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水墨畵의 水波表現
1. 중국의 산수화(노장사상. 역대작가와 내면세계와 작품과의 관계.
개자원화전에 물표현, 화론에서 물표현..)
2. 한국의 산수화
Ⅲ. 수파표현 방법
1. 기법 연구(백묘.몰골.발묵. 본인 작품에 사용된것)
2. 조형성( 공간구성과 배치. 여백...)
Ⅳ. 작품분석
( 중국산수화. 한국산수화 비교. 내면세계. 조형성. 본인작품설명)
Ⅴ. 결론.
Ⅱ. 수묵화의 수파표현.
수파란 물결의 모양, 형태를 이르는 말로 원래 물은 움직임이 없고 모양에 따라 담긴 그릇에 따라 집합형태로 만들어진 즉, 용기에 따라 그대로 순응하고 있지만 용기 형태로 고여 있다. 바람을 눈에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라 한다면 수파는 눈에 보이는 바람이다.
약간의 미풍이 불 때는 미묘한 움직임이 있고, 바람의 속도에 의한 물결은 좀더 높은 파장으로 이루어진다. 바람의 속도와 물결은 상호 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바람은 물결을 부딪힘으로 이끈다. 부딪힘으로 인하여 파생되는 것을 수파라 한다. 물이 아주 고요할 때는 거울거럼 맑은 상태에서는 작은 피라미 같은 곤충에 의해서도 파장을 일으키고 물고기를 보면 물위의 산소흡입과정에서도 공기 방울에 의한 파장도 있고 돌맹이를 던졌을 때 부딪힐 때 원의 반경으로 번져가는 물체의 크기와 속도에 의한 파장도 감지 될 수 있다. 파장은 달라지지만 형태의 파장은 그대로 유지한다. 물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빛에 의해서 육안으로 파장을 볼 수 있고 어둠 속에서는 부딪힘으로 인한 소리의 파장으로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물의 흐름의 형태인 수파의 표현이 수묵산수화에서는 어떻게 전개 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1. 중국의 산수화
중국 산수화에 나타난 수파표현의 시초는 육조시대부터 라고 할 수 있다.
발생 전 산수화의 의식도적인 성격이 육조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창작예술로서의 성격으로 전환되는데 이 시대 분위기에 기인된 자연관에 의해 발로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인물이 도식화의 배경 정도로서 소극적으로 등장하던 산수 자연은 회화의 주요한 장르로서 독립적인 출발을 보게 되는 것이다. 姜敬求, 「六朝時代의 山水畵發生과 그 性格」,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84 p.11
인물만이 중심이 아니라 자연 속에 인물이 어우러지는 이야기 전개형식으로 동경적인 자연관을 볼 수 있는 예로 고개지의 낙신부도권(洛神賦圖券)을 보면 낙신부(洛神賦)의 마지막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낙수(洛水)의 여신이 작별을 고하고 배를 타고 떠나는 장면에서 배경을 이루고 있는 산수의 처리에서 최초의 水波표현이 잘 드러난다. 여기에서의 수파표현은 바람이 부는 방향을 알 수 있게 하고 물결을 길게 이어지게 그렸다.
수대에서도 산수화가 진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당대의 승려 언종(彦悰)의 후화록[後畵錄]에는 정관貞觀 9년 춘 3월11일의 서 가 있으니, 이 곳에 수록된 것은 정관 9년 이전의 작가에 한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모두 26인으로 그 중에 수 隋의 강지 江志는 「산수를 본 떠 그렸는데 그 진체 眞體를 얻었다」하고, 수의 전자건 展子虔은 「 산천의 원근 및 지척천리의 풍경을 그리는 데 뛰어났다」 고 하였다. 權德周 외 옮김, 『중국예술정신』, 동문선, p.281
그리고 수대의 화가 전자건 (展子虔)의 「游春圖」를 보면 화면 왼쪽 윗부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물의 일렁거림을 유려한 곡선으로 가득 채웠는데. 전체적으로 작은 능선의 이어짐이 마름모꼴 형태의 집합처럼 보인다. 그 안에 아늑한 강과 배가 지나가는 자리의 수파표현을 보면 움직임을 표현하기보다는 일정하게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 육조시대에서부터 시작된 산수화속의 수파표현이 수대에서도 진전이 보이고 자연에 대한 심미적 인식체계로 이행하게 되는 것은 당에 와서 인데 이때 산수화는 주요한 화목으로 등장하게 된다. 당나라는 수묵 산수의 대가였던 장조의 시대이며, 시조는 수묵산수의 독특한 위치를 점유한 남종화의 창시자 왕유를 들 수 있다. 당대의 수묵화 발생은 도가적 의경의 철학 사상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지는 것으로 보인다. 노자의 무위지연과 같이 정신의 순수하고 자유스러운 자유방임을 지향하는 체계가 수묵화의 일회성과 상징성, 詩性 등과 자연의 내적 의경을 표상하기에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唐代에 산과 물이 사선으로 대를 이루는 산수화의 예로서 이사훈의 「강범누각도」는 화면 윗부분의 아득한 강과 배, 그리고 수파표현, 물가의 인물 등 전체적인구도에서 수대 전자건의< 유춘도>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화면 위쪽의 강에 떠 있는 범선과 강을 역삼각형으로 하단부로 물결로 이으면서 강의 광활함을 표현해 깊이와 넓이를 대비시키고 있다.
왕유는 [畵學秘訣]에서 물을 그리는 방법에 관해 언급한 부분이 있다. 멀리 있는 물은 파도가 없고 그 높이가 구름과 같이 하라고 하였으며 왕유 「산수론」, (遠水無波 高興雲齊)
, 물은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는 세심한 광경도 놓치지 않고 보여주어야 한다 왕유 앞의 책 , (水看風脚)
고 했다. 또한 오대의 형호는 물을 그릴때는 曲折이 있게 그려야 한다고 했다.5) 형호 「화기」, (...水曲折)
이렇듯이 수파를 표현하기 위한 태도로 자세한 관찰을 요하고 바람의 방향에 따라 물결이 일어나는 모습을 그릴때는 곡절로 움직임을 표현해야 한다.
화론에서 물이 가지는 모습을 표현하는 방법을 살펴보면 북송 때 유명한 화가였던 곽희 (郭熙; 11세기 초- 11세기 말)는 [임천고치 (林泉高致] 라는 책에서 “물은 움직이는 물체이다. 그 모습은 깊고 고요한 듯해야 하고, 부드럽고 매끄러운 듯해야 하며, 넓고 넓은 듯해야 하고, 빙빙 돌아 흐르는 듯해야 하며, 살찌고 기름진 듯해야 하고, 용솟음치는 듯해야 하고, 맑은 샘에서 나오는 듯해야하며, 멀리 흘러가는 듯해야 하고 폭포는 하늘에서 아래로 꽂히듯이 흘러내려야 하며. 급히 흘러 떨어져 땅 속으로 들어가는 듯해야 하며, 물가의 풀과 나무는 무성해서 싱싱한 듯해야 하고 안개나 구름이 끼어 빼어나게 고운 듯해야 하며, 계곡에 햇빛이 비치어 찬란한 듯해야 한다. 이러한 것이 물이 움직이는 물체다운 모습이다.” 許英桓 譯註,「임천고치」, 열화당, 1971년, pp.32~33
* 라고 이렇게 물을 하나의 생명체로 바라보고 살아있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처럼 그려야 한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또 산은 물을 얻어 활기 있고, 물은 산을 얻어 아름답다. 신영주 역,곽희의 임천고치, 문자향, 2004년 p.37
(山得水面活, 水得山面媚)
물을 그릴 경우에는 고요히 흐르는 물, 급히 흐르는 물, 맴돌며 밀려 오다가 부딪치며 격동하는 물, 당기며 펼쳐지며 흐르는 물 등 그 모양이 완연히 자족한 듯이 흐르게 그리면 물의 본래 모습이 풍부하고 넉넉하게 된다. 許英桓 譯註,「임천고치」, 열화당, 1971년, p.31
물이 흐를 때에 여러 가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는 산수화에서 물을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인데, 물을 그릴 때는 물결만 그릴 것이 아니라 산과 주변의 풍경과 어우러져 물의 유동성을 잘 살려서 실감나게 그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유의 <장강적설도>는 물이 주도하고 있는데, 물가 또는 물 속에서의 人事까지의 표현은 물 주도를 더욱 강화시켜 주는 느낌이다.
동원의 하산도 <夏山圖 >(圖 )는 자유롭게 찍은 습윤한 먹점과 넓고 부드럽게 흐르는 듯한 선염이 어지럽게 뒤엉킨 준선들과 잘 어울려져 고요한 강 풍경을 만들어 준다. 담묵으로 물결의 표현을 넓은 선으로 표현해 내었다. 강의 강남의 풍경을 이상적으로 나타낸 독특한 그림이다.
오대의 화가 조간 (趙幹: 10세기중엽 )의 그림 중 <강행초설도 (江行初雪圖)> (도 )는 첫눈이 내리는 날 어부 가족의 일상을 묘사하고 있는 작품으로, 화면을 중앙부분을 가득 채운 수파 표현은 가는 형태의 섬세한 선묘로 이어나갔음을 볼 수 있다. 역시 수대의 유춘도와 당대의 강범누각도에서 볼 수 있는 수파를 표현하는 방법이 이어져 왔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하규의 <산수십이경>부분(도 ) 간결하면서도 느린 시각적인 흐름을 느낄수 있는데 안개 낀 표면에서 고요함이 감돌지만 수파는 고요 속에 감추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왼쪽 윗부분을 여백으로 남겨 놓고 짧은 필치로 물을 표현하고 , 편안하고 끝없이 펼쳐지는 산수화를 그렸다.
이 시기에 활동하였던 마원 (馬遠; 12세기 후반-13세기 중반)은 여러 가지의 형태의 물을 습작하며 물 자체를 그림의 주제로 삼았다.
마원의 이 <십이수도 (十二水圖 (부분)> (圖 . . . .) 는 모두 12 종류의 물결 모양이 실감나게 정교한 필치로 그려졌는데, 모두가 각각 다르게 표현 되어 있다.
물결의 표현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내었다는 것에서 마원이 물의 관찰을 섬세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마원의 그림으로 인해 수파표현에 관한 것이 한층 더 발전하게 된 것이다.
원명에 들어서면 송대의 수직과 수형의 외향적 형태의 정합성을 해체하고 虛境의 精神主義로 內向化 한다. 송대는 관료적 문치주의에 입각한 중앙집권의 체제로 회화 예술에 있어서도 외향적 과시성이 형태의 완정미의 추구로 나타났던 것이지만 원에 이르러 자연과 더불어 고아하고 담담하게 이야기 하는 형식의 사의적 화풍이 주조를 이룬다. 황공망 예찬을 필두로 자연의 내면의 심부를 응시하는 관조적 조형 의식으로 인해 수묵의 기초위에 한두가지 색으로 엷게 포설하는 형식의 간결한 화풍이 주조를 이룬다. 명대에 와서는 暝想的이면서도 超越的이고 동시에 秀逸․瀟酒한 화면으로 정리되어 간다. 심주 , 문징명과 같은 명상적 회화 성향이 가속화 되어 晩明淸初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성향과 팔대산인과 석도에 이르러서는 금욕적 정신화 경향과 완전히 형태적 정합성을 초극한 내면적 대상성의 산수화 경향으로 꽃피우게 된다. 金炳宗 ,「中國繪畵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pp.260~262
원대 왕몽의 <具區林屋圖>(圖 )는 송대 이전에 볼 수 있는 물 표현으로 그물모양으로 촘촘하게 엮어 놓은 듯하다. 마치 화가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엿볼 수 있다.
명대 오위의 <漁樂圖> (圖 )는 물 표현을 그림 위쪽은 여백으로, 물가나 배 주위나 돌 옆은 선을 그어 물의 흐름을 표현하였다.
대진의 <關山行旅圖 >(圖 )를 보면 물가에 있는 돌 주위를 관찰해보면 돌을 중심으로 물이 비켜가는 물결의 흐름을 잘 나타내 준다.
청대 홍인의 <松壑淸泉圖 > (圖 ) 는 중간 부분에 산 사이에서 개울물이 내려와서 맑은 샘을 이루는 풍경을 그렸는데 계곡의 물이 떨어지는 부분만 선을 그어 나타내어주고 나머지 물 처리는 여백으로 표현하여 고요하고 맑은 느낌을 자아냈다.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단순하게 자연을 그림으로써 완벽한 이상세계를 구현해내었다.
이상으로 수묵화中 산수화에 나타난 수파 표현을 시대순으로 대표할만한 작품을 선정해 보았다. 그러면 물 표현의 사상적 ․형태적 의미와. 표현하는 방법적인 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노자는 “높은 선(善)은 물과 같다. 물의 좋은 점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고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거 한다는데 있다. 그래서 도(道)에 가깝다.” 노자 ,제 8장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라고 하여 모든 곳으로 퍼져 나아가고 의도적 행위를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에 생명을 주는 근원인 물의 이미지를 도(道 )와 유사한 것으로 여겼다. 여기서 물이 다투지 않는다 함은 어떠한 장애물에도 버티지 않고 스스로 비켜 나아감으로써 욕심이 없는 무욕(無慾) 상태를 의미하며,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거처한다 함은 더러운 시궁창까지 가지 않는 곳이 없음으로써 자신을 낮출 줄 아는 겸얌함의 미덕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지나가면서 모든 것을 깎아내고 낮은 것을 돋아준다 (損有餘而補不足) 도올 김용옥, 「노자와 21세기(下)」, 통나무 출판사, 1999년 , p.47
라고 하여 물의 평형성의 이미지로써 사회적 평등관의 이미지와 결부시키기도 하고 주어진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할 줄 아는 융통성도 있다.
장자는 고요하고 맑을때 만물을 비추고, 거울로 삼으며 정체된 물은 스스로 맑아질 수 없다고 하였다. 물은 동요하지 않을 때 맑아지고 고요한 상태가 될 때 완전한 수평이 되는 동시에 스스로 침전(沈澱)작용을 하여 맑아진다. 또 그릇의 모양에 따라 어떠한 형태도 취하고 가장 조그마한 큼도 뚫고 들어가며, 강압(强壓)에 양보하지만 가장 단단한 돌도 닳게 하고 얼음이 되어 단단해지고 증기가 되어 사라지기도 한다. 이러한 물의 형상은 자연 순환적인 개념으로 시간의 흐름에 의한 순환에 따른다. 맹자는 물을 바라보는 데에는 기술이 필요하다. 항상 잔물결을 바라보라. 해와 달이 비출 때에는 그 광채가 항상 잔 물결을 빛나게 할 것이다. 사라 알란지음. 오만종 옮김,「공자와 노자 그들은 물에서 무엇을 보았는가」,예문서원, 2001년, p.92
라고 하였는데 투명하면서도 시각적인 물빛은 성인의 지혜에 비유를 할 수 있다.
공자(孔子)는 “흘러가는 만물은 냇(川)물과 같도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여 만물의 운행과 생성(生成)의 도(道)의 본체로서 물을 말하였다.
이처럼 사상가들이 물을 바라보는 체계는 은유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생명과 풍요를 나타내고 있으며 도와 무위, 심과 같은 근본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철학의 기본적인 개념들을 표현하기 위해 물의 이미지를 모델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자원화전에 보면 수파표현의 방법이 자세하게 적혀있다.
垂石에 물을 숨기는 法 (圖 )
수석은 아래로 드리운 돌이다. 왕마힐이 말했다. 「물을 그리는 데는 그것이 중도에서 끊어져도 끊어지지 않아야한다」고 . 소위 끊어져도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반드시 붓은 끊어져도 형세는 끊어지지 않고 모양은 끊어져도 뜻은 끊어지지 않아서, 이를테면 용이 구름 속에 숨어도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지는 것 같아야 한다는 말이다. 위의 책, p.259
물을 그리는 法 (圖 )
돌은 산의 뼈요 물은 돌의 뼈다. 어떤 사람은 물의 성품은 매우 부드러운데 뼈라는 말이 당한 소리냐고 할지 모른다.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물은 산을 밀어젖히고 돌을 뚫어 거령 (巨靈 - 潢河의 水神)을 흔드는 힘이 있다. 물보다 강한 것도 없다고. 그러므로 후한(後漢)의 초공(焦贛)은 물이 뼈를 낳는다고 말했다. 물은 작게는 흐름이 되어 날고 거품이 되어 뿌리기도 하며 크게는 대하(大河)가 되어 멀리 적시고 바다가 되어 만물을 기르기도 한다. 물방울인들 어찌 천지의 피와 뼛속이 아님이 있겠는가. 피는 뼈를 배태(肧胎)하는 당사자요, 뼛속은 뼈에 영양을 공급하는 자이다. 만약 뼈에 뼛속이 없다면 마른 뼈다. 마른 뼈는 흙덩이와 같으며, 그것은 이미 뼈라는 말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산이 뼈일 수 있는 것은 실로 물의 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은 물을 그릴 때에, 매우 자세히 생각한 끝에 정중히 붓을 움직였다. 이제 물을 그리는 각법을 그림으로 보이겠는데, 먼저 황자구의, 전체가 모두 드러나는 물을 들어 둔다. 이는 한 줄기의 물이 청산의 험한 곳을 꿰뚫는 그림이다. 이것 또한 어찌 뼈라고 안 할 수 있으랴. 李元燮 譯, 价子園畵展, 1976년, pp.258~259
江海의 波濤를 그리는 法 (圖 )
산에 기봉(奇峰)이 있듯이 물에도 기봉이 있다. 사나운 바람이 불어젖히면, 큰 물결이 산을 밀쳐 버리는 듯 일어나고 바다에 달이 처음으로 뜨는 곳에 조수가 백마라도 달리는 듯 움직인다. 이때면 바라보이는 것이라곤 험준한 산 아님이 없다. 이것이 물의 기봉이다. 옛날 오도현 (吳道玄)이 물을 그리면 밤새 물소리가 났다고 하거니와 이는 물을 그렸을 뿐 아니라 바람까지도 잘 그렸기 때문이다. 조인희 (曹仁希)가 물을 그리면 온갖 물이 곡절(곡절)하며 흘러서 조금도 어지러움이 없었는데. 이는 바람을 그리는데 그치지 않고 바람의 힘을 빌지 않는 겹친 물결을 그렸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가면 물을 그리는 데 있어서 할 일이 끝난 셈이다. (石尤는 暴景.
송의 曹仁希는 자를 企之라 하고, 물을 잘 그려 고금에 독보했다.) 위의 책, p.259
溪澗의 물놀을 그리는 法 (圖 )
산의 평원한 경치가 있듯 물에도 평원한 모양이 있다. 바람이 고요하고 물결이 잠자며 구름이 흘러가고 달이 나타나는 곳, 놀이 낀 경치는 아득히 넓고 아무리 바라보아도 끝간 데를 알지 못한다. 크게는 강이나, 바다, 작게는 시내나 늪이 이런 때면 고요하기만 해서 아무 소리도 없다. 이때에 물 본래의 모습이 나타난다. 위의 책, p.259
동양에서는 노자의 도 사상의 영향과 함께 역대 화가에서의 물 그림이나 산수에서 나타는 풍경, 즉 자기 앞에 흐르는 강물을 보며 명상하는 사람을 묘사하는 데서 나타나듯이 물의 본질과 함께 관념적이고 사색적인 표현을 하였고, 흐르는 물을 통해 우주를 이해하고, 물에 대해 심사숙고했음을 알 수 있다.
수묵으로만 그리는 산수화에서는 물 표현에 있어서는 그대로 여백으로 남겨 물의 맑음과 잔잔하고 평온한 상태를 극대화하였으며, 때로는 선묘에 의한 물결표현과 담담한 발묵에 의한 물색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2. 한국의 산수화
우리나라의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산수화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대략 6세기 경의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그 시원을 살펴 볼 수 있다.
한국회화에 있어서 여명기라고 할 수 있는 고려시대에는 회화가 순수한 감상을 위한 산수화가 화원들 이외에도 왕공 사대부나 승려들에 의해 그려지게 되었다.
고려에 산수화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인종(仁宗) 연간에 이영으로부터이며, 중국과의 회화교섭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로 고려에서 산천의 형상을 그렸다는 산수화의 출현이 기록상으로는 요(遼) 나라 성종 통화(聖宗統和) 3년(985) 7월에 고려에서 요에 사신을 보내 고려 산천의 지도를 보냈다. 『遼史』卷115, “二十年誦使賀伐宋之捷七月來貢本國地理圖.”
韓致奫,『海東繹史』卷43, “ 聖宗統和三年秋七月辛丑高麗使來貢本國地理圖.”
그러나 이 지리도가 얼마나 산수화적인 내용을 가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인종조의 이녕은 <예성강도>나 <천수사남문도>를 그렸는데.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는 이 작품들은 우리 나라 회화사에서 우리의 산천을 주제로 표현한 실경산수화의 태동을 말해주는 대표작이라 추정된다.
산수를 배경으로 하여 묘사한 작품으로 이제현의 <기마인물도>를 들 수 있는데,
얼어붙은 강을 건너 사냥을 떠나는 기마인물들을 그린 것인데, 그림의 분위기는 한국적인 정취가 보이지만 여기에선 남송대 산수화의 영향을 받음을 통해서 원대 회화의 관계도 느낄 수 있다.
고려 말기 산수화에서 고기패의 작품이라고 전칭되고 있는 필자미상의 <하경산수도>와 <동경산수도>의 산수도를 보면 미법산수화로서 원대 초기 고극공계의 화풍을 수용했음이 엿보이고 수묵으로만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한 절벽과 진한 묵법, 과장된 형태등을 보면 직업적인 화원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보면 이 시대의 산수화는 북송대의 이곽파, 남송대의 원체화풍, 원대 고극공계의 미법산수화풍등 비교적 다양한 화풍을 수용하여 나름데로 한국화 화풍과 실경산수화를 발전 시켰다.
회화가 가장 발전하였던 조선시대에 이르러 산수화는 많은 발전을 하게 되는데, 감상을 위한 그림과 각종 기록화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조선왕조시대 초기 (1392년 ~ 약 1550년) 에는 고려시대에 축적되었던 중국의 화적을 다수 전승된 이외에 연경을 중심으로 한 명과의 회화교역이 활발히 이루어 졌고, 조선초기의 화가들은 북송의 이곽파, 남송의 마하파, 원대의 원체화풍 , 대진을 중심으로 한 명초의 절파화풍들이 전래되어 선별적으로 수용 소화하고 한국적 화풍을 독자적 양식으로 발전시켰다. 조선초기의 세종조가 배출한 산수화가로 안견을 들 수 있는데 그는 곽희파 화풍을 토대위에 마하파 화풍등을 종합하여 독자적인 화풍을 이룬 사람으로 일본의 주문파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안견의 화파의 양식적 특징은 <몽유도원도>와 전칭작은 <사시팔경도>에 잘 드러나 있다. 화원이었던 안견과 함께 부각되는 인물로 15세기를 대표하는 사대부 화가인 강희안을 들 수 있다. 강희안은 명대의 원체화풍과 절파화풍을 수용하여 자신의 화풍을 형성한 것으로 그의 작품 <고사관수도>(圖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물중심의 그림으로 자연을 위주로 표현하는 안견파의 산수화를 달리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여유있고 넉넉한 표정으로 턱을 팔로 괴고 물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긴 高士를 주제로 자유분방하고 속도감 있는 거친 필치로 그린 넝쿨과 절벽, 바위, 갈대 등은 보는 이에게 시원시원한 느낌을 준다. 여기에서 물의 이미지는 고요하고 평온한 자연과 하나가 되고 싶은 당시 선비들의 심리상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또한 초기의 산수화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인물로는 이상좌를 들 수 있는데, 그는 남송원체화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안견파 화풍도 따라했던 인물이다. 이렇게 초기에는 몇가지 화풍을 토대로 한국적 화풍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16세기에 이르면 산수의 형태는 더욱 다듬어지고 한국화된 15세기의 화풍을 더욱 뿌리내리기에 힘썼다. 조선 중기에 주목되는 그림은 김시(1524년~1593년)의 동자견려도 (童子牽驢圖)(도 )인데 그림에서 나타는 것은 냇물이 무서워서 건너지 않으려 뒷걸음을 치는 나귀와 데리고 가야만 하는 동자의 모습을 긴장감 있으면서도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고, 절파풍의 화풍을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흐르는 물의 표현을 유연한 곡선으로 나타내 주고 있으며 화면 아래에는 잔잔하게 펼쳐 보이고 있다.
조선 후기 (약 1700년~1850 년) 에 이르러서는 가장 한국적이고도 민족적이고 할 수 있는 화풍이 등장한다. 영․정조년간에 자아의식을 토대로 부각되었던 실학적 경향이 조선후기의 문화발전에 영향을 미치면서 새로운 화법과 회화관이 탄생하게 된다. 중기 이래 유행하였던 절파화풍이 쇠퇴하는 대신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되고 진경산수화의 발달로 가장 한국적인 산수화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겸재 정선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진풍경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어릴때부터 익혀온 문인화법, 즉 미불준법과 사상적이고 한문적인 진경의 이미지를 삽입시켜 새로운 형식의 화법을 창안하였다. 자연속의 진풍경을 찾아가 그것을 생동하게 묘사하되 진풍경을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고 진경의 의미를 불어넣은 자연의 신비사상과 도가의 유명(幽冥)사상을 표현하였다. 김종태 저, 『韓國畵論』, 일지사, 1989년, p.188
정선의 <通川門岩圖>(圖 )에서는 물결이 일렁이는 파도의 형태로 묘사되어 있으며 넘실거리는 물과 산의 검은 색조가 매우 강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조선조후기의 특징적으로 물 표현한 또 하나의 화가로는 심사정(深師正 ; 1707- 1769)을 대표로 들 수 있는데, 그는 <선유도(船遊圖)> (圖 )에서 바다 물결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현실감 있게 뛰어난 필치를 보여주고 있다. 물의 채색은 소용돌이 부분을 중심으로 청색을 가하였으며 물결의 자유분방한 필치로써 역동감 있는 물을 표현하였다.
김홍도(1745~?)의 <주상관매도 >(圖 )는 관념적인 산수로서 한가롭고 느긋한 기운이 감도는 그림으로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여백으로 하늘과 물을 표현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시적인 공간감을 느끼게 해 준다.
그에 반해 물 표현이 잘 묘사된 작품의 예를 들어보면 홍세섭(洪世燮 ; 1832-1884) 의 <유압도(游鴨圖 )> ( 圖 )를 들 수 있다. 물 위를 헤엄치는 두 마리의 오리를 바로 위에서 내려다 본 광경으로 오리가 물살을 헤치며 나아가는 모양을 그렸는데, 물의 흐름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매우 독특한 구도를 형성하였다. 수면은 오리의 진행 방향에 따라 포물선을 그리며 물러나고 있고, 이 물살로 인해 오리의 속도감이 전해온다. 물의 모습은 원래 수평을 유지하는 잔잔한 모습이지만 움직이는 물체의 파장으로 인해 출렁거리는 물결의 모습을 잘 표현해 내고 있다. 생동감 있는 물살의 모양과 오리의 모양이 잘 어우러져 참신한 현대적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수면의 독특한 느낌이 마치 서양화에서 물위에 유성물감을 떨어뜨려 특이한 효과를 내는 마블링 기법의 분위기와 흡사하다.
조선 말기(약1850 ~ 1910년)의 화단은 후기에 형성 되었던 진경산수화가 위축되었고 김정희를 중심으로 한 남종화가 지배적으로 우세하였으며 김수철, 홍세섭 등 참신한 이색화풍이 형성되었으며 장승업을 비롯한 사람들의 계보가 형성되어 현대 화단으로 이어졌다.
일제시대엔 이상범(1897년~ 1972년)은 수려한 붓자국을 통하여 우리 나라의 산천을 정감있게 서정적으로 표현하였으며 강렬한 색채가 아닌 담담한 수묵과 담채로 시골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야산이나 냇물, 그리고 그 땅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독특한 필선으로 표현하였다.
그의 작품 <유경>(도 )을 보면 흐르는 냇물의 표현을 끊어질 듯 이어지게 표현하였다.
그와 더불어 그 시대를 대변했던 화가 변관식(1899년 ~1976년)은 겸재 정선의 진경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나라 산천의 아룸다움을 거칠고 힘있는 필선으로 표현하였다. 마치 나라의 마지막 정기를 불어 넣으려는 듯 울분과 안타까움을 그림으로 승화시키기도 하였다. 변관식의 < 내금강진주담>(도 )을 보면 폭포의 표현에서 떨어질 때 맞닿은 부분에서 물보라가 일어나는 표현도 잘 나타내 주고 있으며. 폭포가 떨어지는 바위 위를 지나가는 인물들을 작게 그려 경치의 웅장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으로 우리나라의 산수화를 선별하여 시대순으로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중국의 화풍을 수용하였지만 우리 실정에 맞게 소화하여 재창조하였다는 것과 우리의 시각으로 산하를 그리고 실경에 대한 관찰과 진경에 대한 열정을 엿볼 수 있으며 시대적인 상황을 대변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선택적으로 수용․반복하는 과정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한국화를 이룩하였다는데 있다.
3. 산수화에서 물이 가지는 의미
물의 사용에 관한 것으로 붓은 먹을 구사하고 먹을 붓을 표현한다. 즉 픽과 묵은 마치 사묵의 안과 밖과도 같은 관계인데 이 두가지 관계에서 매개가 되는 것이 바로 물 이라는 사실이다. 양주 팔괴중의 하나인 이선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팔대산인은 필은 잘 사용하였으나 먹은 그다지 좋지 않았으며, 석도는 먹은 좋으나 필에 그다지 빼어나지 못하였다. 나의 장점은 물의 사용에 있는데 필묵의 관건은 바로 이 물에 있다.” 이처럼 산수화를 그릴때 묵을 사용한다는 것은 물로써 묵을 조절한다라는 말로 대변할수 있는 것이다.
화론에서 물이 가지는 모습을 표현하는 방법을 살펴보면 북송 때 유명한 화가였던 곽희 (郭熙; 11세기 초- 11세기 말)는 [임천고치 (林泉高致] 라는 책에서 “물은 움직이는 물체이다. 그 모습은 깊고 고요한 듯해야 하고, 부드럽고 매끄러운 듯해야 하며, 넓고 넓은 듯해야 하고, 빙빙 돌아 흐르는 듯해야 하며, 살찌고 기름진 듯해야 하고, 용솟음치는 듯해야 하고, 맑은 샘에서 나오는 듯해야하며, 멀리 흘러가는 듯해야 하고 폭포는 하늘에서 아래로 꽂히듯이 흘러내려야 하며. 급히 흘러 떨어져 땅 속으로 들어가는 듯해야 하며, 물가의 풀과 나무는 무성해서 싱싱한 듯해야 하고 안개나 구름이 끼어 빼어나게 고운 듯해야 하며, 계곡에 햇빛이 비치어 찬란한 듯해야 한다. 이러한 것이 물이 움직이는 물체다운 모습이다.” 許英桓 譯註,「임천고치」, 열화당, 1971년, pp.32~33
* 라고 이렇게 물을 하나의 생명체로 바라보고 살아있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처럼 그려야 한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또 산은 물을 얻어 활기 있고, 물은 산을 얻어 아름답다. 신영주 역,곽희의 임천고치, 문자향, 2004년 p.37
(山得水面活, 水得山面媚)
물을 그릴 경우에는 고요히 흐르는 물, 급히 흐르는 물, 맴돌며 밀려 오다가 부딪치며 격동하는 물, 당기며 펼쳐지며 흐르는 물 등 그 모양이 완연히 자족한 듯이 흐르게 그리면 물의 본래 모습이 풍부하고 넉넉하게 된다. 許英桓 譯註,「임천고치」, 열화당, 1971년, p.31
물이 흐를 때에 여러 가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는 산수화에서 물을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인데, 물을 그릴 때는 물결만 그릴 것이 아니라 산과 주변의 풍경과 어우러져 물의 유동성을 잘 살려서 실감나게 그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Ⅲ. 수파 표현 방법
1. 기법연구
동양화는 선의 예술이다. 선은 원래 운동성과 결합하여 생동감과 힘의 충일함을 전달해 준다. 본인의 작업에서 수파표현을 하기위해 사용된 기법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백묘법을 들 수 있는데 선으로서 수파를 표현하는데,
.
동양화에서 선을 조형의 기초로 삼는 것으로서 백묘는 동양화의 기본 표현기법 중의 하나이다. 말하자면 백묘(白描)는 동양의 전통적인 표현 형식 중의 하나인 것이다. 순수한 선만으로 이루어진 표현방식으로서 백묘(白描)는 먹선으로 대상의 윤곽을 그리는 것으로, 백(白)은 색이 없다는 뜻이며, 묘(描)는 선을 일컫는 것이다. 고대에는 인물의 옷주름을 그린 선을 묘라 불렀는데, 백묘의 특징은 묵선이 표현의 모든 것을 독립적으로 수행한다는 점이다. .
동양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자 장점중의 하나라면 조형의 기초인 선의 이용이라 할 수 있는데, 백묘는 바로 선의 운용과 표현에 관한 성과를 내포하는 것이 될 것이다. 백묘의 기법에 관한 설명에 앞서 관찰방법상의 특징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백묘는 특히 대상이 되는 사물의 생장(生長)특징이나 조직적인 특성 등에 대하여 더욱 세심한 관찰과 연구를 필요로 한다. 이는 대상이 되는 짜임새에 대한 깊은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백묘는 대상이 되는 물체에 빛이 비쳐서 생겨나는 명암관계에 대해서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는 선만으로 사물의 구조를 표현해냄이 목적이므로 빛에 관한 관찰과 연구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백묘 역시 어느 정도 대상의 입체적인 면에 관심을 갖는다. 예를 들면 바위를 표현하는 준법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상의 입체적인 면에 대한 관심은 모두 광선의 변화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다. 이는 대상이 사물의 조직구조에 대한 관찰과 연구의 결과이다. 이렇게 백묘는 대상의 조직 구조에 관심을 집중하고 광선의 변화 등에 대해서는 무시하다시피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단순한 선만으로써 사물을 표현하는 백묘는 그 질감과 공간감 , 그리고 입체감은 어떻게 표현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물의 흐르는 방향, 속도, 움직이는 모양, 소용돌이, 심지어는 맑고 흐림까지 극히 간단한 선으로 표현해 내었다. 이러한 질감의 표현은 선의 변화와 윤곽선의 특징으로 이루어 낸다.
또한 선의 변화는 백묘의 질감표현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동양화는 이러한 선의 변화에 의해 대상이 되는 사물의 질감을 표현하는데 풍부한 경험을 축적하여 왔다. 전통회화에 있어서 인물화의 ‘18묘(十八 描)’. 산수화의 각종 준법등이 바로 그러한 예들이다. ‘18묘’는 고대 인물화에서 각종 옷의 주름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 열여덟 가지의 묘법이다. 이 열여덟가지의 묘법들은 각기 선의 특징에 따라 이름 지어진 것으로서, 이 열여덟 가지의 묘법들은 각기 선의 특징에 따라 이름 지어진 것으로서, 각종 필법들은 질감의 표현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선의 변화를 통해 질감표현을 하는 경우와 또 다른 수법으로 먹의 농담과 건습은 백묘의 사물의 질감을 표현하는 방법이 된다.
공간감의 표현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가까운 것은 두껍고 먼 곳에 위치한 사물은 가늘다. 또 가까운 곳의 것은 진하고 먼 곳의 것은 연하다. 이렇게 선의 대비를 통한 방법을 이용한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이든지 농담과 소밀(疏密)은 차이가 크지 않아야 하며, 만약 이러한 차이가 너무 크게 되면 화면은 조화를 잃어버리게 된다. 즉 필묵의 조화는 백묘에 있어서 어떠한 경우라도 지켜져야 할 대단히 중요한 규율이다. 한편, 동양화는 선을 이용한 강조의 수법으로 물체의 적어지는 면. 즉 투시에 있어서의 구조를 나타내는 면을 구륵에 의해 개괄적으로 표현된다. 이것이 바로 선에 의한 입체감 표현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으로 백묘에 있어서 입체감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동양화의 선에 어느 정도 내포된 면에 대한 표현은 대상의 양감과 체적감에 대한 고도의 개괄적 표현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동양화의 선은 과학적일 뿐 아니라 나름대로의 독특한 예술적인 특성이 있는 것이다.
앞서 본 바에 의해, 이러한 특징들을 갖는 백묘에 대한 몇가지 예술적인 수법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백묘의 대비는 선의 진하고 옅음. 두껍고 가늘음, 강하고 약함, 가지런함과 어지러움, 그리고 빽빽함과 성김, 흑과 백 등이 있으며 이러한 대비의 내용들을 적절히 이용하여 화면이 서로 어울려 주제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다음은 과장의 수법이다. 대상의 특징을 포착하여 확대, 과장하여 표현하는 것은 백묘에서 종종 이용하는 일종의 예술적 수법인 것이다. 이른바 과장과 변형이란 말은 바로 개괄적이란 뜻이며, 백묘는 바로 대단히 개괄저인 표현형식중의 하나이다. 이밖에도 선의 변화에 따른 장중하고 유동적인 리듬과 운율을 표현해내고 있으며, 화려한 도안, 옷주름의 소밀 등 강한 장식성 또한 백묘의 예술적인 수법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백묘에 있어서 특징적인 표현 방법들을 볼 수 있었지만. 예술이 인간을 감동시키는 것은 단순히 화면에 표현되어진 사물의 질감이 실제의 그것과 얼마나 닮았는가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내적인 정서와 사상, 감정의 반영에 있다. 여기에서 바로 선묘의 표정 문제가 비롯된다 할 수 있다. 이른바 선의 기교라는 것은 단순히 어떠한 사물의 질감을 표현하는 기교가 아니라 어떠한 선으로 어떠한 감정을 표출해 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선묘는 표현되는 사물의 모양이나 질감, 공간감, 혹은 입체감 등 표면적인 현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본질적이며 깊이있고 강렬하게 사람의 정서를 표현함과 동시에 백묘 특유의 독창적인 예술적 양식을 갖게 한다.
각 시대와 화가에 따라 독특한 선묘의 양식이 있게 마련이며, 이러한 다양한 선묘는 작가가 처한 시대생활, 그리고 사상, 의식과 서로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이렇게 각기 다른 양식적 특성들은 대상의 표현 속에 대비와 과장. 그리고 운율감과 장식풍의 예술적 기교의 운용 속에 들어 있다. 일반적으로 백묘의 선은 정교하고 장식적인 특성이 있어 채색화나 담채화에도 모든 백묘를 기초로 해 색을 더하고 있다. 또, 비록 사의화 (寫意畵) 라 할 지라도 형상의 구조에 대한 관찰과 선의 운용훈련 등은 모두 백묘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즉 백묘를 배우고 익히는 것은 바로 동양화의 표현기법을 더욱 잘 이해하고 파악하는 길이라 말할 수 있다. 백묘 역시 여느 회화양식과 마찬가지로 한계가 있다. 빛을 표현하지 않으며 강렬한 입체감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또 미묘한 선의 변화를 표현하기가 쉽지 않으며 오묘한 변화 역시 표현하기 어렵다. 그러나 백묘는 복잡한 화면을 가장 정교하고 분명하게 표현해 낼 수 있으며 그 표현력 역시 대단히 풍부하다. 현대의 우수한 수많은 백묘 작품들은 백묘로써 현대 생활을 훌륭하게 표현 할 수 있는 여지가 한없이 넓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백묘예술은 부단한 계승과 또다른 혁신을 통하여 발전되어져야 할 것이다.
백묘의 발전은 선과 선 사이의 조합과 새로운 선의 조합을 통한 현실대상의 표현에 있으며 선의 두껍고 가늚, 그리고 진하고 연함 등의 변화는 차후의 일이다. 오늘날의 동양화가들은 추상적인 선의 본질적인 문제에 매달리기 보다는 새로운 사물의 표현에 있어서 새로운 선의 조합을 탐구하고 새로운 체계를 이룩하여 고전적인 백묘화보다 더욱 힘이 진일보하고 감정을 폭넓게 표현 할 수 있는 백묘화를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동양화의 전통적인 표현형식 중의 하나인 백묘를 통해 무한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본인의 작품제작 과정에 도입함으로서 창조적 모색을 시도 하고자 했다. 본인의 작품제작 과정에 도입함으로서 창조적 모색을 시도 하고자 했다. 본인의 작품제작 과정 중 나타나는 선묘는 , 직관에 의한 행위적 텃치의 형식으로 백묘를 수용하고 있다.
이는 본인의 정서의 한 표출로써 시대의 상황을 대변하고자 한 것이다.
한편, 필묵의 조화는 백묘에 있어서 지켜져야 하는 기본요소로서 염두해 두고, 화면상의 수묵표현을 濃 . 淡 .
이와 같이 새로운 탐구와 방법 모색에 앞서, 사물을 선으로서 개괄하고 재조합하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더 깊은 관찰과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며 새로운 시대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새로운 양식의 선묘화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반성과 성찰을 통해 전통을 계승하고 창조적 체험에 임하며 계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발묵법
중국 회화 기법 중 하나로, 발묵법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마치 먹물을 뿌리듯이 쓴다는 의미로 “먹을 금과 같이 아껴 사용한다.”화 상대적인 개념으로 사용된다. 다른 하나는 비단이나 종이 바탕 위에 먹을 뿌린 다음, 먹물이 흐르는 상황에 근거해 추이를 따라 형상을 그리는 것이라 해석 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발묵에 관해 언급한 내용을 살펴보면, 당대 말기 주경현 (주경현, 약 806~840 활동)의 [당조명화록(唐朝名畵錄)]에 따르면, 당대의 화가 황흡은 종이나 비단 위에 먹물을 뿌려 발로 차고 손으로 문지르다가, 그 형상을 따라 바위, 물, 구름 등을 그렸는데, 마음먹은 대로 손을 놀려 구름과 노을, 비바람 치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 완연히 귀신의 솜씨 같아서, 엎드려서 살펴봐도 먹이 얼룩진 자국조차 없었다고 한다.
명대의 자유분방하고 혁신적인 화가 서위(서위 , 1521~1593)는 자신의 창작 경험에 근거하여 그림의 좋고 나쁨은 먹을 많이 쓰거나 적게 쓰는데 달려 있지 않다고 했다.
명대의 이일화(이일화, 1565~1635)는 [죽란화잉(죽란화잉)]에서 “발묵은 먹을 오묘하게 사용해서 붓의 흔적이 보이지 않게 하고, 마치 먹을 뿌린 것처럼 그리는 것이다.” 라고 했다
청대의 심종건( 심종건, 약 1750~1830 활동)은 [개주학화편(개주학화편)]에서 “ 먹은 발묵, 산색은 발취(발취), 풀색은 발록(발록)이라 하니, 발(발)의 쓰임새는 그림 속의 기운을 펼쳐내는 데 가장 알맞다.”고 했다. 동기창지음, 변영섭,안영길 박은희 조송식 옮김, 『화안』, 2003년 시공사 p.21
*
본인의 작업에서 발묵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데 아교나 물을 통해서 기법을 연구한다.
아교를 쓸 경우에는 번짐이
파묵법
파묵이란 말을 양의 원제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산수성석격에서 비롯되었다. 왕유는 진한 먹을 사용하여 그렸는데 부분적으로 맑은 물로써 이러한 진한 먹에 변화를 주었다고 한다. 이는 단순히 물로써 먹의 변화를 꾀하는 파묵법의 초보적인 단계로 아직 묵으로 묵에 변화를 주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묵으로 묵에 변화를 주는 것 에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농묵에 담묵을 꾀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와는 반대로 담묵으로 농묵에 변화를 주는 것이다.
파묵법을 구사한 화가로서는 禿筆을 쓰거나 손바닥으로 형상을 가리는 특이한 화법을 사용하는 張操는 묵의 쓰임이 선의 개념에서 면의 개념으로 확장 시켰다.
적묵법
적묵법이란 수묵을 층층히 쌓아간다는 뜻으로 산수화에 많이 이용되는 기법이다. 당과 송대의 산수화는 먹을 겹겹이 칠하듯 사용하여 두텁고 깊이가 있다. 적묵법은 이와 같이 두텁고 깊이 있는 표현에 적합하다. 적묵은 먹이 마르고 난 다음 다시 덧칠하기도 하고 마르기 전에 먹을 더하는 경우도 있다. 화면에 따라 한번의 수묵으로 만족할 만한 효과를 얻을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먹을 누적하여 비로소 원하는 효과를 얻는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