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氏族의 연원 |
평택임씨(平澤林氏)는 고려말에 세자 전객령(世子 典客令)을 지낸 임세춘(林世春)을 중시조로 하여 임정(林整)과 임경업(林慶業)으로 이어 오는 계통과 임수겸(林守謙)으로 이어지는 계통인 전객령파(典客令派)가 있는데 특히 임경업(林慶業)의 8형제가 모두 8개파로 나뉘어져 있다고 한다.
또 다른 계통은 임팔급(林八及)의 7세손으로 고려말에 삼중대광 평성부원군(三重大匡 平城府院君)이 되었던 임언수(林彦脩)를 1세로 하여 그 아들 임성미(林成味)와 임견미 ㆍ 임제미 ㆍ 임세미(林堅味 ㆍ 林齊味 ㆍ 林世味)로 이어지는 충정공파(忠貞公派)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 두 계통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전객령계(典客令系) 시조는 임세춘(林世春). 고려말에 세자전객령겸 연희궁부사(世子典客令겸 延禧宮副使)를 지냈다. 그의 선계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10여대의 선대 휘(諱)만 적어 오던 것을 1998년 전국 임씨 중앙회를 설립, 1차 사업으로 족보 연구 분과 위원회 (위원장 임행진)를 발족 임씨 상계를 적립하기 위하여 사료와 여루 구보 등의 참고 문허을 분석 상계를 정립하고, 임씨 상계 보감을 발간하였다. 충정공계(忠貞公系) 1 세조는 임언수(林彦脩), 호(號)는 계헌(桂軒). 고려말에 문과에 올라 벽상삼한삼중대광 태위 찬성사 문하대중평장사(壁上三韓三重大匡 太尉 贊成事 門下待中平章事)에 이르렀으며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해졌다고 충정(忠貞)으로 시호(諡號)되었다.
본관지 연혁 |
평택(平澤)은 본래 백제의 하팔현(河八縣)으로 아술현(牙述縣)의 영토였는데 고려 때 평택현(平澤縣)으로 고쳐 천안부(天安府)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조선조 연산군 11년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속되었으나 중종 때 다시 환원되었다. 그 뒤 여러번 변화하다가 1895년 군(郡)이 되었고 1914년 경기도 진위군(振威郡)에 병합, 1924년 진위군(振威郡) 을 평택시(平澤市)으로 개칭, 오늘에 이르렀다. 주요 성씨로는 임 ㆍ 박(林 ㆍ 朴)씨 등이 있었다. |
파명록 |
부사공파(府使公派) ㆍ 사직공파(司直公派) ㆍ 삼청당공파(三淸堂公派) ㆍ 승지공파(承旨公派) ㆍ 영광공파(靈光公派) ㆍ 진사공파(進士公派) ㆍ 금호공파(錦湖公派) ㆍ 참의공파(參議公派) ㆍ 평성군파(平城君派) ㆍ 송현공파(松峴公派) ㆍ 만죽공파(晩竹公派) ㆍ 송담공파(松潭公派) ㆍ 송산공파(松山公派) ㆍ 송주공파(松州公派) ㆍ 송당공파(松唐公派) ㆍ 영해공파(靈海公派) ㆍ 관해공파(觀海公派) ㆍ 대호군파(大護軍派) ㆍ 현감공파(縣監公派) ㆍ 거은공파(居隱公派) ㆍ 지평공파(持平公派) ㆍ 부원군파(府院君派) ㆍ 판윤공파(判尹公派) |
주요 세거지 |
주요 세거지 | ||||||||||||||||||||||||||||||||||||||||||||||
전객령계(典客令系) ‘갑자보(甲子譜)’에 의하면, 임세춘(林世春)의 자손들 가운데 공혜공 임정(恭惠公 林整)의 자손들은, 임정(林整)의 대 이래로 룡인 ㆍ 안성 ㆍ 성주(龍仁 ㆍ 安城 ㆍ 城州)의 교하(交河) 등지를 세장지지(世葬之地)로 삼고 있으므로 초기에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 일원에서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7세 임언(林堰)의 후계(後系) 일부가 12세 임석현(林碩賢)의 대부터 3대에 걸쳐 공주 ㆍ 강릉 ㆍ 홍천(公州 ㆍ 江陵 ㆍ 洪川) 등지로 옮겨가 살았고, 임우석(林禹錫)의 후계(後系)는 성주(城州) 의 교하(交河)와 12세 임훤 ㆍ 임혜(林萱 ㆍ 林蕙) 이래로 금포 ㆍ 창원(金浦 ㆍ 昌原)에, 임량(林良)의 후계(後系)는 함남 고원(高原)에 터를 잡아 세거했다고 믿어진다. 또한 7세 임규(林珪)의 후계(後系)는 원주 ㆍ 충주(原州 ㆍ 忠州)를 거쳐 대체로 16세 임하기 ㆍ 임신원(林夏起 ㆍ 林信遠)의 대를 전후하여 함흥 ㆍ 구례 ㆍ 음성 ㆍ 영주 ㆍ 상주 ㆍ 동래 ㆍ 단양 ㆍ 금해 ㆍ 평양 ㆍ 론산 ㆍ 진천(咸興 ㆍ 求禮 ㆍ 陰城 ㆍ 靈州 ㆍ 尙州 ㆍ 東萊 ㆍ 丹陽 ㆍ 金海 ㆍ 平壤 ㆍ 論山 ㆍ 鎭川) 등지와 영천 ㆍ 밀양 ㆍ 울산 ㆍ 장기(永川 ㆍ 密陽 ㆍ 蔚山 ㆍ 長鬐) 등지에 산거하게 되었다. 그리고 7세 임찬(林瓚)의 후계(後系)는 충남 홍성(洪城)에 많이 살았으며 임㺾(林㺾)의 후계(後系)는 10세 임덕인(林德仁) 이래로 수원(水原)에, 5세 임갑산(林甲山)의 후계(後系)는 익산(益山)에 세거하였던 것 같다. 임정(林整)의 동생 임현(林現)의 자손들인 병사공파(兵使公派)는 沃川(沃川)을 거쳐 14세 임대무(林大武) 이래로 지금의 금산(錦山)에서 살았고, 4세 임보(林寶)의 자손들은 려주 ㆍ 룡인(驪州 ㆍ 龍仁)을 거쳐 16세 임성위(林聖尉)의 대 이후에 牙山에 살았다. 한편 임언수(林彦脩)의 자손들은 4세 직장공 임첨(直長公 林襜)의 대부터 4대에 걸쳐 라주 ㆍ 익산 ㆍ 전주 ㆍ 승주 ㆍ 광산 ㆍ 해남 ㆍ 장흥 ㆍ 진주 ㆍ 안동 ㆍ 홍원 ㆍ 태천 ㆍ 철산(羅州 ㆍ 益山 ㆍ 全州 ㆍ 昇州 ㆍ 光山 ㆍ 海南 ㆍ 長興 ㆍ 晋州 ㆍ 安東 ㆍ 洪原 ㆍ 泰川 ㆍ 鐵山) 등지와 부여(扶餘)의 임천 ㆍ 청양(林川 ㆍ 靑陽) 등지에 나뉘어 정착하였고, 아버지 임형수(林亨秀)의 유언(遺言)에 따라 9세 임구(林枸)가 제주도(濟州島)에 자리잡은 뒤에 그곳에도 자손들이 살게 되었다. 다시 10세의 대에 이르러 임자빈(林自彬)이 아산(牙山)의 신창(新昌)에서 지금의 전남 고흥(高興)으로 옮겨간 것을 비롯하여 고창 ㆍ 홍성 ㆍ 담양 ㆍ 연기(高敞 ㆍ 洪城 ㆍ 潭陽 ㆍ 燕岐) 등지로 일부 자손들이 옮겨가 이들 지역을 세거의 터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l930년경, 평택임씨(平澤林氏)의 자손들은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高城郡 巨津邑), 충북 중원군 ㆍ 옥천군(中原郡 ㆍ 沃川郡) 일원, 충남 부여군(扶餘郡) 일원, 전북 순창군 ㆍ 부안군 ㆍ 익산군 ㆍ 임실군 ㆍ 남원군(淳昌郡 ㆍ 扶安郡 ㆍ 益山郡 ㆍ 任實郡 ㆍ 南原郡) 일원, 전남 곡성군 고달면(谷城郡 古達面), 무안군 일로면(務安郡 一老面), 나주군 ㆍ 장성군(羅州郡 ㆍ 長城郡) 일원, 화순군 동면(和順郡 東面), 경북 상주군(尙州郡) 일원, 문경군 산양면(聞慶郡 山陽面), 예천군 유천면(醴泉郡 柳川面), 영주군 이산면(榮州郡 伊山面), 금릉군 남면(金陵郡 南面), 달성군 화원면(達城郡 花園面), 안동군(安東郡) 일원, 경남 거창군 북상면(居昌郡 北上面), 평남 중화군(中和郡) 일원, 평북 철산군(鐵山郡) 일원, 박천군 ㆍ 정주군(博川郡 ㆍ 定州郡) 일원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오늘날의 대표적 집성촌으로는 전남 광주시(光州市)와 광산군 임곡면 등림리(光山郡 林谷面 登臨里)를 꼽는다. 임언수(林彦脩)의 9대손 임득지(林得智)가 처음 터를 잡은 이래로 4백여년 동안 지켜 내려온 평택임씨(平澤林氏)의 터밭이다. 임득지(林得智)가 이 마을로 오게 된 내력은, 임언수(林彦脩)의 증손인 임첨(林襜)이 조선조 초에 경기도 송현(松峴)에서 라주(羅州)로 옮겨가 살았던 사실이 전해지는데, 지난 1949년까지만 해도 행정구역상 라주군(羅州郡)에 속해 있었던 등림리(登臨里)마을에 임첨(林襜)의 후예인 임득지(林得智)가 이곳에 자리잡았던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현재 2백여 가구 1천여명의 평택임씨(平澤林氏) 자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충정공계(忠貞公系) 임언수(林彦脩)의 맏아들 임성미(林成味)의 자손들은 용인 ㆍ 파주(龍仁 ㆍ 坡州) 등 경기지역에서 살다가 일부가 4세 임첨(林襜)의 대에 전남 나주(羅州)땅으로 옮겨갔으므로 일찍이 이들 지역에 나뉘어 터를 잡았다고 믿어진다. 임첨(林襜)의 자손들 중에서 6세 임백근(林百根)의 후계(後系)가 대체로 14세 임우종 ㆍ 임수간(林宇琮 ㆍ 林秀幹)의 대를 전후하여 전북 고창(高敞)의 흥덕 ㆍ 화순(興德 ㆍ 和順) 등지로 옮겨가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임백근(林百根)의 동생 임만근(林萬根)의 후계(後系)는 9세 임식 ㆍ 임회(林植 ㆍ 林檜)의 대부터 승주의 악안 ㆍ 순천 ㆍ 홍성(昇州의 樂安 ㆍ 順天 ㆍ 洪城)의 결성 ㆍ 공주 ㆍ 제천 ㆍ 광주 ㆍ 양산(結城 ㆍ 公州 ㆍ 堤川 ㆍ 光州 ㆍ 梁山) 등지에 자리잡았으며, 다시 16세 임정원 ㆍ 임덕원(林正遠 ㆍ 林德遠)의 대에 이르러 포천 ㆍ 부여 ㆍ 서산 ㆍ 옥천 ㆍ 부안 ㆍ 장흥(抱川 ㆍ 扶餘 ㆍ 瑞山 ㆍ 沃川 ㆍ 扶安 ㆍ 長興) 등지에도 일부가 살게 되었다. 5세 임계창(林繼昌)의 자손들은 경기지역과 12세 임재교(林載喬) 이래로 나주(羅州)에, 9세 임수원(林壽遠) 이래로 성주(星州)에, 10세 임순우(林舜宇) 이래로 연기(燕岐)에 산거했으며 일부는 10세 임휴(林休)의 대를 전후하여 남원(南原)에 세거의 터를 굳혔던 것 같다. 한편 2세 임견미(林堅味)의 자손들은 충남 청양 ㆍ 서산(扶餘 ㆍ 靑陽 ㆍ 瑞山), 전남 구례 ㆍ 해남 ㆍ 장흥의 안량 ㆍ 경기 퇴촌, 그리고 전북 익산 ㆍ 부안 ㆍ 옥구(益山 ㆍ 扶安 ㆍ 沃溝) 등지에 널리 산거하고 있다. 그러나 대도시이주(大都市移住) 현상으로 많은 후손들이 서울에 살고 있는 것도 다른 성씨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3세 임제미(林齊味)의 자손들 중에서 5세 임재(林榟)의 후계(後系)가 12세 임종(林悰)의 대 이래로 용인 ㆍ 안성 ㆍ 려주 ㆍ 파주(龍仁 ㆍ 安城 ㆍ 驪州 ㆍ 坡州)의 교하(交河) 등지를 세천지(世阡地)로 삼았던 사실이 ‘갑술보(甲戌譜)’에 보이므로 이들 지역에 세거했다고 믿어지며 일부는 12세 임기령(林杞齡)의 대 이래로 안음 ㆍ 경주 ㆍ 월성 ㆍ 금릉 ㆍ 충주(安陰 ㆍ 慶州 ㆍ 月城 ㆍ 金陵 ㆍ 忠州) 등지로 옮겨가 정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 당시 평택임씨(平澤林氏)의 자손들은 부안군 행안면(扶安郡 幸安面), 익산군 웅포면 ㆍ 룡안면(益山郡 熊浦面 ㆍ 龍安面), 전남 화순군 화순면 ㆍ 동면(和順郡 和順面 ㆍ 東面), 광산군 임곡면(光山郡 林谷面), 경북 상주군 임곡면 ㆍ 청리면(尙州郡 林谷面 ㆍ 靑里面), 문경군 호서남면(聞慶郡 戶西南面), 금릉군 남면(金陵郡 南面), 안동군 안동읍(安東郡 安東邑), 평북 철산군 여한면(鐵山郡 餘閑面)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1980년대에 많은 자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 대표적 집성촌은 전남 광주시 광산구 등림리 마을이다. 이곳에 처음으로 뿌리를 내린 인물은 임언수(林彦脩)의 9대손 임득지(林得智)라고 전해지며 이후 4백여년 동안 지켜온 이곳은 평택임씨(平澤林氏) 세거의 터이다. 임득지(林得智)가 이 마을에 오게 된 것은, 임득지(林得智)의 6대조 임첨(林襜)이 조선조 초기에 나주(羅州)로 옮겨가 살았고, 등림리(登臨里)가 1949년까지만 해도 행정구역상 나주군(羅州郡)에 속했던 마을인 것으로 미루어 보면, 나주시 일대에 산거했던 임첨(林襜)의 자손들 일부가 이곳에 자리잡게 되었던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마을에는 금호공 임형수 ㆍ 송파공 임식 ㆍ 관해공 임회(錦湖公 林亨秀 ㆍ 松坡公 林植 ㆍ 觀海公 林檜) 등의 위패를 모신 등림동(登臨洞)가 있다. 그런데 임세춘(林世春)의 후손들은 뒤에 여러 派로 갈리게 되었는데 크게는 11세손 충민공 임경업(忠愍公 林慶業)으로 이어지는 계통과 현손인 갈곡공 임수겸(葛谷公 林守謙)으로 이어지는 계통이 그것이다
그러나 임형수(林亨秀)는 방문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방안에서 「내가 너희놈들 손에 묶여서 한 번 죽어 볼란다. 사약 대신 오랏줄을 들여보내라」고 호통쳤다. 그의 기개에 놀란 병졸들이 엉겁결에 오랏줄을 방으로 집어넣었다. 잠시 후 그는 창살 틈사이로 오랏줄 끝부분을 밖으로 내보냈다 . 그리고 「내 스스로 몸을 묶었으니 오랏줄을 잡아당기라」고 외쳤다. 우르르 몰려들어 힘껏 줄을 잡아당기던 병졸들이 한꺼번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오랏줄 끝에 묶여 나온 것은 임형수(林亨秀)가 아니라 그가 베고 자던 목침이었기 때문이다. 이 광경을 보고 그는 「내가 마지막 가는 길에 너희들 하고 장난 한 번 해 볼라고 그런 거여」라며 가가대소(呵呵大笑)했다 . 그리고 태연히 사약을 받았다. 인조조에 광주구사(廣州救使)를 지내다 이괄(李适)의 난 때 반란군에 살해된 임회(林檜)(호 : 관해(號 : 觀海))는 서릿발 같은 기개로 가문의 명예를 지킨 문신이다. 그는 반란군에 붙들려 손과 발이 찢기는 사형을 당하면서도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두 눈을 부릅뜨고 반군에게 불호령을 치며 완강히 저항, 후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그는 유명한 송강 정철(松江 鄭澈)의 사위로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임훈(林薰)과 임운(林芸) 형제는 선조조의 유명한 효자다. 임훈(林薰)은 명종 21년 효행으로 천거되어 언양(彦陽)현감에 발탁되고 광주목사(光州牧使) 등을 지낸 뒤 선조 15년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었으나 부모를 모시기 위해 이를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의 동생 林운은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 경사(經史)를 비롯해 성력(星歷) · 지리(地理) · 률여(律呂) · 산수에 이르기까지 통달했던 학자다. 평택임씨(平澤林氏)는 푸르고 울창한 수풀[林]처럼 일반적으로 온건하고 조용한 성품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일단 불의와 마주칠 때는 불퇴의 인내와 끈기로 맞서서 싸우는 강인한 기질을 타고난 문무겸비의 집안이라고 한다. 가문의 기질을 말해 주는 대표적인 인물이 병자호란(丙子胡亂)의 명장 임경업(林慶業) 장군이다. 그는 조선조 5백년사에 특이한 자취를 남기고 격동의 한 시대를 불꽃처럼 살다 갔다. 그는 흔히 청나라에 끝까지 맞서 싸우려던 친명(親明)주의의 용장 · 지장(勇將 · 智將)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한사람의 뛰어난 무장(武將)만은 아니라는 전혀 새로운 평가가 있다. 그를 평가함에서 가장 깊고 높아 보이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임경업(林慶業) 일장을 옮겨 소개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임진란(壬辰亂)을 말함에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을 뺄 수 없는 것같이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말함에는 충민공 임경업(忠愍公 林慶業) 장군을 잊을 수 없다. 이들은 다 그 시대의 의미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압박의 맨밑에서 자라난 그는 나면서부터 반발성을 가졌다. 9세에 항적전(項籍傳)을 읽어 ‘〈글은 이름 석자를 기록하면 족한 것이나 만인을 대적할 방법을 가르쳐 주시오 (서족이기성명, 원학만인적(書足以記姓名, 願學萬人敵))’라는데 이르러 재삼 탄식하며 ‘이것이 참 대장부의 말이다’하였다 한다. 항상 <대장부〉3차를 입에서 그치지 않았다 하는 것이라든지, 늘 탄식하여 ‘내 천지 정기를 받아가지고 나매 물건이 아니 되고 사람이 되었으며 여자가 아니 되고 남자가 되었는데 이 조그마한 나라에 나서 얽매이어 일생을 보내게 되니 가석(可惜)한 일이 아닌가’ 하였다는 것은 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몸은 비록 작았으나 담(膽)은 컸고 용기 있고 지모(智謨) 깊고 말 잘하고 무엇보다도 충의(忠義)의 정신이 높았다. 27세에 무관의 길에 나서 점차 그 재기(才器)와 충의가 사람들에게 알려져 만주(滿洲)의 일이 급해지던 때는 '서북방면의 일을 임모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여 의주부윤(義州府尹)의 직책을 띠게 됐다. 남들이 다 안연(晏然)히 있어 다가오는 환난(患難)에 대하여 생각도 하지 않는데 장군이 홀로 이를 미리 보고 백마산(白馬山)에 성(城)을 쌓으며 군량을 저축하여 청태종(淸太宗)으로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의 계교(計巧)를 쓰지 못하여 亂이 나기 몇 달 전에 2만병마를 주어 방비하게 하라 할 때에, 처음엔 주기로 허락되어 그도 '이제 2만병을 얻었으니 적이 온들 무엇이 두려우리오' 하였으나 다시 한 백면간관(白面諫官)의 '이때에 많은 군사를 변방의 무장에 줄 수 없다'는 기괴망측한 말을 듣고 앞의 지시를 취소하여 장군으로 하여금 발을 구르고 탄식하여 '군사 없는 장수가 어쩌리요'하게 하였다. 적군이 이미 침입한 다음에도 그는 ' 5천병만 주면 심양(瀋陽)을 바로 들이쳐 칼에 피묻히지 않고도 대사를 가히 건질 수 있다'하되 그 말을 들어줄 용기를 가진 자가 없었다. 란(亂) 후에는 그 한(恨)을 씻으려 명과 연락해 보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때마침 청(淸)이 정명군(正明軍)을 일으켜 우리더러도 출병 원조하라고 강요하자, 장군이 출정하여 진중(陣中)에서 명군(明軍)과 몰래 내통하여 거사하려다 발각되어 돌아오고 말았다. 그 죄로 청정(淸廷)이 장군을 압송하라 하는 고로 스스로 몸을 묶고 만주(滿州)로 향하다 중도에 탈출하여 조각배로 황해를 건너 산동(山東)에 상륙하여 명정(明廷)을 움직여 획책하려 했으나 그때 明이 이미 형세가 다 되었고, 더구나 불행히 그 의탁했던 명나라 장수가 못난 인물이라 장군을 잡아 청군에 항복하였으므로 포로의 몸이 되어 심양(瀋陽)으로 갔다. 오래 거기서 욕을 당하였으나 그 충성과 높은 의기가 도리어 적주(敵主)를 감복시켜 본국으로 호송함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본국이 그를 위하여 준비한 것은 무엇이었던고. 의주(義州)에 건너선 즉 남녀노소가 '우리 사또님 오신다' '우리 장군 오신다'하며 에워싸고 눈물을 뿌리지 않은 이 없고 고을을 지나는 동안 마중이 그치지 않 고 칭송의 탄식이 길을 메웠으나 서울에 이른 즉 모함과 악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자점(金自點)이 본래 장군을 시기하여 일마다 해치려 하매 그 전에도 몇 번 그의 손에 걸렸더니, 이때에 침기원(沈器遠)의 역모 꾸밈에 장군이 공모하였다 하고 국문(鞠問)하기를 혹독히 하여 드디어 매를 못 이겨 숨지니 그때 나이가 53세이다. 죽음에 이르러 부르짖어 가로되 '天下일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데 나를 죽여 되느냐 ! ' 인조는 장군이 죄 없이 해(害)받음을 아까워하여 구할 뜻이 있었으나 약한 임금이라 대신에게 의견을 물으매 찬성하는 자 없고 주저하는 동안에 승지(承旨)가 장군의 절명을 고했다. 부음이 전하매 사람들은 「나라를 어찌할꼬 장군을 죽여 놓고! 」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 적지 않았다 . 그를 죽여 놓고 나라일이 안 될 것이건만 그는 죽었다 . 그 재용(才勇)을 가지고, 그 의기(義氣)를 가지고 이 시대에 사는 것이 의연한 것이라 못하겠거든, 넘어지기를 어찌 그리 맥없이 할까. 구하려는 자의 손이 방금 그의 머리 위에 내리려 할 때에 그는 홀연히 질러갔으니 이는 무슨 기이한 운명인가. 그는 역사의 고아였던가, 시대의 길을 잘못 들었던 가련한 인물인가, 신이 그 사람을 내어 일단 천하사를 정할만한 자리에 둔 것은 무엇이며, 두었거든 또 참혹하게 앗아감은 무엇인가. 섭리는 이 시대에 이 한 사람을 왜 허락하지 않았던가. 모든 의문을 푸는 것은 오직 한마디가 있을 뿐이다. 이 민족의 고난을 밑바닥까지 맛보게 함이다. 우리가 생각해도 심양 직공(瀋陽 直攻)은 할 만한 것이었다. 청태종(淸太宗)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손에 兵을 주고 시세로 許하여 팔뚝을 맘껏 휘두르게 하였다면, 혹은 그 〈피문부혜아문실(彼文夫兮我文失)>의 칼을 흑룡강(黑龍江)물에 씻었을 것이다. (그 검명(劍銘)에 새기기를 '석자되는 룡천검(龍泉劍)에 만권의 책이로다, 하늘이 날 냈으니 그 뜻이 무엇이더냐. 山東에 재상나고 山西에 장수난다는 너희가 사내라면 나도 사내다(삼척 룡천만권서 전천생아의하여 산동재상산서장 피장부혜아장부(三尺 龍泉萬卷書 全天生我意何如 山東宰相山西將 彼丈夫兮我丈夫)) '고 했다 ) 그러나 그것이 실현 못 되었다. 저의 일생은 찢어진 바위틈으로 찍어들어 암굴 속에 비추는 한 줄기 광선과 같이 주위의 암흑을 더욱 짙게 하는 듯한 존재다. 그의 생애를 알아서 우리는 이 시대의 비통미를 가일층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분과 원한의 존재만일까. 우리 안에 울부짖는 사지 만일까.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일면에 있어 이렇듯 억눌린 시대를 대표하는 비문의 사람이요 원한의 사람이면서도 다른 한편에 있어서는 얼음장을 들치고 나오는 생명의 새싹과 같이 희망과 신앙으로 새 시대를 예고하는 사람이었다. 호란(胡亂)이 지나간 2년 뒤 그가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있어 나라 일을 걱정하는 간절한 정성에서 올린 '진만상사의급군무소(陳灣上使宜及軍務疏)'의 마지막 조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 있다. '여섯째는 가로되, 경천재(敬天災)니 옛사람의 말이 있어 이르되, 임금의 한 순간 아름다운 생각이 빛난 구름 단 이슬 같고 한 순간 모진 생각이 모진 바람 사나운 우뢰와 같다 하였으니, 미쁘다, 이 말이여, 하늘이 미워하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입니다. 대개 재앙이 있으매 공경한즉 재앙이 되지 않는 것이요, 공경하지 않으면 위태로움이 이를 것이니 요즘 천재지변물괴(天災地變物怪)가 자주자주 일어나는 것은 실은 전하의 큰 복이오라. 바라건대 전하는 재앙을 만나고 더욱 덕을 닦으시면 재앙이 변해 상서로, 화를 옮겨 복으로 만들 것이오이다. …' 그 성남이 어디 있으며, 그 분합이 어디 있으며, 그 한탄이 어디 있는가. 이를 들어서 우리는 엄한(嚴寒)을 물리치고 봄바람에 얼굴을 스치는 듯한 느낌이 있다. 이 장군이 이 말을 했으리라고 누가 생각할까. ---“ 하늘이 미워하는 것이 곧 사랑하는 것'이라는 믿음의 이 한마디는 얼마나 무거운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 말인가. 만일 이 한마디가 끝내 나오지 못하고 말았다면 우리는 얼마나 적막한 느낌을 가 질 것인가. 사실 이때까지의 모든 환난은 이 한말의 벌함 을 위함이 아니었던가. 이제 눌린 자의 입에서 이 첨화의 말은 나왔고 역사의 위에 뚜렷이 끝이 있게 되었다. 이것이 어찌 임경업(林慶業)의 말이리오, 폐허에서 돋는 조선의 새싹이다. 그러나 알지 못하리라, 이 겨자씨가 자라나 공중의 새를 깃들이게까지 되고 이 누룩이 서말 밀가루를 다 발효 시킬 것인가, 못 할 것인가,...” 임장군은 갔다. 그러나 민중은 '임경업전(林慶業傳)'의 소설을 엮어 사랑방에서 사랑방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하며 이 겨레의 영웅을 통해 큰 나라 옛 조선에의 비원을 새겨 왔다. 그 태어난 충주(忠州)에는 충열사(忠烈祠)가 세워져 고을 유림들이 지금도 향사를 받들고 있으며 전국 방방곡곡에는 그와 관련된 전설들이 어제 일인 양 전해온다. 〈불의에 굴할 줄 모르는 가문의 기질〉은 국운이 기울어 가는 구한말과 일제하에서 숱한 우국지사를 배출했다. 구한말의 의병장 임병찬(林秉瓚)과 임창모(林昌模), 3 · 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임례환(林禮煥)과 48인의 한사람인 임규(林圭) , 철혈(鐵血)광복단의 임국정(林國禎)과 광복단의 임세규(林世圭), 파리장서(巴里長書)사건의 중심인물 임한주(林翰周) 등이 조국독립의 제단에 피를 뿌렸다. 고종조에 순천진 동첨절제사 · 악안군수(順天鎭 同僉節制使 · 樂安郡守) 등을 지냈던 임병찬(林炳瓚)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스승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2백여 명 의병을 모집, 순창(淳昌)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 체포되었다. 그는 1909년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돌아왔다. 1910년 왕의 특명으로 독립의군부 전라남도순무대장(獨立義軍府 全羅南道順撫大將)이 되어 항일구국투쟁을 전개했다. 1914년 日本경찰에 체포되어 거문도(巨文島)에 유배되자 음식을 끊고 자결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임창모(林昌模)는 을사조약 체결 다음해인 1906년 양회일(梁會一)과 함께 지리산(智異山)에서 의병을 일으켜 光州로 진격했으나 일군(日軍)의 기습을 받고 체포되어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1908년 석방되자 다시 2백여 명의 의병을 모아 청포 · 원산(淸浦 · 元山) 등지에서 일군(日軍)과 교전하다 전사했다. 임례환(林禮煥)은 24세 때 동학(東學)에 입문, 1894년 동학혁명 때 평안도(平安道)지방에서 동학군을 이끌었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2년형을 선고받고 출옥 후에도 항일활동을 계속하다 병사했다. 임규(林圭)는 3·1운동 때 48인의 한사람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귀족원 · 중의원을 비롯한 각 요로에 독립선언서 · 독립청원서를 발송했던 장본인이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본국에 압송되었으나 무죄로 풀려났다. 임국정(林國禎)은 1919년 간도(間島)에서 한상호 · 윤준희(韓相浩 · 尹俊熙) 등과 철혈(鐵血)광복단을 조직했다. 이듬해 독립운동 탄압자금으로 간도(間島)일본영사관에 송금하는 현금 15만원을 탈취, 블라디보스톡에서 무기를 구입하던 중 동지 엄인섭(嚴仁燮)의 밀고로 체포되어 서울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했다. 임세규(林世圭)는 1915년 박상진 · 채기중 · 김한종(朴尙鎭 · 蔡基中 · 金漢鍾) 등과 국권 회복을 위해 광부단(光復團)을 조직, 1917년 강순필(姜順弼)과 함께 군자금 모집에 협조를 거부한 칠곡(漆谷)의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사살한 장본인. 1917년 l2월 이종국(李鍾國)의 배신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역시 순국했다. 근대 문화예술계에서도 임씨는 두각을 나타낸다. 임성구(林聖九)는 이인직(李人稙)의 뒤를 이어 1911년 극단 혁신단(革新團)을 조직, 김도산 · 김소랑 · 박창한(金陶山 · 金小浪 · 朴昌漢) 등의 배우를 이끌고 서울에 이어 최초의 지방공연을 가졌다. 남자를 여자역에 대신 시켰으며 '법지법'(法之法), '륙륙포강온'(六六砲强溫), '의형살해'(義兄殺害) 등을 공연, 신파극의 테두리 안에서 1921년 혁신단이 해산될 때까지 연극 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임천(林泉)은 1927년 동경(東京)미술학교 동양화과에서 2년간 수학 했다. 해방 후 국립박물관에서 문화재의 복원 · 보수공사를 맡아 이 분야의 권위자로서 살아 있는 문화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동안 불국사대웅전 · 경복궁 · 수원팔달문 · 보신문 · 남한산성(佛國寺大雄殿 · 景福宮 · 水原八達門 · 普信聞 · 南漢山城) 등 국보급 건축물의 보수 · 중수 공사를 직접 맡아 했다. 특히 단청(丹靑)에 조예가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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