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詩 春香戀歌
全 鳳 健 著
解說 金 宇 正
成 文 閣
序 ………………… 1
作品 ………………… 2
解說 ………………… 52
序
1959년에 「사랑을 위한 되풀이」를 내고, 두 번째 詩集이 된다. 별로 할 말이 없다.
나에게 있어서는 , 이 時代에 또 하나의 詩集을 가질 수 있었다는 事實이, 무엇보다도
광휘(光輝)로운 일이다.
題字를 주신 原谷 金基昇 先生께 감사한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詩友 金光林 兄의 도움이 컸다.
출판을 맡아주신 成文閣 社長 李聖雨 先生의 好意는 잊을 수 없는 일이다.
1965年 5月
著者
女子(여자)에요.
그래요, 나는 女子(여자)에요.
그런데 나는 獄(옥)에 있어요.
여자는 아이를 낳아요.
나도 낳을 수 있어요.
어머니가 나를 낳은 것처럼.
그런데 나는 獄(옥)에 있어요.
어머니의 이름은 月梅(월매).
아버지의 姓(성)은 成氏(성씨).
그래서 나는 成春香(성춘향).
어머니는 숲을 헤치고 아버지는
냇물을 더듬어서 산에 올랐어요.
봉우리에 壇(단)을 차려 빌었어요.
한밤의 꿈.
靑鶴(청학) 탄 仙女(선녀)가 어머니를 찾아왔어요.
花冠彩衣(화관채의)의 仙女(선녀)는 桂花(계화) 핀
가지 하나를 들고.
열 달이 지났어요.
온 방에 彩雲(채운)이 玲瓏(영롱)한데
어머니는 구슬을 낳았어요.
그것이 나였어요.
그런데 나는 獄(옥)에 있어요.
나도 낳는다면 구슬을 낳고 싶어.
구슬 같은 아이를.
그런데 나는 獄(옥)에 있어요.
어릴 때에는, 새가 나는 것을,
제비가 나는 것을, 나비가 나는 것을,
한 마리 또 한 마리, 그렇게 세었어요.
지금은 안 그래요. 한 마리 한 마리가
雙(쌍)을 지어 나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나는 獄(옥)에 있어요.
남산에 피는 꽃은 내 마음에 피는 꽃. 북산에 물드는 분홍빛은
내 온몸에 물드는 분홍빛.
그런데 나는 獄(옥)에 있어요.
버드나무 千絲萬絲(천사만사)로 늘어진
가지 사이에서 우는 黃金鳥(황금조)는,
내 가슴 둘레를 돌면서 우는 새.
그런데 나는 獄(옥)에 있어요.
나는 사랑하고 있어요.
그런데 나는 獄(옥)에 있어요.
그런데 나는 사랑하고 있어요.
여기서요.
廣寒樓(광한루), 여기서 만났어요.
지금도 나는 여기 있어요.
나는 사랑하고 있는걸요.
이제는 우거진 숲에 들어도
무섭지 않아요. 햇살이 안 드는
어둔 곳이 오히려 정다워요.
풀잎에 손이 스치면
슬며시 허리께가 부끄럽기도 해요.
나는 사랑하고 있는걸요.
나는 여기 앉아 있어요,
그이는 저만치 서서 있어요.
지금도 나는 놀라워요.
그이는 나를 언제나 놀랍게 해요.
흰 돌 위 쓸리는 물에, 목욕하고 앉은 제비. 사람을 보고, 그 놀란 제비.
그것이 그이 앞의 나에요.
내 입술은 반쯤 열려 있어요.
물에 젖어서 반쯤 흔들리는 蓮(연)꽃이에요.
나는 사랑하고 있는걸요.
보세요, 나는 이렇게 앉아 있는데,
저만치 서서 있는 그이.
肉粉唐鞋(육분당혜) 신은 발은 極上細木(극상세목) 겹보선.
藍甲紗(남갑사) 대님에 影綃緞(영초단) 허리띠.
가슴엔 道袍(도포) 받친 黑絲(흑사)띠.
보세요, 細白苧(세백저) 상침바지.
毛綃緞(모초단) 도리囊(낭) 唐八絲(당팔사) 중치막.
六紗緞(육사단) 겹褙子(배자)의 蜜花(밀화)단추.
곱게 빗어 밀기름에 잠재운 머리,
맵시 있는 宮綃(궁초)댕기.
보세요, 仙風(선풍) 어린 그 얼굴.
보세요. 무어라고요. 안 보인다고요.
저만치 서서 있는 아무도 없다고요.
나는 앉아 있는데,
그래요, 나는 이곳에 앉아 있어요.
무어라고요, 무어라고요.
아무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앉아 있는데,
그래요, 나는 이곳에 앉아 있는데.
나는 칼을 쓰고 앉아 있다고요.
칼을 쓰고, 칼을 쓰고, 칼을 쓰고.
저만치 있는 것은
목 매달아 죽은 鬼神(귀신).
이곳은 廣寒樓(광한루)가 아니라고요.
지금은 궂은 비 퍼붓는
깊은 밤의 三更(삼경)이라고요.
저것은 亂杖(난장) 맞아 죽은 鬼神(귀신), 저것은 刑杖(형장) 맞아 죽은 鬼神(귀신)이라고요.
<이년!
잡아 내리라!
형틀에 올려 매어
物故(물고)를 내어라!
매우 쳐라! 매우 쳐라!>
팔다리가 갈라지나요.
어머니, 팔다리가 갈라지나요.
어머니, 그러나 나는 죽지 않아요.
그이는 살아서 있는 것을.
나는 네 가닥으로 떨어져 나간대도,
팔 다리가 머리를 이고, 가슴과
허리는 받쳐들고, 그이에게로 가요.
나는 가서 그이와 함께 살아요.
나는 사랑하고 있는걸요.
육천 번을 죽인대도 매한가지.
육천 마디 얽힌 사랑인 것을.
육천 마디 맺힌 마음인 것을.
<큰 칼 씌워 下獄(하옥)하라!
큰 칼 씌워 下獄(하옥)하라!>
보세요, 저것은 부서진 竹窓(죽창).
보세요, 이것은 무너진 壁(벽).
보세요, 이것은 헐고 낡은 자리.
나는 이곳에 앉아 있어요.
보세요 어머니, 찢겨서 피 흐르는
살에는 狼藉(낭자)한 바람.
그러나 어머니, 나는 보아요.
나는 이곳에 앉아 있어도,
나는 獄中(옥중)에 앉아 있어도,
나는 廣寒樓(광한루), 앉아 있는 것.
육천 마디 맺힌 마음인 것을.
육천 마디 얽힌 사랑인 것을.
보세요, 저만치 서서 있는 그이를,
서서 있는 그이를,
어머니!
채찍은 내리쳐,
모진 바람은 일어
말 탄 당신은 갔네.
한 점의 구름이었네.
흩어진
베개.
흩어진 鴛鴦(원앙)새,
珊瑚甁(산호병)
梧桐甁(오동병)은
부서지고.
깨어진
天銀(천은)알안자.
赤銅子(적동자).
葡萄酒(포도주)
紫霞酒(자하주)는
엎질러졌네.
채찍은 내리쳐,
赤銅火爐(적동화로)의
불 꺼지고.
소리 없는
金盞(금잔),
玉盞(옥잔).
가라앉는 蓮葉船(연엽선),
가라앉는 芭蕉扇(파초선).
채찍은 내리쳐,
메마른 바람과
누런 티끌은
버려진 땅을 휩쓸고,
나는 빛을 잃었네.
내 치맛자락은 빛을 잃고
해도 빛을 잃었네.
<어머니, 이제 香(향) 태워 冊(책) 읽는
밤은 오지 않아요. 바람의 가락을 지닌
봄날의 대나무를 나는 또
언제나 볼 것인가요.>
채찍은 내리쳐,
떨어진 버들가지.
떨어진 燈籠(등롱).
꺼진 燈籠(등롱)의 불꽃.
떨어진 내 두 손.
채찍은 내리쳐,
깨어진 이슬. 蓮(연)꽃
이파리. 깨어진
내 두 눈과
鳳尾草(봉미초)의 속눈.
채찍은 내리쳐,
무너진 대문 안에,
무너진 내 가슴 위에, 또
무너진 中門(중문).
어둠은
두루미와
桂花(계화)를 삼켰네.
두 마리의 물오리는
어둠이 삼킨 내 무릎 위에
목을 얹고 죽었네.
<이제 그 발자국은 삼문을 나오지 않아요. 나에게로 오면서 꺾어 드는 버들이
없어요. 푸름이 없어요. 꽃과 꽃 사이로 난 길이 없어요.
어머니, 나는 또 언제나 七絃琴(칠현금)
비껴 안는 南風歌(남풍가)의 밤을
맞이할 것인가요.>
채찍은 내리쳐,
모진 바람은 일어
말 탄 당신은 갔네.
한 점의 구름이었네.
채찍은 내리쳐,
온 산에
새 나르는
그림자
그치고.
당신은 말했어요.
꾀꼬리의 나래는 金(금)빛이었다고요.
내 나래는 다른 곳에 있어요.
비추이는 것이 없는 달 기슭에.
당신은 말했어요.
桂樹(계수) 紫檀(자단) 牧丹(목단) 碧桃(벽도)에 취한 산은
江(강)물에 떨어져 잠겨 있었다고요.
그러나 내 나래는
금 간 거울의 금 간 데에 있어요.
당신은 말했어요.
진달래 꺾어 머리에 꽂은 女子(여자)가,
질끈 꺾어 함박꽃 함숙 입에 문
女子(여자)가 있었다고요.
그러나 내 나래는
소리가 되지 않는 고함소리
맨 가운데 있어요.
당신은 말했어요.
맑은 물에 손을 넣고, 발을 넣고,
입을 넣어 머금는 女子(여자)가 있었다고요.
그러나 내 나래는 다른 곳에 있어요.
문 위에 달린 허수아비의 손에 있어요.
당신은 말했어요.
버들가지 사이로 가면서
꾀꼬리를 날리는 女子(여자)가 있었다고요.
그러나 내 나래는
서성거리다가 가늘어지다가
희미해지다가, 사라져 버리는
그림자에, 아무도 오지 않는
밤의 바닥에 있어요.
당신은 말했어요.
버들잎 주루룩 훑어
물 위에 띄워 보내는 女子(여자)가 있었다고요.
그러나 내 나래는
날아도 날아도 흔들리지 않는
햇살에 있어요.
당신은 말했어요.
벌이랑 나비는 꽃과 물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고요.
그러나 내 나래는
내리뜬 눈길에 떨어져 있어요.
당신은 말했어요.
내가 흰 구름 사이에 있었다고요.
내 紅裳(홍상)자락, 내 白絃紗(백현사) 속것가리,
그리고 내 박속같은 흰 살결이
흰 구름 사이에 날리면서 있었다고요.
그러나 내 나래는 다른 곳에 있어요.
당신은 말했어요.
丹靑白紅(단청백홍)이 고물고물한 속을 지나
당신은 나에게로 왔었다고요.
그러나 내 나래는 다른 곳에 있어요.
마주앉고
서고 눕는 백년
三萬六千日(삼만육천일) 아닌 바다,
그 텅 빈 바다에.
아니에요, 아니에요.
바다도 지워 버린 안개에 갇혀 있어요.
빛을 삼키면서
빛을 지워 버리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에
疊疊(첩첩)이 싸인 風景(풍경)을 지워 버리면서,
밀려 오는 저것은 무엇일까.
저것은 안개일까.
내 손도 지워 버리네요.
내 무릎도 삼키네요.
지켜 보아도
들쳐 보아도
내가 자꾸
없어지네요.
나를 삼키고
나를 지워 버려
내가 나를 못 보는 이것은
烏鵲橋(오작교) 廣寒褸(광한루)에 서리던
안개가 아니네요.
이곳은 어디일까
지금은 언제일까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것 보세요.
안개가 밀리는 자리에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어요.
벌도 나비도 없지만
黃金鳥(황금조)도 杜鵑(두견)도 없지만
그 나래는 지워지지 않아요.
흐르는 물은 없지만
흐르는 물소리는 지워지지 않고
있어요.
蘭草(난초)도 牧丹(목단)도 없지만
그 냄새는 지워지지 않고 있어요.
그리고 내가,
그래요, 지워지지 않는 나의
꽃보다도 고운 얼굴이,
눈보다도 흰 살결이,
어디서 가뭇가뭇
떨어져 내리고 있어요.
거기서 떨어져 내리면서
저 소리를 듣고 있을까.
<비녀
비녀……>
<우지 마라 우지 마라>
<잡아 내리라!>
<큰 칼 씌워 下獄(하옥)하라!
큰 칼 씌워 下獄(하옥)하라!>
큰 칼 씌워……>
<사랑 사랑
내 사랑아>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천리라고요.
푸름도 나무도 보이지 않는,
당신과 나의 서울이 보이지 않는
길이라고요.
그래도 나는 가야 해.
만리의 길이어도 가야 해.
목줄기에 숨이 차서 새매도
송골매도 나래를 접는다지만,
보라매도 비바람도 쉬어 넘는
고개라지만, 나는 가야 해.
나는 가요. 높디 높은
洞仙嶺(동선령)도 아니 쉬어 넘어요.
벗어 들고요, 나는 보선 벗어 들고.
그런데 내 무릎은 어디에 있을까.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가는 비가 산란하게 뿌리는 길에서
당신도 말도 진한 愁心(수심)에 가리였나.
안 들려요, 안 들려요, 안 들려요.
지금은 언제일까
이곳은 어디일까.
저것은 무엇일까.
나래 소리같은 저것은 靑鳥(청조)일까
나뭇가지에 걸리는 바람일까.
<나무 아래 江(강)물 흐르고
江(강)물 위에 걸린 다리
다리 위에는 서로
보내지 못하는 손과 손이……>
그런데 내 손은 어디에 있을까.
당신의 손은 길이길이 울고 간
말의 네 발굽과 함께 사라졌어요.
마루가 공중에 떠 올랐어요.
당신의 옷은 사나운 물결이더군요.
마루가 공중에서 뒤집혔어요.
당신의 옷은 사나운 바람결이더군요.
내 손에는 잡히지 않더군요.
그때부터에요. 그때부터,
떨어져 내리고 있어요.
내 얼굴이 꽃보다도 곱게,
내 살결이 눈보다도 희게.
내 손에는 잡히지 않더군요.
두 그루 杏子木(행자목)도
얽힌 다래나무와
으름나무의 줄기도.
참, 당신은 말했어요.
강물과 다리에 지는 해를.
쓸쓸히 빗낀 구름의 이야기를.
먼 邊境(변경)에 서성거리는 사람을.
끝 간데없는 길 이야기를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곳은 어디일까.
지금은 언제일까.
저것은 무엇일까.
빛을 삼키면서
빛을 지워 버리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에
疊疊(첩첩)이 싸인 風景(풍경)을 지워 버리면서,
밀려 오는 저것은 무엇일까.
저것은 안개일까.
내 손도 지워 버리네요.
내 무릎도 삼키네요.
지켜 보아도
들쳐 보아도
내가 자꾸
없어지네요.
蓮(연)이 없네요.
내가 없네요.
이곳은 어디일까.
지금은 언제일까.
저것은 무엇일까.
나래소리같은 저것은
바람소리같은 저것은.
이 안개 속에 갇혀서
한 마리의 기러기가 있다면
날고 있다면,
기억이 있을까요.
그대로는 잘 수 없었던 그 일이.
뼈에서도 汁(즙)이 나던 그 일이
짓눌린 나랫죽지가
밤 새워 춤을 추던 그 일이.
그래도 기러기의 두 눈이
보는 것은 안개뿐일까요.
먼 만리 끝 기슭을 더듬어도
두 눈으로 드는 것은
沙汰(사태) 지는 안개뿐일까요.
안개는 기러기의 목줄기도 삼키고
갈빗대도 지워 버리나요. 그래서
기러기의 목줄기가 되살아 나오고
싶어도, 이제는 겨드랑 밑의 갈빗대와 갈빗대 사이가 없나요.
기러기는 죽어서 날고 있나요.
안개는 壁(벽)인가요.
壁(벽) 속을 기러기의 허깨비가
날고 있는 것인가요.
지금은 언제일까
이곳은 어디일까.
저것 보세요
저것 보세요.
蓮(연)이 없어요.
내가 없어요.
壁(벽)인데,
꿈 아니면 볼 것인가.
이곳엔
걷을 珠簾(주렴)이 없고
지금은 案席(안석) 밑에 베개 놓고
닫을 문도 없다.
나에겐 잠도 오지 않는다.
잠이 온대도
꿈의 나래가
얼마나 길어서
이 山(산)을 넘어올 것인가.
목아지가 길어서
잘도 울리는 鶴(학)의 목소리도
이 山(산)은 넘어오지 못하는데.
슬픈 마음은 산이 되고
쓸쓸한 마음은 산이 되었는데.
나를 둘러치면서,
해가 들어도, 비인
산이 되었는데.
꿈 아니면 볼 것인가.
어디서 그 노래와 만날 것인가.
이곳엔
불어서 차는 것이 있는
十五夜(십오야)의 하늘이 없다.
어젯밤도 내리는
보슬비도 없어서,
潤(윤)나는 빛과 뜻 있는 모양이 없다.
평생을 보고도 남을 모습이 없다.
女子(여자)만이 있는 곳이 있었는데,
깊디 깊은 곳이 있었는데,
지금은 간직할 아무것도 없다.
찬 바람이 불어도 침실이 없다.
이곳엔 베개도 팔도 없어서
이마큼 가는 내가 없다.
나를 후리쳐 가는 것이 없다.
내 中心(중심)에 뜨겁게 들어서,
끓어서, 넘쳐서 나는 것이 없다.
꿈 아니면 볼 것인가.
어디서 그 노래와 만날 것인가.
생 밤
삶은 밤.
수박.
흰 꿀.
꿈 아니면 볼 것인가.
어디서 그 노래와 만날 것인가.
누가 구름을 탔던가,
누가 白鷺(백로)를 탔던가.
누가 고래를 탔던가,
말을 탔던가.
누가 鶴(학)을 탔던가.
누가 꾀꼬리를 탔던가,
누가 꾀꼬리를 탔던가.
꿈 아니면 볼 것인가.
어디서 그 노래와 만날 것인가.
하늘에 있는 하나의 것을 바라는
해바라기는 一刻(일각)인들 변함이 없는데.
땅이 무너져도 내 그림자는
돌이 될 수 없는데.
水(수) 火(화) 木(목) 金(금) 土(토)로
맺은 사연이 올올이 찢기어도,
그 목소리는 잠결에 구슬인데.
그 목소리는 四肢(사지)가 갈리는
어둠과 빛의 사이에서도 못 잊는데.
七尺(칠척)의 劍(검)이 내리쳐도
마음의 굽이마다 소나무는 푸르고,
대나무는 푸르른데.
전나무는 잎마다 빛을 던지는데.
육천 마디 얽히고 맺힌 사랑인데.
이곳엔 눈물만으로는
전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지금은 옷 벗지 않고 돌아누운
가슴에 안겨 오는 壁(벽)이 있는데.
꿈 아니면 볼 것인가.
어디서 그 노래와 만날 것인가.
당신은
노래하였네.
냇가에서,
버드나무에서 푸르러서 늘어진
千(천) 萬(만)의 가지 사이에서 너를.
꽃 속에서,
꽃에 비오는 동산에서.
모란에서,
펑퍼지고 고운 마음에서 너를.
산에 수놓인 紅綠(홍록)의 빛에서.
바람 속에서,
꿀벌과 나비에 물린 꽃술의
기꺼움에서 너를.
물의 푸름에서,
강의 맑음에서,
둥실 마주 떠노는 鴛鴦(원앙)새
깃털에서 너를.
해가 질 때에도 너를.
밤의 그늘에서도 너를.
달빛 그늘에 피는
배나무 꽃잎에서도 너를.
銀河(은하)에서,
銀河織女(은하직녀)의 베틀에서,
그 올올이 이어진
木花(목화)실 마디마디에서 너를.
혹은 가을에
단풍잎 타는
千(천)의 봉우리에서 너를.
거기 떠오르는 달에서 너를.
혹은 벼이삭에서,
黃金(황금)의 노적더미에서,
겹겹이 싸인 벼이삭
알알마다에서 너를.
銀欌
玉欌의
더는 누구도 못 꾸미는
꾸밈 속에서 너를.
너를
내가 부른다.
내 눈길이
다하는 곳에서.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곳에서
너를.
다시 바다에서 너를.
바다 그물에서 너를.
바다 그물 얽힌 매듭
설킨 매듭에서 너를.
네가 죽어도
내가 너를 부르마
물의 이름으로.
銀河水(은하수)
瀑布水(폭포수)
萬頃滄海水(만경창해수)
淸溪水(청계수)
玉溪水(옥계수)의 이름으로.
달밤엔 銀(은)의 띠가 되어서
땅을 두르는 長江(장강)의 이름으로
너를.
아니다
아니다.
칠 년을 비가 내리지 않아도
칠 년을 가뭄이 불타 올라도,
다름없이 넘치도록 많은
陰陽水(음양수)의 이름으로
너를 부르마.
너를 부르는
나는 새.
杜鵑(두견)
瑤池(요지)의 靑鳥(청조).
그리고
靑鶴(청학),
白鶴(백학).
大鵬(대붕)새.
더불어 아니고는
날아서 가지 않고 오지 않는
鴛鴦(원앙)새.
너를 부르마.
네가 죽어도
내가 부르마.
鐘(종)의 이름으로 너를.
慶州(경주)
全州(전주)
松都(송도)의,
鐘路(종로) 인경의 이름으로
너를.
너를 부르는 나는
인경 마치.
三十三天(삼십삼천)
二十八宿(이십팔숙)에 응하여
母嶽(모악)에 烽火(봉화) 끄고
남산의 烽火(봉화) 꺼서
온갖 발자취 끊인
너와 나의 밤을,
굽이쳐 울려 퍼지는
젖빛 꿀빛 소리로 채우마.
春香(춘향),
너와
나는
하늘이 기울어져도
땅이 기울어져도
沈香亭(침향정)에 그치지 않는
속삭임이다.
<좀더
좀더>
<이렇게……
이렇게……>
너와
나는
穿楊亭(천양정)의 햇살을
가르고 나는
화살이다.
그 화살을 중심 깊이
어김없이 맞아 들여
떨려나는 標的(표적)이다.
떨려나는 千(천)의 버들잎이다.
너와 나는
好春亭(호춘정)에
몰아드는 바람결.
이끼
돌멩이
짐승
냄새 스민
바람결마다 피어나는
百(백)의 꽃이다.
萬(만)의 꽃이다.
春香(춘향),
오 春香(춘향).
나는 부른다.
비바람이 풀숲을 쓰러뜨리고
비바람이 나무숲을 쓰러뜨리고,
벼락은 나무를 사르고
바위를 부수어도
벼락불 위에
해
달
별빛
풀려,
瑞氣(서기)로운
天宮(천궁)에서
너를.
너를
龍宮(용궁),
水晶宮(수정궁)에서도 너를.
月宮(월궁)에서도 너를.
사랑하는 입술과
사랑하는 손가락
사랑하는 허리와
사랑하는 젖가슴
사랑하는 고개와
사랑하는 눈 눈
사랑하는 사랑하는 팔과 다리,
잠자든 깨어 있든
사랑으로만 떨려나는 다리 거느린
오 너의 水晶宮(수정궁)에서 너를.
내가
너를
부른다.
꿈일까.
그 다리는 어디에 있을까.
동쪽은 어디일까.
그 숲 깊은 곳의 절은
어디에 있을까.
그 푸른 물빛은 어디일까.
나는 어디에 있을까.
이것은 꿈일까.
이것은 부서진 竹窓(죽창).
이것은 숫검정이.
이것은 떨어진 나래.
떨어진 나비의 나래.
아니다.
보선은 나비었네,
대님은 나비었네.
치마도 나비었네,
저고리도 나비었네.
바지는 나비었네.
나비었네 허리띠는 나비었네.
당신에게서, 나에게서
나비는 어지럽게 날으는데
나는 보았네.
오랜 소나무 사이
蘭草(난초) 물고 넘나드는 靑龍(청룡)을.
검은 龍(용), 如意珠(여의주) 물고 넘나드는
彩色(채색) 구름과 구름의 사이.
당신은 알몸이었네.
나도 알몸이었네.
나도 알몸이었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이것은 내 벌거숭이 목을 누르는 어둠, 이것은 내 벌거숭이 발을 얽어 맨 어둠.
나는 무엇을 알고 있을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것은 四肢(사지)에 엉키는 피와 어둠.
나는 그것으로 무엇을 짤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들을 수 있을까.
<빌어 묻느니 天上(천상)의 織女(직녀)
아가씨는 누구이신고,
아느니 오늘의 牽牛(견우)는
기어이 내 몸이오>
당신은
노래하였네.
春香(춘향),
너는
흰 꿀 스민
金(금)이다.
春香(춘향),
너는 온갖
별빛 서린
玉(옥)이다.
너는
千年(천년)을 피어난
땅의 꽃.
너는 錦貝(금패).
너는 瑚珀(호박),
너는 密花(밀화).
너는
千年(천년)을 영근
바다의 열매.
너는 眞珠(진주).
너는 玳瑁(대모).
너는 珊瑚(산호).
오,
당신은
노래하였네.
오,
한 사람의 女子(여자)가
제 입김으로 자신을 태워서
어둠에 솟는 검은 불길일 수 있을까.
그러면 하늘은 펼쳐질 것인가.
그러나 이것은 검은 숲.
그러나 이것은 눈먼 바람.
그러나 이것은 큰 칼.
이것은 내 목에 씌워진 큰 칼.
이것은 큰 칼의 눈먼 바람.
이것은 눈먼 바람이 휘젓는
내 머리카락.
이것은 검은 숲.
나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어디에 있을까.
이것은 밀려와서 덮쳐드는 형틀.
이것은 내 정갱이에 펄럭이는 物故狀(물고장).
나는 어디에 있을까.
한 아름 내리치는 笞杖(태장) 棍杖(곤장).
부러진 형장은 치마폭 물고 솟구쳐,
자꾸 치마를 잃어버리는 나.
치마를 잃어버리는 내
허벅지에 흐르는 피.
나는 어디에 있을까.
자꾸 치마를 잃어버리는 내 두 다리.
치마를 잃어버리는 벌거숭이 허벅지.
오오, 오오, 오오, 오오.
알몸인 내가
알몸인 당신을
업고 있었네.
당신을 업고,
나는 말이었네.
무지갯빛 암말이었네.
당신은 나를 몰아,
안개를 헤치며 이긴 싸움 북,
울리는 수레이게 하였네.
당신은 나를 몰아 구름이게 하였네.
당신은 나를 몰아, 속이 빨간,
나래 편 따오기.
당신은 나를 몰아
부푼 젖 간지러운
고래이게도 하였네.
당신은 나를 몰아
바다의 배이게 하였네. 무지갯빛
부글거리는 바다의 배.
나는 작은 배였네.
나는 알고 있었네.
나는 작은 배였네.
바다는 내 열 개의 손가락 사이에서도 부글거리고 있었네. 내 열 개의 손가락이
바다를 만지면, 무지갯빛으로 부글거리는 당신이 잡히었네. 내 열 개의 손가락이
당신을 잡으면 부글거리는 바다가 만지어졌네.
손이여, 손이여, 손이여.
지금은 허망한 열 개의 손가락이여.
지금은 떨어진 나래, 숯 검정이,
부서진 竹窓(죽창)을 잡고,
지금은 큰 칼의 눈먼 바람이
휘젓는 머리카락, 검은 숲을 잡고,
오오 눈먼 열 개의 손가락이여.
그 숲 깊은 곳의 절은 어디에
있을까. 오오 진달래여, 杜鵑(두견)새여.
동쪽은 어디일까,
진달래 꽂은 머리여.
그 다리는 어디에 있을까. 손이여.
羅衫(나삼) 반만 거머쥔 손이여,
그 푸른 물빛은 어디일까.
함박꽃 함숙 문 입술이여.
지금은 벌거숭이 허벅지를 잡고,
눈먼 열 개의 손가락이여.
나는 어디에 있을까.
당신은 어디에 있을까.
꿈일까.
이것은,
꿈일까요.
그래요,
나는 물에 있어요.
그네의 줄이 끊겼을까요.
나는 그네를 타고 있었는데.
蓼川(료천)의 물일까요.
이름 모를 바다의 물일까요.
나는 그네를 타고 있었는데,
나는 물에 있어요.
나는 밝게 보지 못해요.
흐리고 어두운 사방의 물이에요.
기울어지거나 흔들리지 않는 물.
때기름처럼 끈끈한 물기가 알몸인 내 등허리와 배를 덮고 있어요.
눈을 덮고 있어요.
나는 내가 잠잔다고 생각해요.
그때에요,
나는 중심을 잃어요.
그리고 보아요.
한쪽의 줄이 끊어진 그넷줄,
거기 매달려 기울어진 나의 알몸을.
그 알몸이 흔들리는 전부를.
玉(옥)비녀가 떨어져 내린 곳으로
나는 한껏 소리 지르고 있어요.
그리고 나는 알아요.
어느덧 이는 바람.
물에 젖은 바람이
내 아랫배에 묻어 있는걸.
나는 물에 있어요.
나는 혼자 있어요.
이제는 깜깜하게 어두운 사방의 물.
그러나 나는 알고 있어요.
끊어진 그넷줄이 걸려 있는 곳을요.
물은 기울어지지도
흔들리지도 않아요.
다시 나는 내가 잠잔다고 생각해요.
그때에요,
또 나는 보아요.
깜깜하게 어두운 사방의 물 한 곳에
불빛으로 밝은 것.
그것은 나의 금머리꽃이.
그것은 나의 羅裙(나군)이 거느린 금잔디.
그것은 좌르르 깔린 금잔디에 날아 든 한 마리 꾀꼬리.
아니, 그것은 내가 머리로 벗어
나뭇가지에 걸은 무늬 진 紬緞(주단) 초록빛
장옷이에요. 허리에서 풀어 나뭇가지에
걸어 둔 藍方絲(남방사) 홑단 치마에요.
나는 그것들을 보고 있어요.
바람은 일고 있어요.
그래요 나는 생각해요.
나는 헤엄을 쳐야 한다고요.
나는 헤엄쳐 가야 한다고요.
그곳에는 당신이 있는 거에요.
보세요, 이렇게 들먹이는 목줄기에,
손 줄 사람은 당신인 것을.
이렇게 들먹이는 벌거숭이 가슴에,
이렇게 들먹이는 벌거숭이 허리에,
이렇게 들먹이는 벌거숭이 어깨에,
옷 입혀, 자리 줄 사람은 당신인 것을.
다시 내가 제비의 자태로 앉을
廣寒樓(광한루) 그 자리 줄 사람은
오직 당신인 것을.
아니에요. 몰라요.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은 아니에요.
<雨後東山(우후동산) 明月(명월)이……>
卞學道(변학도).
<春色(춘색)이 아니냐 桃紅(도홍)이……>
新官使道(신관사또) 卞學道(변학도)
<萬壽門前(만수문전) 彩鳳(채봉)이……>
卞學道(변학도)에요. 웃고 있어요.
<花中君子(화중군자) 蓮沈(연심)이
荊山白玉(형산백옥) 明玉(명옥)이……>
웃고 있어요, 웃고, 웃고, 웃고, 웃고 있어요. 웃고 있네요.
<疊疊靑山(첩첩청산)의 雲深(운심)이
影入平羌(영입평강)의 江仙(강선)이
萬塘秋水(만당추수) 紅蓮(홍련)이… 錦仙(금선)이
錦玉(금옥)이 錦蓮(금련)이, 弄玉(농옥)이 蘭玉(난옥)이
紅玉(홍옥)이, 落春(낙춘)이……>
아 落春(낙춘)이. 卞學道(변학도)에요. 卞學道(변학도)에요.
卞學道(변학도)에요. 卞學道(변학도)에요.
<臺上(대상)으로 오르거라>
웃네요 卞學道(변학도). 웃고 있네요 卞學道(변학도).
<네 아무리 守節(수절)한들……>
新官使道(신관사또) 卞學道(변학도), 有夫劫奪(유부겁탈)
卞學道(변학도).
<謀反大逆(모반대역)하는 罪(죄)는 陵遲處斷(능지처단)하느니라
嘲弄長官(조롱장관)하는 罪(죄)는 嚴刑定配(엄형정배)하느니라
죽노라 설워마라!>
눈.
저 눈. 卞學道(변학도)의 눈.
탕건 벗겨지고 상투 코 풀린 저 눈.
劫奪(겁탈)의 눈. 劫奪(겁탈)의 눈.劫奪(겁탈)의 저 눈.
<이 년 잡아 내리라!
이 년 잡아 내리라!>
눈은 짐승의 손이었어요.
달려 들었어요.
머리채 거머쥐고 동댕이쳤어요.
나는 六字拍(육자박)이로 엎드러졌어요.
짐승의 손이 달려들었어요. 내 몸은 벌거숭이가 되었어요. 卞學道(변학도)에요.
卞學道(변학도)가 내 몸을 벌거숭이로 하였어요. 卞學道(변학도)에요. 卞學道(변학도)에요. 卞學道(변학도)에요.
그래요, 卞學道(변학도)가 있는 거에요.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은 아니에요.
그래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당신이에요.
그래요 당신이에요.
당신이 있는 거에요.
밤이 있었어요. 당신이 있었어요.
내 허리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어요.
내 다리도요, 내 고개도요.
그런데 당신은 鳳鶴(봉학)이 춤을 추듯
하면서, 내 손을 잡았어요.
담숙 허리도 안고 속삭였어요.
<羅裳(나상)을 벗어라.>
나는 고개 숙여 몸을 틀고.
나는 물위 뜬, 바람에 뜬 연꽃
이파리. 아니면 눈부신 바다에
굼실거리는 靑龍(청룡). 그랬을까요.
당신의 발가락이, 클린
내 옷끈에 걸렸어요.
당신이에요. 당신이 나를 벌거숭이게
하였어요. 그래요, 당신이에요.
내 가슴에서 저고리를
내 허리에서 치마를
내 다리에서 바지를
내 속 깊은 살에서 속곳을.
당신은 비둘기처럼 들먹이는
내 젖을 잡고, 번갯불이었어요.
방안 가득히 밤새도록
일렁인 불춤의 이랑. 밤새도록
달랑거린 문고리의 銀(은)빛 소리 金(금)빛 소리.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꽃잎 속의 꽃순을 빼어내듯
옷 속에서 빼어낸 알몸인 나를
불꽃으로 사르고 金(금)빛으로 사른 사람.
이 세상의 한 사람, 당신이에요.
당신은 있는 거에요.
보세요 나는 이렇게 헤엄치고 있어요.
보세요 들먹이는 나의 목줄기가
깜깜한 물결을 헤치고 있어요.
보세요 이렇게 바람은 일고 있어요.
보세요 들먹이는 나의 허리가
어두운 사방의 물결을 가르고 있어요.
당신에게로. 당신에게로. 당신에게로.
나는 다시 꽃이 되어야 해요.
꽃잎속의 꽃순이 되어야 해요.
나는 다시 옷을 입어야 해요.
내 알몸에 옷 입힐 사람은
오직 당신이라야 해요.
白方絲(백방사) 진솔 속옷으로 감싸고.
옥비녀 은목걸이 蜜花粧刀(밀화장도),
玉粧刀(옥장도). 白緞(백단)보선과 紫色(자색) 英綃(영초)
수놓인 가죽신도 주고.
色(색) 고름 달무늬 비단 겹저고리로
내 가슴을 감싸 주는 사람.
이제는 軟熟麻(연숙마) 그넷줄을
내 손에 쥐어 주고,
綠陰(녹음) 속에 날리며 내비치는 紅裳(홍상),
몸 따라 움직이는 나무,
몸 따라 머리 위에 흔들리는
수없이 많은 나뭇잎을 주는 사람.
그 사람은 오직 당신이라야 해요.
나는 다시 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니까.
나는 다시 꽃잎 속에서,
빼어낸 꽃순이 되어야 하는 것이니까.
나는 다시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이니까.
빼어낸 알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니까.
나는 다시 불꽃으로 사르어지고,
金(금)빛으로 사르어져야 하는 것이니까.
보세요 이렇게 나는 헤엄치고 있어요.
보세요 이렇게 바람은 일고 있어요.
이렇게 내가 다가서고 있어요.
이렇게 내가 다 왔어요.
당신 곁에 들먹이는 내 목줄기.
당신 곁에 들먹이는 내 허리를 보세요.
보세요. 오오 보세요. 그런데, 이것은.
오오 이것은 갈매기.
당신이 아니네요.
한 마리의 갈매기.
나는 다시 꽃잎 속에서
당신이 아니에요.
한 마리의 갈매기.
나는 다시 꽃잎 속에서
당신이 아니네요.
한 마리의 갈매기.
갈매기는 날까요.
날까요, 갈매기는.
날까요, 갈매기는.
나네요, 나네요,
나네요.
아아,
<香丹(향단)아! 香丹(향단)아!
香丹(향단)아!>
젖어 있어요.
그래요, 나는 젖어 있어요.
그래요, 나는 女子(여자)인 것을.
나를 적시는 이것은
女子(여자)의 속 깊은 중심에서 흐르는 것.
그때에도 나는 젖어 있었어요.
그때에는 알몸의 내가 당신에게,
알몸인 당신은 나에게 있었어요.
五色(오색) 丹靑(단청) 純金(순금) 衣欌(의장)에
아로새겨진 한 쌍의 비둘기는 부드러운
털을 날리면서 푸득거리고.
당신은 내 허리에 있었어요.
그리고 나는 젖어 있었어요.
나의 속 깊은 중심에 끓어 넘쳐
나의 아랫배를 적시고 무릎에 흘러,
다시 발가락도 적시었어요.
당신은 내 뺨에도 있었고
귀밑뿌리에도 있었어요.
발가락도 적신 그것은,
거기서 솟구쳤어요. 허리를 적시고
가슴에 흘러 와서 목줄기도 적시었어요.
당신은 내 입술에도 있었어요.
목줄기도 적신 그것은 다시 팔에
흘러 열 개의 손가락을 적시었어요.
당신은 내 朱紅(주홍)의 혀에도 있었어요.
젖은 내 손가락에서는
복숭아 냄새가 났어요.
당신은 내 가슴에
당신은 내 젖무덤에도 있었어요.
당신은 파묻히어서 있었어요.
나는 全部(전부), 젖어 있었어.
나는 全部(전부), 떨려나고 있었어.
나의 속 깊은 중심에 끓어 넘쳐
나의 全部(전부)를 적시는, 그것은 피.
그것은 피였어요. 그것은 피였어요.
그래요, 당신의 손은 나의 피에 젖어
한껏 부풀어 나면서,
복숭아 냄새가 나면서,
불이 되면서, 불꽃의 손이 되면서,
나의 속 깊은 중심에서,
銀(은)빛 소리로 울려났어요.
金(금)빛 소리로 울려났어요.
누구도 나에게서 빼앗지 못할.
무엇도 나에게서 빼앗지 못할.
그러나 지금 당신은 없고,
내가 쓴 큰 칼은 달빛에 젖고.
나는 혼자서, 내 피에 젖어 있어요.
西施(서시)가 이런 밤에 흘렸을까요.
虞美人(우미인)이 이런 밤에 흘렸을까요.
<白雲(백운) 간에
히뜩히뜩>
그날은 어디에 있을까요.
박속같은 내 살결은 어디에 있을까요.
지금 흘러서 내 아랫배는 젖어 있건만
나의 온몸 안에서 울리는
아프도록 눈부신 당신의
발자국 소리가 없어요.
이런 밤에 王昭君(왕소군)이 젖었을까요.
이런 밤에 班婕妤(반첩여)가 젖었을까요.
<꿈 夢字(몽자) 용 龍字(용자)
神通(신통)하게 맞히었다.>
그 난간은 어디에 있을까요. 어디에
양지 마당 씨암탉걸음은 있을까요.
지금 흘러서 내 무릎은 젖어 있건만
불꽃의 가루를 뿌려 내 숨결을
막히게 하는 당신의 손이 없어요.
당신은 없어요.
나는 혼자서 흘리고 있어.
나는 혼자서 젖어서 있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던 것인가요.
나라의 곡식을 훔쳤던가요.
산 사람을 죽였던가요.
逆律(역률)하였던가, 綱常(강상)을 범하였던가.
나는 사랑했는데,
오직 사랑만을 하였는데.
푸른 하늘, 그 한 장 종이에,
듬뿍 번져나는 사랑을 하였는데.
그러나 지금 당신은 없고,
나는 혼자서 달빛에 젖어
큰 칼 쓰고 흘리고 있어요.
지금 흘러서 내 속살은 젖어 있어요.
지금 흘러서 내 발가락은 젖어 있어요.
<앉으라고 일러라…>
반만 열린 내 입술은 어디에 있을까.
흰 돌에 흐르는 물은 어디에 있을까.
목욕하고 앉은 제비는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있을까. 별도 같고
玉(옥)도 같은 내 이는 어디에 있을까.
흘러서 내 무릎은 젖어 있는데,
흘러서 내 아랫배는 젖어 있는데,
당신은 없어요.
당신의 손은 없어요.
복숭아 냄새나는 당신의 손.
당신의 빛의 손은 없어서,
珊瑚(산호) 채찍같은 당신의 손은 없어서,
나의 속 깊은 중심에 뜨거운,
끓어서 넘치는 것이 없는데,
나는 지금 피에 젖어 뒤틀리는 속살.
나는 지금 피에 젖어 뒤틀리는 무릎.
그래요, 나는 女子(여자)인 것을.
그래요, 나는 젖어 있어요.
젖어 있어요.
해 설
김우정
우리의 詩歌(시가)는 呪術(주술)에서부터 비롯하였다. 주술은 彼岸(피안)과 永遠(영원)에로의 길을 열어가기보다는 현실구제에 보다 더 큰 의미를 둔다. 무엇인가 현실을 변혁시키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분석적이며 합리적인 것보다는 개연적이며 종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 문학에는 抒情詩(서정시)는 있지만 敍事詩(서사시)가 없다. 詩精神(시정신)은 은 있지만 散文精神(산문정신)이 없다. 작품에 이야기를 부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분히 시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들이다. 여기에 우리문학의 발상양식이 깃들여 있지 않는가 생각된다. 그리고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와 같은 시정신을 길러 가는 데 우리 문화의 전통을 계승해 가는 가까운 길이 있지 않는가 생각된다.
춘향전도 그런 의미에서는 예외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시정신이 이루어 놓은 우리 문학의 精華(정화)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그 소중한 재능과 개성을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도록 어떻게 발전시켜 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인 것이다. 全鳳健(전봉건)의 「春香戀歌(춘향연가)」도 그런 의미에서 뜻 깊은 실험이 아닐 수 없다.
춘향은 우리 민족의 이상적 여인상이다. 그녀의 정절, 그녀의 사랑, 그녀의 지혜, 그리고 아름다운 맵시는 한국여성이 가져야 할 모든 매력을 한군데 모아 놓은 것이 곧 춘향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오랜 세월을 우리의 가슴 속에 살아 오면서, 사랑받는 불멸의 여인상이다. 그러한 춘향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방법에 의해서 부활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의 작업은 모국어의 아름다움과 그 구성의 비밀을 깨달았을 때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춘향전에는 우리 말이 지니고 있는 부드러운 감촉과, 현란한 환각적 표현방법, 그리고 독특한 문장 구성의 묘미가 마치 땅 속에 묻힌 광맥처럼 뿌리를 뻗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그것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시인의 깊은 내적 체험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시인 全鳳健(전봉건)이 「春香戀歌(춘향연가)」를 쓰게 된 것도 이러한 내적 체험이 눈뜬 데 있지 않은가?
그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 보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춘향의 이야기가 우리 문학에 있어서 대표적인 것이요 가히 백미편이라 할 만하다는 평가는 상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번에 나는 춘향의 이야기에서 상상도 못했던 큰 감동을 맛보았다.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특히 이도령이 광한루로 나가는 대목을 전후해서 사용된 정경묘사의 현란한 문장이다.
또 한 가지는 춘향과 이도령이 전개하는 사랑의 장면에서 볼 수 있는 정신상태다.
춘향과 이도령이 알몸이 되어 서로 업고 업힌다. 그러면서 노래를 주고받는다.
여기에 세계의 어느 문학 작품에도 없었던 가장 신선하고 강력한 생명의 찬가.――그 건강하고 아름다운 정신이 손에 만져지는 피처럼 생생하게 깃들여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자기 모국어에 대한 이만한 자부가 없이는 창조도 불가능할 것이다. 춘향전이 이 시인을 그토록 매혹시켰던 것은 춘향전이 가지고 있는 생동하는 말의 기운과 그 구조의 비밀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그는 바로 우리 말을 아름답게 하는 비밀이 무엇인가를 여기서 체험했던 것이다.
그의 「春香戀歌(춘향연가)」에 나오는 춘향은 시종 옥 속에 갇혀 있는 춘향이다. 옥에 갇힌 춘향의 의식 속에 浮沈(부침)하는 사랑의 애환과 허무감이 언어의 대위법적 수법으로 이미지를 전개시켜 간다.
춘향의 가슴 속에 불타 오르는 사랑과 정열, 형장 아래 찢긴 춘향의 소조한 내면, 환각과 현실이 교묘하게 엇갈리며 쌓여 가는 이 애닯은 사랑의 노래는, 때로는 불길처럼 타오르고 때로는 낙엽이 진 숲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울리는 언어의 교향곡이다.
이 작품에는 오페라와 같은 이야기의 행진은 없다. 전체로서 파악하고 응고시키는 언어의 긴장력이 있을 뿐이다. 현실과 환각 사이에서 불꽃을 튀기는 춘향의 의식세계가 강력한 영상으로 압도해 오는 이 비밀의 열쇠를 그는 춘향전의 어법에서 찾아낸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이 시인의 언어의 복잡한 구성법이 훨씬 단순화 되어 있다. 그러나 그 단순화 된 언어가 불꽃을 튀기는 춘향의 내면세계를 형상화하는 데 보다 더 큰 밀도를 부여함으로써 우리말의 아름다움의 광맥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작품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된다.
女子(여자)에요.
그래요, 나는 女子(여자)에요.
그런데 나는 獄(옥)에 있어요.
여자는 아이를 낳아요.
나도 낳을 수 있어요.
어머니가 나를 낳은 것처럼.
그런데 나는 獄(옥)에 있어요.
대립된 이미지의 交互的(교호적) 배열로 이미지의 전개를 서로 견제해 가면서, 전체적인 균형을 잡아간다. 즉 「나는 여자에요」하는 이미지는 「나는 獄(옥)에 있어요」하는 이미지에 의해서 한정되고 제한되어 버린다. 잉태의 가능성, 그것은 여성으로서의 완숙을 의미한다. 전우주라도 안에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한 번 「나는 獄(옥)에 있어요」라는 이미지에 의해서 춘향의 넓은 모성의 공간은 가능성으로만 제한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어 환시적인 춘향의 탄생설이 전개되다가 「구슬같은 아이」에 대한 결실의 욕구는 현실의식에 의해서 깨뜨려져 버린다.
<어릴 때에는, 새가 나는 것을,
제비가 나는 것을, 나비가 나는 것을,
한 마리 또 한 마리, 그렇게 세었어요.
지금은 안 그래요. 한 마리 한 마리가
雙(쌍)을 지어 나는 것을 알아요.>
이렇게 한 여성의 자기 자신에 대한 눈 뜸과 성숙한 여성으로서의 갈망은
<남산에 피는 꽃은 내 마음에 피는 꽃.
북산에 물드는 분홍빛은
내 온몸에 물드는 분홍빛.>
이렇게 손에 닿을 수 없는 저만치 남산의 꽃과 북산의 노을처럼 춘향의 의식 속에서 공허하게 명멸한다.
이토록 춘향은 황홀함과 성숙감으로 가득차 있지만 그녀의 화려한 환각은 현실의식에 대체되어 버림으로써 보다 더 극적으로 고조되어 간다. 춘향의 의식은 지난날의 아름다왔던 세계를 향해 나래를 편다.
<풀잎에 손이 스치면
슬며시 허리께가 부끄럽기도 해요.>
이렇게 내면 깊숙히 잠들어 있는 욕구와 <그이는 저만치 서서 있어요> 하는 거리감의 대비. 이 모순과 갈등 속에서 그녀의 의식은 곱게 작열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의식 속에 떠오르는 그녀의 옛 모습, 사랑하는 이 앞에서의 그녀의 황홀한 모습이 그려진다.
흰 돌 위 쓸리는 물에, 목욕하고 앉은 제비. 사람을 보는, 그 놀란 제비.
그것이 그이 앞의 나에요.
내 입술은 반쯤 열려 있어요.
물에 젖어서 반쯤 흔들리는 蓮(연)꽃이에요.
앞의 두 줄이 자아내는 영상과 뒤의 두 줄이 자아내는 영상의 總和(총화)가 춘향의 모습인 것이다. 춘향전의 이 대목을 읽어 보면 훨씬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春香(춘향)의 고운 態度(태도) 歛容(검용)하고 안난 거동 자세히 살펴보니 白石(백석) 滄波(창파) 새빗 뒤에 沐浴(목욕)하고 안진 제비, 사람을 보고 놀래 난듯 별로 단장한 일 없이 天然(천연)한 國色(국색)이라, 玉顔(옥안)을 相對(상대)하니 如雲間之明月(여운간지명월)이요 丹唇(단진)을 半開(반개)하니 苦水中之蓮花(고수중지연화)로다.」
「흰 돌 위 쓸리는 물에」와 「白石(백석) 滄波(창파) 새빗 뒤에」의 그 투명하고 아른아른한 빗살처럼 내리 퍼붓는 광선의 아름다움을 생각해 보면 알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앉아 있는 춘향이 앞에 그녀의 사랑하는 이도령은 <저만치 서서 있는 그이.>로서만 존재한다. 다만 그녀의 체험의 밑바닥에서 아름답게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춘향의 의식의 밑바닥에 살아있는 이도령이지 결코 현실속의 이도령은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이 현실과 환각 사이를 공전하면서 그녀의 의식은 다시 칼을 쓰고 앉아 있는 감옥으로 되돌아 오고 그녀의 앞에는 음산한 귀신들이 나타나 그녀와 이도령의 사이를 갈라 놓는다.
채찍은 내리쳐,
모진 바람은 일어
말 탄 당신은 갔네.
한 점의 구름이었네.
흩어진
베개.
채찍은 내리쳐 바람을 일며, 말을 달려 가 버린 당신. 하늘에 떠도는 한 점의 구름. 그리고 흩어진 베개 사이의 그 긴 시간과 아득한 공간을 상상해 보라. 그리고 「채찍은 내리쳐」는 여기서 떠블 이미지로 나타난다. 말에 채찍질해 그녀에게서 떠나 버린 이도령과 변학도의 잔학한 형장 아래 신음하는 춘향이다. 춘향의 황폐한 내면세계에는 적막과 공허의 바람이 스쳐 가고 절망은 어두운 그늘을 내린다. 춘향의 절망은 점점 더 깊은 수렁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간다. 이미 그녀는 황금빛 나래를 치는 새가 아니다. 형장으로 낭자하게 찢긴 四肢(사지). 달빛조차 들지 않는 어두운 산기슭에 죽지가 부러진 외로운 새다. 그녀는 <바다도 지워 버린 안개에 갇혀> 있는 것이다.
빛을 삼키면서
빛을 지워 버리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에
疊疊(첩첩)이 싸인 風景(풍경)을 지워 버리면서,
밀려 오는 저것은 무엇일까.
저것은 안개일까.
어두운 저승, 안개가 자욱히 서린 음산한 지옥을 방황하는 춘향의 영혼. 그러나 그의 가슴에는 지워 버릴 수 없는 것이 있다. 실체는 없지만 소리는 남아 있고, 형태는 없지만 냄새는 남아 있다. 그것은 춘향의 의식 속에 살아 있는 이도령이다. 그 위에 춘향의 의식은 산산히 부서져 눈송이처럼 내려 덮인다. 그것은 몽롱하게 흐려져 가는 춘향의 환각 속에서 피어나는 꽃송이와 같은 것이다. 어머니의 울부짖음, 변학도의 노한 호통소리. 춘향의 신음소리에 엇갈리면서 그들의 사랑하는 영혼의 교류는 끊이지 않는다. 천리 만리 아득한 길을, <보라매도 비바람도 쉬어 넘는 고개>를, 황량한 들판의 안개 속을, 춘향의 의식은 명멸하는 이도령의 모습을 찾아 헤맨다.
지금은 언제일까.
이곳은 어디일까.
거기는 潚湘江邊(숙상강변)일까? 시간도 방향도 헤아릴 수 없는 곳, 형상조차 구별할 수 없는 음산하고 어두운 환각 속에서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춘향과 이도령의 거리. 그 속을 타는 불덩이처럼, 방황하던 춘향의 의식은 다시 현실에 떠올라 식어 간다.
壁(벽)인데,
꿈 아니면 볼 것인가.
그렇다. 거칠고 황량한 공간을 헤매던 그녀의 의식은 실은 사면의 벽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현실은 그 쓸쓸한 獄(옥)일 뿐인 것이다. 냉정한 현실의 벽, 슬픈 마음이 쌓아 놓은 그 높은 산을 아무도 넘어올 수 없는 것이다. 아무것도 춘향의 고독을 달래 줄 것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그녀의 애닯은 기원은 이미 아득한 추억 속에 있을 뿐 현실은 그녀를 배신하고 짓밟는다. 그러나 춘향의 의식의 밑바닥에서는 다시 이도령의 달콤하고 애닯고 격렬한 음성이 속삭여 온다. 그것은 이 세상의 물줄기가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오히려 끊이지 않을 그런 샘물처럼 춘향의 가슴을 흥건히 적셔 주는 사랑의, 생명의 찬가다. 그것은 이 세상 어느 명장의 솜씨로도 더는 못 꾸밀 그런 목소리다.
네가 죽어도
내가 너를 부르마.
그것은 춘향의 환각일까? 그녀의 손에 잡힌 것은 <부서진 竹窓(죽창)> <숯 검정이> <떨어진 나래>와 대치된다. 아름다운 속삭임은 춘향의 몸에서 나비처럼 날아가 버린다. 하나 하나 벗겨져 알몸을 만들면서…….
彩色(채색) 구름과 구름의 사이.
당신은 알몸이었네.
나도 알몸이었네.
이와 같은 이미지의 交互的(교호적) 배열은 숨가쁘게 반복된다. 그래서 이렇게 나래를 펼치며 날다가 어두운 현실에 의해서 가로 막히고 이 두 개의 이미지는 동격이 되어 倒錯(도착)한다. 앞의 환희는 다음과 같은 이미지로 역전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 벌거숭이 목을 누르는 어둠, 이것은 내 벌거숭이 발을 얽어 맨 어둠. 형장 아래 뜯긴 그녀의 옷자락, 그녀의 살결, 그녀의 핏자국, 그녀는 알몸이다. 끈긴 그넷줄에 매달린 瀕死(빈사)의 백조이다. 죽음의 물이 그녀의 몸을 타고 스며 올라 온몸을 적신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도 까무러친 의식심층부에서 생명의 황금빛 광원을 향해 손길을 내 뻗는다.
그 사랑의 손길이 뻗어 가는 곳에 탐욕스런 변학도의 끈덕진 자태가 가로 막고 선다. 아름다운 사랑의 찬가는 다시 변학도의 잔학과 탐욕의 동격이 되어 대치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 아름다운 사랑의 꽃동산에 날아든 나비는 이도령이었을까? 변학도였을까? 그녀의 의식 속에서 자꾸 엇갈린다.
그러나 그녀의 몽롱한 의식은 마지막 힘을 다하여 정점으로 솟구치는 것이다.
당신은 비둘기처럼 들먹이는
내 젖을 잡고, 번갯불이었어요.
방안 가득히 밤새도록
일렁인 불춤의 이랑. 밤새도록
달랑거린 문고리의 銀(은)빛 소리 金(금)빛 소리.
이렇게 환희의 절정에 솟아 오른 그녀의 의식은 천천히 이도령을 향해 헤엄쳐 간다.
춘향은 <여자의 속 깊은 중심에서 흐르는> 사랑에 젖어 있다. 그녀의 전부를 송두리째 불태울 사랑, 그것이 그녀의 죄다. 그래서 그녀는 의식의 깊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자맥질하고 있는 것이다
五色(오색) 丹靑(단청) 純金(순금) 衣欌(의장)에
아로새겨진 한 쌍의 비둘기는 부드러운
털을 날리면서 푸득거리고.
그들의 사랑에서는 관능도 오히려 황금빛을 발한다. 그것이 춘향의 죄인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사랑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춘향의 의식 속에 되살아나는 지난날의 영상, 춘향에게는 지금 이도령이 없고, 홀로 쓸쓸한 옥에 큰 칼을 쓰고 앉아 말라붙은 핏자국을 매만지고 있는 것이다. 고독과 그리움의 불길처럼 타 오르다가 식어서 대리석처럼 진주알처럼 굳게 굳게 凝結(응결)해 간다.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깨뜨릴 수 없게……. 오색 빛깔을 발하면서…….
全鳳健(전봉건)의 「春香戀歌(춘향연가)」는 여기서 대단원을 이룬다. 누구나 쉽게 읽어 갈 수 있는 작품이다. 그것은 우리말의 전통적 어법을 살려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립되는 이미지를 交互(교호)로 배열해 가면서 그것을 무수히 반복해 간다. 그래서 마치 햇살이 공간을 채우듯이 이 시인은 이미지로 공간을 메꾸어 간다.
그리고 이 작품은 우리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實證(실증)해 준 작품이다. 이 시인의 내적 체험을 통해서 춘향전의 아름다움의 수액을 빨아 올린 것이다. 그의 초기의 시에서 출발하여 「사랑을 위한 되풀이」 「속의 바다」를 거쳐 이제 비로소 시인의 고향에 도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