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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의 무대 전남 벌교읍은 특이하게도 읍내 전체가 다리로 이어진 고장이다. 벌교읍은 철다리 두 개를 포함해 모두 5개의 다리가 놓여져 있다. 다리를 면면히 살펴보면 애달픈 사연 하나쯤은 지니고 세월을 지탱하고 서있다. 벌교에서 남쪽 고흥으로 이어지는 원동천이 있는 선근다리는 홀어머니의 사랑을 위해 자식들이 놓았다는 징검다리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또 광주에서 벌교로 들어오는 장좌리 앞 원동천의 철다리, 다시 벌교역에서 순천으로 가는 벌교천의 철다리, 그리고 형제간에 총을 겨누던 소화다리, 벌교에서 낙안읍성으로 가는 홍교(횡개다리)가 바로 벌교읍과 전부 연결되어 있다. 이 다리들은 그저 끊어진 길을 연결하기 위해 놓았을 뿐이지만 그 다리들은 벌교에서 특별한 위치와 의미를 담고 있다.
벌교의 유래에서 보듯이 벌교는 ‘뗏목을 엮어 만든 다리’라는 명사가 지명이 된 것이다. 벌교를 상징하는 ‘뗏목다리’를 만들어 전국에 널리 알리고 꼬막축제에 이를 적극 활용해서 관광 상품으로 개발해 소설 <태백산맥>, 가곡 ‘부용산’, ‘채동선’의 음악을 연계한 하나의 테마관광 코스가 조성될 수 있도록 기대해 본다.
500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 <태백산맥>은 벌교를 중심으로 해방 후 좌·우익의 이념적 갈등을 그린 작품으로 벌교가 무대며 관문인 진트재를 비롯, 소설의 출발점이 되는 현부자네 집과 작가 조정래의 생가, 바닷물을 막아 만들었다는 중도방죽,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 소화다리 등 소설 속 대부분의 무대들이 벌교읍에 실재하고 있고 항일의 저항정신이 깃든 ‘정의의 주먹’을 상징하는 벌교로 <태백산맥> 소설 속 살아있는 역사를 만나고 싶어 행복한 도보여행을 회원들과 다녀왔다.
<태백산맥>은 어떤 소설인가?를 알아야 한다. 1953년부터 벌교에 살았던 작가 조정래씨가 그의 유년시절 기억과 6년에 걸친 자료조사를 통해 완성시킨 대하소설이다. 1986년 전판 1쇄가 발행된 지 10년만인 1997년 100쇄 돌파, 판매 500만 부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태백산맥이란 제목은 남북으로 잘린 한반도의 허리를 말하며 민족분단을 상징한다. 원고지 1만 5천 7백여매. 한의 모닥불, 민족의 불꽃, 분단과 전쟁, 전쟁과 분단, 등 4부작 전 10권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등장인물만도 270명이 넘는 스케일을 자랑한다. 소설형식을 띄고 있지만, 역사적 사건이나 등장인물 설정 등을 치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실제에 거의 가깝도록 구성해 사실감이 뛰어나다. 7년에 걸친 작업 끝에 일본어로도 번역되어 지금까지 20만부가 넘게 팔려나갔고, 현재 중국어와 영어판도 번역중이다. 1994년 자유총연맹 등 몇몇 단체에서 이적성을 이유로 검찰에 고발한 적이 있지만 판결에서는 무죄가 선고되었다. 같은 해 임권택 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태백산맥> 소설속의 벌교를 알고가면 좋다. 작가 조정래는 소설 <태백산맥>에서 다음과 같이 벌교를 소개한다. 벌교는 한마디로 일인들에 의해서 구성, 개발된 읍이었다. 철교 아래 선착장에는 밀물을 타고 들어온 일인들의 통통배가 득실거렸고, 상주하는 왜인들도 같은 규모의 읍에 비해 훨씬 많았다. 그만큼 왜색이 짙었고 읍 단위에 어울리지 않게 주재소 아닌 경찰서가 세워져 있었다. 읍내는 자연스럽게 상업이 터를 잡게 되었고, 유입인구가 늘어났고 모든 교통의 요지가 그러하듯 벌교에도 제법 주먹패가 생겨났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벌교에 가서 돈자랑, 주먹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순천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고, 여수가서 맛 자랑하지 말라‘는 말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태백산맥 1권 151쪽)
행복한 도보여행 회원들은 지난 8일 벌교행 기차를 타기위해 서광주역으로 모였다. 아침 일찍이여서 오고가는 사람이 별로없다. 아침 6시 48분 벌교행 기차표를 끊었다. 기차에 올라 자리 배치가 끝나고 나니 효천역에 도착한다. 산길따라 산악회원들이 득량 오봉산을 산행하기 위해 기차에 오른다 . 서로 반가워 인사하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옛날 추억을 생각하며 박세영 회원이 계란을 준비해와 나눠준다. 뜨끈뜨끈한 커피도 한잔 준다. 벌써 맘이 통했는지 즐거워한다.
기차여행은 청주가 제격인데 외달도 도보여행 때처럼 지정원 회원이 안와서 아쉽다고 입을 모은다. 오늘 도보여행은 파트너를 정하기 위해 사다리를 타자고 제안해 한바탕 웃는다. 파트너도 정해지고 맘은 벌써 벌교에 가있다. 영화촬영지 명봉역에 도착한다. 기차 내에 카페가 있어 정겹다. 창밖으로 멀리 호남정맥 봉화산과 봇재가 한눈에 들어온다. 풍요로운 녹색의 땅 녹차수도 보성이다. 녹차와 서편재의 본향 보성 관광코스는 대원사→백민미술관→주암호→서재필기념공원→소설 태백산맥 테마무대 문학관→홍교(벌교읍)→최대성유적지→제암산 자연휴양림→용추폭포→다원→판소리 서편제 현장→율포해수욕장(해수녹차온천탕)→환상의 해안도로→미력옹기코스가 유명하다. 보성하면 대한다원이 생각난다. 녹차는 연간 강수량이 1500mm이상인 지역에서 토양의 통기성과 특수성이 좋고 기후가 서늘하며 일교차가 크고, 공중습도가 높은 지역에서 양질의 녹차가 생산된다.
보성이 녹차 생산지로 적격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보성군 보성읍 봉산리 산기슭 일대 현재의 대한다원 입구 삼나무 가로수길 약 100m 지점에서 약 4,500평의 녹차나무를 시험 식재하여 보성 지역의 녹차 재배가 시작되었다. <녹차이야기> 인간이 차를 마신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BC 2700년쯤 고대 중국의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부터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를 염제, 곧 불꽃임금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불로 물을 끓여 먹는 방법을 처음으로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는 이와 함께 차잎에 해독의 효능이 있음을 알고 이를 세상에 널리 알렸던 인류 역사상 첫 다인(茶人)이었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차를 마셔왔고 지금도 마시고 있는데, 이것은 실제로 차가 우리에게 이로움을 주기 때문이다. 차를 끓이는 방법은 잎차를 우리는 팽다법(烹茶法), 말차에 숙수(熟水)를 부어 휘젓는 점다법(點茶法), 차에 물을 넣어 끓이는 자다법(煮茶法)이 있다. 우리 선조들은 팽다·점다·자다를 모두 뜻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전다(煎茶)라는 말을 혼히 썼으며, 보다 넓은 의미로 차를 끓여서 대접하고 마시는 일에는 행다(行茶)라는 말을 썼다.
차는 물의 온도에 따라 차의 각종 성분이 우러나는 속도가 다르고 물에 녹아 나오는 양이 다르다. 그러므로 차의 종류에 따라 찻물의 온도를 달리하는 것이 차의 맛을 한층 좋게 한다. 발효차(황차·홍차)와 말차는 뜨거운 탕수를 바로 부어도 되나, 녹차는 찻물이 너무 뜨거우면 비타민C가 파괴되고 감칠맛이 적다. 쓴맛과 떫은맛을 내는 카페인과, 발효되지 않은 폴리페놀(탄닌)은 온도가 높을수록 많이 녹아 나오며 감칠맛을 내는 유리아미노산은 60∼65℃에서도 거의 용출되므로 녹차는 물을 조금 식혀 부으면 쓴맛과 떫은 맛이 덜 우러나온다. 일반적으로 녹차는 물의 온도가 90℃ 전후면 적당하나 고급 녹차는 아미노산·카페인·비타민C 등의 함량이 많고 섬유소가 적어 연하므로 물의 온도를 70∼80℃ 정도로 식힌다. 발효차는 발효율이 높을수록(붉은색에 가까울수록) 높은 온도에서 우려야 향과 맛이 잘 우러난다. 따라서 한국의 황차(黃茶;뜸차)나 중국의 오룡차·철관음 등은 90∼95℃ 정도의 뜨거운 물을 바로 붓는다. 중국의 발효차는 잎이 크고 주름이 많아 차의 분량을 많이 넣고 여러 차례 우려 마신다. 한국의 고급 황차(발효 세차)나 약발효된 중국의 청차(靑茶)와 재스민차 등은 80∼90℃ 정도로 온도를 낮추어 우린다. 물의 온도를 낮출 때는 숙우(熟盂;귀때그릇)를 사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또한 차는 차와 물의 분량이 적절해야 차가 지닌 향기와 참맛을 즐길 수 있다. 차의 분량을 얼마나 넣는가는 차의 종류, 마실 차탕의 양, 마실 사람의 취향 등에 따라 다르나, 너무 진하지도 싱겁지도 않게 찻잎의 양을 알맞게 넣는다. 일반적으로 차의 분량은 잎차의 경우 1인당 1∼2g 정도(티스푼 하나)를 넣고, 4∼5인 분량으로는 4∼6g 정도 넣는다. 잎이 어린 세차는 가늘고 카페인 등 가용성분이 많으므로 적게 넣고, 자란 잎이나 발효차는 많이 넣으며, 납작한 솔잎 모양의 마른 차나 부서진 차 등은 부피에 비해 무게가 많이 나가므로 적게 넣는다. 다관에 차를 넣고 물을 붓는 것은 순서에 따라 다음의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① 먼저 넣기[下投法]:차를 먼저 넣고 물을 부어 우리는 방법으로 오늘날에는 이 방법을 많이 쓴다. ② 도중 넣기[中投法]:다관에 물을 조금 붓고 차를 넣은 뒤 다시 물을 붓는 방법이다. 1인용 찻잔으로 녹차를 마실 때 이 방법을 쓰면 처음 부은 물은 찻잔을 데우게 되어 찻물의 온도가 알맞게 된다. ③ 나중 넣기[上投法]:물을 먼저 부은 뒤 차를 넣는 방법으로 여름에 주로 사용하나 오늘날에는 숙우의 사용으로 거의 쓰지 않는다. 말차(분말차)는 얇은 약숟가락이나 휜 대숟가락으로 떠내어 찻사발 가운데에 떨어뜨리고 물을 붓는다. 말차 1인분의 적당량은 1/4∼1/2 티스푼이며 물의 분량은 50∼70mℓ 정도이다.
득량역에 도착하기 직전에 호남정맥 산줄기에 보성강수력발전소가 한눈에 들어온다. 초등학교 때 봄소풍 갔을 때 왕벚꽃이 흐드러지게 많이 피었던 보성강수력발전소는 국내 가장 작은 규모의 수력발전소이다. 일제시대 예당들판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지은 겸백저수지의 물을 이용하여 발전하고 있다. 유역변경식 수력발전소로 긴 파이프라인이 산중턱을 관통하여 산너머 댐의 물을 평야지역에 공급하며 발전을 하고 있다.
작고 소규모이지만 정겹고 어린시절의 아리한 추억이 깃든 아름다운 곳이다. 대법원장을 배출하고 인재가 많이 난다는 오봉산이 관모양을 하고 우뚝 솟아있다. 전통 한옥마을인 강골부락이 보인다. 16세기 말에 광주이씨가 들어와 정착하면서 광주이씨 집성촌이 되었다. 지금 남아있는 가옥의 대부분은 19세기 광주이씨 집안에서 지은 것들이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 한옥마을 가운데 참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몇 안되는 마을 가운데 하나이다.
득량역을 지나 예당역으로 향하는 길목에 득량만 평야가 넓게 보이고 청보리가 파릇파릇 너울댄다. 한 폭의 그림같다. 일제 때 막았다는 4㎞수문뚝이 양쪽으로 보인다. 내고향 조성역에 도착한다. 조성은 호남정맥 존제산이 감싸고 있다. 동로성축제가 유명하다. 동로성축제는 이곳 동로성에서 백제가 멸망하자 나당연합군에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세력이 일본으로 건너간 곳으로 이별과 새로운 희망을 테마로한 축제이며 격년 9월에 개최된다. 조성은 곡창지대로 정원할맥, 간척지쌀, 느타리버섯, 방울토마토, 참다래, 용문석으로 유명하다. 터널을 지나니 벌교 칠동 딸기 비닐하우스가 바다처럼 펼쳐있다. 벌교역에 도착한다. 벌교역은 1930년 12월 25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한 이래 전남 중서부 지방의 여객과 화물수송에 중추적 역할을 해 왔으며 1987년 12월 12일 지금의 역사를 준공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현대식 한옥으로 지어져 깨끗하고 우아하다.
광주 서광주역을 출발한 무궁화호가 하루 여섯차례 멈추는 벌교역은 소설 <태백산맥>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소설 속에서 기차가 섰던 옛 차부 자리가 벌교역이다. 지금도 벌교역을 중심으로 당시 소설 속에 등장한 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에 벌교는 전남 내륙지역 일대에서 수탈한 곡물을 일본으로 가져나가는 거점이 되었다.
소설 <태백산맥>에서는 벌교역을 새로운 권력이 가장먼저 있는 곳으로 묘사되고 있다. 국회의원, 계엄사령관, 경찰서장이 부임할 때마다 빨치산 염상진의 목이 내걸린 곳이다. 권력 추종자들은 그들에게 아부를 해야만 했고, 어떤 때는 민족들 앞에서 수모도 당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소설 속 <태백산맥> 도보기행의 출발지 벌교역을 빠져나오면 벌교읍내에서 가장 번화한 길이 세 갈래로 펼쳐진다. 나오는 방향 왼쪽에 있는 주차장을 지나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옛 동네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큰길이 소설의 무대인 벌교읍내 옛길이다. 소설 속< 태백산맥> 배경따라 보도여행이 시작된다. 벌교역~남도여관(보성여관)~부용공원~농민상담소(옛금융조합)~채동선기념관~채동선생가~송광사 벌교포교당~홍교중수비무리~벌교홍교~김범우집~소화다리(부용교)~대광어린이집(옛회정리교회)~태백산맥문학관~현부자네집~소화네집~중도방죽~벌교역으로 이어지는 코스다.
벌교는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주무대로 소설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곳이다. 소설 <태백산맥> 속에 등장한 벌교의 여러지역을 찾아가면 자연스레 소설 속에 뛰어들어 등장인물들과 만나는 착각에 빠질 정도다. 벌교역에서 홍교에 이르는 길가에 늘어선 병원이나 학교, 여관 등지에서는 항일 투쟁에 연관된 여러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소화다리에 이르러서는 일제강점기 이후 이 땅을 찾아온 분단의 아픔에 얽힌 역사가 자연스레 이어진다. 읍내 전체가 소설 속 무대인 벌교에서 소설 태백산맥의 등장인물이 되어 보자. 벌교읍내 옛길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 중심지기 소위 ‘본정통’이라고 불렸던 이 길에 건물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옛 정종 주조장이었던 자리에서 시작되는 이 길은 짱뚱어탕과 꼬막정식으로 유명한 역전식당 남도여관(보성여관), 남초등학교(벌교초교), 북초등학교(벌교여중), 포목점(현 신협) 금융조합(현 농민상담소) 자애병원(현 벌교어린이집)이 연이어 나타난다.
이 길은 홍교까지 이어지는데 소설에 심취했던 사람들은 마치 소설속의 인물들을 만날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 정도다. 실제로 판자벽에 함석지붕을 얹은 전형적인 일본식 집인 여관앞에 서면 정찰 토벌대장 임만수와 그 대원들이 숙소로 이용하면서 수시로 들락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다. 2층 건물은 옛모습 그대로이다.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헐어버리고 시멘트 건물들을 지었지만 요행히 지금까지 남아있다.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그 시절에도 이 건물은 여관이었고 그때의 실제상호는 보성여관이었다. 남도여관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유물을 관리하고 있는데 현재 리모델링 중이다. 벌교 남초등학교를 지나 벌교여중으로 난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가면 부용공원이다.
오르는 길에 쑥이 많아 회원들이 캐기 시작한다. 부용산 오리길이 은행나무와 벚나무로 1999년 9월 30일 조성되어 운치가 있다. 부용산(해발 192m) 녹색쌈지공원 안내표시판도 설치되어 있다. 부용정에서~전등산성~부용산성~용연사~체육공원으로 이어지는 등산코스가 눈에 띈다. 소설에서는 계암사령관 심재모가 벌교를 지키기 위해 설치한 M1 고지가 있던 자리다.
이 곳에서 벌교읍내 쪽으로 눈을 돌리면 왼쪽에 체육공원이 하나있다. 이곳이 벌교 체육공원으로 일제시대 때 신사가 있던 자리다. 충혼탑도 있다. 부용정 가는 길 초입에 부용산 박기동 시비가 세워져 있다. 요절한 누이를 그리며 쓴 시 ‘부용산’이 ‘빨치산의 노래’가 됐다는 이유로 평생을 쫓기고 매 맞고 천대받다 끝내 혈혈단신 이역만리 땅으로 떠나야 했던 시인 박기동. 번번이 원고를 압수당해 아직껏 단 한권의 시집도 내지 못한 이 불행한 시인은 오늘도 묵묵히 시를 기다리며 살아간다.
벌교에 세워진 부용산 시비 내용은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었구나/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1절)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데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홀로 예 서 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2절전문)
‘부용산’ 부활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시비 건립이다. ‘부용산’이 피어난 곳인 전남 보성군 벌교읍 오리 길에 지난해 10월 1일 ‘부용산시비’가 세워진 것. 박시인은 1993년 호주로 이민온 이래 처음으로 모국을 방문, 시비제막식에 참석해 많은 고향 사람들, 제자들과 해후했다. 50년 가까운 세월 숨어서만 불러야 했던 노래를 돌에 새겨놓고 마음껏 부르게 됐으니 박시인은 물론 벌교사람들 또한 얼마나 기뻤을까. 소설에서 말해주는 벌교체육공원의 모습을 한번 살펴보자. 일본인들이 신사를 얼마나 대단하게 떠받들었는지는 그 터를 잡은 것으로 알 수 있는데다가 계단을 보면 더욱 실감이 간다. 새로 만든 나무계단을 내려와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일본식 붉은 벽돌 건물이 있는데 바로 금융조합 건물이다. 지금은 농민상담소로 운영되고 있지만 소설에서는 좌익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멋쟁이 송기묵이 조합장으로 등장했던 무대다.
<금융조합> 벌교 금융조합은 붉은 벽돌은 바탕으로 하고 그 사이사이에 돌을 깎아 박아 건물의 견고함과 장식적 효과를 동시에 노린 일본인들이 관공서형 건물을 즐겨 지었던 그 모습이다. 지금도 변함없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지난 역사를 반추하게 해주고 있다. 소설에서는 금융조합장 송기묵이 일제강점기부터 금융조합에 근무해온 이력을 지닌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친일파가 척결되지 못한 이 땅의 비극이 수없이 남은 분야에서 그런식으로 기득권을 행사했음을 작가는 여러 주인공들을 통해 일깨우고 있다. 금융조합이 가는 것이 결국은 돈 장사이고 보면 그의 이재솜씨는 멋 부리는 것보다 한 수가 더 앞질러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태백산맥 1권 284쪽)
금융조합을 지나 벌교천을 따라 500m 정도 올라가면 새로지어진 벌교읍사무소와 함께 채동선기념관이 나오고 채동선생가가 나온다. 먼저 읍사무소1층 채동선기념관으로 들어간다. 넓은벌 동쪽끝으로...로 시작되는 정지용의시<향수>에 곡을 붙인 이가 채동선(1901~1953)이다. 벌교출신의 근대음악의 선구자로 불린다. 이은상 시<그리워>등 우리귀에 친숙한 곡들과 <조국><한강><삼일절노래>등 민족혼을 일깨우는 곡들이 그의 작품이다. 기념관에서 그의 사진들과 악보,유품들을 만날 수 있다. 읍사무소 뒤엔 최근지은 채동선음악당이 있다. 도로정비공사가 진행중인 산옆길을 따라 진행하니 채동선생가가 나온다. <채동선생가> 민족음악가 채동선(1901~1953) 선생은 이곳 벌교에서 태어나 순천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지금의 경기고등학교인 제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이때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에 매료되어 1년동안 홍난파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던 중 1919년 3·1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가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져서 이를 피해 일본유학길에 올라 1924년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할때까지 바이올린 수업을 계속하였고, 1926년 독일 슈테르센 음악학교에 유학을 마치고, 1929년 귀국하여 4차례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1932년 가곡'고향'을 발표하였고, 1937년 일제의 감시와 제재가 더욱 심해지자 서울 근교에서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1953년 부산 피난생활 중에 신병 얻어 53세 일기에 타계했다. 채동선선생 남긴 주옥같은 작품 조국, 독립축전곡, 개천절, 한글날, 3.1절노래 이외에도 진도아리랑, 도라지타령 등 수 많은 곡이 있다.
채동선 생가 인접에 송광사 벌교포교당엔 아름드리 향나무가 있어 들를만하다. 이 포교당은 일제강점기에 야학활동이 이뤄졌던 장소이다. 포교당을 지나 조금 진행하니 벌교어린이집 간판이 나오고 소설속에서 총상을 입은 안창민이 고통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면서 몸을 피한 자애병원 자리. 병원터의 앞쪽은 어린이집으로 팔리고, 뒤쪽은 가정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자애병원 바로앞에 보이는 아치형의 다리는 전체길이 27m, 높이 약 3m, 폭 4.5m ‘무지개다리’라는 뜻의 홍교(虹橋)로 소설에서는 이 곳 사투리로 ‘횡갯다리’라 불렸다. 홍교는 벌교천을 가로지르는 가장 오래된 다리로 원래 세 칸의 돌다리였는데 일제에 의해 시멘트다리가 이어져 지금의 볼품없는 모양이 되었다. 전체 다리 중 오래되어 보이는 세 칸만이 보물 304호로 지정된 홍교를 소설에서는 염상진, 하대치 등 빨치산들이 소작인들에게 설을 쇨 쌀을 나눠주기 위해 쌓아두었던 곳으로 그려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홍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대표적인 돌다리다. 홍교가 놓이기 이전에는 땟목 다리를 놓아 건너다녔다고 하는데 벌교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바로 옆에는 벌교홍교 중수비군이 있다.
비는 어떤 일의 행적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세운 기념물이다. 보통 쇠나 돌에 글을 새겨놓아 금석문이라고 한다. 금석문은 지역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홍교 앞 도로변에는 모두 5기의 비가 있습니다. 홍교가 낡고 헐어 다시 고친 내력과 참여자 등을 자세히 기록한 중수비와 단교명비입니다. 이곳 홍교는 단교라고도 불렸는데 큰물이 나면 다리가 끊어지고 사람의 통행이 끊어진데서 유래되었다. 비문은 대부분 마모가 심하거나 훼손되어 내용 판독이 어려워 아쉬움이 남는다. 1737년, 1844년, 1899년에 건립한 3기의 중수비만이 년대가 밝혀진 뿐이다. 이 비군은 홍교의 역사와 지역의 연혁을 알 수 있는 자료로 가치가 있다.
홍교 옆에 공터에서는 제6회 홍교동 효사랑 큰잔치가 열리고 있다. 회원들은 맛있는 음식과 술을 걸게 대접을 받는다. 제일 나이가 많은 오문협고문이 송대관 네박자 노래를 신청한다고 난리 법석이다. 회원들이 박장대소하며 웃는다. 잼나는 도보여행의 묘미이다. 기차시간을 맞추기 위해 아쉽지만 진행한다. 홍교다리 건너편으로 김범우의 집이 보인다.
홍교 다리를 건너니 민족주의자 김범우가 살던 집이 나온다. 걸어 올라가면 길게 이어진 돌담 끝에 그리 크지않은 대문 하나가 보인다. 이 집의 주인으로 소설에 등장하는 김범우의 아버지 김사용은 만석꾼이면서도 유일하게 인간적인 정을 가진 인물이다. 김범우의 집은 원래 대지주였던 김씨 집안 소유의 집이다. 안채의 대문 옆에 딸린 아래채에서 초등학생이었던 작자가 친구인 이 집 막내아들과 자주 놀았다는 것은 작은 흥미를 일으킨다. 소설에서는 품격 있고 양심을 갖춘 대지주 김사용의 집으로 그려지고 있다. 특히 안채 오른쪽 앞부분 귀퉁이에 있는 돼지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생활의 알뜰함과 환경오염을 막고자 했던 살아있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벚나무가 즐비한 벌교천을 따라 진행하니 옛 관덕청이 나오고 외서댁 꼬막정식집과 함께 소화다리(부용교)에 도착한다. 볼품없는 하나의 시멘트 다리로 보인다.
여순사건으로부터 6·25로 이어진 우리 민족의 비극을 고스란히 겪어낸 소화다리다. 1931년 6월에 건립된 철근콘크리트 다리로써 원래 부용교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였던 그때가 소화 6년이기도 해서 누가 부르기 시작했는지 모르게 소화다리로 더 잘 알려져 있고 지금도 대부분 소화다리라고 부른다. 소설에서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겠구만이라… 사람 쥑이는거 날이 날마동 보자니께 환장 허겄구만요’(태백산맥 1권 66쪽) 라는 표현과 포구의 갈대밭에 마구 버려진 시체들을 찾아가는 장면의 묘사 등 그때의 처참한 상황을 상상하면 다리가 달리 보일 것이다. 소화다리에서 벌교 태백산맥 꼬막정식집을 지나 500m정도 진행하니 고가구 한옥집이 나오고 좌측으로 산자락에 돌로 지어진 자그마한 교회 건물이 보인다.
소설에서 서민영이 야학을 일으켰던 회정리 교회의 모델이 된 대광교회 자리다. 1935년 문을 연 교회로 돌로 지어졌다. 85년 본교회가 읍내쪽으로 이사나간 후 폐건물로 남아있다. 소설에서 아이들을 야학에 보내라고 찾아온 교사가 이근술에게 빨치산이 된 남편 때문에 홀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구산댁이 반기며 하는 말 속에< 태백산맥>의 백미라 할 수 있는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가 나온다. 교회 바로 건너편에는 작가 조정래가 어린 시절을 보내며 소설가의 꿈을 키웠던 생가가 있다. 교회에서 내려와 왼쪽으로 버스터미널 방향으로 꺾어돌면 그저 평범한 단층집으로 얼마전까지 노인이 혼자 살았다는데 이사간 듯 문이 잠겨져 있다. 마을 입구나 골목 어귀에 ‘조정래 생가’ 라는 간판이 하나 붙어있을 만도한데 찾을 수 없어 아쉽다. 태백산맥문학관으로 향하는 길 옆에 그 유명한 회정할매 곱창집이 있다. 중학교 다닐 때 이전부터 있던 집이다. 회원들이 곱창을 먹고 가자고 해 자리를 잡았다. 사람이 많고 역시 곱창과 막창 인기가 높다. 연탄불에 구워먹는 것도 별미이다. 막창의 효능은 본초강목이나 동의보감 옛 문헌에 막창은 정력과 기운을 북돋아주고 비장과 위를 튼튼하게 하며 오장을 보호하고 어지럼증을 다스리는 효능이 있고 피로회복에 좋다고 하자 너도나도 소맥에 한 점씩 먹는다.
시간을 재촉하며 조정래 문학관으로 향한다. 입구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쑥이 지천이어서 희선씨와 세영씨가 쑥을 캐기 시작한다. 현부자네 제각으로 가는 길은 친일의 상징으로 오래된 벚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다. 소설의 첫 장면에서 정하섭이 활동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새끼무당 소화의 집을 찾아가는 길이 바로 이 길이다. 벚나무 터널길이 끝나면 오늘쪽으로 연못과 함께 대문이 이층으로 되어 있는 특이한 모양의 한옥집인 현부자네 집이다. ‘정남향에 좌청룡 우백호 거느리고 앞에 물길까지 트였으니 이에 더할 명당이 또 어디 있느냐‘는 소설 속 정하섭의 말처럼 벌교를 통틀어 가장 좋은 집터로 불리는 곳이다. 중도 들녘이 질펀하게 내려다보이는 제석산자락에 우뚝 세워진 이 집과 제각은 본래 박씨 문중의 소유이다. 이 집의 대문과 안채를 보면 한옥을 기본틀로 살았으되 곳곳에 일본식을 기미한 색다른 양식의 건물로 한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꽤 흥미로운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현부자네 집으로 묘사되었다. 소설 <태백산맥> 이 문을 여는 첫 장면에서 처음 등장하는 집이다. 조직의 밀명을 받은 정하섭이 활동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새끼무당 소화의 집을 찾아가고 이곳을 은신처로 사용하게 되면서 현부자와 이집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펼쳐지게 된다. 소화와 정하섭의 애틋한 사랑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소설< 태백산맥> 조정래 등산길도 있다.
버리고 기쁨을 얻는 곳! 화장실이 현대식으로 지어져 있다. 소설 <태백산맥. 관광 안내도도 있다. 정하섭을 사모했던 여주인공 소화가 살던 무당집도 있다.
소화의 집은 조그마하고 예쁜 기와집, 방 셋에 부엌 하나인 집의 구조 부엌과 붙은 방은 안방이었고, 그 옆방은 신을 모시는 신당이었다. 부엌에서 꺾여 붙인 것은 헛간방이었다. 당시의 무당집은 실제로 제각으로 들어서는 울 안의 앞 터에 있었다. 집둘레로는 낮춤한 토담이 둘러져 있었고 뒤로는 풍성한 대나무숲이 집을 보듬듯하고 있었다. 뒤 탄으로 도는 길목의 장독대 옆에는 감나무도 한그루 서있는 소설에서 그려진 소화의 모습처럼 정갈하고 아담한 그런 집이었다. 1988년 무렵 태풍에 집이 쓰러졌고 그 후 주차장으로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어 2008년 보성군에서 복원했다.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고 쓰여진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이 초현대식로 지어져 있다.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은 제1전시실과 제2전시실로 되어있다. 전시실에는 소설을 위한 준비와 집필, 소설 태백산맥의 탈고, 소설 태백산맥 출간이후, 작가의 삶과 문학, 1만 6천여매 분량의 태백산맥을 쓴 원고지 등이 전시되어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상세히 배치되어 있다.
<하대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으며 가장 민중적인 인물이다. 일본인 지주를 상대로 소작쟁이를 하다 징용에 끌려갔다가 해방이 되어 돌아왔으며, 그 기간중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 되었다. 염상진의 충직한 부하이다. <소화> 열일곱 살에 무당으로 전쟁중 정하섭의 아이를 가진 채 조계산 지구에서 지내다가 체포되어 6년을 선고 받고 감옥에서 아들을 낳는다. 정하섭과의 사랑은 운명이자 신령님의 뜻으로 생각한다. 정하섭과 이지숙의 심부름을 해주며 사상에 물든다. <염상구> 염상진의 남동생으로 어렸을 때부터 형에게 시기와 분노의 감정을 가졌다. 47년 9월 결성된 ‘대동청년단’의 열성당원으로 좌익 지하조직을 소탕하는데 적잖은 공을 세운다. 포악하고 계략이 많은 인물이다. 전시실에서 마주보게 된 높이 8m 폭 81m에 이르는 ‘원형상-백두대간의 염원’ 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일랑 이종상 화백에 의해 시각화 되었으며 세계 최대, 최초의 야외 건식 ‘용석벽화’로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문학관 전시자료는 총 159건 719점(육필원고 등 증여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문학관 건물은 세계적인 건축가 김원씨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과거 아픈 역사를 끄집어내기 위래 벌교읍 제석산의 등줄기를 잘라내고 그 전시실은 공중에 매달려 있는 형상으로 건축되었다. 또한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북쪽을 향하고 있어 특이하다. 문학관 입구 벽에는 소설 ‘태백산맥’을 건축으로 말하다… 글씨가 쓰여져 있어 사람들이 역사의 어둠과 빛을 한꺼번에 체험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한다. 문학관을 등지고 읍내를 바라보면 정면에 중도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들판 한쪽으로 길게 이어진 야트막한 언덕이 있는데 이것이 바다를 막은 중도방죽이다.
중도방죽은 실존인물인 일본인 나카시마의 이름을 따 붙여진 지명으로 방죽간척공사는 식민지 수탈기관 나카시마를 앞세워 벌인 대규모 공사였다. 이때 생긴 농토는 벌교 사람들의 땅이 아니라 나카시마의 땅이 되었음을 당연하다. 작가는 소설속에서 하대치의 아버지를 통해 중도방죽을 쌓던 당시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방죽을 다 쌓고 본께 배불리는 놈덜언 일본눔덜이었다 그것이요. 방죽을 쌓다가 죽기도 여럿허고, 다쳐서 빙신된 사람도 많고 하여튼지 간에 저 방죽에 쌓인 돌뎅이 하나하나 흙 한삽, 한삽이 다 가난헌 조선사람들 핏방울이고 한(恨) 덩어린디, 정작 배불린 것은 일본눔덜이었응께, 방죽 싼 사람덜 속이 워쩌겄소. 벌교역으로 가는 길에 철다리가 놓여 있다.
1930년 경전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놓인 이 철다리는 <태백산맥> 소설의 배경이었던 시절은 물론 1970년대 후반 국도 2호선 도로가 선형을 바꾸기 이전까지만해도 홍교, 소화다리(부용교)와 함께 벌교포구의 영안을 연결하는 세 개의 교량 가운데 하나였다. 소설에서 염상구를 가장 인상적으로 부각시켜 주는 곳이 이 철다리다. ‘세상이 다 알게’ 친일을 했던 자들이 무슨 명목을 붙여서든지 애국의 탈을 만들어 쓰려고 급급한 판에 염상구 정도의 이력변조는 아주 양심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태백산맥 1권 189쪽)
제2부용교를 건너니 도로변엔 평일인데도 길 좌우로 장터가 형성돼있다. 끝물이 되어가는 꼬막, 새조개, 봄내음 물씬한 나물 좌판들이 줄을 잇는다.
장날(4.9일)이면 벌교역 앞에서부터 제2부용교(소화다리) 주변까지 온통 시끌벅적한 장마당으로 변한다고 한다. 평소에 잘아는 꼬막을 파는 가게에서 새조개를 사가지고 벌교역으로 향한다. 벌교역 앞을 지나면서 꼭 들러보아야 할 곳이 있다. 소설에서 등장하지 않는 ‘역전식당’이 그곳이다. 허름한 이 식당은 '짱뚱이탕‘으로 유명한 집이다.
벌교에서 가장 맛있는 식장으로 알려진 이곳 작가 조정래가 벌교에 들를때 종종 찾는 집이라고 한다. 먹음직스런 게장과 살이 쫄깃하기로 유명한 벌교꼬막이 함께 나온다. 고향에 가면 가끔 들려서 짱뚱이탕을 먹고 온다. 오늘은 시간이 없어 아쉽다. 기차 시간 때문에 도보여행 회원들은 초장에 새조개를 살짝디쳐서 뒷풀이를 했다.
숨어있던 근현대사의 이면을 파헤친 조정래씨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주무대인 벌교. 홍교와 꼬막의 고장 벌교는 <태백산맥> 이후 국내 문학기행 1번지로 떠올랐다. 벌교의 문화유적들이 골목골목에 격동기를 거친 옛 흔적들이 소설 속 인물들과 뒤 섞여 꺼칠하게 남아있어 또 오고싶다. 도보여행의 주무대인 <태백산맥>은 우리 현대사 물줄기의 궤적을 제대로 그려내 오늘의 역사를 이어주고 있는 소설이다. 태백산맥의 탁월함은 무엇보다 역사의식의 치열함에서 비롯되고 있다. 이 소설의 작가 조정래는 8‧15 이후의 민족분단 과정과 6‧25를 중심으로 하는 분단고착 과정을 밝히기 위한 현지답사와 탐문, 진실을 드러내려는 열정과 용기, 그리고 섬세한 문체를 통해 우리 현대사 물줄기의 궤적을 제대로 그려내 민족통일을 지향하는 오늘의 역사에 올바르게 이어주고 있다. 나는 태백산맥의 거대함을 사랑하기 보다는 그 구체성을 사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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