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적인 유럽 기행 그 여운
들어가기
여행을 하지 않은 사람은 책의 한 페이지만을 보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여행을 통해 살아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여행을 통해 에너지를 재충전하고 생동감 넘치는 여행담을 통해 역사와 문화를 교육할 수 있으리라는 창설자의 취지에 따라 올해도 유럽연수가 이루어졌다.
8월 2일, 여덟 선생님과 사모님을 대동한 금번 연수단은 마침내 많은 선생님의 배웅을 받으며 11박 12일의 장정에 올랐다. 이륙 11시간 30분, 1100미터 높이에서 1000킬로미터 속도로 비행하였다. 날짜 변경선을 지날 때는 구름 위로 비치는 강렬한 태양이 우리 여행단을 7시간이나 더 젊게 만들어 주었다.
독일에서
유럽의 첫 기착지 프랑크푸르트에 현지 시각 오후 5시 30분에 도착하니 공항에는 불법 체류자를 막무가내로 돌려보내지 마라는 피켓을 들고 데모를 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본 독일은 노란 황금 물결이 출렁거리고 있었는데 그 황금 물결을 이루었던 것이 맥주보리 밭이란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에 차창에 비치는 독일의 모습은 교통질서의 천국이었다. 눈에 잘 뜨이는 도로 표지판, 경제 속도를 지키는 차량, 자전거와 전철을 이용한 시민의 모습이 선진국다웠다. 또한 숙소에서 바라본 독일인의 민간 주택의 지붕은 채광이 잘 안 되는지 유리뚜껑으로 된 창들이 많이 있었다.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에는 건축가의 얼굴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어 건축 실명제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가 생각되었다.
중세 역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성(城)을 답사하기 위해 8월 3일 금요일 아침 하이델베르그로 향했다.
첫 번째 답사지는 울창한 숲속에 전쟁의 상흔을 중세 당시의 모습 그대로 안고 파손된 채 서 있는 고성(古城)이었다.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이 혼합되어 있는 중세의 낭만의 고성 정원 성벽에 새겨져 있는 괴테와 뜨겁게 사랑한 마리아네 폰 빌레마(Marinanne von willemer)의 “사랑하고 사랑 받는 나는 이곳에서 행복했노라”는 시 한 구절이 이 고성의 아름다움을 대변해 주었다. 성의 지하에는 1751년에 만든 약 22만 리터의 큰 술통이 남아 옛 정취를 짐작케 했다. 걸어서 하이델베르그 대학으로 향했다.
캠퍼스만 보고 내려오는 길에 황태자의 첫사랑에 나오는 황태자 식당에서 칠면조 요리인지 돼지 뒷다리 요리인지 모를 점심을 먹고 학생 감옥을 구경하였다. 당시에 학생 신분에 어긋난 학생을 퇴학시키지 않고 이곳에 한 달 정도 격리시켜 별도 교육을 하였다고 한다. 벽면에는 낙서가 남아 있어 관광객의 관심을 모은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파라다이스 2주간의 행복’, ‘창살 거미줄 같은 방’ 이라는 낙서가 남아 있다는 이야기만 듣고 우리는 스위스로 가기 위해 부산하게 발걸음을 옮겨 버스에 올랐다.
철학자들이 사색에 잠겼다는 슬랑겐 골목길과 카롤 테오도어 다리(옛다리)가 있는 네카강을 건너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스위스(SWITZERLAND)에서
루체른으로 향했다. 국경을 넘어 스위스 가는 길에 이슬비가 내렸다. 이국 땅에서 비를 보니 더욱 낭만적이었다. 봄비처럼 새록새록 내리는 비는 더위를 식혀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고속도로 중간 휴게소 웨스트 바덴바덴 거리에서 유럽의 보헤미안을 만날 수 있었다. 식당차를 끌고 관광지를 찾아 떠나는 집시들이 아주 많았다.
유럽의 지붕이라고 하는 알프스의 나라. 정밀 기계 공업의 나라. 목초 목축으로 알려진 동화 속의 나라에 드디어 들어섰다. 제약회사 공장들, 산악 사이에 말을 타고 가는 촌부 리마대, 저 푸른 언덕에 그림 같은 집들이 평화스러워 보였다.
루체른(Luzern)은 스위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중세 그대로의 구 시가지 모습과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제목이 유래하였다는 루체른 호수 위 달빛과 필라투스에서 사방으로 마주선 알프스 영봉의 경관이 가히 환상적이었다.
루체른 시가지와 루체른 호수 그리고 그 호수를 연결한 차도와 호수를 가로지른 카펠교, 호수 옆으로 조성된 고풍적 시가지와 신시가지 건물, 환상적 마로니에 가로숲 길이 모두가 여행객의 마음에 한 폭의 풍경화로 남게 되었다.
교육의 아버지 페스탈로치, 심리학의 대가 융(Jung, Carl Gustav)이 태어났던 나라. 제네바의 세계은행, 축구협회인 피파, 올림픽 위원회 등 세계 국제 기구 40여 개가 모여있는 나라. G.N.P 48000달러로 잘사는 나라 스위스 직접 와서 보니 이 모두가 환상적이었다.
루체른 시가지와 호수, 카펠교 다리와 ‘빈사의 사자상’, 틸틸리스를 보았다. 카펠교는 지붕이 있는 다리로서 111번까지 번호가 붙어 있는 그림이 걸려 있다. 이 그림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역 쪽 에서부터 이 다리를 왕복하면 순번대로 그림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목욕탕은 토요일에는 남녀 공용으로 이용한다고 하니 실제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현대 사회의 풍속은 아닌 듯 싶다.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에서
우리는 동계 올림픽 개최지였던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로 이동하였다.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국경 사이에 작은 마을 같은 도시를 거쳐 야곱 성당,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의 황금지붕(베란다)을 보고 난 후 숙소로 향했다. 거리에는 오페라의 도시답게 거리의 악사들이 바이올린, 피아노, 와인잔의 손가락 연주, 톱 연주, 인형으로 피아노 치기 등 음악이 생활화되어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8월5일 일요일 인스부르크에서 출발하여 이탈리아로 향했다. 알프산 산맥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고속 도로 주변 경관은 아름다웠다. 알프스산 고원지대에도 그림 같은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이탈리아로 내려오면서부터는 대리석(화강암)처럼 생긴 돌산들이 산을 둘러 에워싸고 있었다. 점차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사과나무 과수원과 포도나무 옥수수를 많이 심어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이탈리아에 들어서니 우리 나라와 풍토가 비슷해서 그런지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많고 공장지대가 눈에 뜨인다.
거리에 넘쳐나는 피서객들을 보며 바다를 가로질러 열차와 고속도로가 연결되어 있는 항구 도시 베네치아에 도착하였다.
이탈리아 (I T A L Y)에서
이탈리아는 유럽 대륙의 살남부 지중해에 돌출한 장화 모양의 반도와 시칠리아, 사르데냐 섬을 비롯한 많은 섬으로 구성된 공화국이다. 면적은 남북한 전체의 약 1.4배에 달한다. 국토 전체의 87%가 구릉이나 산악지대로 평야는 대륙부와 반도의 해안지역에 있고 연중 온난한 기후라고 한다.
주민은 라틴족과 켈트족, 게르만족의 혼혈로 이뤄진 이탈리아인이며 낙천적인 기질에 음악을 즐긴다. 로마시대 이래로 그리스와 더불어 서양문명의 원천이었다. 농업과 공업이 주요 산업으로서 선진 공업국형 산업구조를 이루었으나 지하자원이 빈약해 원자재를 대부분 수입에 의존해 무역적자 폭이 크다. 하지만 풍부한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지중해의 관광자원을 바탕으로 관광산업이 크게 발달하여 외국 관광객으로부터 얻어지는
관광수입으로 국가제정을 충당시키고 있다.
베니스라고도 불리는 수상도시 베네치아와 ‘꽃의 도시’라고 하는 피렌체를 돌아보고 로마에 입성하였다. 로마는 가는 곳마다 미술관, 조각관, 박물관, 성당들이 즐비하였다. 다음 여정은 로마 제국시절 르네상스의 중심지인 로마 시내 답사이다.
바티칸 시국 -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인 바티칸 시국은 세계 가톨릭의 총본산인 성 베드로 성당을 비롯해 바티칸 박물관 등 이탈리아 미술과 건축의 정수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성 베드로 광장 (Piazza San Pietro)이 있다. 광장 중앙에 높이 25.5m, 무게 350t의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갖고 있으며 4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타원형의 널찍한 광장이 있는데 이것을 공중에서 보면 성 베드로 성당과 광장이 열쇠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성당은 미켈란젤로에 이어 17세기 때 거장 베르니니가 설계했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회랑에는 284개의 원기둥이 있고, 상부에는 140개의 성인상이 세워져 있다. 이 성인상들은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제작한 것으로 모두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오벨리스크 좌우에는 분수가 설치되어 있는데 오른쪽의 것은 마데르나가, 왼쪽의 것은 베르니니가 만들었다. 매주 일요일에는 광장 오른쪽 건물 회랑 위에서 교황이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바티칸 박물관은 명칭 그대로 피오 클레멘티노 미술관. 그레고리안에 트루스크 미술관 등의 총칭으로 유명한 시스티나 예배당도 여기에 포함된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대본산이므로 미술품의 대부분이 그리스도교와 연관있는 것으로 르네상스 화가들의 것이다. 그야말로 미의 보고로 특히 시스티나 예배당의 벽에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의 심판'은 시대를 넘어 세계 미술사의 최대의 걸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파엘로 전시관은 라파엘로가 25세 때 창작을 시도하여 37세로 죽을 때까지 벽화를 그린 4개의 방. 이 중에서 ‘서명의 방'에 전시된 <기적의 논의>와 <아테네 학당> 등이 유명하다.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벽화 <최후의 심판>이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 (Cappella Sistina)도 볼만 하다. 중요한 의식을 많이 치르는데 교황 선거도 이곳에서 행해진다. 구약 성경을 주제로 한 천장화인 <천지창조> 역시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 <빛과 어둠의 분리>로 부터 <노아의 만취>에 이르기까지 총 9개 장면을 담고 있는데 이 가운데 중앙에 있는 <아담의 창조>가 유명하다. 이 작품은 그의 나이 33세때 시작하여 4년 만인 37세때 완성했다고 한다.
양탄자의 방은 라파엘로 제자가 16세기 직물로 짠것으로 예수님의 일생을 양탄자에 수공으로 짜서 걸어 놓았다. 그 앞으로 지도의 방도 볼만하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성 베드로가 순교한 자리에 15, 6세기에 120년간 건립된 바로크 양식의 건물로 교황 율리우스 2세에 공사가 시작하였다고 한다. 둘레가 1Km나 되며 135개의 모자이크 석상과 42개의 제단과 돔 형식으로 된 웅장한 성당이다. 피에타 상은 온화한 모습으로 조각되었다. 인파에 밀려 자세히 살펴보지 못한 점이 아쉽긴 했지만 여름이라 많은 인파 때문에 찜통이었다. 이렇게 많은 인파가 이곳에 찾아온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런 인파 속에서 출구를 놓친 일부 일행은 방향을 잃어 현지 가이드를 놀라게 했다. 여기서 일행을 놓치면 찾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만일 일행을 놓쳤다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 가이드가 찾으러 온다고 한다.
여행단은 “벤허”의 주인공이 되어 마차에 올라 로마의 시내를 둘러보았다.
로마 상징의 원형경기장 콜로세움
고대 로마 황제들은 민중을 정치적 관심에서 현대판의 스포츠 격인 동물과 동물의 격투, 인간과 동물의 격투를 이곳 콜로세움 경기장에서 보여줌으로써 힘을 과시하여 민중을 압도하였는지 모른다. 이곳에 모인 민중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면서 황제의 자비를 베풀어 민중을 통치했을 것이다. 이러한 강력한 왕권 과시에 민중들은 땀과 피를 바친다. 옛 황제 시대의 문물을 그대로 보존한다며 일체 관광버스나 대형 버스를 통제하고 마차로만 도시를 돌아보게 하고 있어 옛 그대로 유지되는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의 관광 수입에 대한 계산이 서 있는 정책적 수단에 불과한 것 같았다. 트레비 분수, 국회 의사당 등 로마 도시를 마차를 타고 로마여행을 마치며 보는 이를 압도하는 건물, 석상, 분수, 도로 기마대, 조형물, 등에서 경이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 모든 것들이 2000여년 전에 세워졌다고 해 더욱 놀라게 한다.
이러한 조형물들이 그들의 힘과 영웅의식 속에서 창건되었는지 모른다. 세계는 로마로 통한다고 하였지만 고대 로마 국가는 패망하고 우리에게 아무리 높은 문명을 이룬 나라라고 하더라도 패망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존엄성과 정체성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로마 상인들이 우리말로 ‘빨리 빨리’, ‘안녕하세요’, ‘미스터 김’ 등 아주 친숙한 우리말로 상품을 권한다. 그만큼 우리 관광객이 많이 찾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
8월6일 런던 도착
런던은 1066년 윌리엄 1세 이후 영국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를 비롯한 모든 면에서 이 나라의 중심지이며 또한 세계의 중심지였다. 지금도 왕실, 정부기관, 의회 등이 런던에 몰려있고, 세계 최대의 인류문화유산의 보고라 불리우는 대영 박물관, 웨스트민스터 사원, 하이드파크, 버킹엄궁 등의 관광지가 있다. 빅토리아 역에서 가까운 숙소에서 자고 일어나 버킹엄궁 옆 하이든 파크 공원을 새벽 5시에 기상하여 10여분 걸어서 산책하였다. 인도에 있는 가로등에는 꽃바구니가 걸려 있어 도시의 미관이 아름다웠다. 아침 날씨는 좋지 않았다. 태풍이 불어온 것처럼 나뭇가지들이 심하게 흔들리고 여름철임에도 불구하고 비가 오고 있어 런던의 날씨는 우리 나라 초가을 날씨처럼 쌀쌀하였다. 자동차의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어 사람 타는 곳이 왼쪽이 있어 우리와 다르고 모든 자동차에는 비행기의 불랙박스에 해당하는 타코메타가 있어 운전사의 교통 기록과 자동차의 운행일지가 모두 기록되기 때문에 노동법을 철저하게 준수해야 한다는 점이 매우 합리적인지 모르지만 인정이 부족한 것이 흠이었다.
런던 조식 후 영국 황실의 주거지인 윈저궁을 관람했다. 이 성은 1087년 윌리엄 경이 이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해 목조 성채를 쌓은 데서 출발하였다. 그 후 12세기 때 헨리2, 3세가 석조로 개축하여 지금의 웅장한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예배당, 왕의 서재와 침실, 식기, 은제 식탁, 수많은 명화, 천장화 등이 화려했으며 조지 5세 왕비였던 메리여왕 인형관과 마가렛 대처가 살았고 국왕이 살고 웨스트민스터 백작의 딸 다이에나와 결혼한 찰스 황태자가 살았다고 한다. 말을 탄 근위병의 교대식을 보자며 재촉하던 가이드 말에 정신이 없이 내려왔지만 그날 따라 교대식을 하지 않는다니 실망이 컸다.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영국에 명문으로 통하는 이튼 칼리지가 있다는 데 그곳을 가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Great Russell Street에 있는 대영 박물관은 세계 최대의 인류문화사 자료를 수집해 놓은 인류문화의 보고이다. 1753년 의사인 한스 스톤이 8만여 점의 소장품과 로버트 코튼 경, 옥스포드 백작의 장서를 공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집트관 한국관, 일본관, 중국관 등 94개의 갤러리에 나뉘어 전시되고 있으며 총 연장 길이만도 4km에 달한다. 세계 각국의 민속자료가 전시되어 있는 대영 박물관을 관람하였다. 이오니아식 원형 기둥을 보아하니 과연 그 규모가 놀랍다. 이곳에 삼성그룹의 지원으로 한국관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비록 한옥과 영조시대 왕의 행차 행실도와 불교 탱화 몇 점이 비치되어 있지만 이런 것을 통하여 한국을 세계인에게 알릴 수 있다는 가이드 말에 대기업들이 정말 해야 할 일이 많음을 알았다.
템즈강 주변에서 국회의사당과 그 유명한 시계탑 빅벤, 타워 브릿지 등을 원거리에서 보고 유로스타(eurostar)를 3시간동안 타고 도버해협을 통과하여 파리에 도착하였다.
프랑스에서
오브아르(안녕) 봉주르(안녕하세요) 메르시(고마워요)의 인사말을 배우며 파리에 아주 늦은 시각에 도착하였다. 파리는 인구 220만의 프랑스의 수도이다. 타원형의 도시로 도시구조가 방사선으로 발달해 있으며 그 중앙에 세느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를 기념하여 세워진 321M의 에펠탑을 비롯하여 개선문, 샹제리제 거리, 콩코드 광장, 몽마르트언덕, 노트르담 성당, 루브르 박물관, 베르사유 궁전 등을 관람하기로 하였다.
몽마르트 언덕은 순교자의 언덕이라고도 한다. 파리 시내 세느강 밖의 지역에 19세기 중기에 북쪽 외각 지역 후미진 곳에 지역 화가들이 모여 교류하기 시작한 곳이다. 물가가 싸기 때문에 환락의 거리로 자리 잡아 예술전당이 된 것이다. 초상화, 풍경화, 피가의 거리, 물랑루즈로 유명하다. 이곳은 본래 바람이 많았다, 그래서 전기 풍자집으로도 유명하단다.
집시의 여인과 성당 신부가 사랑했다는 빅토르 위고의 노틀담의 꼽추 이야기로 유명한 노틀담 성당에 들어가 보니 웅장하고 화려했다. 입구의 건물 벽에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와 그의 순교한 제자들의 부조가 많았다. 종탑을 올려다보니 어떻게 종을 치러 오르는지 상상이 되지 않을 만큼 웅장하고 거대했다. 이렇게 웅장한 성당에 신도들이 얼마나 많이 모이게 될 것인가 과연 성당이 이처럼 웅장하고 거대한 이유는 뭘까? 밖으로 나오니 성당 지붕에는 맹수들의 석상이 금방이라도 뛰어 내려 사람에게 해를 끼칠 것만 같아 겁도 나고 이질감이 생겨났다. 왜 신성한 성당의 지붕에 맹수의 석상을 조각했는지 궁금하다.
루브르는 루파라에서 루브르 궁으로 굳어져 이곳에 박물관이 건립되었다. 원래는 개 사육장이 많았다고 한다. 원어로는 늑대( wolf) 라는 뜻을 보아도 짐작 할 수 있다. 고전적인 궁과 현대적인 피라미드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미술관은 워낙 방대하여 하루에 모두 볼 수는 없었다. 또한 인파에 밀려 섬세하게 볼 수가 없었다. 인상에 남은 방은 축제의 방, 풍요의 방, 비너스의 방, 다이아나의 방, 전생의 방, 거울의 방, 왕비의 방들이었다. 특히 교과서에서 보았던 모나리자와 비너스 조각상의 진품을 보아 감개무량하였지만 많은 인파 때문에 자세히 보지 못한 점이 아쉽다.
파리 시내는 미술관에 전시된 미술품처럼 아름다웠다. 우리 여행단은 눈으로 보는 관람에서 직접 체험해 보는 체험정신으로 프랑스를 느껴 보고자 점심을 먹고 콩코드 광장에서 샹젤리제 거리를 걸어 개선문까지 가기로 하고 자유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삼삼오오 콩코드 광장에서 회전탑에 올라 지중해로 넘어가는 일몰을 감상하였다. 본래 루이 15세가 기마상을 설치하기 위해 조성하였다가 1790년 프랑스 대혁명 때 단두대가 설치되어 피를 부른 곳이었지만 이러한 아픈 역사를 치유코자 이곳을 콩코드르(조화, 화해)라고 하였다고 한다. 높이가 23m나 되는 이집트에서 보내온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다.
샹젤리제 거리를 거닐어 본다. 샹젤리제란 이름은 천당이라는 뜻이다. 천당같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콩코드 광장에서 개선문 광장까지 가는 거리는 2.5km로 너비가 110m나 되는 넓은 도로이다. 인도 양쪽으로는 가로수 숲길이다. 곳곳에 꽃밭 정원이 많이 조성되어 있어 여행객의 발길을 잡는다. 플라타나스 거리와 마로니에 나무숲은 싱그러움이 넘쳐난다. 이곳에는 거리 카페와 대형 쇼핑타워가 자리하고 있어 패션 일번지라고도 한다. 지중해로 해가 기우러가면서 거리의 가로등과 도시의 불빛들이 찬란하게 빛나고 샹젤리제 야경은 환상적이다. 거리의 젊은이들은 길에서 카페에서 사랑하는 이와 음식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세상에 미움과 증오, 갈등과 번민을 묻어 두고 만남과 사랑, 화해와 기쁨이 넘치는 곳에서 재잘거리며 인생을 논하고 있다.
나폴레옹이 희생된 병사를 위로하고 승리를 기념하여 30년만에 완성했다는 개선문에 다다랐다. 이곳을 중심으로 12갈래로 길이 쭉 뻗어 있다는 사통팔달의 요충지이다. 세계 최대의 크기를 자랑한다.
다음 날 바로크 건축의 걸작이라 불리우는 베르사유 궁전을 관람하였다.
프랑스인들은 식사를 전식, 주식, 후식으로 나누어 먹는다. 뿐만 아니라 식사시간이 두 시간 정도이며 식사 중에 말을 많이 하여 서로 서스럼없이 수다를 떨며 식사를 하기 때문에 수다떠는 민족이라고 부른다.
여행하기에 편하고 관광이 발달되어 있단다. 관광 안내소에는 마을 단위로 근무요원이 상주하고 누구나 수시로 자료를 요구하면 상세하게 정리된 자료를 보내준다고 한다.
자식들은 일찍이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용돈을 벌어 쓰고 부모는 용돈을 줄 의무가 없다고 한다. 자식은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독립된 개체로 살아간다고 하니 우리 나라 젊은이들은 생각해 볼이다.
우리는 다음 목표지인 벨기에 브뤼셀로 이동하였다.
벨기에의 브뤼셀로 이동
벨기에는 유명한 동화 ‘파랑새', ‘플란더스의 개’를 탄생시킨 나라이다. 작은 면적이지만, EU와 NATO의 본부가 있는 나라로서 현대 유럽을 이해하는데 빠뜨려서는 안될 국가이다.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와 인접해 있어 유럽의 정상들이 쉽게 만날 수 있어 유럽의 요충지이라고 한다. 국민 소득은 만달러이며 어느 곳이든 땅을 1m만 파들어가면 철강이 나올 만큼 유명한 철강 생산 국가이다. 그래서 세계에 기차나 대포 총기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일자리가 부족해 외국에 주로 운전 기사로 나가며 프랑스, 독일, 네델란드 3개국의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언어 통일이 과제라고 한다. 유럽연합(EU)의 본부가 있는 브뤼셀은 서유럽의 역사와 미술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플랑드르 문화가 담긴 곳이기 때문에 특히 중세사에 흥미가 있는 사람에게는 끝없는 매력을 지닌 도시라고 한다..
빅토르 위고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 한 그랑플라스 광장, 개선문, 왕궁, 법원 광장, 오줌싸게 동상(꼬마 줄리앙, 브뤼셀의 가장 나이 많은 시민으로 불리움, 세계의 정상들이 평화를 상징하는 뜻에서 줄리아의 옷을 만들어 입히는 것이 관례가 되어 각국의 옷을 입고 있는 사진이 의미가 있어 보임), 성 미쉘 대성당, 식물원, 시청사 등 볼거리가 많았다.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이동
벨기에에서 5시간 여만에 다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다. 괴테 하우스와 뢰머광장과 시청사를 둘러보고 귀국 길에 올랐다.
괴테 하우스는 1749년 8월 28일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가 태어나서 청년기까지 지낸 곳이다. 아버지는 법률가였고 어머니는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인 명문 집안답게 상류 계층의 크고 우아한 저택이다. 2차 세계 대전 때 파괴되었으나 시민들의 노력으로 복구되었다. 건물은 5층으로 되어있는데 1층은 식당과 부엌, 2층은 로코코 풍으로 외조부모의 초상화와 피아노가 있다. 3층에는 바로크 양식의 천문 시계가 눈길을 끈다. 18세기에 해와 달을 가르키는 천문시계가 제작되었다는 것에 놀라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4층은 그가 집필했던 방으로, 유명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파우스트>의 초고가 탄생됐다. 괴테 하우스 북쪽의 괴테 박물관에는 그의 초상화와 생애에 관한 회화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뢰머(Romer)는 1405년 프랑크푸르트 시의회가 귀족의 저택 3채를 사들여 시청사로 개조해 사용해왔는데, 이중에서 가운데 한 채를 뢰머로 불렀다. 뢰머는 역대 황제들이 연희를 베풀던 곳으로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된 “황제의 넓은 방”이라 불린다. 따라서 뢰머는 구 시청사의 핵심이며 프랑크푸르트의 역사적인 상징이 되고있다. 뢰머 광장에는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천칭을 들고 있는 ‘정의의 분수'가 있고 남쪽에는 하루 세 차례 40번 종이 울리는 니콜라이 교회가 있다.
귀국하는 기쁨
10여일 동안 이국에서 여러 나라를 보고 듣고 재미있었지만 이제 귀국 길에 오른다니 더없이 기뻤다. 사실 장기간 동안 안전하게 여행을 마친 것에 대하여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물을 잘 이용하여 운하를 만들었다. 물을 교통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물을 생활 용수뿐만 아니라 배를 만들어 운송 수단, 관광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집은 채광을 위한 지붕에 창을 내고 유리창은 이중 삼중으로 되어 있어 우기와 쾌청한 날에 대비하여 환기와 채광에 잘 대비하여 만들어졌다. 대리석과 같은 건축자재가 많아 건축이 발달되었고, 밭농사가 발달하여 치즈 문화와 각종 쨈 식품 문화가 발달하였다.
그들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매우 호전적이었으며 전투와 전쟁으로 승리 국가는 전리품으로 금이나 철을 수탈하여 자국의 건축물에 치장을 하였고, 대포나 총을 녹여 전쟁에 승리한 장군의 동상을 제작하여 후대에 승전의 기쁨을 후대에 길이 전하려 하였던 점이 공통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웅장한 성당이 많은 것을 보면 전쟁으로 인한 흉한 민심을 신앙과 종교에 의해 치유하려는 통치 이념이 방영된 것이 아닌가 한다. 보는 이는 것은 낭만적으로 보였다. 성당, 웅대한 건물, 그 외벽 기둥과 처마 지붕에 거대한 동물 석상, 신화 속의 인물, 예수님 제자들 석상, 등에서 헤브라이즘의 산유물을 보는 듯 했다. 또한 글과 문자가 없었던 시대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림을 이용하여 복음을 전파하려는 의도는 훌륭했다. 그들은 성당에 성화를 그려 국민과 백성을 평화와 사랑, 영생에 대한 믿음을 주기 위하여 고도에 한 정치적, 정책적 배려가 있지 않았나 생각도 해 본다. 그들은 공격과 약탈, 영토 확장을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하지 않았나 상상도 해 본다.
자연의 악조건을 극복하고 삶의 터전을 일군 실상이 보는 이에게 낭만적으로 보일지라도 실제 그 이면에 고통과 인내, 비애, 아픔이 숨겨져 있을 줄 믿는다. 지붕이나 벽에 창을 서너개 냈으며 바람을 이용해 전력을 공급하는 풍차를 만들었고 철 자원을 활용하여 전철을 만들었으며 그림을 그리기 위해 색상을 내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풀, 나무 껍질에 달걀의 노란 자위를 발라 불변의 색상을 내서 벽화를 그렸다고 한다.
지금 유럽은 유럽 공동체(EC)니 유럽연합(EU), 유로화폐(EURO)로 하나의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있다. 이런 제도가 도입되면 더욱 수준 높고 질 높은 유럽으로 발전하리라.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동유럽, 북유럽을 보고싶다. 여행은 생활에 활력소요 재충전의 좋은 학습이다. 이번에 더 넓은 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재단 관계자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