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사가던 날
요즘 유난히도 춥고 눈도 많이 와서인지 마음 한편이 씁쓸하다. 어릴 때 생각이지만 그 시절 있었던 일들이 영화 스크린처럼 뚜렷하게 떠오르는 날 이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마을 한가운데 있는 아담한 초가집이었다. 6.25사번이 일어나고 그 해 가을 마을 사람들이 모두 피난길을 떠났지만 우리 집 만 따라가지 못하고 말았다. 그날 저녁 아버지가 오빠와 나를 불러 우리는 피난 갈 형편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며 엄마 손을 부여잡고 목 놓아 우셨다. 오빠도 울고 무슨 영문인지도 모채 나도 따라 울었던 생각이 난다.
엄마는 이질이라는 병이 깊었으나 전쟁 중에 약도 못 써보고 병마와 싸우고 계셨다. 다음 날 아침 아버지와 오빠가 낫으로 빈 가마니 양옆을 뜯어 긴 나무를 양쪽에 끼워 들것을 만들고는 엄마를 그 위에 누이고 이불을 덮었다. 아버지는 앞에서 오빠는 뒤에서 들것을 맞들고 깊은 산속에 있는 예전 산지기 집으로 이사를 갔다. 산속의 오두막이 유일한 우리 집 안식처요 나에겐 놀이터였다. 다음날 아버지가 외출했다 돌아오시더니 우리 식구가 명이 길다고 하신다. 어제 마을에서 이사나온 몇 시간 뒤에 마을이 폭격에 맞아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몇 시간만 늦었어도 우리 가족 모두 생명을 부지하지 못했을 텐데 아버지께서 선경지명이 있었나 보다.
요행이 목숨을 구했지만 전쟁 중이라 사람들도 없고 농토가 없으니 먹고 살 길이 어려웠다. 산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을 죽 한 그릇 대신해 먹기가 일쑤였다. 그나마 멀건 죽이라도 먹는 날은 옆 마을에 가서 요행이 이삭 몇 알이라도 줍고 남의 밭에서 주워 온 배춧잎이나 고갱이라도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 내 나이 여섯 살. 이삭 줍고 무청 시래기를 주워 오는 일은 어린 내 몫이었다. 점심은 건너뛰고 저녁에는 무를 솥에 넣고 물 한 바가지 넣고 푹 삶아서 아버지는 중간 무 두 개 오빠는 한 개, 나는 작은 무 한 개를 양념도 없이 먹었다. 어머니는 병중으로 이웃마을에서 찬 밥 한 덩어리 얻어 와 미음을 끓여 서너 모금 드시면 아버지께서 ‘또 하루를 살았구나!’ 하신다.
멀건 죽을 며칠 만에 먹던 어느 날, 아버지와 오빠가 밥숟가락을 놓고 나를 바라본다. 영문을 몰라 눈만 껌뻑거리고 있는데 아버지와 오빠 죽 그릇이 모두 내 앞에 있다. 갑자기 별이 번쩍한다. 오빠가 뺨을 때린 것이다.
“이 기집애야! 그만 좀 쳐먹어!” 그러고는 대성통곡한다.
어머니가 눈을 감고 영원히 저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이 없으니 장사 지낼 것도 없이 어머니 쓰시던 이불 호청으로 염을 대신하고 집 근처 산에 묻은 것이 장례 전부였다. 그 어머니가 보고 싶어 반백이 다 된 지금까지도 아련함을 어찌하리오. 어린 시절 굶어 죽지 않고 살고자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생각만 해도 가슴 시려 온다. 오늘은 무쇠 솥에 밥이 끓어 넘치듯이 내 눈물도 흘러넘칠 정도로 한번 울고 싶다. 깊은 사색에 잠기다 보니 이제는 지난 세월 고생도 풍요로운 가을을 위한 시련이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기저귀 빨래터
요즘 날씨가 매섭게도 춥다보니 예전 어릴 때 생각이 난다. 오늘따라 남편이 빙어 잡으러 가자고 아침부터 부산하다. 날씨도 춥고 해서 가기 싫은데 남편이 자꾸 같이 가자고 해서 하는 수없이 빙어 낚시터로 향했다. 와서 보니 여기저기서 빙어를 찍어 먹는 사람의 얼굴에 있는 즐거운 표정에 유독 내 마음은 점점 서글퍼졌다. 얼음을 깨트리고 빙어가 보인다. 한 마리 잡았다. 환호성이다. 어릴 때 동생 똥기저귀 빨기위해 얼음을 깨트리던 생각이 생생하여 서글퍼진다.
아홉 살쯤 되었을 때는 6.25 전쟁 후라 옷이라곤 미군들이 쓰다버린 군용담요를 주어다가 몸빼를 만들어 입는 게 겨울 방한복의 전부였다. 내복이라곤 그 시절 구경도 해본 적 없고 있는 줄 몰랐다. 맨살에 광목으로 만든 속 고쟁이를 만들어 하나만 달랑 입고 그 위에 담요 몸빼를 입고 칼바람 속에서 동생들 똥 기저귀를 빨아야했다. 지금은 세탁기로 빨래를 하는데도 그것도 귀찮다고 간편한 종이 기저귀를 한번 쓰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버린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정말 격세지감을 느낀다. 어릴 때 논 한 귀퉁이에 있는 웅덩이에 얼음을 깨고 내 주먹과 똥 기저귀 하나만 들어갈 정도로 구멍을 뚫어서 그 속에 두 손을 넣고 기저귀를 빨아야 했다. 손이 꽁꽁 얼어 집에 오면 방바닥 이불속에라도 손을 넣으면 따뜻해지겠지만 그렇게 하면 동상에 걸린다고 해서 마음 놓고 손을 녹인 적이 없었다. 겨울만 되면 내 손등은 마치 가뭄 뒤에 논바닥이 갈라지듯 손등이 갈라지는데 학교에 가보면 다른 아이들은 나처럼 손등이 갈라지진 않은 것 같았다. 그 시절 겨울은 눈 위에 눈이 오고 쌓이고 또 쌓이고 몸과 마음이 춥고 시린 생각 뿐이다.
눈이 쌓이면 맨 처음 초벌은 넉가래로 밀고 두 번째로는 싸리비로 쓸고 세 번째는 수수비로 쓸고 나면 아침을 먹는다. 아침이라고 해야 유일하게 보리쌀 한 주먹에다 시래기 말린 것이다. 산 취나물이나 한 가득 놓고 푹 끓인 멀건 죽을 한 대접 먹고 나면 똥 기저귀 빨고 눈 쓸고 얼어붙은 몸이 녹을 여유도 없이 몽당연필 한 자루 양철필통에 넣고 책 몇 권과 공책이라곤 국어, 산수공책 두 권을 책보자기에 돌돌 말아 허리에 메고 그때부터 20리 길을 걸어야 수업 종 치기 전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새엄마가 오던날 삽입?>
지나간 세월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어린 아이가 어떻게 견뎠을까 마음이 시려온다. 새엄마가 무서워서 온갖 고생을 다해도 힘들다는 표현도 못했다. 내 생일이 음력으로 5월 중순인데 생일날 처음으로 먹어본 음식이 조당 숙이라고 하는 좁쌀 죽을 먹었는데 매일 매일 조당 숙만 먹고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도 해봤다. 그날 처음으로 시래기 나물 종류가 들어가지 않은 좁쌀죽을 먹어봤다. 그날 저녁 울면서 두 손 모아 기도했다. “부처님, 산신령님, 하느님, 모두모두 도와주세요. 조당 숙만 먹고 살 수 있도록 우리 집에 좁쌀 한 가마니만 보내주세요.” 두 손 모아 빌며 울었다. 이렇게 맛있는 죽도 있었구나! 내 생일날 처음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보았다. 다음날부터 또 다시 우리 집 진미 상차림은 시작되었다.
어느덧 겨울이 지나 새봄은 여지없이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혔다. 밭고랑이나 논둑에 냉이랑 꽃띠지, 망초 대 같은 푸른 잎들은 눈에 띠는 대로 많이 캐 와야 죽을 끓여 먹을 재료가 됐다. 너무 힘이 들었다. 서울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거기 가서 부잣집에 식모살이로 들어가면 일 년에 두 번 설, 추석 명절에는 좋은 옷도 사주고 쌀밥도 먹을 수 있다고 옆 마을 5학년 언니한테 들었다. 세끼 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하니 내가 자격이 되는지는 몰라도 누가 나 좀 서울에 식모살이로 보내줬으면 하는 마음이 정말 간절했다. 아니 소원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밥은 먹고 싶은데, 할아버지한테 식모살이 보내달라고 빌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빌어본다고 될 일은 아닌 듯 했다. 땅 속에 자고 있는 엄마를 불러볼까? 내일은 학교 갔다가 집에 들어오지 말고 무작정 서울로 발걸음을 옮겨 볼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엄마 없는 것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아버지까지 못보고 어떻게 서울가서 살 수 있을까,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아버지 생각에 차마 집을 떠날 순 없었다. 그리고 알아 봤더니 나이가 너무 어려서 식모살이로 들어 갈수가 없다고들 한다. 어떡케 하면 조울까? 배는 고프고 누가 밥한 수가랄 줄 사람이 세상 전지 한사람도 없었다. 땅속에 있는 엄마를 목이 터지도록 불러 봤다.
.
땅꾼소녀
봄에 대한 기다림, 생명의 향기가 가슴 두드리는 봄. 쨍쨍 내리 쬐는 햇볕에 막연히 희망을 담아본다. 4월에는 나물 뜯으러 샘말 언니들이 여럿 올 것 같다. 많이 왔으면 좋겠다. 재작년에는 4명, 작년에는 언니들 5명이 나물을 뜯으러 왔다. 언니들이 많이 와야 밥을 얻어먹고 살 수 있다. 1년 중에 4~5월 두 달을 손꼽아 기다린다. 산나물 뜯는 이 계절이 되면 점심밥 한 끼니이지만 꿈에도 그리는 밥을 먹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 년 내내 산나물을 뜯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니들은 5-6학년, 나는 3학년이었다. 아래 마을에서 언니들이 나물 뜯으러 오고 있다. 빨리 숨어야지. 내가 따라가면 어린아이라고 산 속에 같이 갈 수 없다고 돌멩이를 던져 가며 따라오지 못하게 할 테니.
대장리로 가야 고비랑 고사리를 많이 뜯는데 왕복 팔십 리 길을 혼자 가려니 걱정이다. 대장리는 깊은 산중이라 문둥이 들이 많다고 들었다. 혼자 가면 잡혀 먹고 여러 명씩 함께 다니면 문둥이들이 잡아먹지 못한다고 했다. 그 시절에는 문등 이들이 왜 그리 많았는지 그래서 언니들 뒤를 몰래 따라 가야한다. 언니들이 우리 집 앞을 지나고 나면 멀찍이 있다가 따라가야 할 것 같다.
언니들이 산비탈로 막 접어드는데 살모사 한 마리가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다. 작년 아랫마을 오빠들이 뱀을 잡는 것을 본 일이 있었다. 저 뱀을 잡아야 언니들과 같이 나물도 뜯을 수 있고 밥도 얻어먹을 수 있다. 깡통만 들지 않았을 뿐이지 거지가 따로 있으랴. 내가 바로 거지가 아니고 뭐겠는가? 어머니가 살아 계셨으면 밥을 얻어먹기 위해 뱀을 잡진 않아도 될 텐데 지금 나는 거지일 뿐만 아니라 땅꾼이기도 하다.
뱀을 잡고 난 뒤부터 언니들이 나물 뜯으러 같이 가자고 했다. 그 날은 나물도 다른 때보다 많이 뜯었다. 언니들이 점심을 먹으려고 모여 앉았다. 나는 멀찌감치 앉아 찔레를 꺾어 먹고 있는데 착한 언니 한 명이 오라고 한다. 다섯명이 도시락 뚜껑에 한 숟갈씩 덜어 준다. 그렇게 모인 밥이 한 그릇은 넘었다. 몇 달 만에 먹어보는 밥인지 생각도 잘 나지 않는다. 그 밥은 단지 밥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내 생명줄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점심을 먹고 고비, 고사리 굵은 것을 언니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착한 그 언니는 받지 않겠다고 한다. 나물이 너무 많아서 무거워 못 가지고 갈 것 같아 모두 나누어 주고 집에는 취나물, 다래순만 잔뜩 가지고 갔다. 팔아도 돈도 안되는 나물만 가지고 왔다고 새엄마에게 꾸중만 들었다. 그 다음에 삽주싹, 참밀 대, 단 나물이나 고비, 고사리 같은 고급 나물을 많이 뜯어 어머니에게 드리고 장에 내다 팔아서 돈을 버는 날은 눈깔사탕 한 알을 먹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눈깔사탕보다 언니들에게 나물 주고 밥 얻어 먹는게 더 행복했다.
언니들이 빨리 와보라고 부른다. 뱀이 쌍으로 두 마리가 엉켜있다. 나는 살아야 한다. 저 뱀을 잡아야 하는데 두 마리가 한꺼번에 있어서 위험하다. 저 뱀은 똬리를 틀고 있으니 뱀에게 물려 죽나 굶어 죽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한번 해보자.
이 악물고 긴 막대기로 제일 중간 부분을 내리치고 머리 쪽을 재빨리 두 번만 때리면 뱀은 힘을 못 쓴다. 굶어 죽기보다 뱀을 잡아야 산 속 외딴집에 산다고 놀림을 받지도 않고 용감한 척 뽐낼 수도 있으니 오히려 일거양득이다.
길가에 길게 누워있는 뱀은 잡기가 참 수월했다. 뱀의 가장 가운데 부분인 배를 힘껏 단번에 내리치고 목을 두 번 내리치면 쉽게 잡을 수 있다. 뱀은 흙냄새를 맡으면 다시 살아남아 원수를 갚는다고 한다. 잡은 뱀은 나무 막대기로 번쩍 들어 나뭇가지 위에 걸어 놓고 오면 다시는 살아남지 못한다고 한다.
언니들은 작년까지만 해도 나물 뜯을 때 함께 끼워주지 않더니 이제는 나를 안 데리고 가면 뱀이 무서워서 걱정된다고 한다. 어린 나도 뱀을 잡으면서 치가 떨리도록 무서웠지만, 너무 배가 고파서 무섭지 않은 척하며 뱀을 때려잡았다.
옛 어른들 말씀에 사람 목숨만큼 질긴 것이 없다고 했는데 내 목숨은 정말 질긴 모양이다.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을 보면 본능적으로 살고자 하는 노력이 나를 지탱해주었나 보다. 감사한 일이다. 어린 시절 불행을 극복하고 소박하지만, 행복하게 사는 지금의 내 모습은 그냥 얻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토회 법륜스님을 만난 인연으로 부처님 말씀도 공부하고 아침마다 108배 기도를 통해 내 업보를 수행 정진하며 몸도 마음도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앞으로는 살생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마음으로 남은 인생 열심히 참회 기도하면서 살고 싶다.
국제시장의 설움
열두 살이 되던 초여름 칠 개월 된 어린 동생을 내 등에 업혀주며 오빠 심부름을 다녀오란다. 부지런히 판교 장터에 도착했는데 서울에서 버스 한대가 터미널에 들어왔다. 시골아이인 나는 입을 벌린 채 무슨 구경거리 없나 기웃거리다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나도 저런 버스 한번만 타 봤으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데 경기도 광주에 사시는 작은아버지께서 조그만 봉지에 눈깔사탕을 손에 들고 내리신다. 나를 보시더니 “마침 잘 만났다. 운전사 양반, 나 이 차 다시 타고 가야하니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하시더니 내 손을 잡고 근처 약국에 들어갔다. “안녕하시오. 건너 마을 저의 형님아시죠? 형님 오시면 제가 조금 바빠서 못보고 간다고 말씀 좀 전해 주시오.” 하시고는 갓난아기를 약국에 맟기고 재촉하시며 뒤 돌아 보지도 못하게 하시었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가 동생을 빨리 집으로 데려 갈지 큰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아기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작은아버지는 다시 내 손을 잡고 버스에 올라타셨다. 이게 무슨 영문인지, 왜 버스를 탔는지 궁금했다. 서울 가서 간딱꼬(원피스) 하나 사줄게 라고만 하신다.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느덧 해질 무렵 서울에 도착해서야 작은 아버지께서는 “너, 내 말 잘 들어라. 너의 작은 고모가 부산 국제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는데 거기 가서 살아야 한다. 거기 가면 하얀 쌀밥에 고깃국 매일 먹고 살 수 있단다.” 6.25 이후 가난한 시절에 쌀밥에 고깃국이란 처음 듣는 말이었다. 고깃국이라니 생각만 해도 이 무슨 꿈같은 말이던가? 마음속 깊이 꿈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보면서 정말 고깃국을 먹을 수 있을까? 이런 저런 상상을 하며 완행열차를 타고 열 두 시간 걸려 다음날 오후 부산역에 도착했다. 고모님 댁에 가보니 집이 크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공장인지 가정집인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으리으리했다. 집에는 일하는 사람이 두 명이나 있었고, 며칠 후 국제 시장 고모네 가게를 갔는데 가게에 구경 간 나를 점원 언니들이 동그랗게 모여 동물원의 원숭이 보듯 구경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너무 촌스러워 외계인 같아 보였는지. 점원 언니들은 시골뜨기 구경을 실컷 하고는 “너 어디서 왔니?” “경기도 광주에서요.” 그 시절 판교보다는 광주가 더 큰 지역이라고 생각하고 광주라고 했다. 지금의 판교는 예전에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너더리라고 불리었다. “정말 친 고모야?” 라고 하면서 동물원에 원숭이 구경하듯 옆 점포의 언니들까지 모였다.
내가 아무리 시골뜨기라고 해도 나이가 열두 살이나 되였는데 창피하고 부끄러움은 알 만한 나이였다. 광주라고 말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조금이라도 큰 도시를 대면 내가 아주 산간벽지에서 왔다는 것을 모르겠지. 시골뜨기가 잔머리를 잘못 굴려 더욱 곤욕을 치를 줄이야. 언니들은 앞에 경기도는 못 들었는지 광주란 말만 기억했나보다. “촌년, 저 가시나 상대 하지 말자. 고향이 광주란다.” 나는 그때만 해도 경상도, 전라도 지역감정이 뭔지 몰랐다. 촌년을 조금 면해보려고 경기도 광주라고 했다가 졸지에 고향이 바뀌었다. 요즘 말하는 왕따를 그 시절 당하고 억울하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살았다.
며칠 후 고모가 할 일을 알려 주었다. 아침에 시장에 가서 가게 문 열어 놓고 오후에 집에 와서 저자를 보라고 한다. 고생문은 이제부터 시작되었다. 가게 문 여는 것이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열두 살 어린아이가 다루기에는 힘에 벅찬 일이었다. 점포 문 열고 닫는 것이 요즘처럼 자동 셔터라 드르륵 올리고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함석에 네모난 큰 강목으로 대못을 박아 만든 문짝을 밀어 넣었다 당겼다 하는 일이었다. 어른 장정도 힘겨운 일을 고모는 인정사정없이 시켰다. 무거운 문짝이 한 가게에 열두 개나 있었다. 그 것뿐이랴. 고모네 가게는 국제시장 4공구 A동 특1호에 하나있고, 5공구 A동 13호에도 점포가 있었다. 그 시절 장사수완 좋은 점원 구하기가 어려워 특별대우를 해주어야만 장사를 할 수 있었다. 고모는 돈 안주고 막 부려먹기 편한 어린 조카딸을 만석군 농가에 머슴 부리듯이 두 곳의 가게 문을 나 혼자 열고 닫게 시켰다. 생각해보니 너무도 억울하다.
학교에 가다
고모님 댁에 올 즈음 나는 초등학교 4학년 쯤 다녀야 했는데 아무래도 학교 보내줄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틈틈이 독학을 하다가 인근 초등학교에서 야간 수업을 연다는 소리를 들었다. 학구열이 넘치는 마음을 주체 할 수 없어 초등학교를 보내 달라고 했다. 그냥 안된다고 하면 될 것을 온갖 욕설을 퍼부어대며 “계집애가 한글 읽을 줄 알면 됐지 학교는 무슨 학교! 내일부터 장사하는 거나 열심히 배워라. 시골구석에서 굶기를 날 새듯 한다기에 데려왔더니 이제 배지가 부르냐? 학교타령이게!”
삶은 호박에 손톱이나 들어 갈 수 있을까? 눈물을 머금고 고모가 시키는 대로 소처럼 일이나 하는 것이 운명인가보다 했지만 고민 끝에 초저녁에 공짜로 여는 한문 공부방에 다니겠다고 거짓말하고 토성 초등학교 야간에 다녔지만 두달만에 들통이 났고, 다음해 남일 초등하교 6학년에 재도전해서 졸업은 간신히 했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했던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중학교는 입도 떨어지질 않아 고심하고 있을 무렵 천주교재단인 데레사 여중이 집 가까이 있었다. 용기를 내어 교무실에 찾아갔다.
“선생님 중학교에 입학 좀 시켜주세요.”
“너, 이 녀석 시험은 봤느냐?”
“아니요. 시험 볼 자격이 안됩니다.”
“학교 다닌 자격은 되고?”
“네. 배우고 싶어요. 선생님, 지금 시험 보면 안될까요?”
당돌한 나에게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간단한 문제를 내주셨다.
어떤 답을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초등학교를 징검다리 건너듯 하고 독학을 했기에 여느 중학생 수준은 안되었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공부하고 싶어 하는 나를 기특히 여겨 학교장 재량으로 야간중학교에 다니도록 해주셨다. 선생님을 쳐다보며 닭똥 같은 눈물이 흐르고 있는데 이젠 교복이 걱정이 됐다. 선생님이 교복까지 졸업생 것을 얻어주셨고 모든 것이 만사형통인 것 같지만 더 큰 고민은 고모께 허락 받는 것이었다.
요즘 같으면 산간벽지에 살아도 이정도의 혜택쯤이야 누구나 받고 살 수 있는 의무교육이인데 그 시대에 태어난 것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고모에게 말씀드렸더니 웬일인지 꾸중은 안하고 ‘어떤 학교서 시험도 못 치른 너를 받아 줄기고’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다.
열어덟 살에 어엿한 중학생이 되어 두근대는 가슴을 감싸안고 해질 무렵부터 시작되는 학교생활이 즐겁기로 말하자면 숨어서 만화책 읽는 기분이라고 해야할까?
고달픈 주경야독 누가 말했는지 모르지만 아침 공기도 상큼, 막힌 코가 뻥 뚫리는 그런 날들이었다. 국어 영어 수학 한문은 그냥저냥 하겠는데 막히는 과목은 역사 지리 과목이다. 그놈의 징검다리 졸업 때문에 뒷받침이 부족했다.
시험 때면 졸음을 참지 못해 카페나라는 알약을 먹어도 봤는데 정신이 몽롱하고 빙빙 돌았다. 걱정하지 말자 주문을 외우기도 하고……. 학교생활 모두가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검정플레어 스커트에 풀을 먹여 빳빳하게 다린 하얀 칼라 교복이 지금도 그립다
|
첫댓글 선생님! 존경합니다.
그 어려운 고비를 견디시고 선생님의 꿈을 이루셨네요.
이런 경우를 두고 '어려서 고생은 사서한다' 는 말이 생겼나 봅니다. 어린 나이에 너무 고생이 심한 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드려 죄송합니다만, 강인한 정신력을 닮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