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엄마
이미경
쾅,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쿵쿵 아빠가 들어왔다. 아빠는 식탁 위에 부스럭대는 까만 비닐 봉투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네 엄마는 왜 그런다냐?"
이럴 땐 궁금하지 않아도 물어보는 게 상책이다. '왜?' 하고 말하려는데 엄마가 들어왔다. 어깨 위에 짊어진 쌀 한 포대를 마루 위에 내려놓았다.
"김치 한번 들어 주면서 오는 내내 구시렁대기는. 무겁기는 내가 더 무겁구먼."
"무거운 게 문제야? 비닐봉투가 문제지!"
그제야 아빠가 짜증내는 이유를 알았다. 아빠는 비닐봉투를 싫어한다. 특히 까만 비닐봉투를 싫어한다. 환경오염 때문이 아니라 남자가 까만 비닐봉투를 들고 다니면 모양이 안 난다고 싫어한다.
"그럼 어떡해? 김치는 한 보따리고, 쌀도 짊어져야 하는데."
엄마는 가끔씩 일하는 갈빗집에서 김치를 싸 온다. 그 김치를 제일 잘 먹는 사람은 아빠다.
"배달은 뒀다 국 끓여 먹게? 미련하기는."
"다 이유가 있지잉."
엄마는 뭐가 좋은지 아빠 타박에도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
"얼른 밥이나 줘."
아빠는 내 옆에 앉아 리모컨을 집더니 채널을 돌렸다, 야구 중계다. 아빠가 즐겨 보는 프로그램은 야구, 축구, 그리고 로또 방송이다. 로또 방송은 빼먹은 날이 거의 없다.
"뭐야, 또 지고 있는 거야?"
아빠는 화면 속 야구 선수들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양말을 벗었다. 양말을 발랑 뒤집어 야구공처럼 돌돌 말더니 화장실 앞에 획 내던졌다. 양말 벗을 때는 뭉치지도, 뒤집지도 말라고 엄마가 신신당부하지만 쇠귀에 경 읽기다. 물론 엄마 말을 들을 때가 있긴 하다. 밥 먹으라는 소리를 들을 때이다. 아빠는 국에 만 밥을 볼이 터질 듯 밀어 넣고, 엄마가 식당에서 가져온 총각김치를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여보, 찬영아!"
엄마는 내 이름을 불러 놓고 3초간 숨을 죽이더니, 마치 첩보원이 비밀 암호를 대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시험 볼 거다!"
엄마 입술이 초승달처럼 얇게 펴지더니, 양 볼이 보름달처럼 동그랗게 떠올랐다.
"무슨 시험? 엄마도 아빠처럼 공인중개사 시험 볼 거야?"
나는 엄마가 공인중개사 말고 다른 시험을 보면 좋을 것 같았다.
"공인중개사는 아무나 보나?"
"그런 대단한 분이 떨어지기는 왜 떨어지나? 준수 엄마는 칠 개월 만에 붙었는데. 나한테 공부할 시간 한번 줘 봐. 일 년이면 합격하고도 남았네요."
엄마가 가자미눈으로 아빠를 째려봤다. 엄마가 자존심 상해하는 건 이해되지만 대학 나온 아빠도 공인중개사 시험에 떨어졌는데, 고등학교밖에 안 나온 엄마가 공인중개사 되는 건 더 어려울 것 같았다.
"시험에 붙으면 난 정말 좋은데…, 근데 찬영이가 어떨지 모르겠구나."
"시험에 합격하면 좋은 거잖아."
"그거야 그렇지."
"대체 무슨 시험을 본다는 거야?"
아빠가 총각김치를 또 한 입 베어 물었다. 총각무의 삼분의 이가 입속으로 들어갔다.
"환경미화원."
엄마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뭐! 환경미화원? 당신 미쳤어?"
아빠 입에서 밥알 몇 개와 씹던 총각무가 튀어나왔다.
"소리는 왜 지르고 난리야? 찬영이도 가만있는데. 어쨌든 서류는 통과했으니까 체력 시험 볼 거야."
나는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엄마가 시험에 합격하면 좋다고는 했지만, 그게 환경미화원이면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하지만 나보다 아빠가 더 결사반대다. 아빠는 동네 창피해서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느냐며 길길이 소리를 질렀고, 내 목소리는 낄 틈이 없었다. 원래 내가 싫어하는데 다른 사람이 더 싫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 싫어하던 마음도 사라지나 보다.
기운이 쫙 빠졌다. 낙엽들을 발로 휘저으며 걷고 있는데 형광 연두색 옷을 입은 환경미화원 아저씨가 눈에 들어왔다. 아저씨는 수북이 쌓인 낙엽들과 여기저기 나뒹구는 전단지를 비로 쓸고 있었다. '엄마가 환경미화원에 합격한다면…,'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준수가 어깨를 확 밀쳤다.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야, 김찬영, 무슨 생각 하느라 부르는데도 모르냐?"
"깜짝이야, 놀랐잖아."
"죄라도 지었냐?"
준수 말대로 나쁜 짓 하다 들킨 것 같았다. 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
"너희 엄마 공인중개사 시험 정말 칠 개월 공부하고 합격했어?"
"응, 보통 일 년은 공부해야 된다고 했는데, 우리 엄만 칠 개월 만에 합격했어."
준수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사실 합격 비법이 따로 있었어."
"합격 비법?"
"응, 내 행운의 부적 때문이야. 암만 생각해도 엄마 합격은 내 부적 때문인 것 같아."
"부적이라니?"
"초강력 자석에 합격이라고 써서 엄마한테 줬거든."
"쳇, 그게 무슨 부적이야."
"부적 맞거든! 내 기를 모아 모아서 초강력 자석에 팍팍 불어넣었으니까. 그 부적이 없었으면 분명 떨어졌을 거야."
나는 준수의 말이 엉터리라고 생각하면서도 부적이라는 말이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문방구로 향했다. 초강력 자석이 아닌 막대자석을 하나 사서 손에 꼭 쥐고 집으로 뛰어왔다. 냉장고에 붙여 보았다. 확실히 초강력 자석보다 힘이 약했다. 스르륵 미끄러지다가 멈췄다. 나는 집게로 자석을 잡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자석을 달구었다. 언젠가 과학 시간에 자석에 열을 가하면 자석의 힘이 사라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십오 분쯤 지나자 자석이 시커멓게 변했다. 자석의 열을 식히고 다시 냉장고에 붙여 보았다. 툭 떨어졌다.
"됐다!"
나는 파란색 색종이로 자석을 감싸고 풀을 붙였다. 그 위에 검은색 사인펜으로 '합격'이라고 쓰고, 제발 엄마가 시험에 떨어지기를 빌었다. 드디어 불합격 부적이 완성되었다.
"찬영아, 일어나 봐. 체력 시험 연습하는데 네가 시간 좀 측정해 줘야겠다."
일요일 아침, 엄마가 나를 깨우며 말했다. 아빠는 엄마가 시험에 떨어지기만을 학수고대할 테니, 아빠와 같이 갈 순 없고 대신 나를 데려가는 것이다. 엄마는 그저께 사온 쌀 포대를 짊어지고 앞장서 갔다. 나는 주머니 속에 있는 막대자석을 만지작거렸다. 줄까 말까 하다 막대자석을 꺼내 엄마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자석이야. 합격 부적."
"합격 부적? 우리 찬영이 다 컸네. 엄마를 이렇게 이해해 주고."
엄마가 환하게 웃었다. 사실 불합격 부적인데….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하는 엄마를 보니 커다란 돌덩이가 들어앉은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졌다.
"네가 싫다고 했으면 엄마도 많이 망설였을 거야."
나는 엄마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엄마 정말 환경미화원 되고 싶어? 환경미화원이 엄마 꿈은 아니잖아. 그치?"
"글쎄…, 꿈은 아니지만 지금은 꿈보다 절실해졌어. 네 아빠는 언제 공인중개사가 될지 모르고, 식당은 언제 또 문 닫을지 모르고. 휴, 식당 전전하며 사는 것도 힘드니까. 엄마가 열심히 일해야 우리 아들 미술 학원도 보내고 그래야 만화도 더 잘 그릴 수 있지."
내 꿈은 만화가다. 작년 3학년 여름방학 때 내가 만화가가 되겠다고 하자 아빠는 엄마에게 그랬던 것처럼 결사반대했고, 엄마는 '네가 좋아하고, 하고 싶다면 엄마는 좋아.'라고 말했다. 엄마는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내 꿈을 응원해 줬는데, 엄마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내가 싫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게 맘에 걸렸다. 왠지 엄마를 배신하는 것 같았다.
"자, 이제 시작하자!"
나는 무거운 쌀 포대를 들어보았다. 허리까지 들어 올리는 데도 낑낑댔다. 10킬로그램이라고 했다.
"모래주머니 대신 이걸로 연습할 거야."
"이걸로 무슨 연습을 해?"
"모래주머니 들고 달리기."
엄마는 앞으로 달려가며 거리를 가늠하더니, 땅바닥에 선을 그었다.
"여기까지가 50미터거든. 넌 여기 서서 출발 신호하고 스톱워치 누르면 돼."
엄마는 다시 출발선으로 뛰어가 쌀 포대를 오른쪽 어깨 위에 짊어졌다. 난 휴대폰의 스톱워치를 누르며 '출발!' 하고 소리쳤다. 멀리서 엄마가 뛰어오기 시작했다. 오른손으로 쌀 포대를 단단히 잡고 이따금 왼손으로 쌀 포대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았다. 뒤뚱거리며 뛰어오는 엄마 모습은 그리스 신화에서 하늘을 어깨에 떠받치고 있는 아틀라스 같았다.
엄마가 헉헉대며 도착선까지 달려왔다. 기록은 13초.
"하, 큰일이네. 늦어도 9초 안으로 들어와야 안전한데. 어쩌냐, 찬영아?"
엄마는 일곱 번이나 뛰었다. 최고 기록은 11초였다. 땀범벅이 된 엄마는 못내 아쉬워하며 종목을 바꿔 연습했다.
이번엔 모래주머니 들고 서 있기다. 엄마는 쌀 포대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이건 좀 할 만하네. 음식 들고 나른 실력이 여기서 발휘되나 보다."
하지만 40초가 지나자 엄마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쭉 뻗은 팔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일 분이 지났을 무렵 엄마가 쌀 포대를 땅바닥에 털썩 내려놓았다.
"이거라도 만점 받아야 하는데."
여러 번 연습 끝에 엄마는 간신히 1분 30초까지 버텨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연습하는 엄마를 보니 불합격 부적을 준 게 후회됐다.
수업을 마치고 나는 다시 문방구에 들렀다. 이번엔 초강력 자석을 샀다. 노란색 색종이로 감싼 자석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소원을 빌었다.
'우리 엄마 환경미화원 시험에 꼭 합격하게 해 주세요.'
저녁에 식당 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에게 초강력 자석을 내밀었다.
"엄마, 그때 내가 줬던 자석 어디 있어? 내일 시험 볼 때 그거 말고 이거 갖고 가."
"뭐하러 자석을 또 샀어? 이러다 일등으로 합격하겠네. 호호호!"
"어쨌든 이거 가져가. 이게 더 효과 만점이야."
엄마는 진짜 합격 부적을 받으며 빙긋 웃었다. 가짜 합격 부적이 무사히 내 손으로 들어오자 무겁게 짓누르던 돌덩어리가 사라진 듯 가벼웠다.
수업 시간 내내 선생님 이야기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종례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집으로 향했다. 현관에 엄마 신발이 놓여 있었다. 신발을 벗자마자 소리쳤다.
"엄마! 어떻게 됐어? 합격했어?"
거실에 누워 있던 엄마가 부스스 일어나며 말했다.
"아직 몰라. 이틀 후에 발표야."
엄마 무릎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무릎은 왜 그래?"
"모래주머니 들고 뛰다가 넘어졌어. 넘어지지만 않았으면 9초 안에 들어올 수 있었는데, 너무 아까워."
"잘 넘어졌지. 안 그랬으면…."
옆에서 아빠가 끼어들었다. 나는 얼른 아빠 말을 자르고 엄마에게 말했다.
"다른 건?"
"연습할 때보다 기록이 좋았어."
엄마의 표정이 밝아졌다. 다행이다. 그래도 합격할 희망은 있는 거니까.
이상한 일이었다. 합격 발표를 기다리는 이틀 내내 엄마보다 내가 더 안달이 났다. 이젠 합격만 한다면 엄마보다 내가 더 좋아할 것 같았다.
합격 발표 날, 텔레비전 앞에서 아빠와 라면을 먹고 있는데 식당 일을 마친 엄마가 들어왔다.
"엄마,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됐게?"
엄마가 빙그레 웃는다.
"합격했구나!"
"정말이야?"
아빠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주 떨어져 달라고 고사를 지냈구먼. 그래 소원대로 떨어졌다. 내가 떨어진 이유는 다 당신 때문이야. 그것만 알라고. 일생에 도움이 안 돼."
"엄마, 정말 떨어졌어?"
이번엔 내가 믿을 수 없었다.
"그래, 넘어지지만 않았어도 붙었을 텐데…."
"잘됐네. 그게 다 그런 데 시험 보지 말라는 신의 뜻이야."
아빠는 신의 뜻이 아니라 아빠의 뜻대로 이루어져서 기쁜 표정이었다.
나는 엄마가 아빠에게 '소원대로 떨어졌다.'고 말한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처음엔 아빠보다 내가 더 엄마가 시험에 떨어지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중엔 진짜 합격하기를 빌었는데…. 이랬다저랬다 하니까 소원을 들어주는 누군가도 헷갈렸나 보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화장실에 가려고 방에서 나왔다. 엄마가 텔레비전을 켜 놓은 채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텔레비전을 끄고 화장실로 걸어갔다. 아빠가 벗은 양말이 동그랗게 말려 화장실 앞에 놓여 있었다. 내 양말도 뒤집어진 채 한 짝은 화장실 앞에, 한 짝은 화장실 안에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돌돌 말린 아빠 양말과 내 양말을 뒤집어 바로 폈다. 그리고 세탁 바구니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당선소감]
"아무도 자신의 본래 모습을 좋아해 주지 않는데 날마다 밖에 나가 꿋꿋하게 자신을 살아간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이매지너리 프렌드>에서 부도가 말했다.
사랑받기를 기대하지 않고 사랑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좋아하지만 그 대상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기꺼이 나 또한 좋아하지 않기로 했다. 소심한 자기 방어다.
동화를 쓰면서 소심한 자기 방어를 무장 해제하자고, 열렬히 짝사랑하자고, 버림받더라도 사랑한 것에 후회 없노라 말할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글 쓰는 내내 그 대상이 나를 좋아할까 하는 회의감에 몇 번씩 마음이 어지러웠다. '나를 좋아해요?' '그럼 나 글 써도 되는 거예요?' 맘 놓고 즐기지 못함을 한심해하며 자기 비하를 했다.
한편으로는 '다이아몬드가 될 원석인데 사람들이 아직 눈치 채지 못한 것뿐이야'라며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했다.
번민에 휩싸이던 중 반응을 보여준 내 짝사랑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하지만 그건 어쩌면 응답이 아니라 질문일지 모른다. 내 대답을 듣기 위한 또 다른 질문.
그렇다면 이번에는 나를 좋아해 주지 않아도 꿋꿋하게 자신을 살아가는 맥스처럼 용감한 사람, 멋진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물론 자신을 방어하고 비하하고 연민하는 짓을 그만두진 못할 거다. 하지만 귀찮을 정도로 '나 괜찮아?' 물어보는 횟수는 줄어들 테고 시간 낭비도 덜 할 테니 그만큼 내 마음에 꼭 드는 동화를 쓸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품어 본다.
동화세상의 선생님들, 이륙기의 언니, 동생들, 내가 땅 사더라도 배 아프지 않아 할 친구들에게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 전한다.
억척스럽게 노력형이었던 엄마를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좋았을 텐데, 흉내 내기도 힘드네요. 우리 엄마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애고 재주 부리지 말고, 엄벙덩벙 넘어가려 하지 말고, 글을 쓰려면 좀 제대로 써 봐!
1969년 서울 출생
한성대 사학과 졸업
[심사평]서민 가정 오밀조밀 재미있는 일상…겉과 속 알찬 이야기
많은 응모작 가운데 끝까지 심사자의 손에 남은 것은 여섯 편이었다. 모두 나름의 장점을 갖춘 작품들이었기에 그 중 한 편을 고르기는 쉽지 않았다. '효주네 옆집에는 누가 살까요?'(권정선)는 기발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쓴 재미있는 글인데 옆집 식구 정체를 알아내는 과정이 너무 밋밋해서 맥이 빠진 것이 흠이었다. '사라진 슈퍼맨'(박정미)은 능숙한 이야기 솜씨와 세상을 보는 진지한 시선이 미더웠으나 사건 전개가 다소 상투에 흐른 점이 거슬렸다. '엄마처럼 안 해'(김우연)는 갈등 사태를 극복해 가는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돋보였지만 갈등을 선악 구도로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 생동감을 떨어뜨렸다. '등에서 나무가 자라는 아이'(이혜정)는 주인공의 힘겨운 삶에 대한 작가의 따스한 시선이 공감을 자아냈으나 문장이 군데군데 거치적거리는 것이 약점이 되었다. '거짓말 일기'(최빛나)는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무게를 겨루며 결정을 망설이게 한 작품이다. 주인공 아이 마음이 어른 세계와 부딪치며 갈등하는 과정이 담담하면서도 치밀한 서술에 실려 완성도를 높였고, 끝을 다 보여주지 않는 열린 결말도 참신해 보였다. 하지만 결말에 이르는 설정에 작위의 느낌이 강하여 끝내 심사자의 손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흠결이 가장 적은 이미경 씨의 '달려라, 엄마'가 당선작으로 뽑혔다. 이 작품은 팍팍한 삶을 어렵사리 꾸려나가는 서민 가정의 오밀조밀한 일상을 주인공인 아이 눈으로 재미있게 그린, 겉과 속이 알찬 수작이다. 소재는 대단하달 것이 없고 주제 또한 아주 새롭거나 깊이 있다 하기 어렵지만, 읽는 재미와 아울러 다 읽은 뒤에 남는 울림과 여운은 만만찮다.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소재를 짐짓 유쾌하게 이끌어가면서도 지나치게 가벼워지지 않게 균형을 잡아 나간 입담도 돋보인다. 다만 화자 격인 아이 눈길에 좀 더 충실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소재의 특성상 아이보다 엄마 쪽에 시선이 기우는 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아이 심리 묘사에 많은 공을 들였더라면 더 힘 있는 글이 되지 않았을까.
심사위원 : 서정오(동화작가)
[2015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오미순
유리 상자
오늘은 어느 편의점에 갈까
아무래도 안경 아저씨가 있는 곳으로 가야겠어요
아저씨는 휴대폰으로 게임하느라 손님을 잘 안 보거든요
이제 내 선물을 고를 시간이에요
배가 고파요. 과자를 잔뜩 먹었는데도 배가 고파요. 밥솥은 비어 있고 냉장고엔 시커먼 비닐만 가득해요. 아빠가 안주로 먹다 싸온 것들이에요. 아빠는 치킨이나 갈비는 안 먹어요. 순 닭발, 곱창, 번데기 이런 것만 먹어요. 난 아무리 배고파도 아빠처럼 못 먹겠어요. 닭발은 빨갛고 징그러워요. 곱창은 지독한 냄새가 나고, 번데기는 벌레잖아요. 난 벌레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요. 우리 집은 사람이 아니라 벌레가 주인 같아요. 벌레들은 마음껏 돌아다니는데 나는 벌레가 무서워서 도망 다니잖아요.
서랍 속에 숨겨 두었던 간식도 다 떨어졌어요. 바닥에는 과자 부스러기들이 굴러다녀요. 내가 개미라면 부스러기만 발견해도 신났을 거예요. 걔네는 몸이 엄청 작잖아요. 나도 새털처럼 가벼운데 왜 자꾸 배가 고플까요?
나는 빨래 바구니에 쌓인 아빠 옷을 살펴요. 땀 냄새랑 발 냄새가 섞여서 우웩, 배속이 더 이상해요. 그래도 오늘은 운이 좋아요. 바지 주머니에 구겨진 천원짜리 한 장이 들어 있어요. 요즘 아빠 주머니엔 회색 먼지뭉치만 가득했거든요.
이제 나갈 준비를 해요. 난 아빠가 시장에서 사온 검은색 점퍼를 입어요. 학교에 갈 땐 아무리 추워도 안 입는 옷이에요. 무릎까지 오는 점퍼를 내가 입으면 꼭 김밥이 걸어 다니는 것 같아요. 아빠는 멋진 걸 고를 줄 몰라요. 그러니까 내 이름도 영실이라고 지었죠. 우리 반 애들 이름은 세빈이, 현지, 다희, 다들 예쁜데 나만 촌스럽게 영실이에요. 이름 때문에 새 학년으로 올라갈 때마다 창피해요. 내가 조그만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하면 아이들이 킥킥 웃어요. 난 어른이 되면 이름부터 바꿀 거예요. 그때가 오면 지금처럼 편의점에 뛰어갈 일도 없겠죠.
오늘은 어느 편의점에 갈까. 난 삼거리에 서서 고민해요. 같은 곳을 자주 가면 편의점 주인이 이상하게 쳐다봐요. 한밤중에 나 혼자 편의점에 가니까요. 절대로 나를 의심해서가 아니에요. 흰 종이 위에 빨간 펜으로 쓰인 경고는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예요. 난 도둑이 아니니까요. 도둑은 남의 물건을 훔치는 사람이지만 난 선물받는 거예요.
그래요. 이건 선물이에요. 겨울이 되면 사람들이 큰 소리로 이야기해요. 불우이웃을 돕자고요. 그게 나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날 못 찾아요. 내겐 아빠가 있으니까요. 그깟 아빠, 없어도 괜찮아요. 나는 성진이네 도시락이 더 갖고 싶어요. 성진이는 무릎이 아파서 절뚝거리는 할머니랑 둘이 살아요. 불쌍하다고 동사무소에서 반찬이 네 개나 들어있는 도시락을 배달해줘요. 모르는 사람들이 햄 세트랑 과자 세트도 선물해요. 난 아빠가 있다고 아무 선물도 못 받아요. 성진이네 할머니는 김치 부침개도 만들고, 콩나물국도 맛있게 끓인다고요. 우리 아빠는 애들은 못 먹는 술안주만 가져온단 말이에요. 우리 집에 와 보면 다 알 텐데, 정말 불공평해요.
으으, 차가운 바람이 꼭 내 살을 깨무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안경 아저씨가 있는 곳으로 가야겠어요. 아저씨는 휴대폰으로 게임하느라 손님을 잘 안 보거든요.
캄캄한 밤거리에 유리상자가 환하게 빛나요. 나는 돈 벌면 편의점 주인이 되고 싶어요. 투명한 유리 안에 근사한 게 잔뜩 들어 있잖아요. 두꺼운 문을 밀면 금색 종이 딸랑 울려요. 안경 아저씨는 잠깐 나를 쳐다보고 다시 고개를 숙여요. 게임은 나쁘다지만 난 게임하는 안경 아저씨가 좋아요.
컵라면 하나를 집어 들고서 편의점을 한 바퀴 돌아요. 따끈따끈한 어묵이랑 고소한 튀김, 윤기가 흐르는 닭다리와 큼지막한 피자가 맛있는 냄새를 풍겨요. 먹고 싶어서 저절로 손이 가지만 꾹 참아야 해요.
이제 내 선물을 고를 시간이에요. 부스럭거리지 않는 작은 선물만 골라야 해요. 안경 아저씨를 한 번 슬쩍 보고서, 나는 점퍼 속으로 선물을 집어넣어요. 그다음 계산대에 조심히 컵라면을 올려놔요. 아무것도 사지 않으면 어른들은 더 이상한 눈으로 보거든요.
"천오백원."
안경 아저씨가 말해요. 휴대폰에서 삐융삐융 게임 소리가 나요. 아저씨가 손가락으로 휴대폰을 누르면 번쩍거리는 다이아몬드가 쏟아져요. 나는 가짜 다이아몬드가 왜 좋은지 모르겠어요. 안경 아저씨가 하품을 해요. 어른들은 모두 아빠처럼 피곤한 얼굴이에요.
사실 떨리지 않는 건 아니에요. 꼭 누가 내 어깨를 잡아당길 것 같아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요. 바람이 세차게 불어 뺨이 얼어붙어요. 나는 따뜻하고 포근한 봄바람이 그리워요. 집으로 가는 마지막 골목길에 도착하면 점퍼 안에서 선물을 꺼내요. 검은 점퍼는 두툼한 솜 때문에 선물을 숨겨도 티가 안 나요. 오늘은 참치 한 개, 손가락 소시지 두 개예요. 돈 주고 사려면 오천원은 있어야 할 거예요.
"안경 아저씨, 잘 먹겠습니다."
나는 먹기 전에 꼭 인사를 해요. 불쌍한 아이를 도운 거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요. 처음엔 안 그랬는데 자꾸 안경 아저씨께 할 말이 늘어요.
"아저씨! 아저씨는 오천원이 없어도 살 수 있죠?"
난 손가락 소시지를 먹으며 말해요. 라면부터 먹으면 배가 꾸르륵거려 소시지부터 먹어야 해요. 어느새 고양이 제비가 와서 날 보고 있어요. 제비는 목만 하얗고 몸은 까매서 내가 지어 준 이름이에요. 난 제비가 집 안에 들어올 수 있게 창문을 열어줘요.
"내 밥이야. 너는 챙겨주는 사람 많잖아."
추울까 봐 문을 열어줬더니 제비가 내 소시지를 탐내요. 난 제비가 부러워요. 까미야 부르는 언니는 통조림 캔을 가져오고, 냥냥아 부르는 언니는 고양이가 먹는 우유도 사와요. 제비는 그럴 때마다 갸르릉 소리내며 예쁜 짓을 해요. 내가 제비처럼 예뻤으면 달랐을까요? 엄마는 안 떠나고, 아빠도 밖에서 술 마시는 대신 나랑 저녁밥을 먹었을까요? 하지만 내 얼굴은 엄마와 아빠가 만들어준 것이잖아요. 쌍꺼풀이 없는 불룩한 눈에 낮은 코와 조그마한 입술. 아무리 봐도 내 얼굴은 엄마랑 아빠를 섞어 놓은 것이에요. 모르는 사람이 봐도 판박이라 그런다고요. 손등에 붙이면 손톱으로 긁을 때까지 안 떨어지는 판박이요.
"야, 빵실아, 너 아빠랑 똑같이 생겼더라!"
나를 놀려대던 우리 반 강호준이 떠올라요. 이름이 영실이라고 빵실이라니, 정말 유치한 애예요. 오늘 아침, 아빠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강호준을 만났어요. 아마 그 애는 '번개 배달'이라고 쓰인 아빠 조끼를 봤겠지요.
"교문까지 가면 안 돼. 건널목에서 내려줘."
내가 몇 번이나 말해도 아빠는 곧장 가버려요. 뒤차가 빵빵대서 내려줄 수 없대요. 내가 늦잠을 자는 건 아빠 탓인데도요. 술 취한 아빠가 대문을 꽝꽝 발로 찰까 봐 난 새벽까지 깨어 있어요. 터벅터벅 걸어오는 아빠 발소리가 들릴 때까지 나는 잠이 오지 않아요.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삼 분을 기다려야 해요. 너무 빠르면 면이 딱딱하고, 오래 두면 지렁이처럼 불어요. 나는 익숙하게 왼쪽 손목을 들어요. 그런데 손목에 딱 붙어 있어야 할 시계가 없어요. 분명 밖으로 나갈 때 차고 있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졌어요. 삼거리에 서 있을 때 빠진 걸까요? 참치 캔 선물을 받을 때 풀린 걸까요? 잠금 쇠가 덜렁거리는 시계는 자꾸 손목에서 떨어져요. 아빠가 고쳐주지 않을 게 뻔하니까, 난 투명 테이프를 돌돌 말아놨어요. 그다음부터 손목에 철썩 붙어 있었는데 하필이면 오늘 풀렸나 봐요. 점퍼 주머니에도 없고 방바닥에도 없어요. 강호준은 고물 시계라고 놀리지만 나한텐 제일 중요한 물건이에요. 엄마가 사준 거거든요. 작은 바늘이 8에, 긴 바늘이 12에 가 있으면 엄마가 온댔어요. 그때까지는 엄마를 기다리지 말고 마음껏 놀라고 했어요. 내가 학교도 들어가기 전, 아주 옛날 일이에요. 엄마가 내 곁에 있을 때니까요.
바람 때문에 귀에서 울음소리가 나요. 맨발에 슬리퍼만 신었지만 추운지 모르겠어요. 시계는 골목길에도 없어요. 삼거리에도 내 시계는 안 보여요. 낡은 거라 아무도 안 주워갈 텐데요. 내 멋대로 선물을 받아서 벌을 받은 걸까요. 편의점 사장님들이 모여 날 벌주자고 했을까요. 갑자기 안경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던 게 생각나요. 혹시 안경 아저씨가 내 시계를 가져갔을까요?
나는 두 눈을 비볐어요. 아니에요. 아빠가 아니라 아빠랑 똑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일 거예요. 아빠가 안경 아저씨랑 얘기할 리 없잖아요. 그런데 조끼에 그려진 번개가 찢어진 걸 보면 아빠가 틀림없어요. 까치집 머리를 벅벅 긁는 것도 아빠 버릇이고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왜 아빠가 안경 아저씨와 내 얘길 하는 걸까요?
"애한테 아빠 퀵서비스 하시냐고 물어보기도 뭣해서요."
안경 아저씨가 아빠를 '아저씨'라고 불러요. 나는 편의점 간판 뒤에 숨어 말소리를 엿들어요.
"거, 미안하게 됐어요. 먹고사느라 애를 신경 못 썼네. 우리 애가 가져간 게 모두 얼마지?"
아빠가 해진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지갑을 꺼내요. 보나마나 지갑은 텅 비었을 텐데요. 술도 안 마셨는데 아빠 얼굴이 붉어져요.
"아저씨, 돈은 얼마 안 돼요. 애 손버릇 고치시라고 연락드린 거예요. 보통은 집에 전화하기 귀찮아서 바로 경찰에 얘기하거든요."
안경 아저씨는 정말 사장님처럼 말해요. 아빤 자꾸 안경 아저씨에게 사과하고요. 찬 바람이 불 때마다 아빠의 조끼가 펄럭거려요. 나는 찢어진 번개무늬를 바라보다 질끈 눈을 감아요. 겨울바람 때문에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아요.
배가 고파요. 남은 손가락 소시지를 먹었는데도 배가 고파요. 상 위에서 불고 있을 내 컵라면이 생각나요. 그렇지만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 깜깜한 놀이터에는 애들이 한 명도 없어요. 모두 따뜻한 방에서 자고 있을 거예요. 둥근 돌로 둘러싸인 모래밭에는 깨진 장난감 삽이 묻혀있어요. 나는 빨갛게 얼어붙은 손으로 모래를 파요.
어른들에게 혼나는 건 무섭지 않아요. 거지 빵실이나, 도둑 빵실이나 그게 그거예요. 하지만 착한 척하는 아빠 얼굴은 보기 싫어요. 안경 아저씨는 아빠가 좋은 아빠인 줄 알았을 거예요. 만날 술 마시고 들어와 소리 지르면서 아빤 날 걱정하는 척했어요. 아빠가 미워요. 나는 삽으로 뜬 모래들을 바람에 흩날려 보내요. 달빛에 반짝이는 모래가 모두 다이아몬드면 좋겠어요. 그럼 넓은 아파트로 이사해서 혼자 살 거예요. 아빠는 아주 가끔만 만나줄 거예요. 벌레가 주인인 집에 혼자 살면 아빠도 알겠죠. 아빠가 없는 동안, 내가 얼마나 쓸쓸한지요.
[당선 소감] "낱장부터 찬찬히… 진짜 책 만들겠다"
오미순 "이모! 1단계 통과한 거야?" 저와 두 손을 마주 잡은 일곱 살 조카가 물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엉터리 왈츠를 추거나 음악에 맞춰 씰룩씰룩 몸을 흔들었습니다. 제가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우리를 보고 샘이 난 다섯 살 조카가 끼어들었습니다. 셋이 손을 잡기만 해도 금세 웃음이 새어 나왔습니다. 아이들은 제 안에 없던 것도 끄집어내는 재주를 가졌습니다.
아버지 말대로 '몽케기'만 하다 어른이 되었습니다. 제주도와 서울은 바람의 결이 달라 더 오래 아팠고, 머뭇거렸습니다. 떠돌이인 저를 덤으로 데리고 다녀 준 언니에게 정말 고맙습니다. 마음껏 저에게 사랑을 고백해주는 조카 승혁이와 준혁이, 아이들의 목소리를 쫓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제게 누름돌이 되어주신 J선생님. 다시 선생님을 부를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참 다행입니다. 그리고 나의 제로, 혹여나 제가 작가라 불릴 수 있다면, 걸음을 헤아리듯 당신이 나를 이끌어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등을 맞대고 서로의 글을 보듬어 줄 수 있기를!
부족한 작품을 선택해주신 최윤정 선생님, 선생님 덕분에 쥐며느리도 등을 펼 짬이 생겼습니다. 낱장부터 찬찬히 시작하여 책의 모양을 갖춰나가겠습니다.
▲1984년 제주 출생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심사평] 독자 마음 파고드는… 생생한 표현 인상적
최윤정·아동문학평론가 올해 응모작은 총 270편으로 작년보다 훨씬 많았다. 응모 편수는 매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지만 일정 수준에 도달한 작품의 수는 오히려 적었다. 요즘에는 해피엔딩의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동화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 된 모양이다.
올해에도 학교 폭력, 아동 학대뿐만 아니라 영아 유기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사회문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 많았고 밝은 작품은 드물었다. 올해는 특이하게 귀신이나 유령 이야기, 그리고 죽은 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야기가 더러 있었다. 그러나 어린이와 연관해서 죽음이라는 사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 보이는 작품은 없었다.
심사자는, 무서운 마음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남자아이의 심리를 무난하게 그려낸 '화장실 귀신', 사랑과 우정 그리고 학교 폭력을 배경으로 소소한 일상 속에서 친구와 다투고 화해하기까지의 과정을 3학년 여자아이의 언어로 잘 그려낸 '5분만', 그리고 주민센터에서 배급품을 받는 조손(祖孫)가정의 친구도, 동네 언니들이 통조림이나 우유를 챙겨주는 길고양이조차도 부러운 자칭 '불우이웃'인 아이 목소리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유리상자', 이렇게 세 편을 최종 후보작으로 놓고 당선작을 가렸다.
앞의 두 편은 이야기가 큰 결점 없이 평이하게 만들어졌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참신함이나 문학적인 향기가 없었다. 그에 비해 '유리상자'는 문제를 포착하는 작가의 시선이 남다르고 배고픈 어린 화자(話者)의 모습이 읽는 이의 마음을 파고드는 강점이 있다. 거듭 고민 끝에 '유리상자'를 당선작으로 결정한다. 작가의 정진을 빈다.
최윤정·아동문학평론가
[2015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박상기
물 좀 줘
아, 목마르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다. 무더운 칠월 날씨가 더욱 힘을 뺀다. 물을 마셔본 지가 언제쯤인지 모르겠다.
뻣뻣한 목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무 명 정도 되는 아이들이 나와 같은 교실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내게 눈길을 보내주는 친구가 없었다. 앞의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몰래 떠드는 아이들이나 귀신같이 잡아낼 뿐, 내겐 관심조차 없었다. 바짝 말라 들어가는 내 목이 쩍쩍 신음을 냈다.
쉬는 시간이 되자,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남자애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장난을 주고받는 사이,
“어머, 진짜야?”
“그럼. 너만 알고 있어야 해.”
여자애들 두 명이 내 앞에서 속닥속닥 비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 내가 다 듣고 있다는 걸 모르나 보다. 귀를 기울여보니 ‘건수’의 이름이 들렸다. 옆 반 여학생 누군가가 건수를 좋아한다는 얘기였다. 건수는 내가 유일하게 이름을 알고 있는 아이다. 내게도 붙은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건수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남자아이들 여러 명이 건수의 자리 주변에 둘러 서 있었다. 건수가 뭐라고 한 마디 하면 아이들이 자지러지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그럴수록 건수는 여유롭게 앉아 분위기를 이끌었다. 아이들에게 인기도 많고 몰래 좋아해 주는 여자애도 있는 건수. 내가 본 아이 중에 건수는 가장 화려했다.
그런데 건수는 한 번도 날 쳐다봐주지 않았다. 난 매일 같이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데……. 지금껏 눈을 마주쳐본 적도 없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건수는 알기나 하는 걸까? 멀리서 건수가 웃고 떠들 때마다 조바심이 났다. 그럴수록 내 목은 더욱 바짝 말라갔다. 참을 수 없는 갈증에 점점 지쳐간다.
하루가 지나갔다. 이젠 힘이 없다. 유리창을 넘은 햇볕이 나를 쨍쨍 옭아맸다. 점심 시간이라 아이들이 모두 운동장으로 나가고 없었다. 이젠 창가에서 친구들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게 버릇이 되었다. 여자애들은 늑목 주변의 그늘에 옹기종기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건수가 공을 몰고 가니 아이들이 송사리 떼처럼 달려들었다. 건수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와 슛을 하자, 공이 그물망에 빨려 들어갔다.
와!
아이들 함성이 여기까지 들렸다. 자랑스럽게 팔을 휘저으며 뛰는 건수 뒤로 친구들이 웃으며 따라붙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드르륵―.
교실 뒷문이 열리며 여학생 하나가 들어왔다. 무척 말랐고 머리카락도 힘없이 처져 기운 없어 보이는 여자애였다. 누구지? 우리 반이었던가? 기억에 없으니 이름도 모르겠다. 여자애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한 번 말을 걸고 싶어졌다.
‘저기……, 물 좀 주지 않을래?’
하지만 이 말이 전해질 수는 없었다. 나는 이 교실에서 누군가 다가오길 기다려야만 하는 처지니까. 내 기분도 모른 채, 그 여자애는 멀찍이 떨어진 앞쪽 의자에 앉더니 이내 힘없이 책상에 엎드렸다.
교실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지금 이곳엔 나와 이름 모를 여자아이뿐이었다. 꼼짝 않고 엎드린 모습을 보니 왠지 나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점심 시간이 끝나자 여학생들이 교실에 하나둘씩 들어왔다. 아무도 엎드려 있는 여자아이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이윽고 떠들썩한 소리와 함께 남학생들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야호, 오늘도 세 골 넣었다.”
건수가 으스대며 땀을 닦고는 물컵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물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소리를 들으니 목이 바짝 타들어갔다. 누구도 내게 신경을 써주지 않는다. 저쪽에 축 처져 있는 저 여자애도 내 처지와 같았다. 우리의 그런 기분도 모른 채, 교실의 시간은 그저 흘러가고 있었다.
또다시 하루가 지나갔다. 이제 내 몸도 축 처지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오랜만에 출석을 불러준 덕분에 어제 그 여자애 이름이 ‘단비’라는 걸 알았다. 내가 이 교실에서 두 번째로 기억하게 된 이름이다. 단비는 수업 시간에 발표한다거나 쉬는 시간에 아이들과 말을 섞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온종일 나처럼 꼼짝 않고 있었다.
창 밖 날씨가 온종일 꾸물거렸다. 한바탕 비라도 내릴 기세다. 지난번처럼 이 비도 내겐 그림의 떡이겠지. 이제 내 목은 완전히 말라버린 지 오래다. 종례 시간이 되면 선생님은 그날 생활 태도가 제일 좋았던 학생 한 명을 뽑아 스티커를 준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의 우수상은…… 박건수!”
짝짝짝.
칠판 왼쪽에 건수의 스티커가 드디어 열 개째 채워졌다. 선생님은 약속한 대로 건수에게 선물을 주었다. 아이들은 부러움이 섞인 축하의 말을 건넸다.
“와, 건수가 처음으로 받네.”
건수가 받은 선물은 하늘색으로 예쁘게 포장된 문구세트였다. 건수가 싱글벙글 다가오며 내 옆의 사물함에 선물을 넣었다. 그렇게 나를 지나치면서도 건수는 날 바라봐주지 않았다.
“차렷, 열중쉬어, 차렷, 선생님께 경례!”
“차 조심, 길 조심, 사람 조심. 친구들 안녕!”
아이들은 경례가 끝나자마자 줄지어 교실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단비만 느릿느릿 책상 속 물건을 정리하느라 제자리에 있었다.
어느덧 교실에는 단비와 나, 그리고 선생님만 남았다. 우리는 서로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단비의 책가방 채워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 안녕히 계세요.”
단비가 교실을 나서며 축 처진 목소리로 선생님에게 인사했다. 선생님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답했다.
“주말 잘 보내렴.”
잠깐, 주말? 이제 끔찍한 주말이라고? 미처 생각 못 했다. 내 마음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선생님, 여기 좀 보세요!’
내 목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선생님은 이쪽을 아예 쳐다볼 기미도 없었다. 조금 뒤에 숫제 밖으로 나가버렸다. 교실에 나 혼자 남았다. 시계 소리만 “척, 척.”하고 들려왔다. 이제는 이 고요함이 두렵다. 앞으로 사흘 동안 버틸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후두둑―.
잠시 후, 창문 밖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운동장이 금세 물기를 먹어 촉촉해졌다. 교정 옆에 드리운 나무와 풀들이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저쪽은 저렇게 맛있게 물을 마시고 있는데 나는 창문 하나를 두고 구경만 해야 하다니! 너무나도 서러웠다. 그런데도 눈물이 나오질 않았다. 이미 눈물조차도 말라버린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슬퍼하던 바로 그때, 교실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건수였다! 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나를 구해주려고 온 건가?
‘나 좀 창 밖으로 내보내 줘!’
하지만 건수는 날 쳐다보지 않았다. 바로 옆의 사물함에서 상품으로 받은 문구세트를 꺼내 들며 웃을 뿐이었다.
“휴, 깜빡 잊을 뻔했네.”
창 밖엔 아까운 비가 흐르고 있었다. 건수마저 날 외면하면 이제 정말로 끝나버릴지 모른다.
‘건수야, 저 비를 흠뻑 맞도록 해줘! 제발…… 내 담당은 바로 너잖아.’
쾅!
내 바람과 달리 건수가 매몰차게 사물함을 닫고는 쌩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야속한 빗소리만 창문에 부딪히며 내 마음을 두들겼다.
흐릿한 창문 너머로 건수가 우산을 쓰며 달려가고 있었다. 화려한 무지갯빛 우산이었다. 운동장 저편엔 비를 피해 나무 밑에 들어간 단비가 보였다. 건수가 그런 단비 앞을 바쁘게 지나갔다. 우산이 없는 단비는 건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비에 젖은 단비가 오늘따라 더욱 축 처져 보였다.
어지럽고 눈앞이 흐릿하다. 기절했다 깨는 걸 몇 번 반복했더니 월요일이 되었다. 내 몸은 이제 완전히 말라버려서 내 것 같지가 않았다. 딱딱한 흙이 나를 겨우 지탱해줄 뿐이었다. 이젠 축 처진 팔을 들어 올릴 힘조차도 없다. 창틀 너머로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옆 반과 발야구를 하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지켜보는 일뿐이었다.
단비가 굴러오는 공을 어색한 몸짓으로 찼다. 빗맞은 공이 아이들 사이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단비가 재빨리 뛰어 1루에 먼저 도착하자 환호성이 들렸다. 열없는 단비의 얼굴에 처음 보는 미소가 번졌다.
“역전, 역전!”
다음에 건수가 들어서자, 아이들의 응원 소리가 더욱 커졌다. 건수가 굴러온 공을 “뻥!” 소리 나도록 힘껏 찼다.
“단비야, 뛰어!”
단비는 아이들의 외침만 듣고 달리기 시작했다. 큰 소리와 함께 공이 위로 높게 떴다.
“아아―!”
건수가 찬 공이 상대 팀 아이의 품 속에 빨려 들어가듯이 잡혔다. 그 바람에 무작정 뛰었던 단비도 같이 아웃되었다. 그대로 발야구 경기가 끝나버렸다. 아이들은 원망 섞인 눈초리로 단비를 쏘아보았다. 단비의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잠시 후, 아이들이 가까운 수돗가에서 단비를 둘러싼 모습이 보였다. 건수가 제일 먼저 단비에게 소리쳤다.
“너 때문에 졌잖아, 이 바보야!”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저마다 단비에게 한 마디씩 던졌다. 대개가 듣기 불편한 말이었다. 내 기억으로 아이들이 단비에게 처음 말을 거는 풍경이었다. 결국 단비는 수돗가에서 물을 마시지도 못하고 교실로 도망치듯 뛰어왔다.
“흐흑…… 흑…….”
단비는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책상에 엎드려 흐느꼈다. 내가 단비를 처음 만났을 때 모습 그대로였다. 어쩌면 처음 본 그 날도 지금처럼 울고 있었는지 모른다.
드르륵―.
선생님이 들어왔다. 방금까지 흐느끼던 단비가 소리를 뚝 그쳤다. 이상하게도 우리 셋만 있으면 고요해진다. 시계 소리가 “척, 척.”하고 들려오기 시작했다.
“단비야, 운동장에 애들 좀 빨리 들어오라고 해줄래?”
정적을 깨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단비가 흠칫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얼빠진 얼굴로 내 쪽의 창가에 다가왔다. 단비는 창 밖의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비난을 퍼붓던 아이들에게 말을 걸기가 두려운 표정이었다. 선생님이 짜증을 섞어 단비를 재촉했다.
“쉬는 시간 끝났는데 다들 뭐 하고 있는 거야? 빨리 오라고 해.”
선생님은 오로지 수돗가에 모여 있는 아이들만 신경 쓰는 눈치였다. 여기 얼굴에 눈물이 흥건한 단비와 말라 죽어가고 있는 내 모습은 안 보이나 보다.
그때, 갑자기 정신이 흐릿해졌다. 나는 마지막이란 생각에 온몸으로 절규했다.
‘제발…… 물 좀 줘!’
그 순간 단비가 창문을 열려고 손을 뻗으려다 팔꿈치가 내 몸에 부딪혔다.
툭!
아찔한 기분과 함께 내 몸이 기울더니 난간 위에 통째로 쓰러졌다. 나를 지탱하던 흙이 다 쏟아지면 이제 정말로 끝장이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모로 쓰러진 내 밑으로 흙이 한 줌도 쏟아지지 않은 것이다. 깜짝 놀란 단비가 황급히 나를 세웠다. 그리고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 밑의 흙을 꾹꾹 눌러보았다. 돌처럼 딱딱한 감촉을 느낀 단비가 안타까움이 섞인 헛숨을 내뱉었다. 단비는 곧바로 싱크대에서 물 한 컵을 떠 와 내 머리에 흠뻑 뿌려주었다.
꿀꺽꿀꺽―.
이대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물을 들이켜니 살 것 같았다. 내 몸에 물이 채워짐과 동시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동안 겪었던 서러움 때문이었다. 내게 물을 줘야 할 사람은 건수였다. 난 매일같이 건수를 바라봤지만 외면당했다. 그래서 지금 물을 먹는 게 기쁘지만은 않다. 건수가 다가오기만을 처음부터 다시 기다려야 하니까.
잠시 후, 선생님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뭐 해? 애들 부르라고 했잖아. 왜 자꾸 여러 번 말하게 하니!”
단비는 다시 막막한 표정으로 창 밖의 아이들과 선생님을 번갈아 보았다. 어느 쪽도 단비의 마음이 향할 수 없었다. 내게 물을 주었던 단비의 고운 손이 어느새 눈물을 닦고 있었다.
그때 마침, 복도에 아이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단비는 소리 없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선생님은 답답한 나머지 모니터만 바라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단비가 다시 책상에 엎드렸다. 나는 이제 저것이 단비가 우는 모습이란 걸 알고 있다. 힘없이 축 처진 모습이 나와 서글프게 닮았다.겨우 기운을 차린 내가 선생님을 향해 간절히 소리쳤다.
‘단비에게도 제발 물 좀 주세요!’
하지만 내 목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어느새 교실은 왁자지껄 몰려드는 아이들로 정신없이 채워지고 있었다.
당선소감 / 어른과 아이가 함께 읽는 환상적인 동화 쓰고 싶어
당선 통보를 받자마자 코피가 주르륵 흘렀습니다. 눈물이 흘러야 하는데 바보 같은 일이었습니다. 재작년, 문학판에 다시 뛰어들었을 때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쏟은 코피였습니다.
낮에는 아이들과 소통하고, 밤에는 아파트의 모든 불빛이 사라질 때까지 장편과 단편을 습작해온 지난 몇 년은 수험생 때보다 치열했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이렇게 한 것은 순전히 즐거웠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고단한 생활에 후회는 없습니다. 문학을 접었던 지난 십 년의 삶이 얼마나 공허했는지 내 영혼이 뼈저리게 느꼈으니까요. 내가 이야기를 써야 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만난 것만으로도 그 십 년은 분명 값진 세월이었습니다.
여기서 안주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5㎞쯤 지났을 뿐입니다. 도중에 멈출 것 같으면 이 기나긴 마라톤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심사위원 선생님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앞으로의 행보로 증명하고 싶습니다.
감사한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대학 시절 내게 아동문학을 권유하셨고 지금도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권혁준 교수님, 글을 단단하게 쓰는 법과 작가의 역량이란 무엇인지 확실하게 가르쳐주셨던 김남중 선생님, 시너지 효과를 내며 문학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이야기두톨 동료와 한톨 후배들.
그리고 삶으로 직접 모범을 보이시며 진정한 내 소명이 무엇인지 일깨워주신 안희묵 목사님, 쉬지 않고 기도하며 미숙한 남편을 사랑과 배려로 보듬어준 아내와 여기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 드립니다.
다시 한 번 뽑아주신 고정욱 선생님, 김서정 선생님께 감사 드리며 더욱 정진하여 독자들과 책으로 소통할 것을 약속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상기. 1982년 충남 태안 출생·공주교대 국어교육과 졸업. 한주형 인턴기자(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3)
심사평 / 화분의 목마름·우정의 간절함 맞닿아 읽는 이의 마음에 울림
작년에 비해 양적으로도 위축되고 내용 면에서도 다양성과 활기가 줄어든 응모작들을 보면서 두 심사위원의 마음도 그다지 밝지 않았다. 본심에 오른 네 편의 작품에 대한 토론도 길고 무거웠다.
‘도망고양이’는 네 편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었다. 깔끔하고 정확한 문장, 정교한 구성, 묵직한 반전. 솜씨 좋은 소설가의 작품 같은 이야기였지만 가학적으로 보일 만큼 암울한 세계관이 문제였다. 물론 어두운 동화도 있을 수 있지만, 말하는 방식에는 소설과 다른 동화적인 특성이 보여야 한다.
‘수건이 춤추던 날’은 영리한 의인화와 경쾌한 문장, 따뜻한 주제가 좋았지만 아이들이 동일시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약하다는 점, 작년 투고작이 개선 없이 다시 제출됐다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뭘 봐’와 ‘물 좀 줘’는 각각 집과 학교에서 아이들이 겪는 문제 상황을 다루고 있다. 집에서 받는 과외 현장을 감시하기 위해 방에 폐쇄회로(CC) TV를 설치한 엄마와 아들의 갈등을 그린 ‘뭘 봐’는 소재도 문장도 좋았지만 구성이 느슨하고 결말이 허무했다. ‘물 좀 줘’에서는 학교 현장이 상당히 실감나게 그려졌는데 아이들 사이의 왕따, 교사의 무관심이라는 흔한 소재를 담당 아이에게 잊혀 목이 타 들어가는 화분의 시점에서 잡아냄으로써 차별성을 보여주었다. 목마른 화분과 왕따 당하는 아이 사이의 교감 덕분에 이 소재의 상투성은 어느 정도 덜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약간 과하다 싶은 감성, 군데군데 부정확한 문장과 구성상의 허점이 단점이었다.
결국 당선작은 ‘물 좀 줘’로 결정됐다. 물을 바라는 화분의 마음이 보살핌과 우정을 필요로 하는 아이의 심정과 닿는 간절함이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 목 마른 결정에 단비가 될 수 있는 당선자의 후속 작품들이 내리기를 바란다.
고정욱(아동문학가) 김서정(아동문학평론가ㆍ중앙대 강의교수)
당선 소식에 눈물대신 코피... 문학의 마라톤 이제 5km
[2015 신춘문예] 동화 / 박상기 인터뷰
동화 부문 당선자 박상기(33)씨는 현직 초등학교 교사지만 원래 장르문학 작가를 지망했었다. 고등학생 때 습작을 시작해서 20세 때 온라인에 익명으로 환상문학을 연재했다. 출판 이야기까지 오갈 정도로 반응이 좋았지만 갑작스럽게 글쓰기를 포기했다. 그는 기독교로 개종한 것을 계기로 극심한 슬럼프를 겪었다고 회고했다. 글쓰기를 중단한 것은 물론 문학 자체를 읽지 않았다. “판타지 소설은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고 신에 대해서도 다룹니다. 제가 해 오던 작업이 새롭게 맞이한 신념과 맞지 않더라고요.”
그렇다고 미련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10년이 지난 뒤 되돌아보니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은 글쓰기”였다. “요즘 방송에 오디션 프로그램이 많잖아요. TV에 나오는 사람들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하는데, 서른살이 돼 일상 속에서 정신 없이 살아가던 내 모습을 보니 회의가 느껴졌습니다.”
환상문학을 그만둔 박씨가 동화를 쓰게 된 것은 권혁준 교수의 지원 덕이다. 공주교대 시절 스승이었던 권 교수는 그의 글쓰기 재능을 알아보고 창작동화 동아리로 그를 이끌었다. “대학 시절에는 동아리에 이름만 걸어두고 글은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언젠가 다시 글을 쓴다면 동화를 쓰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박씨는 10년 전 쓰던 환상문학과 지금 쓰는 동화의 거리가 멀지 않다고 말했다. 당선작 ‘물 좀 줘’ 역시 화분을 주인공으로 삼아 일상적인 문제를 상상 속의 이야기로 풀어냈다. “성인 문학은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구분이 명백한 편인데 동화는 그렇지 않아요. 해리 포터 시리즈를 지은 조앤 롤링도 스스로를 동화작가라고 말하잖아요. 저 역시 어른과 아이가 함께 읽을 수 있는 환상적인 동화를 쓰고 싶습니다. 만화처럼 재밌게 읽히는 글을 쓰고 싶어요.”
하지만 교사인 박씨 작품의 중심은 역시 아이들이다. 박씨는 “아이들과 하루 종일 같이 생활하다 보니 많이 배우게 된다”고 말했다. “작품을 탈고하고 나면 원하는 아이들에게 보여줍니다. 아이들의 평가를 받으면 글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3년 전부터 매일 저녁 시간을 할애해 꾸준히 글을 써 온 박씨는 앞으로도 교사와 작가 일을 병행하려 한다. “10년 만에 돌아온 작가의 길입니다. 힘 닿는 데까지 쓰고 싶습니다.”
[2015 부산일보 신춘문예 아동문학 동화 당선작]
마음약국 프로젝트 / 김점선
행복한 학급 만들기 프로젝트, 3월의 학급회의 안건이었다. 우리는 '마음약국'을 열기로 했다. 3월 18일. 날짜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날 약사명찰을 차지하기 위해 벌였던 경쟁은 반장선거보다도 더 치열했으니까.
약사 김준석
반짝반짝 빛나는 명찰이 멀리에서도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마음약국에서는 몇 가지 조제된 약을 판다. 기분이 좋아지는 약, 목소리가 커지는 약, 달리기를 잘하게 되는 약 등. 나는 마음이 아픈 친구들에게 상담을 해주고 알맞은 약을 판매한다.
약사가 된 후 친구들이 나를 대하는 눈빛도 달라졌다. 단 한명만 빼고 말이다.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마음에 속상한 일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자식은 보란 듯 내 약국을 한 번도 찾지 않았다. 불현듯 그 자식 생각이 떠오르자 무엇인가가 울컥 솟구쳤다.
"선미야, 오늘은 중간놀이 시간에 6월 모둠바꾸기 하잖아. 그러니까 약국은 점심시간에 열거야."
괜시리 약국 앞에 서성거리고 있던 선미에게 버럭 하고 말았다.
나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모둠발표를 기다렸다. 제발, 제발 예쁜 윤서랑 같은 모둠이 되게 해주세요.
"김준석, 최윤서,"
역시! 4학년이 돼서는 모든 일이 잘 풀린다.
"주태현, 박선재"
1초 만에 산산조각이 났다. 꼭 세상일은 끝까지 살아봐야 한다더니, 선재가 우리 모둠이 되었다.
"우와, 약사랑 같은 모둠이다!"
태현이의 말에도 아랑곳 않고 선재는 자기 짐 옮기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주는 거 없이 미운 놈이 있다더니, 선재가 딱 그런 꼴이다.
"태현아, 책상 좀 앞으로 당겨줘!"
큰소리에 놀란 내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치와와처럼 얍삽하게 생긴 놈이 어찌나 목소리가 큰지.
"개미처럼 목소리가 작아지는 약을 먹으면 좀 좋아?"
나는 누가 들으라는 듯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지만, 정작 선재는 못들은 척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책상 속에 교과서를 집어넣고 있었다.
선재는 마음약국의 약을 믿지 않는 것이 틀림없다.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나도 아직 약을 먹어보지 않아 장담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선재는 정말 약이 필요해 보였다.
"아얏!"
갑자기 날아온 선재 팔꿈치에 내 몸이 기우뚱하고 흔들렸다. 정말 재수 없는 자식이다.
"미안해, 다쳤냐?"
선재가 휘청거리는 내 왼팔을 한 손으로 낚아채며 붙잡았다. 겨우 제자리에 바로 설 수 있었다.
"조심 좀 하시지?"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돌아섰다. 속이 확 뒤틀렸다.
"애들아, 어디에서 구린내 나지 않냐?
나는 태현이와 윤서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옆쪽에서 나는 것이 분명 선재가 범인인 것 같았다.
"선재, 너 안 씻고 다니는 거 아냐?"
옆 모둠 깔끔쟁이 선미가 불쑥 끼어들었다. 반 친구들이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선재 얼굴이 빨개졌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우리 할머니가 요즘 청국장 만들거든. 그게 뭐?"
선재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 큰소리로 말했다. 이미 친구들은 코를 틀어막으며 킥킥거리고 있었다.
'그러게 나한테 좀 잘 보이지. 자식!'
마음속을 짓누르던 납덩이 하나가 날아가는 것 같았다.
점심시간, 콧노래를 부르며 급식실로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점심을 후다닥 먹고 약국을 열기 위해 교실로 향했다.
교실에는 선재 뿐이었다. 선재는 약국 앞에 서더니 책상 위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뭐하는 거지? 마음약국을 엉망으로 만들려는 거 아냐? 현장을 잡아야 했다.
눈을 문틈으로 바짝 대봐도 잘 보이지 않았다. 교실 뒤편, 약국에 가서 고양이 눈이 되는 약이라도 지어먹고 싶었다.
그때 교실 뒷문이 열리더니 선재가 나왔다. 나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교실 문을 닫은 선재가 잠시 나를 쳐다봤다.
"뭐, 할 말 있어?"
나도 녀석의 두 눈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힌 선재의 눈이 보였다. 머뭇거리던 선재는 그대로 복도를 가로질러 뛰어갔다.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울긴 왜 울어?'
나는 마음약국을 향해 몸을 돌렸다.
따뜻한 햇살이 드는 교실 창문 한 켠에 『마음약국』이라는 간판이 아픈 친구들의 마음을 다 치료할 듯 따뜻하게 웃는 듯 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빈 약포지가 눈에 띄었다. 약포지를 만진 건가? 간의 탁자에 놓인 약수납함에 생각이 미쳤다. 다행히 약수납함은 건들지 않은 듯 했다.
나는 의자 뒤로 가서 흰색 가운을 입었다. 마음을 다독였다. 흰 가운을 입으면 난 약사 김준석이 된다. 친구들이 급식실에서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김약사, 벌써 약국 열었네?"
선미 눈초리가 잔뜩 올라가 있었다.
"선미야. 무엇을 도와줄까?"
"나한테 약 제대로 준거야? 분명히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는 약을 먹었어. 하지만, 난 여전히 재정이가 미워!"
선미가 잔뜩 골이 난 얼굴로 말했다.
"약은 처방에 맞게 판매했어. 마음약국 이용수칙 알지?"
나는 두 번째 손가락으로 간판 옆을 가리켰다.
마음약국 이용수칙
1. 약값은 100원이며, 직접 이웃돕기 함에 넣는다.
2. 약의 남용을 막기 위해 주 1회 이하로 이용을 제한한다.
3. 마음 깊이 진심으로 원할수록 약효가 커진다.
"휴. 난 이제부터 재정이랑 싸우지 않겠어!"
선미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약국은 점점 더 인기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 후로도 다섯명의 친구들이 다녀갔다.
막 약국 문을 닫을 준비를 할 때였다. 선재가 내 약국을 찾아온 것이다. 눈언저리가 아직도 발갛게 보였다.
"목소리가 작아서 왔어."
평소 선재답지 않게 풀이 죽어 있었다.
"선재야. 지금도 네 목소리 충분히 크거든."
나는 선재의 얼굴을 살폈다. 내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은 것 같았다.
"목소리가 커지는 약이 필요해!"
선재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지금 너한테 필요한 약은 목소리가 작아지는 약이야."
선재가 일부러 나를 골탕 먹이려는 것이다.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지만 꾹 참았다.
"진심이야, 목소리 커지는 약을 줘!"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선재는 고집스럽게 서 있었다. 3개월 만에 처음 약국을 찾아서 필요한 약이 큰 목소리를 갖게 해달라니. 미칠 노릇이다. 난 최대한 약사의 품위를 지키려 애셨다.
"알았어."
나는 약수납함에서 약을 꺼냈다. 약포지에 기차화통 삶아먹은 것처럼 목소리가 커지는 약이라고 적은 후 선재에게 건넸다.
선재는 약포지를 받더니, 이웃돕기 함에 100원을 넣었다. 그러고는 큰 걸음으로 자리에 돌아갔다. 찜찜한 기분이 줄곧 내 머리를 괴롭혔다.
'네가 약사인 날 놀려?'
온갖 생각이 뒤엉켜 수업시간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집으로 갈 때는 어떻게 해야 되죠?"
종례시간, 언제나처럼 선생님이 물었다.
"차조심, 사람조심, 개조심."
그 누구보다도 큰 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내 소리는 선재 목소리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선재와 대화가 필요했다.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선재야?"
옆을 봤지만, 이미 선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급히 교실을 나왔다. 선재를 따라잡기 위해 부랴부랴 신발을 신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선재의 모습이 보였다. 나 몰래 말처럼 빠르게 달리는 약이라도 먹은 것 같았다.
"같이 가!"
태현이가 불렀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덕분에 막 교문을 나서는 선재의 뒷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처 말 붙일 새도 없이 선재는 부지런히 학교 담장 옆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살금살금 도둑고양이처럼 선재 뒤를 따라갔다. 대부분 큰길로 학교에 가긴 하지만, 가끔 이 골목길을 지나가기도 했었다.
'그동안 선재를 왜 한 번도 못 만난거지?'
못 만날 수밖에. 저렇게 학교 끝나자마자 쌩 하고 가버리는데, 못 만나는 게 당연했다. 선재는 아무 의심 없이 자기 갈 길만 바쁘게 걸어갔다.
어느덧 파란색 대문 앞에 서는 선재 모습이 보였다. 조금만 앞으로 가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우리 아파트 후문이 나온다. 집에 가다가 우연히 본 척하면 되겠다.
"선재야!"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선재가 호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러더니 입에 털어 넣었다. 분명 마음약국에서 산 약을 먹는 것 같았다.
'어? 지금 약을 먹는 거야?'
선재의 수상한 행동에 나는 멈칫했다.
"할머니, 할! 머! 니, 학교에 다녀왔어요!"
선재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며 대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자 선재는 개선장군처럼 안으로 들어갔다. 철컥, 대문이 닫혔다.
나는 대문 앞에 바짝 붙어서 집안을 살펴보았다.
잠시 후, 지팡이를 짚고 더듬더듬 나오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졸지에 난 남의 집 안을 엿보는 이상한 아이가 되어있었다.
"오야, 내 강아지. 잘 다녀왔어? 재미있었고?"
할머니가 연신 선재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선재는 학교에서는 볼 수 없었던 웃음을 웃어대면서 할머니의 손에 얼굴을 맡겼다.
"할머니, 나 없는 동안 심심했지? 이제 나랑 운동가게."
책가방을 내려놓은 선재가 할머니에게서 한 발짝 떨어지더니, 두 팔을 크게 앞뒤로 저어 보이며 말을 했다.
"의사 선생님이 집에만 있으면 안 된대, 많이 걸으래."
할머니는 선재의 큰 목소리와 허우적대는 발놀림을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대문 옆 담벼락으로 몸을 숨겼다. 선재가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의 손을 잡고 대문 쪽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재와 할머니는 발걸음을 맞추며 걸었다. 천천히, 천천히 파란색 대문을 나와 걸어갔다.
"할머니, 오늘도 청국장 찌개 끓였지?"
선재의 목소리가 골목을 가득 채웠다.
"두부 넣고 맛나게 끓여 놨제."
"두부까지! 우와, 맛있겠다."
선재가 어깨까지 들썩이며 말했다.
"할!머!니, 오늘은 선재 목소리 더 잘 들리지?"
선재가 신이 나서 우렁우렁 소리쳤다.
"오야. 오야! 할미는 선재 목소리가 젤로 잘 들린다."
행복해 보이는 할머니 얼굴이 커다랗게 다가왔다.
"내가 노래 불러줄까? 으흠. 다른 사람들이 선재를 부르면 한참을 생각해 보겠지만, 할머니가 나를 불러준다면 무조건 달려갈 거야…."
선재의 노랫소리가 골목길에 퍼져나갔다. 나는 넋을 놓고 선재와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선재와 할머니가 다시 파란색 대문 집 앞으로 도착했다. 선재가 대문 앞에 우두커니 서있는 나를 쳐다보았다.
"준석아, 마음약국 약이 정말 효과 있나 봐! 우리 할머니 좋아하는 얼굴 좀 봐!"
녀석의 표정에서 기쁨이 한가득 묻어났다.
"그러게."
나는 멍하니, 선재 얼굴을 바라보았다. 할머니 때문에 고민하고, 마음약국을 찾은 선재에게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일은 나도 친구 믿어주는 약을 먹어야겠다.
마음약국 프로젝트가 이렇게 성공하리라고는 약사인 나도 믿지 않았는데…. -끝-
[2015 신춘문예-아동문학 심사평] 동시 '국수'와 동화 '마음약국 프로젝트' 두고 오래 고심
최종심에 올라온 동시 '국수'와 동화 '마음약국 프로젝트'를 두고 오래 고심했다. 지난해에는 동화가 당선되었으므로 올해는 동시에 관심을 두고 고심할 수 밖에 없었다.
'국수'는 이 세상에 오는 비가 모두 국수가 되어 지구 저 편의 가난하고 배고픈 아이들을 배불리 먹였으면 하는 시의적절한 주제가 눈길을 끌었으나, 비를 국수로 형상화하는 과정에 무리가 있어 아깝게 당선작에서 밀려났다.
'마음약국 프로젝트'는 귀 멀고 눈 먼 할머니와 함께 사는 선재가 할머니의 불편을 덜어드리기 위해 '마음약국'에서 '목소리가 커지는 약'을 사고 그런 선재를 지켜보는 '나'의 마음을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 나가 끝내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자아낸다. '마음약국'이라는 어린이들의 행복 학급 만들기 프로젝트가 기발하고 현실과 잘 어울리는 이야기 전개도 무리가 없었다.
동시에 대한 기대는 또 다시 다음 해로 넘긴다.
심사위원 공재동·배익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