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헌종 때 향등에 쌍효자가 났었다는 광주 삼강록의 기록이다. 이 두 효자는 향등에 살았던 光山金氏 周鼎(광산김씨 주정), 문숙공파 후손 在文(재문)의 네 아들 가운데 큰 아들 廷福(정복, 보명 廷鉉)과 막내 廷烈(정열, 보명 學鉉)이다.
잠시 광주를 본으로 하는 13성 가운데 광산김씨를 소개하자면 光金(광김)은 토반이 아닌 국반으로 널리 알려진 성이다. 그러니까 광주만의 성씨가 아니라 나라에서 손꼽히는 성씨다.
光山은 광주의 별호다. 광산이란 瑞石山서석산을 말한다. 빛을 품어내는 산, 그것도 예사로운 빛이 아니라 상서로운 빛을 발하는 산이란 뜻이니 그 산이 바로 무등산이다. 고로 무등산은 바로 서석산, 광산이다.
서석산 아래 우리 조상님들과 우리가 사는 곳이 광주 또는 광산이었으니 그 어찌 의미가 새롭지 않겠는가. 그 어지 우리 조상들을 숭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우리의 광주, 그 이름 또한 그냥 생긴게 아니라 우리 조상님들이 지었던 이름, 산과 지세에 딱 맞아떨어진 이름이지 않는가. 자 보자, 오늘날 어찌보면 그 이름 민주의 중심에 우뚝선 광주이지 않는가. 그러기에 광주인들 또한 무한한 역사속의 빛으로 남도록 하였던 그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광주라는 이름, 우리에게 자긍심과 영원성을 던져주는 이름이니 참으로 대단한 우리 조상님들이 아닐 수 없다.
이름대로 민주의 빛이 되지 않았는가, 그래서 빛고을이라 하였을까. 아 그래서 의와 예와 충과 효향이라 하지 않았을까. 거기에 남구의 효향,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자랑스럽다.
이러한 광산 또는 광주를 본으로 하는 성씨들은 우리 광주를 빛나게 하였던 영원한 표징이니 참으로 광주인의 한사람으로 자긍심이 불끈 솟는다.
광산 또는 광주김씨의 시조는 興光(흥광)이다. 흥광은 원래 신라말 헌강왕 또는 신무왕의 아들이라하지만 정확한 기록을 찾을길 없어 신라 왕자라 통칭하고 있다. 그는 장차 국란을 예견하고는 무진주(광주) 서1동에 은거하기에 이르렀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금은 광주가 아닌 전남 담양 대전면 평장동이다.
광주읍지 고적편에 평장동이니 다시 광주로 환원하여 광주의 유서깊은 곳이 되었으면 어떨까 제의해 본다.
중앙일보에서 발간한 `성씨의 고향ꡓ에서도 광산김씨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가문이다. 광김은 세도가 당당한 가문이라기 보다는 대대로 석학과 거유를 많이 배출한 가문으로 고려조에서 그 후손들이 여덟 평장사(정2품)가 나오자 모두들 이곳을 평장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 때 특출한 인물 중에 7世 良鑑(양감)은 태복경으로 송나라 사은사로 가서 맡은 일을 원만히 수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당나라에 들어가 太廟(태묘, 종묘제도)와 太學(태학)제도를 도입하여 오늘날 국립중앙 교육의 효시가 되었으니 그곳이 바로 국립교육기관인 국자감(조선 때 성균관)이다. 이곳에서 인재를 양성하여 기용하였던 태두로 그이의 시호는 文安(문안)이다.
그러니까 광김의 대파는 14世와 15世에서 문정, 문숙, 랑장, 양간, 사온직장공파로 갈린다. [다음호로 이어집니다]
남구 왜 孝鄕인가 ─ 광주의 빛이 되었던
광산김씨 문숙공파조 주정의 내리 3대 봉작
파조 周鼎(주정, 1228-1290)은 광산김씨 14世로 고려 고종 15년에 조청대부 금오대장군 金鏡亮(김경량)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난 그의 초명은 之淑(지숙)이다. 한편 장남 須(수)는 문정공파 파조 台鉉(태현)의 아버지가 된다.
주정은 문과 장원급제로 출사하여 원나라에서 고려에 원병을 청할 때 행종도감사로 왕을 호종하고 원나라에 들어가 반군을 평정시켜 좌부승지에 기용되고, 그 뒤 몽고군이 고려를 쳐들어오자 명을 받고 출정하여 물리쳤는가 하면 충렬왕 때 우리 역사상 최초로 일본을 치러가다 바다에서 갑자기 돌풍을 만나 많은 병사들의 생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 계책을 세워 큰 참변을 막기도 한 그는 김방경이 공을 세우고도 유배되는 것에 상소하여 풀려나게 하였다. 그는 평소 공명정대한 벗이 아니면 사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불의에 야합하지 않고 항상 책을 가까이 하였다.
벼슬은 상장군, 보문각 태학사, 판삼사사에 올라 문무를 겸전한 광주(광산)인이다. 文肅(문숙)이라 시호가 내려졌던 그를 후 손들이 파조로 섬겨 문숙공파가 형성되었다.
슬하에 충숙공 深(심)과 시중공 流(류)와 2남 2녀를 두어 류는 시중공파조로 갈린다.
여기서 잠시 ‘고려 때 문숙공파가 왜 광주를 빛냈는가’ 에 대하여 이야기 하자면 이렇다.
주정의 장남 深(심)과 심의 장남 石堅(석견)이 化平府院君(화평부원군), 석견의 장남 粹(수)는 海陽君(해양군)으로 봉작을 받았다. 화평이란 광주가 화평부, 해양은 해양현이었다. 그러니 3대가 광주 고호로 봉작을 받았으니 그 어찌 가문만의 빛이겠는가.
봉작이란 단지 개인만이, 가문만의 영예가 아닌 고을의 영예다. 그것은 국가의 충에 대한 척도의 표징이기에 더 그렇다. 그것도 국란 공신이다. 그래 ‘충신 집안에 충신 난다’는 말이 나왔던가. 문숙공도 국란공신, 자손들도 국란에서 공을 세워 광주 고호로 봉작을 받았으니 고려시대에 광주를 빛낸 가문 중에 가문, 광산김씨 문수공파가 아닐 수 없다.
나라에는 공신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공록은 후손들이 무한으로 누린다. 그렇지만 조상의 잘못은 천추에 미친다. 그래서 백성이 공이 있으면 상과 품계의 예우는 항상 따른다. 그래서 살아 최상은 봉작이요, 사후의 우러름은 시호다. 봉작과 시호는 후손들의 영예이기도 하지만 그 손들이 잘못하면 도리어 조상에게 욕으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게 하는 우리 조상님들의 깊은 뜻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에 가장 큰 욕이 조상을 욕 먹히는 것이 제일 큰 불효라 하였다. 그래서 언행과 공분이 뚜렷하지 않으면 결행하지 않는 것이 명문가 자손들의 불문율이었다.
살아서 경대부나 귀인을 公(공)이라 하고, 뚜렷한 공신에게는 君(군), 공이 크고 왕의 친신에게는 府院君(부원군)에 봉하여 그의 초상을 그려 벽에 걸어 문무백관의 우러름을 받게 하였던 벽상공신이다. 벽상공신이 화평부원군 부자가 나왔다.
그 어찌 광주만이 빛이겠는가.
고려 吏典(이전, 관리의 법)에 부원군을 책록 받을 자는 ‘서자나 장리의 손은 안 된다’고 명문 되었다.
서자는 첩의 아들이요, 장리는 나라 돈을 훔쳐 먹는 관리다, 장리의 손에겐 봉작도 못주게 하였던 것은 무엇을 의미함인가. 참으로 오늘날과는 너무나도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단면이다. 그래도 우리 조상님들을 폄하시킬 사람들이 있는가.
이 공신에도 국란과 정란으로 구분된다. 국란은 나라의 사직이 위태로운 변란이 닥쳤을 때, 정란은 왕을 추대하기 위한 일이나 정권 보호차원의 거사. 그러니 광주5. 18민주화 운동 때 정권을 찬탈하기 위해 살상을 감행했던 핵심들에게 주어졌던 직과 훈장과도 같은 일과 더러는 폐정과 폭군 등을 몰아내기 위한 거사이지만 그 의미는 전적으로 다르다.
남구 왜 孝鄕인가 ─ 광산김씨 문숙공파
향등 쌍효자의 뜻을 기리려 합심한 후손들
[전호에서 이어집니다]
국란공신은 민족의 충신이다. 왜냐하면 정란공신은 정권이 바뀌면 역신이 되기도 하여 의미자체가 다르다. 더군다나 광주는 국가의 위기 앞에 항상 선봉을 섰다. 조선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웠다. 이에 이순신장군은 `약무호남 시무국가(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가 없어졌을 것)ꡑ라 했다. 그래서 광주는 지금도 義의 영원한 활화산이다.
조선조에서도 광산김씨를 왜 명문이라 하였는가. 간략하자면, 상신(上臣) 5, 대제학 7, 문과급제 200여 人에 달했다. 권력으로 위세를 부리지 않고 대제학을 제일 많이 등용시킬만큼 학문이 깊어 동방 18현에 김장생과 김집 부자가 올라 우리나라 성씨에서 유일할 뿐만 아니라 예와 의를 숭상하는 씨족이다.
그리고 조선시대 임진란 때 광주에 살았던 김덕령은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출정하여 왜군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그러나 당파싸움이 극에 달하여 모함으로 공을 세우고도 억울하게 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여 죽음에 이르렀다. 그는 ‘춘산에 불이 나니 다 붙는다/ 저 산 저 뫼에 이는 불은 끓 물이나 있거니와/ 내 없는 마음에 불이 나니 끓 물 없어 하노라. 읊으면서 죽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우국충정이 당파싸움의 제물이 되어 그의 억울함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살았다.
훗날 그의 억울함이 만천하에 들어나 사우를 충장사라 명하고 그가 태어난 곳을 충효동이라 사명하였다. 무등산의 충장사가 바로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장군의 충과 의를 기리는 사우요. 충효동은 그가 태어난 곳이다. 김덕령은 광산김씨 랑장공파 손이다.
본론으로 들어가 향등이라는 동네는 원래 건지산 기슭에 있었다. 그 곳을 광주광역시 쓰레기 매립장으로 조성하기 위하여 효천역 앞으로 옮겨졌다. 옛 동구에 있었던 쌍효비각도 헐리고 비석은 쌍효자 형 김정복의 묘역에 세워 놓아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한다. 사실상 송덕이나 기적, 열효에 대한 비는 모두의 귀감으로 삼기 위하여 반드시 사람이 많이 왕래하는 곳에 세웠다. 그래서 묘에 세운 것은 격에 맞지 않다. 격에 벗어나면 되려 욕이 된다.
향등에 처음 터를 잡았던 이는 영조 12년에 태어난 광산김씨 33世 昌河(창하)로 광산김씨 문수공파 내 시중공파 손으로 쌍효자 정복과 정열은 그의 증손자들이다.
정복과 정열은 金在文과 김해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4남 중 첫째와 막내다. 廷福(정복, 보명 廷鉉)은 1817(조선 순조 17)년에 태어나 1849년에 생을 마친 그의 자는 振玉(진옥), 호는 德軒(덕헌)이고, 廷烈(정열, 보명 學鉉)은 1827(조선 순조 27)년에 태어나 1877년에 생을 다한 그의 자는 振學(진학), 호는 誠齋(성재)다.
둘은 어려서부터 유달리 뜻이 잘 맞아 의가 좋았다. 이들은 가풍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뜻에 잘 따랐을 뿐만 아니라 밖에 나가서는 어른들을 공경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 김해김씨가 병으로 위중하자 형이 손가락을 깨물어 입안으로 피를 흘려 넣자 아우도 수혈하여 생명을 연장시켜 효자로 향천되었다.
그 후 容周(용주)와 容休(용휴)는 증조부의 효성을 만고에 기리려 쌍효비를 세우려다 용주는 죽고 容年(용년)이 소를 팔아 비를 다듬고, 용휴와 조카 二中(이중)은 1922년 이민수씨를 찾아가 비문을 받아 容植(용식)이 세운 쌍효비각이었다.
우연하게 필자에게 쌍효자 이야기를 하여준 분은 동본동명, 향등 중화요리 성림각 주인은 비가 오는데도 오토바이에 필자를 태워 안내하여 주어 참으로 고마웠다.