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시적동기詩的動機에서 찾아보는
심미적審美的 감수성
―김순여 시인의 시세계
최 원 철
(부산대학교 명예교수, 시인, 수필가)
사물의 형상이나 감각적 심상心象에서 나타나는 대상으로부터 시적동기를 일으키는 감성의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은 심미적 감수성이 있기 때문이다.
심미적 심리상태는 곧 원초적인 직관이요 거짓 없는 솔직한 마음의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로 통하여 나타나는 표현이 곧 시적 창조와 연결되는 것이다. 직관적으로 들어오는 시각적 미각적, 후각 및 촉각이나 청각적인 감각을 언어로 재현시키는 것이 시적 이미지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통찰력을 그림으로써 나타내게 될 때 화가가 되고 언어로 나타낼 때 문학가가 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김순여 시인은 사물의 형상을 통하여 심미적인 감정을 토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김시인의 첫 시집 『외딴 섬』에서 봐도 처음부터 직관적인 대상이 주로 자연으로부터 추출된 것이 대부분이다. 제2집에서는 사물에 대해 더욱 깊은 통찰력으로 시적 동기를 찾아내고 있다.
하늘은 파란색을 숨겨둔 금고
가슴에 묻어둔 그림들이
뭉게구름으로 눈앞에 다가온다
무거운 두 다리 풀숲에 내려놓고
눈을 감으면
엮어놓은 작품들이
한 겹씩 가슴에 안기어
잊혀져간 기억들이 새롭다
환하게 되살아난 한 폭의 그림
아린마음 밭에
여운으로 남긴다
―「가을구름」 전문
위의 「가을구름」에서 하늘을 보고 자신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기억들을 ‘엮어놓은 작품들’이라고 상상하며 ‘한 폭의 그림’처럼 남겨져 있는 여운을 그려내고 있다. 김시인의 ‘가을구름’에서 그 이미지를 심미적인 서정으로 생명을 불어 넣고 있다.
여름햇살에 달구어진 나뭇잎
어느새 화려한 단풍으로 갈아입은 옷
가는 세월 잡지 못해
곧 남루한 모습으로 길가에
낙엽되어 흩어질 운명
스산한 바람결에 길가 소복이 쌓여
가을비에 젖어가며
애달프게 추위에 떤다
사슴 한 마리
길 잃고 헤매다가
멍 하니 바라보는 하늘에
흐르는 구름 한 점 쳐다보며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때 늦은 가을에
붉게 남은 감 하나가 나무에 달려있듯
내 마음은 서러움에 매달려
웅크리고 있다
―「만추」 전문
위의 「만추」에서 자연현상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비교한다. 풍성하고 화려한 잎으로 존재하던 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될 때 단풍든 잎들이 낙엽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본다.
주위 환경에 따라 잎들은 ‘스산한 바람결에 길가 소복이 쌓여/가을비에 젖어가며/애달프게 추위에’ 떠는 낙엽이 되어 뒹구는 것을 보는 김시인 자신도 ‘’길 잃고 헤매‘는 ’한 마리’ 사슴처럼 ‘멍 하니’ 하늘을 보며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감수성을 나타내고 있다.
주위의 환경에서 보여 지는 사물을 통하여 끊임없이 인간에게 다가오는 삶에 대한 애착을 느끼게 되고, 존재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때 늦은 가을에/붉게 남은 감 하나가 나무에 달려있듯/내 마음은 서러움에 매달려/웅크리고 있’는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커다란 키에 둥근 얼굴
여인을 닮아 거울을 바라보듯
님의 얼굴을 보고 싶음인지
온 종일 쉴 새 없이 해를 향해
바라보는 모습
왜 그리 뚫어지게 바라볼까
봐도 봐도 자꾸만 보고 싶은
그대 얼굴
변함없는 마음에 노란빛 감동
―「해바라기」 전문
김순여는 일반적인 실상實相에 내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해바라기’가 ‘해를 향해 바라보는 모습’을 다만 사랑하는 사람을 사모하는 마음을 그려냈다. 그러나 모든 대상을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에 대한 소재가 많이 이용하는 것을 좀 더 다양한 소재로 이동시켜 선택할 수 있는 다양성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 1866~1952)는 20세기 미학이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직관적 지식이 중요 한 단계라고 강조하였다. 예술의 직관성, 즉 직관으로 들어오는 미학을 표현이라는 방법을 시詩로 나타내는 것이 서정적 시문학의 발전의 핵심 논리가 될지 모른다. 예술은 사랑을 노래하는 서정적 직감성을 빼 놓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미술 비평에서 샤를르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도 미의 본질을 찾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심미성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서정시에 있어도 마찬가지이다. 자연에서 나타나는 직관적 표현에서 심미성을 찾는 것이다. 자연의 직관성에서 내면적이면서 형이상학적 무한한 세계를 동경하며 상상의 영역까지 모색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얀 눈으로 덮인
성당마당 십자가 아래서
뜨거워지는 내 마음
어찌해야하나
잠시라도 생기는 애통하고 싶은 마음
살아 있으니
그래도 용서 받을 수는 있나보다
―두 팔 매달린 신음소리가 들리는 내 귀
나도 한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
그대로 안아주면 내 가슴은 어떨까
망설이는 마음에 혼란스럽다
내가 먼저 결심한 내미는 손에
굻어 앉은 무릎을 털고 일어나면
잔잔히 호수가 되는 내 마음
나는 기쁨을 끌어안는다
―「용서」 전문
위의 시에서 보통의 상태에서 볼 수 있는 실제의 직관적 형식의 의미가 자신의 내면적 세계와 이어져 있다. ‘하얀 눈으로 덮인’ 성당의 십자가 아래에 와서 자신도 모르게 뜨거워져 오는 심적 내면의 뉘우침의 소리를 스스로 듣게 된다. 평소 남의 잘못을 아마도 용서할 시간적 마음을 느끼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성당의 십자가가 그냥 일반적인 십자가가 아닌 깨끗하고 정결하게 보이는 눈으로 덮인 십자가인 것이다. 그것을 볼 때 평소 알고도 지은 죄나 모르고도 지은 죄를 상상하게 되고 살아생전 ‘잠시라도’ 애통한 마음으로 신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것은 외면적 사건을 내면의 세계로 전환되어 표현되는 아름다움이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생각하며 시인은 ‘나도 한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그대로 안아주면 내 가슴은 어떨까/망설이는 마음에 혼란스럽다‘라고 고백을 한다. 스스로가 내가 용서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곧 남을 용서하겠다고 기도한다. ’내가 먼저 결심한 내미는 손에/굻어 앉은 무릎을 털고 일어나면/잔잔히 호수가 되는 내 마음‘을 가질 때 시인의 마음에 ’기쁨을 끌어 안‘게 되는 것이다. 이런 표현성은 직관에서 내면의 세계의 인식 및 긍정적 표현을 나타내고 있다.
늦겨울의 강물은
지친 발걸음으로
강변에서 하얗게 쉬고 있다.
실크빛 햇살은 강물을 깨우고
노란 개나리꽃 봉오리는
병아리 떼와 함께 나들이 한다.
아름다움도 언젠가
노란 꽃잎처럼 떨어져야 하지만
주름살 하나하나 손짓하는 내 손길
겨울잠에서 깨어난 듯
변해가는 모습에
개나리가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우린다.
―「개나리」 전문
작가가 누구나가 일반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감각적인 형태에 생명을 부여하고 감정과 감성을 엮어내어 시적인 표현으로 이끌어 내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개나리」에서 ‘늦겨울, 강물, 개나리꽃, 병아리’ 등 자연적인 변화나 요소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봄에 피는 개나리꽃이 떨어지는 현상을 작가 자신이 아무리 아름다운 시절과 활기에 찬 삶이 있었을지라도 스스로 늙어 가는 삶을 생각하면서 평소 가지고 있던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모든 것은 흘러가고, 떨어져 가는 자연의 흐름을 아름다운 봄에 느끼는 특이한 현상이다. 봄에 개나리꽃이 낙하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세월을 거슬러가지 못함을 알고 ‘주름살 하나하나 손짓하는’ 시인의 마음을 그려내고 있다. 그 뿐 아니라, ‘변해가는 모습에/개나리가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우린다.’고 했다. 자연의 숨소리마저 듣는 시인의 감성을 토로하고 있다. 자연에서 시적 동기를 찾아내고 여기에서 삶의 심미적 감수성을 이끌어 내는 것을 엿볼 수 있다고 하겠다. 보고 느끼고 듣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던 1930년대의 표현주의가 미술, 음악, 문학에까지 두루 다양한 장르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이 작가 내부의 자아, 주관적 표현 등을 추구하여 내부적 생명을 부여하는 ‘감정표출의 예술’성을 가지고 있음을 느끼게 하고 있다.
깊은 잠에 빠진 고요를 깨워
창문을 연다
작약꽃 가득한 뜨락
바람은 나비의 무희복을 흔든다
마냥 걸어 보는 꿈길
색깔이 없다
빛 고운 치마폭에 잠재우는 내 마음
어느덧 꿈길에서 나와
바람과 함께 왈츠를 춘다
―「꿈길」 전문
일반적으로 꿈은 현실을 재현하는 성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이상하고 낯선 측면도 있으며 이것은 시간과 목적의 불연속성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는 인간의 행위나 감정은 무의식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꿈은 개인 속에 잠재 되어 있는 무의식을 드러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꿈은 현실을 재현하는 성질이 있다. 위의에서 “깊은 잠에 빠진” 꿈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꿈속에서 창문을 열고 내다보는 자신의 뜨락은 꿈속에서 자아가 살고 있는 정원인 것이다. 거기에는
살랑대는 바람이 정원의 나뭇가지들을 춤추듯 흔들어대고 나비가 나는 형상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무희 복을 입고 연회를 베푸는 형상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그렇지만 “마냥 걸어 보는 꿈길/색깔이 없”음을 솔직히 시인하고 있다. 물론 가끔 색깔 있는 꿈도 꾼다고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런 현상적인 문제가 아니라 아무리 좋은 꿈이라도 꿈길,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님을 발견한다. 즉 그 속에는 심미적인 감성을 추구할 수 없다.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빛 고운 치마폭에 잠재우는 내 마음/어느덧 꿈길에서 나와/바람과 함께 왈츠를 춘다”고 한다. 빛 고운 치마폭에 싸여있는 마음도 꿈이 아닌 생시의 생활이요, 비로소 꿈길에서 나와서만이 참다운 삶의 왈츠를 추는 것을 알 수 있다. 꿈을 현실과 동등한 것으로 보는 해석에서도, 현실과 꿈은 구별되는 것이다. 때때로 꿈을 깨어있는 상태의 행위보다 더 높이 평가하기도 하지만 꿈보다 현실의 기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꿈길」에서 보이는 직감은 시·공간을 너머선 표현이다. 인간에게는 정신적 활동이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 속에 파도는 세월을 밀어내고
잠자던 젊음을 불러내어
바다에 떠있는 쪽배가 된다
잔잔한 물결 위에 뜬 구름되어
소리 없이 흐르는 시간을 따라
길을 뒤돌아본다
지그시 눈을 감으면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낙조가
오히려 나를 찬란하게 만든다
외딴섬에 닻을 내려
곱게 접어둔 엽서를
차곡차곡 모아
가야할 길 위에 파란 잔디처럼 깔아 놓으리라
―「가는 길」 전문
김시인은 「꿈길」에서 색깔이 없는 ‘꿈길’을 걸었다. 그러나 「가는 길」에서는 꿈길과 같이 색깔이 없는 길이 아니라 ‘불게 물들이는 낙조가’ 있고 오히려 시인은 ‘찬란하게 만든다’고 하였다. 아마도 꿈의 세계는 무질서의 공간이 엄청나게 큰 것이기에 누구나가 꿈을 꾸고 현실을 벗어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현실세계의 공간은 꿈의 세계보다 더 작은 공간이고 제한적이며 질서가 있는 공간일지 모르지만 여기에는 꿈을 낳을 수 있는 심미적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기에 찬란한 색깔이 존재하는 것이다. 시인이 가지고 있는 정서적 감성을 사물에서 뽑아내는 언어의 창조자이기 때문에 사물에서나 심상에서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형상화 하는 것이다. 「가는 길」은 작가의 ‘여정’이다. 김시인은 “내 마음 속에 파도는 세월을 밀어내고/잠자던 젊음을 불러내어/바다에 떠있는 쪽배가 된다” 고 읊조리고 있다. 연이어 “잔잔한 물결 위에 뜬 구름 되어/소리 없이 흐르는 시간을 따라/먼 길을 뒤돌아본다.”라고 한다. ‘물결 위에’ 비춰진 뜬 구름‘과 ’소리 없이 흐르는 시간‘은 세월을 나타내는데 왜 하필 ’물결위에 비춰진 뜬 구름‘일까. ’물결‘은 인간의 삶에 비춰진 김시인이 살아가는 길이라고 믿고 싶다. 너무나 절묘하게 엮어낸 형상이 아닐 수 없다. 자연의 현상에서 원초적인 서정을 시詩로 이끌어내는데 훌륭한 발상이라 하겠다. 마지막 연에서 “외딴섬에 닻을 내려/곱게 접어둔 엽서를 차곡차곡 모아/가야할 길 위에 파란 잔디처럼 깔아 놓으리라”는 혼자되어 외롭게 살아가도 모든 사연들을 서뿔리 버리는 것이 아니고 아름다운 여생을 푸른 잔디가 길을 덮듯이 후회 없는 삶을 깔아 놓겠다는 시인의 이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넘나들며 고민하고 바라는 심미적 아름다움이라고 생각된다.
가는 길 잘 찾지 못한 한 마리 비둘기
언덕배기에 우두커니 서서
바람결에 날아가는 세월을 본다
비워진 마음 한 모퉁이에
따스한 온기를 채우려
조용히 날개짓을 한다
한창 정열로 불태우는
붉은 잠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새의 시선에는 어느덧 초점이 흐려진다
날아야 할 창공 높이는 어디까지인지
멀고 먼 길을 떠날
날개짓을 하며
또 다시 깃을 털고 하늘을 나른다.
―「비상」 전문
위에서 ‘비둘기’가 곧 김시인 자신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신이 ‘가는 길 잘 찾지 못한 한 마리 비둘기’가 된 것이다. 시詩에서 묻어나는 서글픔도 심미감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언덕배기에 우두커니 서서’ 덧없이 가볍게 지나가는 ‘세월’을 보는 것이다. 곁에서 ‘한창 정열로 불태우는 잠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신의 ‘초점이 흐려진다.’고 했다.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다고 하듯이 모든 것이 세월 따라 흘러가는 것을 제3자가 되어 바라보고 있다. 인간이라는 것은 세월로부터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과거에서 점점 이탈되어진다. 그렇지만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과거는 풍화되어 잊히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 기억으로 남아 있다가 초시간적 감각을 계기로 되살아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흐려지는 초점이 과거가 기억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 기억’에 남아 있다가 시적 동기가 부여 되어질 때 언제든지 감수성으로 다시 되살아나서 하나의 작품으로 쓰여 질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날아야 할 창공높이는 어디까지인지” 모르는 그 곳까지 “다시 깃을 털고” 날아간다. 과거에서 현실로, 현실에서 미래로 도약해 가는 것이다.
시詩는 언어사용의 기원과 동일하게 시작 되면서 삶에 대한 제례의식으로 행해지는 주문으로부터 시작 되었다고 추측한다. 삶 속에서 바라는 희망과 염원이 담겨있는 것이다. 김순여는 살아온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미적 감각으로 처리하여 시詩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김순여는 시의 소재를 멀리에서 찾지 않는다. 주위의 환경을 시의 원초적인 감성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모든 생물과 무생물에 숨어있는 혼(Soul)을 찾는 것이다. 거기에 과거의 경험이 녹아있고 현재가 숨소리 하는 것이다. 철학에서 이데아(Idea)나 종교의 영혼(Spirit)를 찾는 것이 아니다. 평범하게 만나는 그 속에서 진의를 끄집어낸다. 이렇기 때문에 더욱 친근한 심미적 감성을 느끼게 된다. 시詩를 쓰는 방법이 어렵고 길게 써야만 되는 현실에서 진실로 심미적 감성을 느끼기는 매우 드물다. 물론 옛날 써오던 시적 답습은 고쳐야 할 문제로 대두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서정을 바탕으로 둔 시詩가 대중에게는 더욱더 많이 읽혀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꼭 어렵게 써야 시詩가 되는 것이 아니다. 김순여의 시詩는 너무나 쉽고 이해가 빠르다. 즉 구김 없는 시적 세계를 아름답게 보여준다고 하겠다. 자연에서 배우고 자연에서 커가고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자연현상을 그대로 이야기하게 되면 그것은 보고서이거나 논문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객관성을 그대로 끌고 와서는 시詩가 될 수 없다. 객관성의 형태나 형상이 눈으로 들어와서 작가의 뇌에서 걸러(filtering)되고 그다음 주관적 사고와 정서가 표출되어 하나의 시詩가 탄생되어야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詩에 서정이 깃든 심미적 정서가 시詩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럴수록 중요한 것은 비유(Metaphor)가 필요하고, 거짓(Lie)이 아닌 픽션(Fiction)이 필요한 것이다. 혹자들이 이야기하는 시작詩作원리가 진실해야한다지만 진실 그대로에 정서를 부여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정서를 부여해 본들 감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서조차 거짓이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픽션과 거짓은 다르다. 픽션은 상상의 세계에서 창조할 수 있는 장르이고, 거짓은 그 자체가 속임수일 뿐이다. 왜냐하면 시詩는 진실한 감성을 부여하여 나타내는 서정적 표현이다.
김순여는 직관적 수용을 가급적 은유로 나타내려고 시詩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직관적 수용에서 심미성을 찾고 새로운 서정적 장르를 개척해 나가기를 바란다. 제1시집 『 외딴 섬』에서 제2집 『식탁 위에 낙엽』에서는 점점 더 세련된 시詩로 태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서정시가 대부분 시인들이나 대중에게 고착되어 있는 의식이라고 생각하지만 시대의 발전이나 흐름에 맞게 개선되어가야 할 책임과 의무가 요구되어지는 시기인 것이다. 앞으로 더욱더 노력하여 직감에서 정감을 더하고 거기에서 새로운 시적 세계가 펼쳐지기를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