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살던 고향 꽃피는 산골 - 말방리(末方里)
말방리(末方里)는 개곡리(開谷里)와 함께 동대산맥 중턱에서부터 7번국도까지 늘어선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비교적 고도(高度)가 낮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평탄(平坦)한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낮아지는 지형이며, 서쪽으로 계곡이 흐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말방(末方), 장산, 양짓말, 하촌(下村) 마을 등이 있다. 말방 마을은 옛적 숭복사터 어귀에 마방(馬房)이 있었다하여 ‘마방’이라 불리다가 후에 ‘말방’으로 개칭되었다.
그리운 내 고향 말방리
일설에서는 불국사에서 이곳까지 절이 이어져 비를 맞지 않고 올 수 있었다고 하며, 그 끝자락에 해당하므로 ‘말방(末方)’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또 다른 설에는 ‘언방(言方)’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말방리에는 문화재로 1985년 8월 5일 문화재자료 제94호로 지정된 숭복사지(崇福寺址) 3층석탑이 있다.
말방리는 경주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울산으로 가다가 괘릉리와 활성리를 지나면, 국도 왼쪽으로 ‘외동석재’라는 석재(石材) 공장이 있는 마을이다.
외동 석재
동대산맥(東大山脈)을 경계로 양북면 장항리와 맞닿아 있고, 남으로는 개곡리(開谷里)와 서쪽으로는 7번국도를 사이에 두고 죽동리(竹洞里)와, 북으로는 활성리(活城里)와 이웃하고 있다.
말방(末方)은 신라 원성왕(元聖王) 때 파진찬(波珍飡) 김원량(金元良)이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 ‘숭복사 터’가 있는 마을로 동·서 2기의 3층 석탑이 남아있어 답사객들의 발길이 잦은 마을이다. 위에서 말한 ‘파진찬(波珍飡)’이란 신라 때, 17관등(官等) 가운데 넷째 등급의 벼슬 이름이다.
숭복사지
장산(獐山)·양짓말·하촌(下村)이 말방1리, 말방(末方)·탑리(塔里)가 말방2리를 구성하고 있다. 말방1리는 동대산 서편 기슭에서 꿈틀꿈틀 흘러내리던 산등성이가 숨을 고르는 7번 국도변 평지의 들판에 자리한 마을이다.
그리고 숭복사지(崇福寺祉)를 비롯한 동대산 쪽의 골짜기와 등성이는 모두 말방2리에 해당한다. 마을의 자랑거리로는 창건(創建)된 지 100년이 넘는 장산교회(獐山敎會)와 마을 어귀 도랑(하천)둑에 서 있는 오래된 ‘땅버들’ 3그루가 대표적이다.
여기에서의 ‘땅버들’은 버드나뭇과에 속한 낙엽 활엽관목으로 높이는 1~2미터 정도이고, 잎은 피침형이며 톱니가 있고 꽃은 단성화(單性花)로 4월에 핀다. 열매는 식용(食用)하며 가지와 잎은 풋거름으로 쓰인다. 우리나라, 중국, 일본 등지에 분포한다.
말방리 땅버들
그리고 말방리(末方里)는 외동읍 32개 마을 중에 범죄 발생이 없고, 경로효친사상이 높아 ‘모범마을’로 선정되기도 했었다. 비록 호수는 적지만 20여개의 다양한 성씨가 모여 살면서도 일가친지처럼 화합이 잘된다고 한다. 마을일을 자기 일처럼 손수 돕고 협동하는 잘 사는 마을이라는 것이다.
현재 80가구에 96세대 470여 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으나, 실제 거주인구는 이보다 적다고 한다. 주민등록은 이곳에 두고 다른 곳에서 거주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다.
넓은 들판을 끼고 있는 이 마을은 주로 논농사에 의존하고 있으며, 150여 두의 한우(韓牛)를 기르고 있다. 말방리(末方里)의 자연부락과 문화재, 중요지형지물을 살펴본다.
말방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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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長山, 獐山)
옛적 이 마을 앞으로 길게 늘어선 산이 마치 노루처럼 생겼다고 하여 ‘장산(獐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동대산 준령이 흘러내려 그 여운이 길게 이 마을 앞을 거쳐 현재 국도 서쪽 ‘동맷갓’까지 연결되어 마치 노루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개간하여 농토가 되고 공장이 들어서 노루 형상의 산은 그 형체만 어렴풋이 남아 있다.
노 루
양짓말
‘장산(獐山)’의 남쪽 양지쪽에 있는 마을로 양지(陽地) 바른 곳에 있다 하여 ‘양짓말’로 불렀다고 한다.
하촌(下村)
‘장산(獐山)’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말방리(末方里)에서 가장 아래쪽에 있다 하여 ‘아랫말’ 또는 ‘하촌(下村)’이라 불렸다고 한다. 7번국도 동쪽에 인접한 마을로 말방1리 마을회관과 장산교회(獐山敎會)가 이 마을에 있다.
말방리
필자가 외동중학교에 재학할 당시에는 이 하촌(下村)마을과 관련하여 조금은 특별한 추억(追憶) 한 가지를 갖고 있다.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2학년 때의 일이다.
2학년 2학기 때로 기억이 되는데, 죽동리(竹洞里) 못 미쳐 말방리(末方里) ‘하촌부락’의 7번국도 변에 있던 구멍가게에서 상급생과 동기생 몇 명을 상대로 ‘나마가시’ 먹기 ‘내기’를 했을 때의 일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나마가시’는 이름이 와전되어 ‘야마가시’라고도 했는데, 이는 일본의 생과자(생과자)를 말하는 ‘なまがし’의 우리말 독음이다.
어느 날 하학(下學) 길에 필자가 3학년 선배들과 동급생들을 상대로 호기롭게 ‘나마가시’ 20개를 먹겠다고 도전장(挑戰狀)을 내기는 했는데, 열서너 개를 먹고 손을 들어버렸다.
점심을 굶은 터에 ‘나마가시’ 맛이 너무나 좋아 족히 먹을 줄 알고 도전을 했지만 반을 조금 더 먹고 져버린 것이다.
그때의 '나마가시'와 엇비슷한 지금의 쵸콜렛식빵
내기의 조건(條件)은 필자가 이기면 ‘나마가시’ 20개를 공짜로 먹게 되고, 지면 먹은 것을 포함하여 두 배를 상대방(相對方)들에게 사는 조건이었다. 가난한 시골 중학교 2학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도박을 한 셈이다.
다행히 선배(先輩)들이 필자의 난처함이 안쓰러웠던지 필자가 못 먹고 남은 것을 하나씩 나누어 먹고, 더 이상 벌칙(罰則)을 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20개의 ‘나마가시’ 가격도 엄청난 부담이었다.
일단 외상(外上)으로 처리해 놓고 어머님을 속여 어떻게 갚아주기는 한 것 같은데 ‘간이 배밖에 나온’ 행동이었던 것은 틀림없었다. 거듭 말하지만 당시의 ‘나마가시’는 참으로 맛이 좋았다.
지금의 롤빵(나마가시)
동창(東倉)터
‘동창(東倉)터’는 지금의 마을회관 뒷들에 있다. 이 ‘동창터’는 개곡리 파일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조선조 중종(中宗) 때 대동미(大同米) 수집 창고가 당시의 영남좌로(嶺南左路) 동쪽인 말방리(末方里)에 위치한데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대동미(大同米)란 조선 중기 이후 대동법(大同法)에 따라 거두던 쌀을 말한다.
그 당시 외동읍 동북부지역에서 거둬들여 매년 정기적으로 경주관아로 수송하던 세곡(稅穀)을 집결 시켰던 창고가 말방리(末方里)에 있었다는 얘기다.
말방리
동맷갓(120m)
‘장산(獐山)’ 마을 서쪽 7번국도변에 있는 산으로 ‘장산(獐山)’이라고도 하는데, 부근 구릉지(丘陵地)와 함께 그 형상이 마치 노루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 ‘장산(獐山)’이라 했다고 한다. 본래 동대산에서 이곳까지 산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낮은 부분은 모두 농토로 개간되었다.
동창뒷들
‘동창(東倉)터’ 뒤에 있는 들판으로 7번국도 동쪽에 위치한 넓은 들이다.
동창뒷들
창앞들
‘동창(東倉)터’ 밑에 있는 들로, 장산 북쪽에 있다.
고랑못 안
‘고랑못’ 안쪽에 있는 논을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고랑’은 두둑한 두 이랑 사이에 좁고 길게 들어간 곳을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산골짜기’를 이르는 말이다.
말방리
새못안
‘새못’ 안쪽에 있는 논을 말한다.
새봇밑
‘새보’ 밑에 있는 논을 말한다.
쌍보밭
‘장산(獐山)’ 남쪽 ‘상보들’ 위에 있는 밭으로 지금은 논으로 변했다.
말방리
고랑못
‘말방(末方)’ 서북쪽에 있는 못으로 두 ‘고랑’이 모이는 자리에 ‘못(저수지)’이 있다.
새못
‘말방(末方)’의 서쪽에 새로 만든 못으로 ‘동창뒷들’에 있던 연못이었는데, 30여 년 전에 경지정리로 인해 지금은 논으로 변했다.
새보
‘장산(獐山)’ 북쪽에 새로 만든 보(洑)를 말한다.
말방리
상보
‘장산(獐山)’ 동남쪽에 있는 ‘봇도랑’으로, 위쪽에 있는 ‘보(洑)’라고 ‘상봇도랑’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에서의 ‘봇도랑’은 하천에 막은 봇물을 끌어들이거나 빼게 만든 도랑을 말한다.
창앞들보
‘창앞들’에 물을 대는 보(洑)를 말한다.
말방저수지(末方貯水池)
‘말방저수지’는 외동읍 말방리(末方里) 64-3번지에 소재하며, 산속에 위치한 자연지(自然池)라 1급수의 맑은 물을 자랑하던 청정저수지였다. 그런데 이 맑은 저수지도 지난 2005년 4월 3일 ‘말방 낚시터’로 변모하면서 그 깨끗한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마사토(磨砂土)와 황토(黃土) 바닥인 말방저수지는 아직까지 물이 맑고 고기가 깨끗하여 조사(釣士)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주 어종(魚種)은 잉어, 향어, 붕어 등이며, 좌대(座臺)는 100여개에 이른다.
평균수심은 2~4m, 편의시설로 수면실, 식당, 화장실 등이 갖추어져 있고, 입어료(入漁料)는 2만원이다.
말방리 말방저수지
장산교회(獐山敎會)
말방리(末方里) ‘장산부락’에 소재하는 ‘장산교회’는 1905년에 미국인(美國人) 선교사 ‘아담스’와 서성오 조사, 장병호 영수, 김용태 집사에 의해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1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장산교회’는 현재 100여명의 신도(信徒)들이 출석하고 있다.
‘장산교회(獐山敎會)’는 한 때 필자의 할머니와 필자들이 출석한 교회였다. 영지초등학교에 다닐 때 주일이면 할머님을 따라 출석했으나, 할머님께서 노환으로 거동을 못하시고 부터 출석을 하지 않았다.
외동중학교에 다닐 때는 3년 동안 교회 옆 담벼락을 지나다녔으나, 그때도 이 교회에는 그냥 지나치기만 했었다. 끝내 예수님을 믿는 신도가 되기는 했지만, 왜 그랬는지 지금도 이해가 잘되지 않고 있다.
장산교회
6․25 때는 ‘장산교회(獐山敎會)’에서 교회계통으로 나온 분유(粉乳) 등 구호품(救護品)을 전해 줘서 포식을 하기도 했었다.
‘장산교회’에서 보내준 큼직한 원형(圓形) 분유통을 ‘멀방’에 두고, 심심하면 한 대접씩 담아와 동생들과 함께 숟가락으로 퍼 먹거나, 밥솥에 쪄서 먹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鮮明)하게 떠오른다.
‘나물먹고 물마시던’ 시절이라 창자마다 기름기가 없어 분유(粉乳)를 먹기만 하면 으레 설사(泄瀉)를 하곤 했던 기억도 어슴푸레 떠오른다.
장산부락과 장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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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너무 길어 말방리 향우님들이 아니시라면, 그냥 뛰어 넘으시기 바란다)
신라시대 때, 지금의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末方里) 산23-1에는 숭복사(崇福寺)가 소재하고 있었다. 당초의 명칭은 ‘곡사(鵠寺)’였는데, 여기에서의 곡(鵠)은 ‘고니 곡자’로 당시 곡사의 뒤에 ‘고니(白鳥)’ 모양의 바위가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곡사(鵠寺)의 주변에 해당되는 괘릉(원성왕릉)의 안내소 입구 가기 전에 바위가 있기는 있으나, 아무리 뜯어봐도 ‘고니(백조)’를 닮은 것 같지는 않다. 능역(陵域)에는 이 바위 외에 또 하나의 바위가 있기는 하나, 그냥 펑퍼짐한 모양이다.
말방리 숭복사지
오랜 세월, 풍화작용(風化作用)으로 마모가 되었는지, 곡사를 말방리(末方里)로 이건하면서 바위를 석재(石材)로 채취하여 그 곳으로 이송했는지는 몰라도 아래 그림에서와 같이 ‘고니(백조)’ 형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이 바위는 필자들이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에 도보로 통학할 때 하교길에 가끔씩 드러누워 쉬어서 다니던 휴식처(休息處)이기도 했었다. 필자들이 통학할 때는 드러누울 데가 무척 많았다.
괘릉리 원성왕릉 주변의 바위
앞서 소개한대로 연안리 동급생(同級生) 구멍가게 툇마루에도 자주 드러누웠고, 연안리 사과밭에서 ‘능굼’을 ‘도디케 묵을 때’도 ‘대성마을’ 야산 무덤에 비스듬히 드러누워 깨물어 먹곤 했었다.
그 시절 제대로 드러눕는 곳은 거의 매일같이 드러누웠다 귀가하는 괘릉(원성왕릉) 앞 잔디밭이었다. 울창한 소나무 그늘 잔디밭에서 책보를 베고, 모자로 얼굴을 덮은 체 30~40분씩 낮잠을 자고 귀가하기도 했었다.
‘번지럽은’ 시절이라 시오리의 비포장도로(非鋪裝道路)를 걸어오면서 갖은 장난질과 ‘쪼치바리’를 하느라 이곳에 이르면, 너무나 피곤(疲困)해서 드러눕기만하면, 잠이 솔솔 오곤 했었다.
여기에서도 한 시간 이상을 더 걸어가야 하는 불국사(佛國寺) 진현동 학우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휴식처가 되었고, 잔디가 너무 좋아 잠자리로서는 ‘왔다’였기 때문이다.
괘릉리 원성왕릉 잔디밭
그리고 그 시절에는 싸구려 광목(廣木)이나 ‘미영베’로 지은 교복(校服)이라 아무데나 앉기도 했고, 눕기도 했었다. 웬만큼 흙이나 먼지가 묻어도 벗어서 툭툭 털고 그대로 입고 다닐 때였다.
이때의 버릇 때문이었는지, 무작정상경(無酌定上京) 이전까지는 달 밝은 밤마다 동네 처녀를 꼬드겨 이 잔디밭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밤늦도록 무슨 밀담(密談)을 나누곤 하기도 했었다. 얘기가 엉뚱한 곳으로 빗나가고 말았다.
본론으로 돌아간다. ‘곡사(鵠寺)’는 신라 제37대 선덕왕(宣德王) 이전에 원성왕(元聖王)의 비인 숙정왕후의 외조부가 되는 김원량(金元良)이 지금의 괘릉리 원성왕릉 자리에 창건한 사찰이다.
그런데 이때 창건한 괘릉리의 ‘곡사(鵠寺)’ 자리가 명당자리로 소문이 나 있던 터에 당시의 원성왕이 죽자 곡사(鵠寺)의 위치에 원성왕릉을 만들고 절은 지금의 말방리로 옮겼다.
원성왕릉
그 후 곡사는 제48대 경문왕(景文王) 대에 이를 중창하였으며, 제49대 헌강왕(憲康王) 대에 이르러서는 숭복사(崇福寺)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고 헌강왕(憲康王) 11년(885)에는 다시 그 이름을 대숭복사(大崇福寺)로 바꾸었다. 여기에서 경문왕이 곡사(鵠寺)를 중건하고, 헌강왕이 사찰의 명칭을 바꾼 내력을 잠시 살펴본다.
주지하다시피 신라(新羅)의 하대(下代)는 왕위계승 과정에서 진골(眞骨) 귀족 간에 끊임없는 왕위 쟁탈전이 벌어져,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던 시기였다.
경문왕
여기에서의 진골(眞骨)이란 신라 때, 골품(骨品)의 하나로 부모 중 어느 한쪽이 왕족인 사람을 말한다. 반면 성골(聖骨)은 신라 때, 골품의 첫째 등급으로 부모가 모두 왕계(王系)인 사람을 이른다.
어쨌든 경문왕(景文王)은 즉위 후 자신의 왕위에 도전하는 다른 왕실귀족들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긴급한 과제였다.
그리하여 원성왕계(元聖王系) 내에서의 각 분파관념을 없애고, 자신의 정권으로 귀속시키려는 회유연합책을 펴게 되었다. 그러한 노력의 표현으로 가장 먼저 행한 것이 바로 곡사(鵠寺)의 중창이었다.
숭복사지
원성왕(元聖王)이 신라 하대(下代) 왕위계승에 있어 중시조(中始祖)가 된다는 점을 감안한 정책이었다.
원성왕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여 분열된 왕실을 통합하고자 그동안 황폐하게 방치되었던 원성왕의 원찰(願刹)인 곡사(鵠寺)에 관심을 기울여 이를 웅장하게 중창하는 역사를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원찰(願刹)’이란 죽은 사람의 화상(畵像)이나 위패(位牌)를 안치해 놓고 명복을 비는 법당을 이르는 말이다.
이러한 곡사(鵠寺)의 중창은 당시 경문왕(景文王)이 자신의 통제권에서 벗어난 불교계를 다시금 정비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었고, 정법전(政法典)을 정비하고 불교계를 통제하고자 했던 원성왕(元聖王)의 정책에 주목하여 원성왕을 위한 곡사 중창이 이루어 졌다고 보기도 한다.
원성왕
위에서 말한 ‘정법전(政法典)’은 신라 때에 있었던 관서의 하나로 관원으로 ‘대사(大舍)’ 한 명과 ‘사(史)’ 두 명을 두었다.
이렇게 중창한 곡사(鵠寺)는 헌강왕(憲康王) 11년(885)에 그 이름을 대숭복사(大崇福寺)로 바꾸었다. ‘대숭복사비명’에는 이러한 개명(改名)을 두고 중국의 예를 들고 있다.
진(陳)나라의 보덕사(報德寺)가 수(隨)나라에 이르러 흥국사(興國寺)라 했는데, 이는 ‘보덕(報德)’이라는 말보다 ‘흥덕(興德)’이라는 말이 국가를 단위로 할 때 더 합당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숭복사지
이러한 의미는 곡사(鵠寺)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고 있다. 절 뒤에 ‘고니’ 모양의 바위로 이름 붙여져 한 지역만을 의미하던 ‘곡사(鵠寺)’ 대신에 포괄적 의미로 국가를 단위로 하는 ‘대숭복사(大崇福寺)’로 바꾸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최치원이 지은 ‘대숭복사비명(大崇福寺碑銘)’은 서문(序文)과 명문(銘文)으로 이루어졌는데, 서문은 다시 도입부와 전개부로 나누어진다.
서문의 도입부분은 숭복사를 중창(重創)한 임금의 덕과 나라의 태평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숭복사의 중창과정이 담겨있는데, 숭복사의 유래와 기원, 경문왕(景文王)과 곡사의 중수, 제49대 헌강왕(憲康王)의 등극과 숭복사로의 개칭(改稱), 제50대 정강왕(定康王)의 비명 찬술명령 계승, 제51대 진성왕(眞聖王)의 비문 찬술 독려, 그리고 최치원의 비명 찬술 동기 등 여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숭복사지
특히 사찰의 창건과 중수과정은 시대에 따라 소상히 정리되어 있어 숭복사에 대한 경문왕계 왕실의 입장과 당시 시대 상황이 잘 반영되어 있다.
숭복사지(崇福寺址)에는 현재 금당지(金堂址), 석단(石壇)을 비롯하여 동서로 삼층석탑 2기(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94호)가 남아있는데, 기단부에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양각되어 있으며, 각 옥개석(屋蓋石)의 받침은 4단으로 되어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은 인도(印度)의 신화, 즉 불교 이전 인도의 주류 종교인 바라문교와 힌두교의 신과 초자연적인 존재들을 흡수한 것이다.
불교 교리상 이들 팔부신중(八部神衆)은 깨달음을 얻지 못해 고뇌하는 중생의 하나로 보기도 하고, 부처의 법을 지키고 대중을 교화하는 하늘의 장수(將帥)를 이르는 말로 ‘팔부중’ 또는 ‘천룡팔부’라고도 한다.
숭복사지 3층석탑과 팔부신중
(기단부(1층)에 새겨진 것이 '팔부신중'인데, 4면에 둘 씩 새겨져 있다)
본론으로 돌아간다. 동탑은 서탑과 같은 크기와 양식으로 보이나, 현재는 일부 파괴된 기단부와 1층의 옥신(屋身), 2개의 옥개석만이 남아있다.
숭복사지에 위치해 있던 귀부(龜趺)와 ‘국사대웅(國寺大雄)’, ‘개와대웅(蓋瓦大雄)’ 등의 문자가 새겨진 평기와 등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위에서 말한 ‘귀부(龜趺)’란 거북 모양의 비석받침을 말하는데, 거북 모양의 잔등에 장방형의 받침(碑座)을 마련하고 그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는 일은 중국 당(唐)나라 때부터 성행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비석을 세울 때에는 일반적으로 땅에 묻거나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했으나, 통일신라 이후 당(唐)나라의 영향을 받아 귀부(龜趺)를 비좌(碑座)로 삼게 되었고, 그 뒤 조선시대까지 석비(石碑)의 전형적인 형식이 되었다.
경주박물관에 전시된 숭복사 귀부
각설하고 여기에서는 숭복사지의 발견과 발굴경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현재 동·서 3층 석탑만 남아 있는 숭복사지(崇福寺碑)는 1931년 일본인(日本人) ‘삼산(杉山)’에 의해 알려지게 되어 현지답사가 진행되었다.
답사 당시에는 논 한 모퉁이에 탑신(塔身)과 탑기단(塔基壇), 팔부중상(八部衆像) 등 3층 석탑의 석재 2기가 있었고, 나머지 석재는 1개소에 모아둔 상태였다. 이 외 석조 1개, 쌍두귀부 1기, 비편(碑片) 1개 등을 발견했다.
위에서 말한 ‘팔부중상(八部衆像)’은 앞에서 소개한 ‘팔부신중(八部神衆)’과 같은 말인데, 부처가 설법할 때 항상 따라다니며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8종류의 신장상(神將像)을 이르는 말이다. 석굴암 내부 벽체에 양각된 조각들이 ‘팔부중상’이다.
석굴암의 팔부중상
어쨌든 그 이후에도 구체적인 절의 명칭을 밝혀내지 못한 채 ‘말방리사지(末方里寺址)’라고 불리어 오다가 1939년 3월 조선총독부에서 조선금석총람 상·하 1부를 조선총독부 경주분관에 기증함으로써 기왕에 판독된 비편(碑片) 글자와 확인 대조한 결과 이 절터가 삼국유사에 기록된 ‘곡사(鵠寺)’임이 확인되었다.
원성왕릉의 조영(造營 ; 궁궐이나 절 등 큰 건물을 세움)과 관련하여 현 위치로 이건(移建)되면서 헌강왕(875∼886) 때에 숭복사(崇福寺)로 개칭되었음이 확인된 것이다.
필자는 외동중학교에 다니면서 말방리(末方里)를 아침저녁으로 3년 동안 왕래했었지만, 숭복사(崇福寺)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고 지나쳤다.
숭복사지 동탑
해방 전까지 발견된 다섯 개의 숭복사(崇福寺) 비편(碑片)에서는 약 30여개의 글자가 판독되었으며, 모두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 후 20여년이 지나 1961년에 출토(出土) 연월일과 수습자가 미상인 상태로 비편(碑片) 1개가 추가됨으로써 10여자가 더 판독되었고, 1965년 3월 한국일보사가 주관한 신라삼산오악조사단(新羅三山五岳調査團)의 2차 조사 시 동탑지(東塔地)에서 비편(碑片) 1기를 다시 추가하였다.
숭복사 비석조각
그리고 3년 뒤인 1968년 4월 16일, 수년 전에 출토되었던 동서탑 북쪽 금당지 서북쪽 못머리 부근의 한 지점에서 동시에 발견되었다고 하는 다섯 개의 비편(碑片)을 경주시내 고물상에서 구입한 후 현장을 확인하였으며,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후 10년 뒤인 1978년 국립경주박물관의 현지 지표조사에서 비편(碑片) 2개를 다시 수습하여 다섯 자가 더 판독된 것을 합하면, 비석의 조각은 모두 13편으로 99자가 판독되었다.
또한 삼산오악조사단(三山五岳調査團)은 동탑지에서 앙화(仰花)의 일부로 보이는 석편 2개를 수습했는데, 그 중 하나는 여래좌상(如來坐像)이 조각되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꽃무늬(花文)가 조각되어 있었다. 여기에서의 ‘앙화(仰花)’란 탑의 ‘복발’ 위에 놓고 꽃모양을 새긴 장식을 말한다.
앙 화
그리고 ‘복발(覆鉢)’은 탑의 노반(露盤) 위에 ‘바리때’를 엎어 놓은 것처럼 된 부분을 말한다. 또 ‘바리때’는 ‘발우(鉢盂)’라고도 하는데, 절에서 승려들이 쓰는 밥그릇으로 나무를 대접처럼 깎고 다듬은 후에 안팎에 칠을 하여 만든다.
노반(露盤)은 탑의 꼭대기에 있는 상륜(相輪 ; 불탑 꼭대기에 있는 쇠붙이로 된 원기둥 모양의 장식 부분)의 한 부분으로 네모난 기와집의 지붕과 비슷한 모양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 숭복사(崇福寺)의 절터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쌍탑식 가람(伽藍)배치로 금당(金堂) 앞에 탑이 동서로 배치되었으며, 대지를 3단의 석축으로 구분하여 맨 위에 금당과 탑이 자리 잡고 있다.
바리때
여기에서 말하는 ‘가람(伽藍)’은 본래 ‘승려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 곳, 즉 사찰’을 나타내는 산스크리트어 ‘saṃghārāma’의 음역어(音譯語)인 ‘승가람마’가 준 말이고, ‘금당(金堂)’은 절에서 본존(本尊), 즉 석가모니불을 안치한 건물을 말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 금당(金堂) 중심에서 북으로 50m정도 떨어진 곳에는 동서로 긴 기단석(基壇石)이 발견되었는데, 이곳은 강당지(講堂址)로 추정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숭복사비(崇福寺碑)의 비문을 쓴 최치원(崔致遠)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최치원은 신라6부의 사량부 사람으로 신라 말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량부(沙梁部)는 신라 때, 육부(六部)의 하나로 신라 초기의 고허촌(高墟村)을 고친 이름이다. 지금의 경주 남천(南川) 이남, 서천(西川) 이동, 북천(北川) 이남 일대로 추측된다.
숭복사지 서탑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은 신라가 건국되기 전의 부족연맹체인 사로6촌(斯盧六村) 시절에는 ‘취산진지촌(觜山珍支村)’이었고, 신라가 건국된 뒤 중앙의 행정구역인 6부(六部) 시절에는 ‘본피부(本彼部)’로 개편되었다.
최치원의 얘기로 돌아간다. 최치원의 자(字)는 고운(孤雲)으로 12세에 중국의 당(唐)나라에 입국하여 18세에 당의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고, 20세에 ‘율수’라는 현(縣)의 현위(縣尉)가 되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빈공과(賓貢科)’란 중국 당나라 때, 외국인에게 보이던 과거(科擧)시험을 말하며, ‘현위(縣尉)’는 현령이 있는 고을에 배치되어 교육을 맡아보던 지방의 벼슬아치를 말한다.
숭복사지 3층석탑
그러나 최치원은 현위(縣尉)로 부임한지 1년 만에 이를 그만두고, 24세 때는 ‘황소의 난(黃巢의 亂)’ 토벌에 나선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4년 동안 당나라 군무(軍務)에 종사하기도 했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황소의 난’은 중국 당(唐)나라 말기 약 10년 동안에 걸쳐 일어난 농민 대반란으로 875년 산둥성(山東省)에서 소금을 밀매하던 황소(黃巢)·왕선지(王仙芝)가 주도한 반란이었다.
이후 최치원은 28세 때인 헌강왕 10년(884)에 신라에 돌아와 왕으로부터 시독(侍讀) 겸 한림학사(翰林學士)의 직을 받았으나,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대산(大山), 부성(富城), 천령(天嶺) 등의 태수(太守)로 재임했었다.
숭복사지
이후 견훤(甄萱)이 후백제(後百濟)를 건국하고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자 진성왕 8년에 ‘시무10여조(時務十餘條 ; 時務策)’를 왕에게 건의하여 받아 들여져 아찬(阿飡)의 위를 받았다.
‘아찬(阿飡)’은 신라 때, 17관등(十七官等) 가운데 여섯째 등급(等級)의 벼슬을 이르던 말로 육두품(六頭品)이 오를 수 있었던 가장 높은 관등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육두품(六頭品)’이란 신라 때, 왕족 다음가는 신분으로 진골(眞骨)과 오두품(五頭品) 사이의 계급이었다.
숭복사지 동탑
그러나 최치원은 개혁안의 시행도 확실하지 않은데다 효공왕(孝恭王) 2년 아찬(阿飡)에서 면직되자 벼슬을 버리고 방랑의 길에 들어 산중에 은거하다 어디서인지 모르게 만년을 마쳤다.
그는 그의 문집인 ‘계원필경(桂苑筆耕)’ 외에 불교 관계의 저술도 많이 남겨 ‘사산비명(四山碑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불국사결사문(佛國寺結社文)’ 등을 남겼다. 근년에는 현재 남은 글들이 ‘최문창후전집(崔文昌侯全集)’으로 묶여 간행되었다.
숭복사지
최치원(崔致遠)이 만든 ‘시무책(時務策)’은 급히 해결해야 할 사안을 논하여 왕에게 건의하는 글이었다. 이 ‘시무책(時務策)’에는 당대의 여러 가지 문제점 및 폐단, 그것이 생기게 된 이유, 구체적인 해결방안 등이 제시되어있다.
고려시대에는 왕이 일정한 품계(品階) 이상의 관리에게 시정(施政)의 잘잘못을 논하여 올리게 하였고, 과거시험과목에도 ‘시무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시무책’으로는 최치원(崔致遠)이 진성여왕에게 올린 것과 고려시대에는 최승로(崔承老)가 성종에게 올린 것, 조선시대에는 이이(李珥)가 선조에게 올린 것 등이 있다.
숭복사지 서탑
‘시무책(時務策)’은 단순히 문제제기나 불만의 표현이 아니라 그러한 과정을 통해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과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애민애국(愛民愛國)의 한 방법이었다. 숭복사 얘기가 한참 빗나가고 말았다.
본론으로 돌아간다. 숭복사는 금당(金堂)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두 탑이 나란히 마주보고 서 있는데, 양탑 모두 2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으로 이루어진 석탑으로 동탑(東塔)은 2층 몸돌이 없어지고, 서탑(西塔)은 2층과 3층 몸돌 및 3층 지붕돌이 없어졌다.
숭복사지
여기에서 말하는 ‘몸돌’이란 ‘격지’, 즉 큰 돌에서 떼어 낸 얇은 돌조각을 떼어 내고 남은, 그 몸체가 되는 돌을 말한다.
그리고 두 탑 모두 2층 기단면(基壇面)의 한쪽에 2구씩 전체 8구의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조각되어 있다. 숭복사지 석탑의 특이한 점은 탑의 ‘지붕돌’ 네 모서리 끝에 풍경(風磬)을 달았던 흔적인 구멍들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붕돌’은 비석이나 석등, 고인돌 따위의 위쪽에 지붕처럼 만들어 얹는 돌을 말한다.
지붕돌
‘풍경(風磬)’은 절이나 누각 등의 건물에서, 처마 끝에 다는 작은 종으로 속에 추를 달고 그 밑에 쇳조각으로 붕어 모양을 만들어 달아 놓은 것인데,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려 쓸쓸하고도 맑은 소리를 낸다.
숭복사지의 동탑 및 서탑 모두 1층 몸돌의 네 면에 문(門)모양이 새겨져 있다. 일반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줄어 있어 통일신라 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숭복사지 석탑 지붕돌 모서리에 뚫려 있는 구멍(풍경을 달았던 흔적)
한편 숭복사(崇福寺)의 비석은 15편의 비석 조각이 발견되었을 뿐 비(碑)의 전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신라시대 학자 최치원(崔致遠)의 문집에서 추려낸 4개의 비문(碑文)인 ‘4산비명(四山碑銘)’ 중에 숭복사비(崇福寺碑)가 포함되어 있어 비석의 조성 배경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풍 경
비문에 따르면 885년(신라 헌강왕 11), 헌강왕(憲康王)이 현재의 숭복사지에 있던 ‘곡사(鵠寺)’라는 절을 크게 중창한 뒤 명칭을 숭복사로 개칭하고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령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헌강왕과 그 뒤를 이은 정강왕(定康王)이 연이어 승하하는 바람에 비문을 짓지 못하다가 896년(신라 진성여왕 10)에 이르러서야 비문을 완성했다고 전하고 있다. 현재 비석 조각은 국립경주박물관과 동국대학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숭복사지에 있었던 비석의 좌대인 귀부(龜趺)는 지금 경주시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의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는데, 두 마리의 거북이 조각된 쌍귀부(雙龜趺)이다. 말방리 숭복사지(崇福寺址)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와 전시하고 있다.
경주박물관의 숭복사지 귀부
길고 네모난 대석 위에 거북 두 마리가 앉아 있는데, 머리 부분이 용의 모습을 닮았다. 등에는 두 겹의 귀갑문(龜甲文)이 새겨져 있으며, 목에는 알이 굵은 목걸이를 걸었다.
거북의 등을 연결하여 넓고 편평한 비석 자리를 마련하고 그 위에 받침대를 조성하였다. 받침대 위에는 원래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지은 숭복사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현재 비석은 사라지고 파편들만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승복사지(崇福寺祉)와 최치원(崔致遠)에 대한 얘기가 너무 길어지고 있어 이쯤에서 줄이고자 한다.
말방리 출신 향우님에 따르면, 숭복사가 있던 곳을 ‘절골’이라고 불렀고, 이 ‘절골’은 숲이 짙어서 좀 으스스한 골짜기였는데, 어릴 때 이른 봄이 되면 칠기(칡뿌리)를 캐러 다녔다고 한다.
숭복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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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 출신으로는 장지호(전 대전시 총무국장), 장재길(부산 남부경찰서 경비과장), 이수홍(울산 중산한의원)씨 등이 있다.
그리고 재경 외동향우회 임원을 역임했거나 역임하고 있는 이수락, 장세정, 한태우씨 등도 모두 이 마을 출신들이다.
말방리 마을회관
말방리에는 또 필자가 외동중학교에 재학할 당시, 이 마을에 외동면의회 제2대 의원을 역임한 이도우(李渡雨) 의원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도우(李渡雨) 의원은 앞서 소개한 연안리 파일에서 필자들이 연안리 사과밭에서 ‘능굼서리’를 해 먹을 때, 항상 주모자(主謀者)로 활동했던 이상목(李相穆)군의 선친이었다.
얘기가 나왔으니 그 당시 우리나라 지방자치제도의 최초 무대였던 외동면의회 의원선거와 관련한 사항을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말방리 노인정
1952년 4월 25일 실시한 초대 외동면의회(外東面議會) 의원선거는 휴전선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전국적으로 국민회(國民會)와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 후보들이 득세한 이 선거에서 당시의 외동면(外東面)에서는 14명의 의원을 선출하였다.
당시의 지방자치법 제13조에서는 면의회(面議會) 의원의 경우 인구 5천명 미만인 때에는 10인을 정원으로 하고, 5천이상 1만미만일 때에는 5천명 을 초과하는 인구 매 2,500명에 대하여 1인을 증원할 수 있으며, 1만이상일 때에는 1만명을 초과하는 인구 매 5,000명에 대하여 1인을 증원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었다.
말방리
초대 외동면(外東面) 의원선거 당선자는 총 14인으로 후에 제6대와 제7대 면장(面長)을 역임한 방어리 출신 이종호(李鍾昊)씨와 제2공화국 당시의 민선면장(民選面長)을 역임한 권태봉(權泰奉)씨가 포함되어 있다. 초대 외동면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인사들은 다음과 같다.
이종하(李鍾河) 이장우(李璋雨) 이종호(李鍾昊)
김규식(金圭湜) 김영주(金永柱) 이하우(李夏雨)
이인화(李仁和) 권태봉(權泰奉) 남성진(南星鎭)
권태수(權泰守) 송두생(宋斗生) 우남근(禹南根)
김원식(金元植) 조강진(趙鏮振) 합계 : 14명
|
말방리
1956년 8월 8일 실시한 제2대 면의원(外東面議員) 선거에서는 경상북도 전체에서 2,649명을 선출했는데, 후보자 4,372명 중 720명이 사망하거나 사퇴하고, 무투표당선자가 무려 933명이나 되었다.
경상북도 전체 의원정수 2,649명중 집권당인 자유당(自由黨)에서 1,740명, 무소속에서 836명이 당선된 이 선거에서 외동면의회(外東面議會)는 의원정수가 초대보다 2명이 감소된 12명이었다.
1956년 2월 13일 지방자치법을 개정하여 면의회의 의원수를 인구 1만 명까지는 11인으로 하고 1만 명을 넘는 매 1만 명까지에 1인을 증원할 수 있도록 강화했기 때문이다.
말방리
당선자 중에는 후에 직선 외동면장(外東面長)을 역임한 권태봉(權泰奉)씨를 비롯한 4명이 재선되었다. 제2대 외동면의원(外東面議員) 선거에서 당선된 인사들은 다음과 같다.
성 명 |
성별 |
연령 |
직업 |
학력 |
경력 |
정당 |
권태봉(權泰奉) |
남 |
51 |
농업 |
소졸 |
면의원 |
자유당 |
김원식(金元植) |
〃 |
38 |
〃 |
〃 |
|
〃 |
우병도(禹炳道) |
〃 |
36 |
〃 |
〃 |
창고
관리인 |
〃 |
이도우(李渡雨) |
〃 |
44 |
〃 |
漢修 |
|
〃 |
임정식(任珽植) |
〃 |
41 |
〃 |
〃 |
리장 |
〃 |
최병규(崔炳奎) |
〃 |
27 |
〃 |
소졸 |
|
〃 |
김주한(金柱漢) |
〃 |
59 |
〃 |
漢修 |
자치회장 |
〃 |
김응기(金應琪) |
〃 |
37 |
〃 |
소졸 |
리장 |
〃 |
이진구(李鎭九) |
〃 |
45 |
〃 |
漢修 |
〃 |
〃 |
김규식(金圭湜) |
〃 |
35 |
〃 |
소졸 |
면의원 |
〃 |
이종하(李鍾河) |
〃 |
40 |
|
〃 |
〃 |
〃 |
송우춘(宋祐春) |
〃 |
38 |
〃 |
〃 |
면서기 |
〃 |
(연령은 당시 연령, '漢修'는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다는 뜻임. '소졸'은
소학교 졸업이라는 뜻임. 당시의 소졸은 소학교를 졸업하고, 소학교 교사
를 할 정도로 실력이 출중하였음. 이도우 의원은 말방리 출신으로 필자의
외동중학교 제7회 동기생인 이상목 군(대구광역시 거주)의 선친이시다.)
1960년 12월 19일 실시한 제3대 면의원(外東面議員) 선거는 4.19혁명으로 자유당(自由黨) 정권이 붕괴되고, 민주당 정권하에서 실시되었다. 경상북도 면의회(面議會) 의원정수 2,605명을 선출하는 이 선거에서 당선자 2,581명중 무소속후보자 2,142명이 당선되고, 집권당인 민주당(民主黨)은 424명이 당선되었다.
말방리
당시의 외동면의회(外東面議會) 의원선거에서는 제2대와 같이 12명의 의원을 선출했는데, 제5대 면장을 역임한 정영우(鄭永祐)씨가 초선으로 진출하고, 이하우(李夏雨)씨가 초대에 이어 재선되었다. 제3대 외동면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인사들은 다음과 같다.
김규철(金圭哲) 우태호(禹泰壕) 박동욱(朴東旭)
정영우(鄭永祐) 이동주(李銅周) 김영욱(金榮郁)
김종원(金淙遠) 이종필(李鍾弼) 이춘우(李春雨)
오종호(吳鍾浩) 이하우(李夏雨) 김동식(金東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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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필(李鍾弼) 의원은 외동읍 북토리 출신으로 필자와 한글
이름이 똑 같은 영지초등학교 제7회 동기생 이용우(李龍雨)의 선친
이시다. 그 이용우도 오래전에 부산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제3대 외동면의회(外東面議會)는 5·16에 의해 개원 6개월 만에 해산되고, 이후 지방자치법의 개정으로 읍·면을 지방자치단체에서 제외함으로써 읍·면에 대한 의회구성제도 역시 함께 폐지되었다.
말방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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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음악은 다른 부락의 경우와 같이 이미자(李美子)의 ‘고향의 봄’을 선곡(選曲)하여 음미하고자 한다.
고향의 봄
작사 : 이미자
작곡 : 이미자
편곡 : 박경호
흑난초 곱게 피는 고향에 봄은
강남제비 찾아와서 집을 짓겠지
내 어이 고향 두고 타향을 왔나
그리워서 불러보고 눈물을 짓는
정든 고향 찾아가자 꽃피는 고향
흑난초 눈에 어린 고향에 봄은
강남제비 돌아와서 피었으련만
천리타향 머나먼 곳 내 어이 왔던가.
오늘 밤도 잠 못 들어 밤을 지새는
정든 고향 나는 가리 꽃 피는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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