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설명 |
백지사의 고통을 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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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37°13′15″ 동경 127°23′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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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단천1리 3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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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633-9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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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633-9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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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annae.o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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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천리 사적지 혹은 단내 사적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당시 광주 유수부인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은 바오로(1804-1866년)의 고향이자 유해가 묻혀 있는 묘소이다. 한국 교회 안에 처음으로 신부를 모셔온 순교자 윤유일의 묘가 모셔져 있는 어농리 사적지와 불과 몇 리 떨어져 있지 않은 단천리는 한국에 교회가 세워지던 1784년 이전부터 천주교가 들어와 있었던 유서깊은 교우촌이기도 하다.
영동 고속 국도에서 덕평 톨게이트로 빠져 나와 양쪽으로 시골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논밭길을 7킬로미터 정도 달리면 왼편 언덕 위로 커다란 하얀 십자가가 보이고 그 아래 말끔하게 단장된 정은 바오로의 묘지가 눈에 띈다.
논둑을 따라 비탈을 20미터 정도 올라서면 파란 잔디에 둘러싸인 묘소와 그 옆에 삼 단으로 된 단 위에 단아하게 서 있는 성모상이 인상적이고 묘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논밭 사이로 구불구불한 길과 인근 마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묘 주위에는 유난히 푸른 빛을 띠고 있는 소나무들이 우거져 있어 마치 순교자의 굽히지 않는 신앙을 증언해 주고 있는 듯하다.
이 사적지가 이렇듯 말끔하게 모습을 갖춘 것은 1987년 9월 15일, 이천 지역 출신의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발족한 '이천 성지 개발 위원회'가 수원 교구장 김남수 주교의 집전으로 이 날 윤유일 순교자와 그 일가족을 기념하기 위한 어농리 사적지와 함께 이곳 단내 사적지를 축성하고부터이다.
동래 정씨로 그 조부 시절부터 실학 사상의 영향을 입고 일찍이 서학에 접했던 그의 집안은 이미 정은 바오로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촌형인 정섭과 정옥이 신앙을 갖고 있었으며 순교의 모범을 보여 준 바 있다.
신유박해가 지나간 3년 후인 1804년에 태어난 정은 바오로 역시 천주교에 입교하고 그 어머니 허 데레사와 부인 홍 마리아 역시 입교했다. 그들이 살던 이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동산 밑 마을'은 103위 순교 성인 중 한 사람인 이문우 요한의 고향이기도 하다.
또 단천리는 최초의 방인 신부인 성 김대건 신부가 머물렀던 은이 마을과는 12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이기도 하다. 김 신부는 1846년 귀국한 이후 동산 밑 마을을 들러 이곳을 방문, 신자들에게 고해 성사를 준 후 바로 이 묘소 앞 오방이 산모퉁이를 지나 배마실 공소를 거쳐 새벽 어스름에 은이 공소로 돌아갔다고 한다.
1866년 병인박해의 회오리는 이 마을에도 휘몰아쳤고 포졸들은 정은 바오로를 붙잡기 위해 매봉에 숨어 망을 보았고 당시 63세의 노인이었던 그는 추운 겨울날 낮이면 마을 뒤 '검은 바위' 밑 굴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내려와 잠을 자고 또 올라갔다. 그러나 결국 그는 포졸들에게 체포됐고 남한산성까지 가파른 산길로 끌려갔다. 이때 그의 증손자 정 베드로가 그의 체포 소식을 듣고 자진하여 천주교인임을 고백하고 함께 잡혀갔다고 한다. 한 달여를 남한산성에 갇혀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은 두 사람은 그 해 음력 12월 8일 얼굴에 물을 뿌리고 백지를 덮어 숨이 막히게 해 죽이는 백지 사형으로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그들이 순교한 뒤 시체는 남한산성 동문 밖으로 시구문을 통해 던져졌는데 가족들이 몰래 그의 시신을 찾아 이곳에 안장했다. 그러나 증손자 정 베드로는 당시 함께 순교한 수많은 시신들 틈에 섞여 미처 찾아오지 못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구산, 단내에서 남한산성으로 이어진 순교
호국(護國)과 호교(護敎)를 위한 몸부림이 배어 있는 남한산성(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은 하남시 서부 성당에서 사적지 조성을 위해 힘을 쓰고 있는 곳이다.
이곳의 첫 번째 애환은 1636년 12월 14일, 청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양이 위태롭게 되자 인조가 세자와 백관들을 대동하고 피난해 오면서 시작되었다. 인조는 이곳에서 40여 일을 수성하였지만, 모든 사정이 악화되자 결국 이듬해 1월 30일 백관과 군사들의 호곡 소리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성문을 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청나라와 굴욕의 맹약을 맺은 삼전도에 세워진 청나라 태종의 송덕비를 가리켜 '치욕의 비' 또는 '한(汗)의 비'라 불렀으니, 이것은 곧 '호국의 몸부림'이었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1839년의 박해 때 남한산성에서는 두 번째 애환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호교를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이 몸부림은 천상의 승리로 결실을 맺게 되었고, 신앙인들의 노래는 훗날까지도 이어져 남한산성 한 모퉁이를 치명터로 만들었다. 당시 이곳이 치명터가 된 이유는, 1626년에 산성리가 형성되고 1795년부터 광주 유수가 성안에 거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광주 일대에서 체포된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모진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속의 모든 부귀와 육신의 고통을 버려야만 했다.
남한산성에서 맨 먼저 호교의 노래를 부른 이는 광주 의일리(현 의왕시 학의동)에 살다가 1801년에 체포되어 동문 밖에서 참수된 한덕운(韓德運, 토마스)이다. 그 뒤를 이어 광주의 거북뫼 곧 구산(현 하남시 망월동) 출신인 김만집(金萬集, 아우구스티노)이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1842년 초에 남한산성 옥중에서 "진실한 통회와 애덕의 정을 지닌 채" 순교하였다.
한편 김만집의 형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성인은 이때 포도청과 형조에서 수많은 형벌을 받은 뒤 1841년에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며, 셋째인 김문집(金文集, 베드로)은 김만집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58년경에 석방되었다. 이곳 남한산성에서 다시 순교자가 탄생한 것은 1866년의 병인박해 때였다.
바로 그 해 겨울 이천 단내(이천시 호법면 단천리)에 거주하던 정은(바오로)도 63세의 나이로 체포되어 재종손 정 베드로와 함께 1866년 12월 8일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남한산성의 광주 유수가 그들에게 내린 사형은 일명 도배형 또는 도모지(塗貌紙)라고 부르던 백지사(白紙死)였다. 이 형벌은 먼저 팔과 양다리를 뒤로 하여 나무에 결박하고, 여기에 풀어헤친 상투를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얼굴에 물을 뿌리고 창호지를 한 장씩 겹쳐 나감으로써 숨이 막혀 죽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순교한 정은의 시신은 동문 밖에 짐승의 먹이로 버려졌다가 가족들에 의해 어렵게 거두어져 단내에 안장되었다.
박해자의 손길은 얼마 되지 않아 이미 교우촌으로 알려져 있던 구산에 뻗혔다. 이내 김문집(베드로)을 비롯하여 집안의 어른 남자들이 모두 체포되었고,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당시 김문집의 나이는 66세의 고령이었다. 그와 함께 체포된 김씨 집안의 신자들은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인 성희(암브로시오), 순교자 김만집의 차남 차희, 김문집의 외아들 경희, 경희의 5남이자 성희의 양자인 교익(토마스), 경희의 6촌 윤희 등 모두 6명이었는데, 이중에서 김교익만이 안면 있는 포교의 도움으로 생환하였을 뿐 모두 순교하였다. 결국 구산의 순교자는 김성우 성인을 비롯하여 모두 7명이 된 셈이다.
한편 가까스로 생환한 김교익은 사형이 집행된 뒤에 매일같이 형장으로 찾아가 김문집과 김성희·경희 등 3명의 시신을 찾아다 구산의 가족 묘역에 보존되어 오던 성 김성우와 김만집 형제의 무덤 옆에 안장하였다. 그러나 김차희의 시신은 아들 김교문에 의해 거두어져 안양 수리산에 안장되었다가 실묘되었으며, 후손이 없던 김윤희의 시신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구산과 단내에서 시작된 신앙을 천상의 영복으로 영글게 한 남한산성에는 이 밖에도 수많은 순교자들의 애환과 몸부림이 어려 있다. 그러나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순교 터 매입과 사적지 작업은 어렵기만 한 상황이다. '순교자들이 살아서 들어갔던 동문과 배교하지 않고 시체가 되어 나온 시구문' 모두가 우리에게 한 시대의, 그러나 잊어서는 안될 역사를 증언해 주고 있다. 오늘도 성지에는 순교자들의 전구가 깃들어 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44호(1999년 5월), pp.107-109]
단내 성지는 바로 앞에 단천(丹川)이 가로질러 흐르고, 뒤에는 숲이 울창한 와룡산이 감싸고 있어서 아름다운 자연경관 속에 자리하고 있는 성지이다. 또한 단내 성지에는 숲이 울창하면서도 인적이 없는 와룡산의 계곡과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총연장 5.2km의 순례코스가 조성되어 있다. 이 순례코스는 전망이 좋은 와룡산 정상에 위치해서 이문우 성인의 고향과 김대건 신부님의 사목활동 경로를 조망할 수 있는 예수성심상과 병인박해를 전후해서 박해받는 신자들의 은신처였던 검은바위와 굴바위 그리고 김대건 신부님의 사목활동로를 따라 조성되었다. 산새 소리와 풀벌레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리는 울창한 숲길을 따라 걷는 단내 성지의 순례코스는 번잡한 일상을 벗어나 피정하는 마음으로 순례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순례코스이다.
성가정 광장
단내 성지를 감싸고 있는 와룡산 계곡 하단부에 두 개의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아래의 큰 광장이 성가정 광장이다. 성가정 광장 중앙에는 성가정 성지인 단내 성지를 상징하는 성가정상이 건립되어 있다. 성가정상에서는 가정을 위한 기도, 부부의 기도, 부모를 위한 기도, 자녀를 위한 기도 등을 바치며 가정 성화의 은총을 구하게 된다.
순교자 광장
성가정 광장 위에는 이곳에서 사목활동을 하셨던 김대건 신부님의 성상이 굽어보고 있는 순교자 광장이 있다. 순교자 광장에는 치옥석으로 제작된 돌제대를 중심으로 단아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야외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그래서 약 10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순교자 광장에서는 규모가 큰 행사 때 미사가 봉헌된다.
순교자 정 바오로와 정 베드로의 묘
단내 성지의 야외광장 우측면을 감싸고 있는 오방이산 끝자락에는 이곳에서 탄생하여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하신 정은 바오로와 정 베드로 순교자의 묘소가 있다. 두 순교자의 묘소는 이곳을 순례하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바쳐 하느님을 사랑했던 두 분의 거룩한 삶을 숙연한 마음으로 회상하게 해 준다.
십자가의 길
단내 성지의 야외제대와 두 분 순교자의 묘소 뒤 쪽으로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산허리를 끼고 조성되어 있어서, 순례자들이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기도할 수 있다.
예수성심상
단내 성지 주변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와룡산 정상에 대형 예수성심상이 건립되어 있다. 야외광장에서 15분을 걸으면 이 산 정상에 오를 수 있고, 여기서는 예수성심께 가정을 봉헌하며 성가정의 은총을 구하는 기도를 바친다. 또한 이곳에서는 탁 트인 전망 때문에 이문우 성인의 고향인 동산리와 김대건 신부님의 사목활동로 등을 조망할 수 있다.
검은 바위
예수성심상에서 와룡산 계곡을 따라 20분을 걸으면 정 바오로 순교자와 그 가족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생활하며 기도했던 검은 바위에 도착한다. 검은 바위에는 성모동굴을 건립해서 묵주의 기도를 바치며 박해의 괴로움을 이겨냈던 정 바오로 순교자와 그 가족들의 성모신심을 본받을 수 있게 했다. 따라서 검은 바위를 순례할 때에는 묵주의 기도를 바치며 성모님께 가정성화의 은총을 구하도록 한다.
굴바위
검은 바위에서 와룡산 능선을 타고 30분을 걸으면 정 바오로 순교자의 가족들이 가산을 몰수당한채 추방되어 피난생활을 하던 굴바위에 도착한다. 검은 바위에서 굴바위에 이르는 길은 굶주림과 추위와 두려움에 시달리며,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신앙을 충실히 지켰던 선조 신앙인들을 묵상하며 순례하도록 한다.
김대건 성인의 길
검은 바위에서 굴바위를 순례하지 않고 바로 단내 성지로 돌아오게 되면, 김대건 신부님께서 이곳으로 신자들을 사목하기 위해 오셨다가 돌아가실 때마다 걸으셨던 “김대건 성인의 길”을 걸어서 단내 성지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이 “김대건 성인의 길”은 밤을 꼬박 새워 걸으며 몸을 아끼지 않고 신자들을 보살피던 김대건 신부님의 목자적 사랑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정은(鄭溵) 바오로(1804-1866년)
정은 바오로 순교자는 단내에서 1804년에 출생하셨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신자들의 지도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으며, 남한산성에서 백지사(白紙死)형으로 순교하셨다. 순교하신 후 두 아들인 일동과 수동 형제가 시신을 단내 성지로 모셔와 안장하였다.
정 베드로(?-1866년)
정 베드로 순교자는 정 바오로 순교자의 종손자로서 단내에서 출생하셨다.1866년 정 바오로 순교자가 체포되시자, 감옥에서 병약한 할아버지를 도와 드리고 함께 순교할 것을 결심한다. 그래서 스스로 관청을 찾아가 천주교 신자임을 밝히고 체포되어, 정 바오로 순교자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식으로 순교하셨다.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순교 터의 흙을 채취해서 정 바오로 순교자의 묘 옆에 의묘(儀墓)를 조성해 놓았다. [출처 : 이상 수원교구 홈페이지]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1821-1846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는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 마을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건의 아명은 재복(再福)이고 이름은 지식(芝植)이라고 하는데, 그의 집안은 열심한 구교 집안이다.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Pius)와 아버지는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다. 신앙 깊은 순교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김대건은 굳센 기질과 열심한 신덕으로 충실히 생활하던 중, 16세 때인 1836년에 모방 신부에 의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가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 프란치스코는 병사하였으므로, 남은 두 신학생만이 훌륭히 학업과 성덕을 닦았으나 나이가 25세에 이르지 못하여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무렵 파리 외방 선교회가 조선 교구를 담당하여 주교와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켜 전교하고 있는 중이었으나, 조선이 외국과 수호조약을 맺지 않아 종교자유가 없었음으로 프랑스 루이 필립 왕이 파견한 함대의 세실 제독이 그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나섰다. 김대건은 세실 제독의 통역관이 되어 조선이 들어갈 메스트르 이 신부와 함께 에리곤 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실 제독이 갑자기 조선 항해를 중지하게 되어 김대건은 혼자 육로로 본국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변문에 이르러 조선 사절단의 일원인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본국 소식을 자세히 듣게 되었는데, 성직자를 비롯하여 아버지와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국을 서둘러 그해 12월 29일 혼자 의주 변문을 거쳐 입국하였으나 중도에서 본색이 탄로날 위험이 생겨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김대건은 백가점(白家店)과 소팔가자(小八家子)에 머물며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우고,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고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다시 입국을 시도하여 고 주교와 함께 변문으로 왔으나 김 부제 혼자만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1845년 4월 주교와 신부를 맞이하기 위하여 상해에 갔다가 그 해 8월 17일 상해로부터 20리가량 떨어진 김가항(金家港)에서 페레올 고 주교 집전으로 신품을 받았고, 그곳의 만당(萬堂) 소신학교에서 첫 미사를 드림으로써 조선교회의 첫 사제가 되었다.
같은 달 31일 고 주교와 다블뤼 안 신부를 모시고 라파엘호라 명명한 작은 목선을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1845년 10월 12일에 충청도 나바위라는 조그마한 교우촌에 상륙하였다. 김 신부는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만주에서 기다리는 메스트르 이 신부를 입국시키려고 애썼으나, 의주 방면의 경비가 엄해서 고 주교는 바닷길을 알아보라고 지시함으로, 백령도 부근으로 갔다가 순위도에서 1846년 6월 5일 밤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 신부가 황해 감사 김정집의 심문에서 자신은 조선에서 출생하여 마카오에서 공부했음을 토로하자 황해도 감사는 황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중신회의를 열고 서울 포청으로 압송케 하였다. 일부 대신들은 김 신부의 박학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하여 배교시켜 나라의 일꾼으로 쓰자고 하는 의견도 있고 해서 배교를 강요했으나, 김 신부는 도리어 관리들을 교화시키려고 하자 사학의 괴수라는 죄목을 붙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김 신부의 나이는 26세였다.
성 이문우(李文祐) 요한(1809-1840년)
성 이문우 요한(Joannes)은 경기도 이천 동산 밑 마을의 양반 교우 집에 태어났으며 경천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5살 때에 고아가 되어 어떤 여신자가 서울로 데려가 양자로 삼았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그 양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비록 그는 독신생활을 소원하였으나 양모의 원을 겸손하게 받아들여 결혼하는데 동의하였고 가장으로서 좋은 모범을 보였다.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이 세상을 일찍 떠나자, 다시는 혼인하지 않고 수덕생활을 실천하는데 전념하며 신자들을 도와주는 데 헌신할 따름이었다.
요한은 1년 이상 모방(Manbant, 羅) 신부를 따라 지방으로 다니며 복사의 일을 했고, 1839년의 박해로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모금활동을 하였으며, 또한 주교와 신부들이 숨어 있는 이곳저곳으로 찾아가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여러 차례 알려드렸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순교한 후에는 교우들과 함께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냈다. 그는 이름이 알려져 있어 체포될 위험이 많았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자기가 하던 일을 계속하였다.
요한은 7명의 신자와 더불어 위험을 무릅쓰고 성직자들의 시체를 찾아 노고산에 모신 다음에 시골로 피신하기 위하여 친구 집에서 나오다가 붙잡혔다. 처음에는 그 역시 한동안 당황하였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는 “천주께서 나를 부르신다. 천주께서 특별한 은혜로 나를 부르시니 어찌 그분의 부르시는 소리에 대답을 아니 할 수 있겠는가?” 하며 오라를 받고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포장의 온갖 회유와 계략적이 말에 대하여 요한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어떻게 죽음을 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임금님의 명령에 복종하려면 만물의 조물주이신 대군대부를 배반해야 할 것인데, 죽어야 한다 해도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관장님이 말씀하신 바는 모두 오래 전에 생각한 것이오니, 더 이상 강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얼마 후 술과 음식을 주는 등 또다시 여러 방법으로 설득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으므로 도둑들이 갇혀 있는 감방으로 들여보냈다. 요한은 도둑들의 감방에서 지냈는데 그들 중에는 배교자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을 보고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저 불쌍한 사람들이 전에는 어쩌면 나보다 더 착하게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저렇게 멸망하지 않았는가! 천주여, 제 마음 약함을 도와주소서.”
이윽고 형조로 이송된 요한은 그곳에서도 굳센 마음으로 신앙을 증거했으며, 마침 그곳에 있던 12명의 용감한 형제자매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그리고 그는 양부모와 교우들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서 그는 옥중 교우들의 신앙생활, 자신의 지난날에 대한 반성과 주님께 대한 사랑, 교우들이 주님 사랑을 저버리지 않도록 권고하였다. 그는 옥에 들어온 지 거의 3개월이 되던 1840년 2월 1일, 다른 두 동료와 함께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그는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이호영(李~) 베드로(1802-1838년)
성 이호영 베드로(Petrus)는 경기도 이천 땅 구월에서 가난한 시골 양반의 자제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을 여윈 후 모친과 누이 아가타(Agatha)와 함께 서울 한강 북쪽 문막이라는 곳에서 살 때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를 만났다. 신부는 그의 충실성을 보고 아직 젊은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말과 행동에서 절제가 있었고, 여러 교우와 외교인을 항상 권면하여 자기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던 중, 하루는 과거 보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왕의 총신과 아는 사이가 되어 급제를 하게 된 꿈을 생각하며 순교를 예감하였다고 한다.
1835년 2월 어느 날, 베드로와 그의 누이 아가타는 붙잡혀 옥에 갇혔다. 그는 수없이 심문과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포기 하지 않았다. 재판관이 “만일 네가 말로 천주를 배반하기 싫거든 커다란 글자 하나를 써 줄 터이니 거기에다 점 하나만 찍든지 침을 뱉든지 하면 배교하는 표로 인정하고 너를 놓아 주겠다”고 하였으나, 그는 “만 번 죽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단호히 말하였다.
그래서 이호영 베드로는 사교를 믿는다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때 그는 “나는 칼 밑에 치명하기가 원이었다. 그러나 천주의 명령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4년 동안이나 옥중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갖은 고문과 병고를 잘 참아냈고, 항상 대재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양순한 표양이 외면에 드러나 옥졸들조차 칭찬하였다고 한다. 이윽고 그는 옥중에서 병으로 순교하니, 때는 1838년 11월 25일, 그의 나이는 36세 때였다.
성녀 이소사(李召史) 아가타(1784-1839년)
성녀 이소사 아가타(Agatha)는 경기도 이천의 구월에서 태어났고, 1838년에 순교한 이호영 베드로(Petrus)의 누님이다. 그녀는 17세의 나이로 어느 외교인에게 출가하여 3년을 살다가 남편과 사별했는데, 현석문 카롤루스는 기해일기에서 아가타의 생활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얼마 아니 되는 가산마저 없이 한 후 늙은 시어머니와 어린 시동생과 함께 근근이 살았는데, 그때에 그녀가 당한 고난은 필설로 이루 형언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러나 비록 이와 같은 곤궁 중에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언제나 화평한 기색과 기쁜 웃음이 떠나지 아니 하였으니. 그녀의 착하고 아름다운 언행을 모두 기록하기도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1835년 2월 어느 날, 포졸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이 아가타는 동생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어서 그녀의 올케마저 잡아가려 하자, “이 사람은 죄가 없으니 내버려두시오” 하고 말하여 올케만은 어린애들과 노모를 돌보게 하였다고 한다. 판관 앞에 불려나간 이 아가타는 모진 매를 맞고 주리를 틀리었으나, 조금도 겁내는 빛을 보이지 않았고 또한 그녀의 용기는 조금도 꺾이지 아니하였다. 이리하여 3년 남짓 오랜 옥고를 치른 끝에 그녀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1839년 5월 24일, 그녀는 여덟 명의 다른 신자들과 함께 달구지에 태워져 포청을 떠나 형장으로 향했다. 아가타는 우마차 위에서도 다른 때와 같이 온화한 기색으로 눈을 내리뜨고 있었고, 우마차에서 내리면서 십자성호를 긋고 조용히 칼을 받았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56세였다.
성녀 조증이(趙曾伊) 바르바라(1782-1839년)
성녀 조증이 바르바라(Barbara)는 명문가의 딸로서 어려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며, 16세에 남이관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에게 출가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난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그리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시아버지와 어머니가 희생되고 남편은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때 남편을 따라갈 수도 없었고 또 의지할 데도 없었으므로 시골 친정으로 돌아가 남동생 집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았다.
그 당시 조선에는 신부가 한 분도 없었고 신자들과의 교류도 없었기에 바르바라도 자연히 냉담하게 지냈다. 30세 때에 서울로 올라온 그녀는 열심한 신자 친척집에 머물면서부터 예전의 허송세월을 보충하려는 뜻으로 신앙을 지키며 열심히 살았다. 또 바르바라는 친척인 정하상 바오로(Paulus)가 북경으로 선교사를 모시러 가는 계획을 도우며 그 여비를 보태기 위해서 쉬지 않고 일하였다. 1832년에 남편이 귀양지에서 돌아오자 그녀는 남편과 함께 유 파치피코(본래 이름은 余恒德) 신부를 보살펴 드렸고, 나중에는 집에 신자들을 위한 강당을 마련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유 신부가 중국으로 돌아간 후 바르바라는 작은 집을 구하여 이사하였는데, 모방(Man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와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를 자신의 집에 영접하였다.
조 바르바라는 가끔 이런 말을 하였다. “만일 박해가 일어나면 우리는 죽어야 할 터이니, 천주의 영광을 현양하고 우리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고통을 참아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하자.” 과연 이것은 빈 말이 아니었고 그녀의 행동과 말이 일치하게 되었다. 그때는 기해박해가 한창이었기 때문에 남편은 시골에 가서 숨어 있었고, 바르바라는 혼자 있다가 7월 붙잡혔다. 그녀는 그녀의 이름도 밝히지 않고, 남편의 피신처도 대지 않았으며, 신앙을 배반하지도 않았기에 고문을 20회 이상이나 당하였다. 바르바라는 “만 번 죽어도 나는 천주를 배반할 수 없고 또 내 남편이 어디 숨어 있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하느님께 대한 충성과 비밀을 지킨 것 때문에 바르바라는 주리를 틀리고 곤장을 180대나 맞았고, 형조로 옮겨가서도 다시 세 차례나 곤장을 더 맞았다.
바르바라는 마침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사형 집행일이 되자 옥에 갇혀 있던 모든 신자들이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없게 된 것을 슬퍼하였다. 조증이 바르바라는 사형장에 나가기 전에 둘러싼 신자들을 애정과 신앙에 넘치는 말로 위로하고, 신앙을 증거하는데 굳건하라고 격려하며 서소문 밖의 형장으로 나아갔다. 때는 1839년 12월 29일이었으며, 그녀의 나이는 58세였다. 그녀는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남이관(南履灌) 세바스티아노(1780-1839년)
성 남이관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또는 세바스티아노)는 양반집에 태어났는데 그의 부모는 1800년경에 입교하였다. 어머니는 젊어서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 남필용은 1801년에 고발되어 옥에 갇혔다가 유배지인 강진에서 별세하였다. 당시 20세가량이던 세바스티아누스는 경상도 단성 땅으로 귀양을 가서 그곳의 어느 처녀와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직 세례성사도 받지 아니하였고, 천주교에 대하여 아는 것이라고는 매일 저녁 거르지 않고 외우는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는 자녀를 낳기 위하여 첩까지 얻었으나 그것이 중죄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40세에 이르러 병을 앓던 중 어떤 신자의 이야기를 듣고 첩을 멀리하고 성세를 받은 후로는 신자다운 생활을 하였다. 이처럼 교리를 알고 회개한 그는 지난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며 허송세월한 것을 회복하려고 애쓰니, 그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의주까지 가서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를 모셔 들여 온 다음, 유 신부의 심부름으로 북경에 편지를 쓰기도 하면서 신부 댁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 보았다.
기해년의 박해가 일어나자 세바스티아누스는 서울을 떠나 경기도 이천 고을에 몸을 숨겼으나 어떤 신자가 포청과 내통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장은 주리를 클게 하며 세바스티아누스에게 배교하라고 명령하였으나 그의 신앙은 확고부동하였다. 이 이튿날 의금부에 이송되어 문초를 세 번 당하는 동안 다리에 곤장을 수없이 맞았고 참수의 선고를 받았다. 남 세바스티아누스는 형장으로 끌려가기 전에 여자 옥의 옥리를 불러 자기와 같이 붙잡혀 아직 옥에 남아 고생하고 있는 아내에게 “우리는 같은 날 죽기로 언약했는데 천주께서 달리 안배하시니 적어도 둘이 다 같은 일을 위하여 죽도록 하자. 천당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을 일러 보냈다. 그 후 세바스티아누스는 1839년 9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여 순교하니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출처 : 이상 가톨릭 성인사전]
단내 성가정 성지 소개
1. 한국 최고의 교우촌
단내는 현재 한국에 존재하는 교우촌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래된 교우촌이다. 단내는 1784년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될 무렵부터 천주교신앙이 전해 져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200여 년간 신앙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는 마을이기 때문이다. 한국천주교회는 세계교회사상 유일하게 선교사들의 선교에 의 해서 신앙이 전해진 것이 아니라 일군의 유학자들이 학문적으로 천주교를 연구하다가 자발적으로 천주교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당시에 천 주교를 수용하는 데 앞장섰던 유학자들은 실학의 창시자인 성호 이익(1681-1 763)의 직계제자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당대에 가장 학문적소양이 뛰 어난 학자로 평가 받았던 권철신(1736-1801) 과 이기양(1744-1802)이 천주교를 수용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두 인물 중에 이기양이 한국 천주교 창설기인 1784년을 전후해서 이곳 단내에서 살았다. 당 대의 뛰어난 학자였던 이기양은 그와 교유하는 다수의 학자들이 천주교를 수용하도록 영향을 미쳤고, 그래서 1801년 신유박해 때 “여주 이천 간 사학의 괴수”로 지목되어 체포당했다. 그리고 이기양은 그 해에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되었다가 그 이듬해에 그곳에서 사망하게 된다. 이런 연유로 이 곳 단내는 한국천주교 창설기부터 신앙이 전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 천주교 창설 초기에 형성되었던 교우촌들은 모두 혹독한 박해의 와중에서 신자들이 순교하거나 그 곳을 떠남으로써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유일하게 단내만은 모진 박해를 겪으면서도 현재까지 200여년의 세월동안 끈질기게 신앙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2. 김대건 신부님의 사목활동지
단내는 최초의 방인 사제였던 성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1821-1846)의 중요한 사목활동지이기도하다. 김 대건 신부님은 1845년 8월17일에 사제로 서품된 지 13개월 만에 25살의 젊은 나이에 순교하셨다. 그래서 김대건 신부님이 사목활동을 한 기간은 불과 몇 개월밖에 되지않는다. 그 짧은 사목활동기간동안 김 대건 신부님은 이곳에 사는 정은 바오로의 집으로 여러 차례 찾아오시어 이곳에 사는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시고 신앙생활을 지도하셨다. 그 당시는 박해시대이기 때문에 밤에만 사목활동을 할 수 있 었다. 김대건 신부님이 이곳에서 약 12km 떨어진 양지 은이 공소에서 밤길을 걸어 이 곳 단내에 오셔서 고해성사를 주시고 다시 양지 은이 공소에 도착하면 날이 밝곤 했다. 지금도 단내성지에는 그때 김 대건 신부님이 걸으셨던 길이 남아 있어서 밤을 세워 걸으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신자들을 보살피던 김대건 신부님의 목자적 사랑을 회상하게 한다.
3. 순교자 정은 바오로와 정 베드로의 고향이자 묘소가 있는 곳
이곳 단내에서 출생하셨으며, 김대건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받고 신앙생활을 지도받았던 정은 바오로(1804-1866)와 정 베드로(?-1866) 두 분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하셨다. 그 때 63세였던 정은 바오로는 늙고 병들어 쇠약한 몸으로 1866년 12월 2일에 단내에서 체포되어 남한산성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추위도 막을 수 없게 통나무로 허름하게 지은 임시 감옥에서 굶주림과 추위와 태형으로 난 상처의 고통에 시달리며 25일간 수감생활을 하다가 12월27일에 얼굴에 물을 뿌리고 창호지를 붙여서 죽이는 백지사 (白紙死)형으로 순교하셨다. 정 바오로의 조카손자였던 정 베드로는 평소에 존경하던 작은 할아버지가 쇠약한 몸으로 체포되어 가시는 것을 보고 자기도 같이 감옥에 갇혀서 할아버지를 도와드리고 함께 순교할 것을 결심한다. 그래서 스스로 관청을 찾아가 천주교신자임을 밝히고 체포되어 정은 바오로와 함께 수감생활을 하다가 같은 날 같은 곳에서 백지사형으로 순교하셨다.
정 바오로와 정 베드로 두 분이 순교하신 후 정은 바오로 순교자의 두 아들인 정 일동과 정 수동 형제가 밤을 타서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두 분의 시신을 수습하러 남한산성의 처형 터로 갔다. 그리고 정은 바오로 순교자의 시신을 찾아서 단내성지에 안장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 베드로 순교자의 시신은 찾지를 못했다. 그래서 단내성지를 개발하면서2000년 4월11일에 정베드로 순교자의 순교터인 남한산성 동문 밖의 흙을 채취해서 정은 바오로 순교자의 묘옆에 정베드로 순교자의 의묘(儀墓)를 조성했다.
4. 이천 출신 5위 성인 기념성지
이천시에 소재하는 단내성지는 한국의 103위 순교성인 가운데 이천에서 태어나신 4분의 순교성인과 이천에서 체포되어 순교하신 1분의 순교성인을 기념하는 성지이다. 즉 단내성지 바로 건너 마을인 동산리에서 태어나신 이문우 요한(1810-1840)성인, 그리고 이천의 구월에서 태어나신 이호영 베드로(1803-1838),이소사 아가다(1784-1839) 두 남매성인, 역시 이천 태생인 조증이 바르바라(1782-1839)성녀와 조증이 성녀의 남편으로 처가인 이천에서 체포되어 순교하신 남이관 세바스티아노(1780-1839)성인등 다섯분의 순교성인을 기념하는 곳이 단내성지이다.
5. 가정성화를 위해 순례하는 성가정성지
단내성지에서 기념하는 순교자들은 이문우 성인을 제외하면 모두 가족순교자들이다. 정 바오로와 정 베드로 순교자는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이고, 김대건 신부님도 부자가 함께 순교성인이며, 이호영 성인과 이 아가다 성녀는 남매간이고, 조증이 성녀와 남이관 성인은 부부사이이다. 한편 이문우 성인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남달리 극진했던 성인이다. 순교는 바로 성덕의 절정이다. 그러기에 이 가족 순교자들은 가족이 함께 성덕의 정상에 도달함으로써, 가정 성화의 귀감을 보여준 분들이다.
또한 이 순교자들은 마지막 순교의 길을 가면서도 가족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고자 함으로써, 지극한 부부사랑과 부모사랑과 자식사랑을 보여준 분들이다. 그러기에 단내성지는 이 같은 순교성인들의 모범을 본받아 가정성화를 위해 기도하고, 성가정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얻기 위해 순례하는 성지가 되어야 마땅하다. 더구나 오늘의 현실이 가정성화를 위해 순례할 수 있는 성가정성지를 절실히 요청하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모든 교우들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절실한 문제는 바로 가정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정문제의 핵심은 사랑의 결핍에 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사랑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가정의 불행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부부사이에, 부모와 자식사이에, 형제들 사이에 사랑이 결핍될 때그 가정은 불행해지게 된다. 그리고 참된 사랑은 남을 위해서 자기를 기쁘게 희생하고자하는 열망을 품게 한다. 그리고 이런 사랑이 존재하는 가정이야 말로 성가정이다. 가족들 사이에 무너진 사랑을 재건하는 것이 가정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이다. 그러기에 단내는 이곳을 순례하는 이들이 사랑이 아닌 일체의 감정을 소멸시키고, 오직 사랑만을 마음에 담고 돌아가는 곳이 되게 하려고 한다. 그래서 단내성지가 가정 안에 무너진 사랑을 재건하는 순례지, 가정 안에 일치와 평화와 행복을 재건하는 성가정성지로 기능하게 하고자한다.
<단내 성지 홈페이지에서>
출처--가톨릭정보 http://www.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