 입학식 날 할머니의 손을 잡고 가야 했다. 학교에 갔다 온 아이를 따뜻이 맞이해 준적도 없었다. 아이들은 정작 말이 없었지만, 내 마음은 늘 미안하고 아팠다.
3. 1학년 때까지는 시어머니께서 돌봐주셨지만, 2학년이 되자 문제가 생겼다. 시누이가 아기를 낳아서 아기와 산모를 돌보러 가셔야 했다. 반기는 이 없는 빈 집에 혼자 들어가기 싫었던 것일까, 전자오락이 너무 재미있었을까. 아이는 할머니가 자장면 사 먹으라고 식탁 위에 두고 가신 오백원으로 길거리에 앉아 오락을 하고, 점심을 쫄쫄 굶은 채 할머니나 엄마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거리를 배회하고 다녔다. 아이가 자꾸만 눈이 퀭해지고 턱이 뾰족해지는 것이 이상해서 캐물었더니 그제야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실토를 했다. 속이 미어지듯 아팠다.
4. 3월은 아이들에게 몹시 힘든 달이다. 긴 겨울 방학동안 자유로운 생활에 길들여진 몸은 규칙적인 학교생활에 적응하기가 힘이 든다. 새 선생님에게 적응해야 하고, 새 친구도 사귀어야 한다. 낯선 환경 속에 놓인 신입생인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몇 시간을 긴장감 속에서 보내다보면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면역력이 떨어져 3월엔 거의 모든 어린이가 감기를 앓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물론 일교차가 심한 시기라 그럴 수도 있지만, 새 환경에 적응하느라 받는 에너지 소모와 스트레스가 결정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5. 지친 몸과 마음을 풀 수 있는 묘약이 있다. 바로 사랑 가득한 엄마의 품이다. 아이가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따뜻하게 품어주며 수고했다고 등을 토닥여주면 된다. 정성으로 준비한 따뜻한 간식을 차려주며 맛있게 먹는 모습을 마주 앉아 바라봐주면 더 좋겠다. 그 순간 아이의 모든 스트레스가 날아가고 행복감을 느끼며 원기를 되찾을 것이다.
6. 이 때 ‘시험 잘 쳤니?’ ‘몇 점 받았니?’와 같은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 다시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최인철 교수의 말처럼 이렇게 물어야 한다. “오늘 어떤 좋은 일을 했어? 몇 번을 웃었어?”*
7. 그런데 취업 주부 비율이 50%를 넘어서고 있다니 내 아이처럼 하교 후 반겨 줄 엄마가 없는 어린이들의 문제가 심각하다. 물론 방과후학교와 돌봄교실이 있다. 최장 저녁 8시까지 돌보는 늘봄학교가 올 2학기부터 1학년에 한해 개설되고, 점차 학년을 확대해나갈 계획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어린이 입장에서 보면 여전히 집 밖에서 단체 활동을 해야 하는 스트레스 상황에 장시간 머무르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8. 장애가 있는 어르신을 돌보는 요양보호사처럼, 가정에서 어린이를 사랑으로 돌보는 돌보미 제도를 도입하면 어떨까. 아동 돌보미를 원하는 아르바이트 대학생을 대상으로 일정한 교육을 이수케 하고 어린이를 돌보게 한다면, 몸과 마음의 건강에 더 이롭지 않을까. 어린이는 편안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공부나 숙제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스스로 돌봄을 자청 하는 이가 많아진다면 더없이 좋겠다.
9. 올해 신입생이 0명이라 입학식을 못한 초등학교가 전국에 181개교나 되고, 전국 초등학교 신입생 수도 작년에 비해 10%나 줄었다고 한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그러니 모든 어린이는 한 명 한 명 모두 귀하다. 이 귀한 어린이들을 돌봐야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이제는 정부와 지자체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가 되었다. ‘무엇이 어린이에게 가장 좋을까’에 초점을 두고 양육과 교육 정책을 펴 나가길 기대해본다.
* 박웅현, ‘다시, 책은 도끼다’ 중에서
4. 옹이/ 박희자 1
1. MBN 방송에서 한일전에 출격할 현역 가왕 Top 7을 뽑는 결승전 날이었다. 100일간의 대장정에서 회차가 거듭되면서 실력을 인정받는 마이진이 도전할 곡은 조항조의 ‘옹이’였다. 그녀가 연습실에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다 한 구절의 가사에 눈물이 터졌다.
2. 십여 년을 무명 생활로 끝이 보이지 않았다 했다. 절망 속에서 노래를 내려놓아야 하나, 갈등하던 때 ‘얼마나 달려가야 이 사랑 내려놓을까, 어디쯤 달려가야 그리움도 놓을까,’하는 구절에서 위로받고 다시 노래할 수 있었던 감정이 북받친 눈물이었다. 그 말이 공감되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사이버 앵벌이가 올린 한 구절의 사연이 내 가슴에 박힌 옹이 감정과 겹친 일이 생각나서였다.
3. 지난 12월 초였다. ‘우연히 성당 카페를 서핑하다 빨간불이 켜진 N에 클릭했다. 젊은 여성이 성당에 다녀보고 싶은데, 용기가 나지 않는다.’라고 시작된 장문의 사연이 구구절절했다.
4. “자신이 망가지는 줄 알면서도 상처받은 과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사람을 저주하며 괴로움 속에서 삶을 포기하고 싶다. 최근에는 우울증에, 공황장애까지 앓고 있다. 발목인대파열로 두 번 수술을 받았다. 이틀 후에는 세 번째 수술을 앞두고 있다. 수술을 받으면 나을지, 안 나을지 몰라 결정 못 하고 있다. 이런 답답한 현실을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했다.
5. 복잡한 내용에 내 머릿속이 뒤엉켰다. 성당으로 인도하는 것이 신자로서 의무다. 성당에 오겠다는 사람을, 더구나 가망고객 찾는 영업을 평생 직업으로 해 온 내가 신앙의 힘으로 빛을 찾고 싶다는 가련한 사람을 모른 척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몸도 마음도 병든 사람에게 알량한 동정심으로 손 내밀어 큰 짐을 지게 될 걱정에 고개를 흔들었으나, 이미 늦었다. 어느새 내 손끝은 그녀의 절박한 심정에 동조되어 좌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6. “성당 문 두드린 용기에 박수 보낸다. 햇볕 쐬며 걷는 당당한 자신을 그려보자! 걸어야 뇌가 자극받아 행복 호르몬을 생성시켜 준다. 수술부터 받길 권한다. 자신이 우울에서 벗어나서 행복할 때 상대를 용서해 줄 마음의 여유도 생길 것이다.” 등등
7. 그녀가 댓글을 달았다. 관심 가져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용기 주시니, 긍정적인 생각으로 수술 잘 받고 성당으로 찾아뵙겠다. 는 말이 반가워, 수술 날이 아침, 평안한 마음으로 수술 잘 받고 올수 있도록, 기도하겠다는 위로의 댓글을 보내주었다.
8. 어느 날 신자들과의 자리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꺼냈다. 신자로서 그녀의 딱한 처지를 함께 안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신자 한 사람이 걱정하며 조심하라 하는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순간순간, 그녀가 건강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지워지지 않았고 소식이 궁금해졌다.
9. 크리스마스이브에 침묵하고 있는 그녀의 대화 창에 안부를 남겼다. “00 님이 만나고 싶다는 아기 예수님 오시는 날입니다. 빛으로 오시는 분께서 우리의 마음을 환하게 비춰 줄 거예요. 메리 크리스마스!”
10. 성탄 전야 미사 강론에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웃을 돌아보는 사랑이 성탄의 참 의미라는 말씀을 들으며, 그녀를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와 카페를 열었다. 그녀의 소식이 와 있기를 기대했다.
11. 댓글은 없었다. 왠지, 허전해서 눈을 돌려, 새로 올라온 글을 클릭했다. 이 또한 구구한 장문의 사연이었다. 다섯 살 딸을 키우는 싱글대디였다. 얼마 전, 다리를 다쳐 일을 못 하고 있다. 아이가 아파도 병원도 못 가고, 날씨가 추운데 따뜻한 옷 하나 사 줄 돈이 없다. 어제는 아이 생일이라 케이크 사 달라고 조르는 아이를 데리고, 제과점이 있는 길목을 비켜 다른 골목을 돌며, 이사 가고 없다는 거짓말을 한 못난 아빠라는 구절에 순간,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른 내 기억으로 가슴이 울컥했다.
12. 아들, 유아기에 우리 집 경제가 어려웠다. 작은 것 하나까지도 정서로 연결되는 중요한 시기에 물질적인 갈증을 느끼는 아이를 욕구를 채워주지 못해 마음이 아팠다.
13. 작은아들이 숫자를 익혀 쓰고, 한글을 깨쳐, 제 이름 썼을 때도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주려고 나만의 방법으로 이벤트를 해 주었다. 목말을 태우거나, 등에 업고 집을 나섰다. 만나는 이웃에게 “우리 아들이 열까지 숫자를 썼어요. 동화책을 읽었어요” 하며 장원급제라도 한 듯, 눈 찡긋하고 호들갑을 떨면 이웃들도 맞장구치며 기뻐해 주었다.
14. 말보다 달콤한 보상이 아쉬워하는 아들에게 받고 싶은 생일날 선물로 종결되었다. 목말을 타거나 등에 업히는 날에는 당연한 듯 “생일날 케이크 받을 거니까! 맞지 엄마!” 하며 아들의 기대가 커질 때면, 내 마음도 케이크의 이스트처럼 부풀었다. 그때쯤이면 우리 집 형편도 나아져, 아들에게 여섯 개의 초를 꽂은 생일케이크를 안겨주리라 기대하면서,
15. 한겨울 1월이 아들 생일이다. 아빠가 계절 타는 일을 했다. 추위가 이어지면 일을 할 수 없을 날이 많았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맹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엄마인 내 수중에 아들과의 약속을 지킬 방법이 없었다. 궁리 끝에 케이크 사러 가자며, 아들을 등에 업었다. 아들의 따뜻한 체온이 뼛골까지 시린 내 마음을 울렸다.
16. 제과점이 어디쯤 있는지 아들도 알고 있다. 아이를 업고 다른 길에서 헤매며 “아들아! 제과점이 언제 이사 갔지! 분명히 이 골목에 있었는데” 등에서 아들은 흩어진 엄마 목소리 들으며, 속 울림을 인지했을 것이다. “ 제과점 언제 이사 갔지! 어디로 갔을까,” 하며 음률을 맞춰 종알대는 넉넉한 아이였다. 구멍가게에서 산 초코파이 하나에 촛불 하나 밝혀주며, 차마 아들 눈빛을 마주하지 못했던 그 일이 떠올랐다.
17. 사연에 계좌가 찍혀 있었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 가까웠다. 열두 시가 넘으면 은행 시스템 점검 시간에 걸려 이체가 막힌다. 딸아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길 바라며, 계좌이체를 서둘렀다.
18. 자선하고 난 후에 마음으로 찬찬하게 글을 읽어 내려가는데 ‘성함과 전화번호를 남겨 놓으면 돈 벌어 갚겠다.’라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사이버 해킹하려는 건 아닌지, 의심하며 글을 살폈다. 긴 문장의 문체가 00녀의 글의 흐름이 같았고, 사람을 설득시키는 우수한 작문 실력도 닮아 있었다.
19. 카페는 가입 신청을 마쳐야 글을 올릴 수 있지 않나! 00녀는 가입 신청해서, 등업이 되어 있었고, 아이 아빠는 가입 신청 안 되어 있었다. 세계적인 문호 톨스토이가 쓴 글도 두세 편만 읽으면, 그게 그거라 듯이 아무리 다르게 써 올려도 경쳡 되어 의구심이 더했다. 그제야 같은 사람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액수는 크지 않지만, 사람 상대로 영업을 평생 해온 내가 교묘한 심리전에 말린 자신이 부끄럽고 화가 났다.
20. 다음날, 내가 올린 글을 삭제하려고 카페를 열었다. 관리자의 댓글이 올라와 있었다. ‘사이버 앵벌이니 절대 마음 약해서 도와주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21. 친구에게 사건을 이야기했다. “영혼이 맑아서 그렇다. 그래도 한 번의 자선으로 끝나서 다행이다. 만약 사이버 앵벌이가 아니면 어쩔 뻔했노, 그 성격에! 이참에 아들 생일날 못 해 주었던 케이크 선물이라도 보내주지, 마흔세 개의 초가 꽂히도록 최고로 큰 왕 케이크로! 그러면 박혀 있던 옹이도 쏙 빠져나가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